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하나님아들 2016. 8. 30. 13:45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로마서 1장 8-12절
석기현 담임목사

요즘 '진짜 사나이'라는 프로가 꽤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그게 주일밤 예배 시간에 방송되고 있는 까닭에 저도 소위 '본방 사수'는 못하지만 재방송을 통해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 '진짜 사나이'들이 가장 긴장에 사로잡히는 순간은 그들이 새 부대로 전입하여 생활관에 들어가게 되는 때입니다.
아무래도 연예프로이니까 어느 정도는 미리 '설정'된 것이겠지만, 그렇더라도 신병이 선임병들을 처음으로 대면하게 될 때의 초조함과 불안감은 어쩔 수가 없는 '리얼리티'인 것입니다.
하지만 신고식 때 처음에는 엄하게 대하던 선임병들이 신병을 놀리는 장난을 쳐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 준다든지 하면 그 어색하고 어려웠던 관계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같이 고된 훈련을 받을 때 서로 격려해 주고 도와주거나, 여가 시간에 자기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여자 친구에게서 온 편지를 같이 읽으며 피차 속은 따뜻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 전우애는 더욱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진짜 사나이'들이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가게 될 때쯤이면 그 마흔 살 넘은 연예인들이나 스무 살 전후의 멀쩡한 장정들의 눈에서 영락없이 '이별의 눈물'이 터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는 헤어진 후에 본인도 아직 군복무를 하고 있으면서 '진짜 사나이'들에게 '위문편지'를 보내는가 하면, 휴가를 나왔을 때 그 아까운 시간 중에도 직접 찾아와서 만나기까지 하는 군인도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진짜 군생활이 아니라 연예프로이며 같이 있던 기간도 겨우 5일 정도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우애'라는 것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이 교회를 통해 나누게 되는 '성도 교제'의 끈끈함과 '형제 사랑'의 따뜻함은 그런 특별한 인간관계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는 비교조차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과 로마교회 교인들 사이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첫인사가 끝나자마자 바울은 자기가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으며 만나보고 싶어 하고 있는지 그 간절한 심정을 토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회의 그 어떤 관계에서도 찾을 수 없는, 실로 차원 높고도 각별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는 오직 참된 성도 사이에서만 통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영적 교통'이 구체적으로 과연 어떤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바른 신앙을 가진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그 어떤 관계보다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됩니다.

8절에 "8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달리 번역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뜻입니다.
기도의 중보자가 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신 까닭에 지금 바울이 "내 하나님께" 올리고 있는 감사기도 역시 예수님을 통해서 드려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그처럼 감사기도를 올리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곧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라고 한 대로 '로마교회 교인들 때문'이었는데, 보다 구체적으로는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로마교회는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도가 직접 목회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만약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로마교회를 '초대 교황인 베드로'가 세웠다면 바울이 이 로마서를 보내면서 그를 언급하지 않을 리가 없었고 또 사실상 그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가르쳐 주기 위하여 이런 편지를 보낼 필요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때에 로마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돌아가서 교회를 세웠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학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기독신자가 되었던 로마교회 교인들은 그 순수한 '처음 신앙'을 잘 지키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너희 모든 사람"이라는 말은 로마교회의 교인들 하나하나가 다 똑같이 '믿음 좋은 신자'였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고 한 것은 로마교회가 당시 세계의 중심지에 있었기 때문에 그 성도들의 신앙에 대한 칭송 역시 곳곳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 드렸듯이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를 '서바나 전도'의 전초기지로 점찍고 있었기 때문에 그 교회에 대한 평판이 어떠냐 하는 것은 곧 세계 선교의 문이 쉽게 열리느냐 아니면 오히려 걸림이 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되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로마교회의 신자들이 그처럼 바른 믿음으로 명성이 자자했으니 바울로서는 실로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믿음 좋은 신자'들끼리는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척 보면 다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예배 후에 '새 교우 영접'할 때에도 이미 예수님을 영접하고 다른 교회에 다니다가 우리 교회에 오시는 성도들 가운데 그런 분들을 만날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비록 간단한 인사와 짧은 기도를 나누는 시간이지만 이미 영적으로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교우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교회에 설교나 집회 인도를 가게 될 때에도 경험하게 됩니다.
그 교회의 영적 분위기가 평소에 얼마나 뜨거운지, 그 교회 성도들의 신앙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는 예배가 시작되어 첫 찬송을 부르는 순간 즉시 제 심령 깊숙이 감지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면 저도 '주님, 이곳에 이런 좋은 교회를 세워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를 드리면서 저 자신부터 벌써 은혜 충만한 가운데 강단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부득불' 드리는 말씀이지만, "경향교회 같은 교회가 있다는 사실만 생각해도 감사합니다."라는 말도 제가 몇 번이나 직접 들었습니다.
미국에 사는 제 친구 장로 한 명이 자기가 아는 어느 교인이 '우리나라에 이런 훌륭한 목사님도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인터넷 설교 한 편을 소개해 주었는데 받아 보았더니 바로 저의 설교였다고 하면서 "이런 친구 목사를 둔 것이 자랑스러웠다."고 말해 준 적도 있었습니다.
사실은 저야말로 '이런 좋은 목사님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든지 '이런 좋은 장로님을 우리 교회에 세워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를 드린 적이 셀 수도 없을 정도인 것입니다.

