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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그리스도교에서 자연과 인간

하나님아들 2012. 7. 25. 15:25

 

 

그리스도교에서 자연과 인간

김경재 (한신대, 조직신학)

 

 



[1] 들어가는 말

  이 글에서 필자는 그리스도교에서 이해하는 자연과 인간의 본질, 그리고 그 상호관계성을 신학적 관점에서 이해하여 보려고 한다.  자연 생태계의 위기를 초래한 근대 서구 기계기슬문명, 인간중심적 자연관,  그리고 정복의 대상으로만  정위된 비생명적 기계론적 자연관이 모두 그리스도교의 창조설화에 그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한 주장을 대표하는  과학사가 린 화이트(Lynn White)의 문제의 논문 "환경위기의 역사적 기원"이 발표된 이후, 그리스도교 신학계에도 그의 지론에 대한 찬반양론이 일어났으며, 철저한  창세기 경전연구 분야에서 성서신학적 검토, 이론신학 분야에서  신자연신학의 대두및 창조신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필자는 우리의 논제를 세가지 단계를 거쳐 검토하여 보려고 한다. 첫째, 그리스도교 신앙과 세계관의 근원적 기초를 제공하는 성서가 과연 린 화이트교수의 지적처럼 비판받아야 할만큼 반생태적이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정복을 정당화하는 종교적, 형이상학적 이념을 제공하고 있는가를 경전에 대한 주석학적 분석을 통하여 검토할 것이다. 이 검토를 위하여 특히 20세기 구약성서 학계에 탁월한 시계지평을  열어놓은 서로 대조되는 두 학자, 게하르트 폰라트와 클라우스 베스터만의 입장을 대비시켜 볼 것이다. 둘째, 우리의 논제를 그리스도교 사상사 속에서 검토하되, 특히 서방기독교의 기틀을 놓은 어거스틴의 "무로부터의 창조" 교의와  20세기 개신교의 대표적 신학자 칼 바르트의 창조론에서 자연과 인간, 그리고 그 상호관계성을 "창조와 계약"의 상호 존재론적 공속성 이론에서 파악해 볼 것이다. 셋째, 그러한 고찰이후, 20세기 후반 특히 1980년대 이후 그리스도교 신학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자연신학운동, 특히 창조(자연) 안에 신의 내재적 초월을 강조하는  율겐 몰트만의 창조신학을 그 대표적 예로서 택하여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지구촌 시대의 동서문화가 교차하고 상보하는 문명전환기에서 그리스도교의 과제를 적시해봄으로서 본 논문의 결론을 삼을 것이다.

[2] 그리스도교 경전 속의 "창조설화"와 "원 역사"에서 본 자연과 인간 이해   
(가) 창세기의 '시원기 설화'(창1-11장)의 집필 의도는 우주 기원론이나, 생명 발생이론이 아니고,존재계와  생명계의 진실한 모습을 들려 줌으로 고난 속에서도 "존재에의 용기"를 잃지말게 하자는 것.

 구약성경 창세기 처음부분(1장-11장), 다시말해서 하무라비왕조 시대와 동시대 인물인  아브라함의 탈향(脫鄕)이야기가 시작되기 직전까지의 창세기 이야기를,  구약학자들은 "원역사" 또는 "시원기 설화"(始原期 說話)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그것은 역사과학의 탐구로서 밝혀지는 사실적 역사라기보다, 우주, 자연, 인간, 죄, 투쟁, 살인, 죽음, 구원등 근원적인 삶의 원형들을 알려주는 '설화'(Saga)이다.
  전통적으로 특히 서방 라틴적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시원기 설화' 중에서도 창세기 1-3장을 그 남어지 후반부(창4-11장)와 분리시켜 독립적으로 이해함으로서, "부분을 전체의 빛에서, 전체를 부분의 빛에서 이해하라"는 해석학적 순환법칙을 위반하였다. 그 결과는 심각한 것이었는데, 원래 구약 창세기 편집자가 그 책을 편찬 재구성할 때 전달하려던 우주와 생명과 인간에 대한 총체적이고도 유기체적인 통찰력과 구원의 지혜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결과  창세기는  신의 전지전능을 과시하는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및 인간의 자연지배 정복론(창세기 1장), 여성에 대한 남성우위론과 물질에 대한 정신의 우위론을 구축하는 '이원론적 사고'(창세기 2장),  만인의 구원이 요청되는 "원죄교리"(창세기 3장)의 출처로서 경전본문내용들이 오용되거나 호교론적으로 교리증빙자료로서 남용되곤 하였다.   
  전통적으로 서방 라틴적 그리스도교는 창세기 1-3장을 "시원기 설화" 남어지 부분(창세기 4장-11장)에서 분리시켜 교의학적 기초자료로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은 그 특징이 매우 구원론 중심의 신학, 역사 중심의 실재관, 세계와 신을 철저하게 분리 시키는  초월론적 신관을 발전시켜왔다.  그리고 마침네  우주와 자연을 그 시계(視界)에서 잃어버리는 "역사 안에 갇혀버린 종교"가 되었던 것이다. 자연의 세계, 창조세계가 그 자체로서 담지하고 있는 영광과 권위와 권리가 상실당하고, 자연세계는 구원사의 역사과정에 종속되거나,  역사라고 부르는 드라마가 그 위에서 연출되는 고정된  무대로서의 피동적  기능만을 하도록 변질되었다.
  구약성경에 대한 문학비평적 연구와 편집사및 전승사적 연구결과에 의하면, 지금 우리가 구약성경 "시원기 설화"(창세기1장-11장)에서 대면하는 여러가지 설화들은  오랜기간  구전(口傳) 단계를 거쳤고, 또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기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주변세계의 다양한 '시원기 설화들'과 문화적 교류, 수용, 변용, 재해석, 지평융합을 이뤄왔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의 창조설화와 비교되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서사시, "에누마 엘리쉬"에 전해지는 창조설화, 에집트 멤피스에서 발굴된 거룩한 문헌자료에서 밝혀지는  유사한 설화들, 그리고 수메르,바벨론, 고대 아프리카 종교에서도 발견되는 바처럼, 흙이나 진흙 먼지로서 사람을 만들고 생명의 숨을 불어넣는다는 인간창조 설화나 홍수설화등은 문화인류학과 종교현상학적 연구를 통하여 볼 때, 그 설화 문학적 유형과 모티브가 구약성경에만 배타적으로, 독점적으로 있는 "계시적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정직한 신앙인으로 하여금  받아드리게 한다.
   그렇다면 구약성경 창세기는 19세기  종교사학파의 주장처럼 단순히 고대 근동지역 종교적 신화자료들의 집성물에 불과한 것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성경의 기록편찬자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고난체험을 통하여 얻은 깊은 영감과 계시적 지혜의 조명을 그들의 굳건한 믿음 위에 받아드림으로써 그 때까지  전승되어 오던 다양한 자료들을 이스라엘의 영의 용광로에 넣고, 새롭게 야훼신앙의 빛 안에서 재조형하고 재배치하고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면서 인류들의  영원한 경전으로 출산시켰다. 베스터만이 말한데로,"자기 실존의 근거요 밑바탕에 대한 원래적인 탐구는 모든 인류에게 공통된 것이다.이것은 모든 종족과 문화와 종교 속에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그 자체가 인간 존재에 속해 있는 것이다".
   창세기 전반부 "시원기 설화"(창1-11)는 다음과 같은 편집기자의 몇가지 중요한 해석학적 통찰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다른말로 말하면, 창조설화는 "무로부터의 창조교리", "원죄교리", "인간의 자연지배 정복론", "가부장적 남성 우월론", "종(種)의 진화론을 부정하는 창조교리", " 이신론적(理神論的) 절대초월신관", "단일 인종 세계분포이론"등등 그러한 것들을  정당화하려는 교리적, 또는 호교론적 동기가 아니다. 설화의 중심주제는   보다 근본적인 삶과 존재에 대한 전일적이고 근원적이고 통찰과 지혜를  보여주려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또한  집필의 근본목적 이다:   
   그리스도교의 창조신앙은 첫째,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스스로 그러한것"(自然), 스스로 존재하는 당연지사의 사물들이 아니고, 뜻의 들어난 것, 은총의 선물, 존제에로 현전(現前)하도록 불리움 받아 나타난 것, 그래서 존재는 감사할 것, 아름답고 좋은 것, 한마디로 "존재의 대긍정"을 가르치려는 세계관을 말한다. 구약성경에는 '스스로 그러하는 것' 또는 '스스로 질서지어있는것이라는 의미의 중국어 '자연'(自然)이라는 단어나 헬라어 '코스모스'(cosmos)dp goekdgksms 히브리 단어자체가 없ek. 그 대신 '하늘과 땅'등 구체적인 '피조물'(he ktisis)이라는  단어나 '전체'(koi) 라는 단어가 있을 뿐이다. 히브리적 사유에 있어서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하나의 창발적 사건으로서 이해될 뿐이며 스스로 객관적으로 질서있게 존재하는 객체적 대상으로서 파악되지 않았다. 세계는 언제나 다양하고 새로운 것들이 발생하는것이고,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지탱되고 생동하는 세계로 살아 충만해 있다고 보았다.
   둘째, 창조의 세계중에서 인간존재가 특수하게 그 위치를 받았지만, 인간존재란 그 본질이 흙이고, 자연임으로 인간은 그 상대성, 유한성, 자연과의 유기체적 관계성, 특히 동료인간과의  공인간성(Mit-menschlichkeit)을 잊지말고 신-인간-자연의 삼중적 관계에서 절대 월권하지 말것을 경고한다.  인간의 개인사와 역사 속에 있는 온갖 죄악과 비극은 운명의 장난이거나, 신들의 전횡이거나, 제3의 우주론적이고 신화론적인 원리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의지의 남용과 그의 탐욕과 휴브리스에서 온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셋째, 인간 본성은 선할수도, 악할수도 있는 두 가능성을 언제나 갖고있어서 창조질서 안에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형제살인, 홍수, 바벨탑의 붕괴등으로 상징되는 혼돈과 무의 위협을 언제나 받고있지만, 창조주의 보존의 은총,  구원의 은총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시는 축복대로 생명세계는 비존재를 극복하고 구원을 이뤄간다는 사실을 신앙고백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당시, 이스라엘민족이 역사적 고난과  시련속에서  삶을 회의하고, 존재의미를 잊어버리고, 무의미와 잡다한 혼돈의 무(無) 속으로 그들의 생명을 양도해 버리려고 유혹을 받을 때, 이스라엘백성과  동시대인들과 모든 인간들에게 생명을 긍정하는 "존재에로의 용기"를 불러넣어 주려는 것이다.
  창세기의 창조설화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과 역사적 경험이라는 "삶의자리"(Sitz im Leben)에서 채록되고, 재해석되면서 편집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백성들 자신의 생명체험 이야기및  우주 창생이야기는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들이 지니고 있었던 우주창조 이야기 사이에는 닮은 유사성도 있지만 고유한 특이성도 있다.  창조,생육과 번성,보존,축복, 안식이라는  삶의 원형적 리듬을 따라 공명상태를 이루면서도 절대 유일신관은 창조자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불가분리적인 상관관계 속에 넣고서 이해하는 독특성을 보인다.
   
