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 성전!! 하나님의 집!!!

[스크랩] 주님을 깊이 알게 해 준 성막

하나님아들 2012. 9. 6. 11:41

 

1. 그리스도의 놀라운 모형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님과 가깝게 사귀면서 주님을 아는 데 성막만큼 많은 도움을 준 것은 없었다. 내가 성막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을 맛보았던 것처럼, 독자들도 이 글을 통해 한 사람 한 사람 주님을 깊이 알고 주님의 은혜를 입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이 성막은 너무나 깊고 엄청난 그리스도의 모습인데, 그 귀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성경 속에서 성막에 관한 글을 읽고, 깨닫고, 이해하는 부분은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려고 하는 영역의 만분지 일도 되지 않을 텐데, 내 글이 너무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되는 마음이 있다.

구약의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과정을 기록한 글인데, 하나님은 25장부터 40장까지 거의 출애굽기의 반 가까이를 성막에 대해 기록하게 하셨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왕 바로의 권세 아래에서 살았던 삶은, 다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쌓는 일로, 곤고한 삶의 연속이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바로의 권세에서 벗어나고 힘있게 애굽에서 나오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 60만여 명이 애굽에서 나온 그 광경은 한 심령 심령이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기 전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세력인 사단을 위해서 끊임없이 국고성을 쌓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취미와 적성을 가지고 사회에 봉사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없는 심령들의 삶은 불순종의 아들을 가운데 역사하는 영에게 속고 있으며, 결과적으로는 영혼을 지옥으로 몰고 가는 사단의 계획 아래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인 성막


출애굽기는 전반부에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애굽에서 나왔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후반부에는 율법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이어서 곧바로 성막에 대한 이야기가 25장부터 시작되어 완성되는 것으로 끝난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5장 39절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경은 구약 성경으로서, 구약 성경은 여러 부분으로 예수님을 나타내주고 있다. 그 중 성막은 가장 명백하고 상세하게 주님을 나타내는 그림이다.

성막이 여러 가지 깊은 비밀들을 알려주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막은 장이 몇 규빗, 광이 몇 규빗 등의 복잡한 것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육신적인 눈으로는 별로 흥미가 없지만, 조용히 마음을 낮추고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을 살펴나갈 때, 예수님의 모습을 깊이 발견하고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섬긴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참 모습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유대 땅에 오셨을 때, 그 당시 종교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알지 못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다. 물론, 그 당시의 서기관, 율법사, 바리새인들은 성경은 많이 알고 있었지만, 성경 속에 숨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모습은 몰랐던 것이다.

