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비틀즈'(The Beatles)라는 유명한 4인조 rock music 그룹이 부른 인기곡 중에 'Let It Be'라는 노래가 있는데, 세계적으로 손가락에 꼽힐 만한 애창곡 안에 들어가는 불후의 명곡입니다. 저도 학창 시절 때부터 좋아했던 노래인데, 멜로디도 아름답지만 그 가사부터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 'Let it be.'라는 말은 '그냥 그대로 두어라.'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데, 1절에 보면 자기 어머니가 어릴 때 들려주었던 '지혜로운 말'이었다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즉 인생에서 어떤 어려운 일, 마음 아픈 일,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당할 때에 너무 고민하거나 힘들어 하지 말고 그냥 되어가는 대로 가만 내버려 두는 것이 더 낫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나름대로 꽤 '지혜로운 말'입니다. 아무리 골머리를 썩여도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을 가지고 한없는 갈등에 빠지거나 아무리 애써도 안 될 일을 두고 발을 동동 구르며 쓸데없이 고생하기보다는, 차라리 좀 여유를 가지고 '어떻게 되든지 그냥 되어가는 대로 두고 보자.'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상책이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 신자에게는 그런 고민이나 갈등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을 때 훨씬 차원 높은 '지혜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함께 보여 주고 있는 자세인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이후 평생토록 오직 주님의 뜻을 따라 충성하는 종으로서 살아왔던 사도 바울은, 그의 사역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면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어떤 길이 주의 뜻인지 혼동되도록 이끄는 말들이, 그것도 함께 성도된 형제들의 입을 통하여 그에게 계속 들려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말들은 진심으로 그를 걱정해 주는 마음과 또한 나름대로 신앙인의 양심으로 한 말들이었던 까닭에 사도 바울에게는 더욱 혼란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바울은 결국 참된 '주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바로 찾았으며 그 길을 끝까지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과연 그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이 시간 우리는 주어진 본문 말씀을 통하여 기독신자가 자신의 인생을 오직 '주의 뜻을 이루는' 정도(正道)를 따라 살아가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신자는 '미래에 대하여 걱정'하는 대신 '기도하는 가운데 미래를 맡김'으로써 주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1절부터 6절에 기록하기를 "1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행선하여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행선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 4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5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새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니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마지막 사역이 된 제3차 전도여행을 떠난 사도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의 장로들과 눈물의 기도로써 작별을 고한 후에 예루살렘을 향한 항해를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란 지중해 바다를 직선으로 가로질러서 팔레스타인 지방으로 가는 배를 말합니다. 이것은 통상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던 일반적인 배편보다 좀 더 위험하기는 하지만, 바울은 어찌하든지 오순절 이전에 예루살렘에 꼭 도착하고자 그렇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그 배로 지중해를 통과하여 도착한 곳이 "두로"였는데, 이곳은 팔레스타인 서북쪽에 있는 항구 도시였고 그는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렀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당시 두로에도 이미 교회가 설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아마도 스데반 집사의 순교 후 예루살렘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을 때 사방으로 피신했던 신자들 중에 일부가 그곳에 정착해서 세웠을 것입니다.
이 두로교회의 신자들은 바울과 자주 만났던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한 주일 같이 지내는 동안 이들은 평생 사귄 친구처럼 주 안에서 깊은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간곡히 말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 두로교회의 신자들은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장차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고난을 알 수 있었던 까닭에 그렇게 근심어린 충고를 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물론 그들이 그렇게 걱정해 주는 마음에는 고마워했겠지만, 끝내 그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다시 길을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두로교회의 신자들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러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바울 일행과 그들은 다 함께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을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배가 떠나려 하는 항구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보고 있는 가운데서도 그들은 남의 눈길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예 무릎까지 꿇고 함께 기도했던 것이었습니다.
