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주의 집에 들어가, 성전을 향하여"

하나님아들 2016. 8. 30. 13:42

"주의 집에 들어가, 성전을 향하여"
시편 5편 7-12절
석기현 담임목사

요즘 '진짜 사나이'라는 텔레비전 프로에 보면 고된 훈련을 끝낸 후에 지휘관이 병사들에게 "각자 고향 있는 쪽을 향하여 뒤로 돌아!"라고 시킨 후에 "각자 어머니의 이름을 크게 세 번 부른다. 실시!"라는 지시를 내리는 장면이 가끔 나옵니다.
그러면 '진짜 사나이'들을 위시한 그 부대의 병사들은 각각 자기 집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면서 "어머니, 감사합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라고 크게 외치는데, 다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게 됩니다.
그토록 가고 싶지만 가지는 못하는 집을 생각하면서 몸이라도 그 곳을 향하여 바라보고, 그토록 뵙고 싶은 어머니이지만 당장은 볼 수 없는 어머니를 향하여 뜨거운 감사와 사랑의 고백을 하게 되면 그 사나이 대장부의 가슴들도 절로 찡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자기 집 있는 쪽을 향하여' 어머니 이름을 부르는 것은 휴가를 받거나 제대를 해서 '자기 집에 들어가서' 어머니와 직접 만나게 되는 감동과는 물론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윗 역시 그런 감동을 체험한 사람이었는데, 바로 7절에 나오는 대로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재하신 신이신 까닭에 성도가 어디에서 기도하든지 간에 다 들으실 수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주의 집에 들어가서' 기도하기를 즐거워했으며, 사정이 그럴 수 없을 때에는 '성전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즉 다윗의 기도는 언제 어디서 올린 것이든지 간에 근본적으로는 다 '성전을 중심으로 한 기도'였던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는 그 다윗의 기도를 통하여 성도가 성전을 찾아와서 기도하거나 몸이 나올 수 없을 때에도 마음만은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과연 어떤 은혜를 받게 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전의 기도는 성도로 하여금 '언제 어디에서도 하늘 아버지와 독대하는 특권'을 누리게 해 줍니다.

본문 7절에서 다윗은 "7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라고 서원했습니다.

우리나라말 번역에는 이 7절 전체가 한 문장으로 계속 이어지지만, 원문에 의하면 상반절과 하반절이 각각 독립되어 있는 두 개의 문장입니다.
즉 이 7절 상반절은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겠습니다.
'라는 뜻인 것입니다.
여기 "주의 집"이란 바로 이어지는 하반절에 나오는 "성전"을 가리킵니다.
물론 다윗 시절에는 아직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지 않았었지만, 그는 언약궤가 안치되어 있던 성소를 두고서 이미 '성전'이란 표현을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두고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누릴 수 있게 된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상 종교에서는 사람이 신에게 나아가 제사를 드리는 것을 사람 쪽에서 신에게 좋은 일을 해 주는 것처럼 여기고 그래서 신 쪽에서도 그에 대하여 뭔가 보답해 주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기가 성전에 나아가는 것을 두고 자신 쪽의 무슨 공로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 일까지도 전적으로 '주의 풍성하신 인애와 자비 때문에' 누릴 수 있게 된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즉 다윗은 자신이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자체가 엄청난 특권이요 최고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며 감지덕지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성전에 나아갔던 까닭에 다윗은 7절 하반절에서 보여 주는 대로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는 예배자가 되었습니다.
다윗이 성전에 제사 드리러 나아갈 때, 혹은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엎드려 기도할 때마다 그의 인격은 여호와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에게 있어서 성전이란 어떤 종교적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출입하는 장소가 아니라, 바로 거기에 임재하고 계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친히 뵈옵는 장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감히 직접 만나게 되는, 너무나도 두렵고 떨리는 곳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발이 성전 문턱을 넘어갈 때면 그의 숨소리까지 조심스러워졌고, 아니 멀리서 그 성전을 기억하면서 기도드릴 때조차도 그의 전 인격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후들후들 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성전에서의 기도란 바로 그 기도하는 성도가 하나님을 직접 1대1로 대면하게 되는 아주 특별한 시공간입니다.
말이 간단해서 그렇지 사람이 위대하신 절대주권자를, 아니 죄인이 이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엄청난 특권을 바로 기도하는 성도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들은 어디를 순방할 때 자기를 환영해 주는 시민들과 직접 악수를 합니다.
그렇게 길거리에서 대통령의 손을 직접 한 번 붙잡고 악수해 본 사람은 평생토록 그것을 자랑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가지 형편으로 그렇게 하기 어렵겠지만, 그 대신에 청와대에 대통령 앞으로 직접 탄원서 같은 것을 보내어서 그에 대한 응답을 받게 된다면 그것만 해도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만일 대통령의 개인적인 초청을 받아서 청와대에 직접 들어가게 되고, 그것도 다른 사람은 곁에 없이 대통령과 1대1로 독대를 하게 되는 것은 그 얼마나 엄청난 특권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대한민국 안에서 정말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몇 사람밖에 누리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도는 하나님과 바로 그런 1대1의 독대를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무슨 사전 신청이나 허가조차 필요 없이 그저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성전에 와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길거리에서 잠시 손만 잡아보거나 편지만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라, 그 하나님의 집 안에까지 들어와서 그 분을 아예 '아바 아버지'라 부르면서 1대1의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를 힘입어서' 우리가 누릴 수 있게 된 이 특권, 언제든지 '주의 집에 들어와서' '주를 경외하는 인격'을 통하여 그 주님과 영적으로 독대하는 이 놀라운 축복을 성전에서의 기도를 통해 마음껏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전의 기도는 성도로 하여금 '불신사회 속에서도 의인의 언행'을 지키도록 준비시켜 줍니다.