요즘 나는 수원교도소에 가서 성경 공부를 인도하고 있는데, 그 곳에는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은 신약을 다 외운다고 했다. 󰡐�어떻게 신약을 다 외울 수 있을까?󰡑� 처음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신약을 다 외우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니까 두 사람인가 손을 들었다. 그 중 한 사람에게 성경 한 구절을 외워주면서 그 다음 구절을 외워 보라고 했더니, 더듬거리기는 했으나 외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은 신약을 다 외웠지만, 성경 속에 숨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비밀을 몰랐기 때문에 그 때까지 그 마음이 죄 속에 머물러서 예수 그리스도와 가까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성경을 보아도 그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마음을 모른다면 껍데기로 아는 것이지 아무 의미가 없다. 예수님 당시에 성경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람의 형상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 왜냐 하면, 그들이 성경은 알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예수님을 발견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면, 바로 그들 가운데 역사하시고 계신 예수님이 구약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과 동일한 분인 줄 알았을 것이며, 사마리아 여인이 󰡐�이분이 메시아󰡑�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2천 년 전, 주님이 오셨을 때와 같이 오늘날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마음 속에 나름대로 고상하고 인자한 예수 그리스도의 상(像)을 그려놓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신앙인들이 그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얼마나 다르냐 하는 것이다.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만일, 오늘 예수님께서 2천 년 전과 같이 서울에 와서 어느 교회에 들어가신다면, 그 교회의 목사님과 교인들이 정말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때때로 나에게 󰡒�어느 교단에 속했느냐?󰡓�, 󰡒�어느 신학교를 나왔느냐?󰡓� 그리고 󰡒�당신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참된 하나님의 종을 알아내는 방법이 󰡐�어느 교단에 속했느냐?󰡑�, 󰡐�어느 신학교를 나왔느냐?󰡑�, 하는 외형적인 것 말고는 달리 분별해 낼 만한 눈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기준을 가지고 예수님을 본다면 틀림없이 예수님은 이 시대의 교회들에게 이단이라는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어느 교단에도 속하지 아니하였고, 또 신학교도 나오지 아니하셨다. 다만 하나님께 속한 분이시기 때문에 서울 시내 어느 교회를 가신다 해도 하나님의 종으로서 말씀을 전하기 원하실 것이다. 그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면 예수님을 쫓아내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느 신학교를 나오고, 어떤 교단에 속했으며, 어떤 봉사 단체에서 일을 하느냐 하는 외형적인 것을 보는 눈 외에 다른 것을 볼만한 눈이 없다면,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가 없다. 또 마음의 세계를 보는 눈이 없다면, 예수님이 이 시대에 오신다 해도 사람들을 배척하고 말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성경에 어떠한가?󰡑� 하는 것을 불문에 붙이고 자기들의 생각과 맞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판단해 버린다. 예수님의 겉모습인 손이나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지 않고도 자신의 마음에 임하신 예수, 자기의 죄를 사하시고 인도하시는 예수, 성경이 말하는 예수를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30억 원 어치의 금


성막에 관한 성경 말씀을 읽어 보면, 외형적으로는 성막에서 아무 것도 흠모할 것이 없다. 사막에 있는 성막은 아주 길고 높은 흰 세마포 천으로 둘러싸여 있어 아무 매력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성막 안의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가면 사방은 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출애굽기 38장 24절에 보면 성소 건축 비용에 들어간 금이 29달란트 730세겔인데, 이것을 kg단위로 환산하면 한 달란트가 약 34.717kg이므로 1000kg, 즉 1톤이 되며, 돈으로 환산(주)하면 약 130억 원에 해당되는 금이 성막에 들어 있는 것이다. 130억 원에 해당되는 엄청나고도 보배로운 금이, 외형적으로 볼 때에는 아무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세마포 천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바로 예수님이 그러하시다.

세상 사람들은 속이 비어 있기 때문에 외형적인 것을 갖추려고 애를 많이 쓰지만, 주님은 외형적으로는 세상에서 인정을 받을 만한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성막이 외형적으로는 흠모할 것이 없지만, 그 안에 들어가 보면 130억 원에 해당되는 찬란한 금으로 가득차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도 외모는 볼 것이 없지만, 그 안에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들을 갖고 계신 분인 것이다.

예수님의 귀함을 맛보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기의 젊음이나 소유를 드리려 할 때 예수님을 인하여 핍박이나 고난을 받게 될 때, 마음에 부담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예수님을 소개하기를,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이사야 53:2)

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님의 외모


시중에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서 파는 그림들이 많이 있는데, 그 그림을 보면 그림마다 예수님의 모습이 조금씩 다른 걸 알 수 있다. 그 그림들은 실제적인 예수님의 얼굴이 아니라 화가들이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린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림에서처럼 그렇게 인자하고 근엄하며 잘 생긴 분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귀하고 아름답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 속에 있는 심령이 그렇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진짜 예수님이 아닌, 자기 마음에 드는 모습을 상상하여 그려놓고 그것을 예수님이라고 섬기고 있는 것이다. 참된 예수님은 대개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와 전혀 다르다. 성경 66권에는 예수님에 관한 글이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놀라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외모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키가 큰지 작은지, 예수님의 얼굴형이 어떤지, 머리카락은 어떤지, 그러한 것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예수님을 나타낼 때, 예수님의 속, 그 심령에 대하여 소개하기를 원했지, 예수님의 바깥 모습을 나타내기를 원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내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바깥에 대해서만 관심이 많다. 그것은 사람들이 육에 속하여 영적으로 어두워져 있기 때문이다.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외형적인 부분, 즉 모든 사람들이 좋게 여기는 착하고, 진실하고, 오래 참고, 사랑이 많은 모습들만 생각한다.