  (나) 창조는 잡다한 혼돈에서 아름다운 질서와 조화에로, 미분화상태의 무차별적 전일에          서 분리를 통한 구체적 존재자들의 창발적(創發的) 현전(現前)운동.

창세기 창조설화 중에서 특히 창세기 1장 1절부터 2장 4절 전반부까지를 특히 경전의 문학비평적 연구결과 사제문서자료(P자료)라고 부르며, 이 자료가 집대성되어 창세기 1장으로 고정된것은 주후 600년경이라고 학자들은 본다. 그것에 비하여, 창세기 2장 4절 후반부터 3장 전체 내용을 이루는 원자료를 야훼문서자료(J자료)라고 부르며, 그 자료가 독립된 전승자료로서 문자로 고정된 때는 주전 1200년경이라고 본다. 사제문서자료(P자료,창1:1-2:4a) 안에 인간창조 이야기를  그 속에 부분적으로 담고 있지만(창1:26이하) 설화내용의 대부분이 인간이외의 다른 존재계의 창조 이야기이다. 그에  비하여, 야훼문헌자료(J자료,창2:4a-3:25)의 이야기 내용 대부분은 흙으로 인간을 만드는 이야기와 인간 타락 이야기이다.
 오늘날 구약 성서신학의 연구에 의하면,  원래는 세계창조 설화(P자료)와 인간창조 설화(J자료)가 직접 연관없이 독립된 전승단계를 거쳐왔다는것, 그런데 사실은 인간창조설화(창2장)가 세계창조설화(창1장)보다 더 오래된 것이라는 것, 창세기를 기록편집한 성서기자 어느 야휘스트는 그러한 두가지 다른 전승의 설화를 그의 신앙의 눈을 통하여 절묘하게 재구성 종합편집 함으로서, 자연과 인간과 역사, 자연과 인간과 신을 불가분리적인 관계성 안에서 연결시키고, 피조물이라는 전체성 안에서 인간의 위치와 한계와 사명과 삶의 궁극적 의미를 볼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세계창조설화 도입부분과 첫째날 창조이야기를 새번역 한글성경으로 인용해보면 아래와 같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       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하시니 빛이        생겼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셔서,빛을 낮이라 하       시고,어둠을 밤이라 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표준새번역, 창세기       1:1-5)

