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두멍으로 나아가는 본을 보이는 영성 사역자
기독교 영성신학 연구원
과 목 명 : 근현대의 영성 담당교수 : 문 석 호 님
학 과 명 : 신학연구과 2학년 제 출 자 : 이 성 범
“오늘의 바른 영성, 어떻게 세워 나갈 것인가?”
물두멍으로 나아가는 본을 보이는 영성 사역자
본문) 요한복음 13:1~17
예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광원(귀일원)의 설립자인 이현필 선생은 평생을 금욕으로 고행을 하며 채식주의자로 지냈습니다. 이현필은 식사생활에 있어서 일식주의자였고 철저한 채식주의자였습니다. 하루 한 끼만 식사를 했는데 꼭 저녁에만 했으며 주로 금식으로 지내는 때도 많았습니다. 또한 그는 많은 신비적인 체험에 대해서는 일체 침묵하였고, 꿈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성경을 가르쳤으며 하루 종일 하는 대화가 그대로 설교였다고 전해집니다. 간혹 아픔 때문에 선생의 기도를 받고자 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신이 아니오”하며 거절했다고 하는일화가 있습니다.
이현필 선생은 말년에 후두결핵으로 고생하였는데, 생을 마감하기 전에 뜻하는 바가 있어 제자들에게 고깃국이 먹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평생 채식주의자였으며, 자신들에게도 채식주의를 가르친 스승의 말에 놀랐습니다. 하지만 임종이 가까운지라 말씀대로 생선국을 끓여 들였더니 겨우 두 숟갈을 넘겼다고 합니다. 이것이 유명한 “이현필의 파계” 사건입니다.
이현필은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이 스승이 걸어 왔던 삶을 율법적으로 따르지나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스승의 삶의 모습으로 인하여 제자들이 고행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잘못된 교훈으로 흐르는 경향을 감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멸시하는 결과가 될까 두려워 말년에 일부러 파계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는 제자들에게 선행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행동의 고백으로 가르쳤습니다. 결론적으로 이현필의 삶은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에게 원하시는 거룩을 향한 삶이었습니다.
본문)
1.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 곳 - 성소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원하시는 거룩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앞에 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행동으로 보여주신 말씀이며, 공생애 기간 중 사역하셨던 모든 내용들의 핵심이 여기에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제자들이 앞으로 어떠한 자세로 사역을 행해야 되는지를, 본을 보이는 행동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1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그러면 이 본은 무엇을 향한 본입니까? 물론 죄를 씻는 성결을 향한 본입니다. 거룩이라는 구별됨을 향한 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손과 머리까지 씻겨 달라는 베드로의 요구에 이렇게 답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10절) 이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눈앞에 언뜻 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먼 옛날 미디안 광야의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가 하나님을 뵈올 때의 장면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거기서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곳에 세상의 죄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 거룩한 곳이 어디입니까? 네, 바로 성소입니다. 그런데 성소 바로 앞에는 성소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 바로 물두멍이 있습니다. 이 물두멍은 번제단과 성소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왜 이 물두멍이 가운데에 놓여 있어야 합니까? 그 이유는 구원의 번제단을 거쳤지만 제사장의 손은 제물의 피로 더러워졌고, 광야의 흙바닥을 밟고 있는 발도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발은 항상 땅을 밟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더러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에게 있어서 이 물두멍은 너무나 필요한 것입니다.
