예언자 영성회복 무엇을 해야 하나?
대전환기를 맞은 우리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한 전환기가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며 전환기가 요구하는 역사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앞에서 찾아본 바와 같이 ‘영성 운동’이 우리가 맞은 전환기의 가야할 방향이고,
‘예언자영성회복’이 구체적인 내용이다.
목적과 방향, 내용이 확인되었다면 이제 ‘예언자 영성회복’이라는 중차대한 일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다음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A. 예언자 사관의 정립
구약의 예언자들이 멸망의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을 구원해내고 세계역사에 등장한 최고의 지도자들로 평가받는 이유는 하나님의 체험에 근거한 역사해석과 방향제시 때문이었다.
유사이대 독보적이던 그들의 독특한 행동들은 하나님 체험에서 획득된 독특한 역사의식에서
비롯되었다.
한 나라와 그 문화를 최종적으로 정리하는 정신활동은 자신들의 역사관을 정립하여 그 역사를
해석해내는 일이다.
어떤 역사관을 가지느냐는 그 나라와 문화의 운명을 판가름할 만큼 중요하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이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세상을 다스리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시간 즉 역사를 만드시고 지배하시는 역사적인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인류문화에 ‘역사’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것은 성경이다.
창조는 곧 역사를 말하기 때문이다.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기독교는 어떤 역사관을 가져야 할까?
어려운 문제인 것 같지만 넓게 들여다보면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역사를 해석하면 된다.
‘하나님의 관점’이 역사관이어야 한다.
문제는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의 관점을 가질 수 있는가?”에 있다.
인간이 인간의 학문을 터득하여 역사를 해석하는 것도 대단히 벅찬 일인데, 그래서 역사철학이라는
학문이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공부인데, 무슨 재간으로 인간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을
얻을 수 있는가?
그런 일이 가능한가?
그런 관점을 가졌던 사람들이 있는가?
물론 가능하며 그랬던 사람들이 있었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예언자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보았던 사람들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들의 독특한 하나님 체험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하나님으로부터 신탁을 받아서 직접화법으로 선언하는 상태의 경험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자신들의 생각과 의견을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말한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게 되어지는 어떤 영적인 상태가 있다
아무 때나 일인칭 화법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상태가 되어있을 때에만 그렇게 할 수 있다.
뒤에서 다루게 되겠지만 이런 상태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영적인 체험의 경지이다.
예언자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대단히 활발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언자 사관에 대한 연구는 아직 전무한 실정이다.
예언자의 사상이나 신학, 그들의 용감무쌍한 행동, 그리고 그 업적에 대한 연구에만 치중했다.
이제 예언자들을 영성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을 가진 역사 해석자로
접근해야 한다.
예언자들이 가장 깊은 영적인 상태에서 얻어냈던 역사를 보는 눈을 우리는 터득해야 한다.
이런 관점은 인간의 이성적인 활동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이성의 산물(産物)이 아니라 영성의 산물이다.
세상의 학문과 역사이론을 통해서 터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면전에서 부여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대언하도록 위임하실 때 주어진다.
하나님을 직접 뵈옵게 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의 역사가 하나님의 관점(神思考)에서 보인다.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 진다.
영성의 시대에 예언자 영성회복을 하려면 예언자 사관을 정립해야 한다.
그러나 이 사관은 학문적인 활동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영적인 상태에 도달해서 얻어져야
하는 것이므로 영성체험과 맞물려 있다.
창조주이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영성체험은 하나님의 관점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체험을 통한 사관의 정립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이는 기독교의 정체성 확립과도 직결된다.
기독교가 세계 구원을 말하려면 세계의 역사를 해석해내는 독특한 사관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 사관의 정립은 기독교의 지상과제인 선교와도 직결된다.
세계역사를 해석해내는 사관이 없이 세계를 구원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가능하지도 않다.맨손으로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겠다는 것과 같이 무모한 일이다.
