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직장생활이나 학교에 다니는 것과 같은 공적 생활이 있는 반면에, 가족끼리 오붓한 파티를 한다든지 혼자서 독서나 음악감상을 즐기는 등의 사생활이 있습니다. 그런 '프라이버시'(privacy)는 공적 생활과는 달리 당연히 '은밀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무슨 몰래 해야 할 부끄러운 일이나 범죄행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사생활의 즐거움과 행복을 제대로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끼리만 하는 파티를 이웃사람들이 지나가면서 구경할 수 있는 장소에서 한다면 분위기를 망칠 수밖에 없을 것이며, 혼자 조용히 있고 싶을 때에는 배우자나 자녀들로부터도 방해를 받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기독신자의 신앙생활에서도 그처럼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있습니다. 공적 신앙생활의 대표적인 것은 바로 예배이며 각 기관별 정기모임이나 주교 혹은 찬양대의 봉사활동 등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반면에 사적 신앙생활도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개인경건생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인 사생활과 마찬가지로 '은밀한' 것이 되어야만 그 보람과 은혜를 제대로 누릴 수 있는데, 오늘 본문 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두고 "1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개인경건생활의 기본에 해당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세 가지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늘의 아버지" 앞에서 행해야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심으로써 '개인경건생활'은 곧 '하나님 아버지께만 보이는 의로운 생활'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기독신자라면 누구나 반드시 행해야 할 세 가지 '은밀한 개인경건생활'에 대하여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어떻게 '상을 베풀어' 주시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은밀한 구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갚아 주십니다.
본문 2절부터 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2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제'는 물질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물질적으로 돕는 선행을 가리키는데, 문제는 그것을 '사람에게 드러내어 칭찬을 들으려고 일부러 회당과 거리에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실제로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공개적으로 구제하는 일들이 정기적으로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단정하셨습니다. 이 '외식자'란 '연기자(actor)'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그처럼 사람들 앞에서 구제하는 것은 많은 칭찬을 받기 위해서 일부러 하는 행위이며, 그것은 관중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기 위해서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말씀입니다. '나팔을 분다'는 것은, 실제로 당시에 구제할 때에 나팔을 불면서 했다는 해석도 있지만, 그보다는 일부러 표를 내고 눈에 띄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런 공개적 구제행위의 진짜 목적은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으로부터 감사와 칭찬을 받는 것'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요란하게 떠벌이는 구제는 이미 자기 상을 받은, 즉 구제하는 본인이 진짜 원하는 바 그 받고 싶어 하는 영광을 이미 다 받은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진실한 경건생활은 아니라고 단정하신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 구제라는 것은 비록 타인 앞에서 자랑하려는 의도는 없다 할지라도 자기 스스로 자만하게 될 소지도 다분한데, 3절과 4절에서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른손"과 "왼손"은 많은 경우에 같은 일을 동시에 하기 마련입니다. 두 손으로 무거운 물건을 함께 들어올리고, 두 손으로 도구와 재료를 동시에 잡고서 작업을 하기도 하며, 또 박수를 칠 때에도 반드시 두 손이 맞닿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제할 때에는 어떻게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물론 이 말씀이 구제할 때 두 손으로 주지 말고 한 손으로 주라는 뜻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곧 남에게 구제를 해 주고 있는 자기 자신조차도 자각하지 못할 만큼 겸손한 자세로 행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남에게 구제를 베풀면서 '아, 내가 지금 이런 착한 일을 하고 있구나. 더구나 남에게 보이지 않고 은밀하게, 정말 겸손하게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조차 스스로 가지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 구제가 되어야만 "하나님이 갚으시리라"고, 즉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구제생활을 기억해 주시고 그 상급의 계좌를 지켜 주실 뿐 아니라 이자에 이자까지 쳐서 반드시 갚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공적으로 결코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도 칭찬하지 않고 그저 남에게 베풀기만 하는 구제라는 것은, 전도서의 말씀처럼 불신자들의 눈에는 마치 '식물을 물위에 던지는 것'처럼 그냥 재물을 없애버리는 행위처럼 보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 날 후에 반드시 도로 찾게' 해 주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구제란 남이 필요로 하는 것을 요청 받기 전에 그냥 먼저 주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받은 방식과 똑같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영혼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였지만 감히 하나님께 그것을 구할 엄두도 못낼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편에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까지 우리에게 먼저, 일방적으로, 아무 조건 없이 그냥' 주셨습니다. 이처럼 무조건 받는 사랑을 스스로 체험한 신자라면 그런 사랑의 빚을 어려운 이웃에게, 특히 바로 내 곁에 있는 약한 성도에게 구제를 통하여 갚아 나가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구제'란 어떤 선한 양심이나 인류애 같은 데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성도라면 자동적으로 실천하게 되어 있는 선행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공적으로 빈부의 격차 해소나 소득의 재분배 따위의 개념에서 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각 성도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절로 행할 수밖에 없는 일인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개척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에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운 교인이 한 명 있었는데 어느 장로님께서 제게 구제헌금을 가져오셔서 이름을 밝히지 말고 그분에게 전달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것을 받은 교인은 "아, 아마도 아무개 집사님께서 주신 것이군요."