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죽음과 완성
금확섭
1.죽음의 원인
1) 죽음은 죄의 형벌인가?
죽음의 원인에 대하여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전체적으로 묵시사상적이며 바울적인 이론1)을 추종했다. 즉 행위와 결과의 연관성에 기초하여 죽음을 인간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부과하신 벌로 이해했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모든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아담의 원죄의 보편성을 증명한다. 원죄로 말미암아 최초의 죽음이 왔다. 이에 상응하여 구원은 두 가지 단계로 일어난다. 죄인은 하나님에 의하여 은혜로 말미암아 화해되며, 죽은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된다. 죄의 극복 다음에 죽음의 극복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죽음을 하나님과의 교통의 단절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통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배제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성서의 전통에 상응한다. 그러나 죽음이 인간의 죄의 결과라면, 낙원에서 아담과 하와는 사멸하지 않는 존재여야 했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성적인 생육과 모순된다. 그렇다면, 그들의 원래적인 불멸성도 죄로 말미암은 사멸성에서 그들을 보호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죄는 단지 윤리적인 혼란을 초래할 뿐, 인간의 문리적인 구성에 아무런 변화도 초래하지 않았다고 보는 다른 이론들은 배제되었다. 418년 카르타고 공회는 "펠라기안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첫째 사람 아담은 사멸의 존재로 창조되었으며, 그는 죄를 지었든 짓지 않았든 그의 몸은 죽는다고 말하거나, 다시 말하여 죄 때문이 아니라 자연적 필연성 때문에 육체를 떠났다고 말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529년 오렌지 공의회와 1546년 트렌트 공의회에서 이 이론은 타당성을 얻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죽음의 두 가지 형식, 곧 육체적인 죽음(mors corporalis)과 영원한 죽음(mors aeterna)은 죄의 결과이다. 저주의 "영원한 죽음"뿐만 아니라 몸의 신체적인 죽음도 죄의 값이다. 오렌지 공의회는 죄를 "영혼의 죽음"(mors animae)이라 불렀으며, 육체적인 죽음을 첫 번째의 죄의 벌이라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의 불멸성과 사멸성의 문제를 다음과 같은 세 단계의 이론을 가지고 천재적으로 해결했다. 낙원에서 아담은 불멸성, 곧 죽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posse non mori)을 가지고 있었다. 죄와 함께 인류는 이 가능한 불멸성을 잃어버리고 현실적인 사멸성의 상태, 곧 죽지 않을 수 없음(non posse non mori)으로 빠져버렸다. 죄를 극복하고 자연을 완성하는 그리스도의 은혜는 선택된 사람들에게 현실적이고 상실될 수 없는 불멸성, 곧 죽음의 불가능성을 가져다준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다.
17세기 초기 개신교 전통주의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카톨릭 교회의 이론을 추종했으며, 죽음의 세 가지 측면, 곧 "영혼의 죽음", "몸의 죽음", "영원한 죽음"을 구분했다. 이 세 가지 죽음의 원인은 (1) 마귀의 유혹, (2) 인간의 죄, (3) 하나님의 진노이다. 죽음의 이 세 가지 형식은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는 영혼의 죽음 속에서 느껴지고, 그 다음 신체의 죽음 속에서 경험된다. 저주의 "영원한 죽음"은 영혼의 죽음과 몸의 죽음에서 나타난다. 인간의 죽어감은 최후심판의 공포를 경험하게 되며, 죄의 저주가 사망하는 사람을 무섭게 엄습한다. 죽음의 시간이 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인격적 심판의 시간이라면, 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용서에 대한 믿음 속에서 죽는 것은 중요한 일로 생각된다. 2)
2) 자연적 죽음인가?
19세기의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은 죄와 신체적 죽음의 인과론적 관계를 거부했으며, 신체적 죽음을 "자연적 죽음"으로 보고, 죄와 심판과 벌의 종교적 틀에서 그것을 해방시켰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죽음 그 자체는 악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벌도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유한한 본질의 자연적인 끝이요, 시간적 한계이다. 죄로 말미암아 교란된 하나님 의식(Gottesbewusstsein)이 비로소 이 자연적인 죽음을 주관적으로 하나의 악한 일로 경험하게 되며, 하나의 벌로 두려워하게 되었다. 죽음은 죄로 말미암아 야기된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인간에 대한 영적인 세력을 얻게 된다. 죽음 때문이 아니라 죽음의 공포로 말미암아 우리는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언제나 강렬한 그의 하나님 의식 속으로 이끌어들이고 그들의 하나님 의식을 강화함으로써, 인간을 죄에서 구원한다. 그의 구원은 불멸성으로의 신체적 구원이 아니라, 열락(Seligkeit)으로서의 종교적-윤리적 구원이다. 죄의 용서를 받고 구원자를 믿는 사람은 그의 죽음을 악이나 벌로 경험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있는 것, 곧 "자연적인 끝"으로 경험한다. 신자들에게 죽음은 죄인들에게 나타나는 것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신자들이 "자연적인 죽음"을 죽을 때, 그들은 공포와 경악 없이 죽는다. 그리스도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다.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의 전통은 슐라이에르마허의 입장을 한 걸음 더 발전시켰다. "영혼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교통의 파괴를 뜻하며, "영원한 죽음"은 그것의 상실을 뜻한다. 하나님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이 경험들은 신체의 죽음과 분리되어야 한다. 죄의 결과는 영적 괴리, 내적 불평화, 윤리적 부패, 영원한 저주에 대한 공포이다. 신체적 죽음은 도덕적-종교적 원인으로부터 설명될 수는 없다. 인격적 삶에서 자연적 현존재로 넘어가는 것은 인간의 사유가 파악할 수도 없고 경험을 통하여 증명될 수 없는 하나의 도약(Sprung)이다.