우리는 아직 세계사를 해석해내는 우리만의 역사관을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
이 역사관을 정립하는 것 이 최우선의 과제다
B. 새로운 역사해석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우리의 독특한 역사관을 가지고 세계역사를 해석해야 한다.
역사를 가르치는 기독교 신학자들이 해야 할 일은 이스라엘 역사, 교회 역사만을 더듬어보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세계사 전체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해내는 일을 해야 한다.
이런 작업은 기독교 밖에서 진행되는 합리적인 역사연구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기록하거나 말한다는 것 자체가 주관적인 해석일 수밖에 없다.
여러 각도에서 연구하고 제시하는 객관적인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예언자 사관이다.
예언자 사관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왜곡하거나 굴절시키지 않는다.
단지 그 사건이 담고 있는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의 뜻과 섭리, 의도를 말하는 것이 예언자 사관이다.
기독교 내에서 진행되어온 작금의 이스라엘 역사와 교회사 연구는 교회 밖의 학자들이 시도하는
방법을 빌려서 정치, 경제, 문화적인 측면에 관심을 가지면서 객관적인 사실접근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그 결과 이스라엘 역사와 교회사는 사건, 사상, 인물 나열의 역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지금까지 해온 것들을 기초로 해서 그 사건, 사상들이 가지는 의미를 말해야 한다.
역사 속에서 진행된 수많은 사건들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의 범주 안에 있으므로 그 사건들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있다.
그 의도를 말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는 역사에서 일어난 크고 중요한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으로 하여금
말씀하시게 해야 한다.
구약성경에는 당시의 주요 사건에 대한 예언자들의 해석이 들어있다.
이를 참고하며 이스라엘 역사 전체가 당시 오리엔트의 배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해석해야 한다.
교회역사도 마찬가지다.
로마제국과 유럽에서 교회가 이러 이러한 사건들을 겪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런 사건들이 있었던 객관성에 최대한으로 다가가서 그 사건이 지니는 의미를 말해야 한다.
의미를 말하지 않고 객관성만을 말하려고 하면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런 해석은 세속학문으로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역사관으로 인정하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하나님을 역사의 주관자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주요 과제다.
진정한 영성가는 신비체험이나 고차원적인 윤리를 실천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 한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자신의 시대를 해석하는 것이 그것이다.
영성가는 역사 해석자여야 한다.
자기 비움의 길1부와 2부는 이를 시도한 것이다.
「하비루의 길」은 이스라엘 역사를 재해석하려는 시도였고 ,2부「죄인의 길」은 교회사를
재해석하는 작업이었다.
근대와 현대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겪었던 수많은 사건들에 대하여 단순히 객관적인 서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이 의도였다.
3부 「비움의길」에서는 예언자 사관을 가능하게 했던 예언자 영성을 주제로 하여 어떻게 그 영성에 도달할 것이며 그 영성이 무엇인지를 다루려고 한다.
C. 예언자영성의 정립
이제 예언자영성이 수면위로 부각되었다.
그렇다면 ‘예언자영성’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예언자영성을 회복하려면 예언자영성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규명해야한다.
1) 예언자 영성과 개신교
구약의 율법이라 불리는 시내산 계약법과 그 계약법의 정신을 계승하여 실천을 외친 예언자들의
영성과, 율법과 예언자들을 완성시키신 예수님의 영성은 사도들을 통하여 초대교회로 이어졌다.
이 영성이 ‘예언자 영성’이며 헤브라이즘의 큰 흐름이다.
이흐름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중세기를 거치면서 단절되고 말았다.
헬레니즘의 은둔적인 사고가 그 흐름을 차단시켰다.
중세기의 천여 년 동안 단절되었던 흐름은 종교개혁을 통하여 개신교로 흘러들어왔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로마가톨릭의 충실한20년 수도사였으나 은둔 수도의 한계를 절감하고
수도사 옷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수도원 수도가 아닌 세속의 삶을 통한 수도를 강조했다.
루터는 중세 천년의 오류를 뛰어넘어 성경과 바울의 신학과 초대교회의 교부들로 돌아가는 복고주의를 시도한 것이다.