  세계와 인간의 기원을 설명하는 다양한 세계문명 속에서 채집되는 "시원기 설화" 유형은 크게 네가지 범주로 대별된다. 첫째, 만드는 행위를 통한 창조; 둘째, 음양생식과 출생을 통한 창조; 셋째, 투쟁을 통한 창조; 넷째,말씀을 통한 창조가 그것이다. 창세기 창조설화는 둘째와 셋째유형을  철저히 배격하고, 첫째와 넷째범주의 창조방식이 압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사제자료(P자료)의 창조이야기는 전형적인 "말씀을 통한 창조" 설화이고, 야훼문서자료(J자료)는 만들기나 행위를 통한 창조설화이다. 말씀을 통한 창조설화가 가장 후대의 , 가장 신학화된 창조설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형태인 생식과 출생을 통한 창조, 또는 발생과 생성을 통한 창조는 수메르, 에집트의 우주창조 이야기의 특징이고, 투쟁을 통한 창조이야기는 바빌로니아 서사시인 "에누마 엘리쉬"에서 고전적 표현으로 나타났는데, 마르둑과 티아맛 사이의 투쟁으로 말미암아 패배하여 찢긴 티아맛의 몸으로  세계의 창조가 이루어 진다는 이야기이다.
   창세기 창조설화는 이 세계를 지배하는 창조주가 악의 원리나 신화적  존재와 투쟁을 하거나, 신들간의 성적 결합을  통하여 우주만물이 창조되었다는 다신론적 고대설화 형태를  철저하게 부정 배격하고  시적 문체를 띈 간결하면서도 압도적인 말씀을 통한 창조설화를 보여준다. 첫구절은 총체적 선언적 문장으로서 창조세계 전체를 총괄적으로 아우르면서 창조주와의 관계와 창조세계의 본질을  밝힌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1:1). 세계는 신성의 넘처흐르는 유출의 결과도 아니고, 필연적 인과율의 연쇄고리로 연결된 존재세계도 아니고, 음양의 합생과 우주적 원질료의 조합생성의 결과물도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통한 무로부터의 창조" 행위가 어떤 절대무의 상태에서, 도깨비 방망이를 휘둘러 요술을 부리듯이 세계를 하나 하나 불러내는 그러한 단순신화 형태도 아니다. 창조가 이루지기 전의 '무'(無,Nothingness)란 성경구절에 의하면, 아직 형태를 입지못한 혼돈상태의 땅, 텅빈 공허, 깊음 어둠의 심연으로서 묘사되고 있다. 그 위에 하나님의 기운(영,신적 바람, 루앗흐)이 빙빙돌면서, 어미닭이 날개를 퍼득이며 새끼알을 품는 형국으로 운동할 때에, "빛이 있으라" 말씀 하시니, 빛이 생겼다고 설화는 이야기 한다. 그 빛이 좋음을 하나님이 보시고, 빛과 어둠을 갈라 놓으셨다고 했다.
   우리는 창세기 창조설화(창1:1-2:4a) 속에서 두가지 중요한 원리를 본다. 첫째는  창조이전, 비존재상태, 무(無)라는 것은 다름아닌, 형상(形相,Form)이 없는 절대혼돈(絶對混沌,Chaos)과 잡다 (disordered Many, 雜多)를 말하며, 창조는 형상과 질서와 조화와 아름다움과 구체성을 띄고 존재가 빛안으로 현전(Phenomenon,現前)하는 창발적 현상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창발적'이라 함은 창조적 발생이라는 의미로서 "빛이 있으라" 명령하는 존재구체화의 능력면에서 보면 창조이고, 어둠으로부터 빛을 갈라 나누어 내는 과정을 통한 빛 안으로의  현전으로서 보면 발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조설화의 둘째 모티브는  "갈라놓음에 의한 창조"라는것이다. 빛과 어둠의 갈라놓음, 창공과 바다의 갈라놓음, 육지와 해양의 갈라놓음, 낮과 밤의 갈라놓음, 각종 식물과 동물의 종류대로 갈라놓음이 그것이다. "갈라놓음에 의한 창조"란, 미분화된 천체성은 아직 구체적 존재자로서 나타니기 이전이기 때문에, 갈라놓음의 행위에 의하여 개별 존재자들이 구체성과 존재의 확실성을 창조주로부터 부여받는 존재확인 행위인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환상이나, 마야가 아니고, 구체적 존재성을 향유하면서 "참여의 원리"를 통해 전일성을 누린다. 하나의 존재자 개체는 각각의 류(類)와 종(種)에 속해 있고, 그 하나 하나의 종과 류는 더큰 질서지어진 전체에 참여하는 창조질서 안에있고, 그 전체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 안에 있다.
  창세기 창조설화(P자료 ,창1:1-2:4a)는  시공간과 대지와 바다와 창공의 창조, 식물의 창조, 천체창조, 동물의 창조, 인간창조로 이어지면서 창조를 하나의 유기체적 전체구조 안에서 전체로서 파악한다. 하늘의 물체들이 신성을 지니고 있다는 고대사회의 천체숭배나 점성술적 세계관으로부터, 히브리적 성서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갈라서게한 것이 넷째날의 천체창조 이야기 이다. 하비칵스와 린 화이트가  말하고자 한 것도 바로 이 점에서 이다. "자연의 탈신성화" 또는 자연을 포함한 전체 피조세계의 비마력화는 고대사회에서 자연을 경배하고 천체들과 자연을 숭배하는  우상숭배로부터 인간을 자유하개 하였다.그리하여 자연을 그저 두려움없는 대상으로서 자연그대로 대면하고 활용하고 탐구하게 함으로서 오늘날의 자연과학과 기술공학에 의한 자연정복, 자연수탈, 자연파괴가 결과적으로 이뤄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생태위기의 역사적 기원이 그리스도교의 창조신앙에 부분적으로 기인한다는 린 화이트의 지론에 필자는 동의한다. 그러나, 자연을 하나의 피조물로서 담담하게 봄으로서 자연숭배나, 천체숭배나 점성술의 숙명론으로부터 해방된다고 해서, 자연에 대한 적대적, 정복적, 수탈적 태도를 자동적으로 지니게 된다는 필연적 이유는 없기 때문에, 서구 근세 기계론적 자연과학의 자연수탈과 자연정복적  문화현상은 인간본성 일반이 지닌 자기중심적 이기심과 탐심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하지, 특정종교의 창조설화에 그 모든 원인을 전가하는 것은 문제해결의 길이 아니다.   

 (다) 창세기 창조설화 속의 인간 창조이야기는 히브리적 사유에서 히브리적 인간론의  본         질을 보여 줌.

  인간이 자연에 대한 성찰을 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과 자연과의 불기분리적 관계성과, 자연(우주) 안에서의 인간의 위치와 자신의 책임을 묻고 자각하려는 동기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창조설화 안에 나타난 서로 다른 두가지 인간창조설화( P자료 창1:26-31, J자료 2:4b-25)는 바로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인간학을 위한 기본 방향을 제시하여 왔다는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인간창조 설화의 두가지 전승자료 중에서, 창세기 2장에 나타나는 J자료(창2b-25) 보다 약 600년 뒤에 편찬서술된 P자료(창1:26-2:4a)는 인간이 지음받을 때, 그 재료나 질료가 무엇인지, 창조자가 어떤 과정을 밟아서 인간을 만들었는지에 전혀 관심이 없다. 남자와 여자가 어떤 절차상의 순위를 따라 서로 다르게 지음 받았는지에 대하여도  언급하지 않는다. P자료에 나타난 인간창조설화는 다만 인간도 다른 피조물들과 똑같이 "피조물"이라는것, 창조의 전체 구조와 시공간 속에서 자기의 위치와 역활을 부여받아 존재하게 되고, 다른 동식물과 똑같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축복을 함께 받은 피조물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아담)을  만들      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      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아담)을 창조하셨      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       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주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      든 생물을 다시리라" 하셨다.(창세기 1:26-28)

