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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세속화와 세속주의 개념의 관점에서 본 기독교의 독특성

하나님아들 2017. 4. 15. 16:35

세속화와 세속주의 개념의 관점에서 본 기독교의 독특성
(The Uniqueness of Christianity in terms of secularization and secularism)
신학정론 제22권 1호 (2004년 5월)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그 괄목할 만한 성장으로 인하여, 그리고 지금은 타문화권 파송 선교사의 숫자라는 면에서 세계 3위라는 폭발적인 선교운동으로 인하여 세계 교회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 들어와서 한국교회의 성장이 정체되고 있으며 그 결과 한국교회의 선교운동도 내리막길을 갈지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학자들과 교회지도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그 주된 원인을 교회의 세속화에서 찾고 있다.

  한국교회의 성장을 보면 1960년대 이전과 이후가 그 요인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1960년대 이후의 교회성장은 한국의 경제개발 계획에 따른 급격한 산업화, 근대화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1) 즉 산업화는 급격한 이농현상과 도시화를 촉진했고 도시빈민의 발생을 가져왔는데 교회는 도시빈민들이 상실한 전통적인 마을공동체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에서 선포되는 번영의 메시지는 그들에게 희망을 줌으로써 교회성장의 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이 요인은 한계효용에 도달했고 역기능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경제 성장으로 인한 부의 획득은 세속화를 가속화하고 교회성장의 침체를 가져왔는데 이것은 서구적 의미의 세속화 뿐 아니라 한국 전통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 종교성과도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교회의 세속화는 어떤 양상과 본질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서구의 세속화와 어떤 차이점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가? 세속화라는 개념은 많은 논란을 일으켜왔으며 학자들 간에 어떤 정확한 개념적 합의도 도출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2) 그래서 사회학자들 중에는 세속화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을 포기하거나 이 개념을 사용하는 자가 명백히 자신이 어떤 의미로 이 개념을 사용하는지를 분명히 하고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3) 따라서 우리가 한국교회의 세속화를 논할 때에도 세속화의 개념을 성경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정의하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세속화의 본질을 왜곡되게 파악할 수가 있다.

  이 글은 먼저 서구적 개념의 세속화와 세속주의 배후에 있는 세계관을 살펴보면서 성경적 의미의 세속화나 세속주의와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보려고 한다. 그리고 타종교들에 대한 비교종교학적 분석을 통해서, 이러한 종교들이 어떤 면에서 세속적 종교성을 드러내며 기독교 세계관이 어떤 면에서 독특한지를 규명해보려고 한다. 그 과정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세속화가 근대적 세속화 뿐 아니라 전통적 종교들의 세속적 종교성의 토양 위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하는 것이다.  

  1. 서구의 사회학적 관점의 세속화와 세속주의 개념에 대한 비판적 고찰

  세속화의 개념에 논란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세속화의 개념이 종교라는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서구에서 종교라는 개념은 대개 기독교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어 왔으며 이방종교들은 기독교왕국(Christendom)의 통치 하에서 종교가 아닌 것으로 간주되어졌다. 기독교왕국 하에서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사적인 삶에서 뿐 아니라 국가와 사회, 학문의 공적인 영역에 이르기까지 적용되는 원리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서구에서의 세속주의, 세속화의 문제는 계몽주의 이후의 근대화(modernization) 혹은 근대성(modernity)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근대성의 특징 중에 하나는 합리성과 합리화라고 할 수 있다. 막스 베버(Max Weber)에게 있어서 근대성(modernity)은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견지에서 광범위한 합리화의 과정이 가져온 결과이며 근대화는 모든 영역에 합리성을 부여하는 과업이다. 4)
세속화는 이러한 삶의 영역들이 종교적 관장을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스티브 브루스(Steve Bruce)는 세속화가
(1) 교회의 대중적 연루(involvement)의 감소,
(2) 종교기관들의 영역과 영향력의 감소,
(3) 종교적 신념의 영향과 인기의 감소라는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다. 5)

세속화는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구분을 가져왔으며 종교는 사적인 영역의 기호로 상대화되었다. 6) 그 결과 학문과 신앙, 국가와 종교의 분리라는 세속주의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학적 견지에서의 세속화와 세속주의의 개념은 후기기독교왕국(Post-Christendom)의 현상이며 서구사회의 근대화라는 독특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다. 7)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세속화와 세속주의가 한국적 상황이나 혹은 비서구지역(2/3세계)에서 일어나는 세속화와는 성격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서구의 사회학적 관점의 세속화와 세속주의 개념은 그 자체가 17, 18세기의 서구의 지배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데 성경적 관점의 세속화의 의미를 변질시킴으로써 “세속화”라는 개념을 세속화시켰다고 하겠다. 폴 히버트(Paul Hiebert)의 아래 그림은 서구적 세속주의의 배후에 있는 플라톤의 이원적 세계관을 잘 나타내 보여준다.


