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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성(靈性)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아들 2016. 9. 8. 11:20

영성(靈性)이란 무엇인가?


영성(靈性)이란 무엇인가? (I)

기독교 영성의 올바른 정의를 향하여
김 흥 규 <목사,텍사스 성루가연합감리교회>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불교 수필가로 유명한 법정(法頂) 스님에서부터 단군사상 복원운동을 벌이는 김지하와 노동자 시인 박노해, 이름없는 수많은 환경운동가들에게 이르기까지 '영성'은 어느새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대중적인 담론 가운데 하나가 되어버렸다.
물론 웬만한 기독교 지식인들 역시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할 때 너나 할 것 없이 마치 '영성'이 기독교의 전매특허나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개중에 어떤 이들은 '성령운동'을 '영성운동'과 똑같은 것으로 당연시하기 조차한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전자가 후자의 한 부분에 속할 뿐 등식화될 수 없다.) 어거스틴이 일찍이 누가 시간이 무엇인지 묻기 전에 자신은 시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막상 시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모른다고 말했던 것처럼 '영성'이라는 용어 역시 조직적인 모호성(systematic ambiguities)에 시달리고 있다.
필자는 앞으로 두 차례에 걸쳐서 먼저 '기독교 영성' 개념의 교회사적 전개 과정을 매우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그 다음에 정의를 내려보고자 한다.
우선 영성(spirituality)이 육성(carnality)에 반하여 비물질적인 의미로 쓰여질 경우 매우 광범위한 개념이 될 수 있다. 즉 물질문명의 횡포에 크게 실망하고 육욕의 한계에 직면한 인간이 자기 내면 세계로 깊이 침잠해서 자기초월과 자기해방을 시도할 때 영성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광의에 있어서 기독교 영성, 불교 영성, 이슬람 영성, 힌두 영성, 심지어 무신론적 영성까지 다양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우리는 영성 일반이 아닌 기독교 영성에 관심을 국한시키고자 한다.
영어 'spirituality'는 라틴어 'spir-itualitas'에서 파생되었다. 그런데 이 'spiritualitas'와 동계어인 명사 'spiritus'와 형용사 'spiritualis'라는 말들은 모두 '영,' '숨' 혹은 '바람'등을 뜻하는 희랍어 'pneuma'와 히브리어 'ruach'와 관계되어있다. (더 정확히 말해서 'spiritus'는 희랍어 'pneuma'를, 'spiritualis'는 'pneu-matikos'를 번역한 말들이다.)
그러므로 그 기본적인 의미에 있어서 영성은 사람에게 호흡과 생명과 바람을 가져다주는 체험 혹은 삶의 양식과 연관되어있을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형용사 'spiritual'(영적인)은 일종의 기독교 신조어(新造語)로써 바울 서신에 나타난 하나님의 거룩한 영의 지배를 받는 삶, 즉 pneumatikos를 영역한 것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 14; 그 밖에 갈 3: 3, 5: 13, 5: 16-25; 고전 3: 1-3; 롬 7-8장을 참조하라).
바울에게서 '영적인 것'은 영혼과 육의 이원적 대립개념에서 파악되는 바 비물질적이고 비육신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정반대적 삶의 양식, 즉 육체를 따라 사는 삶과 성령을 따라 사는 생활을 설명하기 위한 것뿐이다. 영적인 사람은 육적인 사람과는 달리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인 것이다.
이와 같은 바울의 윤리적 영성 개념, 즉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사는 거룩한 삶'의 의미가 후기 저자에게 비로소 등장한 것은 5세기 초반에 한 익명의 저자가 수신자가 "영성에 있어서 진보를 나타내도록 행동하라"(So act as to advance in spirituality)고 권면한 편지에서였다고 한다. 어쨌거나 바울에게서 시작된 영성 개념은 교회사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육체와 물질세계를 비하하는 풍조와 더불어 금욕주의적 범주안에서 점차 폭넓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부시대로부터 적어도 11세기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영성 개념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라는 바울적 이해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기독교 영성 개념이 결정적으로 변환된 시점은 11세기 중반, 이성과 계시, 자연과 은총,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어거스틴의 신학적 예지를 종합하려고 했던 스콜라주의가 대두되면서 부터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집대성된 스콜라 신학의 영향으로 기독교 영성은 더 이상 바울적인 '성령을 따라 사는 도덕적 삶'이라기보다 물질적/육체적인 세계로부터 극명하게 대립되는 비물질적/비육체적 영역으로서 형이상학적으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참고로 아퀴나스의 전 저술물에는 'spiritualitas'라는 용어가 약 70 여회, 'spiritualis'는 약 5천 여회 출현된다고 한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대, 그리고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는 동안 기독교 영성은 인간의 내적인 세계, 즉 거룩한 기질과 헌신을 추구하는 경건주의적 측면에서 주로 이해되었다. (일례로, 기독자의 겸손과 거룩한 기질을 강조한 토마스 아켐피스의 Imitatio Christi를 들 수 있다.)