라고 전혀 엉뚱한 교인을 짚으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교인께서 잘못 짐작하셨다고 귀띔도 해 드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가만히 내버려 둠으로써 그 구제금을 받은 교인은 자기가 잘못 짐작한 그 집사님에 대하여 감사와 사랑을 간직하게 될 것이고, 정작 그 구제금을 드린 장로님은 100퍼센트 하나님께로부터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니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처럼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만 나타나는 이런 구제, 교회 경상비의 재정보고에는 나오지 않더라도 하늘 아버지께서 기록하고 계시는 비밀구좌에 예치되고 있는 구제가 경향의 각 성도들을 통하여 그야말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도 모르게' 끊임없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먼저 받은 사랑에 감격해서 성도와 이웃에게도 그냥 줄 줄 아는 이런 구제를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 앞에서 늘 행함으로써, 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우고 자신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친히 갚아주시는 상급을 넘치도록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골방에서 문을 닫고 올리는 '은밀한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게 합니다.
5절부터 8절의 말씀에 "5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과 의사소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사이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진솔한 행위인데, 그런 기도까지도 '외식'으로 행하는 자들이 있다고 예수님께서 두 가지로 경고하셨습니다.
그 첫째는 '사람을 의식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매일 아침과 오후와 저녁에 정해진 기도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형편만 된다면 성전에 나와서 기도드리는 것을 가장 이상적으로 여겼는데, 성전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는 가까운 회당을 찾아가거나 아니면 그냥 길거리에서나 집안에서라도 그 시간만 되면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기도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그런 정기기도 시간이 가까워지면 회당과 거리와 같은 공공장소로 일부러 나가있다가 그 시간에 딱 맞추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식자들이 그렇게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고, 그들의 정기적인 기도생활에 감추어진 진짜 의도를 딱 꼬집어서 지적하신 것입니다.
기도생활에서 나타날 수 있는 두 번째 외식은 '일부러 길게' 기도하는 것인데, 이어지는 7절과 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것 역시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언부언"이란 '같은 말을 반복해서 시간을 오래 끄는' 기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과 같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시 이방 우상종교에 그처럼 형식적으로 반복되는 기도문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 랍비들 역시 기도는 길면 길수록 좋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레위라는 랍비가 "어쨌든 긴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라고 가르쳤을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외식적인 기도 대신에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이 자기 집안에 개인 기도실을 꼭 만들어 두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며, 특히 당시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다 단칸방 집에 살았으니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어떤 '비밀스러운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바깥 사회나 다른 사람과 철저하게 분리되고 오직 자신과 하나님만 남아 있는 마음의 방'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성도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가리켜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일 뿐 아니라 "은밀한 중에 계시는" 아버지이시기도 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처럼 골방 속에서 은밀히 기도하는 성도는 그냥 자기를 '내려다보고 계시는' 하나님 정도가 아니라 바로 그 골방 안에서 자기와 '마주 앉아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소위 방언기도는 오늘날의 대표적인 '거리와 회당에서의 기도'입니다. 방언기도한다는 사람치고 자기 혼자 방안에서 하는 사람을 본 적 있습니까? 꼭 여럿이 기도하는 자리에서 터져야 하고, 그런 방언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이 곁에서 보면서 신기해하고 부러워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특별히 은밀하게 통하는 것이 방언기도라면, 그런 기도가 왜 꼭 다른 사람 귀에는 이상한 소리, 시끄러운 소리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까? 골방에서 둘이서만 대화하는데 시끄럽게 소리 지를 필요가 무엇이 있으며, 골방에 자기하고 하나님만 있고 그 대화를 곁에서 듣게 될 다른 아무 사람이 없다면 굳이 그 둘만 알아들을 수 있는 비밀언어로 대화할 필요가 도대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중언부언하는 기도'의 대표적인 것은 바로 천주교의 묵주기도인데, 예를 들면 소위 '환희의 신비' 제1단 하면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심을 묵상합시다."로 시작됩니다. 그러면 머릿속에서 마리아의 예수님 잉태 상황을 상상하면서 입으로는 주기도문을 한번, 성모송을 열 번, 그리고 영광송을 한 번 외우는데, 손으로는 지금 몇 번 외웠는지를 묵주구슬을 돌리면서 세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 내용에는 "1917년 파티마에 발현하신 성모님의 부탁으로 묵주기도 중 '영광송' 다음에 '구원을 비는 기도'를 추가하게 되었습니다. "라는 식으로 때로는 '마리아가 직접 나타나 부탁해서' 새로운 것이 추가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제1단이 끝나면 제2단으로 넘어가는데, 그런 단들을 다섯 개씩 모아서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 빛의 신비' 등으로 부르는 하나의 기도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개의 어떤 '신비의 기도문'만 해도 주기도문을 다섯 번, 성모송은 쉰 번, 영광송을 다섯 번 반복하게 됩니다. 기도문 자체가 아예 중언부언으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정확하게 중언부언하기' 위해서 묵주를 주판알처럼 돌려서 계산까지 하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예수님께서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고 지적하신 대상에 정확하게 해당되지 않겠습니까?
