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칭의란 무엇인가?”
-칭의와 성화에 대해 쉽게 설명해 주신다면…
방금 말씀 드린 대로, 칭의란 근본적으로 ‘죄 용서’, ‘무죄선언’, ‘의인이라 칭함 받음’ 이라는 법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로 회복됨’이라는 관계론적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 우리가 믿음으로 얻는 칭의는 주의 재림 때 있을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석에서 얻게 될 것의 선취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칭의’의 완성은 예수의 재림 때까지 유보되어 있는 것입니다. 전통적 개신교가 대체로 그랬듯이, 한국교회도 칭의론의 관계론적 의미를 간과하고 그것의 ‘종말론적 유보’의 구조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한국교회가 일방적으로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무죄선언’ 받고 ‘의인이라 칭함’ 받는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의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만 강조하고, 그것을 예정론과 성도의 견인론으로 뒷받침하면서, 복음을, 칭의론을 아주 단순화시켜 가르쳐온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더 단순화 하여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는 구호로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받아온 사람들이 ‘아 그래? 그럼 나 예수 믿고 세례 받고 지금 교회 다니고 있으니, 나의 구원은 확실히 보장된 것이구만. 그럼 아무렇게나 살아도 뭐 문제될 것 없겠네?’ 라는 생각을 갖게 되고, 그러니 죄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한국 교회는 의인의 삶이 없으면서 ‘의인’으로 자처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칭의론에 대한 부분적 (즉 왜곡된) 이해를 가지고 윤리 없는 구원론을 설파하는 많은 한국의 목사들은 사실상 그들이 이단이라고 규정한 구원파의 구원론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도 꽤 많은 진지한 목사들은 전통적인 개신교의 ‘구원의 서정’ 론에 입각하여 은혜로만/’믿음으로만’ 얻는 ‘칭의’는 ‘성화’로 이어져야 우리가 ‘영화’, 즉 구원의 완성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면서 (롬 8:30), 오늘 여기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른바 ‘성화론’이라는 개념이 꽤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 개념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 즉 믿음으로 의인 된 자들이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개념의 이름이 잘 못 붙여졌고, 그것을 칭의론과 구분하여 생각하게 하므로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화’라는 개념을 ‘칭의’ 뒤에 오는 구원의 새로운 단계로 사용하지 않고, 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 세례 받을 때에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께 바쳐짐, 하나님의 소유물이 됨, 하나님의 백성이 됨, 곧 ‘성도’가 됨의 뜻으로 사용합니다. 바울은 또 그의 편지들 중 서너 번 이렇게 우리의 믿음의 시작점에 이미 ‘성화’ 된 사람들은 계속 그 ‘성화’의 삶을 살아서 (즉 계속 세상의 가치나, 정신, 도를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최후의 심판에서 ‘성화’ 에 있어 흠없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합니다 (살전 3:13-14; 4:1-8; 5:23; 롬 6:19-23).
그러니까 ‘성화’도 ‘칭의’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의 시작점에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종말에 ‘완성될’ 것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둘 다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얻음, 곧 그의 백성 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지금 현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칭의’와 ‘성화’는 같은 실재를 말하는 병행어들 또는 동의어들로서 (고전 6:11), 그 실재 (곧 하나님의 백성 됨)을 서로 다른 그림언어로 표현하는 것들입니다. ‘칭의’는 우리가 이제 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과 ‘의로운’ (즉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고, ‘성화’는 세상의 오염으로부터 정화되어 ‘거룩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로 보고 율법과 관계하여 구원론을 펼칠 때는 ‘칭의’의 개념을 사용하나, 그것을 세상의 오염으로 보면서 율법의 문제와 연결시키지 않으며 구원론을 펼칠 때는 ‘성화’의 개념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믿음의 시작점에 이미 하나님께 바쳐져 ‘성도’가 된 것은 여러 서신들에서 언급하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현재적 삶을 순결하게 살아갈 것을 가르치는 것은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에 오염될 위험이 컸던 이방세계의 그리스도인들, 즉 고린도인들과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쓴 편지들에서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롬 6:19-23 도 참조).