8절 이하 10절에 기록하기를 "8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9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10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쫓아내소서 저희가 주를 배역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나의 원수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9절에서 그들은 특히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기도할 줄 모르는 불신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정말 단 한마디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라고 했습니다.
기도할 줄 모르는 불신자의 입에서 거짓말이 쉽게 나오고 저주하는 욕들이 문장마다 담겨 있고 성령을 훼방하는 말조차 거침없이 내뱉어지는 것은 바로 그런 말들의 진원지인 그들의 '마음 중심'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라고 했습니다.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의 말이란 것은 제아무리 지혜로워 보이고 그럴듯한 말처럼 들려도, 실상은 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여 같이 사망의 구덩이에 빠지도록 만드는' 미혹의 말일 뿐인 것입니다.
끝으로 악인은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두드리는 기도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처럼 사람을 간사하게 속이는 말재주만 평생 늘어갈 뿐인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속에 있는 악한 것을 입의 말로 내어 놓는 자'들은 다윗의 원수일 뿐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원수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10절에서 다윗은 그들을 가리켜서 "주를 배역한" 자들로서 "정죄"를 당할 사람들이며, 따라서 결국 "자기 꾀에 빠지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쫓겨나게" 되는 심판을 당할 자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8절을 다시 보시면 참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라는 말은 다시 말하자면 '나의 원수들이 내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까닭에'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 받아 이스라엘의 장래 왕으로 내정된 이후부터 당장 수많은 원수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자기 왕위를 위협하는 요주의 인물로 찍었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사울왕의 신하들, 다윗의 동료들까지도 다윗의 갑작스러운 출세와 급속도의 승진을 두고 시기가 가득 찼으며, 자연히 다윗에게서 무슨 털끝만한 허물이라도 찾아내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었습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노이로제에 걸리지 않겠습니까?
그런 정신적인 압박감에 짓눌려 살 바에야 차라리 모든 것 다 집어치우고 '기름부은 받은 장래의 이스라엘 왕'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그저 그런 무서운 눈초리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자기를 미워하는 대적들이 그를 에워싸고 무슨 트집거리를 잡으려고 눈들을 부라리고 있을 때, 다윗은 오히려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 내 원수들이 나를 책잡으려고 이렇게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 저는 더욱 의롭게 살아야 하겠습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주의 길을 내 눈앞에서 똑바르게 만들어 주십시오.'라는 말 역시 '제가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그 길만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면 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도 절대로 실족하지 않고 보란 듯이 똑바로 살아가겠습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배짱 두둑하면서도 또한 의젓하기 짝이 없는 자세입니까?
원수가 지금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는 상황에서 다윗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그런 원수에 대한 경각심을 지금보다 더 의롭게, 더욱 바르게 살아가는 자신의 경건생활의 촉진제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악한 원수들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서도 의인의 말과 행동을 지킬 수 있게 해 준 것이 바로 다윗이 매일 '주의 집에 들어가서' 혹은 '성전을 향하여' 드렸던 기도였습니다.