특히 18세기와 19세기에 사이에 수많은 영성운동가들이 '기독자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에 도달하려고 애씀으로서 중세시대에 크게 융성했던 '수덕 신학'(ascetical theology), 혹은 '신비 신학'(mystical theology) 을 포괄하고 보다 실천신학적으로 체계화시킨 경건주의 신학(pietist theology) 혹은 영성 신학(spiritual theology)으로 발전시키게 되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영성이 단지 인간의 '영적 체험의 차원'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 체험과 관련된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연구하는 하나의 '학문적 분과'로도 이해되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 영어권에서 '영성'이라는 말이 크게 부흥하게 된 것은 불어인 'spiritualite'를 영역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영어권에서 'spirituality'라는 표제가 처음 사용된 시점은 1922년 피에르 포레츠(Pierre Pourrats)의 저서 Christian Spiritua-lity가 출판되고서 부터라고 한다. 그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개신교에서는 은사운동을 하는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이 '영성'이라는 용어를 간헐적으로 사용했지만 주로 카톨릭적인 용어로 뚜렷이 자리잡게 되었다.
개신교에서 '영성'이라는 용어에 어떤 두려움이나 심지어 혐오감까지 느끼게 된 것은 카톨릭적인 잔재인 인간의 공적주의 혹은 자기의에 대한 강한 저항감 때문이었으며 때마침 불어닥친 사회 복음주의(social gospel) 운동은 '영성'이 개인주의적 색채가 짙다는 사실에서 백안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개신교 주류교회들은 융 심리학이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자기 성취'라는 미국적 신화가 각광을 받게 되자 영성 훈련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특히 제도화되고 관료화된 교회구조가 많은 신자들로부터 환멸을 불러일으키자 내적 갱신운동의 일환으로서 영성 개발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1950년대 이후 '영성'이라는 용어가 '영적 생활,' '영적 가르침,' '내적인 삶,' 혹은 '경건성' 등의 재래 용어보다 훨씬 더 자주 사용되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이다


영성(靈性)이란 무엇인가? (II)
지난 호에 우리는 기독교 영성의 역사적 용법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았다. 교회사가 전개되는 과정 속에서 영성(靈性)은 육성(肉性)에 대립되는 개념 그 이상의 포괄적 의미로 매우 다양하게 쓰여졌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삶과 대조되는 '영을 따라는 사는 삶'으로 파악된 바울적 영성 개념을 비롯하여, 초월적이며 이지적인 피조물로서의 인간이해를 대변하는 형이상학적 용어로, 신비적 신인합일의 체험, 헌신, 경건, 기독자의 완전 등을 의미하는 신비-윤리적 개념 등으로 다각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영성은 무엇인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영성 개념이 비록 기독교적 뿌리를 갖고 있다고 해도 기독교만이 이 용어를 독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현대 물질문명의 횡포에 크게 실망한 현대인들이 너나 없이 영성을 추구한다고 말할 때 기독교 영성은 불교 영성, 힌두 영성, 이슬람 영성, 등의 타종교 영성과 더불어 종교적 영성의 한 가지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실을 전제하면서 필자는 Kenneth Collins가 구분하고 있는 영성의 세 가지 차원을 소개한 뒤 이 기반위에서 필자 자신의 기독교 영성 개념 정의를 도출해내고자 한다.
Collins는 Sandra Schneiders가 현대적 영성 개념을 1)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차원(dimension)으로서의 영성," 2) "이러한 차원을 현실화시키는 실천 경험(experience)으로서의 영성," 그리고 3) "이러한 영적 체험을 연구하는 학문적 분과(discipline)로서의 영성"으로 대별하고 있는 것에 기초해서 자신의 정의를 더욱 세분화시킨다. 먼저 인간 실존의 가장 기본적인 차원으로서의 영성은 유신론자나 무신론자를 막론하고 인간이 그 본질에 있어서 자기를 초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초월자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영적 존재, 즉 homo spiritualis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둘째로, 삶의 경험으로서의 영성은 가지가지의 영적 체험으로 잘 설명될 수 있는데 Collins는 크게 세 가지 범주의 체험 영성을 지적한다. 먼저 '자연주의적 영성'(naturalistic spirituality)은 인간의 비유신론적 초월 경험을 일컫는다. 즉 어떤 신체험이나 종교적 회심과 상관없이 인생의 본성이나 목적에 대한 특별한 신념--예컨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에 따라 살게 되는 바 개인이나 공동체의 삶의 스타일로 설명될 수 있는 영성 체험이다.