만일 이러한 "도약"을 하나의 범주로 만든다면, 우리는 자연의 다른 불편한 상황들도 인간의 죄로부터 설명해야 할 것이다. 죽음이 불행과 사멸을 가져온다는 이 명제는 우리가 윤리적 인격의 삶을 사는 한에서 타당하다. 그러나 죄를 자연의 삶에 어떤 작용을 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불확실한 영역에 있게 된다. 그러므로 죄를 통하여 죽음의 객관적 "형태"가 변화되었다고 말해서는 안될 것이다. 단지 인간의 의식 안에 있는 죽음의 형태가 죽음의 공포 속에서, 양심과 후회의 고발 속에서 변화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은 영혼의 죽음과 영원한 죽음을 죄로 말미암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몸의 죽음을 죄와 죽음의 연관성에서 분리한다. 이는 인격과 자연을 엄격하게 구분하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는 죽음을 "그 자체는(an sich)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며, 심판의 표징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죽음은 유한한 현존재가 지닌 한계의 형태이며, "그 자체로서"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 인간의 출생이 "비존재로부터 존재로의 내디딤"인 것처럼, 죽음은 "존재로부터 비존재로의 내디딤"이다. "죽음 그 자체"는 유한한 인간 존재의 제한된 현존재에 속하며 자연적인 것이다. "죽음 자체"의 이 본질로부터 바르트는 "현실적인 죽음"을 구분한다. 인간의 현실적인 죽음은 사실상 죄인의 죽음이요, 죄인은 이 죽음을 저주로서 두려워하고 죄 많은 삶에 대한 벌로 경험한다. 그리스도와 믿음이 없을 경우, 죽음 자체와 현실적인 죽음은 일치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며 믿음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저주의 죽음에서 "자연적인 죽음"으로 해방된다. 비자연적인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은 영원한 생명으로의 해방이므로 인간의 자연적 죽음으로의 해방이다. 자연적인 죽음은 창조자의 질서에 따라 그의 피조물의 삶에 속하며, 피조물에게 필연적이다. 자연적인 죽음이 존속할 경우,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구원은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피안이 되시며, 인간은 "과거에 있던 자(one day will only have been)"로서 하나님의 영원한 삶에 참여하며 그의 유한한 삶이 하나님 안에서 영원함을 얻고 영광스럽게 되는 데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할 경우, 죽음과 고난과 불안은 자연질서에 속하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 되지 않는가?
바르트는 "자연적 죽음"에 대한 이 견해를 그리스도론적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리하여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죽을 수 있기 위하여 그 자신은 "죄가 없는"인간일 수밖에 없지만, 사멸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죄인들이 당해야 할 저주의 죽음을 당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자연적인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신체적인 죽음 그 자체가 죄의 값이라면, 죄가 없는 그분은 불멸의 존재여야 했을 것이다. 인간의 유한한 본성은 그 자체로서 사멸해야 할 것으로 창조되었다. 그리스도는 죄인들이 당해야 할 저주의 죽음을 당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자연적인 죽음을 당했다. 3)
몰트만은 위의 두 가지의 견해, 즉 죽음이 원죄의 결과라는 견해와 죽음은 인간의 자연적 끝이라는 견해를 모순된 것으로 여기고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는 죽음은 모든 사물의 영원한 생명으로의 새 창조와 함께 극복될, 연약하고 시간적인 피조물의 특성(Eigenschaft)이라는 생각을 제시하려 한다. 4)
3) 시간적 피조물의 사멸성(시간적 피조물로서의 죽음)
(1) 유한성은 언제나 사멸성을 뜻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한편으로는 천사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돌과 같이 유한하지만 사멸하지 않는 존재들이 있다. 죽음은 생물학적으로 볼 때, 성적인 생육을 통하여 비로소 살아있는 것의 세계 속으로 들어왔다.
(2) 죽음은 "죄의 값"이라 불릴 수 있지만, 인간에게서만 그렇게 불릴 수 있다. 베드로후서 2장 4절에서 "죄를 지었다"고 하는 천사들은 불멸의 존재로 존속한다. 죄를 짓지 않은 인간 아닌 다른 생물들은 "자기의 뜻 없이 허무한 데 예속되어 있으며" 사멸한다.(롬8:20) 따라서 피조물 속에는 죽음 없는 죄와 죄 없는 죽음이 있다.
(3) 인간들 가운데는 죽음으로 인도하는 다른 인간들에 대한 죄도 있고, 자기 자신에 대한 죄도 있다. 인간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끊임없이 인간 아닌 다른 피조물 속으로 들어온다. 땅의 생태학적인 죽음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야기된다.
(4) 제사장 문서에 의하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첫 계명은 "생육하고 번성하라"였다. 여기서 인간의 사멸성은 논리적으로 처음부터 전재된다. 죽고 태어나는 일이 없다면, 세대들의 연속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반하여 J문서의 원역사(창3장)에 의하면 죽음은 하나님의 계명의 위반에 대한 벌로 생각된다.
요한계시록은 모든 사물의 새 창조 끝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계21:4) 즉 모든 죽음은 하나님의 새롭고 영원한 창조에서 추방되는데 영혼의 죽음은 물론 몸의 죽음도, 인간의 죽음은 물론 모든 생물의 죽음도 추방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창조가 시간적 창조를 완성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죄와 죄의 결과를 극복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태초의 창조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태초의 창조의 목적을 완성한다.
(5) 보편적인 죽음이 시간적 창조에 속한다면, 특수한 "죄인들의 죽음"은 죄를 통하여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할 수 있다. 양자 사이에는 인과의 관계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양자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시간적 창조의 연약함은 하나님처럼 되어서 이 연약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죄의 촉매제와 같다. 죽음 때문에 죄가 이미 존재하는 한에서만이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우리는 사멸성을 참지 않으며, 죽임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죽게 할 수 있다. 태초의 창조는 상처받을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폭력 행위가 가능하였을 것이다. 죽음이 시간적 창조에 속한다 할지라도, "자연적"이라 불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 그것이 "자연적"으로 불릴 경우, 우리는 이 "자연"을 결코 긍정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죽음은 개방 상태에 있고, 불완전하고 완성되지 못한 첫 번째의 창조의 표징이라 생각할 수 있다.