  P자료(창1:26-31)가 보여주는 인간창조설화 중에서 다른 피조물들과 다른점이 무엇인가를 두가지 점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그 하나는 인간이라는 피조물은  창조자의 "형상을 닮아" 서 창조되었다는 것(창1:26)과, 또 다른 하나는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고 땅을 정복하라(길들이라)는 그의 역활에 대한  명시(창1:28)가 그것이다.  창세기 인간 창조설화 P자료(창1:26-31)가 말하려고 하는 자연, 인간, 창조주와의 상호관계성에 대한 기본적 시각을 총괄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창조 역시 다른 전체창조 과정과 그 전체 구도 속에서 여섯째날에  창조함 받아 존재계에 등장한 한 피조물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히브리적 사유에서 인간존재는 그가 지닌 정신적, 영적 재능과 능력이 아무리 심원할지라도 인간은 다른 고대신화에서 보는 것처럼 신과의 신화론적 혈통관계에서 자기를 이해하지 않는다. 인간존재는 본시 천상세계나, 이데아의 세계에 있다가   땅위로 하강한 신적존재자가 아니며, 신들간의 투쟁을 통하여 쟁취한 타살당한 신적 몸을 소재로하여 특별하게 제작된 특별존재가 아니다. 둘째, 인간의 존엄성과 그 우주 속의 특별한 위치는 인간 존재자체가 "신의 형상물" 로서 신의 존엄, 영광, 권위를 담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의 형상론"(Imago Dei)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그 설화는 인간이 지닌 정신적 영적 자질론이나 외형적 동형론을 말하려는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 그 자체가 존엄하고 신의 영광을 반영하고 대리적으로 신의 권한을 담지고 대행하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메타포이다.   고대 제국의 절대 통치권자가 자신의 통치권한과 책임을 위임한 분봉왕을 파견할 때, 또는 자기 통치영역 안에 제왕자신의 직접 임재가 불가능할 때, 고대제국의 제왕들은  자신의 초상(형상)을 대리 현존시킴으로서 통치권의 정당성과 권위를 담보하도록 하였다. 그처럼, 땅 위의 인간이라는 피조물은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단지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 하지만, 그 인간존재와 함께, 인간 존재를 통하여 창조자의 영광, 권위, 의지를 드러내려 한다는 의식을 나타내고 있는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좀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형상론"의 신학적 의미를 통찰하건데, 창세기 편찬자는 고대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가치를 한없이 멸시하는 인간에 의한 인간 수탈,착취, 억압, 살육, 사회적 신분성차별에 저항하면서, 인간의 신성불가침한 존엄성과 평등성을 주장하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창조설화 P자료(창1:26-31)가 말하려는 셋째 요지 곧 생명들을 다스리고 땅을 정복하라는 "대리적 위탁 책임"이, 인간의 우주 안에서의 위치와 기능, 그리고 그 상호관계성에 대한 오늘날 생태위기론 쟁점의 근원이라고  거론되어 왔다. 다시말해서 인간의 피조세계 안에서 기능과 책임수행을 이해하려고 할 때, "다른 생물들을 다스리고 땅을 정복하라"(창1:28)는 위탁명령을 어떤관점에서 본래 성경기자의 의도대로 바르게 해석학적으로  이해하느냐의 문제이다. 모든 문헌해석은 '영향사 의식'을 가지고 이해되는 것이며, 각각 고대사회와 현대사회의  삶의 자리를 반영하게 되어있다. 다른 생물과 땅(자연)의 "다스림과 정복"은 결코 약탈자가 무자비하게 황폐화시키고 수탈하는 그런 행위일 수 없다. 고대제국의 제왕은 절대군주이지만, 동시에 영토의 군주로서의 영토 영역안의 모든 생명있는 것들과 땅에 대하여 축복을 중재하고, 그것들을 돌보고 보존하는 책임이 있는것이다. 군주의 절대왕권은 이러한 왕다운 직무수행을 행함으로서만 그 타당성과 존엄한 권위가 보장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28절에 나타나는  "땅을 정복하라(길들이라)"는 말이 선포되는 원이스라엘의 삶의 정황은 기름진 옥토를 오늘날의 생태위기에 이르도록 자연을 수탈, 오염, 황폐화시키는 그런 맥락이 아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땅"의 경험은 언제나 공허와 혼돈과 황량한 비존재의 상태로 돌아가버릴 수있는 "거치른 광야나 사막"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통치하고, 정복하라"는 말 안에는 개간하고, 정원을 돌보듯 관리하고, 질서와 복지상태에로 경작하라는 의미가 본래의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생태계 위기의 역사적 근원을 창세기 인간창조설화 속에 나타나는 한 구절 곧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구절에 원인론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경전주석학적으로 볼 때 해석학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인간창조설화 P자료(창1:26-31)가 말하려는 넷째 주제의식은 인간의 본래적 창조형태의 기본꼴이 단독자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 "나와 너", "우리와 너희"라는 인간관계성 속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존재는 독존적 단독성 안에서, 자의식으로 깨어있는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정신" 속에 있지 않고, 함께 더불어 사귀이며 말하고 들으며 , 서로 기쁘게 돕고 도움받으며 살아가는 관계성 안에 있다. 공인간성(共人間性,Mitmenschlichkeit) 그것이 인간본질의 비밀이며, 인간성의 기본꼴 이라는 것이다.
  창세기에 나타나는 또 다른 인간창조설화는 J자료(창2:4b-31)에 나타나 있다. 그리고 오늘날  성서신학은   P자료에 나타나는 창조신앙과 J자료에 나타나는 창조신앙이, 그 전승자료의 출처와 그 영향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신앙전통에서 내적으로 통일성을 이루고, 히브리적 사유가 창조설화를 통해서 증언하려는 신앙적 진리를 더욱 명료하게 각인시키고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J자료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창조신학 특히 자연과 인간과의 상호불가분리적 관계성에 대한 강조는 P자료의 문서화 작업보다 적어도 시기적으로 400-500년 앞서기 때문에, 우리는 J자료에 나타난 인간 창조설화(창2:4-31) 안에서 히브리적 자연, 인간, 신과의 관계성에 대한 근본적 관점을 식별해 낼 수 있는 것이다.
  J자료에 나타나는 인간 창조-타락설화(창2:4-3:24)가 말하려는 인간과 자연과 하나님에 관한 근본적 통찰과 증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과 자연, 인간과 땅과의 불가분리적 관계성, 공속성이 강조되면서 인간의 출처와 본질은 "흙, 땅, 먼지"라는 것이다. 인간의 자연성, 사멸성, 덧없음,연약성, 대지에로의 귀속성을 유감없이 나타내는 신학적 인간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땅의 흙을 가지고 사람을 빚어 만들었다"는 이 소박한 인간창조 설화는 육체와 영혼, 육체와 정신이라는 헬라적 이원론, 또는 데까르트적 심신이원론을 강하게 부정하고있다. 인간에게는 본래 불사성이 없다. 인간은 창조의 질서 속에서 흙에서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전체생명세계의 순환구조에 종속되어 있다. 그것이 창조질서요, 창조법칙이라는 것이다.
  둘째, 흙으로 만든 인간존재는 "하나님의 생명기운"(히브리어 '뉘샤마', the breath of life)이 코에 불어넣어지자, 살아 생동하는 생명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생명의 기운"(뉘샤마)은 "하나님의 영"(루아하)도 아니고, 이데아 세게에 선재(先在)하면서 신적 속성을 지닌 "불멸적 영혼"(the immortal soul)도 아니다. 다시말하자면, "생명의 기운"은 인간을 구성하는 구성요소가 아니라, 유기체적 물질체를 생명되게 하는 생기(生氣)인데, 그 출처와 귀착지가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고백이다. 생명이 생명으로서 약동하고 창조적으로 창발하는 원인을 "양의질화 법칙"으로서 설명하는 유뮬론적 생명관을 거절하고, 생명의 근원을 창조주 하나님에게 돌리는 성경적 사고가 나타나 있다.
  셋째, 인간의 타락과 땅위 역사의 무질서와 비극의 원인은, 신들의 투쟁이거나 우주의 규칙적 순환운동이 초래하는 우주론적 원인이거나, 또는 인간존재 그 자체 피조성이 지닌 선천적 결함 또는 본능 때문이 아니라, 자유의지의 남용에 기인한 "타이탄적-프로메테우스적 동기"(Titanic-Promethean motiv) 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보려는 인간의 교만"(hubris)은 창조의 원질서를 다시 교란시키고, 혼돈의 세계로 변질시키며, 돌봄과 양육과 다스림이라는 에덴동산 안에서의 자기 책임을  망각하고 지배 수탈의 관계 속으로 전락한다. 땅을 섬기고 지키는 위탁된 과제(창2:15)를 인간이 배신할 때, 땅은 엉겅퀴를  내고, 죽음은 고통으로서 닥아온다.  구약성경의 창조설화를 정직하게 드려다 볼 때, 근세이후 자연과 인관관계의 소외관계,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차별적 정복과 황폐화, 자연질서와 인간질서 사이의  이원론적 대립구조, 뉴톤-데까르트적인 기계론적 자연관 등등은 전혀 성서적 근거가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라] 안식은 창조신학의 정점이다.

  그리스도교적 창조신학의 정점과 최종목적(텔로스)은 일곱째날의 안식인데, 안식의 창조      신학적 내용은 노동의 휴식에 있지않고, 창조의 기쁨을 향유하고 생명의 충만을 즐기는것,       공동체 구성원간의 사귀임과 잔치, 전피조물이 신의 영광에 초대된다는 생명의 성화(聖化)와 영  광화에 있다.  
  사제문서자료(P자료) 증언에 의하면, 일곱째날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창조의 마지막 목표가 신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안식의 신학적 모티브는 후기 유대교가 성전과 율법을 중요시하고 안식일을 엄수하도록  안식일 법을 제정하기 전에, 창조의 궁극목적이 안식에 있음을 강조한다는 점에 우리는 유의 할 필요가 있다. 창세기 창조설화에 의하면, 신이 피조물을 창조하고 그 영광의 꽃으로서 인간을 지으신 것은, 신을 섬기게 하려 함도 아니요, 영원한 생산노동에 종사하게 하여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는 문화적, 정치경제적 존재로서 살게하려 함이 아니다.   
  안식은 신이 베푼 생명의 축제에 초청받아 참여하여 함께 사귀고 즐기는 자유와 기쁨에 있다.축제에서는 모든 형태의 의무규정에서 인간은 잠정적으로나마 해방되고, 노동의 생산성 향상이라는 근대사회의 신화에서 부터도  해방되고, 사회신분상의 차별과 갈등구조에서도 해방되고, 생명의 아름다운 모든 것을 향유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니 매우 아릅답고 좋다"고 하신 존재와 생명의 현실을 대면하여 몸으로 체험하면서 향유하는 것이 잔치이며 축제이다. 안식의 거룩한 잔치에 초청받아 잔치에 참여하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창조자의 조건없는 존재에로의 초청을 감사하면서, 창조의 아름다움을, 존재한다는 사실의 신비함과 선함을 향유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교의 자연과 인간이해에서 창조와 계약, 우주와 역사와의
   상호관계성

 앞장(2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자연과 인간이해를 성경 경전의 분석과 성서신학적 조명을 통하여 그 기초적 이해를 시도하여 보았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신학사에서 자연과 인간, 창조와 구원사의 관게, 그리고 시간과 영원의 관계성에 대한 신학적 사색을 깊이 한 사람들 중에서  성 어거스틴과 칼 바르트의 견해를 고찰함으로서 우리의 주제를 좀더 추구해보려고 한다.  