떠나는 자와 보내는 자들이 함께 '무릎을 꿇어 기도하는' 장면은 참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염려하는 성도들의 마음을 그 기도를 통하여 오히려 위로해 주려 했습니다. 또한 바울더러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말리던 두로교회의 신자들 역시 이제는 모든 것을 주님의 선하신 인도에 전적으로 맡기면서 함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의 신자들이 공항이나 기차역 같은 곳에 단체로 모여서 자기네 식의 종교의식을 거행하면서 작별하는 모습을 아직까지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기독신자들이 그런 공공장소에서 여럿이 함께 둘러서서 간단한 예배를 드리면서 다른 교우를 전송해 주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저 자신도 그런 경험이 많이 있었습니다. 제가 경향교회 대학부SFC에 있을 때에 운동원 중에 누군가가 군대에 입대하게 되면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그렇게 함께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면서 보내 주었습니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던 친구를 당시의 국제공항이었던 김포공항에서 작별할 때도 그랬고, 또 나중에 제가 미국으로 가게 되었을 때 저 역시 부모님과 경향교회 성도들로부터 그처럼 따뜻한 전송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친구가 군대 가면 어떻게 배겨 낼 수 있을까?' 하고 걱정만 하면서 보내는 것은 정말이지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그 친구의 군대생활을 지켜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드리며 작별하는 것은 쓸데없는 걱정과 근심어린 눈으로 보내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큰 힘을 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 밑에서 키워온 내 자식이 이제 타국에 가서 혼자 어떻게 살 수 있을까?'라는 걱정만 가득 마음에 담고 자식을 비행기에 태워 보내려 할 때에는 그야말로 피차 눈물과 이별의 고통만 더 가중될 뿐입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딸을 위하여 이미 '여호와이레'로 다 준비해 주셨을 것을 든든히 의지하는 마음으로 함께 기도드리면서 작별을 하면 떠나는 편에게나 보내는 편에게나 정말 그보다 더 든든한 위로와 격려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서로 헤어지게 될 때에도 피차 기도를 통하여 앞날을 오직 주님의 뜻에 믿고 맡길 줄 아는 이런 차원 높은 작별은 오직 참된 기독신자들만 보여 줄 수 있는 실로 아름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불신자들로서는 내일을 알 수 없는 미래란 생각하면 할수록 더 깊은 불안과 근심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소위 운명과 재수에 모든 것이 다 걸려 있고 스스로는 무엇을 대비하기는커녕 무슨 일이 일어날지조차 알 수 없으니 그야말로 속수무책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에게 있어서의 미래는 이미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 안에서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확정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기도야말로 바로 그런 주님의 선하신 역사에 우리의 미래를 전적으로 안심하면서 맡길 수 있는, 실로 든든한 최상책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제한된 눈으로 볼 때에는 불확실할 수밖에 없고 불안하기까지 한 일을 맞이하게 될 때마다 저 전지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늘 아버지께 기도드림으로써 모든 근심걱정은 다 떨쳐버리고 오직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고야 말 것'을 의지하며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자는 '미래에 대하여 예언'하는 것보다는 '사명만 붙들고 미래를 향해 나아감'으로써 주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7절 이하 12절의 말씀에 "7두로로부터 수로를 다 행하여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9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 와 11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12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수로를 다 행하여"라는 말은 '항해를 끝내면서'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혹은 '항해를 계속하여'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사실 "두로", "돌레마이" 그리고 "가이사랴" 이 세 지명들은 모두 다 팔레스타인의 연안 항구였으므로 바울이 탔던 배가 이곳들을 차례로 기항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의 마지막 경유지가 된 가이사랴에 도착한 바울은 거기서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을 만나 그 집에서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이 빌립은 바로 예루살렘교회의 첫 '일곱 집사' 중 한 명이었으며, 사도행전 8장에 보면 그가 에디오피아 내시를 전도한 후에 "가이사랴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는 이미 약 20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었는데, "전도자 빌립"은 그동안 계속 가이사랴에 살면서 사람들을 전도하여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에게는 "딸 넷"이 있었는데 다 "처녀로 예언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신자들 중에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빌립의 딸들 역시 그런 은사를 받은 것을 보면 그가 다른 사람을 전도하는 일뿐 아니라 자기 자녀의 신앙교육도 잘 시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일행이 그 빌립의 집에서 며칠을 지내는 동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바울에게 찾아왔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8절에도 바로 이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는 기록이 있으니, 그는 특별한 예언의 은사를 받았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여기서도 아가보 선지자는 "성령이 말씀하시되"라고 시작하면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을 예언해 주었습니다. 그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한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을 하면서 때로는 '시각적 퍼포먼스'를 동원했던 것과 상통합니다. 그러면서 아가보는 바로 그처럼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하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게 될" 것 즉 로마 군병에게 넘겨지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던 것이었습니다.