(6) 우리는 우리의 죄나 아담의 죄에 대한 벌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적 심판 가운데서 죽는 것도 아니다. 사실 우리는 태어나서 언젠가 사멸하는 모든 것처럼 "자연적인 죽음"5)을 죽는다. 그러나 우리는 신음하고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과의 연대 속에서 죽는다. 신학적으로 "자연"은 더 이상 태초의 상태가 아니며 궁극적 상태가 아닌 창조의 상태를 가리킨다. 우리의 "자연적인 죽음"은 우리를 땅으로 데려가며, 이 땅과 함께 우리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봄을 기다린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죽음은 죄의 결과도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슬픔과 그리고 미래의 세계와 영원한 생명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사실(Tatsache)이다. 새 창조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유를 드러낼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하나님의 생동성에 자유롭게 참여함으로써 "우주의 신성화"를 가져온다.
(7) 근대세계의 인격과 자연의 분리(슐라이에르마허), 계약과 창조의 분리(바르트)는 인간의 본성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지만, 창조의 공동체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한다. 그것은 자연을 파괴하는 근대세계의 인간 중심성의 표현이다. 인간은 인격으로서 땅의 자연에 참여하는 자이고 자연적 존재로서 인격이다. 인간 중심성은 인간을 제외한 이 세계의 나머지 피조물에 대한 치명적 파멸의 선언이었다.
(8)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화해를 우리에게 주기 위해서 "우리를 위하여" 죄인의 죽음을 대신 당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물론, 죽은 사람들에게도 그가 지닌 하나님과의 교통을 주기 위하여 죽었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화해시키고(골1:20)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다림으로 충만케하기 위하여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죽음을 죽었다.
(9) 기독교 신앙이 죽음의 불안과 심판의 불안을 제거하기보다 오히려 확장하였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신앙은 심판의 불안을 그 핵심으로 가진 종교적 죽음의 불안에서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슬퍼하고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과 우리를 연대시킨다. 6)
2. 죽은 자의 소망
유럽의 정신사에는 죽음에 대한 두 가지 상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불멸하는 영혼에 대한 고대의 상이요, 다른 하나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성서의 상이다. 전자는 상처를 받을 수 없는 영혼의 자기 확신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하나님이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창조하시리라는 믿음의 확신을 가리킨다. 전자가 인간의 자기 초월에 기초한다면, 후자는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에 기초한다. 임종을 맞고 있는 사람에게 어떤 희망이 있느냐고 물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희망, 영혼의 불멸에 대한 희망을 가진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앙고백은 "나는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혹은 "나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장래 세계의 삶을 기다립니다"라고 말한다. 이제 이 두 가지 표상의 차이를 드러낸 다음, 기독교의 부활의 희망 속에서 영혼불멸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파악하려고 한다.
1) 영혼불멸
a) 신적 실체로서의 영혼
영혼 불멸에 대한 모든 이론은 플라톤과 함께 시작한다. 그는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묘사하면서, 영혼의 불멸이 무엇이며 그것을 앎으로써 삶과 죽음에 대한 어떤 태도를 가지게 되는가를 제시하였다. 첫째 증명단계에서 삶과 죽음은 깨어 있음과 잠자는 것처럼 서로 대립하여 있으며 이 대립에서 생성된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사실상 다시 사는 것과 죽은 자들이 산 자들로 되는 것과 죽은 자들의 영혼의 존재가 있다". 둘째 증명 단계는 인식적 단계이다. 우리의 삶은 다시 회상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의 영혼 속에는 출생 후 이 세계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 이미 출생 이전에 그의 영혼 속에 주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인식의 과정으로부터 영혼의 선재가 추론된다. 셋째 증명의 단계는 죽음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 죽음은 육체로부터 영혼의 분리를 말한다. 영혼은 "올바로 철학할" 때, 다시 말하면 죽음을 명상할 때, 그 자신을 직접 의식한다. 영혼이 죽음에 대한 명상 속에서 육체의 죽음을 앞당겨올 때, 영혼은 그 자신의 불멸을 깨닫게 된다.
영혼의 선재는 그의 후재(postexistenz)에 상응한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의 영혼이 있었다.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영혼은 존재할 것이다. 영혼은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영혼은 죽지도 않는다. 영혼은 육체의 출생과 죽음에 초월하여 있으며, 그의 본질에서 출생과 죽음과는 무관한 채로 존속하기 때문에 선재하며, 또 후재한다. 사멸할 육체의 죽음은 육체로부터의 영혼의 분리이다. 플라톤은 참으로 인간적인 것을 영혼과 동일시한다. 인간은 자기의 정체성을 그의 영혼에서 발견하고 그의 육체로부터 거리를 가짐으로써, 자기 자신을 불멸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며, 죽음에 대한 면역성을 얻게 된다.
영혼불멸설은 "죽음 이후에 삶"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출생과 죽음 저편에 있는 인간의 신적 동일성에 관한 이론이다. 죽음은 사멸할 육체로부터의 영혼의 해방이기 때문에 죽음은 영혼의 잔치가 된다. 죽음 속에서 영혼은 그의 영원한 본향으로의 귀향을 축하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영혼의 가장 좋은 친구이다. 죽음은 영혼을 육체의 감옥과 귀찮은 육체적 욕구들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킨다. 7)
플라톤의 이원론은 영혼은 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불멸한다. 기독교적 이해에 의하면 하나님은 창조자이고, 영혼은 그의 피조물이며 신적인 것이 아니다. 영혼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유한하고 변화될 수 있으며, 사랑할 수 있고 고난당할 수 있으며, 바로 이 점에서 인간적인 것이며 신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8)
b) 초월적 주체로서의 영혼
극단적 칸트주의자인 요한 고트립 피히테는 "죽음이라 불리는 것이 나의 일을 결코 중단시킬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일은 완성되어야 하지만, 결코 완성될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나의 현존은 시간의 규정을 받지 않으며, 나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나는 그 위대한 과제를 받아들임으로써 영원을 내 안에 취하게 된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모든 이성적인 존재의 마지막 규정은 자기 자신과의 절대적 합일, 영속적 일치, 곧 그의 정체성에 있다. 이 정체성은 경험적 자아가 초월적 자아와 일치함으로써 획득된다. 이것은 저 '숭고한 과제'에 헌신함으로써 일어난다"고 하였다.