 (가) 성어거스틴에 있어서 창조, 시간, 그리고 종말

 카시러가 적절하게 말한데로  성 어거스틴(354-430)이야 말로 그리스도교 사상사 에서 만이 아니라, 서양 철학사 속에서 시간의 문제를 가장 근원적이고 포괄적으로 다룬 사람중에 한 사람이다. 어거스틴은 특히 그의 <고백록>과 <신의 도성> 속에서 시간과 영원의 문제를 창조와 존재문제와 연결시켜 심원하게 다루었다. 말 할 필요도 없이 시간은 공간과 함께 인간 인식작용의 근본적인 직관형식이기 때문에, 사람 눈의 시각기능 중에서 자기 눈동자나 눈섭자체를 볼 수없듯이 시간의 실체를 알 수 없다. 체험된 시간을 시간성이라고 말한다면, 인간의 시간성은 곧 인간존재의 규정성이요, 실존적 존재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 근거 지반이면서, 우리의 유한성을 실감나게 하는 한계상황적 단절이다.
 어거스틴이 플라톤 및 신플라톤적인 철학사상과 성경의 신앙적 증언들을 자신의 영혼 안에서 통전하면서 파악한 시간성의 속성은 매우 부정적인 모습으로서 파악되고 있다. 다시말해서 어거스틴이 파악한 시간성은 항상 지나가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시간성은 존재의 분산및 분열현상과 긴밀하게 관계되어 있으며, 불가역성을 특징으로하고서 비반복적인 일회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시간은 유한성의 가장 대표적인 특성으로서, 신의 영원성과 날카롭게 대비 되는 것으로 어거스틴은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은 영원자로서 언제나 동일하고 불변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시간성은 없고 다만 영원한 현재로서 모든 시간을 초월하신다.   반면에 시간은 항상 지나가는 것으로서 무상성, 불안정성, 파편성, 분열성, 상대성으로 나타난다. 신과 피조물의 근본적 특징은 신의 영원성과 피조물의 시간성의 대비에서 들어난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신플라톤적인 세계관이 얼마만큼 성서적인 히브리적 사유를 담보하고 있는가는 검토해야 할 과제이다. 문제는 어거스틴이, 영원자(창조자)와 피조물을 영원과 시간의 특징으로서 대비시킴으로 인하여, 헬라철학적인 본질과 현상의 이원론적 사고가 그리스도교의 신학속에 깊이 침윤해 들어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유년해야 하겠다. 어거스틴에 의하여 히브리적 사유와 플라톤-네오플라톤주의와의 사상적 지평융합이 심도깊게 이뤄지고 기독교사상이 더 풍성해졌다는 긍적적 측면이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히브리적 사유와 신앙의 본질적 변질이라는 부정적 측면도 있는것이다. 예를 든다면, 현상세계에 대한 본질세계의 우위성, 자연계에 대한 정신적 영적 세계의 우위성, 감성적인것에 대한 이성적인것의 우위성이라는 비성경적 또는  반히브리적  사유방식과 가치체계에 기초한 헬라적 실재관이 기독교 안에 깊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어거스틴 시대에 우주기원에 관한 이론들은 신화적 이론들을 제외하면  크게 세가지  입장으로 대별할수 있었다. 첫째는 '형성설'(the formative theory)인데 이 입장에 의하면, 이 우주세계는 영원부터 존재하는 어떤 근원적 형이상학적 질료로부터 형성되었다는 설이다. 형이상학적 질료란 물질개념과 다른 가능태 상태의 형상(Form)이 없는 "혼돈적 무"와 같다. 플라톤의 대화편 <티마이우스>(Timaeus) 에서 데미우르고스가 질료를 이데아에 의하여 세계를 형성해간다는 신화적 세계창생 이론이라든가, 힌두교나 불교나 유교의 집적설(集積說)이나 인연생기설, 그리고 기일원론적 음양합생설도 결국 형성설의 일종이라고 볼 수있다.  둘째이론은 '유츌설'(emanation theory)인데 플로타이누스가 말하는  일자(一者)로부터의 만유의 유출이론이 그대표적 예이다. 존재의 위계질서는  일자(一者)의 하강(descent)과 상승(ascent) 운동에 비례하여 결정된다. 세계 우주는 일원론적이며 범신론적이다. 이러한 실재관에서는  순수정신인 일자(一者)가 비물질적이기 때문에 물질에 대한 정신의 우위성이 강조된다. 이러한 두가지 세계기원설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제3의입장 곧 '창조설'을 지지하고 저 유명한 "무로부터의 창조"이론을 정립하였다.
  어거스틴의 "무로부터의 창조교리"가 말하려는 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 교리는 첫째, 창조주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실재하시는 존재이며, 모든 피조물은 자존적인 존재가 될수없는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무로부터 지음받았기에, 우발성(contingency)과 유한성을 지니면서 항상 무에로 되돌아갈 가변성(mutability)아래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교리가 지적하려는  둘째 점은, 세계창조는 다만 창조주의 자유의지와 그의 선하심과 은총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창조된 세계는 선하고 아름답다는 존재긍정의 세계관이다. 어거스틴은 "모든존재는 그것이 존재하는 한 선하다"고 주장하였다. 세계 현실의 악은 '선의 결핍', '무에로의 타락', '선의지의 결핍' 때문이라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어거스틴의 '무로부터의창조'교리는 결국 창조는 목적이 있다는 유목적적인 목적사관의 원형적 근거를 제공 한다. 존재의 형성과정이거나 역사의 운동과정은 우연이거나 맹목적이거나 순환적 반복행위가 아니라, 신의 영광에 참여하는 즉 안식에 이르는 텔로스를 지향한다고 어거스틴은 보았다.
  어거스틴은  창세기주석에서 창세기 1장 1절 해석을  2절 이하로부터 구별하고, 전자와 후자는  근본적인 질적차이를 가진 창조행위로서 두 단계로 나누어  해석한다. "하나님이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였다"(창1:1)는 구절을 전체 창조설화의 서론적 명제로서나 혹은  총괄적 선언명제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석하는 대신  어거스틴은  '하늘과 땅'(caelum et terra)의 해석에서 '하늘'은   순수하게 형상화된 '영적 하늘'(caelum intellectuale)로서, 그리고 '땅"은  아직 어떤 형상을 입지않은 질료, 즉 '무형의 질료'(materia informis)를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태초의 이 '하늘과 땅'의 창조는 '절대무'(ouk on)로 부터의 창조이기 때문에 창세기 1:2절 이하구절에서 나타나는  엿새동안의 창조행위 곧  '상대무'(me on)로부터 형상과 질서를 입혀 불러내는   형성적 창조행위와 구별된다고 보았다.
  어거스틴은 고백록 속에서 말하기를 "당신은 절대무(de omnino nihilo)로부터 질료를 창조하시고, 그 형상이 없는 질료로부터(de informi materia)세계를 형성하셨습니다" 라고 말한다. 물론 이 구별은 어거스틴에 있어서 인식론적 ,논리적 구별이지 시간계기적 구별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노래할 때, 소리(sound)가 곡조(tune)에 논리적으로는앞서지만 시간적으로는 동시적인것과 같다.
  시간이란 형상이 부여된 피조물과 함께있게 된, 존재자의 상흔이기 때문에, 시간과 모든존재자는 함께 있다. 따라서, 형상을 아직 입지않은 무형적 질료와 완전한 형상만을 지닌 천사적 존재들은 시간을 갖지 않는다고 말할 수있다.  전자는 시간 이전의 상태에 있고, 후자는 시간을 초월해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견해에 의하면 창조세계는 두가지 요소에 이하여 제약(condition)되고 있는데, 하나는 '무형의 질료'요, 또다른 하나는 창조주의 마음에 있는 '영원한 형상'(eternal forms)이다. 후자는 말씀안에 있는 로고스들이요, 이데아들 이라고 볼 수 있다. 무형의 질료는 말씀(로고스, 영원한 형상)에 의하여, 일정한 구체적 존재로서 실재성을 입고 존재자로서 안정되고 질서있는 아름다움과 선을 반사하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시간의 제약성을 받게되면서 사멸성의 운명도 동시에 얻게된다. 사멸성이란 곧 존재의 분산이요, 비존재인 무형의질료 에로 와해되고 침몰해 가는 현상을 이름한다. 이것에 저항 할수있는 능력은  오직 창조자의 절대 은총, 사랑, 보존의 능력이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세계창조와 그것의 보존과 세계의 계속적인 창조적 과정은 창조자의 은총의 행위 이시다. 세계가 존재하며 무로 환원하지않고 지탱되고 끊임없는 아름다움과 새로움으로 충만할 수 있다는 사실자체가 신의 선하심과 은총의 능력이라고 어거스틴은  본다.세계와 인간은 시간의 파편성에 의해 제약되고 분열을 경험하지만, 시공간의 제약성 자체가 악이거나 도피해야 할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어거스틴에 있어서 시간성은 곧 피조성이요, 그것은 모든  피조물이  구체적 실재성을 입고 존재를 경험하고 향유하는 존재론적 구성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을 벗어버릴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영원과의 조우를 경험해야 한다.  시간성 속에서 영원성을 덧입는 경험을 해야 한다. 세계는 부정되거나 폐기되어야 악의 도성이 아니고, 모든 부정적인 것들이 엄존함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신 안에서 아름다움과 선함을 발현하고 체험하는 "영원한 도상의 과정"인 것이다. 역사와 세계는 영원하지도 않고, 그것 스스로 자족하지도 않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그것은 창조자에게서 지음받아 존재를 부여받고, 창조자의 선함과 영광을 분여받고 향유하다가, 다시 더 높은 차원에서 영원자 안에서 안식할 열려진 세계이다. 그것이 어거스틴이 이해한 창조된 세계현실 이다.   
  