2. 인간의 한계로서의 성화
바로 이것이 사도행전 이후 로마서로부터 시작되는 성화의 과정인 것입니다. 이 성화의 과정을 예수께서는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서 제자들에게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의 발을 씻기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본문의 3절부터 10절 사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발을 씻겨 주신 것은 이해가 가지만, 우리가 서로 발을 씻긴다는 것은 언뜻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의 죄를 씻어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바로 중보자적인 거룩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대로 말하자면 선생으로서 “본을 보이는” 삶인 것입니다. 이 선생으로서 본을 보이는 거룩한, 구별된 삶의 모습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스스로 회개케 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시청각으로 보여 주신 것이 바로 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구별된 삶의 본 된 모습이 바로 서로의 발을 씻겨 주는 열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본을 그토록 갈망하던 많은 영성가들이 기독교사에 위치하여 지금까지도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은 영성의 길을 가는 신학도로서는 가슴 뿌듯한 일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본을 보이는 모습이 결코 율법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서두의 예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날마다 거룩을 향하여 나아갔던 이현필의 영성적 삶의 모습조차도 제자들에게는 행위로 비쳤던 것입니다. 스승은 그것이 아니라고 그토록 강조하며 처절한 거룩에의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직접 체화하지 못한 주위의 사람들은 행위라는 표면적 모습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얘기입니까? 그것을 주님은 16절과 17절에서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즉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거룩을 추구하는 영성적인 삶을 살아야 하겠지만, 주와 선생이신 예수님과는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한계를 정확히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한없는 위로를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모르고 끝없이 그리스도와 같게 되려는 욕망 속에서 질주하다가 교만 혹은 좌절로 인해 스스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현필은 바로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파계를 결정했던 것입니다. 결코 종은 상전보다 크지 못합니다. 비록 우리가 영성 사역의 지도자로 나서게 될 것이지만, 우리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보다 앞서 갈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영성생활의 근본이지만, 우리는 그와 같게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역의 현장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범하는 실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았다고 자부하는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착각에 빠진 자는 결코 발을 씻으려 하지 않습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거룩 혹은 경건을 경시하며 율법적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역자들이 번제단에서 바로 성소로 뛰어 들어가 버리고 마는 모습을 우리는 지금도 수없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3. 레위기는 영성훈련의 텍스트
날마다 거룩을 추구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결법이라는 문자에 얽매여 있었던 모습은 참으로 답답하기도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들의 문자는 버리고 그 안에 담겨있는 영성적인 모습들을 재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성경의 문화는 거룩을, 즉 구별된 깨끗함을, 추구하는 문화입니다. 이 거룩한 문화는 시내산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이후로 이스라엘의 절대적인 문화가 되었습니다. 그 구체적인 조항들이 바로 레위기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레위기는 세상에 있는 것들을 3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것, 깨끗한 것(정한 것), 더러운 것(부정한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이 세 가지 범주에서 벗어나질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러워진 것들은 버려야 했으며, 아니면 깨끗하게 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기는 율법의 책일 뿐만 아니라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답게 하는 영성훈련의 텍스트인 것입니다. 그 영성의 훈련과정을 세밀하게 제시하는 책이 바로 레위기인 것입니다. 이 거룩의 과정을 한글개역성경은 정결례 혹은 정결의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바로 이 거룩을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영성적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려면 먹는 것, 입는 것은 물론 모든 생활방식이 거룩해야 하는 것이 구약시대 그리고 예수님 시대까지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아니 지금 이 시간에도 이스라엘은 이 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거룩하고자 하는 열망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충만합니다. 그래서 그 어려운 법들을 문자적으로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의문에 얽매이지 않는 영적 성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미 목욕한 자는 온몸이 깨끗하다고 하십니다. 단지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십니다. 이 얼마나 은혜의 말씀입니까? 그런데 오늘의 우리는 발을 씻지 않으려고 합니다. 구원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으니, 능력이 나타나 사람들의 병을 고쳤으니 주님은 항상 나와 동행하신다고 하는 “따놓은 당상적” 신앙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물두멍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까? 우리의 죄를 물두멍의 물에 비춰 보아야 할 필요가 없습니까? 날마다 우리의 죄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 율법적입니까?