이제 성막을 통하여 숨겨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로 말미암아 남은 생애가 복되고 신령하게 되기를 바란다.


2.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


죄 사함을 받은 전도사


대구에서 목회를 할 때의 일이다. 한번은 버스에서 안면이 있는 어떤 전도사님을 만났는데, 아주 심각한 얼굴로 나에게 상담을 부탁하여 함께 집으로 와서 조용히 신앙적인 문제를 상담하게 되었다. 그분은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의 전부를 바치는 마음으로 대구 근교에 조그마한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열심히 전도하여 교인들도 많아지고 예배당도 지어 그런대로 괜찮게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회에서는 그 전도사님을 다른 곳으로 보내고, 그 교회에 다른 목사님을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분은 예배당 건축을 위해서 사채를 많이 빌려다가 완공했는데, 이제 거기서 나오게 되면 그 많은 빚을 감당할 수가 없다고 했다. 며칠 동안 잠도 자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다가 거의 미칠 지경에 이르자, 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닌 나에게 상담을 청해 온 것이었다.

나는 그분에게 내가 목회를 하는 동안에 내게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런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셔서 나를 건져주시고 도우셨던 이야기를 했다.

다윗은 시편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시 23:4)

고 말했는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면서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정말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를 지키시고, 건져주시는 일들을 수없이 경험했기 때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두려움이 되지 않았다고 간증하고 있다. 다윗이 양을 지킬 때 사자나 곰의 발톱에서 벗어나고, 골리앗과의 싸움이나 수많은 전쟁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항상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나도 그 당시 목회를 하면서 매일 매시 많은 어려움을 만났다.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들이 자주 있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이 내게 힘을 주셔서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던 간증을 그분에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렵고 곤고할 때마다 나를 도우셨는데, 도대체 전도사님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기에 전도사님을 이런 고통 속에 몰아 넣고 도움을 주시지 않습니까? 도대체 전도사님은 하나님을 어떻게 믿기에 이렇게 어렵고 고통스런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혼자 번민하고 고통하고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사야 59장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다.󰡑�는 말씀처럼, 전도사님과 하나님 사이에 죄가 가로막혀 있다면, 전도사님이 아무리 간절히 기도할지라도 하나님은 도우실 수가 없고, 전도사님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에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때 비로소 그의 마음이 낮아져서, 그는 열심히 일하여 훌륭한(?) 전도사가 되었다고 생각했었지만, 늘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는 고백을 했다.

내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에 대한 말씀을 전해 주자, 그분은 그 날 오후에 복음을 받아들여 거듭나게 되었다.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는 것을 옆에서 본 나는 무척 기뻤다.

후에 그 전도사님은 맨주먹으로 그 교회에서 나왔는데도, 하나님이 그에게 더 좋은 장소에서 더 좋은 예배당을 짓게 하셨을 뿐 아니라 많은 성도들도 모이게 하셨다. 지금은 교회를 찾아오는 심령들에게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죄의 담을 허는 구속에 관한 비밀을 증거하는 훌륭한 목사가 되었다.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문제가 생겨 어려움을 당할 때는 전혀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혼자 괴로워하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어서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 마음 가운데 거하신다면, 우리에게 닥치는 문제가 어떤 문제든지 그 문제는 우리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문제이다. 내가 주를 위해 살려고 노력하거나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마음을 일으키셔서 신앙 생활을 하게 하시는 것이다.