(나) 칼 바르트 창조론에서 창조와 계약, 자연사와 구원사   

  칼 바르트(1886-1968)는 그의 <교회교의학> 제3권 창조론에서 우리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바르트는 먼저 그리스도교 신학이 말하는 창조신앙과 세계현실이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된 피조적 현실이라는 지식은 신앙의 지식이고, 궁극적으로는 역사과학적 탐구로서는 밝혀지지 않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빛에 의해 밝혀지는 지식임을 강조한다. 바르트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천지와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신앙적 명제는 모든 전체 실재가 참으로 신과 구별된 실재로서 참으로 실재한 다는것과, 이 전체 피조영역은 창조주에 의해 뜻해졌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창조의 주(主) 하나님이지 단순한 세계원인 이거나 생성원리이거나 단순한 법칙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르트는 세계가 엄연한 실재의 세계로서 존재한다는 현실은 그 자체의 자존적인 존재이유와 존재능력으로서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창조세계의 권리 ,의미, 목적, 존엄성이 모두 피조물을 당신 자신의 영광에 초청하고  창조주와 함께, 창조주와 구별되어 존재하기를 기뻐하신 창조자의 영원한 선택과 결정, 그 스스로의 영광과 즐거움에서 결행한 영원한 선택과 계약안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철저한 신학적 언표인데, 그것을 바르트는 "창조는 계약의 외적 근거이고, 계약은 창조의 내적 근거이다"라고 신학적 명제로서 표현한다.
  바르트는 창조자는 비역사적(non-historical)이거나 그런 의미에서 또한 비시간적(non-temporal) 존재가 아니라, 모든 시간성과 역사성의 존재론적 근거로서 시간의 충만이고, 과거, 현재,미래를 동시에 경험하는  시간의 창조적 지반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세계가 창조 되었고, 창조되고 있으며, 미래에도 새롭게 창조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 자신의  자유로운 결행과 은총의 선택으로서 그의 영광의 들어내심이고, 그의 곁에 자신과 구별되는 한 피조현실의 실재가 존재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선택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점을 바르트가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절대주권과 은총의 현실성을 강조하면서, 피조현실이 존재하는 이유가 필연이거나, 우연이거나,  자연자체가  "스스로 조직하는 우주"로서 자기를 영원히 지어가고 형성해가는 자존적 실재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어거스틴처럼 하나님의 창조는 한 역사인데, 창조가 하나의 역사라는 의미는  창조가 시간의 창조와 함께, 시간 안에서 이뤄진 창조자의 결행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영원과 대조되는 시간이란 곧 피조물의 실존형식이다. 물론 영원이란 단순한 시간성의 부정으로서 무시간적 영원이 아니다. 도리혀, 영원이란 모든 시간의 원천이고, 시간의 충만이며  절대시간 이다.바르트에서 영원이란 현재,과거,미래의 동시적 통일이고, 시작,중심,종국의 동시적 일치이며, 또한  시원,과정,목표의 동시적 통전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원이란 곧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고 , 하나님의 영원성은 무시간적인 영원한 현재가 아니라 모든 시간의 충만이고 시간의 원형(prototype)이다.
  신학적 명제로서 독특한 표현으로 말하는 바르트의 창조론은 모든 경험과학적 창조현실에 대한 설명과 형이상학적  우주론이나 존재론을 넘어서서, 과감하게 그리스도교 신앙에 기초한 창조론을 설파한다. 창조와 계약이 서로 공속적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그 존재근거가 된다면 창조는 하나님의 영원한 은총의 선택행위로서 피조물을 당신의 영광에 초대하고 참여시키며 즐거워하는 구원사건의 토대가 되고, 무대가 된다. 그러나 창조가 단순히 구원의 드라마가 그 위에서 전개되는 고정된 무대장치일 뿐이라고 오해한다면, 바르트의 창조론을 우리는 크게 왜곡시키게 된다.      신의 영원한 은총의 선택적 결행, 곧 은총의 계약이 창조행위로 나타나는 내적 근거라고 한다면, 창조와 구원은  동전의 앞뒤처럼 동시적이며 일치한다. 다시말해서 구원(계약역사)은 창조(우주자연)라고 부르는 무대 위에서 전개되어가야 할  드라마의 전개가 원본대로 진행 되지않기 때문에, 그 오류를  수정하기 위하여 연극진행 도중에 개입된 신의 조정행위가 아니다. 첨부터 진행되던  바로 원 뜻의 창조적 결행으로서 전체 피조계의 현실총체적 드라마가 곧 구원과정이요 구원의 현실이다. 창조가 곧 구원이며, 구원은 곧 시간 속에서 창조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사'란 일반 우주사와 구별되어 전개되는 독특한 종교사이거나 교회사가 결코 아니다. 우주적 보편사의 내적 의미가 곧 구원사이다. 일반 세속사의 내적 의미가 구원사이다. 아니, 사실대로라면 자연사 그 자체가 구원사의 일부이다.
  위에서 살펴본대로, 성어거스틴과 칼 바르트의 신학적 사유 안에서 볼 때, 창조전승과 구원사적 맥락에서 계약전승은 분리되어 있지 않고 불가분리적 관계성 속에 있다. 그렇다면 지난 19-20세기 그리스도교 신학 안에서 발전한 구원사 신학 일변도 강조는 분명히 성서가 증언하는 멧시지, 곧 자연 자체가 창조주로부터  그 독자적인 존엄성, 영광, 품위를 담보 받고있다는 멧시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자연자체도 신의  구원과 영광에 참여하도록 초청 받고 있다는 성서의 근본 멧시지를  손상시켰다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러한 성서의 근본적 통찰을 훼손시킨 이유는  역사주의라고 부르는 시대적 이념에 신학이 스스로를 종속시켰으며, 근대 자연과학이 이뤄놓은 놀라운 업적과 계몽주의적 합리주의 이념에 직면하여 신학이 자신의 정당한 학문적 발언을 포기했다는  비판적 자기 성찰에 도달하게 된다.   

