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
차 례
서 론 1
1. 한국 보수주의 신학의 방향 1
2. 보수주의 종말론에 대하여(전천년설의 문제점) 6
성경적 종말론 7
I. 종말론 논쟁 7
1-1. 일관된 종말론 8
1-2. 실현된 종말론 8
1-3. 실존적 종말론 9
1-4. 세대론적 종말론 9
II. 구약의 종말론 10
2-1. 래드의 종말론 10
2-2. 후크마의 종말론 12
2-3. 이사야의 종말 사상 13
2-4. 하바국의 종말 사상 17
2-5. 요엘의 종말 사상 18
III. 신약의 종말론 19
3-1. 세례요한의 종말 사상 20
3-2. 예수의 종말 사상 21
3-2-1.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차이 24
3-2-2. 예수그리스도의 종말론의 종합적 진술 24
3-2-3. 후크마의 예수님의 종말론 25
IV. 마태의 종말사상 40
4-1. 마태의 개인적 배경과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 40
4-2. 마태의 역사의식 44
4-2-1. 마태복음 1장에 나타난 역사의식 44
4-2-2 마태의 미래적 종말 사상 46
4-3. 시작된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 사이의 긴장(마 13장) 50
4-4. 재림을 알리는 시대의 징조들(마 24장) 51
4-4-1. 시대 징조들의 특징 51
4-4-2. 징조의 세 가지 종류 52
① 하나님의 은총을 반영하는 징조 53
② 하나님께 반역하는 징조들 54
③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징조들(마 24:6-8) 57
4-4-3 징조 구분의 중요성 58
V. 바울의 종말 사상 58
5-1. 현존상태 61
5-2. 중간상태 62
5-3. 미래상태 62
5-4. 미래상태의 “방아쇠 장치”(triggering mechanism) 64
5-5. 환란전 휴거를 바울이 믿었는가? 64
5-6. 영원상태 전에 천년왕국이 있을 것을 바울이 믿었는가? 65
5-7. 묵시적 이원론에 관계된 용어들 67
5-7-1. 양자됨 67
5-7-2. 첫 열매 68
5-7-3. 보증자 69
5-7-4. 인(印) 69
5-7-5. 육체의 부활사건 70
VI. 사도요한의 종말 사상 72
6-1. 요한복음 72
6-2. 요한계시록 75
부록 80
1. 예수의 천국 비유 80
2. 예수의 감람산 강화(마 24-25장, 막 13장, 눅 21:3-36, 17:22-37) 83
3. 야고보의 종말론 84
서 론
종말을 알기 위해서는 시작, 즉 창세기를 알아야 한다.
1. 한국 보수주의 신학의 방향
1-1. 복음주의 신앙은 본질적으로 역동적(Dynamic)이기 때문에 신학도 역동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학을 할 때 명사형으로 이해하지 말고 동사형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하나님, 생명, 구원 등등에 대해서도 동사형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보기) 교회----명사형은 건물을 가리키나 동사형은 공동체를 가리킨다.
1-2. 삶이 무엇이냐?(Wm신?고 1조 1항)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지혜라 한다. 삶의 지혜는 경건의 능력을 가리킨다고 칼빈은 말했다.
지혜에 근거한 경건의 능력있는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경건의 능력이 있는 삶이 어떻게 가능한가?(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성경안에서 복음을 접하여 복음을 파악하고 이해할 때 가능하다.
1-3. 그렇다면 경건의 능력있는 삶을 가능케 하는 성경은 무엇인가?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
살전 2:13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였고 히 4:12에서는 성경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으며 벧전 1:23에서도 살아 있는 말씀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말씀은 변화와 개혁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다 롬 1:16에서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하면서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신자들로 하여금 경건의 능력있는 삶을 가능케 한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역동적인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신자는 역동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1-4, 그렇다면 신자들로 하여금 역동적인 삶을 가능케 하는 이 복음(말씀)은 누가 주셨는가? 그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살아 계신 생령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무한, 불변하신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과거에도 역사하셨고, 현재에도 역사하고 계시며, 미래에도 역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존재하시되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즉 섭리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실 때는 주로 말씀으로 섭리하시고 도한 여러 방편, 즉 은혜의 방편들을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여러 방편에 대해서 알게 될 때 일을 쉽게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삼위의 하나님은 인격적 질서의 하나님이시고 삼위의 하나님은 그 안에서 섬김, 사귐, 나눔을 충만히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인격적 질서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는 섬김, 사귐, 나눔이 그 안에 충만히 있다는 것이다.
성자는 중보자를 가리키며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다. 그리고 성자는 양자의 영, 진리의 영을 가리킨다.
1-5.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어떻게 다루시는가?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은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이다.
1-5-1. 피조된 인격체
피조되었다는 의미==인간은 의존적 존재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피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인격체라는 의미==인간은 책임적 존재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의존적이되 책임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은혜와 열심은 정비례하고 믿음과 열심히 정비례한다. 믿음이 크면 열심도 크고 은혜가 크면 열심도 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학과 신앙은 열정적이어야 한다. 다시말해서 능동적인 신앙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은혜 100%+인간의 책임 100%이다.
1-5-2. 영?육 통일체
영과 육은 우리 몸에서 유기적으로 통일되어 있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영과 육을 모두 관리를 잘 하여야 한다. 예) 음식과 노동을 통한 관리가 필요
교회의 세속화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내 신앙(영혼)만 지키고자 하는 것이 세속화이다. 즉 교회 안에서는 열심히 하고 세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이 세속화이다. 어째서 이것이 세속화인가? 그것은 세사 사람들이 주장하기를 교회는 교회에만 관심을 갖고 세상에 대해서는 관심이나 관여를 하지 말라 한다. 교회가 이러한 세상의 주장을 수용하여 세상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고 교회 안에서만 열심을 내었기 때문에 이것이 곧 세속화이다.
그러므로 영과 육의 통일성을 무시하는 즉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무시하는 것은 성도가 세속에 빠지게 할 수 있다.
1-5-3.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은 명사형이 아니라 동사형이다(이것을 후크마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은 의, 지식, 거룩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고 자연을 보호하는 열심을 통해서 나타난다. 즉 하나님과는 사랑을 이웃과는 섬김을 자연에 대해서는 청지기적 직분을 감당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 때 가능한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는 삶으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노동이다. 그러므로 노동은 인간 존엄성의 첫 걸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담을 흘리지 않고 게으른 생활을 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는 삶의 첫 걸음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노동을 통해서 땀을 흘릴 때 그 가치가 나타난다. 사도바울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사람은 trouble maker이다. 그러나 노동을 하는 사람은 peace maker이다.
1-6. 인간이 왜 가치와 존귀성을 상실하였는가? 그것은 죄 때문이다. 그렇다면 죄의 기능은 무엇인가?
죄로 인하여 인간은 극단적으로 두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은 교만과 자만이다. 인간은 죄를 지을 때 자신을 합리화하여 교만에 빠지던지 아니면 죄를 지은 후에 죄 책감에 빠져 자신을 학대)자학)하게 된다. 이러한 극단적인 현상을 보이는 인간이 죄를 지은 후에 교만한 인간은 쾌락주의에 바지고 자학하는 인간은 금욕주의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려 죄를 지은 인간은 결국에 가서는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멸시하는 것을 가리킨다. 인간이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므로 인간의 가치를 상실한다. 말씀은 변화시키고 개혁시키는 능력이 있는데 이러한 능력이 있는 말씀을 무시하는 것은 성화되지 않는 삶이며 인간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삿 21:25에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하였는데 인간은 자기 멋대로 즉 자기 소견대로 살다가 망하게 됨을 알 수있다.
인간의 마음 속에 말씀이 있으면 인간은 자유를 누린다. 인간은 죄 때문에 자유를 상실하고 육체의 노예가 되고 마귀의 노예로 살게 하여 인간을 방종하게 한다.
1-7. 죄에 대한 해결책
죄가 사망을 주므로 죄를 없애면 된다. 사망을 없애는 방법은 생명을 주면 되는 것이다. 생명을 부면 사망은 사라지게 된다. 생명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시다. 그러므로 생명을 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여 자유를 누려야 한다. 인간이 말씀 안에 있다는 증거는 자유한 삶을 누릴 때 나타난다. 즉 복음이 능력을 체험하게 되면 자유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의 법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하는 것이다. 이를 벗어난 것은 방종이다. 질서 안에서의 자유만이 자유이다.
인간이 복음이 능력을 체험하게 되면 마귀의 의도를 알게 되어 인간을 죄와 사망의 노예로 만드는 마귀를 이길 수 있게 한다. 3:17-19에서 하바국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3: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라고 하면서 비록 나에게 아무것도 없어도 나는 여호와로만 즐거워한다고 고백을 한다.
그리고 빌 4:13에서는 사도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하면서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는 삶을 말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롬 8:31-39에서 (롬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8: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라고 하면서 주님을 통하여 넉넉히 이기는 삶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 안에 거하는 신자의 삶의 모습이다.
1-8. 만족한 삶을 유지하는 방법
성경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가능하다. 그렇다면 성령의 사역은 무엇인가.?
1) 믿음을 심어 준다.---이것은 개인적인 측면이다.
2)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를 세운다---교회적인 공동체
그러므로 복음 안에 거하는 자는 믿음이 자라고 견고하고 믿음이 역사하고 믿음이 활동적이어야 한다. 믿음은 일을 한다. 믿음은 우리를 거룩 , 즉 성화시킨다. 성황의 목표는 우리 몸의 영화(롬 8:29-30)이다. 그리고 거룩한 삶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성화는 동사형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역동적인 삶을 사는 것이 믿음의 삶인 것이다.
믿음의 사역은 개인적이 아니라 교회를 통한 공동체적인 사역이다. 믿음이 사역은 섬김과 사귐이 있어야 한다. J.Calvin은 거룩을 과부와 고아와 같은 이웃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1-9.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은 어떻게 보장되어 있는가?(구원론)
1) 예수의 오심과 그의 사역을 통해서 보장된다.
2) 성령의 오심과 그의 사역을 통해서 보장된다.
예수(성령)의 오심과 그의 사역을 다루는 것이 종말론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을 잘 알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삶이 보장된다.
종말론은 끝이 아니라 꽃을 피우는 즐거움의 신학이다.
이러한 것들을 누리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종말과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2. 보수주의 종말론에 대하여(전천년설의 문제점)
박 형용박사의 종말론(내세론)은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2-1. 종말론이 Dynamic하지 않다.
최 권능 목사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현세보다 내세에 더욱 큰 소망과 관심을 유발시킨다. 천당은 죽음 이후의 샅이다. 천국의 역동적인 것이 무시된다. 역동적인 종말론이 없으면 내세에만 관심을 갖게 한다. 즉 죽음 이후에만 관심을 갖게 한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없게 된다. 그래서 기독교 사회 윤리가 사라지고 교회가 세속화된다. (ex : 교회와 정부(정권)가 타협을 한다. 이것은 박 형용박사의 내세론의 악한 열매의 모습이다)
2-2. 개인의 구원에만 큰 관심을 갖게 한다.
사회적 윤리와 역동성의 상실이 가장 큰 문제이다. 그리고 성령론에도 문제점이 있다. 내세 지향적인 성령론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한 성령의 역동성을 약화시킨다. 오순절에 역사하신 성령께서 지금도 역사하시고 앞으로도 역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론에 대한 이해를 함에 있어서 종말론적인 이해가 중요하다.
지금도 성령께서 역사하신다---종말론적 관심
성령의 역사는 이미 끝났다----구원론적 관심
성경적 종말론에 대하여
종말론은 최후의 일들에 대한 체계적 연구로서 조직신학의 갓돌(capstone)이다. 이는 조직신학의 각 영역마다 아직 대답되지 아니한 문제에 대하여 종말론이 그 대답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신론의 경우--하나님이 그가 하시는 일에서 최종적으로 어떻게 온전하게 영광을 받으시게 되며 어떻게 하나님의 경륜이 충만하게 실현되는가?(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하여),
인간론의 경우--죄의 파괴적 영향이 어떻게 온전히 극복되는가?
기독론의 경우--그리스도의 사역이 어떻게 완전한 승리를 누리게 되며 그가 영광을 누리게 되는가?
구원론의 경우--성령의 사역이 어떻게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한 구속과 영화를 마무리 하는가?
교회론의 경우--교회의 최후의 영화(apotheosis)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종말론이 대답을 주는 것이다.
특별히 많은 현대 신약 학자들의 주장하는 것을 보면, 신약신학은 종말론 그 자체는 아니라 할지라도 전체적으로는 적어도 구원론과 윤리와 관련하여 종말론적으로 방향이 설정되어 있다.
종말론을 다루는 성경적 자료는 전통적으로 두 부류가 잇다. 하나는 죽음, 영혼의 중간상태, 몸의 부활, 최후의 심판, 그리고 개인의 최종적 영원한 운명(천국과 지옥)을 다루는 개인 종말론과 그리스도의 재림과 신천신지를 다루는 우주적 종말이 있다. 그런데 신자들의 영화와 불신자들이 유기로 귀결되는 개인 종말은 하나님의 영원한 우주적 절망과 완성으로 귀결되는 바 미래 종말의 한 국면인 것이 사실이다.
I. 종말론 논쟁
19세기와 20세기 초엽의 고전적 자유주의(대표:아돌프 폰 하르낙)는 복음서들의 종말론이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에 속하지 아니하고, 1세기 초대교회의 열정적 분위기의 산물이라 보고 전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들이 주장에 의하면 예수는 본래 도덕 교사로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인간의 무한한 가치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사랑의 윤리를 가르쳤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 견해는 철저하게 배제되고 예수와 신약의 종말론에 대한 각양의 대안적 연구들이 제시되었다.
1-1. 일관된 종말론
바이스가 예수의 신국선포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있어서 종말론적 요소는 껍데기가 아니라 핵심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슈바이쳐가 신국의 신비와 역사적 탐구에서 바이스의 주장을 확대하여 예수는 19세기의 사람이 아니라 1세기 사람이었고 그 시대의 유대주의 묵시가 예수의 메시지에 본질적 요소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예수는 그의 허왕된 묵시적 꿈에 맹목적으로 사로잡혀 그의 삶을 헛되게 내버린 망상적 광신자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생전에 임할 것으로 생각하고 가르쳤으며 자신을 메시야로 믿었다. 예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말론적 동기를 일관되게 철저히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의 메시지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종말론적이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을 보내신 것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마지막 심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 이전에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마 10장에 진술되어 있는 것과 같은 재림이나 “메시야적” 고통이 그가 예언했던 대로(마 10:23) 일어나지 아니하자 예수는 그가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첫번째 재림의 지연). 그래서 그는 새 시대를 위한 대속물로서 자기 홀로 메시야적 불행을 짊어지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상에서 자기의 오류를 새롭게 깨닫고서 하나님에게 버림을 당한(마 27:46) 망상에 전적으로 사로잡힌 사람으로 죽었다. 그는 하나님이 전혀 의도하지 아니한 어떤 일을 위해 헛되게 노력한 나머지 자기의 무덤을 판 사람이었다.
이 견해에서 예수의 가르침의 종말론적 내용은 비록 그것이 예수에게는 중심적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홀스트롬이 잘 지적한 대로 슈바이쳐의 종말론은 자유주의 기독론의 당연한 귀결이다. 그는 형식상으로는 종말론을 주창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은 종말론을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의 윤리는 리츨의 경우보다 훨씬 참된 기독교에서 더 멀어진 인본주의 도덕에 머문다.
1-2. 실현된 종말론
실현된 종말론은 캠브리지 학자인 도드(C.H. Dodd)와 주로 연관이 있다. 슈바이쳐의 일관된 종말론을 강렬하게 반대하여 도드는 왕국의 비유와 사도적 선포와 발전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를 사실상 시작하였다고 주장한다.1 그의 사역, 죽음, 그리고 부활이 왕국의 도래를 가능케 한 것이다 도드에 따르면 예수는 크게 미래에 관심이 없었다. “미래 종말론”은 예수가 곧 바로 재림하지 아니하자 유대 묵시문학에 근거하여 후대 교회가 예수의 가르침을 재구성한 결과로 신약에 도입된 것이다. 예수는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기보다는 자기가 살던 시대와 장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였다. 따라서 종말론은 시간적 관점에서 마지막 일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들에 관심을 가지며 역사의 끝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영원히 현재적인 것”을 중요시 한다. 묵시적 언어는 바로 이러한 진리에 대한 옛 표현이다. 성경 주해자는 부활과 승천과 재림이 동일한 진리에 대한 세 가지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도드의 실현된 종말론을 비판하는 자들 가운데는 예레미아스와 쿨만이 있다. 특히 쿨만은 그의 그리스도와 시간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결정적 승리를 이룬 D-day와 그 다음에 따르는 V-day라는 유명한 표현을 사용하여 그의 종말론을 소개하였다. 이렇게 하여 쿨만은 신약 종말론의 “이미”(the "already")와 “아직”(the "not yet")을 놓치지 아니했다.
1-3. 실존적 종말론
불트만은 그의 신약신학에서 실존주의적 종말론 사상을 주장한다. 인격적 중대한 결정의 순간이 바로 “종말론적”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종말(에스카톤, ?εσχατον)은 개인적 인간 존재에게 진정한 존재를 위해 결단할 기회가 주어지는 시간(카이로스, καιρ??)이라고 불트만은 주장하는 것이다. 도드의 주장과는 다르지만 종말은 역사적 예수의 사역에서 그때 “이미” 실현되었다. 불트만에 따르면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즉각적 도래를 선포한 유대묵시적 예언자에 지나지 아니했으나 그의 케리그마의 신화적 요소를 제거할 경우 지금 여기에서 결단을 요구하는 그의 케리그마의 선포에서 종말이 이미 실현되었던 것이다.