플라톤처럼 피히테도 인식의 초월적 전제들로부터 출발을 하여 인식하는 주체의 불멸을 추론한다. 그러나 그는 초월적 자아를 도덕적 자아와 결합하며, 도덕적 자아를 인류의 과제와 결합하는 점에서 플라톤과 다르며, 근대적으로 사유한다고 볼 수 있다. 인식의 초월적 전제는 불멸의 것이요, 도덕적 자아는 위에서 말한 지고의 과제에 헌신할 때 사멸하지 않게 된다.
그는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과 일치해야 한다고 한다. 순수한 초월적 자아는 자기 자신과 모순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하고 나누어져 있지 않으며,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적 자아는 다양성과 현상들의 무상함으로 말미암아 모순 가운데 얽혀있고, 흩어진 상태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상태에 있는 것과 같은 상태에 있어야 한다. 경험적 자아가 순수한 자아에 상응할 때, 인간은 자기 자신과 일치한다. 이때 그것은 침해될 수 없고, 상처를 받을 수 없으며, 사멸하지 않는다. 그것은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 나누어져 있는 것, 자기 자신에게서 분리되어 있는 것만이 상처를 받을 수 있고 사멸하기 때문이다. 9)
관념론적 견해에 의하면 자아는 초월적인 것이며 죽음은 현상들의 세계 안에 있는 한 현상에 불과하다. 기독교적 이해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기 자신과의 단순한 동일성을 가질 뿐인데, 이 동일성으로 말미암아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출3;14)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자아는 너에 의하여 구성되며, 네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다. 10)
c) 실존의 핵으로서의 영혼
"사멸하지 않는 영혼"의 이론에 대한 셋째 견해는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는(ungewordenen) "실존의 핵"(Existenzkern)에 대한 에른스트 블로호(Ernst Bloch)의 물질론적 표상이다. 블로호는 플라톤의 회상(Anamnesis) 대신에 "한번 드러난 얼굴"(einmal aufgedecktes Angesicht)에 대한 메시아적 희망을 말하며, 피히테의 인륜적 관념론과 달리 혁명적 실천에 대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죽음은 모든 희망의 생각에 대하여 걸림돌이 된다고 한다. 죽음은 좀더 나은 삶에 대한 유토피아가 깨져 버리는 실재일 뿐만 아니라, 실재적 "반 유토피아"이다.
그는 불멸의 영혼과 사멸의 신체를 구분하는 대신에 불멸하는 실존의 핵과 사멸하는 실존을 구별한다. 인간은 이 차이를 의식함으로써, 실존의 영원히 창조적인 원천을 분명히 알게 된다. 실존의 핵은 아직 살아 있지 않으므로 사멸할 수 없다. 11)
불멸을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을 말한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정해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는 인간의 죄와 죽음을 통하여 파괴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 안에 있는 신적인 생명의 영에 의한 불멸하는 관계를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정해진 인간의 규정은 폐기될 수 없고, 대체될 수 없으며, 사멸할 수 없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죄와 죽음이 하나님보다 더 강할 것이며,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12)
2) 육의 부활
영혼의 불멸이 하나의 견해라면, 죽은 자들의 부활은 하나의 희망이다. 전자가 인간 안에 있는 불멸의 것에 대한 신뢰라면, 후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며 죽은 자들을 살리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다. 생명을 창조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속에서 우리는 죽음의 극복과 "죽음이 더 이상 있지 않는"(계21:4) 영원한 삶을 기다린다. 불멸의 영혼은 죽음을 "친구"로 환영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영혼을 지상의 육체로부터 구하여 내기 때문이다. 부활에 대한 희망에서 죽음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의 사랑의 피조물들의 "마지막 원수"이다 (고전15:26).
부활의 희망은 멀리 떨어져 있는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한 사변이 아니다. 삶을 열정적으로 긍정하는 사랑만이 희망의 적합성(Relevanz)을 파악한다. 삶은 이 희망을 통하여 죽음에 대한 불안과 자기 상실에 대한 불안에서 해방되기 때문이다. 부활의 희망은 우리 인간을 사랑 가운데서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살도록 하고, 죽음으로 향하여 가는 삶을 전적으로 긍정하게 한다. "육의 부활"에 대한 희망은 신체적 삶과 감각적 경험들을 멸시하고 비속화하도록 하지 않고, 오히려 이것들을 깊이 인정하고 비참하게 된 "육"에게 그의 가장 높은 영광을 부여한다. 부활의 희망은 현재의 삶을 "떠도는 상태"에 있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부활의 초월은 사랑의 육화(Inkarnation) 속에서 삶으로 구체화한다. 전적으로 살고 전적으로 죽으며 전적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에스겔 37장은 이 세상의 삶으로의 부활이다. 이 부활은 야웨의 루아하를 통하여 일어난다. 이스라엘의 종말론에서 생명의 주님에 대한 기다림은 죽음의 한계를 넘어 영원한 생명을 향한 부활로 확대되며, 한 걸음 나아가 죽음 자체의 폐기에 대한 기다림으로 확대된다.
