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2년에 있었던 런던 올림픽은 사상 최악의 오심들로 얼룩진 올림픽이라는 오명을 남겼습니다. 수영에서 박태환 선수가 부정출발했다고 해서 실격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유도의 조준호 선수가 심판 전원일치의 판정승을 받은 후에 심판위원장의 개입에 의하여 판정이 바뀐 것 등이었습니다. 특히 펜싱에서 신아람 선수가 연장전 겨우 1초를 남겨 놓고서 어처구니없게도 네 번씩이나 경기가 재개되는 바람에 결국 역전패 당하고 만 것은 정말 지금 생각해도 절로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는 억울한 장면이었습니다. 물론 그 국제심판들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역시 사람인 까닭에 자기 딴에는 공정하게 판정을 내린다는 것이 그런 오심들을 낳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기장의 심판들만 비난할 수 없는 것은 교회 안의 신자들 역시 그와 똑같은 잘못들을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야말로 자기 딴에는 신앙양심과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다른 사람을 공의롭게 판단할 수 있다는 교만에 쉽게 빠질 수 있는 까닭에 실제로는 더욱 치명적인 '오판'들을 가장 많이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그처럼 '남을 판단하기 좋아하는' 교인들을 향하여 성령께서 엄중히 내리시는 경계의 교훈 두 가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심판'을 사람이 대신 행하려 하는 교만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1절과 2절의 말씀에 "1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의 "판단"이란 내용적으로 볼 때 '비난'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남을 '정죄'하는 판단이지 선악에 대한 정확한 '분별'을 뜻하는 판단이 아닌 것입니다. 특히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무조건 죄인으로 판단하고 자신은 깨끗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상 그것은 유대인뿐 아니라 사람이라면 모두가 다 가지고 있는 공통적 악습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자들을 향하여 성경은 오히려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이라고 선포합니다. 즉 남을 판단하기 좋아하는 '너 자신부터가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그 어떤 핑계도 댈 수 없다.'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점에 대해서 문자 그대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no excuse)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라"고 했습니다. 죄는 남에게서 잘 보이기 마련이지만 실상 바로 자기 자신 속에 똑같은 죄의 뿌리가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은 결국 그와 똑같은 죄를 저지르고 있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정죄하는 꼴이나 다름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판단할 자격도 권리도 없다면 과연 누가 각 사람에 대한 최종 심판권을 가지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 대답이 바로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여기서 "진리대로"라는 말은 '공의를 따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공의로운 판결법이란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즉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지만 '회개하지 않는 죄인'에게는 영벌을 내리시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에게는 용서와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까닭에 그처럼 '진리대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두꺼운 법전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 판결에는 선입견과 오해와 실수가 들어가기 마련이며, 그 결과 때로는 사실과 정반대되는 오판을 내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타인에 대하여 스스로 심판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착각인 동시에 교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대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판단은 보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각 사람이 행한 선과 악에 따라' 정확하게 판단하시는 것인데, 바로 6절 이하 11절에 기록하기를 "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9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10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11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판단의 대상이 될 사람의 행동은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먼저 "참고 선을 행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저 소극적으로 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신앙을 붙잡는 가운데 고난까지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란 바로 그처럼 신행일치의 선을 행하는 자에게 주어질 영광스럽고도 귀중하며 영원히 계속될 내세의 "영생" 축복을 소망하는 신자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선을 행하는 자'와 대조적으로 '악을 행하는 자'가 있습니다. 바로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는" 불신자들인데, 이들은 구원의 진리를 거역하고 교회를 반대하는 세력을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세속주의나 우상숭배자들은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인 까닭에 실제적으로는 '불신앙의 당'에 함께 가입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런 불신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노와 분으로" 판단하실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가 바로 지옥 영벌인 것입니다.