사람은 그 대화의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 자신의 수준이 달라지는 법입니다.
평소에 어떤 사람과 자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됨됨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 인터넷 대화방에 들어가서 저질스러운 채팅이나 하는 사람은 그 인격의 수준과 삶의 질이 동시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매일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과 기도로 대화하는 사람은 그만큼 그의 언행이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고상해지고 경건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 기독신자들은 매일의 삶을 통하여 우리가 무언가 실족하는 것을 책잡으려고 눈에 심지를 돋우고 노려보고 있는 대적들에게 둘러싸여 살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불신자들이 '저 친구는 남들 다 근무하러 나오는 주일에도 자기는 꼭 근무를 빠져야 한다고 저만 잘난 듯이 설치는데, 뭐 흠 잡을 것이 없나?' 하고 은근히 예의주시합니다.
대학교에서 데모에만 앞장서는 '정치적 기독학생 서클'에 있는 학생들은 '저 친구는 기독신자와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사회참여가 아니라 구령운동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저 친구의 그 뭐 보수신앙인지 개혁신앙인지 하는 것들을 싸잡아 비난할 거리가 없나?' 하고 속으로는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는 더욱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서 곧게 하소서"라고 매일 '성전을 향하여' 기도드림으로써 단단히 준비를 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런 대적들에게 책잡힐 것이 없도록 직장에서 남보다 갑절로 성실하게 근무하고, 그런 원수들이 낙심하게 될 만큼 다른 학생들보다 몇 배로 열심히 공부함으로써 그야말로 군계일학과 같은 진실한 크리스천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그처럼 원수 앞에서 보란 듯이 바르고도 의연한 의인의 모습을 나타낼 때에 마귀가 얼마나 맥이 쭉 빠지겠습니까?
매일 이 죄악이 관영한 불신사회에 나아가기 전에 먼저 '주의 집에 나아가거나' '성전을 향하여' 기도드림으로써 그렇게 단련되고 준비된 의인의 경건한 언행을 통하여 오히려 원수들에게 창피를 주는 통쾌한 승리를 거듭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성전의 기도는 성도로 하여금 '수세와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받게 해 줍니다.

11절과 12절에서 다윗은 "11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12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특히 젊은 시절에 아주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울왕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매일을 연명했어야 했고, 자기를 시기하는 정적들의 시기와 모함 때문에 머리가 쪼개질 듯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런 압박감에 이십 년 동안이나 매일같이 눌리면서 살게 되었으니 웬만한 사람이라면 자살하든지 미치든지 최소한 우울증이라도 걸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에게는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20대와 30대 인생 전부가 흘러가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그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압박감을 끝까지 이겨내고 결국 40세에 이르러서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그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다윗에게 무슨 특별한 정신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윗 자신만의 피난처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자기보다 힘세고 성질 고약한 인간들이 괴롭혀 와도 언제든지 피할 수 있는 장소, 아무리 자기에게 닥치는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가 강력해도 항상 편안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자기만의 안전한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품으로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 이것이 다윗의 스트레스 해소의 비결이었습니다.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 이것이 다윗의 위기관리 요령이었습니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 다윗은 두려움에 짓눌릴 때마다 바로 이렇게 자기만의 기도의 처소를 찾아가서 그가 사랑하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심기일전했던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무조건 하나님 앞에 찾아가서 엎드리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원수와 행악자를 편드실 리가 없고 끝내는 어디까지나 의로운 사람의 편이시다'라는 사실을 다윗은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그와 같은 하나님의 편애와 의리는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는" 행위로 반드시 나타난다는 사실을 또한 믿고 체험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어디까지나 다윗의 편만 들어 주시는 호의적인 감정을 보여 주시며, 모든 일이 합력하여 다윗에게 이롭게 되도록 역사해 주신다는 사실이 바로 다윗이 든든히 신뢰하고 있던 '은혜의 방패'였던 것입니다.