“종말론적 메시지에 대한 필수적인 요소는 그 메시지를 통하여 일하며 결단을 요구하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과 그 메시지가 포함하고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개념이지 세상 종말이 임박해 있다는 신앙이 아니다”라도 불트만은 주장하였다.
1-4. 세대론적 종말론
슈바이쳐, 도드, 그리고 불트만과 같은 비판적 학자들에 의하여 20세기 초반에 형성된 황무지를 세대주의 종말론이 휘몰아쳐 들어왔다. 이때 영국과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는 성경적 신앙에 기초하여 그리스도께서 어느날 진실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가르치는 종말론이면 어느 것이나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까닭에 1909년과 1917년판 스코필드 관주성경에 의해 주로 주장되기 시작한 환란전 전천년설이 범람하게 되었다.
세대주의자들의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예수님이 유대 백성들에게 나타난 후, 계시의 순서상 일어나야 하는 다음 일은 다윗 왕국의 건설이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신 바로는, 아직 계시되지 아니했지만, 왕국과 왕이 거절 당하는 일과 장기간의 신비한 형태의 왕국과 십자가에 대한 전세계적 선포와 교회를 불러 모으는 일등이 나타났다.” 이스라엘의 미래적 축복들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과 현세대의 교회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세대주의자들은 주장했다. 구약은 지금의 세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했다. 이 세대는 예언자 시대에서 볼 때 “대 삽입”(grand parenthesis)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미래적 축복에 대한 모든 구약의 예언들은 이 “대 삽입 교회 시대”에 뒤이어 나타나고 교회의 환란전 휴거와 유대인과 세상에게 다같이 임하게 될 다니엘이 말한 바 “일흔번째 주”의 대환란과 천년동안 철장으로 열국을 다스릴 그리스도의 재림이 선행되는 유대적인 천년왕국에서 성취될 것이 분명하다. 그의 천년통치 후에 그는 그의 남은 모든 적대 세력을 파멸시키고 대백보좌 심판시에 재판장이 되시며 하나님이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그이 나라를 아버지께 넘기실 것이다.
II. 구약의 종말론
예수는 그의 공적 사역을 시작함에 있어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막 1:15)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를 그가 사용함에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 가에 대하여 아무데서도 결코 정의하지 아니했다. 아마도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 아 용어와 그것의 내용에 적어도 친숙했기 때문인 듯하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사용되어 있지 아니하지만 하나님이 자주 왕으로 호칭되고 있는 사실에 그 개념이 나타나 있음에 확실하다(예, 이스라엘의 왕으로 호칭된 경우--출 15:18, 민 23:21, 신 33:5, 시 84:3, 사 43:15, 온 세상의 왕으로 호칭된 경우--왕하 19:15, 시 29:10, 47:2, 96:10, 97:1-4, 145:11-13, 사 6:5, 렘 10:7, 46:18, 단 4:34-35).
2-1. 래드의 종말론
레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구약의 개념을 다섯가지로 요약하였다.
1) 역동적 희망. 2) 종말론적 희망, 3) 지상적 희망, 4) 역사적으로 정향된 희망, 5) 윤리적 희망.
첫째로, 역동적(Dynamic) 희망은 이스라엘이 기대한 하나님의 “왕국”이란 주로 하나님의 통치로 이해되었고 그이 통치가 행사되고 사람들의 세계와 세상 자체에 미치는 그 통치의 영역(시 145:11,13)은 부차적이었음을 뜻한다.
둘째로, 종말론적 희망(Eschatological)은 이스라엘이 점점 더 하나님을 멀리하여 물러가고 경건한 자들이 “왕국”을 창출하는 방편으로 역사를 보지 아니함에 따라서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나님이 역사의 마지막에 그이 남은 자를 속량하고 불경건한 자와 사악한 자를 심판함으로 역사를 영광스럽게 완성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직접 대 격변을 통해 개입하실 것을 점점 더 강렬하게 말한 것을 뜻한다.
셋째로, 지상적 희망(Earthly)이란 구속에 대한 이스라엘의 미래적 희망이 비록 종말론적이지만 항상 땅을 “인간 존재의 섭리적 장(場)”으로 전제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사 11:9, 35:2, 65:17, 66:22).
넷째로, 역사적으로 정향된 희망(Historically orientated)이란 예언자들은 비록 복합적이지만 하나의 단순한(single) 희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희망은 가까운 역사적 미래와 궁극적 종말론적 미래를 동시적으로 보았으며2 연대기적 순서와 관계없이 가까운 미래를 궁극적 미래의 관점에서 보았던 것이다(예, 주의 날에 대한 선지자들의 관념).
다섯째로, 윤리적 희망(Ethical)이란 하나님의 미래 왕국에 대한 약속이 하나님께 충성스런 자들만을 위해 희망을 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변함없는 윤리적 요구가 이스라엘에게 다르며 그들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심판만이 기다린다.
레드의 왕국 개념에 우리는 메시야적 희망을 덧붙이는 것이 중요하다. 구약의 메시야적 희망과 관련하여 게할더스 보스는 다섯가지 필수적인 측면들이 있음을 주목한다.
1) 사람들에게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고 있는 바 사람에 대한 통치의 부과이다(창 49:10, 민 24:17-19, 눅 17:20).
2) 메시야가 “위대한 최후의 왕”이 되리라는 사상에 반영되어 있는 바 종말론적 요소이다. 이 왕은 현 세상 질서의 마지막에 나타나 미래 세계를 연다. 그런 점에서 메시야는 종말론적 역사의 중심점에 서 있다(시 2:8-12, 사 9:2-7, 단 2:44, 7:13-14, 말 3:2-3, 4:1-5).
3) 메시야적 희망에 담겨 있는 초자연적 요소이다. 메시야는 현 세게 질서와는 본질상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 질서를 창조한다(사 11:1-9, 32:15, 65:17-25).
4) 구원론적 요소이다. 주님은 메시야를 통하여 영적 전투적 구원을 성취하시며, 자기 백성을 심판에서 구출하여 다가올 새 세계의 축복된 상태로 인도한다(사 9:4-5, 11:1-16, 미 5:4-5, 슥 9:9-10)
5) 메시야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차지하고 있는 종교적 위치와 관련이 있다. 그가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권리가 있고 하나님과 동일시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2-2. 후크마의 종말론
후크마는 구약의 종말론적 전망이 구체적으로 성취된 일곱가지의 특별계시적 개념들에 주목함으로써 종말론적 전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오실 구속주에 대한 기대---그는 먼저 “여자의 씨”(창 3:15)로, 그 다음에 “아브라함의 씨”(창 22:18)로, 그 다음에는 유다지파의 후손(창 49:10)으로, 그리고 특별히 다윗의 자손(삼하 7:12-13)으로 계시되었으며 아주 분명하게는 아니지만 독특하고 최종적인 방법으로 선지자(신 18:15) 제사장(시 110:4), 왕(슥 9:9), 하나님의 고난의 종(사 42:1-4, 49:5-7, 52:13-53:12), 그리고 이자(단 7:13-14)의 직분을 행하실 것으로 기대되었다.
2)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에게만 아니라 전세계에 온전히 미치게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단 2:44-45).
3) 새 언약의 체결--이스라엘과 새 언약을 맺으므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죄와 우상숭배를 용서할 것으로 기대되었다(렘 31:31-34).
4) 적대적 열국들의 포로상태로부터 이스라엘의 회복이 기대되었다(사 11:11, 렘 23:3, 겔 36:24-28).
5)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부어 주실 것이 기대되었다(욜 2:28-32).
6) 주위 날의 임박이 기대되었다. 그날이 믿지 않는 이방들에게는 심판이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이 될 것이다(욜 1:15, 사 13, 암 5:18-20, 습 1:7, 말 4:5).
7) 신천신지의 창조가 기대되었다(사 11:6-9, 32:15, 66:22).
다가올 주의 날과 관련하여 구약의 선지자들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욥 19:25-27, 시 73:24-25, 사 26:19, 단 12:2, 참조. 마 22:29, 32, 히 11:10, 13:16,19)과 뒤따르는 심판(시 50:4-6, 전 12:14, 말 3:2-5)을 또한 보았다.
이 모든 종말론적 일들이 구약 성도들을 위하여 역사의 지평선에 흐릿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언제 어떻게 이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일들이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하여도 온전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베드로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선지자 자신들까지도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는지는 상고 하느니라”그러나 베드로가 계속하여 진술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그들이 부지런히 연구하고 상고하였어도 겨우 이 정도만 그들에게 계시되었는데 그나마도 “이 섬긴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다가오는 세대의 성도들)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다(벧전 1:10-12).
몰트만은 성경의 종말론을 논하면서 종말론은 “마지막 부분에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기독교는 종말론이며, 소망이며, 앞을 바라다보며, 앞을 향해 움직인다. 그러므로 현재를 혁신하고 변혁하고 있는 것이다. 종말론적이란 단순히 기독교의 한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매개체이며 관건이라 할 수 있으니 그 안에 모든 것들이 놓여 있다.... 따라서 종말론은 단순히 기독 교리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종말론적 개관이야말로 모든 기독교 선포의 특징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특성이고 전체 교회를 특징지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이다.
2-3. 이사야의 종말 사상
이사야는 기원전 740-720 사이에 웃시야 왕 때에 유대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로서 이사야의 종말론을 이해 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2대 사건을 알아야 한다.
먼저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는 사건이고(B.C. 721),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자 남 왕국 유대의 히스기야 왕은 위기의식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히스기야는 희년을 선포하게 되는 것이 두 번째의 사건이다(기원전 702년, 사 37:30)3
희년은 하나님게서 제정하신 것으로서 이 대에는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면에서 자유와 평 등을 선포하는 것이다. 남쪽 유대는 히스기야의 이러한 희년 선포를 통하여 반바알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잇야의 종말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상황을 잘 알아야 한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멸망하던 때에 남 왕국에서 활동하던 선지자로서 당시 이스라엘의 왕은 웃시야로서 웃시야의 선조 중에는 여호람(왕하 8:18; 대하 22:18,20)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은 아하시야이다. 여호람의 죄로 말미암아 아하시야는 단지 1년 동안만 통치를 하게 되고 그 뒤를 이어 요아스가 어린 나이에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는데 이 때에 아달랴라는 자가 섭정을 하게 되었는데 이 때에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아달랴를 ?i아내고 요아스를 도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며 통치를 하도록 도와 주었다. 그러나 대제사장 요호야다가 죽자 요아스는 바알을 숭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요아스를 비방하자 요아스는 스가랴를 돌로 쳐죽였다.
요아스의 뒤를 이어 아마샤가 왕이 되고(왕하 25장) 그 뒤를 이어 웃시야가 왕이 되었다. 웃시야 시대에 앗수르가 군사 경제적으로 약해지자 이틈을 타서 웃시야가 군사 경제를 정비하여 유대가 흥황하게 군사 경제적으로 흥황하게 되었다(대하 26). 그리하여 웃시야가 교만하여지고 이를 본 하나님게서 그를 문둥이가 되게 하셨고 대신해서 요담을 왕이 되게 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알 종교는 여호와의 통치권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여호와의 주권을 부정하는 것이 바알 종교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바알 종교를 가진 유대의 특징을 이사야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2)--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여호와를 머릴하고 물러남
(사2:7-8)--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공경하여--금은보화 마필 병거가 많다---하나님에게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우상을 섬기고 군사력을 증대하였다.
(사3:14)--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장로들과 방백들을 국문하시되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은 너희 집에 있도다--권력층이 부ㅜ패하면서 가난한자를 핍박하고 그들의 재산을 탈취하는 권력층의 부패상을 보여 주고 있다.
(사5:8-12)--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할 자가 없을 것이며 열흘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지기에는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여호와의 통치권을 멀리 하면서 부동산을 독점하게 되었다. 이는 레위기 23:104에서 땅은 여호와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땅은 어는 한 개인이 독점하여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이스라엘의 부패한 자들이 여화의 땅을 자기의 것인양 많은 당을 독접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여호와의 것을 취하는 죄로서 거기에 나타나는 현상은 남자들은 향락을 추구하게 되고 여자들은 사치를 저지르게 된다5
그러므로 이사야 시대에 나타난 종말론적 현상의 특징은 그리하여 여호와의 주권을 멀리하고 여호와의 주권과 통치를 부인하고 부동산 투기에 전력투구를 하여 남자는 향락을 추구하게 되고 여자는 사치를 하게된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고통에 빠지게 되는 것이 종말론적 현상이다.
딤후 3:1-5에 나타난 종말론적 특징은 --(딤후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딤후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딤후3: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딤후3: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딤후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통이 따른다고하고 있다. 그런데 고통을 당하는 이유가 하난이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부정하고 원통함을 풀지 않는등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행위를 일삼는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특징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사라지고 인간적인 탐욕을 추구하여 강포하고 항상 악을 행하다. 이는 아담 때부터 지은 죄가 증폭됨을 의미하며 언약을 파기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고통 중에 있을 대 그들을 방치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종말론적인 vision을 제시하신다. 이사야서에 나타난 그 vision은 다음과 같다.
(사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남은 백성(언약백성)을 통하여 언약을 이루어 가신다. 이러한 남은 자에 대하여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사회적이고 구족적인 죄)를 사하신다. 즉 세상의 교회가 약하고 악이 승한 것 같이 보일지라도 하나님게서는 어약을 이루어가신다.
(사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임마누엘(메시야)의 징표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이러한 종말론적 vision은 메시야게서 오신다는 것이다. 즉 구ㅜ언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메시야께서는 이 땅에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무엇을 행하시는가?
사 53장---오실 고난의 종---고난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실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원을 이루시는가?
(사6:1-3)--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사6: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사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죄(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죄)에서 구원하신다.
(사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사65:18)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사65:19)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사65:20)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에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 (사65:21)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사65:22) 그들의 건축한 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재배한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 (사65:23)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 (사65: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사65: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66:2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새 하늘과 새 땅 창조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종합하여 볼 때 이사야에 나타난 종말론족인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기로 태어 나시고 성령이 임하셔서 예수 그리흐도를 통하여 구원이 이루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천신지가 이루어진다는 것으로서 이사야는 바알숭배와 향락과 사치가 있는 것을 보면서 에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에언하고 그를 통하여 죄가 사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신천신지가 이루어짐을 보았다.
2-4. 하바국의 종말 사상
하바국은 기원전 610-600에 활동하던 선지자이다. 이 시기는 유대의 멸망(B.C.586)이 가까운 시기이며 여호야김 시대로사 예레미야와 같은 시대의 선지자이다.
유대왕 요시야가 므깃도 전쟁에서 전사하게 되고(왕하 23:29-30)6 유대 왕들이 부패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신흥국인 바벨론을 세우셔서 유대를 응징하시고자 하셨다. 이때 유대는 애굽왕의 마음을 움직이고 자시의 향락을 유지하기 위해서 백성에들에게 세금을 더 많이 징수하고 노동력을 착취하게 되었다(왕하 23:31-35)7
이렇게 시대가 악할 때에 하바국은 합 1-2 장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이 시대를 djejg게 하여야 합니까?”라고 질문한다.
합 2:3-4에는 하바국의 종말론적 사상이 나타나는데 그 특징은 고통으로 나타난다. 그 고통은 사회적, 경제적, 영적 고통으로 총체적인 고통을 가리킨다.
합2:3-4에서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히브리서 기자가 10:34,37-388에서 인용을 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고통을 당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히브리서에서 합을 이용한 것을 살펴보면 합의 종말론적인 사상을 알게 된다.
합에서의 “정녕 응하리라”는 의미는 정한 때에 하나님의 묵시가 응하리라는 의미인데 이것을 히브리서에서는 “잠시 잠깐 후면~오실이가 오시리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때가 차면 종말에 오실이가 오시리라는 의미이다.
때가 차되 오실이를 믿지 않는 자는 더욱 강포해지고 때가 차서 믿는 자는 오직 믿음으로 살게 된다.
벧후 3:9에서는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하면서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내하신다고 하였다. 즉 성도는 고통 중에 있을 지라도 인내하여 오실이를 기다리라는 것이 하바국의 종말론 사상으로서 이는 기독론적이고 구원론적이다.
2-5. 요엘의 종말 사상
요엘은 주전 830-800 사이의 요아스 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로 추측된다. 요아스는 자신을 돕던 여호야다가 죽자 희년을 지키지 않고 바알을 숭배하기 시작하였다. 욜 1:10,20은9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지 않으면 큰 쟁아이 임함을 알게 한다.
욜 2:28-32은10 요엘의 종말 사상을 나타낸다. 28절에서에서 “그 후에”라는 말은 23절의11 “전에”라는 말과 대조되는 말이며, “전에”라는 말은 “전과 같은 것”, 혹은 “처음에“라는 의미도 가능하다.
땅이 헐덕거릴 때 먼저 비를 주신다. 그리고 신(성령)을 주신다.
2:23의 비는 이른 비를 가리킨다. 여기서 이른 비는 히브리어로 ????로서 이는 “이른 비” 또는 “교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적당하게”란 단어는 ?????인데 이는 “의를 위하여”, “ 의(義)에”로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적당한 비를 주신다”는 “의의 교사를 보내 주신다”라는 의미로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 절의 의미는 “내가 의의 교사를 먼저 보내어 모든 사람ㅇ게 은혜를 골고루 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욜 2:28의 “그 후에”는 행 2:17에서12 베드로가 “말세에”로 번역하여 인용하고 있으며 “만민에게”는 “”모든 육체에게“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2:29는13 신분, 지위, 인종에 상관 없이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겠다는 것을 알게한다.