이사야서의 소묵시록(사24-26장)에서 부활은 명백한 구원의 희망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다니엘서 12장 2절에는 "땅속 가운데서 잠자는 사람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깨어날 것이다. 그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수치와 함께 영원히 모욕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최후의 심판에 대한 생각이 전면에 등장한다. 최후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모든 사물과 사람에게 집행된다. 죽은 자들은 부활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삶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들은 몸과 영혼과 함께 부활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몸과 영혼을 가지고 행한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며, 그들의 행위에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든지 아니면 영원한 심판과 부끄러움을 받아야 한다.
부활은 죽음 전체에서 일어나며, 인간 전체에서 일어나며, 신체적으로 일어날 것으로 생각된다. 기독교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죽어감과 죽음의 경험을 통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통하여 형성되어 있다. 부활은 사멸할 수밖에 없는 이 삶이나 다른 사멸의 삶으로의 돌아옴이 아니라, 영원한 삶으로 들어감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죽은 그분에게서 일어난 종말론적 사건이요, "단 한번만(롬6:10)" 일어났다. 그리스도는 모든 죽은 사람들을 위한 예언자적이며 대리자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부활하신 분이요(행26:23),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맨 먼저 살아나신 분이다(골1:18). 죽은 사람들의 부활의 과정이 그에게서 시작했으며, "살리는 영" 안에서 계속되며, 그에게 속한 사람들과 모든 죽은 사람들의 부활 속에서 완성될 것이다. 죽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님에 의하여 그의 생명의 영을 통하여 일어난 것처럼,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전체로서의 인간에게 일어나는 신체적 사건으로, 다시 말하여 "죽을 몸을 살리는 것"으로(롬8:11) 기대된다.
"육의 부활"이란 표현 자체가 구약성서적 언어에 의하면 죽은 사람들을 넘어선다. "모든 육"이나 "어떤 육도"(창9:11, 시65:3, 145:21, 욜3:1)라는 구약성서의 표현들은 신체를 가진 인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짐승들을 포함한 "모든 살아있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육의 부활"에 대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은 철저히 인간의 부활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말의 뜻에 따라 "모든 살아있는 것의 부활"을 향하여 열려있다. 현재의 몸뿐만 아니라 그의 물질, 곧 육이 미래의 부활에 참여해야 한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은 이 인간을 영혼과 몸을 가진 전체로서의 인간을 가리키며, 이를 넘어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이리하여 미래의 세계에서는 허무에 예속되어 "신음하는 피조물"(롬8:19-21)도 구원을 받을 것이다. 죽음이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은 모든 사물과 상황의 우주적 새 창조에 대한 희망의 시작일 뿐이다. 그것은 개인의 인격적 종말론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 희망과 함께 시작하는 모든 인격적 종말론은 점점 더 우주적 종말론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 13)
"육의 부활"은 이 허무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로 변형되는 것과 이 사멸할 삶이 영원한 삶으로 변화되는 것을 뜻한다. 13)
3) 죽음 속에서의 부활
현대 카톨릭의 신학자들(K. Rahner, J. Pohier, G.Greshake, G. Lohfink 등)들은 루터의 생각에 근접하면서 죽음 속에서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이들은 영위되지 않은 영혼의 삶이 아니라, 현실적이며 모든 감각과 함께 몸과 영혼으로 영위된 인간의 삶이 하나님에 의해 화해되고, 구원받으며, 변용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현실적으로 영위된 온 인격의 삶에 관심을 가진다. 인간은 그가 사는 동안 세계 속으로 성장하며, 세계는 그 안으로 생장한다. 구원은 하나님이 이 삶 속에서 연합시킨 것을 분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희망의 비전은 온 세계를 포괄할 수밖에 없다. 즉 구원은 "영혼의 열락"이 아니라, "죽은 사람들의 부활"로서 총체적으로 이해된다. 죽은 사람들의 총체적인 부활의 시기에 관하여는 1966년 "네덜란드 교리문답"은 죽음 후의 생명은 새로운 몸의 부활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부활의 몸은 땅 속으로 들어간 분자나 원자 같은 것이다. 인간은 새로운 인간으로 깨어나며 부활된다. 1973년 "새신앙 지침서"는 "죽은 사람들의 개인적 부활은 죽음과 함께 그리고 죽음 안에서 일어난다." 최후의 날은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마지막에 오는 날이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주의 날"이다. 이 날이 죽은 사람들의 부활의 날이라면 이 날은 사람들이 시간적으로 언제 죽었든지 간에 동시적으로 "한 순간에", 다시 말하여 통시적(通時的)으로 모든 죽은 사람들에게 나타난다. 이러한 것은 영혼의 불멸성과 몸의 부활의 차이를 극복한다. 연옥에 있는 육체 없는 영혼의 중간상태에 대한 표상이 불필요하게 되고, 죽은 자를 위한 미사가 불필요하게 된다. 그러므로 총회는 1979년 지침서에서 "죽음 안에 있는 부활"의 표상을 거부했다. 그러나 칼 라너에 의하면 "몸과 영혼을 가진 인간의 단 하나의 그리고 전체적인 완성이 죽음과 함께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며, 육의 부활과 보편적 심판은 세계의 시간적인 역사를 따라서(ent-lang) 일어나며, 양자는 각각 사람들의 개별적인 심판의 총화와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단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죽음 후에 인간이 이 삶의 시간적 범주들과 공간적 범주들에 더 이상 예속되어 있지 않다 할지라도, 개인적인 완성과 세계의 완성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이미 우리 자신의 죽음 속에서 부활한다면, 우리는 "이 구원받지 못한 세계"로부터 구원받았을 것이며, 땅과 우리의 신체적 연대는 폐기될 것이다. 그러나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무덤은 인간과 이 땅이 결합되어 있으며 오직 함께 구원받을 수 있음에 대한 표지가 아닌가? 새 땅 없이는 "육의 부활"도 없을 것이다. 비로소 새 땅이 인간의 새로운 신체성에 대한 가능성을 부여한다. 개인의 "죽음 속에서 있는 부활"을 죽은 사람들의 보편적 부활의 역사적 "선취"로 이해하며, 이 보편적 부활을 죽음 속에서 일어나는 개인적 부활의 완성으로 이해 할 때, 우리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양자의 거리를 의식하게 될 것이다. 15)
크레사케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죽음 속에서 영혼은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에게로 건너가고 세상 종말에 육신이 영혼을 뒤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 속에서 부활이 이루어질 것을 희망한다. 육신의 부활은 신체의 부활이나 시체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육신의 부활이란 전인이 죽음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구체적인 세계와 함께 새로운 미래를 부여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미래를 상상할 수 없고, 죽음을 초월하는 미래가 어떤 것인지를 모르며, 또 알 필요도 없다. 그런데 부활은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보편적인 과정에 놓여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격체의 육신 자체가 곧 세계 자체이기 때문에, 이 인격체의 죽음을 통하여 바로 이 세계가 완성의 상태로 서서히 성장한다. 이 과정에는 개인의 공동체와 역사의 완성이 서로 혼합되어 있다. 부활은 전체 실재가 사랑 속에서 충만에 이르는 과정이다. 16)
3. 죽은 자의 상태
죽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교통을 유지하는가? 죽은 사람들이 부활할 때까지 몸 그리고 영혼과 함께 무덤에서 잠자는가? 그들은 죄에 대한 벌을 면제받고 하나님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연옥의 "중간상태"에 있는가? 그들은 벌써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의 행복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가? 과연 죽은 자는 어떻게 있는가?