9절 이하에는 바로 이런 선악 간의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임할 것을 재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즉 불신앙의 악한 영을 가진 자에게 내려질 것이며, 그런 심판을 받게 될 대상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있을 뿐입니다. 반면에 오직 선을 행하는 신자에게만 "영광과 존귀와 평강"의 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심판과 그 보응들이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복음을 먼저 받은 위치에 있었으니만큼 먼저 심판받아 마땅하며, 그 후에 헬라인들 즉 다른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선악을 기준으로 하는 심판이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고 했듯이 하나님의 심판은 무슨 빈부나 귀천이나 인종이나 성격 등에 따라 차별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선과 악' 이것만이 심판의 잣대가 될 것이며, 율법은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선이며 악인지를 구별할 수 있게 해 주기 위하여 주어졌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율법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선악 간에 각 사람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심령 속에 있는 가장 본질적인 선과 악을 '진리대로' 판단하시고 심판을 내리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슨 자질구레한 경범죄에 대한 약식재판이 아니며, 누가 조금 잘나고 누가 조금 못난 인생을 살았다는 것에 대하여 따지고 드는 쩨쩨한 판단도 아닙니다. 혹은 누구는 조금 더 착하게 살고 누구는 조금 못되게 살았다고 하는 식의 오십보백보에 불과한 윤리적 차이를 두고 '도토리 키 재기'를 하는 심판도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각 사람의 가장 은밀한 것,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선하게 살았는가 아니면 악하게 살았는가?' 하는 이 가장 본질적이고도 결정적인 문제를 두고 실로 공의롭게 판단하고 보응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있고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겠습니까? 그처럼 남을 판단하기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항상 자기가 남보다 낫다는 착각과 교만에 빠져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바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찾아내어 정죄하면서도 정작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무심하게 여기는 꼴(마 7:1-5)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남의 죄를 보고 마음속에 분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야말로 즉시 극히 조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처럼 남을 판단하는 동안 자기 속에 오히려 악의 덩어리가 더 커지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더 교만해지고 악독해지며, 자기 자신을 겸손히 살피지 않고 오로지 남의 허물만 들추려고 분주해지는 꼴불견의 인간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모든 최종적 판단은 오직 유일하게 공의로우신 판단자이시며 완벽하신 심판주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그 대신 남의 잘못을 보게 될 때마다 그것을 거울삼아 자신을 스스로 겸손히 돌이켜 볼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심판'이 늦어지는 것을 자신의 죄를 회개할 기회로 여겨야 합니다.
3절부터 5절에 기록하기를 "3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5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도 "같은 일" 즉 같은 죄를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남을 함부로 "판단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하려는 자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4절과 5절에서 계속 "네가", "너를", "네 고집과", "네게"라고 2인칭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네 자신이야말로, 너에게 판단을 받고 있는 다른 사람뿐 아니라 너도 똑같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인 것을 모르느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처럼 타인을 정죄하기에 열을 올리는 '네 자신'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으로써 심판하지 않고 기다려 주고 계시는 대상이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오래 참으시면서 기다려 주시는 동기는 순전히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의 성품 때문이며, 그 이유는 오직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참고 기다려 주시는 것을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묵인하거나 허용해 주시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은혜를 회개의 기회로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회개치 않아도 될 여유가 있는 것처럼 남용하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을 "멸시"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런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은 하나님의 "진노를"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쌓는" 자가당착이 될 수밖에 없으며, 결국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마지막 심판날에 실로 무서운 '진노의 심판'을 받고야 마는 것입니다.
12절부터 16절의 말씀은 그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자기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만 임할 것처럼 방심하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 엄중한 경고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기록하기를 "12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4(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율법 없이 범죄한 자"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14절과 15절은 그처럼 "율법 없는 이방인"들도 비록 율법을 들을 기회는 없었다 하더라도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본성'이란 바로 다음 절에 나오는 "양심"을 가리킵니다. 즉 사람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불신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양심을 따라서 '율법이 명하는 일'과 똑같은 선행을 할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낸다"고 했는데, 이것은 곧 사람들이 양심에 따라서 선과 악에 대하여 고발이나 논쟁이나 판단이나 선고를 내림을 가리킵니다. 