[4] 창조안에 계신 하나님

  (가) 생태학적 창조론의 대두

  대체로 1970년 대 이후 그리스도교 신학계는 20세기 전반기 시대의 창조론이 다루려던 주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신학적 과제에 직면하여 있다. 20세기 전반기 그리스도교 신학계가 직면한 창조론의 문제는 창조의 현실적 실재와 힘으로서 등장한 '종족과 민족'의 우상화및 그것의 절대화에 대한 이념적 비판을 가하는 문제였다. '혈통과 대지'를 신성시하고 절대시하는 인종적, 국수주의자들의 정치적 이념, 서구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속에 은폐되어 있는 허구의식을  어떻게 밝혀내고,  그  만행을 저지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구체적으로 나치즘과 파시즘, 그리고 일본의 황국주의등 정치종교적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기위하여 신학계의  창조론의 시급한 잇슈는 인간정신의 내적 가능성을 스스로 절대시하는  내재주의적 신학을 공격하는데 집중되었다.
 그리하여 칼 바르트를 중심으로하는 20세기 전반기 변증법적 신학운동은  '창조세계를 초월하신 하나님', '피조물과 창조자의 질적 차이'를 강조하면서 '자연신학'의 관제를 '하나님 인식의 문제'라는 좁은 관점에서 논의하는 조심스러움을 보였다. 그러나, 이제 20세기 후반 특히 1970년대 이후부터 그리스도교 신학은 새로운 자연신학의 대두, 새로운 창조신학의 강조, 생태학적 위기를 신학적 과제로 자각하고 자연(창조) 그 자체를  신학의 주제로 삼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대표적 사상가의 한 사람으로서 율겐 몰트만을 들 수 있다.   율겐 몰트만은 그의 최근의 저서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생태학적 창조론> 안에서 다음과같이 말한다: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이라는 제목과 함께 나는 하나님을 성령으로 생각하였다. 하나님       은 '생명을 사랑하는 영'이며, 그의 영은 모든 피조물들 '안'에 있다....피조물 안에 계시는
   신적인 창조의 영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창조론은 자연철학과의 대화를 위한 출발점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우리가 창조자, 그의 창조, 그리고 창조의 목적을 삼위일체론적으로      본다면, 창조자는 그의 창조의 영을 통하여 창조전체와 개개의 피조물 안에 거하시며, 그의      영으로써 창조를 유지하고 존속하게 한다. 창조의 내적인 비밀은 하나님의 이 거하심에 있는      데,이것은 안식일의 내적 비밀이 하나님의 쉼에 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만일 창조의 목적과      미래를 질문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되는 (계시록21장) 창조안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빛나는 거하심에 결국 부딪히게 된다.

위 인용구에 흐르는 새로운 신학적 사유의 패러다임 전환은  결국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던 20세기 전반기 신학적 무드로부터 전환하여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면서  '자연-인간-하나님'의 상호 침투내재적 초월경험을 강조하려는 추세인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창조신학의 대두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신관 곧 '절대적 주체자로서의 유일신' 이라는 신관을 폐기하고 그 신적 생명의 존재양식 자체 안에  내재적 상호침투와  '상호 순환적 사귀임'(perichoresis)을 핵심으로 하고있는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이해로 다시 복귀함을 의미한다.  세계와 맞서있고, 세계를 초월하여 있는 전능한 유일신적 신관에서는 신의 세계초월성과 세계지배가 강조되기 때문에, 창조된 세계는 하나님 없는 세속화된 세계가 되어갔고, 하나님은 창조세계 현실과 무관한 형이상학적 초월존재로서 퇴위해 갔다. 그러한 비그리스도교적 초월신관에 상응하여, 신의 주권과 세계지배권을 위임받았다고 보는 근대적 주체철학의  인간학은 인간 자신을 인식과 의지의 '주체'로서 정위하고  세계를 그의 '대상'으로 정위하는 주객도식을 만들어냈다.
  몰트만은 중세기 신학과 오늘날 카토릭 신학의 기본명제인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않고 오히려 자연을 전제하며 완성한다"라는 명제를 다음과 같이 바꾸어 이해한다: "은혜는 자연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 준비 시킨다".  몰트만의 이러한 신학적  명제수정은 전통적 신학이 창조와 구원,자연과 초자연, 피조세계와 창조자를 이분법으로 분활하고 전자를 후자에 비하여 불완전하고 더나아가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전자의 후자에로의 종속을 암묵적으로 받아드리는 발상법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게 하려는것이다.  그러한 몰트만의 새로운 신학적 사유는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을 고유한 메시야적 종말론의 빛 안에서 미래 개방적으로  인식하려는 태도인 것이다. 우리가 앞서서 보았듯이,바르트에 있어서는  신의 영원한 선택과 계약이 창조의내적 근거였으나,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역사적 계약의 중요성보다는 계약을 통하여 약속되고 보증된 미래의 '영광의 나라'가 창조의 내적근거가 된다.
  몰트만이 그의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이라는 책의 부제를 <생태학적 창조론>이라고 명기한 이유도 단순히 그의 창조신학을 최근의 생태계 위기론을 의식하면서 '생태학적 윤리의식'을 염두에 두고 창조론을 논의하겠다는 의도 이상이다. 다시말해서, 희랍어 어원분석에 의하면 생태학(Ecology)은 '집(oikos)에 관한 이론'인바, 집이란 생명의 거함과 체류의 상징이므로,우주자연 전체 곧 창조세계를 인간과 생명체들과 창조자의 거함과 체류의 집으로서 파악하려는 의도를 나타낸다.
  그리스도교 창조신앙에 의하면, 창조(우주자연 현실세계)는 '하나님에 이해' 이루어지며, '하나님을 통해' 형성되어가며, '하나님 안에서' 실존한다. 하나님의 영(Ruach)의 끊임없는 유입으로 인하여 피조물들은 구체적 존재형상을 입고 '지어졌으며'(bara), 그 창조영의 새롭게 하는 창조성과 생기를 힘입어 거듭 '새로워진다'(hadash). 즉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영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고 그 창조적 힘 안에서 지속적 창조를 수행하며, 신적 영의 임재가 창조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규정한다. 요한 칼빈의 표현을 빌리면,"성령은 어디에나 임재하여 모든 것을 유지하고 양육하며 살게한다". 몰트만도 창조세계 안에 끊임없이 임재하는  하나님의 영의 활동(Wirkung)을 창조하는 활동, 보존하는 활동, 쇄신하는 활동, 완성시키는 활동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면서 창조자의 세계내재성과 세계의 자기초월성을 긴밀하게 상관시킨다. 세계현실이 항상 미래개방적인 새로움을 향하여 자기초월을 할 수 있는 것은 창조자의 세계내재를 통하여 존재의 개방된 여백을 창출해내는 창조자 자신의 자기제한과  자기비움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몰트만의 새로운 창조이해가 전통적인 범신론적 사고, 곧 세계와 신의 근원적 일치에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몰트만의 생태학적 창조론은 세계현실과 창조주 관계의 상호 '구별'에 강조점이 놓여있지 않고 상호 내재적 사귀임에 강조점을 두려고 한다. 그러나 세계의 창조는 세계의 발생(Weltverursachung)과는 다른 것이라고 강조한다. 전통적인 신학적 표현들은 창조자와 세계의 관계성을 표현할 때, 창조,보존,유지, 완성등 일방통행적 수직지배 관계용어를 많이 사용해 왔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거함, 함께 고난당함, 참여, 동반, 인내, 기뻐함, 영광스럽게 함등과 같은 사귐을 나타내는 쌍방 교류적 수평관계적 언어를 사용하기를 즐긴다.
  그리스도교 창조신앙에 의하면, 세계를 초월하는 하나님과 세계안에 내재하는 하나님과  세계를  통한 창조적 과정 안에 있는 하나님은 같은 한분 하나님이다. 한분 하나님이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신다"(에베소서 4:6).그리하여 하나님은 창조세계 '안'에 계시며, 창조세계는 하나님 '안'에 있다. 처음 지음받은 '하늘과 땅'은 버려진채로 하나의 질료로서 저기와 여기에 그냥 존재하고 있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풍요로운 자유의 영광, 창조적 영의 생기로 끊임없이 침투되고 메시야적 영광의 하나님나라가 비취는 종말론적 빛에 의해 조명되고 있다. 그래서 세계현실은 절망적 불의와 위기 속에서도 언제나 새로움, 개방성, 창조성, 자기초월성을 담지한다.  결국 그리스도교적 창조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재적 상호침투, 상호사귀임, 상호구별되면서 하나되심의 신적 신비가,  '존재유비'나 '신앙유비'를 통하여 마침네  창조적 자연, 그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 그리고 하나님의 삼자 관계성을 이해하는  규범적 원형이 되는 것이다.