따라서 개신교는 예언자영성의 흐름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표어를 내걸었던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은 헬레니즘의 은둔사상에 기초한
수도원 운동으로 말미암아 차단된 중세기를 뛰어넘어서 헤브라이즘의 계보를 잇고 있으며,
구약의 시내산 계약법(율법)과 예언자를 완성시키신 예수님과 초대교회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따라서 개신교는 수도사 영성이 아니라 예언자 영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개신교 내에서 영성운동을 하려면 예언자영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2) 개신교영성에 대한 이해
세상이 아닌 제3의 장소 수도원에서 수련을 하는 수도원 영성은 정적(靜的)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관상(觀想)과 내적인 성찰과 몰입 등을 통한 하나님과의 합일과 일치를 추구한다.
이들은 깊은 영성을 체험한 후 세상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돌보는 사랑과 윤리 도덕적인
삶을 조용히 실천하는 길을 갔다.
이와 같은 은둔수도의 관점에서 보면 종교개혁자들과 개신교내에서 일어났던 주요 사건들인
청교도 운동, 경건주의 운동, 감리교 운동, 각성 운동 등을 주도한 지도자들의 영성은 설명되지 않는다.
깊은 영성이 없이 단순한 신앙적인 열정에 사로잡혔던 사람들 정도로 여겨진다.
그러나 예언자 영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예언자 영성의 대표적인 표본들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시내산 계약의 정신을 말살시키고 있는 왕과 최고 권력층에 맨주먹으로 정면도전을 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광야에서 은둔수도에 전념하다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현실에 벌어지고
있는 모순과 죄악에 갈등하며 고민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탁을 선언하며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잘못을 질타한 행동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은둔수도사들 가운데는 교황청이 천년이상을 천인공노할 온갖 범죄행위를 저지르고 있어도
이에 대하여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사람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교회의 지도자들과 세속의 지도자들이 결탁하여 봉건제도를 만들어 놓고 농노들을 짐승처럼 다루어도 말 한마디 하는 자가 없었다.
게다가 수도사들이 모여 있는 수도원도 대지주가 되어 지배계급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은둔수도는 이런 반성서적인 범죄행위에 대하여 침묵하게 한다.
중세기의 대표적인 개혁운동이라고 평가되는 프랜시스와 도미니칸 운동을 비롯하여 중세기 내내
그 어디서도 교황청의 오류와 봉건제도에 대하여 비판하고 나선 경우를 만나기 힘들다.
중세기에 개혁을 표방했던 경우는 대부분 윤리, 도덕적인 부패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은둔수도자들은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버리고 무소유의 가난을 실천하며 병들고 가난한 자와 같이
사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긴다.
이런 것들이 예수님을 닮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구조적인 병폐를 지적하고 나서는 예언자들의 행동은 부질없는 경거망동일뿐이다.
병들어 죽어가는 세상의 근본을 뜯어 고쳐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려는 시도 자체가 없다.
왜 그럴까?
우연이 아니다.
은둔 수도에서 나온 이원론 윤리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천년이상을 묻어두었던 교황청의 범죄행위에 대한 고발이 종교개혁 선구자들에게서 들려오기 시작했고 루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개화되었다.
루터는 무명의 수도사였다.
수도원 신학의 한계에서 고민하던 그는 바울의 서신들을 통하여 신앙의 핵심을 발견한 후 교황청의
오류를 95개 조항으로 고발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루터의 외침은 예언자영성으로 돌아가자는 절규였고 은둔수도의 암흑을
깨우는 닭의 울음소리였다.
루터야말로 맨손으로 절대 권력자를 향하여 도전하던 예언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예언자 영성의 관점이 아니고서는 루터의 행동과 신학, 영성을 정확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은둔수도와 예언자영성은 만날 수가 없다.
서로 그 뿌리가 다른 까닭이다.
은둔수도에 기초한 가톨릭은 예전(禮典)과 의식(儀式), 성체(聖體)를 나누는 미사 등을 중요시한다.
대단히 정적인데 이는 은둔수도가 예배의식에 반영된 결과다.
구교에서는 예전에 대한 신학이 대단히 발달되어 있다.