서구의 세속주의는 초자연의 영역(종교)과 자연의 영역(과학)을 이분법으로 나누고, 자연은 초자연의 영역이 개입하지 않는 폐쇄적인 영역으로 간주된다.9)
서구적 관점의 세속주의에 있어서는 종교-초자연-타세상적 문제들(other-worldly problems)과 과학-자연-이세상적 문제들(this-worldly problems)은 확연히 이층적으로 구분되어진다. 그러므로 종교는 사적인 기호의 영역이고 과학은 학문적인 탐구의 영역이 된다. 이러한 이층적 세계관은 초자연적이면서 동시에 이세상적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는 중간영역을 배제하게 된다.10) 즉 서구의 세속화, 세속주의 개념은 “이세상적”(this-worldly) 가치에 집착하고 이세상에 궁극적 관심을 두는 것을 세속화로 간주하는 성경적 관점을 보지 못하게 하고 세속화와 세속주의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을 어렵게 할 수 있다. 즉 서구적 세속화, 세속주의 개념은 “종교의 세속화” 현상을 말하면서 “세속적 종교”가 처음부터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는 면이 있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일어나는 세속화는 근대화(modernization)와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보편적 현상과 연관되어 있기도 하겠지만 전통적인 “세속적 종교”들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즉 서구의 세속화는 후기기독교왕국(post-Christendom)의 현상인 반면에 한국의 세속화는 후기유교왕국(Post-Confuciandom)의 현상으로서 샤머니즘과 유교와 같은 현세지향적인 한국 전통종교들의 토양 위에 서구의 세속화가 덧붙여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2. 성경적 관점에 입각한 “세속화” 개념

  세속화(secularization)의 개념은 라틴어 “사이쿨룸”(saeculum)에서 온 것인데 이것은 히브리어의 “올람”(םꗚוֹע), 헬라어의 “아이온”(αἰών)을 번역한 것이다. 교회는 사이쿨룸의 개념을 “세상”(the world), “세상적임”(worldliness) 혹은 “이 세대의 영”(the spirit of age) 등과 같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므로 세속화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기독교 교회에게는 매우 명확한 것이었다.11)


  성경에 “세상”이라는 용어가 부정적으로 혹은 긍정적으로 언급되는 곳이 있다. 구약에서는 헬라어의 “코스모스”(κόσμος)에 해당하는 한 단어는 찾아보기 어렵다. 구약에서 “천지”는 헬라어로는 코스모스로 번역되어졌지만 그것은 부정적인 의미를 준다기보다는 단순히 물리적 우주에 가까운 말이다. 신약에서는 “세상”이 물리적 우주를 의미할 때에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동시에 “세상적”이라는 의미를 가질 때에는 부정적으로 사용된다. "이 세대"라는 용어도 “세상적임”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 구약에서 “도르”(רוֹדּ)는 세대를 나타내는데 그 자체로서는 중립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종종 이 개념은 악과 관련되어서 “악한 세대”라는 표현이 나타난다(창7:1, 민32:13, 신1:35, 렘2:31, 7:29). 신약에서 “게네아”(ϒενεά)는 구약의 도르와 거의 비슷한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마12:39, 12:45, 17:17, 23:36, 막8:12, 8:38, 눅9:41, 16:8, 17:25, 행2:40, 빌2:15, 히3:10).12)

  성경은 이 세상이 “세상적”이 된 경위를 보여주고 있다. 사단의 유혹에 인간이 넘어감으로써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롬5:12) “세상의 더러움”(벧후2:20)이 야기되어졌다. 사단은 “이 세상임금”(요12:31, 14:30, 16:11), “이 세상 신”(고후4:4)으로서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엡6:12)로서 이 세상에 역사하는 자가 되었다. 이 세상에서는 “세상의 염려”가 있으며(마4:19, 고전7:33) 있으며 사람들은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른다”(엡2:2). 사람들은 “세상과 벗이 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약4:4) 된다. 그러나 이 세상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끝이 있다(마24:3, 28:20). 성경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마12:32, 엡1:21) “이 세상”과 “저 세상”으로 (눅20:34-35) 표현되는 두 가지 “아이온” 혹은 “코스모스”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더 이상 속하지(ἐκ) 않았음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18:36). 예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제자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다(요17:16). 기독교인들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오히려 “세상에서 택함을 입”었기 때문에 세상의 미움을 받는다(요15:19, 17:4).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세상 안에(ἐυ) 있으며(요17:11) 나아가서 세상으로(εἰꐠ) 보내어진 자이다(요17:18).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사랑하거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요일2:15-16).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하며(롬12:2) 오히려 이 세상을 판단하는 자이다(고전6:2).

  하나님의 관심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3:16)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구원받게 하려 하심이다”(요3:17). 그리스도께서는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갈1:4).

  성경적 관점에서 본다면 세속화는 인간의 타락 사건과 함께 일어난 것으로서 “이세상 풍속을 좇”는(엡2:2) 것이다. 즉 세속화는 이세상적(this-worldly)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며 이세상에 궁극적 관심을 두고 이세상적 방식을 따는 것이다. 세속주의는 “세상의 초등 학문”(골2:8, 20, 갈4:3)에 나타나는바 이세상적 가치와 이세상적 관심과 이세상적 방식을 추구하는 세계관들이다.