출애굽기 25장에는 성막을 짓는 이야기가 나온다. 25장 1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예물을 가져오라고 명하셨고, 그 가져온 예물로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8)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에 거하기를 원하셨지만, 거룩한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이스라엘 무리 속에 거하실 수가 없어서 그들 가운데 거할 성소를 지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물론,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하신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하나님 우리 마음 속에 거하시길 원하지만, 우리 마음에 죄가 있으면 거하실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 마음 속에 당신이 거하실 수 있는 󰡐�거룩한 처소를 만들라.󰡑�고 하는 말씀이기도 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뒤에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셔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다. 그들이 시내 산 밑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내 산 꼭대기로 부르셔서 모세에게 십계명 돌판을 주시고, 하늘나라에 있는 성막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삼가 내가 산에서 네게 보인 그대로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셨다. 모세는 사십 주야를 시내 산 꼭대기에 있은 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두 개의 돌판을 양손에 쥐고, 그의 마음 속에 하늘나라에 있는 성막을 간직하고 내려왔다.


율법을 범한 죄인들


그런데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산 밑에서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가 어디 갔는지 알지 못하니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자.󰡑�고 하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는 그 앞에 제사하고 춤을 추며 기뻐 뛰놀았다. 그때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왔는데, 모세는 화가 나서 하나님이 친히 손가락으로 쓰신 십계명 돌판 두 개를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 버렸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는 항상 죄악이 존재했다. 출애굽기 18장을 보면, 모세는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판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로마서 5장 13절에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처럼, 전에도 그들에게 죄는 있었지만,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그냥 살 수가 있었다.

이제는 하나님의 율법이 그들 속에 내려왔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등 여러 가지 하나님의 계명, 즉 율법이 왔기 때문에 그들은 그 율법에 의해서 죄인이 된 것이다. 율법이 내려오기 전에는 금송아지를 만들고 섬길지라도 그것이 죄인 줄 몰랐지만,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율법이 그들 속에 임할 때에, 그들이 행한 것은 죄가 되어 버렸다.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죄악이 드러나자 모세는 굉장히 당황하기 시작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요청대로 십계명을 주면 그들이 다 지킬 줄로 믿었으나 실은 그렇지 못했다.

모세는,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인의 회중에 거하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씻기 위하여 괴로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면서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다. 모세는 어떻게 죄를 씻을 수 있는지, 그 방법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냥 범죄를 회개하고, 자백하며, 죄를 씻어 달라고 간청만 할 뿐이었다. 출애굽기 32장 32절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라는 말까지 하면서 간절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4절에 보면,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고 하셨지, 용서해 주신다는 말씀은 찾을 수가 없다.

그 이후 레위기 4장에 오면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용서받는지 그 방법을 설명해 주고 계신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성막의 제단 앞에 나아가는 길이 있지만, 그 전에는 성막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눈물로 간청만 할 뿐이었다.


더러운 인간들 속에 거하실 하나님의 처소


죄를 사함받는 방법이 신구약 66권 여러 부분에 나타나 있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방법을 잘 알지 못하여, 애통해 하고만 있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들이 지은 죄는 십계명 가운데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너를 위해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는, 앞의 두 가지 계명이었는데, 그것을 어긴 죄가 드러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사자를 너희들과 함께 보내겠고, 나는 같이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출애굽기 33장 2절에 보면,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도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은 깊은 죄 속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과 더 이상 같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지런히 성막을 만들어서 하나님이 죄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실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즉,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구비된 것이 바로 성막이다. 성막 바깥에는 뜰이 있고, 또 그 뜰 바깥에서는 레위 자손들이 생활하면서 범죄한 자들은 감히 성막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여, 하나님이 거하시기에 불편이 없도록 하였다.