정말 경건한 신자들은 그런 '길거리의 기도'나 '일부러 길게 하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만의 골방에서 하나님과 은밀히 만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하나님, 저 좀 뵙고 싶습니다. ' 하고 그 골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기다려주고 계십니다. 거기에는 무슨 예약이나 문밖 소파에서 10분을 더 기다려야 할 필요가 없으며, 나보다 먼저 와서 그 방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더구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그 골방에 들어가기 전부터 우리의 병이나 결핍을 비롯한 모든 소원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이라고는 그저 그 골방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아버지' 하고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직 당신의 자녀를 위하여서만 항상 열려 있는 이 기도의 골방을 언제든지 찾고, 거기서 세상도 잊고 주위 사람도 신경 쓸 필요 없이 오직 하늘 아버지하고만 나누는 은밀한 교제의 기쁨과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고서 행하는 '은밀한 금식'은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16절 이하 18절에 "16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금식'이란 문자 그대로 음식이나 음료를 끊는 것입니다. 아침식사를 영어로 'breakfast'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깨뜨리다, 중단하다'의 'break'와 '금식'의 'fast'라는 단어를 합성한 것입니다. 즉 '금식을 중단하다'라는 말인데, 바로 어제 저녁에 식사한 이후 밤새 금식하던 것을 이제 아침이 되어서 중단하고 밥을 먹는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금식은 그처럼 '하룻밤 동안만 하는 금식'이 아니라 하루 세끼를 다 굶는 완전한 금식이나 하루 중 한 끼 혹은 두 끼를 거르는 부분 금식을 가리킵니다. 또한 기간으로 볼 때에는 하루 금식에서부터 시작하여 며칠 혹은 몇 주일에 걸친 장기간의 금식도 있습니다.
실제로 모세의 율법에서 꼭 금식해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는 날은 일 년에 단 한 번, 바로 구약의 대속죄일 하루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 금식일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추세를 보였는데, 그 최고조에 이른 것이 바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행한 금식이었습니다. 물론 금식을 자주 또 정기적으로 하는 것이야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만 문제는 "(나는 이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나이다"(눅 18:12)라고 자랑하면서 기도하는 바리새인의 비유에도 나오듯이, 그들은 자기네들이 '일주일에 두 번' 즉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정기적으로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떠벌리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바리새인들은 일부러 얼굴에 재를 바르고 더 수척하게 보임으로써 자기가 금식 중에 있다는 사실을 과시까지 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외식을 꾸짖으시면서 이어지는 17절에서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금식 중에는 더욱 머리도 잘 빗고 면도도 깨끗이 하고 얼굴화장도 평소처럼 예쁘게 해서 조금도 사람에게 표가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주부가 금식한다는 핑계로 다른 식구들의 밥도 안 차려 주는 것은 경건생활이 아니라 오직 죄를 더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금식 기간이 40일이었으니 나는 겸손하게 거기서 하루를 빼서 39일 동안만 금식했다고 말하는 것도 사실상 겸손이 아니라 교만일 뿐인 것입니다.