  이처럼 성경적 관점에서 세속화의 개념을 규정한다면 세속화의 개념은 결코 현대화된 사회에만 나타나는 고유의 현상이라고 할 수 없다. 서구적 사회학적 관점에서의 세속화와는 달리 성경적 의미의 세속화는 종교의 퇴조현상을 수반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오히려 세속적 종교성은 더욱 번창할 수도 있다. 세속적 종교의 대표적인 실례들이 바로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가나안의 이방 종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세속적 종교들은 초자연적이지만 동시에 이세상적 가치들을 추구하는 종교성을 드러낸다. 신명기 8장에서 나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의 훈련 내용은 생존과 번영을 위한 노동과 그에 기초한 세속적 종교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극복하는 반세속화, 반세속주의 훈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적 관점을 토대로 세속화와 세속주의를 정의하자면, 세속화가 세속적 관심, 가치, 방식을 추구하는 쪽으로 강화되는 사회현상인 반면 세속주의는 “이세상적 가치”에 기초하고 있는 철학, 이데올로기, 종교들이 반영하고 있는 세계관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속화는 모든 시대에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이지만 특별히 근대화(modernization)에 수반되어 나타나는 서구의 세속화 현상은 그 이전의 세속적 종교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세속화와 비교할 때 차이점을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사회학자들이 규정하는 서구의 세속화 현상은 “근대적 세속화"(modern secularization)13)
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적어도 서구에서 근대적 세속화 현상의 이전에 세속화가 전혀 없었다는 잘못된 인상을 제거할 수 있고 세속적 종교들에 의해서 야기되는 세속화를 간과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오웬 채드윅(Owen Chadwick)과 같은 학자는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종의 기원”을 근대적 세속화의 출발로 보고 있다.14)
이러한 주장은 세속화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다. 진화론 안에 함축되어 있는 진화와 진보의 관념은 연약하고 죄성을 가진 인간존재라는 성경적 사실에 반대하여 인간성과 인간의 능력에 대한 낙관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학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허물어뜨리는 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근대적 세속화”는 세속적 태도가 과학기슬의 발달과 근대화(modernization)의 흐름과 함께 사회체계, 학문, 문화 등의 영역에 확산되어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회학적 의미의 세속화는 종교적 영향력의 감퇴라는 사회적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15)
크레이크 개이(Craig Gay)는 세속화를 “종교적 관념, 가치들, 그리고 기관들이 공적인 영역에서 지위와 영향력을 잃고 궁극적으로는 현대 사회에서 그 타당성을 상실하는 과정”으로 정의하고 있다.16) 그러나 비록 근대적 세속화의 현상이 종교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것이 사실이지만 세속적 종교들에 나타나는 세속화와 명백히 공통되는 점은 이세상적(this-worldly) 관심, 가치, 방식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세속화는 자신의 삶에서 이세상적 가치와 방식을 증대시켜나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사회적 차원에서 이세상적 가치의 추구를 구조화하는데 종교적인 방식을 사용하면 세속적 종교로 나타날 것이고 무신론적으로 가면 서구적 세속주의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이정석(J.S. Rhee) 교수도 세속화가 계속해서 있어왔던 보편적 현상이며 이러한 장구한 세속화의 과정에서 절정으로 나타난 것이 소위 오늘날 “세속화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근대적 세속화는 과거의 세속화에 비해서 더욱 조직적이고 지배적인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17)


  오늘날의 세계화(globalization) 현상을 고려해볼 때 비서구 지역에서의 세속화가 서구의 세속화 현상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여전히 비서구의 세속화는 전통적인 세속적 종교의 토양 위에 서구적 근대화와 세속화라는 거름이 뿌려져서 세속화를 가속화시키는 경향으로 나타난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의 세속화도 현세지향적인 샤머니즘과 유교의 토양 위에 근대화와 산업화에 동반되는 서구적 세속주의가 더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3. 세속적 종교성과 타종교들

  서구의 사회학자들은 세속주의를 설명하기 위해서 “초자연”이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세속주의는 초자연을 부정하는 것일 뿐 아니라 동시에 “이세상적”인 것을 의미해야 한다. 서구의 사회학자들이 이러한 관점으로 세속주의를 정의하게 된 것은 과학의 발달과 계몽주의 정신이 초자연적인 기적들을 배제한 것과 관련되어 있다.18)


  폴 히버트에 의하면 17, 18세기 이후로 서구인들은 종교와 과학의 영역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서 초자연과 타세상을 자연(경험)과 이세상을 동일시했다. 이러한 이층적 플라톤적 이원론을 수용한 것으로서 세계관은 중간영역을 배제하고 과학의 세속화와 종교의 신비주의화를 불러왔다.19)



위의 도표에서 폴 히버트는 초자연-타세상-종교, 자연-이세상-과학이라는 서구적 이분법적 도식이 항상 타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민속신앙(folk religion) 혹은 하등종교의 차원에서는 초자연적이면서 동시에 이세상적인 것이 가능하다. 즉 민속신앙은 세속적 종교성을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폴 히버트의 종교체계 분석틀은 공식종교(formal religion), 혹은 고등종교(high religion)라고 말할 수 있는 종교도 역시 세속적 종교성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렇다면 세속적 종교성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가? 세속적 종교성은 궁극적 관심, 가치, 실현방식이라는 면에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세속적 종교성은 궁극적 관심을 이세상에 두거나 이세상적 가치와 이세상적 방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세속주의를 정의함에 있어서 초자연적이냐 아니냐는 이세상적이냐 아니냐에 비해서 덜 결정적일 수 있다.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서구적 사회학적 의미의 세속주의와 성경적 관점의 세속주의를 종합한다면 세속주의는 ① 종교의 형태를 띠든 아니든 초자연을 배제하거나 혹은 ② 초자연을 수용하지만 세속적 종교성을 드러내는 세계관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초자연-자연, 타세상적-이세상적이라는 요소들에 입각해서 다음과 같이 종교들을 분류해볼 수 있을 것이다.
  