간단히 예를 들자면, 불신사회에서도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반영하는 법과 윤리 등을 통하여 살인이나 간음을 죄로 규정하고 처벌하고 있는 것 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한 율법 없이 망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비록 나름대로 양심을 따라 산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 없는 한 결국 최후심판의 날에는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말 놀랍고도 의미심장한 반전은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앞에서 '율법 없는 이방인'이 그 때문에 망하게 되었다면 '율법 있는 유대인'은 다 구원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는 않다고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듣고도 순종치 아니하는 것'이 비단 유대인뿐 아니라 오늘날 역시 수많은 교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대표적인 죄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야고보서 1장 22절 말씀에도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진리의 도를 듣기만 하면 다 된 줄로 생각하고 방심하기 쉽지만 그것은 '스스로 속이는' 착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처럼 율법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은 자, 다시 말해서 '신행일치'의 삶을 보여 주지 못한 사람은 애당초 '율법 없는 이방인'과 조금도 다를 바 없으며, 오히려 그 들은 것에 대하여 부채를 더 많이 지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그 양자에게 똑같이 임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16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전한 참된 복음에는 예수님을 믿는 자에 대한 구원뿐 아니라 믿지 않는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역시 동시에 포함되어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날이 올 때에 더욱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그것은 '율법 없는 이방인'이 아니라 바로 '율법을 듣고도 순종치 아니한 유대인'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율법을 받고도 순종치 아니했던 자들이야말로 더욱 큰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은밀한 것" 즉 자기 속에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착각과 남을 정죄하는 교만을 숨겨 두고 있던 죄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일단 임하게 되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그 행위대로 정확하게 판단하시는 실로 엄밀하면서도 공정한 심판이 될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살았든지 신약 시대에 살았든지, 원시사회에서 살았든지 현대문명을 누리며 살았든지, 성경을 읽어 보았든지 전혀 기회가 없었든지 간에, 하여튼 아무도 항의할 수 없는 공의로운 판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심판의 날을 아직까지는 '참고 기다려' 주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우리 각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것은 실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멸시하는 엄청난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실로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가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 켐피스라는 신학자는 "지옥불의 연료는 사람의 죄밖에 없다. 지금 자신의 육체를 따를수록 그는 지옥불의 연료를 더 많이 저축하는 자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까지도 전혀 엉뚱하게 적용시키는 악습이 있습니다. 즉 다른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을 보면 '왜 하나님께서 저런 사람에게 빨리 벌을 주지 않으시나?'라고 불만을 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참아 주고 계시는데, 어떻게 자기가 나서서 그 사람에게 얼른 심판이 내려져야 한다고 감히 하나님을 다그치려 하는 것입니까?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라는 말씀은 '내 눈에 죄가 훤히 보이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율법 있는 자'이면서도 아직도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저와 여러분 자신을 향해 선포되고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은혜의 시간을 자신의 죄를 회개할 기회로 여기지 못하는 것은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최악의 '고집'일 뿐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기다려 주시는 때를 오직 남의 잘못만 정죄하면서 허비하는 것은 바로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가게' 될 뿐인 것입니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늦어지는 것을 두고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처럼 교만하고 악한 나를 위하여 여전히 참고 기다려 주고 계심을 깨닫고 '내 속에 있는 들보'부터 찾아 회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심판의 오심은 그 누구보다도 바로 선수 당사자에게 보상받을 길이 없는 피해와 고통을 주게 됩니다. 몇 년을 피땀 흘려서 노력해 온 것이 그 오판 하나 때문에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야말로 그런 판단을 받는 다른 교인에게 실로 말로 다할 수 없는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타인에 대하여 심판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교만일 뿐 아니라 하나님만이 공의로운 최종 심판주가 되심을 망각하는 큰 죄악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진리가 기준이 될 때에만 사람의 죄가 정확히 가려지기 때문이며, 죄에 대하여 절대순결하신 하나님만이 사람의 죄를 공정하게 판단하실 자격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궁극적 심판자로 알지 못하는 교회란 그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식으로 서로를 비난하면서 서로가 더 잘났다고 뻐기는 난장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심판을 늦추어 주시는 줄을 모르고 그저 타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 늦다고 불만을 토하는 것은 그야말로 스스로 가중처벌을 불러들이는 바보짓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아무도 '피할 길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자기만 열외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만약 나 자신이 다른 사람의 언행을 보면서 얼굴이 찌푸려지고 비난과 정죄가 속에서 솟구쳐 오르면 그 즉시 '아, 이것은 위험신호구나. 내가 지금 스스로 교만해지고 있구나.'라고 스스로 경계하고 자기부터 회개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정의감'에만 충만한 교인들이 모인 교회는 어떻게 될 수밖에 없는지 아십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선언 앞에 꼼짝 못하고 오히려 그 주님 앞에서 떠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소위 '주여, 저 종을 치소서!'라는 것을 기도라고 올리는 사람은 정작 죄인의 구세주이신 예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간음한 현장에서 붙잡혀 자기 죄에 대하여 일언반구의 변명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여인만 오히려 예수님 앞에 남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만 십자가의 제단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성도들이 모인 교회만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평안히 가라"는 놀라운 은혜를 입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남을 정죄하는 자칭 의인'들이 모이는 곳이 결코 아닙니다. 이 시은소는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자기 가슴을 치며 회개할 수밖에 없는 자들만 나아올 수 있는 곳입니다. 각 사람에 대한 모든 최종심판은 오직 '진리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하면서, '남을 판단할 만큼 스스로 의롭다 하는' 자세가 아니라 오직 '자기 죄를 부끄러워하며 통회자복 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엎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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