2:31은14 천지개벽이 일어남을 알게 한다.
2:32의15 “여호와의 이름”을 행 2:21에서 “주예수의 이름”으로 인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엘의 종말론적 사상은 에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성령의 우주적인 부어주심과 초림과 재림 사이에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되어 사실상 구원 사역이 끝날까지 활발하게 계속된다는 것이 요엘의 종말론적 사상이다.
III. 신약의 종말론
눅 1:16-17(말3:1; 4:5-6)은 신학의 종말론의 시작을 보여준다. 신약의 종말론은 세례요한과 예수의 탄생에 관하여 엘리사벳과 마리아에게 전해 준 천사 가브리엘의 예고(눅 1:16-17)로16 시작되었다. 여기서 주의 할 것은 신약의 계시가 보류된 바로 그 시점에서 시작된 것이다. 즉 말라기 3:1과17 4:5-6의18 예언들이 성취되므로 바로 그 계시와 연결되어 신약의 계시가 시작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사가랴가 세례요한에 대하여 예언한 것(눅 1:16-사 4:3의 성취)도 그 내용으로 보아 세례요한은 말라기가 예언했던 바 주께서 자기의 오심을 위하여 백성을 준비시키려 자기 앞에 보내고자 한 주(예수)의 “엘리야 같은 선구자”이었다. 이에 대하여는 예수님 자신이 마 11:14과19 17:11-13에20 증거하였다.
마리아(눅 1:54-55)와21 사가랴(눅 1:68-75)는22 다같이 요한과 예수의 탄생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의 언약의 약속을 성취하신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다. 한편, 시므온(눅 2:29-32)23과 안나(눅 2:38)는24 나중에 아기 예수를 하나님의 “구원”,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 그리고 “예루살렘의 구속”으로 표현하였다. 시므온은 또한 아기 예수의 사역이 비극적인 면도 포함하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눅 2:34-35)25.
이를 통해서 볼 때 예스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한 구약의 모든 예언들이 성취됨을 보야주면서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알게한다.
3-1. 세례요한의 종말 사상
--講義--
세례 요한은 회개를 통한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연결하여 설명한다. 즉 회개한 곳에 하나님 나락 임한다고하여 회개를 통한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면서 이미 시작된 종말을 보여주고 있다.
요한은 심판한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을 나타내어 심판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강조하였다.
요한은 회개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임재와 심판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동일시하여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시간적 차이를 인식하지(언급하지) 않은채 종말론을 설명하였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종말론의 특징이다.
--冊--
예수의 선구자로서 요한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회개하고 예수를 믿을 것을 요구하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3:2)고 말하였다. 이 기본 메시지를 그는 보충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0-12)
여기서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 함은 역사속에서 확정적으로 결정적인 때가 이스라엘에게 임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는 말과 “불로 세례를 주며 태우리라”는 말은 예수님에게 구원과 심판의 권세가 있음을 요한이 시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고자 하며, 그의 나라가 은혜와 심판으로 역사 속에 뚫고 들어오려는 것이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구원과 심판의 권세가 있음을 시사하면서 그의 구원과 심판 사이에 아무런 시간적 간격을 언급하지 아니한 것은 구약 선지자들의 정향된 단순한(single) 희망의 고전적 실례이다. 구원과 심판에 대한 연대기적 연속성이나 시간적 간격에 관심이 없었던 까닭에, 나중에 요한은 그가 옥중에 있을 때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마 11:3)하고 물었던 것이다. 이렇게 물은 것은 요한이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의심한 까닭이 아니라, 메시야가 오시면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불로 심판하리라고 그가 선포한 것을 당장 예수가 행하지 아니한 것으로 보이기에 느껴지는 그의 예언자적 성급함 때문이었다.
3-2. 예수의 종말 사상
예수는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그의 선구자인 요한보다 더욱 분명하게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선포하였다-이 말슴은 세례 요한의 말을 확증해 준다. 이를 두고 누가는 “오늘날 이 글(사 61:1-2)26이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고 표현하였다. 나중에 예수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헬라어로 중간태 동사 비아제타이(βι?ζεται)가 사용됨) 침노하는 자(헬라어, 비아스타이(βιαστα?)가 사용됨)는 빼앗느니라”(마 11:12, 눅 16:16).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지금 능력있게 활동하고 있으며 이것에 대해서 복음을 듣는자는 능동적으로 지금 현재 반응할 것을 요구하는 말씀으로서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임재한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 “침노하는 자” 가운데 몇몇, 곧 바리새인들에게 선언하기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눅 11:20)고 하였다. 얼마 안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할 것인가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이 묻자 예수는 대답하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고 하였다. 예수는 또한 자기를 대적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너희 손이 닿는 곳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고 선언하였다. 끝으로, 최후의 유월절 만찬상에서 예수는 자기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긴다”(눅 22:29). 분명컨대, 예수의 경우 하나님의 나라 또는 “통치”가 그 자신의 인격과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오심을 통하여 지금(현재적으로) 이 땅에서 역사 속으로 뚫고 들어온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즉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 시작된 종말)
그렇지만 또한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미래의 어떤 것으로(as something future) 말씀하였다. 즉, 그의 권능이 충분하게 나타나 온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하게 미치게 되는 때 그가 영광 중에 오심(파루시아-παρουσ?α-)27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는 저기의 제자들에게 “당시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마 6:10) 하고 기도하라 가르치고 나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그는 또한 이렇게 확언하였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1-12).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였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그는 그의 감람산 강화(Olivet discourse)에서 자기의 미래 재림과 나라를 이같이 묘사하였다.28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 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1-34).
끝으로, 최후의 유월절 식사 때에 예수는 자기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일렀다.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26:29). 이로 보건대., 예수의 경우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하게 최종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미래에야 가능케 되는 것이 분명하다.
“이미”와 “아직”간의 이같은 긴장 관계에서 우리는 “묵시적 이원론”(apocalyptic dualism), 즉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으나 다른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오고 있다는 신약의 파라다임을 보게 된다. 구약 성경이 연대적으로 분명하게 구별되지 아니하고 비록 복합적이지만 단순한 단위(a single though complex unit)로 묶어서 표현했던 것을, 예수가 이제 구별지어 분명하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먼저 은혜 가운데서 임하고 그 다음 나중에 미래의 대격변의 권능과 큰 영광 가운데서 그것이 역사 속으로 임하게 될 것이라 하셨다.
후크마는 그의 개혁주의 종말론에서 신약의 종말론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세 문장으로 요약한다.
1. 우리는 신약에서 구약에 예언된 종말론적 사건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2. 우리는 신약에서 구약의 기자들이 하나의 운동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인 것이 두 단계 즉 현재의 메시야 시대와 미래 시대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3. 이 두 종말론적 단계간의 관계란 현세대의 축복들이 미래의 더 큰 축복들의 보증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신약에서 발견한다.
이같은 신약의 종말론의 “묵시적 이원론”을 예수의 천국 비유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29
3-2-1.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차이
요한은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앞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 사이의 시간적 차이를 모른다.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시작된 하나님 나라와 임할 하나님 나라 사이의 시간적 간격과 연속성이 있다고 하면서 관계성을 알고 있다-묵시적 이원론(apocalyptic dualism)-.
예수님은 마 13장에 소개되어 있는 7개의 비유들이 천국의 어떤 “비밀”을 계시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13:11)30. 이 비밀이 무엇인었는가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13:17에서31 설명하고 계시며 13:34-35에서32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마 11장에서 세례 요한의 질문은 예수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메시야가 아니므로 한 질문이다. 세례 요한이 생각한 하나님 나라는 능력으로 심판하는 나라였다. 그러마 예수님이 도래케 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마 11:5의 모습이다.33 즉 은혜로 용납하시고,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이점을 생각하면서 13:11은 세례 요한이 생가하는 하나님 나라가 아닌 긍휼로 용서하는, 은혜의 하나님 나라를 알리겠다는 것이다.
3-2-2. 예수그리스도의 종말론의 종합적 진술
예수님의 오심으로 종말이 시작되었고(갈 4:4)34 임마누엘이 성취되었으며(마 1:23)35, 성전이 건설되었다(요 1:14)36 예수님의 순종의 삶을 통해서 율법이 성취되고 이로써 구원의 근원이 이루어졌다(히 5:8).37 예수님의 죽음은 영원한 희생제물이 되었고(히 1:6)38 그의 부활은 칭의4:25),39 사망에 대한 승리(고전 15:55,57),40 우리 몸의 부활의 소망이 되었다(고전 15:52).41
이로 보건데 그리스도의 구속사건들은 총체적으로 종말론적 사건이다.
신앙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재림하실 예수를 기다리는 가운데서,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의 심니으로써 이 땅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순종하는 삶을 통해 개혁운동을 하여야 한다. 재림의 날까지는 사단의 남아 있는 세력으로 인하여 고난과 악이 있으나 성령과 복음과 믿음이 승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해 나간다.
3-2-3. 후크마의 예수님의 종말론
1.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역사의 중심점이라는 사실은 이 중심점 사건으로 “과거의 모든 것이 성취되어질 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든 것도 결정되어 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의 영역인데 그 속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의 죄를 이기셨으며 다시 한 번 세상을 그와 화목케 하셨다(고후 5:19).42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단번에 만인을 위해 사망과(고전 15:21-22)43, 사단과(요 12:31)44, 그리고 모든 악한 권세들을 이기시고 승리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다. 이것은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시대가 장차 있게 될 더욱 평화로운 시대로 연결될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도 있다. 다시 말하자면, 신약의 신자들은 한편으로는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크고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이 이미 발생했다고 생각한는 한편, 또 한편으로는 일련의 매우 중요한 종말론적 사건들이 장차 발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은 묵시론적 종말론이 특징이다.
2. 새로운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
신약시대의 신자들은 그들이 마지막 날들, 마지막 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에 대해서 좀더 자세한 성경적 증거를 주목하기로 하자.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에 관해 말씀하시기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시다 하시니”(눅 7:28)라고하셨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요한은, 아직도 그리스도께서 지금 소개하시는 새로운 시대의 왕국이 아니 ㄴ구 시대에 속해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그리스도의 왕국에 성도가 된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에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성경 저자들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새세대로 인도해 들이셨다는 사실에 그렇게 많은 비중을 두는 저자는 없다. 골 1:13에서 바울은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조의 옛 세대의 권세로부터 구속되었음을(참고 갈 1:4--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암시하고 있다. 엡 2:5-6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하면서 미듬으로 우리가 새로운 세대에 살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롬 12:2에서 그는 구체적으로 그의 형제들에게 권고하기를 “너희는 이 세대(세대, 헬라어 아이온)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도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육체”와 “영혼”과의 대조는 인간 존재의 두 양상 사이의심리학적 대조라기 보다는 두 가지의 세력 영역 혹은 두가지의 세대(아이온), 즉 옛 것과 새 것에 속하는 삶의 형태 사이의 대조이다. 바울의 저서들 중에서 “옛 사람”과 “새 사람”의 대조에 대해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 옛 사람이란 인간이 죄에 속박되어 있는 옛 세대 혹은 시대에 속한 사람을 말하며, 빈면에 새 사람은 인간이 죄의 속박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에 속한 새 시대, 새 세대를 가리키고 있다. 신약시대의 신자는 죄의 옛 세대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새로운 세대로 옮겨지게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며,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기 때문에 새 세대는 정말로 이미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3. 역사의 모든 것은 목표를 향해 움직여가고 있다-새 히늘과 새 땅을 향하여
비록 그리스도께서 새 세대를 지작시키셨지만 그 세댕의 최종적 결정체는 아직도 미래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역사를 신에 의해 예정된 목표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역사가 어떤 목표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은 히브리 예언자들의 독특한 공헌이다. 칼 뢰이스(Karl Lowith)의 말에 의하면 “그러나 최후의 목표를 향한 현세의 지평선은 하나의 종말론적 미래이며 그미래는 단지 기대와 소망에 의해서만 위를 위해 존재한다. 어떤 초월적인 목적의 긍극적 의미는 기대되어지는 미래에 그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기대는 히브리 예언자들 속에 강하게 꿈틀거리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헬라 찰학자들에게는 찾아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히브리 예언자들 뿐 만 아니라 신약의 저자들도 역사를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에는 반드시 그의 재림이 뒤다르게 된다. 이미 건설된 하나님의 왕국은 아직도 그것은 절절상태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비록 많은 구약 예언들이 ?루어졌지만 아직도 많은 예언들이 성취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의 신자들은 역사가 이 마지막 경정점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있음을 알고 있다. 역사의 이러한 정점에는 시약시대의 신자들이 아는 바 대로 그리스도의 재림, 성도의 부활, 심판의 날, 새 땅과 새 하늘과 같은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역사의 극치점이기 때문에 모든 역사는 이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의 으미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을 우주적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하늘과 땅”이란 표현은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성경의 표현방법이므로 구속의 목표는 다름 아닌 오늘날 과학자들이 우주라고 부르는 것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 인간이 죄에 빠짐으로 그 잣긴 뿐만 아니라 피조물의 나머지 모든 것에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참고, 창 3:17-18, 롬 8:19-23), 죄로부터의 구속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세계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헤르만 리더보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구속은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드라마와 그리고 우주적 투쟁의 중요성을 갖고 있는 데 이러한 것들 속에서 인간은 그의 죄와 버려진 상태 속에 속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이 속에서 하늘과 땅, 천사들과 마귀들 등이 연관되어져 있으며, 이런 하나님의 드라마와 우주적 투쟁의 목표는 창조된 우주 전체를 하나님의 지배와 통제 아래로 되돌아 오게하려는 것이다.”
구속의 이러한 우주적 차원을 엡 1:9-10과 골 1:19-20과 같은 성경구절들이 보여주고 있다. 엡 1:9-10을 보면 “(엡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골 1:19-20은 우주적 차원의 구속 속에서 그리스도는 구속 뿐만 아니라 창조의 주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구절이다(참고, 16절.(골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리스도는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해 만물이 창조되었으며, 그러므로 전(全) 창조사역에 깊이 관여하고 계신분으로서 구속사역에 동참하고 계신다. 피조물이 “썩어짐에 종노릇 한 데서”(롬 8:21) 완전히 해방됨이 하나님의 구속 목적들을 만족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이런 목적들에 비추어 보기 위해서, 우리들은 역사를 마침내 본연의상태로 복원되고 영광스럽게 될 우주의 목표를 향해서 움직여 나아가는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역사가 목표 지향적인 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적인 역사해석에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이 말이 모든 역사적 사건이 어떻게 역사의 목표와 연관되어 있는지를 우리가 항상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안다는 것은 종종 극히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윌들이 신문기사에 큰 표제를 읽거나, 뉴스를 듣거나, 뉴스 잡지를 읽을 때, 우리느 반드시 하나님이 항상 역사를 지배하고 있으며 역사는 점진적으로 그것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여사해석의 중요한 특징들이다. 이제부터 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는 세계를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이런 역사의 해석이 함축하는 바를 얼마간 살펴 보기로 하자.
1) 현 세대의 특징적인 활동은 선교사역들이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하나님의 왕국을 새로이 시작하셨다면, 또한 그가 우리에게 진실로 위대한 선교 지상명령을 주셨다며(마 28:19-20), 교회가 할 위대한 사역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 때야 끝이 오리라”(마 24:4)고 말씀하셨다. 벧후 3:9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아직 재림치 않으시는 이유는 오직 인간에 대해서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고려해 볼 때 한 가지 사실로 귀착되는 데, 즉 교회의 선교적 사명이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이 시대의 특징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2)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계속되는 긴장 속에 살고 있다.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위치는 마지막 날들 속에 살고 있으나 마지막 날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그는 새 세대 속에 살고 있지만 최종적 세대는 아직 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록 그가 “다가올 세대의 능력들”을 향유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는 죄와 고난과 죽음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은 아니다. 비록 그가 성령의 첫 열매를 갖고 있지만, 그는 그의 최종적 구속을 기다리면서 내면적으로는 탄식하면서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긴장은 현 세대에 독특한 맛을 부여하고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시대의 신자들이 감히 알지 못했던 축복들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들은 구약시대의 신자들보다 하나님의 구속적 계획에 관해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우리의세상 여정에 마지막 끝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낸바 되지 않았다(요 3:2). 비록 신약시대 신자들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어느 누구도 그들을 그리스도의 손에서부터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있는 반면에 그들은 그들 자신이 아직 완성을 소유하지 못하고 따라서 매일 그들의 죄들을 고백해야만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승리를 쟁취하셨기에 우리 주변의 세상 속에서, 그리고 역사 속에서 우리는 그의 승리의 증거들을 찾을 수 있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승리의 최종적 결정이 아직도 일어나지 아니했으므로 역사 속에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며, 그리스도의 승리를 반영하고 있지 않은 듯한 많은 일들이 계속 존재할 것이다. 최후의 심판 날까지 역사는 이러한 모호성에 의해 계속될 것이다.
3) 역사 속에는 두 줄기의 발전이 있다.
방금 기술된 “이미” 와 “아직“ 사이의 긴장은 그리스도의 초림 이래로 세계 역사 속에서, 한님의 왕국의 성장과 발전과 나란히 병행하여 악의 왕국의 성장과 발전을 우리가동시에 볼 수 있음을 의미하게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가라지의 비유(마 13 : 24-30, 36, 43)에서 예수님께서, 사단의 자식을 상징하는 가라지가 알곡으로부터 분리될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신 것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단의 왕국이 최후심판의 날까지 하나님의 왕국이 성장하는 한 함께 공존하며 자라날 것이다.