  (1) 초자연적-타세상적 종교성

  ① 정토불교

  대승불교의 정토신앙은 자력구원적인 소승불교와는 달리 타력의 도움을 구한다는 면에서 독특성을 가지고 있다. 정토신앙에서는 중생들은 아미타불의 원력(願力)의 도움을 받아서 이상적인 불국(佛國)인 서방정토극락(西方淨土極樂)에 태어난다.21)
정토불교에서는 구원이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타력에 힘입는다는 면에서 기독교의 구원론과 비슷한 면이 있다. 그러나 정토불교에서 정토(淨土)는 최종적인 귀착지라기 보다는 성불(成佛)을 위한 중간 기착지이다.22) 정토불교는 그 소망을 이세상(this-world), 즉 예토(穢土)에 두지 않고 정토(淨土)와 같은 타세상(other-world)에 두고 아미타불의 원력과 같은 초자연적 힘에 의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② 이슬람교

  이슬람교는 유대-기독교 계통의 유신론적 종교로서 초자연적인 존재들, 신, 천사, 사탄, 진(jinn) 등의 존재들을 인정하며 이들 초자연적 존재가 이세상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슬람은 알라에 대한 복종과 순종을 의미하며 신의 유일성을 의미하는 따우히드(Tawhead)가 이슬람 신앙의 중심이다. 알라가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시한 규범인 샤리아(Sharia)는 인간생활의 모든 영역을 주관하게 함으로써 이상적인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Umma)를 건설하는 것이 이 땅에서의 이슬람의 목표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슬람은 천국과 지옥과 같은 내세(next-worldly) 개념들을 가지고 있는데 선행과 악행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23)
이슬람은 이 세상에서 움마와 같은 타세상적 가치를 실현하려고 하며, 또 천국이라는 내세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

(2) 자연적-타세상적 종교성

  ① 샹카라의 베단타 철학

  샹카라의 베단타 철학은 우주의 궁극자인 브라만(Brahman)과 다양한 현상세계의 관계를 다루는 형이상학적 합리주의이며 브라만과 자아의 관계를 다루는 메타심리학적(meta-psychological) 합리주의이다.24)
불이론(不二論)적 베단타 철학은 브라만이 아트만(Atman)이라는 범아일여(梵我一如)으로 요약된다.25) 불이론적 베단타 철학의 궁극적 관심은 불교와 마찬가지로 고통의 문제이다. 대자아인 아트만은 환몽적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으며 경험적 자아인 지바(jiva)는 현상계의 다양성에 의해서 유혹되어지며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해탈(moksa)이란 곧 브라만만이 실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26)

  불이론적 베단타 철학에서는 존재론적으로 이세상을 떠난 다른 타세상은 실재하지 않는다. 타세상(other-world)은 인식의 전환에 의해서 도달되는 것이다. 불이론적 베단타 철학에서는 이 세상의 일에 소망을 두지는 않으며 비록 인식론적으로 기초되어 있기는 하지만 해탈의 경지라는 타세상적 가치를 추구한다. 그러나 불이론적 베단타철학에서는 초자연적 존재의 개입은 전제되지 않는다.

  ② 소승불교

  불교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고통의 문제에 있다. 석가모니의 궁극적 관심은 어떻게 고통을 이해하며 이것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27)
석가모니는 이세상적 일들로부터 벗어나서 깨달음 혹은 열반의 경지라고 하는 타세상적인(other-worldly)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소승불교는 기본적으로 합리주의적이며 초자연적 설명을 배제한다는 면에서 세속적이다. 석가모니는 세계의 유상(有常)-무상(無常), 유한(有限)-무한(無限), 정신과 육체의 관계, 여래의 사후에 유무(有無) 등의 질문에 대해서 침묵함으로써 형이상학적 논의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28)

  소승불교는 기본적으로 물리적 세계에 대한 관찰로부터 시작되었고 물리세계의 인과관계를 인간의 고통의 영역에 적용하려 하였다. 즉 불교의 연기설은 고통이 이 세계 안에서 어떤 사건이나 사물들의 인과관계에 의해서 발생하는지를 보여준다.29)
소승불교는 자력구원을 추구하는 인본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종교이다. 어떤 면에서 소승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요소를 드러내는 철학적 종교라고 할 수 있다.  

  ③ 종교적 휴머니즘 (religious humanism)

  도날드 메이어(Donald Meyer)에 의하면 종교적 휴머니스트들은 자연과학과 인간성, 그리고 우주적 경건(cosmic piety)의 태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진다. 그들에게 우주는 그 자체가 경외와 존경의 대상이 된다. 그들은 “우주적 감성”(cosmic emotion)이나 “우주적 의식”(cosmic consciousness)라는 개념을 거부하지 않으며 우주적 경건을 추구하는데 메이어는 이것을 세속적 초월(secular transcendence)이라고 부른다.30)
우주적 의식이나 우주적 경건은 힌두교의 베단타(Vedanta) 철학이나 노장철학에서 나타나는바 “자연주의적 경건”과 거의 달라 보이지 않는다.