아까 두로교회의 신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울을 만류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빌립 집사의 딸들이나 아가보 선지자처럼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을 바울에게 전해 주는 성도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그 '예언'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이어지는 13절부터 16절에 기록하기를 "13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15이 여러 날 후에 행장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16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성도들의 그와 같은 예언이 틀림없이 "성령이 말씀하시는" 사실임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어떤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인지'를 성령께서 '예언'해 주시는 말이었지,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즉 바울이 성령을 통해 받은 명령은 이미 사도행전 19장 21절에서 나타난 대로 "내가 거기(예루살렘에)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이 한 가지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아시아와 마게도냐 지방의 전도사역을 마친 사도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서바나로'라는 길을 뚜렷이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어떤 환난이 자기 앞에 기다린다고 해도 바로 이 마지막 사명의 길을 끝까지 가는 것이야말로 성령의 참 뜻이며 궁극적인 명령인 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일찍이 예수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을 회심시켜 주신 후에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 8:16)고 말씀하신 대로 오직 복음전파 사명을 위하여 그 어떤 '해를 당하더라도' 끝까지 충성할 각오로 여기까지 달려온 전도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선언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수난당할 것을 아시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눅 9:51)하셨던 모습을 그대로 본받아 바울 또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따라가고자 하는 자세였습니다. 이처럼 바울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당하게 될 고난을 미리 알고 피하려는 마음보다는 오직 사명 완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훨씬 더 강력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칠 환난을 예언해 주는 말을 듣고 겁을 집어 먹는 대신에 오히려 '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더욱 각오를 단단히 하면서 오로지 받은 사명의 길을 끝까지 가는 쪽을 택했던 것이었습니다.
전도자 빌립과 아가보 선지자는 바울의 그와 같은 지사충성의 결단을 보고서는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하면서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미래를 아는 것'과 '주의 뜻을 아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성령께서 아가보에게 알려 주신 예언과 바울에게 내리신 명령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가보 선지자는 '성령이 말씀하시는' 대로 예언을 했으며, 사도 바울은 '성령의 뜻을 정확하게 헤아려서' 끝까지 순종했던 것이었습니다.
'성령의 예언'을 가지고 잘못된 결론을 성급히 내렸을 때에 가이사랴의 성도들은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강권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환난을 당할 것은 확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바로 '주의 뜻'임을 그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이사랴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려 할 때 "가이사랴의 몇 제자"들도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받게 될 고난에 기쁘게 동참할 각오로 "함께 갔던"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에 예언의 은사가 활발했다면 오늘날 역시 그러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시 초대교회와 오늘날의 교회 사이에 있는 큰 차이점 하나를 망각하고 있는 소치입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아직 신약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 생애의 목격자들인 사도들을 통해서 직접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계시가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때에는 '예언이나 방언을 통하여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일들이 자주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신구약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사정이 전혀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성경 말씀이 예언해 주는 것만 들어도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의 제일 마지막 장 결론에 해당되는 요한계시록 22장 18절에서도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라고 '특별계시의 종결'을 명백히 선언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미리 알게 되면 정말 더 잘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우리가 만약 무병 무사고로 장수하게 될 것을 미리 안다면 십중팔구 더 안이하고 게으르게 살 것이 틀림없습니다. 반면에 일찍 죽게 될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얼마 남지 않은 시간마저 자포자기 내지는 초조와 공포에 사로잡혀서 '이미 죽은 사람'처럼 살게 되지 않겠습니까?