오늘의 우리는 보혈의 은혜에 감격하기는 하지만, 번제단에 머물러서 물두멍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바로 성소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물두멍은 이제 번영과 축복의 신학에 밀려서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성막의 바닥은 여전히 광야의 거칠고 메마른 흙입니다. 이런 것들을 정결하게 씻어내는 곳이 바로 물두멍입니다. 이것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곳입니다. 이 물두멍을 거친 자들이 찢어진 휘장이 있는 성소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찢어진 휘장은 바로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바로 지성소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히브리 사람들은 의문에 얽매여서 거쳤지만, 은혜 시대의 우리는 영성훈련으로 거치는 것입니다. 이 거룩하게 되는 지성소에의 과정은 성도에게 있어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 지성소로 들어가는 최후의 순간에 예수께서는 이 본문의 행동을 취하신 것입니다. 이 장면을 15절에 의거해서 겸손의 모범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물론 겸손이 사역자들의 중요한 덕목이기는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그 겸손의 본을 보이는 그렇게 만만한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을 하면 앞절들과의 문맥에도 맞지 않습니다. 이 순간이야말로 죽음을 앞 둔 절대절명의 순간이니까요. 그래서 예수께서는 1절의 말씀처럼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의미에서 이 정결의 예식을 취하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핵심 부분을 말씀하셔야 할 마지막 때가 온 것입니다.
5. 결 론
그리고 제자들은 그러한 모습으로 주님의 일을 해야 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바로 그것은 모세오경의 순서대로 이어지는 구속사의 진정한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선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그 구원한 백성들을 거룩의 길로 인도하셔서 드디어는 가나안 천국으로 들여보내시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이제 제자들에 의해 펼쳐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시내산에서부터 계획된 거룩의 길이었으며, 바울로부터 해석되어 아피아 가도를 통해서 세계에로 펼쳐진 성화의 길인 것입니다.
영성신학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졸업을 약 4개월 남겨 놓고 있습니다. 졸업은 또 하나의 시작이란 말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이 졸업이 마지막이라는 절박한 심정이 있어야 할 줄로 압니다. 영성훈련과 영성신학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바로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지식으로만 그친다면 이것이야말로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지도자로서 우리는 날마다 물두멍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거기서 다시 한 번, 번제단의 은혜에 감격하며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그러나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모습들을 통하여 교인들에게 본이 되고, 또 그 본을 통하여 교인들의 발을 씻어줄 수 있는 사역자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7절) 아멘!
과 목 명 : 근현대의 영성 담당교수 : 문 석 호 님
학 과 명 : 신학연구과 2학년 제 출 자 : 이 성 범
“오늘의 바른 영성, 어떻게 세워 나갈 것인가?”
물두멍으로 나아가는 본을 보이는 영성 사역자
본문) 요한복음 13:1~17
예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광원(귀일원)의 설립자인 이현필 선생은 평생을 금욕으로 고행을 하며 채식주의자로 지냈습니다. 이현필은 식사생활에 있어서 일식주의자였고 철저한 채식주의자였습니다. 하루 한 끼만 식사를 했는데 꼭 저녁에만 했으며 주로 금식으로 지내는 때도 많았습니다. 또한 그는 많은 신비적인 체험에 대해서는 일체 침묵하였고, 꿈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성경을 가르쳤으며 하루 종일 하는 대화가 그대로 설교였다고 전해집니다. 간혹 아픔 때문에 선생의 기도를 받고자 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신이 아니오”하며 거절했다고 하는일화가 있습니다.
이현필 선생은 말년에 후두결핵으로 고생하였는데, 생을 마감하기 전에 뜻하는 바가 있어 제자들에게 고깃국이 먹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평생 채식주의자였으며, 자신들에게도 채식주의를 가르친 스승의 말에 놀랐습니다. 하지만 임종이 가까운지라 말씀대로 생선국을 끓여 들였더니 겨우 두 숟갈을 넘겼다고 합니다. 이것이 유명한 “이현필의 파계” 사건입니다.
이현필은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이 스승이 걸어 왔던 삶을 율법적으로 따르지나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스승의 삶의 모습으로 인하여 제자들이 고행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잘못된 교훈으로 흐르는 경향을 감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멸시하는 결과가 될까 두려워 말년에 일부러 파계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는 제자들에게 선행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행동의 고백으로 가르쳤습니다. 결론적으로 이현필의 삶은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에게 원하시는 거룩을 향한 삶이었습니다.