1) 연옥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속에서 죽을 경우, 그는 그의 죄를 용서받지만 그의 죄에서 정화되지는 않는다. 그는 죄에 대하여 필연적인 벌을 시간적으로 당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속죄를 아직 얻지는 못했다. 이 세계에서 신자들의 삶은 계속되는 참회와 지속적 정화의 과정을 나타내는 것처럼, 죽음 후에는 그들의 영혼이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칠 것이다. 이 목적은 신적인 규정에 상응하는 인격의 완성에 있다.
연옥은 관용될 수 있는 죄와 시간적인 죄의 벌에 아직도 묶여 있는 영혼이 그 속에서 정화되는 벌과 정화의 상태이다. 연옥은 신자들의 영혼을 그들의 죽음 후에 하나님에게 이끌어오는 은혜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벌이 있다. 첫째는 '저주의 벌'(poena damni)이다. 이 벌은 인간이 동경하는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 연기되는 데에 있다. 둘째는 감각의 벌(ponna sensus)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는 죄의 나머지에 대한 참회의 고난에 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연옥에 있는 영혼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효과 있게 도울 수 있다"고 신앙의 명제는 말한다. 이에 대한 근거는 "성도의 교통"이다.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는 모든 사람은 서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으며, 그들을 위하여 대신 하나님에게 보상을 제시할 수 있다. 죄의 사면을 얻은 사람은 자기에게 보장된 벌의 사면을 죽은 사람들에게 보장하여 달라고 하나님에게 간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이를 위한 실재적 도움은 죽은 사람들을 위한 성만찬, 곧 죽은 사람들을 위한 미사이다. 연옥의 장소가 어디에 있으며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연옥에 대한 표상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발견하고 받아들이며, 화해시키고, 영광스럽게 하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모순된다. 육체 없는 영혼의 존속에 대한 표상은 우리가 몸과 영을 가지고 사랑하던 죽은 사람들과의 교통에 대한 우리의 동경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교의학자 슈마우스(M. Schmaus)는 연옥에 관한 성서적 근거로서 마카베오 2서 12장 40-46절을 말하지만, 본문은 연옥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마태복음 12장 32절17)에서 피안의 세계에서도 죄가 용서받는다는 추론을 하지만, 이 또한 성서적 근거가 희박하다. 또한 연옥에서 인간은 도덕적 완성을 이루어 하나님을 보게 된다지만,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의 능력과 공적과 업적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때문에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 그리스도의 피가 신자들의 죄에 대한 유일한 보상이며 유일한 속죄, 유일한 정화이다. 연옥은 그리스도에 대한 무서운 모욕이다. 몸에서 분리된 영혼은 인격이 아니다. 하나님 중심의 견지에서만 우리는 "인간의 존속"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영원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유한한 존재들은 현재적이며,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죽음 후에도 계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18)
2) 수면설
루터는 처음에는 죽은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 확실한 생각을 갖지 못했으나, 나중에는 그것을 의식과 지각이 없으며, 깊고 꿈이 없는, 공간과 시간을 벗어난 "잠"으로 표상하였다. 그는 인간학적으로 현재에서 미래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말론적으로 미래에서 현재를 생각했다. 죽은 사람들이 마지막 날 그리스도에 의하여 부활될 때, 그들은 어디에 있었는가도 알지 못하고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이 죽어 있었는가도 알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날 갑자기 부활할 것이며, 어떻게 죽음 속으로 들어갔고 어떻게 죽음에서 깨어났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영혼을 떠난 육체만이 아니라 온 인간을 깨우실 것이다.
죽음이 "잠"이 되었다는 것은 루터에게서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 죽음은 인간에 대한 그 힘을 잃어버렸다는 것과, 둘째,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의미는 죽은 사람들로부터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제한다. 죽음은 인간에 대한 그 힘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주어버렸다. 물론 신자에게 죽음은 그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그 힘을 더 이상 갖고 있지는 않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부활로 향하는 문이다.