구제는 스스로 자랑해야 남들이 알 수 있고, 개인기도 역시 그러하지만 금식은 굳이 남들에게 보이려 하지 않아도 절로 나타나게 됩니다. 즉 얼굴이 수척해지고 몸에 힘이 빠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절로 나타나는 것'까지도 나타나지 않도록 '은밀히' 해야 한다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야만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그 금식기도에 반드시 응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9장 15절에서도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신자가 금식해야 할 때도 있음을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금식은 식욕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억제함으로써 절제와 극기의 자세를 계속 유지하게 해 주고 바로 그런 가운데 더욱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시편 35편 13절에서 다윗이 "나는...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라고 고백한대로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그런 특별한 금식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까? 대표적인 경우를 두 가지만 들자면, 죄 회개의 기도와 어떤 간절한 소원의 기도가 있을 때입니다. 요나의 경고를 듣고 니느웨의 모든 백성들과 왕이 다 금식하고 회개했던 것이라든지, 다윗이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들을 살려주시기를 간구하면서 금식기도했던 것 등이 그런 예입니다. 그런 영적 비상사태를 만나면 그냥 아침을 거르는 김에 하는 금식이나 다른 교인들과 같이 식사하는 주일 점심이나 저녁 식탁에서 혼자만 표내는 금식이 아니라, 오직 자신과 하나님 둘만 아는 은밀한 금식을 통하여 그 하늘 아버지께 간절히 매달리는 기도를 드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 대예배 후에 여러 특별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저를 만나러 오시는 교인들을 위하여 제가 기도해 드리는 시간이 있습니다. 물론 그처럼 목사에게 기도 받기를 원하는 것은 좋은 자세이고, 목사 역시 병자나 군 입대자를 위하여 간구하고 성도의 사업이나 유학을 위하여 축복 기도하는 것은 목자와 제사장으로서 기꺼이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그 어떤 목사가 대신 해 주는 기도보다는 자기 자신이 간절한 마음으로 금식기도하는 것이 하늘 아버지께 직통으로 가는 기도이며 실제적으로 훨씬 더 능력 있는 기도가 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로 가볍게 넘겨버려서는 아니 될 자신의 중한 범죄에 대하여 통회자복하는 기도, 절대로 밋밋하게 낭비해 버려서는 아니 될 자신의 인생을 두고 일생일대의 승부를 거는 기도, 결코 수수방관할 수 없는 교회의 어려운 문제를 두고 그야말로 사생결단으로 오직 주님께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기도 - 이런 뜨겁고 간절한 기도제목을 두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늘의 아버지께 금식하며 기도드림으로써 하나도 남김없이 응답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구제는 이처럼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지극히 은밀한 영적 사생활이며, 기도와 금식도 그야말로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놓는' 기독신자만의 행복한 프라이버시입니다. 혼자만 즐겨야 할 개인생활을 남들 앞에 다 내놓고 하는 것은 순전히 자기과시욕에 빠져 있든지 아니면 무언가 비정상적인 사람의 행동인 것이 틀림없는 것처럼, 개인경건생활을 '사람 앞에 보이려고' 하는 것 역시 오로지 외식적 종교생활일 뿐인 것입니다.
반면에 구제와 기도와 금식과 같은 경건생활의 기쁨과 은혜를 아예 맛볼 줄 모르는 교인은 자신만의 사생활을 통한 행복을 전혀 누릴 줄 모르는 사람과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구제할 때, 기도할 때, 금식할 때' 즉 'when'이라고 하셨지, 'if' 즉 '혹시 구제나 기도나 금식을 하게 되면'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즉 이 세 가지 경건생활은 참된 기독신자에게는 무슨 '선택사양' 종목이 아니라 '전공필수' 과목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교회가 공적으로 전도와 선교에 최고의 힘을 집중해야 하는 것처럼, 각 교인 개인적으로는 반드시 은밀한 구제에 마음과 힘을 쏟아야 합니다. 매일 새벽과 금요일 밤에 예배당에 모여서 통성으로 합심하여 올리는 기도도 드려야 하지만,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누워 있을 때나 서서 걸어갈 때나 언제 어디서든지 자기만의 '골방'을 통하여 주님과 1대1로 만나는 기도에 항상 깨어 있어야만 합니다. 정말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을 때에는 그 어떤 '기도의 능력이 있다는 신통한 목사나 권사'를 통해서가 결코 아니라, 바로 자기만 아는 금식기도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친히 중보해 주시는 가운데 그 응답을 반드시 받게 되는 축복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반드시 상을 주신다.'고 약속된 이런 은밀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통하여 실로 자기만의 '경건의 능력과 신비와 은혜'를 늘 충만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