  ④ 노장철학

  노장철학은 춘추전국이라는 난세에서 살아남는 처세술적 양생(養生)과 반문화주의적 절대 자유의 추구라는 면을 가지고 있다. 노장철학은 인위적인 것을 반대하며 무위(無爲)를 주장한다. 노장사상에서 인간의 문화를 인위적으로 보며 유가(儒家) 사상이야말로 세상적인 인위적 문화주의의 대표자로 간주된다.31)
노자와 장자의 궁극적 관심은 이세상적인 일들이 아니라 무위를 통해서 절대적 자유의 상태를 추구하는데 있다. 비록 이러한 상태가 존재론적으로 타세상은 아니지만 인식론적으로는 타세상이다. 이런 면에서 노장철학은 소승불교와 유사하다. 따라서 불교가 중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 불교는 노장사상의 관점에서 이해되었다.32) 노장철학은 기본적으로 자연주의이며 초자연적 힘이나 존재가 이러한 절대적 자유를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소승불교, 노장철학 등은 비록 초자연적 존재의 실재를 배제하지는 않지만 초자연적 존재나 힘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 이러한 종교들은 합리주의적이고 자연주의적이다. 이러한 종교들은 종교적 자연주의(religious naturalism)라고 할 수 있다. 자연주의는 합리적 설명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자연의 법칙과 같은 것을 모든 면에서 적용하려고 한다.33)


  (3) 자연적-이세상적 종교성

  ① 유교

  유교의 궁극적 관심은 이 세상에 있다.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귀신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질문했을 때 공자는 “아직 사람도 능히 섬기지 못하면서 어떻게 귀신을 섬기겠으며 아직 삶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죽음을 알겠는가”(논어, 제11편, 11) 라고 하면서 대답을 거부하였다. 또 논어에는 공자가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논어, 제7편 20)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공자가 비합리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논의를 배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의 말에 의하면 “공자로부터 본성과 천도(天道)에 대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논어, 제5편 12) 라고 하는데 이는 공자가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한 논의를 꺼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시유교는 국가의 통치에 궁극적 관심을 두는 정치철학이었다. 공자의 궁극적 목적은 이 세상에서 요순(堯舜) 때 이루어졌던 것과 같은 이상왕국을 성취하는데 있었으며 성인(聖人)과 철인(哲人)이 통치할 때 이상적 통치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원시유교의 목적은 수기(修己)와 치인(治人) 혹은 내성(內聖)과 외왕(外王)으로 표방되어졌다.

  유교는 초자연적 존재를 배제하지는 않지만 초자연적 존재나 힘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유교는 합리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이 세상의 일에 궁극적 관심을 두고 있다.

  ② 과학주의(Scientism)와 맑스주의(Marxism)

  과학주의와 맑스주의는 서구적 상황에서 자라난 세속주의라고 할 수 있다. 데이빗 마틴(David Martin)에 의하면 맑스주의와 과학주의 양자 모두가 신을 세속화한 시도이며 그 뿌리는 유대-기독교로부터 전치되어진 유토피아적 형이상학(utopian metaphysics) 이다. 맑스주의와 과학주의는 맑스주의적 메시아니즘(Marxist messianism)과 과학주의적 메시아니즘(Scientific messianism)을 주창하는 데 이른다.34)


  (4) 초자연적-이세상적 종교성

  이 범주에 속하는 샤머니즘과 애니미즘은 세속적 종교성을 가지고 있는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민속신앙은 샤머니즘과 애니미즘의 세계관을 그 핵심으로 포함하고 있다.


  4. 국가와 종교의 분리와 세속화

  종교 사회학적 견지에서는 종교적 중립을 전제하므로 기독교 뿐 아니라 타종교에서도 세속화 현상이 나타난다고 본다. 물론 초자연과 자연의 확연한 구분, 초자연의 배제, 종교의 영향력의 감소라는 서구적 사회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타종교와 기독교의 세속화 현상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적 의미에서 “세속화”의 개념을 정의했을 때 기독교의 세속화와 타종교의 세속화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

  공적인 영역에서의 종교의 퇴출은 필연적으로 국가와 종교의 분리라는 현상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국가와 종교의 분리는 세속화의 한 중요한 특징으로서 간주된다.35)
그리하여 타종교의 세속화의 예로서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제시되기도 한다. 물론 이슬람이나 힌두교 국가에 있는 정당들 중에는 근본주의에 반대하여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는 세속주의를 강령으로 채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국가와 종교의 분리 현상은 과연 타종교의 세속화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인가?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세속주의의 중요한 특색으로 파악하는 것은 이 또한 기독교왕국을 통과한 서구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세속화와 세속주의의 개념이 탄생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국가와 교회의 분리가 성경적 관점에서의 세속화의 기준으로 과연 적합한가는 재검토되어져야 한다. 오히려 콘스탄틴 대제 이후의 국가와 교회의 일치야말로 어떤 면에서 교회의 세속화였다고 볼 수 있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공적인 영역, 정치, 문화, 학문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정당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왕국화에서 시작되는 국가와 교회의 일치는 교회가 정치권력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성경적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며 (요18:36) 성경적 관점에서는 서구의 세속화의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세속화는 교황제의 확립을 통해서 구조화되었고 이세상적 방법, 즉 무력을 동원해서 기독교왕국화를 시도하는 십자군 전쟁과 같은 것으로 그 극치를 드러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회학적 의미에서의 서구의 세속화의 문제는 국가와 종교의 분리에 초점이 맞추어져서는 안 되며 엄밀히 말해서 종교가 공적인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사적인 영역의 기호의 문제로 전락되었다는 데에 강조점이 주어져야 한다. 사유화되었다는데 있다.