참된 신자들에게는 그처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더라도 금세 서로를 알아보고 통할 수 있는 신기한 영적 텔레파시가 있습니다.
'믿음 좋은 신자'를 만나게 되고 '바른 진리 위에 세워진 교회'가 있다는 사실을 두고 서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이 실로 신령한 교제를 나눌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도할 때 피차 기억해 주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선한 응답을 함께 누리게 됩니다.

9절과 10절에 "9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는 구절을 다시 좀 더 알기 쉽게 번역하자면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내 온 심령을 다하여 섬기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처럼 자기가 충성스럽게 섬기고 있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우기까지 하면서 간증하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곧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항상"이라고 한 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마다 로마교회 교인들을 위한 간구를 잊지 않았습니다.
"쉬지 않고"
라고 한 대로 그것은 매일 계속하여 올리는 기도였으며 또한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너희를 말하며"
라고 한 것은 바울이 로마교회 교인들을 생각하면서 올린 기도는 앞 절에 나왔던 '감사의 기도'뿐 아니라 그 외에도 그들의 여러 가지 형편들을 위한 '도고의 기도'가 포함되었음을 뜻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주요한 기도 제목이 바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사도 바울은 하루빨리 로마교회 교인들을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길'이 열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 교회를 선교기지로 삼고 서바나 전도를 실시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일이 속히 진행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리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기도드릴 때마다 이처럼 로마교회 교인들을 기억하면서 기도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형식적인 인사치레가 아니었으며 외식적인 과장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로마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올리는 기도에 대하여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까지 증인이 되신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비록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이였지만 바울과 로마교회 교인들 사이의 영적 교제는 그런 진실하고도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아주 가깝고도 긴밀하게 유지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기도는 결국 '하나님의 뜻' 안에서 '좋은 길'의 응답을 받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한다.' - 이것 역시 참된 신자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놀라운 영적 교통의 방법입니다.
"제가 잊지 않고 기도해 드리겠습니다."라고 교역자가 약속해 주는 것은 그저 관례적으로 하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교인 편에서 "저희들이 목사님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 역시 무슨 예의상 하는 인사치레가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자신이 남을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있는지를 요란하게 자랑할 필요도 없이 그 기도를 듣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증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항상' 기도드릴 때마다 '쉬지 않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 주는 것이야말로 한 성도와 다른 성도의 관계가 그 얼마나 진실한 것인지를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경향교회 교인들끼리 정말 영적으로 가까운 사이,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교제를 나누려면 그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를 위하여 잊지 않고 기도해 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매일의 새벽 기도 시간을 통하여 우리는 자기 가족부터 시작하여 같은 전도회 회원들, 같은 구역이나 교구의 식구들, 같은 봉사기관에서 섬기는 동역자들, 교회의 교역자들과 장로님들 한 명 한 명을 위하여 빠짐없이 기도드려야 합니다.
아니 자칫 자신의 관심 속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소자 교우' 한 명까지도 꼭 기억해 내면서 더욱 간절히 기도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놀라운 것은 그런 기도는 반드시 상대방도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좋은 길'의 응답을 서로 받게 되고야 만다는 사실입니다.
주일학교 교사가 자기 반의 어떤 '문제학생'을 생각하면서 눈물로써 올리는 기도는 언젠가 그 학생이 바른 신앙의 길로 돌아오게 되면서 '아, 그동안 우리 주일학교 선생님께서 나를 위해 그렇게 간절히 기도해 주셨구나!'라고 깨달아지게 됩니다.
교회의 큰 일을 하면서 짓눌리고 있는 중에도 기관별릴레이 기도회에서 만나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야말로 용기백배 사기충천하게 됩니다.
목사 역시 사람인지라 때로는 매우 낙심되어 축 처져 있다가도 새벽기도회나 금요기도회에서 성도들이 합심하여 외치는 뜨거운 기도 소리를 듣게 될 때 다시 강단에 설 수 있는 새 힘이 용솟음치게 됩니다.
여러분의 교구 담당 전도사님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거리와 골목으로 나아가 전도하고, 심방을 냉담하게 거절하는 장결자를 몇 번이고 찾아가서 담대하게 아파트 문을 두드릴 수 있는 것도 바로 여러분께서 각자의 '골방'에서 그 분들을 위하여 매일 올리는 기도 소리가 똑똑하게 전달되고 있으며 반드시 응답될 것을 피차 믿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통한 교제를 할 줄 모르는 교인들이라면 설혹 백번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같이 예배드리고 함께 교회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해도 그것은 실로 '가까운 것 같지만 먼 사이'로 끝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사람 눈에는 안 뜨이는 골방의 기도라 해도, 사람 귀에는 들리지 않는 묵상기도라 해도 저 위에서 '항상' 내려다보시며 '어디서든지' 듣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꼭 서로를 위하여 잊지 않고 기도함으로써 피차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베풀어지는 선한 응답을 함께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서로 위로와 힘을 주고받는 성도'는 그 교제를 통하여 더욱 강건하고도 화평한 교회를 세워가게 됩니다.