본문)
1.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 곳 - 성소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원하시는 거룩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앞에 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행동으로 보여주신 말씀이며, 공생애 기간 중 사역하셨던 모든 내용들의 핵심이 여기에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제자들이 앞으로 어떠한 자세로 사역을 행해야 되는지를, 본을 보이는 행동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1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그러면 이 본은 무엇을 향한 본입니까? 물론 죄를 씻는 성결을 향한 본입니다. 거룩이라는 구별됨을 향한 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손과 머리까지 씻겨 달라는 베드로의 요구에 이렇게 답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10절) 이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눈앞에 언뜻 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먼 옛날 미디안 광야의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가 하나님을 뵈올 때의 장면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거기서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곳에 세상의 죄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 거룩한 곳이 어디입니까? 네, 바로 성소입니다. 그런데 성소 바로 앞에는 성소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 바로 물두멍이 있습니다. 이 물두멍은 번제단과 성소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왜 이 물두멍이 가운데에 놓여 있어야 합니까? 그 이유는 구원의 번제단을 거쳤지만 제사장의 손은 제물의 피로 더러워졌고, 광야의 흙바닥을 밟고 있는 발도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발은 항상 땅을 밟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더러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에게 있어서 이 물두멍은 너무나 필요한 것입니다.
2. 인간의 한계로서의 성화
바로 이것이 사도행전 이후 로마서로부터 시작되는 성화의 과정인 것입니다. 이 성화의 과정을 예수께서는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서 제자들에게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의 발을 씻기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본문의 3절부터 10절 사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발을 씻겨 주신 것은 이해가 가지만, 우리가 서로 발을 씻긴다는 것은 언뜻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의 죄를 씻어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바로 중보자적인 거룩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대로 말하자면 선생으로서 “본을 보이는” 삶인 것입니다. 이 선생으로서 본을 보이는 거룩한, 구별된 삶의 모습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스스로 회개케 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시청각으로 보여 주신 것이 바로 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구별된 삶의 본 된 모습이 바로 서로의 발을 씻겨 주는 열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본을 그토록 갈망하던 많은 영성가들이 기독교사에 위치하여 지금까지도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은 영성의 길을 가는 신학도로서는 가슴 뿌듯한 일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본을 보이는 모습이 결코 율법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서두의 예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날마다 거룩을 향하여 나아갔던 이현필의 영성적 삶의 모습조차도 제자들에게는 행위로 비쳤던 것입니다. 스승은 그것이 아니라고 그토록 강조하며 처절한 거룩에의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직접 체화하지 못한 주위의 사람들은 행위라는 표면적 모습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얘기입니까? 그것을 주님은 16절과 17절에서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즉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거룩을 추구하는 영성적인 삶을 살아야 하겠지만, 주와 선생이신 예수님과는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한계를 정확히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한없는 위로를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모르고 끝없이 그리스도와 같게 되려는 욕망 속에서 질주하다가 교만 혹은 좌절로 인해 스스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현필은 바로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파계를 결정했던 것입니다. 결코 종은 상전보다 크지 못합니다. 비록 우리가 영성 사역의 지도자로 나서게 될 것이지만, 우리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보다 앞서 갈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영성생활의 근본이지만, 우리는 그와 같게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역의 현장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범하는 실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았다고 자부하는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착각에 빠진 자는 결코 발을 씻으려 하지 않습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거룩 혹은 경건을 경시하며 율법적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역자들이 번제단에서 바로 성소로 뛰어 들어가 버리고 마는 모습을 우리는 지금도 수없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3. 레위기는 영성훈련의 텍스트