‘성화’라는 개념을 이렇게 사도 바울이 실제로 사용하는 방법대로 쓰지 않고, 전통적인 개신교의 ‘구원의 서정’의 틀 안에서 이해하여, ‘칭의’ 다음에 오는 구원의 새로운 단계, 즉 현재적 단계를 지칭하기 위해서 쓰면, 그 언어 사용으로 얻고자 하는 결과를 얻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바울의 구원론을 ‘구원의 서정’의 구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해도, 우리 개신교의 전통에 따라 ‘은혜로만/믿음으로만 칭의’를 강조하는 것만큼은 하지 않으며 (아니, 하지 못하며 – 혹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오류를 범할까봐), 게다가 선취된 ‘칭의’를 예정론과 성도의 견인론으로 견고히 뒷받침하여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니, ‘칭의’ 다음에 있다는 ‘성화’의 단계가 항상 부차적인 것, ‘이루면 좋지만 못 이루어도 뭐 나의 구원에는 큰 지장을 주지 않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칭의’ 뒤에 ‘성화’의 단계가 있다는 식으로 구원론을 전개할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칭의’나 ‘성화’ 둘 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감을 말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삶으로써 죄를 짓지 말고 의를 행하며 (‘칭의’), 세상의 오염을 피하고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성화’)를 살아야 한다는 요구를 각각 그 자체 내에 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칭의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대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석에서 얻을 ‘무죄선언/의인이라 칭함 받음’을 지레 받음이라는 법정적 뜻과 그것이 함축하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회복됨’이라는 관계론적 뜻을 둘 다 중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회복됨’이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빠’ 노릇해주심을 덕입어 사는 그의 ‘자녀’들이 되었다는 ‘가족’의 그림으로도 표현할 수 있지만, 더 포괄적으로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통치 아래로 이전되었다, 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그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통치’의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칭의’는 ‘주권의 전이’ (Lordship-transfer) 인 것입니다 (골 1:13-14).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된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상속’ 받아 만유 위에 대행하는 ‘주’가 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 (통치)’는 현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의 나라 (통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때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에 대한 믿음을 우리의 심장으로 고백하고 ‘예수가 주이시다’고 입으로 부르짖음으로써,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이전되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롬 10:9-10). 이것이 ‘칭의’입니다. ‘예수가 주이시다’고 고백하는 것은 죄와 죽음의 세력을 꺾은 주 예수의 도움을 청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그의 주권 (통치)에 순종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칭의’된 자는, 즉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이전된 자는,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로 들어간 자는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즉 더 이상 세상을 좇지 않고 (즉 이 세상(대)를 통치하는 사단에 순종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삶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칭의론’은 이렇게 구조적으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의 서신들에서 윤리적 요구를 강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칭의론’을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이전됨’으로 제대로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윤리적 삶을 요구하지 않는, 아니 윤리적 삶을 방해하는 거짓 ‘칭의론’을 극복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은혜가 ‘싸구려 은혜’ 로,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이 구원파의 ‘복음’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제가 작년에 두란노를 통하여 출판한 책, ‘칭의와 성화’에서 칭의론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저는 한국 교회, 특히 대형교회들의 부패의 가장 근본 원인은 그들이 바울의 칭의론의 복음을 의로운 삶이 없는 구원파적 구원론으로 왜곡하여 선포하여 온 데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여러 목사들의 왜곡된 ‘복음’이 결국 기독교로 하여금 ‘개독교’로 욕먹게 하고 전도의 문을 닫는 근본 원인인 것입니다.
- 한번 구원 받은 사람이 그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나요?
성경은 두 가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신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에 계속 등을 돌리고 죄를 지으면 구원의 완성을 받지 못하고 탈락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려 계속 은혜를 베푸십니다: 목사의 설교나 아침에 묵상하는 말씀을 통해서도, 선생이나 친구의 조언을 통해서도, 사회의 법이나 예술 작품 등을 통해서도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상기시키며 사단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의 선한 뜻을 행하라고 요구하시고 그 선한 뜻을 행할 수 있도록 믿음도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신실히 지키십니다.
그러나 또한 성경은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은혜에 등을 돌리고 계속 사단의 종노릇을 하면서 타락의 길을 가면 되돌아 올 수 없는 낭떠러지에 떨어질 수 있다고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출애굽하여 구원의 첫 열매를 얻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구원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가면서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결국 다 죽은 것을 상기시키면서, 그것이 우리를 향한 경고의 예라고 말하고 있죠. 비슷한 경고가 우리 신약성경 곳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파는 차치하고, 정통이라는 교회들에서도 그런 본문들은 무시하고, 롬 8장 3-39 절 같은 본문들만 일방적으로 강조되니, 성도들이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두려워 하지 않고 쉽게 죄를 짓는 삶을 하도록 오도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의 견인론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끝까지 지켜주심)과 타/탈락에 대한 경고, 성경의 이 두 개의 상반된 가르침들을 어느 쪽도 약화시키지 않고 상호 논리적 긴장을 의식하는 가운데 함께 견지하는 것이 건전한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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