① 신약성경에서 우리는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한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이 이미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된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을 구약 성경의 예언에 대한 성취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다. 예를 들면, ①마태복음에 기록된 동정녀 마리아로부터의 예수님의 출생 ②예수님의 삶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심에 관한 수많은 자세한 기록들은 구약의 예언의 성취사건들로 여겨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베들레헴에서의 출생(마 2:5-6, 미 5:2), 애굽으로의 피난(마 2:14-15, 호 11:1), 백성들에 의해 배척을 받으심(요 1:11, 사 53:3), 예루살렘의 입성(마 21:4-5, 슥 9:9), 은 30냥애 팔리심(마 26:15, 슥 11:12), 십자가에서 찔리심(요 19:34, 슥 12:110),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는 일(마 15:24. 시 22:18), 뼈를 꺾지 않음(요 19:33, 시 34:20), 부자의 묘지에 장사됨(마 27:57-60, 사 53:9), 그의 주활하심(행 2:24-32, 시 16:10), 그리고 승천하심(행 1:9, 시 68:18).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단번(hapax)에와 오직 한 번(ephapax)와 같은 단어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벧전 3:18에서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의 저자도 같은 사상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ephapax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히9: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히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같은 내용을 전달하고자 함으로써 사용된 또 다른 다어는 히 10:12에서 나타나는 (한 영원한)이다.“(히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히10: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이사야에 인용된 여러 개의 구절들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최종적 사건임을 배우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바가 그리스도의 사역안에서 결정적으로 발생되었고 완성되었음도 알게 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구속자가 오신 것이다.
이 점에 관해 다른 몇몇 증거들을 살펴보자.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선포하시기를 예수님의 오심 속에서 왕국(하늘 나라)가 가가이 왔다고 하였다(마 3:2, 막 1:15).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영으로 자기가 악마와 귀신들을 내어쫓는 일이 하나님 왕국이 그들 위에 임하였다는 증거라고 하였다(마 12:28). 윌가 이미 살펴 보았듯이 하나님의 왕국이 오고 있다는 것이 구약의 종말론적 기대의 한 측면이었다면, 우리는 이 예언이 역시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체 안에 약속된 왕국이 왔고, 이 왕국은 장차 미래에 최종적 완성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의 저자들은 그들이 이미 마지막 날들에 살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 점은 특별히 베드로가 오순절에 행한 설교속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요엘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말하기를 “(행2:15)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행2: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행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말세에“(마지막 날들)란 어구는 히브리어 아하레이 헨의먼역으로 그 문자적 의미는 ”...후에“이다. 베드로가 이와 같은 용어를 인용하여 방금 일어났던 오순절 사건에 적용하고 있는 데 그가 근본적으로 의미하고 있는 바는 ”우리는 이제 마지막 날들 속에 속해있다“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바울에게도 발견되는 데 그의 초기 서신들 중의한 곳에서(갈 4:4) 바울은 역설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때가 차매” 세사에 오셨다고 한다. “충만”“ 가득함”이라는 헬라어는 성취 혹은 완성시키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시간이 차매 나타나셨다는 뜻은 역사의 위대한 중심점이 도착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구약의 예언이 이제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비록 이상과 말들이 시간의 끝 순간에 역사가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점을 배제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말들이 의도하는 중심사상은, 구약의 관점에서 바라다 볼 때 신약시대는 “성취의 때”라는 것이다. 수년 후에 쓰여진 서신인 고전에서도 바울은 이 점에 관해 더욱 분명한 논조로 진술하고 있다. “(고전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여기에서도 역시 “성취”의 의미가 분명히 나타나있다.
히브리서 저자도 자기들의 피가 아닌 피로 매년 지성소에 들어가야 했던 구약의 대제사장들을 그리스도와 비교함으로써 새 세대와 엣 세대 사시의 갈등과 긴장에 관해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가 구약의 제사장들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는 “(히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이 행하였던 역할이 잠정적이었던 것에 비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나타나신 것을 종말론적 성취 및 최종점으로 보고 있다.
요한 서신들은 일반적으로 신약의 글들 중에서 가장 늦게 스여진 문서들로 간주 된다. 이 서신들 속에서도 윌는 신약 시대가 종말론적 성취의 한 단면으로 반영되고 있음을 발견케 된다. 그러나 “말세에” 혹은 “마지막 날들에”라는 표현들 대신에 요한 사도는 “마지막 때”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요일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이상과 같은 종류의 표현들은 신약시대의 신자들이 세상 끝에, 말세에, 마지막 때에 살고있는 자기 자신들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들이다. 또한 그들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이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왕국이 세어짐 속에서 발샹하였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 점은 일반적으로 “실현된 종말론”의선구자 도드의 입장과 어느 정도 연관되어 질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실현되지 않은 많은 종말론적 사건들이 앞에 놓여 있기 때문에 또한 신약 성경이 현재적 종말론과 아울러 미래적 종말론에 관하여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실현된”종말론이란 용어를 즐겨쓸 것이다. “시작된 종말론”이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종말론적 역사 발생이 이미 이루어진 동시에 미래에 종말론적 완성 단계로 발전되어갈 것이라는 측면도 내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시작된 종말론”이란 종말은 이미 시작하였으나 아직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② 신약성경을 살펴 볼 때 우리는 구약의 저자들이 하나의 운동과정으로 묘사했던 내용이 신약성경에 와서는 두 단계로 인식되고 있음을 주목해야만 한다-현재적 메시야의 시대와 미래의 도래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신약의 신자들은 자기들이 지금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새 시대에 살고 있음을 인식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이 새 시대가 장차 올 또 다른 시대를 잉태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증거로서 신약의 저자들은 우리가 지금 마지막 날들에 살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동시에 두 세대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두 세대란 현재의 세대와 장차 다가올 세대를 말한다. 장차 올 세대를 묘사하기 위하여 세 가지 유형의 표현법을 발견하게 된다. “저 세상(눅 20:35),45 ”내세“(눅 18:30),46 ”오는 세상“(마 12:32).47
에를 들자면, 히브리서 저자는 자기 시대에 어떤 이들은 “내세의 능력들”(히 6:5)을48 맛보았다는 구절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엡 2:7에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라고하면서 “오는 여러 세대들”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세대와는 다른 미래의 세대가 장차 있을 것이라는 인식이 면면히 재확인 되어 왔는데 성경은 이러한 두 세대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몇몇 구절들이 있다. 눅 20:34-35에는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두개인들에 대해 답변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라 했다. 두 세대가 함께 연결되어 기록된 또다른 구절은 마 12:32이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현재의 때와 장차 올 때 세대가 대조적으로 묘사된 또다른 구절을 읽어보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 18:29-30). 이상에 열거한 여러 개의 구절로부터 우리는 신약의 저자들이, 현재의 세대를 뒤따라 올 장차의 세대를 바라다 보았다고 단정할 수 있다.
우리는 “마지막 날들에” 혹은 “마지막 때에”라는 신약의 표현들을 통해 두 세대가 한데 아울려 나타나고 있는 아주 흥미로운 실례를 찾아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앗듯이 베드로는 오순절에 행한 그의 설교에서,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시기가 “말세”에 속해 있음을 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지금 “말세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수로서 표현된 “말세”라는 표현구는 현 세대를 지칭하지 않으며, 항상 장차 올 세대를 가리키고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단수로 사용된, “말세”는 인류의 대심판의 날이나 부활의 날을 가리키고 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하셨다. 동일한 장 40, 44, 54절에서49 비슷한 표현이 발견된다. 요 11:24에 마르다가 자기의 오라비 나사로에 대해 말한 기록이 있다.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12:48에서 예수님은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제자들에 의하면, 우리는 지금 “말세에” 살고 있는 것이며 “마지막 날”은 장차 올 것이다.
또다른 흥미있는 일은 synteleia(end, 혹은 completion)라는 헬라어 명사를 살펴보는 일이다. 이 단어가 세대라는 목수형 명사와 함께 쓰여진 경우가 한 번 있는 데 이 경우 synteleia는 현재의 세대를 의미하게 된다. “세상 끝에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게 하시려고 나타내셨느니라”(히 9:26). 그러나 synteleia가 aion(세대)의 단수형과 함께 쓰여질 경우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장차 미래에 있게 될 최종적 절정 상태를 지칭하고 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예수님께서 가라지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마 13:39, 참고 40,49)라고 하셨다. 뚜한 제자들이 장래에 관해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 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 24:3)했다.
그러므로 신약의 종말론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리스도의 오심을 뒤돌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마지막 날들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신약의 종말론은 동시에 장차 일어나게 될 초히종적 상태를 바라다 보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도 확증하고 있다. 마지막 날은 지금 오고 있는 중이며 최종적 상태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사실상 우리는 신약 성도들이 갖고 있는 종말론 기대를 다음과 같이 도표로 그려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의
창조 초림 재림
? 지나간 세대 ? 현 세대 ? 장차 올 세대
←????????????????????????????????????????????????????????????????????????????→
? 마지막 날등 ? 마지막 날
세대들의 끝에 세상 끝에
신약 성경의 종말론이 뒤를 돌아다 보는 동시에 앞을 바라다 보고 있음을 살펴보았음으로 이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어떻게 종말론의 이 두 가지 측면들이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③ 두 종말론적 국면들 사이의 관계성은 현 세대의 축복들이 장차 올 더 크나 큰 축복들에 대한 보증이며 담보물이라는 것으로 규명되어질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좀더 설명이 필요하다. 신약 성경에 으하면 그리스도의 초림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확실성을 보증해 주는 담보물과 같다고 할 있다. 그리스도가 부활 후 승천하실 때 천사들은 이 점에 관해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행1: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히브리서 저자도 죽음 후에 심판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바울도 디도서 2:11-13에서 신약의 저자들이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살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epephanne)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epiphaneian)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1-13). 위에 나타난 두 번째 헬라어는 척번째 쓰여진 헬라어 동사의 명사형으로 두 단어 모두가 실질적으로 눈에 보이게 나타나실 것을 지칭하는 단어들이다.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나타나셨듯이 장차 미래에 나타나실 것에 대해 본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이란 이미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미래에 대한 기대라고 할 수 있다. 벌카우어(G.C.Berkouwer)의 말을 들어보자
???미래에 대한 약속은 과거의 사건들과 불가분리의 관련성을 맺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기대란 “미래의 시앗들은 현재 속에 누어 있다”는 식의 일반적 관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대란 장차 일어날 것과 이미 과거에 일어난 것 사이의 특수한 관계작용에 의해 전적으로 경정되어진다. 우리가 지닌 기대가 전적으로 확실하다 함은 바로 이러한 관계작용에 그 쭈리를 깊이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종말론이란, 이미 나타나신 바 되고 또한 “간절히 그를 기다리는 자들을 구원하시려고???두 버째로 다시 나타나실“(히 9:28) 그리스도를 고대하는 일과 항상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종말론이 독특하다는 것은 그것이 과거에 일어났던 그리스도의 승리에 그 기반을 둔 목적들이 장래에 완성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점에 그 독특성이 있다. 래드 교수도 이 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미래에 있게 될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교회의 증거는 이미 역사 속에 성취되었던 승리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소망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발생했던 사건들과 그 사건들에 대한 교회의 경험위에 근거를 둔 소망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오스카 쿨만은 잘 알려진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D-day와 V-day 사이에 살고 있다. D-day는 그리스도의 초림이었고 그 때에 원수들이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V-day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며 그 때에 원수들은 최종적으로 완전히 항복하게 될 것이다. “최후의 승리에 대한 소망은 너무도 크고 생생하다. 왜냐하면, 승리를 결정지워주는 전맹이 이미 이어났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이다.”
핸드리쿠스 벌코프(Hendrikus Berkhof)도 동일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신약 성경에는 미래란 그리스도와 성령 속에서 이미 존재했던 것을, 또한 죄와 고통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지속되어질 것들을 전개하며 완성시킴을 의미한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의 소망이란 빈곤 속에서 싹트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소유했다는 의식 속에서부터 움트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미래에 있게 될 훨신 더 크고 풍요한 축복들을 소망한다. 이는 지금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이미 많은 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래를 소망하고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에에 있어서는 더행복한 미래를 기대하는 소망이란 빈곤과 불확실성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소망이란 미래에 대한 더 많은 시야를 넓혀 주는, 이미 갖고 있는 소유 대문에 일어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소망은 종종 신앙과 사랑과 연관되어지는데, 신앙과 사랑 역시 소유들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지금 소유하고있다는 사실 바로 그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상실하고 아직까지 얻지 못한 그 무엇을 고통스럽게 느끼게 하고 있다. ”좀더 맛 보았으며“하는 식이다. ???러므로 소망이란 소유와 결핍의 열매인 것이다.
그러하다면, 우리는 신약 성경의 종말론의 본질에 관해 세 가지 관찰 결과를 종합할 수 있게 된다. 첫째, 구약에 예언되었던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이 이미 발생했다. 둘째, 구약의 저자들이 한 개의 운동으로 묘사했던 바가 이제는 두 개의 국면으로 보여진다-현 세대와 미래의 세대. 셋째, 이 두 개의 종말론적 국면간의 관계성은,현 세대의 축복들은 장차 올 더 큰 축복들에 대하 ㄴ보증이며 담보물이라는 점으로 설명되어진다는 것이다.
벌코프는 이 두 줄기의 발전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과 연결시키고 있으며, 그리스도인과 적그리스도인이라는 두 줄기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인류 역사의 종말 직전에 최후의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십자가와 부활로 계시된 두 줄기, 즉 인간의 반항의 길과 하나님의 압도적인 능력의 길이 모두 절정의 종국과 위기에 다다르게 될 때까지 계속 존재하며 심화되고 강화되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들, 적그리스도, 천년왕구, 엄청난 최후의 투쟁들 등에 관한 표상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바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역사를 전체로서 보기 위하여는 두 개의 줄기를 함께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십자가와 부활은 둘 다 역사의비밀이다. 이 두 가지 요소중 어느 하나만 인식한다거나, 또는 한 요소로부터 다른 요소를 분리시킨다는 것, 즉 예를 들어 부활의 능력이 단지 교회 안에서만 활동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단코 배제되어야 만 할 것이다...십자가와 부활 사이에는 어떠한 정적감도 있지 않다. 그리스도의 통치로부터 생겨나는 그림자들은 현 세대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반면에 그의 통치의 밝은 빛은 세상 끝까지 계속될 것이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역사의 모호성을 보게 된다. 역사는 악에 대한 선의 간단한 승리를 계시하지도 않으며, 선에 대한 악의 전적 승리를 계시하고 있지도않다. 악과 선은 나란히 계속해서 존재한다. 현 세대 동안 이 둘 사이에 알력과 투쟁이 계속되어지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기 때문에 그 싸움의 궁극적 결과는 명약관하하다. 적은 이미 패한 전쟁을 놓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역사의 전개에 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역사는 진정한 전개를 나타내고 있다고 윌는 말할 수 있는가? 다시 한 번 우리는 역사의 모호성에 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역사가 진보하듯이 역사에도 퇴보가 있는 듯이 보여진다. 자동차의 발명은 이와 더불어 공해의 문제와 교통사고율의 증가를 가져왔다. 인쇄술의 발명은 동시에 저질의 도색적 출판의 범람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예들을 계속해서 들 수 있다. 한 걸음이 앞으로 나갈 때마다 인류는 뒷걸음 치는 듯이 보였다. 이처럼 진보는 퇴보와 한쌍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니콜라스 베르쟈예프는 약사에서 진정한 진보는 찾을 수 없으며 오히려 퇴행이 뒤따르는 향상을 보게 된다고 하였다.
요약하자면, 비록 우리가 역사 속에서 이 두 줄기의 발전, 즉 하나님의 왕국의 줄기와 사단의 왕국의 줄기를 늘 인식해야 할 것이지만, 믿음이야 말로 우리로 하여금 상상 하나님의 왕국이 사단의 왕국을 지배하며 압제하고 마침내 정복한다는 것을 알게 할 것이다. 윌느 하나님의 왕국 속에서 역사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4) 우리의 역사적 판단들은 모두 잠정적이다
이것은 역사의 모호성을 넌즈시 알리고 있다. 우리는 최후 심판 날에 선과 악이 마침내 분리되며 모든 역사적인 동향들에 대한 마지막 평가가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듯이 그대가지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게 될 것이다. 이것은 최후의 심판이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우리으 모든 역사적 판단들은 상대적이고 시험적이고 잠정적임에 ?v림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결코 절대적으로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선하다, 혹은 악??, 도는 -그 사건이 선과 악의 두 가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면- 악이 지배적이다., 선이 지배적이다라고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한 작가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만물의 끝이 오기 전가지는 어떠한 역사의 현상도 절대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우리는 종종 역사적 운동들과 세력들을 단순히 흑백 논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교회는 선하고 세상은 악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실제로는 세상 일은 이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디고 있다. 교회 안에도 악한 것들이 많이 있으며, “세상” 속에도 선한 것들이 많이 있다. 아브라합 카리퍼가 종종 말했듯이 “세상은 종종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좋은 경우가 있고 반면에 교회도 우리가 그럴것이라고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더 악한 경우도있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건들은 단순히 흑백논리로 설명되어서는 안될것이며 오히려 여러 층의 회색들로서 표현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역사적 판단들이 잠정적이라고 해서 우리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서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지는 않다. 역사적 사건들에 관해 일체 판단하지 않는 것보다는 판단의 오류가 있다 하더라도 판단을 내리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각각의 판단에는 각각의 의미가 나름대로 있기 때문이다.