저는 산호초 열대어를 기르는 취미가 있는데, 이것들은 무척 예쁘기는 하지만 키우기가 꽤 어렵습니다.
그 물고기들이 예쁜 값을 한다고 얼마나 성질들이 까다로운지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아도 병에 걸려서 시름시름하다가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키울 때에 주의해야 할 여러 가지 일 중에 하나가 어항 안에 물고기들의 '피신처'(retreat place)들을 많이 마련해 두는 것입니다.
산호초 열대어들은 원래 자연 상태에서도 '영역 다툼'이 심한데, 더욱이 어항이라는 작은 공간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그 갈등과 싸움이 더욱 치열해집니다.
그 영역 다툼에서 작고 힘없고 순한 종류의 물고기들은 자연히 훨씬 더 큰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그런 물고기는 우울증에 걸려 한구석에 처박혀서 밥도 먹지 않고 있다가 한두 주일 후면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어항 안에 크고 작은 돌들을 쌓을 때, 물론 보기에도 좋게 해야 하겠지만, 그 돌들 틈에 크고 작은 공간들이 많이 생기게 해서 물고기들이 각자 자기 기분과 자기 크기에 맞는 자기만의 '리트릿 플레이스'를 확보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합니다.
일단 물고기가 그런 자리를 찾게 되면 좀 크고 성질 사나운 놈이 괴롭혀 와도 항상 그 안전한 자기만의 피신처로 대피할 수 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안정감을 가질 수 있으며 그 결과 어항이라는 그 생소하고 불편한 공간에서도 자기 나름대로 적응하면서 생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자라 해도 계속 스트레스만 받고 살면 견디어낼 재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피할 줄 모르면 우리는 불신 남편의 핍박을 당할 때마다 괴로워서 환장해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의지할 줄 모르면 우리는 불치의 병에 걸린 가족을 뒷바라지하는 일에 지치고 질려서 자기 자신도 우울증에 걸려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할 줄 모르면 우리는 쪼들리는 가계부와 빨간 숫자가 늘어나는 사업 장부를 볼 때마다 땅이 꺼질 듯한 한숨만 쉬면서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들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면 어떻게 사람이 미치지 않고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런 까닭에 저와 여러분에게도 자기 자신만의 피신처가 꼭 필요합니다.
어떤 핍박도 결코 따라올 수 없고 오직 여러분 자신만 들어갈 수 있는 영적 공간, 그 어떤 사람도 더 이상 여러분을 괴롭힐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보호막을 쳐 주시는 그 안전하고 평온한 장소를 확보해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성전에 나와서 기도드리는 시간과 장소가 아니겠습니까?
언제든지 찾아와서 기도드릴 수 있는 내 아버지 집, 바로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피난처인 동시에 또한 가장 확실한 은신처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어떤 수세와 궁지에 몰리더라도 그럴 때일수록 더욱 신자에게 있어서 최상의 리조트 휴양지요 백약보다 더 나은 영적 재활원인 이 '기도하는 집'을 찾아옴으로써, 그 완전한 피난처 안에서 모든 고민을 치유 받고 모든 환난에서 보호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다윗은 성전중심의 기도생활을 통한 은혜를 날마다 누린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궁의 침상에서 기도할 때에도 성전을 사모하며 기도했으며, 압살롬의 난을 피하여 들판과 숲속에서 야영하면서 기도할 때에도 역시 성전을 향하여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원수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막힌 기도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지 성전과 통할 수 있는' 기도였으며, '자기 혼자만의 세계' 속에서 맴도는 기도가 아니라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과 직통하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 역시 다른 신앙생활들과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교회중심의 기도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참된 기도는 자기 혼자만의 골방에 들어박혀서 내내 그 안에서만 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비록 엿새 동안에 몸은 세상 사회 속에 섞여 사느라고 바쁜 중에도 마음만은 '성전을 향하여' 쉬지 않고 기도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일주일 중에 딱 하루, '토요일 경향 온가족 총동원 새벽기도회'만이라도 '주의 집에 들어와서' 기도를 드리면 나머지 날에 가정이나 학교나 직장에서 개인적으로 가지는 기도생활 역시 더 은혜롭게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성전에서의 기도는 다른 곳에서 드리는 기도보다 훨씬 더 좋은 어드밴티지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전에 나와 기도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독대하는 '하나님의 양자의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 기독신자는 매일 성전에서 기도하고 준비함으로써 의인으로서 나타내야 할 '언행의 무장'을 완전히 갖춘 상태로 불신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언제든지 성전을 찾아와 기도드림으로써 그 어떤 시험과 환난을 당할지라도 결코 죽지 않는 '든든한 안전보장'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은 이 성전을 실로 '내 아버지 집'인 동시에 '기도하는 집'인 줄로 알고 마음껏 활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님을 직접 대면하는 특권', '원수들이 에워싸고 노리는 가운데서도 의인의 경건생활을 지킬 수 있는 능력', '그 어떤 막다른 골목에 쫓기더라도 주님의 은혜가 방패처럼 막아주는 보호' - 이런 축복을 '주의 집에 들어와서' 기도하며 '성전을 향하여' 기도함으로써 날마다 충만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 †정금같이 나오리라†
글쓴이 : 켈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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