11절과 12절에 "11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12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미 영적으로는 그처럼 '같은 신앙'과 '서로를 위한 기도'를 통하여 깊고도 가깝게 교제해 온 사이였지만, 사도 바울은 이제 육신적으로도 직접 그 로마교회 성도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간절히 구한 것도 바로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사이라면 서로 만나보고 싶어지게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사도와 교인들 사이에서는 더욱 그러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 교인들을 그처럼 만나고 싶어 했던 데에는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 또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었습니다.
여기서 "무슨"이라는 말은 '어떤'이라는 뜻입니다.
즉 바울은 어떤 '영적 선물'을 정말 하루라도 빨리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서 그들을 만나보게 될 날을 그토록 '심히 원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신령한 은사'란 무엇보다도 바로 '복음의 진리'였습니다.
그때까지 어떤 사도를 통하여 체계적인 신앙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로마교회 교인들은 비록 '바른 기초적 신앙'은 가지고 있었지만 보다 더 깊고도 풍부한 교리를 배우는 것이 절실하고도 시급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신령한 진리'의 교육으로 그들을 더욱 성장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견고케" 즉 더욱 강건한 신자가 되어 결국 로마교회가 앞으로 세계 선교를 위하여 힘 있게 쓰임 받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로마교회 교인들을 만나고 싶어 했던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12절에 있는 대로 그 만남은 또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즉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만남이 아니라, 사도 바울 역시 로마교회 교인들로부터 자신의 복음 사역을 위한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는 평신도들을 만나 그들의 신앙생활이 더 '견고'하게 성화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평신도들은 그런 사도에게 '안위'함을 주어 그 사역에 더욱 힘을 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진정 서로를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성도 사이에서 벌어지게 되는 놀라운 '영적 상부상조'였습니다.

군대에 간 아들을 면회하려 가는 어머니의 손에는 그 아들에게 얼른 먹여 주고 싶은 음식이 들려 있는 까닭에 그 발걸음도 더 다급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애인을 만나 데이트를 하게 될 때에도 그냥 얼굴만 보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뭔가를 해 주어야 더욱 애틋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이처럼 '피차 주고받는' 가운데 그 정이 더욱 두터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형제자매로 교제하게 된 성도 사이에서도 이런 현상이 반드시 벌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올바른 목사와 신실한 성도들이 만나게 되면 성도들만 그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목사 자신도 실로 엄청난 영적 충전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훌륭한 찬양대장 장로와 열심 있는 찬양대원들이 함께 봉사하게 되면 바로 그 찬양대장 장로 한 명의 모범과 리더십 때문에 찬양대원 전체의 영적 수준이 함께 향상되며, 마찬가지로 바로 그런 찬양대원들의 존경과 순종 때문에 찬양대장 장로는 더욱 겸손한 마음과 두려워하는 자세로 충성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가 바로 이런 영적 선물을 서로 나눌 수 있어야 그 만남의 가치는 그야말로 최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각자가 성경 말씀을 생활에서 실천했을 때 받은 축복을 간증하는 은혜, 서로의 아프고 괴로운 것을 어루만져 주고 위로해 주는 사랑, 함께 주의 일을 섬기면서 천군만마와 같이 든든히 의지할 수 있는 신의, 아니 그저 예배당에 앉아 있는 얼굴을 멀리서만 보아도 피차 절로 미소를 짓게 되는 즐거움 – 바로 이런 재미 때문에 저와 여러분은 교우의 얼굴 보기를 '심히 원하는' 가운데 모이기를 힘쓰게 되고 그 결과 교회 전체는 더욱 강건한 성장과 더불어 화평한 교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경향의 모든 성도들이 만날 때마다 바로 이처럼 서로의 신앙을 견고하게 해 주고 피차 안위함을 얻을 수 있는 교제를 주고받음으로써 이 경향공동체를 이보다도 더 영광스럽게 부흥시키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주일에 말씀 드렸듯이 사도 바울과 로마교회 교인들은 서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이미 한 '우주적 교회' 안에 같이 있는 성도들이었습니다.
그처럼 성도들 사이에서는 또한 만나기 전부터 벌써 이처럼 진실하고도 뜨거운 '성도의 교통'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의 다른 어떤 관계나 단체 속에서는 결코 체험할 수 없는, 오직 성도가 교회를 통해서만 누릴 수 있는 놀랍고도 신비한 은혜입니다.