그 다음에 '일원론적 영성'(monistic spirituality)은 주객(主客) 분열이 해소되는 신비-초월적 합일의 체험을 지칭한다. 예컨대 힌두교의 "Atman(大我 혹은 宇宙我)이 곧 Brahman(梵, 우주의 최고원리)과 하나"라는 주장, 불교에서 말하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실상을 깨닫고 '절대무'(絶對無)의 경지에 도달하는 체험, 혹은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의 신인합일의 체험 등이 모두 이 유형의 영성에 속한다. 중요한 것은 Collins가 이와 같이 독특한 유형의 영성을 구분하는 것은 "모든 신비주의가 영성적이지만 모든 영성이 곧 신비주의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명제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마지막으로 '유신론적 영성'(theistic spirituality)은 기독교나 유대교, 이슬람교 등과 같은 유일신론적 종교 등에서 초월자를 하나의 살아있는 인격신으로 체험하는 형태를 말한다.
세 번째로, 현대적 영성 개념에서 간과할 수 없는 하나의 두드러진 현상은 영성이 단지 인간 실존의 영적 차원이나 실제적 영성 체험을 지칭할 뿐 아니라 이에 대한 학문적 논구로서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20세기초에 생겨난 '영성 신학'(spiritual theology)은 기독자의 완전을 그 목표로 하는 바 교의학의 한 분과로서 이해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의 바티칸 제 2공의회 이후 '영성 신학'은 '영성'이라는 전혀 새로운 학문적 성격을 가지는 신학적 분과로 변형되었다. 즉 당초의 '영성 신학'과는 달리 이제 새로운 신학분과로서의 '영성'은 더 이상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적 전유물이 아닌, 비교조적이고 비규범적인 성격의 독립 분과로서 '기독자의 완전'과 같은 실천 윤리에도 천착하지 않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일체의 영성 체험을 이성과 경험에 기초한 과학적 객관성의 잣대에 의하여 해명되어야 할 엄격한 학술적 대상으로 만들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적어도 현대 서구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영성은 크게 1) 생득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영적 구조, 2) 이와 같은 영적 구조의 현실 체험, 그리고 3) 인간의 영성 일반에 대한 신학적 연구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기독교 영성을 도대체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지금까지의 개념 정의로 보건대 기독교 영성은 두 번째와 세 번째와 관련해서 보다 정확히 정의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절대자에게 자기를 개방하거나 자기를 초월할 수 있는 본유적 인간 조건으로서의 영성은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인간의 기본적 영적 차원이 신학적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Karl Rahner와 같은 신학자에게 이와 같은 인간학적 조건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된다.)
그렇다면 Collins의 두 번째 영성 범주 중에 기독교 영성은 일원론적 영성이나 혹은 유신론적 영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Meister Eckhart의 '영혼속에서의 신의 탄생'과 같은 신비체험은 일원론적 영성 유형에 속하며 여타의 모든 기독교 영성 체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인격신 하나님의 체험과 관련되어 있다 하겠다. 그리고 기독교 영성이 하나의 영성신학으로서 모든 시대, 모든 상황 속에서의 기독교인의 영적 체험에 대한 학문적 연구로 이해될 경우 독특한 학파나 전통에 따라 바울 영성신학, 요한 영성신학, 베네딕트 영성신학, 도미니칸 영성신학, 제수이트 영성신학, 루터 영성신학, 칼빈 영성신학, 웨슬리 영성신학등으로 세밀하게 분리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현대 영성신학자들은 바로 이 세 번째의 학술적 개념으로 '영성'을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 영성이 이와 같은 차원들을 다 포함하는 매우 다의적 개념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올바른 기독교 영성 이해를 위하여 어떤 실무적인 차원에서 정의를 내리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결론으로, 비록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필자는 여러 자료들을 읽고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싶다. "기독교 신앙의 살아진 경험으로서의 기독교 영성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예배나 명상, 독거, 기도, 노동, 자선, 등등의 훈련을 통하여 체험함으로서 진정한 기독자의 실존을 추구하는 것이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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