모든 조건이 구비된 장치 - 성막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인데,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추하고 더러운 인간 속에 거하실 수가 있는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더러운 우리 마음속에 거하실 수 있는 모든 장치를 하신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더럽고 악한 죄가 있었으나, 성막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무런 불편없이 그들을 인도하실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이 우리 마음 안에 거하실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의로워져야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영원히 의인이 되도록 완벽한 속죄를 이루었다. 그래서 그 속죄의 사실을 믿는 사람은 죄를 짓고 연약해도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온전케 하시고 거룩하게 해 주시는 것을 믿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의 추한 죄악을 씻어 주셔서, 우리를 거룩하고 의롭게 하셨다. 성막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실 수가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 마음 속에 거하시기에 불편이 없으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실 때에 거듭난 성도는 거룩하고 의로우며 흠없이 완벽하다. 왜냐 하면 인간의 어떤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나를 의롭게 하셨다.󰡑�, 󰡐�나를 거룩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내 마음 안에 거하시기에 불편이 없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 그 마음은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에 머물러 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내 마음 가운데 거하시기에 불편이 없도록, 예수님이 나를 의롭게 하신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3. 하나님이 나타나시려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성막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몸을 갖고 계시지 않으시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물질의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이 에덴을 만드신 뒤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

영이신 하나님은 이 세상에 물질 세계를 만드신 이후, 물질의 세계 속에 영이신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셨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넣어주셔서 이 땅에 거하게 함으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기를 원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친히 다스려야 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권세를 사람에게 주셨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담에게 다스림을 받는 것은 곧 하나님께 다스림을 받는 것이었다. 또, 만물이 하나님을 보기 원할 때, 아담을 통하여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아담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전하기를 원하셨지만,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아담 속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되고 죽었다.

그 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했을 때, 하나님은 성막 안에 거하면서 성막을 통하여 당신을 나타내기 원하셨다.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당신의 거룩함과 의로움과 선하신 뜻을 나타내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귀한 뜻을 알기 위해서 성막으로 나아와야 했다.


인간들 안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떠나 가나안에 들어와서 실로에 회막을 세웠는데, 광야에 있었던 법궤나 성막의 기구들을 가져와 하나님이 거하시게 했다. 그런데 실로의 회막에 있던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범죄하고 악을 행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에게 여러 번 경고하셨지만, 홉니와 비느하스의 범죄가 그치지 아니하여, 결국 하나님은 실로의 회막에서 떠나셨다. 시편 78편 59, 60절에 보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실로의 성막, 곧 인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

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하나님이 인간들 안에 세우신 장막, 곧 실로 회막을 떠나신 것은 그들의 범죄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 속에 거하실 처소가 없이 지내시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온 이후에 당신이 거하실 만한 처소로 성전 짓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범죄하여 혼란한 가운데 있었으므로 오랫동안 성전이 지어지지 못했는데, 다윗 시대에 와서 이스라엘이 통일이 되고, 그 후 솔로몬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성전이 지어지게 되었다.

솔로몬이 성전을 다 짓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성전을 통하여 다시 당신을 나타내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나아와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거기서도 떠나셨고, 결국 성전은 허물어지고 말았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건축물이 아닌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간의 몸을 입게 하시고 이 땅에 보내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당신을 나타내기를 원하셨다. 고린도 전서에 기록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로움과 구속함이 완전히 갖추어지신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계시면서 그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대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나타내셨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고 대적하였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대적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행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예수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한번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의 성전을 통해 나타나셨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심으로 예수님이 바로 성전이셨다. 주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지만,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실 예수님 자신을 나타낸 것인데, 그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46년 동안 지은 이 전을 네가 사흘 만에 일으키겠느냐?󰡓�고 반박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그를 통하여 병자를 고치고, 불쌍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예수님은 자신의 뜻대로 산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셨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도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하고 기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33년 동안 계시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이후 이제 하나님은 과연 누구를 통하여 당신을 나타내실 것인가? 이 땅에 아름다운 산천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만일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지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입은 성도들을 통하여 나타나기를 원하신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떠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안에 계시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셨던 하나님이 동일하게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날 때부터 성령으로 잉태되어 거룩한 분이지만, 우리는 추하고, 더럽고, 육신적인데 어떻게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수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당신을 나타내시려면 먼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한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만든 이유는, 하나님은 죄 가운데는 거할 수 없는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막 안에 거하셨던 것처럼, 우리 안에도 거하시려면 우리 마음 속에 죄가 손톱만큼도 없어야 한다.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야