이에 반하여 루터는 예전중심의 ‘보는 예배’를 말씀중심의 ‘듣는 예배’로 바꾸어 놓았다.
기록되어진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루터가 성경을 번역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말씀’을 강조하는 것은 예언자 전통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선포한 사람들이다.
이 ‘말씀’이야말로 예언자영성의 중심축이다.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을 삶으로 사는 것이 예언자영성이다.
예전중심의 미사에서는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온갖 성물들로 꾸며진 교회의 분위기와 화려한 예배의식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구교 예배와 신교 예배의 차이는 예배절차의 차이가 아니라 그 뿌리인 영성의 차이다.
은둔영성과 예언자영성의 차이가 예배의식에도 반영되어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개신교의 지도자들과 그들이 주도한 신앙운동들은 예언자영성으로 접근할 때
이해가 명확해진다.
루터는 맨손으로 교황청의 오류와 범죄행위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고, 캘빈의 신학에 기초한
청교도 운동은 영국에서 전제왕권에 맞서서 공화정을 실현하였으며, 루터교 내에서 다시 일어난
개혁운동인 경건주의의 선상에서 등장한 웨슬리는 말을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설교’를 통하여
산업사회의 부작용으로 타락의 극을 달리던 영국을 변화시켰다.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각성운동과 개신교 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성령운동도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예언자영성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성령)의 충만함을 추구하는 영성이다.
자신의 노력이나 어떤 수도가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세속의 삶을 경건하게 사는 것이
예언자 영성이다.
성경의 말씀과 기도, 설교를 통하여 성령님께서 감동하시는 역동적인 신앙생활이 불길처럼
퍼져나가는 것이 특징인 예언자 영성은 보편성을 띈다.
지극히 평범한 모든 사람이 영성수련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영성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예언자 영성이다.
수도사 영성이 특별한 사람, 영적인 엘리트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개신교의 신앙운동에 대하여 예언자 영성이라는 관점에서 정리된 바가 전혀 없다
개신교에 대한 영성이해는 수도사 영성의 관점으로는 접근 자체가 어렵다.
예언자 영성으로만 이해가 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개신교의 영적인 흐름이 바른 길로만 갔다는 것은 아니다.
개신교 내에서도 영성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들이 있다.
단지 흐름의 방향이 예언자영성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예언자영성의 관점에서 개신교 내에서 있었던 영성적인 운동들에 대한 성격을 규명하고 그 영성의
깊이를 더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성령운동’이라는 용어자체는 대단히 중요하고 또 깊이가 있는 것이지만 그 내용이 영적인 현상과
은사를 추구하는 형태 등으로 치우치는 것이 현실이다.
예언자 영성의 깊이는 수도영성보다 훨씬 더 깊다.
예언자들이 도달했던 영적인 상태는 곧 수도영성에 최고의 영적인 상태라고 말하는 ‘합일’, ‘일치’,
‘완전’ 등의 상태 그 이상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들은 뒤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3) 영성의 역사 재정리
아직까지 예언자들을 가장 큰 영성가로 보려는 시도가 없었고 이들이 역사를 바라보던 역사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영성가들은 당연히 수도사라고 생각을 했으므로 영성의 역사는 곧 수도사들의 역사였다.
이제 이러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영성의 역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영성의 역사로 해석해야 한다.
특히 사사, 예언자들은 예언자 영성의 표본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들도 영성의 관점에서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사도들과 초대교회도 마찬 가지다.
신구약 중간기와 중세기도 예언자 영성의 관점에서 다시 조명되어야 한다.
구속사 4천년 전체를 영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 명암들이 명확히 드러난다.
예언자 사관은 곧 영성의 사관이다.
D. 예언자 영성수련법 제시
예언자영성이 명확히 정리되면 그 수련법을 제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삶이 곧 수련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예언자영성의 수련이다.
이에 대해서는<16>, “오늘의 ‘새 부대’는 무엇인가”에서 이미 다루었다.
케노시스 영성원
'신앙의 생각! 말!! 행동!! 영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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