정말 우리가 미리 알아야 할 것은 단 한 가지, 바로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이 예언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용한 점쟁이라 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심판주로서 재림하신다.'는 이 역사의 마지막 사건을 모르면 설혹 다른 것 백 가지를 미리 알고 소위 '액막이'라는 것을 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제아무리 훌륭한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 해도 '각 사람이 그 행한 대로 심판을 받고 천국영생과 지옥영벌로 나누어질 것이다.'라는 이 예수님의 예언보다 더 중요한 예언은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미래 중에서도 제일 마지막 미래, 각 사람의 생명이 영원히 좌지우지될 이 결정적인 미래의 순간을 바로 맞이할 준비를 못한다면 그 사이에 일어날 사소한 일 몇 가지를 혹 자기 마음대로 좀 바꿀 수 있다손 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이 예언의 말씀을 분명히 듣고 깨닫고 믿고 있는 신자라면 자신의 인생에 정말이지 더 이상 다른 무슨 예언이 필요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오직 그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잘하기 위하여 그 남은 인생을 자기가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열심히 장사하면서 살 뿐입니다. 그야말로 '바쁜 꿀벌은 슬퍼할 겨를도 없다.'는 말대로 그저 맡겨 주신 사명을 따라 충성스럽게 섬기면서 재림하실 주님을 만날 준비하기에만 여념이 없는 알차고 보람찬 여생이 되는 것입니다.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까?'를 알려고 하는 어설픈 예언자가 아니라, 오직 '반드시 속히 오실 주님'께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게 될 영광에 참예하기 위하여 '그저 앞만 보고 달려가는' 충성된 사명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미리 알 수만 있다면 자기 인생이 훨씬 더 잘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슨 용한 점쟁이가 있다는 소문만 나면 돈 보따리를 싸들고 찾아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한때 우리나라의 유명한 월간잡지에 매월 소위 '용하다는 점쟁이'들의 기사가 실리는 것을 보고 '아니, 이게 무슨 기사감이라고 한 페이지씩이나 그것도 특별히 매끈한 종이에 천연색으로 인쇄까지 해서 싣고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기사가 아니라 '기사처럼 보이는 광고'였습니다. 그처럼 비싼 광고를 낼 수 있을 정도라면 그런 점쟁이들이 얼마나 돈을 많이 벌고 있겠습니까? '요다음에는 틀림없이 아들 낳는다.'라는 따위의 예언, 누가 해도 '맞을 확률이 반은 틀림없는' 이런 뻔한 말 한마디를 들으려고 그렇게들 복채를 갖다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 어떤 불확실하고 근심스러운 미래를 앞에 두고서도 그것을 완벽하게 대처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금통장이나 무슨 '빽'이 아니라, 자신의 기도로써 스스로를 재충전하며 성도들의 기도로써 격려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미래에 대한 예지의 능력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가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는 확실하게 이끌어 주시는 성령의 인도하심만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사명감이 이끌어 주는 길만이 그에게는 유일한 전진 방향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그저 걱정에만 빠지는 것이나 곁에서 똑같이 염려만 하는 것은 그야말로 '불 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으로 문제를 더 악화시키게 될 뿐입니다. 그런 걱정과 염려의 수렁에 빠지지 말고 오직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것만이 최상의 대책입니다. 또한 미래에 대한 길흉을 미리 듣게 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생이 바로 잡히는 것도 결코 아니며 오히려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자'라는 따위의 자포자기적인 향락에 빠지게 만들 뿐입니다. 오직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 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라는 마지막 한 날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남은 생명 전부를 주를 위해 바치겠다는 이 한 가지 확실한 사명감을 붙잡고 나아가는 것만이 자신의 미래를 헤쳐 나가는 최선의 길인 것입니다.
성도의 미래는 사람의 근심 걱정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뜻대로 이루어질' 뿐입니다. 성도의 앞날은 자신의 미래를 얼마나 정확하게 미리 알고 있느냐에 성패가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뜻대로 이루어질' 그 날까지 죽도록 충성하며 따라가는 사명의식에 달려 있습니다. 근심 대신 기도로써 미래를 예비하고 헛된 추측 대신 부동의 사명감을 붙잡고 미래를 향해 나아감으로써, 그 어떤 일이 닥쳐도 항상 '주님의 뜻을 찾는 바른 길'로 인도함을 받고 '주님의 뜻만 따르는 힘찬 길'로만 끝까지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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