  한국의 유교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유교는 조선시대에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역할을 해왔다. 국가의 조직과 공공교육기관의 교육체제들이 유교적 이념에 입각해 있었으며 유교적 이념은 사회 전반에 걸쳐서 적용되고 있었다. 조선의 멸망은 국가와 유교를 분리시켰는데,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세속화로 규정한다면 조선의 멸망의 유교의 세속화를 가져왔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유교가 원래 정치철학에서 출발했고 이세상에서의 정치적 권력의 획득을 목표로 하는 종교, 즉 이세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종교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유교의 세속화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교는 원래부터 이세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세속적 이념이고 종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유교와 이세상적 정치권력을 추구하는 “세속화된 유대-기독교적 종말론”36)
으로서의 맑스주의와 유사성을 가진다.

  통일신라나 고려시대도 국가와 불교의 일치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왕들은 불교를 열렬히 신봉하여서 절들을 세우고 불교 행사들을 거행했으며 소위 호국불교는 국가와 왕실을 보호하는 것을 표방하였다. 이러한 국가와 불교의 유착은 중세 서구에서 로마카톨릭의 사제들이 그러했듯이 불교승려들의 부패를 가져왔다. 그러나 공식종교로서의 불교는 기본적으로 이세상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 불교는 국가의 통치에 대한 어떤 교리도 자체 내에 가지고 있지 않다.

  이슬람도 그 발생 처음부터 정치권력을 추구를 배제하지 않았다. 이슬람은 유교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국가와 종교의 일치를 추구하였다. 무함마드와 칼리프는 종교지도자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지도자였다. 이슬람지역에서 근대국가들이 형성되면서 국가와 이슬람의 분리가 나타났지만 기독교처럼 세속화라는 생각은 대두되지 않았다.37)
이슬람은 인간의 원죄를 인정하지 않으며 이세상적인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슬람에는 “세상적”이라는 개념이 없으며 이슬람 신학자들은 이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는다. 이슬람 신학자인 쿠르쉬드 아흐맏(Khurshid Ahmad)은 오히려 기독교를 금욕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기독교가 이세상에 대해서 부정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8)

  이슬람 근본주의는 국가와 종교의 일치를 주장한다는 면에서 사회학적 견지에서는 반세속주의로 간주되어지곤 한다. 말콤 워터스(Malcolm Waters)에 의하면 이슬람의 부흥은 서구적 근대화와 세속주의에 대한 반대이며 “이슬람화”(Islamization)에 대한 요구이다. 이슬람의 이 땅에서의 목표는 성직자 정치를 구현하는 움마(Umma)의 건설에 있다. 움마는 이상적인 이슬람 공동체로서 교육은 꾸란(Quran)에 기초해서 되어져야 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에서는 국가가 곧 움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39)

  이슬람이 비록 초자연적 존재의 개입을 인정하고 또 천국과 같은 타세상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이슬람화를 이루는 방법에 있어서 이세상적인 방법, 즉 정치적 권력의 추구, 폭력의 사용을 능동적으로 옹호한다는 면에서 세속적 종교라고 할 만하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슬람 근본주의는 서구에 의해서 주도되는 세계화(globalization)에 대한 지역화(particularization)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서구적 근대적 세속주의에서 그들 자신의 전통적 세속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열렬히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기독교왕국과 이슬람에서의 국가와 종교의 일치를 신정(神政) 정치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신정정치의 이념은 신약 이후의 시대에는 더 이상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

   5. "안에서"(in)와 “속하지”(of)의 관점에서 본 타종교들과 사상들

  종교를 이세상-타세상, 초자연-자연이라는 범주로 구분하는 것은 성경적 의미의 세속주의를 정의하는데 있어서 충분해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정토불교나 이슬람과 같은 종교들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초자연-타세상의 범주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성경은 “세상 안에서 살아감”(in the world)과 “세상에 속하지 않음”(not of the world) 라는 패러독스를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안에서(In)-속하지(Of)”의 축을 통해서 기독교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안에서”는 이세상을 변화시켜서 타세상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세상에서 적극적인 삶을 사는 태도를 의미한다. “속하지”는 이세상에 궁극적인 희망을 두거나, 이세상의 방식을 사용하거나, 이세상적 가치를 따르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기독교는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난 역사상의 오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종교의 측면에서 (1)의 범주에 속한다고 본다. 즉 성경은 기독교인들이 이세상에 속하지 않아야(not of the world) 하며, 따라서 이세상에 궁극적 관심을 두지도, 이세상적 가치를 추구하지도 않고 이세상적 방식을 사용하지도 않을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기독교는 타세상적 가치를 이세상에 실현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이세상 안에서(but in the world) 살아갈 것을 가르친다.

  서구의 세속주의는 이 세상에 궁극적 관심을 두고 이세상적 가치를 추구하며 이세상적 방식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2)의 범주에 들어간다. 유교는 이 세상에 궁극적 관심을 둔다. 유교가 비록 내성외왕(內聖外王)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이세상적 가치를 추구하지는 않지만 정치적 권력을 추구함으로써 타세상적 가치를 실현하려고 한다는 면에서 이세상적 방법을 사용한다고 볼 수 있다. 과학주의나 맑스주의는 이세상에 궁극적 관심을 두며 유토피아와 같은 타세상적 가치를 추구하지만 정치권력의 추구나 초자연의 배격과 같은 이세상적 방식을 드러낸다. 이슬람은 이세상에 궁극적 관심을 두지 않을 수도 있고 이세상적 가치를 추구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역시 정치적 권력의 추구나 폭력과 같은 이세상적 방식을 통해서 움마의 실현과 같은 타세상적 가치를 실현하려 한다.