하나님이 인간을 보실 때,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각기 자기 길로 갔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도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인간들의 마음을 보시고,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마태 복음 15:19)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 속은 악하고 더러울 뿐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악하고 더러운 것을 다 씻고 깨끗해져야만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실 수가 있으며,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타나실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광야에서 지었을 때, 광야에는 많은 죄악들이 있었지만, 성막 안에는 손톱만한 죄도 용납되지 않았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잘못을 저질러 그들이 성막 안에서 죽임을 당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기 때문에 성막 안에 불의가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일 불의가 들어오면 하나님은 떠나실 수밖에 없다. 아담에게서, 성막에서,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은 떠나셔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거하실 동안에는 만족하셨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우리의 더러운 죄를 흰눈처럼 깨끗하게 씻으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어느 부분의 죄만 사했다면 하나님은 우리 속에 거하실 수가 없다. 만일 과거의 죄만 사하셨다면 우리가 죄를 짓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서 너희와 영원히 같이 거하리라.󰡓�

고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기 위해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야 했던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14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다. 또 히브리서 9장 12절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추하고 불의한 죄를 짓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어떤 죄에 한정된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 속에서 전혀 죄를 발견하실 수가 없다. 이것은 우리가 죄인인데 하나님이 의롭게 봐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했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다니엘서 9장 24절에서 이렇게 예언했다.

󰡒�내 백성과 내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여기서 지극히 거룩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물이 마치고, 죄가 끝나고, 죄악이 영원히 속해짐으로 영원한 의로 드러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지 아니하고 자신의 행위를 보고 있다면 마음이 죄에 눌려 살게 되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가 없게 된다.


성도들의 모형


믿음은 하나님과 마음을 같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 죄가 없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 󰡐�거룩하다󰡑�, 󰡐�죄가 없다󰡑�라고 말씀하고 계시지만, 우리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일치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도 육신적으로 많은 허물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 속에 거하시기에 불편함이 없으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를 보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를 통해 나타나실 수가 있었다. 거룩하신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당신을 나타내신 것과 동일하게 바울이나 베드로를 통해 나타나시고, 또한 우리를 통해 나타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온전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성막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일 뿐 아니라 성도들의 모형이며, 교회의 모형이기도 하다.


4. 죄에서 해방받았는가?


율법과 함께 주어진 성막


성막에 관한 말씀이 출애굽기 25장부터 40장 사이에 나오는데,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는 일로 시작하여 성막이 완성되는 것으로 끝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바로가 순순히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세와 바로 사이에 많은 갈등이 있었다. 또한 바로가 마음을 꺾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애굽에 많은 재앙을 내리셨고, 결국 그 마음이 꺾어져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죄악된 세상에서,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말하고 있는데, 사단은 절대로 우리들을 그냥 내보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내주고 있다.

사단은 우리가 그냥 교회에 나가고, 기도하고, 교인이 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그 단계를 지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함받고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지게 될 때는, 강력하게 막는다.

출애굽기를 읽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왕 밑에서 종살이를 할 때, 고통을 견디지 못해 부르짖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려고 하자 많은 문제들이 일어났다. 이스라엘 백성들이󰡐�우리를 내버려두라. 애굽의 종살이도 괜찮다.󰡑�고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가 나오기를 포기할 정도로 사단은 그들을 쉽게 내보내지 않았다.

오늘날도 죄 사함 받기를 사모하여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까지 왔지만, 갑자기 가족으로부터 핍박이 온다든지 아니면 마음에 두려움이 생겨 스스로 포기하고 형식적인 교인이 되어 주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은 출애굽기를 통해서 죄악의 굴레에서, 사단의 세력에서 벗어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또 이 일은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 편에 서서 사단의 세력인 애굽 왕과 싸워서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 주고 계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건너 광야 생활이 시작되었을 때에 모세의 장인이 모세가 집에 두고 온 아내 십보라와 두 아들을 데리고 찾아왔다.

모세는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판하고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판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범죄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 뒤 19장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말하였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율법을 다 지키겠다고 대답하였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셨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 뒤에 바로 따라온, 천막으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성전인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교회의 그림자인 것이다.