5) 역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이해는 근본적으로 낙관적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역사를 지배하시며 그리스도께서 악의세력을 이기셨다고 믿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만불의 궁극적 결과는 악이 아니라 선이며, 우주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구속적 목적은 결과적으로 실현될 것이며, “비록 악이 종종 강해 보이나 하나님이 이미 지배자이심”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대 속에서 그의 일을 승리적으로 계속 이루실 것을 믿는다. 이것이 믿음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옛 세상 속에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셨다는 사실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경험이 우리의 믿음과 충돌되는 듯 보인다 할지라도 우리의믿음은 요동되지 아니할 것이다. 믿음은 사실들이 하나님께 대하여서는 이 믿음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6) 이 세대와 다음 세대 사이에는 불연속 상태 뿐만 아니라 연속 상태도 존재한다.
전통적으로 우리들은 다가올 세대를 “이 악한 세상 속에 투하되는 폭탄으로써 현세와 내세를 완전히 절단시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현세와 내세 사이에는 불연속 상태 뿐 아니라 연속 상태가 있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다가올 세대의 능력들이 임 현 세대 속에는 활동하고 있다. 만약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 신자는 직슴 마지막 날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미 어떤 의미에서 최소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서 일어났고(골 3:1) 그와 함께 하늘에 앉도록 되어 있다(엡 2:6).
그러므로 신자의 기독교적 경험 속에는 이 세대와 다음 세대 사이에 참된 계속성이 있는 것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 질문의 답이 이 진리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문 58: 영생이라는 조항은 당신에게 어떠한 위로를 주는가?
답 : 현재 나는 마음 속으로 영원한 기쁨의 시작을 느끼고 있으므로 아 생명이 끝나면 나는 완전한 축복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인데 그 축복은 눈으로도 볼 수 없고 귀로도 들들 수 없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알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그것으로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생과 내세 사이에는 얼마간 문화적 연속성이 존재하는가? 우리가 오늘날 이미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어떠한 의미가 존재한단 말인가? 우리가 오늘날 향유하고 있는 문화유산들이 하나님의 맑은 내일 속에도 우리와 계속 함께 할 것인가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그렇다고, 또한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가올 새 땅은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며 현재의 땅을 새롭게 한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현재의 문화와 다가올 세상의 문화 사이에는 불연속 상태 뿐 아니라 연속 상태가 있게 될 것이다. 벌코프는 우리에게 이런 연속 상태를 제시해 주는 많은 성경의 비유들을 회상시켜 주고 있다.
???성경은???현재와 후세의 관계를 씨 뿌리는 것과 곡식 거두는 것, 곡식이 익는 것과 추수하는 것, 낱알과 이갓의 관계 등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바울은 사람이 그리스도 위에 금과 은으로 집에 기초를 세울 수 있어서 그의 공력이 끝가지 남게 되며 상급을 받게 될 것이라고(고전 3:14) 마랗고 있다. 계시록에도 종국에 믿는 자를 다르게 될 저희의 행한 일들을 언급하고 있으며(계 14:13), 두 번씩이나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면서 땅의 왕들의 영광과(계 21:24) 만국들의 영광(계 2:26)_이 새 예루살렘 속으로 가져가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역사 속에서 선택하며 수고해야만 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현재와 미래 사이에 연속 상태에 관해 매우 평이하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이런 상징적 언어의 의미를 좀더 분명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정말로 이제는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일해야만 한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왕국을 좀더 완전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이생에 있어서의 우리의 노력은 영원한 중요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도 그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불신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과학과 문화의 열매들이 새 땅에서도 역시 발견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한다. 구러나, 더욱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죄에 대한 우리의 싸움들-개인적이든 지도상의 문제이든-우리의 선교사역, 좀더 두드러진 그리스도인 문화를 세우려는 우리의 기도들은 이생을 위해서 뿐 아니라 다가올 세상을 위해서도 가치가 있게 될 것이다.
IV. 마태의 종말사상
4-1. 마태의 개인적 배경과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
마태가 레위지파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의 조상들은 성소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며 유대민족을 위하여 중보사역을 맡아 제사장 열할을 하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유대민족을 선택하셔서 역사를 섭리하시는 것이 모든 인류의 모든 민족을 향해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하게 하는데 있다는 것을 에스라가 간파하였다. 대하 36:23,50 에 1:2-4,51 느 9:30-38는52 유대민족을 통해서 모든 인류를 섭리하신다는 사상을 보여 준다. 즉 우리는 여기서 제사장 역사의식을 볼 수 있다.
역대기의 저자인 에스라는 역대기서에서 다음 몇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하나님이 레위지파를 선택하여 성소의 언약궤 앞에서 봉사하게 한점(대상 15:2; 23:24-32),53 둘째, 다윗의 선택하여 이스라엘을 통치케 하되 수많은 전재에서 승리하여 통일왕국을 건설하고 하나님과의 어약에 충실하게 한 점(대상 28:4; 대하 6:6),54 셋째, 다윗의 아들 가운데 솔로몬을 하나님이 선택하여 성전을 건축하게 한점(대상 28:5-6; 29:;1),55 넷째, 하나님이 자신의이름을 나타내는 장소로 에루살렘과 성전을 택한 것(대하 6:6; 7:12),56 다섯째, 다윗(대상 6:49; 15:13),57 아사(대하 14:4),58 여호사밧(대하 17:3-9),59 요아스(24:6-9),60 히스기야(대하 29:10),61 그리고 요시야(대하 34:19-21)62 등을 대표적인 실례를 들어, 다윗 계열의 신실한 왕들이 모세의 율법에 츙실하여 통치한 점, 여섯째, 여호람(대하 21:12-19),63 요아스(대하 24:19-25),64 아마샤(대하 25:15),65 그리고 므낫세(대하 33:109-11; 36:15-16)66 등이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을 무시함으로써 멸망한 점, 일곱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돌보심이 과거 처럼 변함없이 지속되는 것을 증거하는 유대 민족의 계보, ?P으로 성전 건축(대상 22-23장; 28-29장; 대하 2-7장), 성전수리(대하 34장), 유월절 제사 회복(대하 35장) 등은 유대민족을 선택하여 역사 속에서 섭리하시는 목적이 온 인류의 모든 족속을 향해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하게 하는 데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유대민족을 선택하셔서 역사 속에서 섭리하시는 목적이 온 인류에 온 족속을 향해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하게 하는데 있음을 에스라가 간파하여 이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에스라의 역사관은 비록 유대민족이 죄도 많고 허물 많고 연약하고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율법에 충성되지 못하고 피를 흘리는 죄를 많이 범했을 지라도 하나님이 이 민족을 버리지 않으시고 은혜와 사랑과 돌보심이 과거처럼 지속이 된다는 것이다. 지속이 되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이 민족을 통하여 온 인류가 하나님의 복을 받도록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하도록 하나님이 여전히 역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사장의 역사관을 에스라가 가지고 있었다. 이점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대하 36:23을 보자.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역대하를 마감할 때에 하나님께서 비록 이 유대백성이 하나님의 매를 맞아서 징계를 당하여서 바벨론 포로가 되고 하나님께서 렘에게 말씀하신 것을 응하게 하셔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 원년에 바사와 마음을 유하게 하셔서 성전을 중건케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유대백성과 그 가운데 있는 성전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온 세상을 여전히 통치하고 계심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러면서 스 1:2-4에서 역대하의 말씀을 그대로 반복한다. “(스1: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스1: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스1:4) 무릇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우거하였든지 그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예물을 즐거이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이것은 에루살렘 성전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바라는 것이다. 느 9:32에 보면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를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우리와 우리 열왕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열조와 주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열왕의 때로부터 오늘날까지 당한바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시지 마옵소서”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유대민족이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유대민족을 통하여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한 구속사역을 이룬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에스라의 역사관이며 제사장의 역사관이다. 이러한 역사관을 제사장직을 맡아 온 레위인 출신의 마태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에스라 시대로부터 400(300)년이 지나도 하나님의 구속은 이루어지지 않고 중간사 시대에 오히려 에루살렙 성전이 이방인에게 주도되고 헤롯에게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유대를 사랑하시는가? 아직도 하나님은 유대민족을 통하여 구속사역을 이루시고계시는가? 하면서 굉장히 큰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태는 하나님 대신 돈을 택하였다. 마태는 하나님이 자기 민족을 버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철저히 배반한 것이다. 철저하게 배반하게 되었다는 증거는 하나님 대신 돈을 택하였다는 것이 증거이다. 아마도 마태는 성전이 황폐되고 하나님의 계시도 중단되었으며 유대민족은 나라 없이 강대국의 통치 아래 시달려 오는 어두운 역사 현실을 보고 이렇게 판단하였을 것이다.
4-2. 마태의 역사의식
4-2-1. 마태복음 1장에 나타난 역사의식
마태는 예수를 만남으로써 자신과 자기 민족의 역사를 보는 눈이 바뀌게 되었다. 1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한 바 메시야를 때가 차매 보내셨다.
1절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다. 2:1도 마찬가지다-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1:1에서 마태는 예수님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다윗왕의 계통 후손으로서 예수님이 바로 이 땅에 왕으로서 오신 것을 소개하고 있다. 마태가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통으로 소개하는 이유는 인간의 생각으로는 사실상 중단되었다고 생각했던 왕의 혈통,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아직도 여전히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기 위함이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계보는 하나님이 아직도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섭리하심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마태는 하나님이 계속해서 자기 민족을 통하여 구속사역을 행하심을 알게 되었다. 1장에 나타난 족보 중 이방여인 넷은 수치스러운 역사를 보여준다(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이렇게 부끄러운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속역사가 끊이지 않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인간의 죄와 허물을 이기심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여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은혜로 죄를 능히 이기셨다. 그리하여 구속역사가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은 신실하게 역사 가운데 일하셨다. 1-6절에서 마태는 유다와 다윗의 큰 죄악 마져도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의 강줄기를 막지 못했음을 보았다. 그러나 8절에서 마태는 요람의 죄로 인하여 자기 민족에게 하나님이 크게 진노하여 징계하신 것을 보았다(요담과 웃시야 사이에 3대가 빠졌다-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 요람은 아달랴의 충돌질에 의하여 바알 종교를 남쪽 유다에 정착시켰다. 그리고 11절에서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맣았아”할 때에 그 중간에 여호야김이 빠졌는데 이는 여호야김이 렘시대에 여호와 말씀을 불에 왕으로서 하나의 말씀을 경멸하였기 때문에 계보에서 그 이름들을 뺀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징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7절에서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한 대로 때가 차매(참고 14대씩) 예수를 메시야로 보내셨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다(18절). 즉 육체를 따라 태어난 왕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직접 태어난 만왕의 왕이셨다. 그는 그의 권세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었다(21절) 그는 죄인을 불러 의인으로 만드셨고(참고. 9:13) 그들 가운데 임마누엘로 함께 하셨다. 즉 유대민족을 성전으로 삼아 주셨다(23절). 그는 자기 백성과 영원히 함께 하신다(28:16-20).
다시 말해서 포로로 잡혀 가는 모습은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징계를 보여주며 또한 요람과 웃시야 사이의 족보에 3대가 족보에서 제외되고 있다. 이는 요람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물으시는 것으로서 이러한 상황들은 하나님이 죄에 대하여 물으시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죄를 범했을 때 반드시 죄를 물으신다(벌을 주심). 이렇게 겉으로는 구속사역이 끊이진 것 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우리는 족보를 통하여 알게 된다.
그리고 14대라는 것에서 14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중요하다. 즉 다윗의 히브리어는 ??? 인데 ???를 수로 표기하면 ?(4) ?(6) ?(4)로서 14를 가리킨다. 그리고 14는 7×7로서 완전수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이 때가 차매 그 약속이 이루어짐을 보여 주기 위해 마태가 상징적으로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여 주었던 것들이 때가 차매 이루어진 것을 마태가 본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18절). 즉 육체를 따라 태어난 왕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직접 탱어 난 왕이셨다. 그는 그의 권세로 자기 백성을 자기 죄에서 구원하실 수있었다(21절). 그는 죄인을 불러 의인으로 만드셨고(참고. 9:13)67 그들 가운데 임마누엘로 함께 하셨다. 즉 유대민족을 성전으로 삼아 주셨다(28:16-20).68
이로써 마태는 비로써 역사의 중심점에 서 계시는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 민족을 사라하심을 보고서 새롭게 예수님과 함께 그 백성을 섬기는데 헌신한 것이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사적, 종말론적으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마 1:21의--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나온 것이다.
마태는 예수그리스도가 역대기에 나타난 약속을 성취하신 분으로 이해하고 임마누엘을 강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마귀가 꺽이고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였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또한 마태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인 것을 강조하였고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와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 사이의 긴장을 13장의 천국비유를 통하여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24장을 통하여 어떻게 준비하여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마태는 역대기의 역사관에 기초해서 역사의식을 이해하고 있었다. 마태는 1장 자체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묵시적이라 말은 구약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감취어져 있던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드러나게 된 것을 가리킨다. 미래에 완성될 종말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종말을 산다. 그리고 마태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말하면서 미래에 대한 하나님 나라도 언급하고 있다.
4-2-2 마태의 미래적 종말 사상
미래에 있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마태의 언급
임박한 재림--마 10:23; 24:32
(마10: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마24: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먼 미래에 있는 재림--마 24:14; 25:10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25: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재림의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마 24:32; 25:13
(마24: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마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이미 시작된 종말론과 미래에있을 종말론의 긴장관계에 대해서는 마 13장에 나타난다.
마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비밀이란 하나님 나라가 묵시적임을 나타낸다.
세례 요한은 불의 심판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용서를 통하여 은혜로 싸매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는 심판이 아닌 은혜의 나라로 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은혜의 나라는 세례 요한까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시작된 은혜의 하나님 나라와 앞으로 임할 심판의 하나님 나라가 핵심이다. 이것에 대해서 아는 것이 13장의 중요성이다.
① 씨뿌리는 비유
마 13:18-23에서69 씨를 뿌리는 것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복음 선포와 더불어 시작이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서 사단의 나라가 꺼기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씨앗이 길, 돌밭,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까지 마귀의 저항을 받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저항의 상태는 어떤 때는 크게 주고 어떤 경우에는 왕성한 것 같다가 환난이 있으면 줄어들게 됨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나라는 각양의 저항을 받는 다는 것이다. 저항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긴장 속에 있다. 신자는 많은 시련을 받는다. 하나님 나라는 임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사단을 결박하고 승리하였는데 왜 이런 긴장(어두움, 죄악)이 있는가?
이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사단의 저항(고난, 환난, 유혹 등)이 있다는 것이다.
13:23은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라고 하였는 데 여기서 “결실하다”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헌신, 인내, 하나님 말씀을 듣고 결실하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는 마귀와의 대적과 긴장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의 성화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요구이다. 그러므로 성화는 하나님의 은헤이면서 동시에 요구가 되는 것이다. 성화는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중생한 사람이 자동적으로 성화되는 것이 아니다.
중생한 사람이 열심히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세상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幣活銹? 하나님의 말씀의 이해가 필요하다. 일과 믿음은 동행한다. 로마서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지만 4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그 약속에 의지하여 이삭을 얻기 위해 더?L 노력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인내하고 순종하고 성화되어 긴장을 잘 극복해야 한다.
② 가라지 비유(13:24-30)70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가 있는 곳에 원수들의 역사도 있다. 이때 가만 두어라, 즉 추수 때까지 두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는데 이것은 알곡과 가라지 사이의 긴장을 보여 준다.
가라지가 더 빨리 더 많이 자란다. 그리고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랄 때 가라지 때문에 알곡이 쓰러지지 않는다. 그러므로어떤 때는가라지가 알곡을 보호하게고 된다. 가라지로 인하여 알곡이 넘어지지 않고 경성하여 깨어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니까 가라지를 가두어서 불사르고 알곡은 곡간에 놓는다. 가라지를 먼저 불사르고(심판하고), 곡식은 곡간에 들여 놓는다.
그렇다면 가라지를 시간적으로 먼저 심판하고 시간이 지난 후 알곡을 곡간에 넣는가?
그렇지 않다. 동일선상에 있다. 만일 시간적으로 차이가 있다면 전천녀설에 큰 타격이 있게 된다. 동일선상의 사건으로 맞물려 일어난다. 마지막 그날에는 의인과 악인에 대해서 동시에 심판이 있다. 동시적으로 상호 연관되어 일어난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 될 때 하나님 말씀이 역사되었는데 동시에 사단의 저항이 있어 긴장, 갈등이 끝날까지 계속있다. 그러나 종말에 심판이 있다.
③ 겨자씨 비유(13:31-32)71
사람의 눈에 보기에 하챦게 보인다. 처음은 미약하지만 나중에 창대해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도 같다.
앞에서는 갈등, 긴장이 강조되었으나 여기는 시작할 때 외관상 하챦고 작게 보이지만 때가 되면 놀라운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④ 누룩의 비유(13:33)72
여자가 누룩을 넣는다. 연약한 여자가 누룩을 넣어야 얼마나 넣겠는가? 조금 넣을 것이다. 보이지 않게 부풀지만 결국 전부 부푼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영역이 넓다는 것을 의미한다.
⑤ 감추인 보화(13:44)73
하나님 나라가 사람 눈에 보이지 않게 감추어져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발견하였다.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도, 생명보다 하나님 나라는 중요하다.
⑥ 진주 비유(13:45-46)74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는 비싸다는 것을 강조한다.
⑦ 그물 비유(13:47-49)75
이 비유에서는 악인에 대한 심판만 언급되어 있고 의인에 대한 상급의 언급은 없다. 의인의 부활은 있는데 악인의 벌을 강조하기 위하여 악인의 심판을 강조하고 있다.
막 4:26-29 “(막4:26)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막4: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막4: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막4: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하나님 나라를 누가 성장케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 자신이 씨를 뿌리시고 자라나게 하신다. 천국은 하나님 자신의 행위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확장된다. 막4은 고전 3과 연결해서 이해해야 한다. 고전 3:6-9에서((고전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고전3:8)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고전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는 관리는 일꾼이하고 성장은 하나님께서 하게 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은 통치자이시고 나는 일군이 된다.