  (3)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이세상적 관심과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무능함이나 무기력 때문에 사회적응에 실패하고 이세상에서 적극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들이다. 예를 들면 알콜중독에 빠져서 세상을 비관하고 자기인생을 한탄하는 도피주의자나 이세상에서 심한 상처를 받고 낙심하여서 대인기피증이 걸린 고립주의자가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하겠다.

  (4)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이세상에 궁극적 관심이 없고 또 이세상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이세상과 분리시키고 은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탈속적 은둔주의나 신비주의적 수행자들 중에서 발견되어진다. 그들은 이세상을 변화시켜서 자신들이 추구하는 타세상적 가치를 이세상 위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이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이세상이 아니라 자신의 의식이며, 인식주관이며, 자아이다.

  성경적 의미에서 세속화는 (1)의 범주에서 (2)의 범주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말아야 하는데 세상 안에 살기 때문에 이세상에 궁극적 관심을 두고, 이세상적 가치를 추구하며, 이세상적 방식대로 하게 되는 것이다. (1)에서 (4)로 가는 것은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복음을 증거하며 빛과 소금으로 적극적으로 타세상적 가치를 전파하는 것을 실패하고 자기도취적인 폐쇄적인 공동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6. “타세상적”에 관한 타종교들과 사상들의 관점

  우리는 여기서 “타세상적”(other-worldly)임에 대해서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타세상적이라고 할 때는 시간적인 차원에서 “내세적인”(next-worldly) 것 뿐 아니라 가치적인 면에서 “세상적이지 않음”(not this-worldly)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기독교의 타세상은 하나님이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이세상에서의 삶이 종결된 후에 가게 되는 장소라는 내세지향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성경에서 말하는 타세상으로서의 천국은 내세적인 면 외에도 심령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이며(눅17:20-21) 교회가 이세상 안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참가함으로 구현해야 할 천국이 있는 것이다. 즉 천국은 먼저 성도의 심령에 임하여서 이미 도래했고 이세상 안에서 교회를 통해서 확산되어지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하여 완성되어질 것이다.40)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의 타세상 개념은 마음과 사회변화와 내생이라는 세 가지 차원에 걸쳐있다고 할 수 있다.

  노장철학, 소승불교, 샹카라의 불이론적 베단타철학은 기본적으로 이세상을 변화시켜서 타세상을 이 땅위에 실현시킨다기보다는 자신의 인식주관을 변화시켜서 즉 마음을 변화시켜서 마음에 타세상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도나 열반과 같은 타세상적 상태는 이세상을 변화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전환을 필요로 한다. 장자에게서 절대자유를 획득하는 것은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는 것을 넘어섬으로서 가능하다. (장자, 제물론)

  정토불교는 왕생극락과 같은 내세를 추구하지만 이 세상을 변화시켜서 타세상화 하는데 관심이 모아져 있지는 않다. 정토불교의 어떤 종파는 정토가 내세에 어떤 다른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세상, 예토(穢土)에서 마음 속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마음을 바꾸면 정토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토불교의 사상에도 이세상을 적극적으로 바꾸어나가는 면은 부족하다.

  이슬람은 이세상 위에 타세상적 가치의 실현을 추구하는 면이 있다. 즉 따우히드, 알라의 유일성에 입각해서 모든 규범들이 실현되어지는 이상적 공동체인 움마를 건설하는 것을 추구한다. 동시에 이슬람은 내세적인 의미의 타세상의 관념도 가지고 있다. 이슬람에서 인식주관의 변화를 통해서 타세상을 실현한다고 하는 관념은 수피 이슬람 외에 정통적인 이슬람에서는 찾기가 어렵다.

  유교와 맑스주의는 본래 정치적 권력을 통해서 이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추구한다. 여기에는 내세에 대한 깊은 관심이 없다. 유교의 경우 철인(哲人), 성인(聖人) 정치를 위해서 인격의 수양을 요구하지만 마음의 수양이나 인식의 전환 그 자체가 타세상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목표가 되지는 않는다.

  결론

  서구의 사회학적 견지에서 세속화와 세속주의 개념은 서구에서의 독특한 역사적 과정과 상황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비서구 지역에서의 세속화를 설명하는데 충분하지가 않다. 성경적 관점에서 세속화는 보다 포괄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세속화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기독교는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균형을 유지하는 독특성을 드러내는 종교이다. 이것은 곧 기독교 영성의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기독교의 타세상은 마음과 사회와 내세에서 이루어지는 세 가지 차원에서의 균형을 요구한다. 기독교는 이세상에 궁극적인 관심을 두지 않으며 이세상적 가치를 추구하지도 않으며 이세상적 방식대로 하지도 않는다는 면에서 이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는 타세상적 가치를 타세상적 방식으로 마음과 사회에 실현하며 내세에서도 그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목표로 한다.