죽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시간 속에 있다. 인간이 죽음으로부터 부활이 오기까지는 바로 한 순간이다. 그리스도는 자기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사람에게 3일 후에 혹은 마지막 날이라고 말하지 않고 "오늘"이라고 말했다.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눅23:43).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오늘이다. 19)
3) 그리스도와의 교통
"죽음 속에서 인간 전체가 폐기된다"거나 "죽음 속에서 인간의 정체성이 중지된다"고 말할 수 없다. 죽음은 "인격 전체의 끝이 아니다." 성취된 삶이나 실패한 죽음은 죽음 속에서 폐기되지 않는다. 모든 삶은 "하나님 앞에" 존속한다. 실제적 죽음에서 하나님이 인간과 맺은 관계는 소멸하지 않고 존속한다. 죽음을 통하여 인간은 시간적으로 제한된 삶에서 불멸의 삶으로 변화되며, 제한된 현존재에서 현재적인 현존재로 변화된다. 죽음은 인간의 영을 시간적 제한과 공간적 제한에서 자유롭게 한다. 죽은 사람들은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고 공간적으로 제약되어 있는 대칭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20)
기독교 종말론의 중심은 인간의 자아도 아니고, 이 세계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그의 미래를 열어준 하나님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길" 위에 있다. 그 자신이 "길"이다. 그러므로 모든 기독교의 종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미래가 앞당겨오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종말론적 유보"(Vorbehalt)라고 불리는 거리는 지닌다. 그리스도는 죽은 사람들로부터 이미 부활하였으나, 우리는 아직 부활하지 못하였다. 그리스도는 은혜의 힘을 통하여 죄의 세력을 분쇄하였으나, 죽음의 지배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되었지만,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세계 속에서 살고 죽으며, 이 세계와 함께 새 창조를 동경한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사람들의 보편적 부활 사이의 시간이 존재한다. 이 중간시간은 대기실처럼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통치를 통하여 그리고 생동케하는 성령의 경험을 통하여 차 있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그의 죽음과 부활과 함께 "시작한다." 그가 죽음을 폐기하고 죽은 사람들을 부활시키며 마지막으로 그의 나라를 아버지에게 넘겨줄 때(고전 15:28) "완성될" 것이다.
죽은 자로서 그리스도는 죽은 사람들의 형제가 되었다. 죽은 자로서 그는 죽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었다. 부활한 자로서 그는 죽은 사람들과 살아있는 사람들을 취하여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한 길 위로 그들을 데리고 간다. 죽은 사람들은 죽었으며, 아직 부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와 함께 그의 미래를 향한 길 위에 있다. 그가 영광 속에서 나타날 때, 그들은 그와 함께 있을 것이며 그와 함께 영원히 살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통 안에 있는 죽은 사람들의 실존은 아직 "죽은 사람들로부터의 부활"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존재"이다. 죽은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있지도 않고, 잠자는 것도 아니며, 이미 부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빌 1:23)
죽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교통 속에서 시간을 가지는가? 우리가 시간을 단순히 인간의 선적인 삶의 시간으로 이해한다면, 죽은 사람들은 시간에서 탈락된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을 관계적으로 이해하여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시간으로, 그리고 인간을 위한 그리스도의 시간으로 이해할 때, 죽은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시간을 가진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하여 시간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교통은 그들을 경직되게 하지도 않고, 잠자게 하지도 않는다. "죽은 사람에게 복음이 선포된다"고 베드로전서(4:6)는 말한다. 그리스도는 죽은 사람들과의 연대를 통하여 그들에게 내린 그의 구원하는 가능성을 인지하고, 죽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그는 죽음의 세계 속에서 복음의 소급하여 작용하는 힘을 준다. 미리 죽은 사람들도 믿음에 이를 수 있다.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교통 속에는 죽음도 한계가 될 수 없는 신적인 가능성의 이 경험이 있다. 누가 더 강한가? 죽음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가? 그러므로 죽은 사람들도 시간을 가진다. 물론 죽음으로 인도하는 우리의 생명의 시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시간을 가진다. 그것은 받아주고 변용시키며 바르게 회복하는 사랑,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사랑의 시간이다.
죽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교통 속에서 공간을 가진다. 그리스도의 교통은 두 개의 반원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원의 한편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교통이고 다른 한편은 죽은 사람들의 교통이다. 우리는 아직 이 공간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죽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통을 다른 편으로부터 경험하게 될 것임을 "확신한다."
죽은 자들과 살아 있는 사람들은 서로 지속적이고 파괴될 수 없는 교통이 있다. 이 교통은 "속죄의 고통"이 아니라 "사랑의 교통"이 있다. 그것은 같은 희망 속에 있는 교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이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 죽은 사람들은 상실되어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궁극적으로 구원받지 못했다. 그들은 죽은 사람들과 함께 동일한 희망 속에 있으며, 공동의 위험 속에 있다. 영원한 생명과 새 창조에 대한 공동의 희망이 죽은 자들과 살아있는 자들을 결합시킨다. 21)
4. 부활의 현재성
죽은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된다면, 이 영원한 생명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이 시간적 삶 다음에 올 어떤 다른 삶인가? 아니면 이 시간적인 삶이 다르게 되는가? 만일 그것이 이 시간적 삶 다음에 올 어떤 다른 삶이라면, "부활"이란 표현은 잘못된 것이며, 죽음은 어떤 다른 삶이 탄생되는 시간일 것이다. 그러나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관해서는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것이다"(고전 15:54)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사멸할 이 삶 전체에 그 무엇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많은 사망 통지문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지상의 삶이 "영원화"하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지상의 삶은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비디오 필름에 담겨져서 영원의 하늘 속에 보존될 것이며, 이것은 우리에게 그리 기쁜 소식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지상의 삶의 모든 경악스러운 경험, 실수와 병도 영원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한 장애인의 삶의 영원화, 혹은 일찍 죽은 어린아이의 영원화를 어떻게 표상해야 할 것인가?