군인들은 '걸그룹 이야기'가 나오면 금세 친해지지만, 우리 신자들은 처음 만난 사이라 할지라도 '예수 신앙고백'만으로 벌써 백년지기처럼 통하게 됩니다.
가족들이 자녀의 유학이나 가장의 해외근무 등으로 인하여 헤어져 있을 때에는 그 아쉬움을 편지나 전화로밖에 달랠 길이 없지만, 우리 예수권속들은 비록 오대양 육대주에 흩어져 있을지라도 '피차 기억해 주는 기도'를 통하여 서로에게 하나님의 선한 길이 활짝 열리도록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세상의 연인들 중에서는 불같이 사랑하다가도 상대방에게 금세 싫증을 느끼면서 남남처럼 돌아서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만, 우리 교인들은 만날 때마다 피차 위로와 힘을 끝없이 주고받게 됨으로써 교회중심으로 더욱 강하고도 뜨겁게 하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소위 '7080 세대'에 속한 대중가요 가운데 '좋은 걸 어떡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눈 감으면 떠오르고 꿈을 꾸면 나타나고 안 보면 보고 싶고 헤어지기 싫어지네' - 대충 그렇게 기억되는 가사의 노래였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라면 누구나 다 구구절절 공감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신자는 그런 경우에 어떻게 노래하는지 아십니까?
바로 시편 기자처럼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시 16:3)라고 노래합니다.
교역자는 교인을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고 같은 전도회원들끼리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어지고 같은 주일학교나 찬양대에서 만나 함께 봉사하는 시간이 너무나 즐거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지상교회 중에서도 이 경향교회 안에서 교제하고 있는 다른 성도'들이야말로 내게 있어서 '가장 귀중한 존재'이며, 내 인생을 통하여 누릴 수 있는 '모든 기쁨, 최고의 즐거움' 역시 바로 이 교우들을 알게 되고 만나게 되고 사귀게 됨으로써 비롯된 것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 만날 때에도 별로 어색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무언가 공통점, 무언가 서로 통하는 것이 있는 사람은 초면에서부터 쉽게 사귀게 됩니다.
바로 '같은 신앙'으로 탁 통하는 성도는 아무리 첫 대면이라 할지라도 아주 자연스럽게 되며, '바른 신앙의 뿌리'로 이미 연결되어 있는 교회끼리라면 아무리 교단은 다르다 할지라도 실상은 '한 교회'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그 친분이 더욱 두터워집니까?
비록 바다를 가운데 두고 떨어져 있다 해도 편지나 전화로 계속 연락을 취하며 소식을 나누는 사이입니다.
평소에 항상 서로를 잊지 않고 위하여 기도하는 성도의 사귐이 바로 그처럼 공간을 초월하면서 더욱 뜨겁고 진실하게 발전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늘 만나면서도 또다시 보고 싶어집니까?
만날 때마다 무언가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을 때, 무언가 서로에게 도와주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더 자주, 더 빨리 만나고 싶어집니다.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며 피차 견고케 만들어 줄 신앙의 은사들이 있을 때 그 만남은 더욱 간절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경향의 성도들 역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땅에 있는 존귀한 성도'야말로 '나의 모든 즐거움'이라고 똑같이 공감하며 노래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앙으로 통하는 만남에서 시작하여, 기도 중에 끊임없이 기억해 주는 사이가 되며, 만날 때마다 서로의 신앙생활에 힘을 더해 주는 이 신비하고도 은혜로운 성도 교제를 통하여 우리 경향교회를 더욱 '행복한 이스라엘 공동체'로 함께 세워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 †정금같이 나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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