  1990년대 이후 한국 경제의 성장은 성공적이었지만 한국교회는 성장이 정체되는 고통을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샤머니즘이나 운명감정술 등 여러 가지 잡다한 세속적 종교성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한국에서는 지성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최고의 합리성과 함께 샤머니즘적인 행위들에 참가한다. 세속적 전통종교들의 토양 위에서 성장한 한국교회는 이러한 세속적 종교성에 의해서 영향을 받아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한국교회는 복음 전파에는 적극적이었으나 사회와 문화를 변화시키는데 있어서는 소극적이었다. 한국교회는 숫자적 성장과 샤머니즘적 기독교의 성향을 교정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되돌아볼 시점에 있다.41)


  한국과 같이 세속적 종교성이 강한 전통종교의 토양을 가진 지역의 교회들은 어떻게 세속적 종교성을 성경적으로 전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물론 세계화의 시대에 근대적 세속주의의 흐름을 어떻게 차단할 것인가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각주)
1)  John T. Kim, Protestant Church Growth in Korea(Belleville, ON, Canada: Essence Publishing, 1996), p.122.
2)  Craig M. Gay, The Way of the (Modern) World: Or, Why It's Tempting to Live As If God Doesn't Exist(Grand Rapid: Wm. B. Eerdmans, 1998), p.18.
3)  Jung S. Rhee, Secularization and Sanctification: A Study of Karl Barth's Doctrine of Sanctification and Its Contextual Application to the Korean Church. Dr.theol. Dissertation(Amsterdam: Free University Press, 1995), p.3.
4)  Bryan S. Turner, Orientalism, Postmodernism, and Globalism(London: Routledge, 1994), p.79.
5)  Steve Bruce, Religion in the Modern World from cathedrals to cults(Oxford: Oxford Univ. Press, 1996), p.26.
6)  Peter Berger, A Far Glory: The Quest for Faith in an Age of Credulity(New York: Anchor Books, 1992), p.67.
7) Peter Beyer, Religion and Globalization(Thousand Oaks, CA: Sage, 1994), pp.70-72.
8) Paul Hiebert, 위의 책, p.260.
9) Gailyn Van Rheenen, Communicating Christ in Animistic Contexts(Grand Rapids: Baker, 1991), p.96.
10) Paul Hiebert, 『인류학적 접근을 통한 선교현장의 문화이해』, 김영동, 안영권 옮김(서울:죠이선교회출판부, 1997), pp.259-262.  
11)  Jung S. Rhee, 위의 책, pp.7-8
12)  Rhee, 위의 책, p.8.
13)  Rhee, 위의 책, p.11.
14)  Owen Chadwick, 위의 책, p.18.
15)  Owen Chadwick, The Secularization of the European Mind in the Nineteenth Centu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5), p.17.
16)  Craig M. Gay, The Way of the (Modern) World: Or, Why It's Tempting to Live As If God Doesn't Exist(Grand Rapid: Wm. B. Eerdmans, 1998), p.19.
17)  Rhee, 위의 책, p.11.
18)  Owen Chadwick, 위의 책, pp.161-188.
19)  Paul Hiebert, 위의 책, pp.259-260.
20)  Paul Hiebert, 위의 책, p.256.
21)  Kenneth Ch'en, Buddhism in China(Princeton: Princeton Univ. Press, 1964), p.339.
22)  동국대학교 교양교재 편찬위원회 편, 『불교학개론』(서울:동국대학교출판부, 1984), p.284.
23)  Khurshid Ahmad, “이슬람: 기본원리와 특성,” 위의 책, 『이슬람: 그 의의와 메시지』, Khurshid Ahmad 엮음, 이석훈 옮김(서울: 우리터, 1993), 29-38쪽.
24)  Eliot Deutsch, and J.A.B. Van Buitenen, A Source Book of Advaita Vedanta(Honolulu: The Univ. Press of Hawaii, 1971), pp.72-76.
25)  Deutsch, 위의 책, p.74.
26)  Deutsch, 위의 책, p.176.
27)  John M. Koller, Oriental Philosophies(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70), p.120-123.
28)  불교학개론, pp.76-77.
29)  Koller, 위의 책, p.127.
30)  Donald H. Meyer, "Secular transcendence: the American religious humanists," American Quarterly 34 No.5(1982):524-542. 물론 여기서 메이어가 말하는 "secular"의 의미는 서구적 사회학의 세속주의 개념을 따르는 것으로, 우주에 대한 초자연적 영역의 간섭 배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또 “transcendence"는 ”경건“(piety)과 같은 초월적 가치를 지향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하겠다.
31)  Wing-Tsit Chan, A Source Book in Chinese Philosophy(Princeton: Princeton Univ. Press, 1963), p.136.
32)  Ch'en, 위의 책, pp.48-53
33)  Donald Meyer, 위의 책, p.529.
34)  David Martin, The Religious and the Secular(New York: Schocken Books, 1969), p.35.
35)  Steve Bruce, 위의 책, pp.152-162.
36)  Larry Shiner, The Secularization of History: An Introduction to the Theology of Friedrich Gogarten(Nashville: Abingdon Press, 1966), p.26.
37)  Henry Corbin, 『이슬람철학사』, 김정위 옮김(서울: 대광문화사, 1986), p.6.
38)  Khurshid Ahmad, “이슬람: 기본원리와 특성,” 위의 책, 39-41쪽.
39)  Malcolm Waters, Globalization(London: Routledge, 1995), pp.127-132.
40)  홍창표, 『하나님 나라와 종말론』(서울:도서출판하나, 1993), 219-256쪽.
41)  Bong-Ho Son, "Some Dangers of Rapid Growth," Korean Church Explosion(Seoul: Word of Life Press, 1983), p.341.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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