  (나) 自然-神-人間의 不相雜,不相離의 관계성

  우리는 위에서 창조적 자연, 인간, 창조자 하나님의 삼자관계성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신학의 최근 이해에 대하여 일별하였다. 그 삼자관계성에 대한 새로운 성경 주석학적 이해는 종교개혁이후 특히 근세 심신이원론적, 물질/정신 이원론적 데까르트-뉴톤적 세계관에 의해 쇠뇌되어왔던  근세이후 그리스도교 신학적 토양에서 볼 때  신학적 사유의 혁명적 패러다인 전환을 의미한다.
  정통적 그리스도교 교의는  우주(자연)에 대립한 주체적 창조주를 강조하여 자연과 창조자(신)의   질적 차이에 역점을 둠으로서 범신론적 신관에로의 오염을 지나치게 경계해 왔고, 따라서 창조자(신)의 세계초월성과  자연의 피조성이 강조되어 왔었다. 그 결과 자연은 그 神聖性을 박탈당하고, 비신성화되거나 비주술화됨으로서 결과적으로는 자연안에 본구적으로 내포된 능산적 창조성과 생명적 충일성 마져 거세되고 자연은 "죽어있는 물질적 소재"로 전위되었다.
  이러한 자연과 신의 불연속적인 질적차이의 강조는 인간과 자연, 인간성과 신성의 관계성에 대한 이해에 영향을 미쳐 인간을 자연 위에 군림하게 하는 정신적 실체로 정위시켰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창조주(신)와는 질적으로 다른 한 피조물로 정위시켰다.
  줄여말하면 전통주의적 신학에서 자연-신-인간, 그 삼자관계는 철저한 질적 차이성이 강조되고, 불연속적인  분리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앞절에서 살핀대로, 그리스도교 신학의 신비주의적 전통 속에서, 성례적 신학의 전통 속에서, 특히 최근의 생태학적 성령론신학의 대두 속에서 지근까지이해되어 왔던 정통주의적 견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自然-神-人間의 삼자관계성에 대한  새로운   발상법의 전환을 촉구하게 되었다.
   새로운 발상법의 전환이란, 마치 신유학의 전통에서 理氣關係를 설명할 때에 상호 혼동시킬수없고, 상호 분리 시킬수 없는 不相雜,不相離의 원칙을 강조하듯이, 自然-神-人間의 삼자관계성을 그렇게 이해해야만 바른 그리스도교적 이해에 이른다고 말 할 수 있다. 불연속적인 질적차이를 강조하기 보다는, 불가분리적이고 불가혼동적인 삼자관계성을 강조하는 것이 보다  성경 경전에 기초한 바른 이해라고 보는 것이다. 필자는 이하에서 그러한 견해의 타당성에 대한 그리스도교  경전에 기초한 몇가지 대표적 사례를 언급하려 한다.       
   창세기 창조설화(사제문서자료,창1:1-2:4)는 물론 우주만물의 궁극적 창조자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적 세계관을 나타낸다. 그러나 좀더 자세하게 창조설화를 음미해보면, 자연을 대변하는 땅, 하늘, 물등은 결코 所産的인 물질적 실체만이 아니고, 창조자의  능력을 대행하여 혹은 창조자의 능력과 공조하여 무수한 생명있는 것들과 자연실재를 조성해내는  能産的인  자연실재라고 보는 것이다. 창세기 1장 창조설화의 해당 본문구절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여라. 씨를 맺는 식물과 씨 있는 열매        를  맺는 나무가 그 종류대로 따 위에서 돋아나게 하여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땅은 푸        른 움을 돋아나게 하고, 씨를 맺는 식물을 그 종류대로 나게 하고,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그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였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창1:11-12)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늘 창공에 빛나는거들이 생겨서, 낮과 밤을 가르고, 계절과 날        과 해를 나타내는 표가 되어라. 또 하늘 창공에 있는 빛나는 것들은 땅을 환히 비추어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창1:14-15)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물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고, 새들은 땅 위 하늘 창공으로 날아다녀       라"하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어라. 집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그 종류대로 내어라"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창1:20,24)

  이상에서 본대로, 창세기 창조설화는 창조를 창조자의 전능을 신화적으로 과시하려는 의도를 찾아 볼 수 없고, 창조 의지적 "말씀에 의한 창조행위"를 수행함에 있어서, 하늘, 땅, 물이 각가가 창조자 하나님과 불상잡의 관계에서, 그러나 동시에 불상리의 관계에서  능산적으로 창조에 동참하는  참여적 능산자로서 정위된다. 땅이 식물들을 내고, 물이 생물들을 번성하게 한다.
  자연은 죽어 버려져 있는 물질덩어리가 아이었다. 그 대표적 성구로서 흔히 생태학적 성구로서 요즘 주목받는 세군데 성경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모든 피조물이 주님을 바라보며, 때를 따라서 먹이 주시기를 기다림니다. 주께서 그들에      게 먹이를 주시면, 그들은 받아 먹고, 주께서 공급하여 주시면 그들은 좋은 것으로 배를 불      립니다. 그러나 주께서 얼굴을 숨기시면 그들은 떨면서 두려워 하고, 주께서 호흡을 거두어      들이시면,   그들은 죽어서 본래의 흙으로 돌아 갑니다. 주께서 주의 영(ruach, 숨, 생기)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 됨니다. 주께서는 땅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시편      104:27-30)

   그 날에는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고,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벌레와 언약을 맺고,
   활과 칼을 꺽어버리며 땅에서 전쟁을 없애어, 이스라엘 백성이 맘놓고 살 수 있게 하겠다.       그 때에 내가 너를 영원히 아내로 맞아드리고, 너에게 정의와 공평으로 대하고, 너에게 변함      없는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고, 너를 아내로 삼겠다. 내가 너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너와 결혼      하겠다. 그러면 너는 나 주를 바로 알 것이다. 그 날에 내가 응답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       다.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에 응      답하고, 이 먹을 거리들은 이스르엘에 응답 할 것이다.(호세아 2:18-22)  

   그것은 곧 피조물도 사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      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함께 겪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로마서 8:21-22)

 위에 인용한 세군데 성경구절은 히브리적 사유의 근원이 되며, 그리스도교 사유의 모태가 되는 原이스라엘의 自然-神-人間의  삼자관계가 얼마나 철저하게 不相雜, 不相離의 관계에서 파악되고 있는지를 잘보여주는 성경구절이다. 그리스도교 경전에는 결코, 우주자연과 삼라만상을 높이  초월한 '절대타자'로서의 초월신 따위를 상장하지 않는다. 자연 그 자체를 神이라고 경배하지 않지만, 자연을 창조자의 영광을 드러내는 피조물일 뿐만 아니라 불가분리적인 관계성 속에서 함께동병상린한다. 자연-신-인간은 "순환적 침투"(perichoretischen Durchdringung) 가운데서   상호 구별되지만 상호 분리되지 않으며, 상호 유기적 관계성 속에서 일치를 경험하지만 상호 혼동되거나 혼잡하게 되지 않는다.
  우리는 창세기 인간창조설화를 담고 있는 서로 다른 두가지 자료(창1:26-28,창2:4-25)는 경전본문비평과 역사비평적 연구결과 시대적 배경이 다르고, 그 民談口傳的 오랜 삶의 자리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두가지 종류의 인간창조설화를 창세기 서두에 아무 거리낌없이 연속적으로  편집한 것은 自然-神-人間  삼자간의 불상잡, 불상리의 원칙에서   히브리적 사유방식은  매우 유연하고 자유로웠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인간존재는 철저히 흙으로 그 몸을 지음받은 자연의 소산물이면서, 동시에 "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음으로서 그 독특한 신적 영광과 신성을 인간성 안에 담지한 존재로서 살아 갈수 있다는  신념이다.
  히브리적 사유에서는 결코 물질적, 육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임을 부끄러워하여 탈육체화 하여 순수 정신적 一者에게로 상승하려는 신풀라톤적, 영지주의적 구원론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대신 모든 것이 "영광스럽게 변화 할 것이다"고 믿는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신성이 몸이 되어서, 충만하게 머물러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이 안에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골로세서 2:9-10)라고 사도 바울을 말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보면 자연은 신성의 충만을 담지하고 매개하는 성례전적 실재(Sacramental reality)이며, 인간은 신의 형상을 담지하는  신적 영광의 구체적 영물적 실재 이면서 동시에 자연과 공속적 관계성 속에 있는 자연의 일부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교에서 自然-神-人間의 삼자 관계가 위에서 새롭게 살핀대로 不相雜, 不相離의 원칙아래에서  상호 "순환적 침투"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되어가는 창조적 과정이라고 한다면, 동서철학의 만남과 대화에서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이 열려질 수 있다고 본다.  
   


출처 : 주사랑
글쓴이 : 항공모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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