후크마에 의하면 임박한 종말을 알리는 구절과 먼 미래에 있을 종말을 알리는 구절 사이의 이해에 대하여 말하기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임박한 미래를 알리는 구절에 대하여는 예언적 원근 통시법(prophetic foreshprtening)으로 바라다 보아야 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종종 그랬듯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그는 가까운 사건과 머나먼 미래의 사건을 함께 매우 인접해 있는 사건들로 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멀리 있는 것과 가까이 있는 것을 통시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런 소망을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하신 바를 이해한다면, 근접한 미래에 있게 될 핍박은 머나먼 미래에 있게 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핍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
4-3. 시작된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 사이의 긴장(마 13장)
시작된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의 관계는 긴장이 있는데 시작된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 사이에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① 장구한 기간이 있다(마 13:8,26)76
② 장구한 기간 동안에 하나님 나라가 강력하게 확장된다(마 13:31,32)77
③ 고난과 사단의 저항이 있다(마 13:20-23)78
④ 하나님 나라는 인내와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 진다(마 13:23, 참고. 눅 8:15)79
⑤ 복음전파를 통해서 확장된다(마 24:14)80
4-4. 재림을 알리는 시대의 징조들(마 24장)
4-4-1. 시대 징조들의 특징
① 비록 우리가 일반적으로 시대의 징조들이 미래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런 징조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셨던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마 16:13, 참고. 11:5; 12:39-41)81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 16:3에서 언급하셨던 시대의 징조들에 대한 일차적인 의미이다.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시대의 징조들이란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크나큰 승리를 쟁취하셨으며, 그러므로 역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변화가 이미 일어났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그것들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일하고 있으며 그의 약속들을 성취하고 계시며 구속의 최후 절정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도록 힘쓰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시대의 징조들은 역사의 중심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주님이 통치하시며 그의 목적들을 이루고 게신다.
그러므로 시대의 징조들을 분별한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의 행동에 대해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즉,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세월을 아기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는 것이다. 도한 “빛의 자녀들 처럼 행동하라”(엡 5:8)라는 것을 의미한다. 롬 13장에서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그들의 삶의 질을 통해서 그들의 세대가 하나님의 시간으로 몇 시인가를 그들이 알아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느 ㄴ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바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자”(11:13절)
②시대의 징조들이란 앞으로의 역사의 종말 특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마 24:14,29-30)82
징조들은 그리스도께서 정확이 언제 오실지, 그의 재림을 수반하게 될 사건들이 언제 일어나게 될지를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에게 이런 것들이 분명히 일어날 것임을 확증하고 있다.
③ 시대의 징조들은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왕국과 악의 세력들 사이에 끝없는 대립을 나타내는 것이다(마 13:24-30)83
예수님의 비유에 의하면 알곡과 가라지는 세상 마지막 날에 있게 될 추수 때까지 서로 함께 자라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다의 세력 사이의 분쟁이 역사 전체를 통해서 끊임없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우리가 기대할 수 있음을 뜻한다.
시대의 징조들은 그런 분쟁에 대한 증거를 계속 지니게 된다. 징조들의 어떤 것들, 특히 만국에 복음이 전파되는 징조는 하나님의 권능이 세상 속에서 역사하고 있으며 그의 왕국이 계속 자라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적그리스도의 출현이나, 배도와 불법의 성행, 전쟁들과전쟁의 소문들의 반복된 발생들과 같은 징조들은 악의 세력의 출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대의 징조들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은혜와 오래참으심을 나타내는 동시에 하나님의 계속적인 진노를 나타내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이런 징조들은 우리에게 우리가 기다리는 분은 구세주인 동시에 심판주로 오실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4-4-2. 징조의 세 가지 종류
시대의 징조들은 하나님의 은총과 하나님의 심판을 알루어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은초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 기간 동안에 모든 인류에게 제공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기회 속에 나타내진바 되었는데 징조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① 하나님의 은총을 반영하는 징조
이 징조에 관해서는 구약이 예견하고 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말일이 곧 시작될 것이며 그때에 성령에 모든 육체 위에 부어질 것이며(욜 2:28)84 땅의 모든 끝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라(사 52:10)고85 이미 예언했다. 그리고 사 40:5; 42:6; 45:22와같은 구절들은, 사도들이 복음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전파되고 있음을 증거하고자 할 때 종종 인용하고 하였다.
소위 감람산 강화문이라고 불리는 복음서의 한 부분ㅇ에서 그릿흐도는 재림이 일아나기 전에 모든 나라에 복음이 전파되어야 할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평행구절--(막13:10)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실상 모든 민족들을 향한 선교적 복음전파는 종말의 시대를 가장 잘 특징지워 주는 특성이다. 선교적 복음전파는 현 세대에서 그것은 일차적 의미와 목적을 제공해 준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가장 원초적이고 풍부한 의미에서 선교적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이때가 곧 은혜의 때이며 이때가 곧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여 권고시켜 구원받도록 부르시는 시대이다. 위대한 선교 위임 명령문에서 이 징조는 명령의 행태를 띄고 있다.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그리고 이 명령 뒤에 따르는 약속들을 살펴 보면 이 선교적 명령은 이 세대 내내 수행되어야 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이와 같은 시대의 징조는 선교 사역들을 고무 해야만 함에 틀림없다. 오순절 사건 이후로 모든 세대는 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전파해야 할 엄숙한 의무를 지니고 있다.
이 징조는 앞을 향한 성향 뿐만 아니라 뒤를 향한 연관성도 지니고 있다. 즉 이 징조는 인류역사 속에의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개입에 대한 증표로서,,복음이 제시될 수 있는 객관적인 기반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돌이켜 보고 있다. 동시에 그것은 재림을 바라다 보고 있다. “그대에 끝이 오리아.” 그러나 이 징조는 우리에게 언제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날지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다.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로서 전파될 때가 언제인지 누가 확답을 내릴 수 있을까?
모든 나라에 복음이 전파될 것이라는 이 징조가 완전히 성취될 시기는 오직 하나님만 아시고 계시다고 우리는 먼저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복음이 전세게에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는 오셨으며 또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도록 만드는 징조이다. 그러나 언제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지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말하고 있자는 않다 그러는 동안 교회는 복음을 전 세상에 충실하게 전파해야 하는 동시에 바로이러한 선교사역이 재림 시까지의 이 시대가 갖게 될 독특한 특성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② 하나님께 반역하는 징조들
가) 환난(마 24:21-22)86
환난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항하는 원수들에 의한 대적의 표시이다. 이 환난은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렘 단-에 의해 예언 되었다.
(렘30:7) 슬프다 그 날이여 비할데 없이 크니 이는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로다 마는 그가 이에서 구하여 냄을 얻으리로다 (단12:1)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위에서 인용된 구절 속에는 미래의 “환난의 때”가 이스라엘과 특별히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감람산 강화에서의 말씀(마 24:9-10)87과 산상수훈에서의 말씀(마 5:10-12),88 그리고 마 24:21-22의89 말씀들을 통하여 “환난”이란 궁극적으로 모든 신자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지 환난의 징조는 우리로 하여금 깨어 각성하게끔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환난과 박해를 만나게 될 때 이것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 점점 가까워 오고 있음을 알리는 징조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정말로 우리의 신앙이 이러한 환난을 견디어낼 만큼 강한가 하는 것이다.
나) 배도(마 24:10-12, 24)90
배도 역시 마찬가지로 구약시대부터 예언되었고 있어 왔다는 사실이다. 실상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부터 배도해 나가는 슬픈 연속을 기록해 나가고 있다. 이미 광야시데에도 있었고 사사시대에도 있었으며 역사서와 예언서들 속에도 배도의 내용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두 가지 측면에서의 배역하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첫째는 교회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일에 점점 멀어지게 되는 배도함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날 것을 말하고 있다. 둘째는 예수님의 재림 사건 바로 직전에 최종적 대규모 배도함이 발생할 것을 신약성경은 말하고 있다.
마 24:10-12, 24는91 배도하는 일이 “시대의 징조들” 중에 하나임을 말하고 있으며 딤전 4:1,92 딤후 3:1-5에서의93 “마지막 날들”이란 예수 그리스도의초림과 재림 사이의 전 기간을 말한는 것으로서 배도가 현세대에서 발견되어지는 징조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살후 2:1-3의 “(살후2: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살후2:2)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살후2:3)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은 재림 사건 바로 직전에 최후의 배도사건이 일어날 것임을 분명히 지적해 주고 있다
이를 보건데 배도하는 징조는 불법의 사람의 출현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며 배도하는 일은 불법의 사람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그 정도가 더욱 심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살후 2:9-10의 “(살후2: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살후2: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라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최후의 배도하는 사건이 불법의 사람이 출현 한 후에 더욱 힘해질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다) 적그리스도(마 24:23-24)
이것 역시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다니엘서에 나타나 있는데 예를 들면 네 짐승에 관한 다니엘의 꿈 속에 언급되고 있는 “작은 뿔”인데 “살후에 나타나고 있는 ‘불법의 사람”이나 “작은 뿔”이나 공히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대항하여 말을 내 뱉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을 억압하기 때문에 이 둘은 적그리스도를 가르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마 24:15-16의 “(마24: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마24: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에서 나타나고 있는 “멸망의 가증한 것”의 최종적인 성취는 세상 끝에 있게 될 것이며 이는 살후 2:4의 “(살후2: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라고 말하는 적그리스도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신약성경은 적그리스도에 대해 이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는 오직 요한 서신에만 나타난다. 요일 2:18,22 ; 4:3, 요이 7절).94 이 본문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적그리스도란 경쟁적 그리스도이기도하며 그리스도의 대적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바울의서신에는 적그리스도란 용어가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많은 학자들이 ?소묵시록?인 살후 2장의 “불법의 사람”과 “적그리스도”를 동일시 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불법의 사람에 대하여 살펴 보아야 한다.
㈀ 불법의 사람은 큰 반역 혹은 큰 배도사건 후에 나타날 것이다.
㈁ 불법의 사람은 하나의 인격체일 것이다.
㈂ 불법의 사람은 숭배의 대상이 될 것이다.
㈃ 불법의 사람은 자기의 대의 명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속임수와 기적들과 거짓 가르침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 불법의 사람은 막는 것이 없이진 후에야 비로서 나타날 것이다.
㈅ 불법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재림시 완전히 무너뜨림을 당할 것이다.
요약하자면, 시대의 다른 징조들처럼 적그리스도라는 징조도 교회의 역사를 통해 면면히 나타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더욱이 각 시대는 각 시대 특유형태의 적그리스도적 행위가 나타나고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징조가 가장 심화된 형태로서 그리스도 재림 직전에 결정적인 적그리스도 한 명의 출현을 예기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징조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이 언제가 될지 정확한 날짜를 제공하지 못한다. 우리는 최종적 적그리스도가 어떻게 일어나게 될른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른지 알지 못한다. 현재와 같이 급변하는 시대에는 그러한 이물이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우리가 “시대들의 사이 속”에 살고 있다는 끊임없는 증표들 중의 하나로서, 늘 적그리스도적 세력들, 운동들, 지도자들에 대해 각성하고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③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징조들(마 24:6-8)95
가) 전쟁들(사 19:2; 대하 15:6)
나) 지진들(삿 5:4-5; 시 18:7 ; 68:8 등)
다) 기근들(렘 15:2 ; 겔 5:16-17 ; 14:13)
이를 통해서 보건데 이 징조 역시 구약에서부터 예언되었던 것들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징조들은 엄밀하게 말해서 세상 끝의 징조들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느데 그이유는 “(마24: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고 하셨고 이러한 사상이 8절 후반부에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진들, 전쟁들, 기근들이 일어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다가왔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러한 징조들은 끝을 가리키며 끝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보증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며 이 징조들도 다른 징조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특징지워준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자기의 목적을 이루시고 있다는 표징들이다. 그것들이 발생할 때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세상을 위한 출산고통으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4-4-3 징조 구분의 중요성
① 재림의 임박성과 확실성을 느끼게 한다.(마 24:32-33)96
② 성도들을 깨어 있게 한다.(24:42)97
가) 소극적인 측면 : 세속 동화 방지(마 24:38,49)98
나) 적극적인 측면 :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게 한다(마 24:14, 45, 46)99
V. 바울의 종말 사상
다메섹 도상에서 나사렛 예수 영광의 메시야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예수가 참으로 메시야임인 것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메시야가 오심으로 해서 메시야 왕국이 이미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적 실재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비록 현재의 악한 세대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는 하지만(갈 1:4)100 종말의 하나님 나라가 이미 현재적으로 실재하여 그 나라에 그의 백성이 들어간 것이 틀림없다(골 1:13)는101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은 그의 서신들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하나, 예수는 그가 부활 승천 하시던 때 그의 메시야 통치를 시작하셨다(참고, 행 13:30-41, 고전 15:23-25, 골 1:13).102 다시 말해서, 메시야가 지금 통치하고 계시고, 그의 발 아래 모든 대적들을 복종시킬 때까지 계속적으로 통치하게 될 것이다.
둘, 죽은자의 종말론적 부활이, 자신의 부활이, 모든 자기 백성의 부활의 첫 열매인(고전 15:21-23)103 예수의 부활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래드가 말하는 대로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의 별도의 사건이 아니라 영광스런 부활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셋, 요엘이 “마지막 날에” 있을 것으로 예언한 (2:28-32)104 성령의 종말론적 부어주심(행 2:17-20)이105 “구원의 날”의 완성을 확실케 하는 “보증”(히브리어 아르라본)으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이미 시작되었다(고후 1:22, 5:5, 엡 1:14, 4:30).106
넷, 성령의 종말론적 삶이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내세의 능력을 맛 본”(히 6:5)107 것이다.
다섯, 이 세대의 끝에 온 땅의 의로운 재판관이 내리는 종말론적 심판의 긍정적 요소인 법정적 칭의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음에서 이미 그리스도인들에게 현실적으로 선언되었다(롬 5:1,9, 갈 2:16).108
그런 까닭에, 바울은 “때가 차매”(갈 4:4)109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냈다고 말하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하여 “비밀의 계시”라고 한 것이다(참조, 고전 2:7-8, 롬 16:25-26, 엡 1:9-10, 3:3-5, 골 1:25-26, 딤후 1:9-10, 딛 1:2-3).110
메시야인 예수가 구속 역사 가운데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종말론적 나라가 “그때 이전에” 세상의 역사 가운데 또한 들어 왔고, 지금도 세상 역사 가운데 현존하고 있으며(참고, 막 1:15, 마 13장, 눅 11:20),111 종말론적(영원한)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존재하고, 종말론적 부활이 이미 예수의 부활에서 시작되었고, 종말론적 성령이 임 교회에게 부어졌고 교회 안에 현존하고 있으며, 성령 안에서의 종말론적 생명이 이미 시작되었고, 종말론적 심판(칭의)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이미 선언 되었는 바, 하나님게서는 이미 자기 백서을 법정적으로 무죄를 선언 하신 것이다
바울의 경우도, 예수의 묵시적 이원론의 기본적인 “구속사적 종말론” 구조를 따라, 내세의 새벽 이전에 현재의 이 악한 에대 가운데로, 내세의 “아직”의 구원론적 측면이 “그때 이전에” 은혜롭게 이미 시작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는 더 이상 이 세대의 시민이 아니고 이미 내세의 시민들이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의 백성들이다. 또한 새로운 세상과 그것의 구원이 이미 현존하고 있으나, 옛 세상 가운데 숨겨져 있을 뿐이다.
바울의 종말론의 연쇄적 단계들은 “현존 상태”, “중간 상태”, 그리고 “미래 상태”로 표현될 수 있다.
5-1. 현존상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하여 최후의 승리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말하며, 우리에 대해서는 비록 충만하게는 아니지만, 그 최후의 승리의 본질적인 완전함에 지금 여기에서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생명과 불멸을 경험하고 있고 죽음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딤후 1:10).112 우리의 속 사람은 지금 금생에서 죄와 사망에 대하여 결졍적으로 죽고, 영적으로 부활하여 새 생명을 누리고 있다(롬 6:3-4).113 벌써 지금 우리는 이미 어두움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졌다(골 1:13).114 바울은 우리가 이미 하늘 처소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는 것으로 말한다(엡 2:6).115 (머레이는 “현재적 종말론”의 이 측면을 “투사된 종말론”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 새 새명은 비록 경이롭기는 하지만 우리가 미래에 누리게 될 전부는 아니다. 아직 더 많은 것이 남아 있다. 우리의 속 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지고, 우리의 몸과 우주는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고후 4:16-18, 롬 8:10이하).116 우리 자신이나 다른 아무 그리스도인들도 미래에 우리가 누리게 될 방식으로 지금 여기에서 통치하거나 왕노릇 하고 있지 않다(고전 4:8).117 그런 까닭에, 우리는 한편으로는 속 사람이 누리고 있는 승리에 겸손하게 그러면서도 감사함으로 참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몸의 승리와 몸과 영혼 모두의 승리를 미리 예견하는 것이다.