신약성서에서 부활 혹은 "일어남"에서 가장 가까운 표현은 "변화"(transfotmatio 고전 15:52)와 "변용"(transfiguratio 빌 2:21)이다. 여기서 "부활"은 한 사람이 자신의 치유와 완성을 발견한다는 것을 뜻한다. 영원한 생명으로의 부활은 하나님에게는 그 무엇도 상실되지 않으며, 지상의 삶의 고통도, 행복의 순간도 상실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그의 전 역사를 다시 발견할 것이며, 화해되고 회복되고 치유된 완성된 그의 삶의 역사로서 발견할 것이다. 또한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은 사회적으로 영원한 사랑 속에서 이루어지는 전체성(Ganzheit)으로서 사회적 부활을 이야기할 수 있다. 영원한 삶이란 현재의 삶이 완성된 전체성으로 궁극적으로 치유되는 것을 말한다.
살리게 하는 영은 그리스도의 교통 속에서 이미 이 삶 속에서 "부활의 힘"으로 경험된다. 이 힘으로서 생명의 영은 죽음보다 강하며 "죽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의 영은 삶 전체의 생동하는 형태이다. 영이든 아니면 자아이든, 삶의 한 부분이 죽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죽을 이 삶 전체가 영 안에서 이미 여기에서 죽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원천과 같은 영원한 삶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영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이 삶을 여기에서 죽는 것인 동시에 죽지 않는 것으로, 허무한 동시에 허무하지 않은 것으로, 시간적인 동시에 영원한 것으로 경험하게 한다. 22)
우리의 경험에서 부활신앙은 우리에게 운명지어진 죽음과 대결한다. 부활 신앙은 죽음에 맞선 사랑의 투쟁에서 그 의미를 얻는다. 우리가 생명 한가운데서 죽음에 맞서서, 그리고 지금 생명이 겪는 억압과 손상에 맞서서 저항할 때, 우리는 이미 여기 생명의 한복판에서 부활을 경험한다. 사랑 가운데서 부활은 단지 기대될 뿐만 아니라 이미 경험되기도 한다. 23)
영원한 생명의 영은 먼저 단절되었고 장애자가 되었으며 파괴된 생명이 그 자신을 자유롭게 발전시킬 수 있는 큰 삶의 공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죽음 이전의 이 삶 속에서 이미 우리는 생명의 영을 더 이상 고통이 없는 큰 공간으로 경험한다. 죽음 다음에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더 크게 경험할 것인가! 발전과 활동으로 인도하는 모든 생명의 영역에는 발전과 완성에 이르게 하는 삶의 시간이 속한다. 이미 죽음 이전에 우리는 생명의 영을 하나님의 희망의 힘으로, 곧 우리에게 미래를 주기 때문에 우리에게 시간을 허용하는 희망의 힘으로 경험한다. 영원한 하나님의 영은 생명의 샘으로 경험된다. 이미 죽음 이전에 인간은 이 활발한 생명의 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나며, 새로운 생명을 얻으며, 신선한 에너지로 충만하게 된다. 하물며 죽은 다음에 영원한 생명의 영은 사람들을 얼마나 더 많이 붙들 것인가! 본래 그들에게 정해져 있고 또 그들이 지향해야 할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하여 영원한 생명은 단절된 사람들, 장애자들, 파괴된 자들에게 공간과 시간과 힘을 준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24)
[주]
1) 바울은 죽음을 인간의 죄에 대한 벌로 이해한다. 죽음은 하나님의 타율적인 "벌"이 아니라, "죄에서 불가피하게 귀결되는" 것이다. 몰트만, 오시는 하나님, p.155.
2) 몰트만, 오시는 하나님, pp.160-163.
3) 오시는 하나님, pp.163-168.
4) 오시는 하나님, p.149.
5) 현재 생명의 불안전성으로 인한 자연적인 죽음을 말하고 있다. 자유주의의 자연적인 죽음과 구별하여야 한다.
6) 오시는 하나님, pp.169-174.
7) 오시는 하나님, pp.115-118.
8) 오시는 하나님, p.137.
9) 오시는 하나님, pp.119-122.
10) 오시는 하나님, p.137.
11) 오시는 하나님, pp.122-125.
12) 오시는 하나님, p.139.
13) 오시는 하나님, pp.127-134.
14) 오시는 하나님, p.148. 몸의 부활에 관하여 오스카 쿨만(Oscor Cullmann)은 1958년 "영혼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는 죽음의 모든 공포를 체험하셨기 때문에 초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구원의 중보자로 간주되었으며 예수는 자신의 죽음 가운데서 죽음 그 자체를 정복하신 유일한 분이다. 예수는 단순히 죽지 않는 영혼으로 사심으로써, 곧 본질적으로 죽지 않으심으로써, 승리를 얻으신 것이 아니다. 그는 실제로 죽으심으로 자신의 죽음의 영역에 들어가심으로, 생의 파괴자에게 몸을 맡기심으로, 무의 영역에 곧 하나님의 버리심을 맛봄으로, 죽음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죽음을 정복하기 원하는 자는 죽지 않으면 안 된다. 단순히 불멸의 영혼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이 죽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하고 선한 것, 생명 자체까지 상실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는데 서슴치 않았던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철저한 인간적인 죽음에 대한 공포를 조금도 부드럽게 하려 하지 않았다. 생명이 진정한 사망에서 연유(緣由)한다고 하면 여기에는 새로운 신적인 창조 행위가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창조행위는 인간의 한 부분만 다시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사망이 멸절된 그 모든 것, 곧 통전적인 인간으로 다시 살게 하는 것이다. 오스카 쿨만, 전경연역, 영혼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 복음주의신학총서, 1991, pp. 20 - 29.
15) 오시는 하나님, pp.190-193. 로핑크는 "죽은 자들의 부활"보다는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을을 사용하며 신자들만 부활된다는 것이다.
16) 이신건, 조직신학 입문, 한국신학연구소, 1992, pp.206-207.
17)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18) 오시는 하나님, p.180-187.
19) 오시는 하나님, pp.187-190.
20) 오시는 하나님, p.147.
21) 오시는 하나님, pp.193-198.
22) 오시는 하나님, p.136.
23) 위르겐 몰트만, 이신건역,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대한기독교서회, 1997, pp. 9-10.
24) 오시는 하나님. pp.21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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