날마다 거룩을 추구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결법이라는 문자에 얽매여 있었던 모습은 참으로 답답하기도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들의 문자는 버리고 그 안에 담겨있는 영성적인 모습들을 재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성경의 문화는 거룩을, 즉 구별된 깨끗함을, 추구하는 문화입니다. 이 거룩한 문화는 시내산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이후로 이스라엘의 절대적인 문화가 되었습니다. 그 구체적인 조항들이 바로 레위기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레위기는 세상에 있는 것들을 3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것, 깨끗한 것(정한 것), 더러운 것(부정한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이 세 가지 범주에서 벗어나질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러워진 것들은 버려야 했으며, 아니면 깨끗하게 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기는 율법의 책일 뿐만 아니라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답게 하는 영성훈련의 텍스트인 것입니다. 그 영성의 훈련과정을 세밀하게 제시하는 책이 바로 레위기인 것입니다. 이 거룩의 과정을 한글개역성경은 정결례 혹은 정결의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바로 이 거룩을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영성적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려면 먹는 것, 입는 것은 물론 모든 생활방식이 거룩해야 하는 것이 구약시대 그리고 예수님 시대까지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아니 지금 이 시간에도 이스라엘은 이 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거룩하고자 하는 열망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충만합니다. 그래서 그 어려운 법들을 문자적으로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의문에 얽매이지 않는 영적 성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미 목욕한 자는 온몸이 깨끗하다고 하십니다. 단지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십니다. 이 얼마나 은혜의 말씀입니까? 그런데 오늘의 우리는 발을 씻지 않으려고 합니다. 구원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으니, 능력이 나타나 사람들의 병을 고쳤으니 주님은 항상 나와 동행하신다고 하는 “따놓은 당상적” 신앙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물두멍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까? 우리의 죄를 물두멍의 물에 비춰 보아야 할 필요가 없습니까? 날마다 우리의 죄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 율법적입니까?
오늘의 우리는 보혈의 은혜에 감격하기는 하지만, 번제단에 머물러서 물두멍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바로 성소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물두멍은 이제 번영과 축복의 신학에 밀려서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성막의 바닥은 여전히 광야의 거칠고 메마른 흙입니다. 이런 것들을 정결하게 씻어내는 곳이 바로 물두멍입니다. 이것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곳입니다. 이 물두멍을 거친 자들이 찢어진 휘장이 있는 성소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찢어진 휘장은 바로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바로 지성소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히브리 사람들은 의문에 얽매여서 거쳤지만, 은혜 시대의 우리는 영성훈련으로 거치는 것입니다. 이 거룩하게 되는 지성소에의 과정은 성도에게 있어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 지성소로 들어가는 최후의 순간에 예수께서는 이 본문의 행동을 취하신 것입니다. 이 장면을 15절에 의거해서 겸손의 모범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물론 겸손이 사역자들의 중요한 덕목이기는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그 겸손의 본을 보이는 그렇게 만만한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을 하면 앞절들과의 문맥에도 맞지 않습니다. 이 순간이야말로 죽음을 앞 둔 절대절명의 순간이니까요. 그래서 예수께서는 1절의 말씀처럼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의미에서 이 정결의 예식을 취하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핵심 부분을 말씀하셔야 할 마지막 때가 온 것입니다.
5. 결 론
그리고 제자들은 그러한 모습으로 주님의 일을 해야 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바로 그것은 모세오경의 순서대로 이어지는 구속사의 진정한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선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그 구원한 백성들을 거룩의 길로 인도하셔서 드디어는 가나안 천국으로 들여보내시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이제 제자들에 의해 펼쳐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시내산에서부터 계획된 거룩의 길이었으며, 바울로부터 해석되어 아피아 가도를 통해서 세계에로 펼쳐진 성화의 길인 것입니다.
영성신학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졸업을 약 4개월 남겨 놓고 있습니다. 졸업은 또 하나의 시작이란 말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이 졸업이 마지막이라는 절박한 심정이 있어야 할 줄로 압니다. 영성훈련과 영성신학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바로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지식으로만 그친다면 이것이야말로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지도자로서 우리는 날마다 물두멍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거기서 다시 한 번, 번제단의 은혜에 감격하며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그러나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모습들을 통하여 교인들에게 본이 되고, 또 그 본을 통하여 교인들의 발을 씻어줄 수 있는 사역자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7절) 아멘!
출처 :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
글쓴이 : 오직 성경으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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