5-2. 중간상태
바울이 자신과 다른 모든 신자들을 위하여 가지고 있는 희망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대 승리와 부활이다. 이 희망이 그가 슬퍼하는 자들에게 주는 큰 위로인 것이다(살전 4:13-18).118 이 희망을 온존히 유지하면서, 그는 신자들에게 그들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있는 “중간상태”에 대하여 말한다. 이렇게 불리우는 것은 의인이나 악인에게 다같이 그 기간이 영원하지 않고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마울이 알고 있는 바로는, 중간 상태가 최후의 상태 보다는 그 영광에 있어서 훨씬 못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발생하는 복합적인 사건들을 동반하는 최후의 영광에 비교하면 흠이 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유익”이요, 또한 현재의 상태보다는 축복면에서 “훨씬 빼어나다”(빌 1:21-23).119
고후 5:1-10은 바울서신 가운데서 중간상태를 가장 자세하고 분명하게 다루고 있는 구절이다.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8절) 이라는 표현은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을 말하며, “우리의 장막 집”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1절) 등은 장차 우리가 확실히 덧입게 될 부활의 몸을 가리킨다. 또한, “몸에 거할 때 주와 따로 거한다”(6절)는 표현과 대조되어 있는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한다”(8절)는 표현은 (영혼수면설과 정반대로) 주니과 우리가 중간상태에서 개인적인 사귐을 실제로 누리게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지금 여기 눈물의 골짜기에서는 범죄하지 않는 심장으로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지 아니하지만, 거기서는 더 큰 기쁨을 맛 보며 우리의 존귀한 구주와 더 깊이 사귀고 그를 더 깊이 알게 되며, 우리와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는 말로 표현할 수 없게 환상적일 것이다.
5-3. 미래상태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구속적 게획의 목표는 죄악으로 말미암아 왜곡되어 버린 우주에게 질서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 경험의 영역, 신령한 세계(엡 1:10)120 그리고 자연 자체까지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마침내 만물을 화목하게 할 것이다.” 즉 우주적 구원과 개인의 구원은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에게 존경을 표하고, 예수가 주님인 것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며(빌 2:20-11),121 그리스도는 사망을 포함하여 모든 대적을 정복하 것이다. 그때에 피조물이 자유케 된다(롬 8:19-23).122 그리고 몸이 부활하고 변화됨으로써 불멸하게 된다. 성도의 경우, 최후의 종말은 죽은자로부터 부활하거나 살아서 변화되어 썩음을 보지 않게 된다. 이로써, 주님과 함께 그리고 주님의 목전에서 불멸의 몸을 덧입고 영광스런 영원의 상태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롬 8:23 ; 빌 3:21 ; 살전 4:13-18 ; 고전 15:51-54 ; 고후 5:4-5).123
불신자도 부활하게 된다(행 24:15, 참고. 고후 5:10).124 악한자들의 경우 종말의 때는 심판의 순간이다. 그들은 영원한 파멸로 심판을 받게 된다(살후 1:8-10).125 한편 성도들은 그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되 그들의 행위에 상응하여 보상을 받는다(롬 14:10, 12 ; 고전 3:12-15 ; 고후 5:10).126 참고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영생, 영광, 존귀와 평강을 선물로 주신다(롬 2:7, 10).127
5-4. 미래상태의 “방아쇠 장치”(triggering mechanism)
모든 성경 기자들의 경우처럼 바울의 경우도 이 집합적 종말론의 “방아쇠 장치” 또는 시작점(beginning point)은 그리스도의 신체적, 가시적, 공개적 재림이다(살전 4:13-18 ; 살후 1:5-10 ; 빌 3:20-21 ; 고전 15:23).128 바울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나타남”을 그리스도인의 “복스런 소망”이라고 말한다(딛 2:13).129 그가 오시면, 그는 죽은 그리스도인을 부활시키고,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을 변화시키며, 이 둘이 한 몸되어 주님을 영접하러 끌어 올리우게 되고(살전 4:13-18), 이 성도들은 그와 함께 즉시로 이 땅으로 되돌아와 부활한 악인의 심판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고전 6:2).130
그리스도의 재림은(그것과 동시에 발생하는 죽음자의 부활, 그리고 최후 상태와 함께) 미래 종말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의 초점이다. 이 재림 신앙은 우리에게 경건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바(고전 15:56-58)131 우리의 윤리의 시금석이기도 하다.
5-5. 환란전 휴거를 바울이 믿었는가?
세대주의자들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잴미하시기 7년전에 그리스도인들이 비밀리에 끌어 올리우게 된다. 그러나 바울 서신을 주위 해서 보면 그리스도인들의 휴거는 권능과 영광 가운데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전혀 별개의 사건도, 비밀리에 되어질 것이 아니다(살전 4:15-17).132
5-6. 영원상태 전에 천년왕국이 있을 것을 바울이 믿었는가?
천년왕국의 개념이 명확하게 문자로 소개된 것은 많은 상징을 사용하고 있는 책인 요한계시록 20장에서 뿐이다. 요한의 “천년왕국”에 대한 가장 바람직한 해석은 문자적으로 종말의 한 국면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현재 영적으로 통치하는 것(요 5:24-25 ; 롬 5:17 : 14:17 ; 엡 2:6 ; 골 1:13)으로133 보든지 아니면 이 두 경우로 보든지 하는 것이 좋다. 요한이 계시록에서 무엇을 가르치려고 의도했든지간에 바울의 종말론에서 명확하게 묘사된 천년기가 전혀 없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천년기 통치를 주장했다고 한다면, 그가 그것에 대해서 말했을 법한 서신은 고전 15:20-26일134 것이다. 그러가 사실 그는 거기서 전혀 그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천년기설자들은 고전 15:14(“나라”)와 15:25(“왕 노릇 하시리라“)에서 바울이 천년왕국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주장하며, 또한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πειτα)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ε?τα) 끝이 오리니“라는 소위”차례“<(τ?γματι) 15:23> 구문이라 그들이 칭하는 것에 근거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들의 부활과 ”끝“이 오는 것 사이에 천년왕국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드르이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들의 부활은 첫 번째 ”다음에는“(??πειτα)의 때에 있게 되고, 부활의 끝막음에 해당하는 그 ”끝“은 두 번째 ”그 후에“(ε?τα)(역자주 : 영어로는 ??πειτα와 ε?τα 둘 다 then으로 번역된다) 있게 되는 것이다. 전천년기론자들은 고전 15:23과 15:24 사이에 천년기의 간격이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고전 15:5, 7의 에이타와 에페이타 용법과 딤전 2:13과 3:10의 에이타 용법을 끌어 들인다. 그러나 이 단어들의 용법은 연대기적 연석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사건들의 순간적 연속을 나열하기위해 사용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요한복음 13:4,5(역자주 : 우리말 ”이에“가 에이타임)과고전 15:5,6,7과 비교해 보면 곧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행 24:15에서 “의인과 악인의(한) 부활이 있으리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전천년기자들은 고전 15:24의“나라”가 천년왕국이라고 주장하지만 15:51-5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마지막 원수인 사망을 그가 멸하여 우리 모두의 부활을 가능케 하고 15:25의 문제의 “왕노릇하리라”도 그가 오시기전에 되어지는 것이며, 그의 왕노릇의 절정은 그이 재림과 일반 부활과 곧 뒤따르는 종말론적 심판이며 그때에 “끝이 임하여”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께 그이 메시야적 통치를 돌려 드리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이 내다보는 그리스도의 왕노릇은 악의 세력에 대한 영적 승리로서, 이로 말미암아 결국 그리스도가 성도들을 죽음에서 일으킨다.
한편 전천년기설자들은 천년기에 대한 언그급이 계시록 20장 이외에 신약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계시의 점진성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원리를 여기에 적용하여 마지막 살아남은 사도였던 요한에게만 특별히 천년왕국에 대한 계시가 주어진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이론상으로 가능할지 모르나 이처럼 중요한 계시가 한 사도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도들에게 전혀 주어지지 아니했다고 보려는 것은 사실상 설득력이 없다. 그리고 이같은 주장은 계시록이 신약 가운데서 맨 마지막으로 기록된 것으로 간주하고서 하는 말이지만 게시록의 저작 연대는 아직 확실하게 증명된 것이 없고, 많은 유력한 학자들은 계시록의 외적 내적 증거(예, 계 7:1-8 ; 11:1-2 ; 13: 18 ; 18:10)에135 근거하여 그것의 기록이 연대적으로 늦은 때일 것이라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음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주의 하여야 할 중요한 사항이있는 데 그것은 묵시적 종말론(이원론적 종말론)에 있어서 현세대의 상태이다. 바울은 이 세대를 성령의 시대(오순절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라고 하였는데 이는 일종의 중간적 세대라고 할 수있다. 바로 이 세대의 신자들은 이미 장차 올 세대의 축복들을 향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동시에 그들은 아직 그 축복들을 충만히 소유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5-7. 묵시적 이원론에 관계된 용어들
묵시적 이원론에 관계된 성경의 중요한 단어를 살펴보자
5-7-1. 양자됨
바울은 신자들이 양자됨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령의 사역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갈 4:4-6에서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갈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확증시켜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심을 알게 한다.
그리고 롬 8:14-16에서는 “(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하였는 데 여기서 “양자의 영”이란 바로 성령님을 가리킨다. 그리고 16절에서 “증거한다”는 것은 헬라어로는 συμμαρτυρει로서 이것은 현재형으로서 성령님의 계속적인 사역을 의미한다.
이제 바울은 성령이 신자들에게 확신시키는 그 양자됨에는 종말론적 차원들이 있음을 주지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19절에서 바울은 “(롬8:19) 피조물의 고대 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라고 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고대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의 뜻은 양자가 됨으로써 얻게 되는 축복들과 특권들을 아직 하나님의 아들들이 충만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19절에서 암시적으로 진술된 것이 23절에서 분명해 지고 있다 “(롬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위의 본문에서 “몸의 구속”이라는 것은 우리 육체가 부활할 때에 모든 육체적,, 지상적, 제한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양자될 것”이라는 앞으로의 일이며 동시에 우리가 고대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의양자됨을 증거하심에 있어서 성령은 우리가 이미 얻은 측면과 얻지 못한 측면 모두에 대해서 우리에 확신시켜 주고 계신다. 우리는 양자됨과 연결되어 있는 모든 충분한 권리들을 갖고 있으나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할 수는 없다. “풍성한 양자됨은 아직도 소망의 대상이다”우리의 양자됨에 관한 한 현재의 성령의 활동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성령의 완성된 사역은 이직도 미래에 놓여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장차 받은 유업은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미래적인 것으로 말해주고 있다. 고전 6:9 ; 갈 5:21 ; 엡 1:14, 18 ; 골 3:24 ; 딛 3:7. 비록 아들이 된다는 것이 곧 상속자(후사)가 되는 것과 연결되어 있지만, 좌우지간 기업(유업)을 얻는다는 것은 아직도 미래에 놓여 있는 소망의 대상임에 틀림이 없다.
양자됨과 관련하여 성령이 하시는 역할이란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들인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는 일이며, 동시에 이러한 양자됨의 풍섬한 부가 예수님의 재림 전에서 나타낸 바가 되지 아니할 것도 우리에게 주지시킨다. 그러므로 양자됨이란 용어는 우리에게 이 세대의 특성인 “아직과 이미” 사이의 긴장 상태를 발견하게 한다.
5-7-2. 첫 열매
척 열매라는 용어는 고전 15:20과 23에서는--(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고 롬 8:23에서는--(롬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성령에게 적용되고 있다.
첫 열매에 대한 구약의 배경을 살펴 보면 들판의 첫 소작물들이나 가축의 첫 것들로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들이었다(신 18:4 ; 26: 2 ; 느 10:35-37). 그러므로 첫 열매란 추수 때의 시작을 의미한다. 롬 8:23에서 성령은 첫 열매라고 불리우고 있으며, 여기에서 성령은 추수의 시작으로 묘사되고 있다.
구약 시대에 첫 열매들이란 장차올 대 추수의 첫 시작을 암시했듯이 신자들이 성령을 받는 다는 것은 장차 다가 올 더 좋은 것들의 첫 맛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성령을 갖고 있다. 재림 후에는 풍성한 추수를 얻을 것이니 우리 몸의 부활을 포함할 풍요로움이다. 그러므오 첫 열매란 장차 어느 날엔가 풍성한 추수를 우리가 가두어 들일 날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다.
5-7-3. 보증자
고후 1:22에서136 바울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예만 되는 하나님의 약속들이 장차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증하시는 분으로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지신 바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후 5:5과137 엡 1:14에서도138 성령이 보증자라고 언급하고 있는 데 이 세 구절들은 성령이 미래의 축복들과, 하나님의 약속들의 성취를 “보증하는 예치금”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위의세 구절에서 ?ρραβ?ν(약조물)이란 단어가 나타나고 있는 데 이 단어가 성령에게 적용되었을 경우 우리는 종말론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에 강조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즉 신자들이 지금 현재 소유하고 있는 성령은 신자들의 구원의 미래적 완성에 댜한 보증이며 약정이시다. 성령을 첫 열매로 지칭하는 그 의미는 현재의 영적 즐거움에 잠정적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성령을 우리의 보증이라고 부르는 것은 최종적 성취의 확실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5-7-4. 인(印)
신자들이 성령님의 인치심을 받았다는 구절이 신약에 세 번 나온다. 고후 1:22,--(고후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엡 1:13--(엡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 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4:30--(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 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신약시대의 목자들은 종종 자기들의 가축에 이을 찍어 다른 사람들의것과 구별을 지었다. 신자들이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은 소유권의 증표를 암시하고 있다. 즉 성령으로 인치심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표시이다. 이것은 신자들이 구 속의 날에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사상은 동시에 종말론적인 암시들을 던져 주고 있다. 첫째로, 성령을 인으로서 우리가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이 확신은 성령의 우리 안에서 증거와 연관을 갖고 있으니, 그 증거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확신을 가리킨다. 그러나 성령의 인치심이란 미래에 대한 안전을 내포하는 데, 즉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기업을 최종적으로 얻게 될 것이다.
5-7-5. 육체의 부활사건
사도들이 많은 말로 표현 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일으키셨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었다는 게르할더스 보스의 말은 중요하다.
아마도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이 관계를 가장 분명하게 언급하는 성경은 롬 1:3-4이다. “(롬1: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롬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이 구절에서 몇 개의 대조를 표현하고 있다.
첫째, ???에서 나셨고(γενομ?νο?) 와 인정되셨으니(?ορισθ?σι?) 가 서로 댓구를 이루고 있다. 이 두 단어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있어서 연속도는 두 개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으로 ㅂ하야 만족스러운 해석일 것이다. “???에서 나셨다”는 구저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시기 전에 살으셨던 육신의 생존 기간을 의미하며, 육신의 어머니에게 태어난 그의 지상 생활을 가리킨다. 반면에 “???로 인정되엇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후의 상태를 지칭하는 말로써 그리스도를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언한느 것을 묘사하고 있다.
둘째 댓구는 “육신으로는(κατ? σ?ρκα) 이란 어구와 성결의 영으로는(κατ? πνε?μα) 이라는 어구이다. 이 구절들은 존재의 두 개의 상태의 방식을 서로 묘사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 전의 존쟈 방식을 ”육신으로는“이란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고, 부활 후의 그리스도의 존재 방식을 ”성결의영으로는“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성결의 영으로“는 이란 말은 새로운 상태를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육신으로는 말과 대조시키는 것으로서 서로 다른 그리스도의 존재 양식을 서로 구별시키고 있다. 육신은 그리스도가 부활 사건 전에 존재하게 되었던 도구였다. 이제 성령께서 주님으로서의 그리스도의 품격을 나타내는 도구이며 양식이며 방식이다.
세 번째 댓구는 다윗의 씨로부터(?εκ σπ?ρματο? Δαμ?δ)와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 (?εκ ?αναστ?σεο? νεκρ?ν)이다. 이 두 가지 표현들은 존재 양식의 기원에 대해 서로 차이가 있음을 설명해 준다. 그리스도가 차음에 가지셨던 존재방식은 “다윗의 씨로부터”였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후기 존재 방식은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이다. “부활은, 그러므로 바울에 의하면 독특한 초자연적 능력을 고유사고 행사할 수 있는 새로운 상태의 아들되심의 국면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능동적으로 활동하셨다는 내용이롬 8:11--(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게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에 암시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능동적 역할을 담당하셨다면 바로 그 성령은 신자들의 부활에도 능동적으로 간여할 것인데 인ㄴ 롬 8:11의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는 내용으로 확실히 증거되는 바이다.
그리고 신자들의 부활에 성령이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이 고전 15:42-44--(고전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15: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에 밝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은 구절의 빛 아래서 볼 때 성령은 육체의 부활을 가능케 하는 능동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활이 일어난 후에 그 부활의 육체를 지탱하고 인도해 주시는 일을 담당한다.
한 가지 더 논의할 것이 있다. 만일 바울이 고후 3:18--(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에서 성령이 이미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면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고 말하는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점진적인 변화내지는 새롭게 됨은 육체의 부활을 바라다 보는 일종의 기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성령은 현재의 육체와 미래의 부활육체를 연결시켜 주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은 사람 속에서 일하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사람됨을 새롭게 하신다. 그러나, 현재의 육체와 부활의 육체 사이의 연속성의 비밀은 인간 그“존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있다 죽을 인생이 아느 날 죽지 않는 것으로 덧입혀질 것이라는 신념의 깊은 기저에는 바로 이러한 사상이 깊이 담겨져 있다. 이러한 최종적 목적으로 우리를 준비시키시고 있는 분은 곧 하나님이시며 그 분은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고후 5:5). 이러한 의미에서 신자들의 현세의 삶 속에서 신자들 속에 계시는 성령의 새롭게 하심과 사역은 육체의 부활의 시작으로 이해 되어질 수 있다. 동시에 이런 식으로 바울에 의해 전개되고 있다(참고, 고후 3:18 ; 4:10-11, 16-17 ; 엡 5:14 ; 빌 3:10-11). 미래적 삶(생명)의 영광의 광휘는 지금 신자들을 조명하고 있는 데(고후 3:18 ; 4:6), 이것은 죽은자들로부터의 신자들의 부활에 대한 현재적 첫 열매이며 보증이다(참고, 갈 6:8 ; 롬 8:23 ; 고후 5:5)
결론적으로 성령을 소유함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은 장차 올 세대의 축복들을 우선적으로 맛보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육체의 부활에 대한 담보와 보증은 성령을 소유함으로써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첫 열매를 가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축복들을 풍성히 향유하는 그때, 곧 하나님의 왕국의 최종적 완성의 때를 갈망하고 바라다 보고 있는 것이다.
VI. 사도요한의 종말 사상
6-1. 요한복음
사도 요한의 종말사상도 이미와 아직이라는 긴장 관계를 보게 되는데 그것을 살펴 보면 아래 와 같다.
1. 요 1:1-18은139 요 5:25-26를 전제하여야 한다. 요 5:25-26에서는 “(요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라고 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 때라” 는 종말론적인 때를 가리킨다. 즉 갈4:4의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에서 “때가 차매” 와 같이 해서 종말론적인 때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때가 차매 말씀이 세상에 오시어 성전으로 거했다.
이러한 것을 염두해 두면서 요 1:1-18을 보면 이 부분은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임을 우리는 알게 된다. 특히 요 1:14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말씀은 영광의 주께서 하나님을 충분히 계시해 주고 있는데 이것 역시 종말론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2. 요 1:29,33,36,140에서는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사역을 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세례를 주심으로 새시대를 여셨다. 그리고 창 22:8 ; 출 12:8 ; 사 56:6-7은14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서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담당하시는 어린양으로 예언되었다. 그리고 눅 4:17-19와 행 2:16-17은142 구약을 성취하시고 성령으로 새시대를 여심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요 1:29,33,36,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구주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새시대를 열었음을 알린다.
3. 요 3:13-19는143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지금 당장 심판을 받고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미래에 임할 심판을 미리 보게 한다. 마지막에 있을 의의 선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지금 칭의로 나타난다. 칭의는 단회적이지만 선언은 여러 차례 있다.
실제적 칭의--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선언적 칭의--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외할 때(창 22장)
본래적 칭의--마지막에 있을 최종적 칭의
하나님 나라가 역사의 중심에 있으면서 심판이 있게 된다.
4. 5:24-29에서144 특히 27이하는 시작된 종말과 현재적 부활을 지금 믿음으로 경험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5. 6:39-40145은 현재와 마지막 날이 동시적으로 이야기 되고 있다. 마지막에 있을 생명을 지금 앞당겨 누리고 있다
6: 54과146 11;25-26147은 영생을 이미 현재 누리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12:31-32은148 인자가 들리는 것과 관련해서 심판이 임할 것을 언급하고 있다.
12:48은149 그의 음성을 듣지 않는 자는 마지막 날에 나의 말을 듣지 아니한 그 말이 저를 심판하리라는 것을 말한다.
6. 14:3과150 14:20은151 내세적인 천상적 거처
14:23은152 지상에 하나님의 거처를 정하심을 보여 주면서 지상적 거처를 나타낸다.
그리고 계 21:3은 새하늘과 새땅이 현재적으로 나타남을 보여준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그의 재림이 이미 일어난 것으로 경험되며, 성령의 파송에서 현재적으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성도들이 체험하는 것이다. 즉 예수의 부활사건과 성령 파송에서 그이 재림이 현재적으로 체험되고 있다.
7. 17:1-3은153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의 죽음은 죄와 사망과 사단의 권세를 파하는 사건으로서 이 사건을 통해서 때가 이르매 종말과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이 성취되었고 믿음을 통해 지금 체험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요한은 현재적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을 같은 맥락에서 서로 연결해서 설명하소 시작된 종말과 미래적 종말의 이중적인 것을 아주 밀접하게 연결해서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요한의 사상을 염두해 두고 계시록을 보자
6-2. 요한계시록
계시록은 우리에게 하나의 cycle를 보여 준다.
1장 -- 11장 교회와 세상(지상에서의 투쟁)---인 재앙
6:1-11, 8:6-9:21 ======== 성도들의 핍박과 죽임 당함을 묘사
6:12-8:5, 11:15-19 ======== 승리하는 교회를 묘사
(6:16,17 ; 7:9-17 ; 8:3-5)
6:1-11에서는 인 재앙을 8:6-9:21에서는 나팔 재앙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재앙의 점진성을 보여준다. 인 재앙과 나팔 재앙은 같은 내용을 담은 재앙의 계시인데 이는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계시하는 것이다. 이는 12장 이후 그리스도와 용의 투쟁으로 더욱 구체화 된다.
12장-22장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와 용이 나타난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용(사단)과 그것의 조력자들에게 핍박을 받으나 마침내 승리한다.
12:1-13:18, 16:1-16 =========== 핍박받는 교회
14:1-15:8, 16:17-19:21 ======== 승리하는 교회
(14:12-20 ; 16:15-18) (16:17-18 ; 18:2,17 ; 19:11-16, 19021)
20:1-22:15 ========그리스도와 교회가 최후의 승리자이다.
14:17-20은 낫으로 악한 것을 심판하심을 보여줌(가라지 비유를 연상시킨다)
7째 대접
16:17-18은154 8:5,155 11:19156을 다시 반복한 것이다. 즉 이것은 같은 내용을 인재앙, 나팔재앙, 대접재앙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동일한 내용으로 반복되고 있음을 알게한다.
19:11-21에서157 특히 15절에서 “철장으로 다스린다”는 의미는 제압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14장 하반절에 있는 낫의 심판을 반복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 나팔, 대접 재앙이 동일한 반복인가 아니면 계속적인 재앙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계 20장을 여는 열쇠가 되기 대문이다.
이것을 반복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천년설이고 이것이 재앙의 연속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천년설이158 된다. 즉 19:11-21을 20장 이하에서 설명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무천년설이고, 19:11-21이 20장으로 연결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천년설의 주장이다.
계 20:1-6의159 내용을 순교 당한 신자들은 죽어서 낙원에 들어가는 데 낙원에 있는 성도들이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을, 즉 천상에서 지상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왕노릇 한다는 것은 무천년설이다.
반면에 이 부분을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신자들이 육체적 부활을 하여 그들이 이 땅에서 왕노릇 한다는 것은 전천년설이다.
우리는 위의 상황을 염두해 두고 계 20:1-6의 환상을 무천년설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이 환상은 사단이 결박당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는 바, 사단의 결박은 주님의 주님의 지상 사역 기간 중에 이미 시작되었다(참조. 마 12:29)160 그리고 이 환상은 성도들이 새하늘과 새땅에서 복을 누리는 것으로 끝맺음이 되어 있다(계 22:1).161
이 환상에서 요한이 본 바에 의하면, 이 세대(1000년)를 통해서 교회는 전투하며(20:4상)162 순교한 교회가 승리하여(20:4하)163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여 첫째 부활에 이미 참여하였다(20:5)164
비록 사단이 대배교와 불법의 사람을 통하여(참조. 살후 2장)165 그리스도의 나라를 무너뜨리려고 최후의 발악을 하지만 실패하고, 지옥에 던지워진다(20:7-10)166 또한 그대에 사단의 무리들이 심판을 받아 지옥에 떨어진다(20:11-15)167 그리고 나서, 신천신지에 새예루살렘이 세워지고 그들 가운데 삼위 하나님이 거하시고(21:1-27)168 그의 보좌로부터 생명수 강이 흘러 나온다. 그리고 구속된 성도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한다(22:1-5)169
이러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승리를 확신하게 된 까닭에, 성령과 신부(교회)는 자신있게 복음 초청을 하며(22:17)170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것이다(22:21)171
이와 같이 계시록은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1:20에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라는 장면을 통하여 촛대와 별을 가지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면서, 즉 그리스도의 승리를 보면서 계시록을 마무리 한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복음에 강력하게 초청하는 것으로 마친다. 종말에 승리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며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부록 (로버트 레이몬드의 성경적 종말론에서)
1. 예수의 천국 비유
마 13장에 예수의 일곱 “천국” 비유들이 소개되어 있다.
① 씨 뿌리는 자와 네 종류의 밭
② 알곡과 가라지
③ 겨자씨
④ 누룩
⑤ 밭에 감추인 보화
⑥ 값비싼 진주
⑦ 그물(막 4:26-29에는 여덟 번째로 자라나는 씨 비유가 소개되어 있다).
예수는 이 비유들이 천국의 어떤 “비밀”을 계시하고 있다고 말씀하였다(마 13:11)172. 그 “비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하여 예수 자신이 마 13:17에서173 설명하였고, 마태가 13:34-35(참고, 시 78:2)174에서 예수가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덧붙여 말하였다.
세대주의자들은 이 비유들을 설명함에 있어서 예수와 그의 메시야 왕국은 거부되고, 구약의 예언자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아니한 “장구한 기간의 신비한 형태의 왕국”이 뒤따를 것으로 예수가 이 비유들을 통해서 계시하였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입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것이 능력 가운데 임하기 전에 먼저 우선 은혜 가운데 임하고 있는 것으로 예수가 선포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묵시적 이원론적인 천국의 두 단계 개념을 구약의 선지자들의 경우는 확실하게 구별하여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비밀”이라는 단어를 예수님이 사용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천국”이라는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하여 명확하게 해 둘 필요가 있다. 많은 세대주의자들은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가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해석에 따르면, “천국”은 문자적 “지상(地上)의 다윗의 천년왕국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를 가리킨다. 예수가 처음 선포한 것은 바로 전자의 의미의 ”천국“이 ”가까왔다“는 것이라고 세대주의자들은 주장한다(마 4:17)175. 그러나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두 종류의 별개의 의미의 나라가 아니고 동일한 개념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같은 사실은 마 19:23-24에176 보면, 마태 자신이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같은 의미로 한 문맥에서 사용한 점과, 공관복음서의 병행구에 나타난 용법, 즉 마태는 ”천국“을 사용하나 마가와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즐겨 사용한 점(실례, 마 13:11, 막 4:11, 눅 8:10과 마 19:14, 막 10:14, 눅 18:17)에177 잘 나타나 있다. 이 두 용어는 다같이 하나님의 주권적 구속적 통치(the sovereign redemptive rule of God)를 가리켜 사용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속적 나라와 통치가 예수님의 오시기 전에는 사람들에게 “감취었다”고 그가 선언한 것은 무슨 말인가? 단 2장 등에 근거하여 생각해 보면 유대인들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1세기의 유대인들은 “능력 가운데 임하는 왕국(Kingdom in power)을 대체적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예수가 유대인들에게 바로 이 천국을 사실상 제시하여 보이려고 했다고 하면, 특별히 그가 대단한 ”권능들“을 과시해 보인 점에 비추어 볼 때(참고, 마 11:20-23, 13:54,58, 눅 10:13, 19:37)178, 왜 유대인들이 그를 거부했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예수는 마 13장에서 천국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구약의 시각으로 볼 때는 복합적이지만 ”미분할 된 한 단위“(undivided unit)로 보였으나 두 단계로 이제는 나타나게 될 것을 계시하였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의 두 번째 단계는 다니엘이 예언했던 대로 인자가 능력과 영광 중에 오심으로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마 25:31-46)179. 그러나 능력 가운데 오시기전에 예수가 이 ”비밀“의 비유들을 통하여 가르친대로 천국은 은혜 가운데 그자신의 인격을 통해서(참고, 마 13:37)180 먼저 임하되 점진적으로 오고, 또한 주로 영적 생활의 내면적 불가견적 영역에서 오고 그 나라의 백성된 자들이 아직은 미숙함을 감내하고 심지어 세상나라와 사탄의 나라로부터 저항도 받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스스로 자라나는 씨에 대한 예수의 비유(막 4:26-29)로181 미루어 보건대 천국은 예수의 인격을 통해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이요, 그것은 이적이요, 하나님의 행동이다. 천국은 ”사람이 자거나 깨어 있거나“ 임하게 될 것이다.
현재의 “은혜의 나라”와 미래의 “능력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구별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구별의 기초가 된다. 첫째로, 현재의 “은혜의 나라”는 예수와 사도들이 말하는 바 “ 이 세대”(this age, 아이오노스 투투)(눅 16:8, 20:34, 롬 12:2, 갈 1:4, 엡 2:2), “금세”(今世, this time, 토 카이로 투토)(눅 18:30),그리고 이 세상(the nowage, 톤 뉜 아이오나))딤전 6:17,딤후 4:10, 딛 2:12)과 관계되고, 미래의 “능력의 나라”는 “저 세상”(that age, 아이오노스 에케이누)(눅 20:35), “내세”(age to come, 토 아이오니 토 에르코메 : 토 멜론티)(막 10:30, 눅 18:30, 마 12:32), 또는 “오는 여러 세대”(the ages to come, 토이스 아이오신 토이스 에페르코메노이스)(엡 2:7)과 관계된다.
두째로 신약의 저자들이 구별하는 것과 관련하여 보면, 전자는 “말세”(last days, 에스카타이스 헤메라이스, 에스카투 톤 헤메론)(행 2:17, 딤후 3:1, 히 1:2, 약 5:3, 벧후 3:3, 유 18절), “말세”(last times, 에스카투 톤 크로논)(벧전 1:20), “마지막 때”(last hour, 에스카테호라)(요일 2:18)과 관계되고, 후자는 “마지막 날”(last day, 에스카테 헤메라)(요 6:39, 40, 44, 54, 11:24, 12:48). “마지막 나팔”(last trumpet, 에스카테 살팅기)(고전 15:51). “말세”(last time, 카이로 에스카토)(벧전 1:5)와 관계있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말세 곧 세대의 끝이 왔다”(the end the ages has come)(고전 10:11)고 선포하는가 하면, “오는 여러 세대”(the ages to come)(엡 2:7)라고 역시 말하고,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가 “세상 끝”(the end of ages)(히 9:26)에 나타나셨다고 하는가 하면, 그가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실”(히 9:28) “내세”(the coming age)(히 6:5)에 대하여 또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별들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은 현 세대가 하나님의 구원하는(saving) 활동의 완성의(consummating)시기이고, 따라서 구원의 의미에서 “종말론적”이다.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는 단순히 다른 것들과 함께 곁드려지는 하나의 통치가 아니고, 그의 은혜의 나라는 생명이 죽음보다 훨씬 강하고, 은혜가 모든 죄의 활동 무대를 압도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역이 지옥의 영역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거하는 유일한 나라이다.
그리고 내세(the age to come)는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 활동과 신천신지의 영원한 상태를 지시하는 것으로서, 최종적 영원적 의미에서 “종말론적”이다. 그 시대는 왕이 능력과 영광 가운데서 오실 때 시작될 것이다.
2. 예수의 감람산 강화(마 24-25장, 막 13장, 눅 21:3-36, 17:22-37)
예수는 그의 감람산 강화에서 그의 재림에 대한 어떤 국면들에 대하여 제자들의 오해를 바로 잡아 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건과 및 그것과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부수적 사건들에 대한 가장 완전한 설명을 교회에게 주었다. 그런 까닭에 예수의 감람산 강화는 “예언적, 묵시적” 문학의 걸작이다. 예수의 이 예언적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의 상황적 배경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마 24:3에182 비추어 보면, 예수님이 성전 지역에서 가르치다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불신앙을 인하여 일곱가지의 “예언적 화”(심판)를 선포하고서 성전 지역을 떠나 감람산에 앉아 성전을 내려다 보고 계셨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참고, 막 13:3) 개인적으로 와서 질문을 하였는데,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예수의 재림과 이 세상 끝이 동시에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예수님이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려고 감람산에서 가르침을 주신 것이다. 그의 강화에서 예수님이 말씀하려고 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은 그들의 생전에 이루어질 것이지만(참고, 눅 21:20), 그의 재림과 세상 끝은 상당한 기간이 지난 후에 있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예수는 무화과 나무비유(마 24:32-34)애서 말하고 있는 대로 로마군대의 예루살렘 성전 포위 사건이 있으며 성전이 무너질 것으로 알라고 하셨으나, 곧 이어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마 24:36)고 말씀하신 것은 재림과 세상 끝은 먼 훗날에 있을 것을 지시한다.
예수의 종말론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세 문장으로 요약 될 수 있다.
1) 인간의 앞으로의 남은 역사는 두 단계, 곧 현재의 (악한) 세대와 다가올 세대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2) 이 두 세대는 연속적인 것으로서, 서로 중복되거나 둘 간에 간격이 전혀 없으며, 다가올 세대는 곧바로 현세대는 뒤 이은다.
3) 현세대를 마감하고 다가올 세대를 시작하는 획기적 대사건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 및 그것과 더불어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3. 야고보의 종말론
야고보의 종말론은 예수와 모든 사도들에 의하여 공통적으로 주장된 바, “이미” “시작된 종말론”과 “아직” 미래에 되어질 최종적 사건들의 종말론을 다같이 주창하는 묵시적 이원론이다. 그가 이미 시작된 종말론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 이미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그 중생한 자가 이미 하나님의 구속 받은 자녀(1:18)이며, 또한 교회가 여러 민족 가운데 확장되고 있는 것은 이미 예언된 바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행 15:13-17) 짖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 말들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야고보가 미래적 종말은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은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약 5:7-9)고 한 말과, 그 때에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으리라(2:5)고 한 말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요약하자면,
주님이 오시되 그는 “자유를 주는 최고의 법”을 가지고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5:9, 2:8, 12-13)183.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약속한 나라를 고대하여야 한다. 야고보는 그의 종말론을 통해서 성결생활을 위한 실제적인 자극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종말론의 아주 바른 용도이다(참고, 계 22:17). 그는 지상에서 미래에 있을 평화의 천년 통치시대와 이 시대 사이에 어떤 중간기가 있다는 것을 전혀 언급하거나 암시하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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