죄를 깨달음


그런데 출애굽기 25장부터 40장까지 성막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보면, 25장부터 35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성막을 만들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다음 36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똑같은 성막 이야기가 반복해서 나오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세움을 입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통하여 성막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40장에는 그들이 성막을 세우는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똑같은 성막 이야기인데, 앞 부분에는 만들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뒷 부분에는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창세기 1장을 보면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되니라.󰡑� 하는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

성막도 역시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막을 인하여 축복했다고 하신 것이다.

성막에 대한 이야기가 똑같은 내용으로 두 번 나온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되었다는 뜻 외에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머무는 동안에는 성막이 필요치 않았다. 그들이 광야에 사는 동안에 율법이 내려왔는데,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었다.

율법을 잘 지키면 의롭게 될 줄 알고 많은 사람들이 애를 쓰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내려주신 목적은 율법을 잘 지켜서 하나님 앞에 정정당당하게 나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앞에 나와서 죄 씻음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죄 속에서 고민하다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죄를 사함받는다. 그런데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이 없는 삶을 살다가 율법이 내려오자마자 금송아지를 만들어 바로 율법을 어기게 되었다. 율법을 어겨 죄를 범한 그들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올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성막을 만들라고 하신 것이다.

율법이 없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깨달을 수 없고, 또 죄를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 별 부담없이 나아올 수 있다. 그러나 율법이 그들의 죄를 깨우쳐 주게 되면 그 상태로는 나아갈 수 없고, 분명히 죄를 씻어야 하기 때문에 성막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이 있으면 성막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율법으로 죄를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언제 죄에 매이는가?


로마서는 󰡒�죄가 율법이 없을 때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 중 어느 누구도 율법이 없을 때는 죄를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하나님을 피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율법이 와서 율법이 그들의 죄를 지적해 주니까 죄를 해결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는데, 성막을 통하여 죄를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어떠했는지를 알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뒤에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하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던 것은 그들이 벗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에도 벌거벗고 살았지만, 벌거벗은 것을 전혀 이상하게 느끼지 않았는데,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눈이 밝아져서 그들이 벗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들이 선악과를 먹고 벗은 것이 아니라 전부터 벗고 살았지만, 그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들의 모습을 보는 눈이 떠진 것이다. 아담 하와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거나 하나님이 아담 하와를 보셨을 때, 마치 소나 돼지가 벗고 있지만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벗은 것을 발견하게 되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고 두려움이 오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인간들은 죄를 지어서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범죄한 사실을 깨달음으로 하나님을 떠나거나 숨고, 부담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일단, 죄를 깨닫게 되면 죄를 완벽하게 해결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다.

레위기 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죄 제사에 관한 말씀을 읽어 보면, 온 회중이나 족장이나 평민들이 죄를 범했을 때에 어떻게 속죄 제사를 드렸는지를 알 수 있다.

레위기 4장 27, 28절에 보면,

󰡒�만일 평민의 하나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부지 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그는 흠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하고 제사를 드리라고 되어 있다. 속죄 제사는 죄를 범했기 때문이 아니라 죄에 대한 깨우침을 받았기 때문에 드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죄를 범했어도 그 죄에 대해 깨우침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속죄 제사를 드릴 수가 없다. 속죄 제사는 범한 죄를 깨달았을 때, 죄에 대한 가책과 두려움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제사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우리가 범죄한 후에 죄를 깨닫는 것과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굉장한 차이가 있다. 죄를 지어도 죄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 죄를 사함받을 수 없는 것이다. 죄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데 부담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죄가 드러남으로 하나님 앞에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이다.


선과 악을 알게 된 인간


죄를 지으면 범죄한 사람이 되지만 죄를 깨닫기 전까지는 마음이 전혀 죄에 매이거나 눌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죄에 매이고 눌리는 것은 죄를 지을 때가 아니라 범한 죄를 깨닫는 순간부터이다. 그 때부터 우리는 죄에게 종노릇을 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두려워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보고 벗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도 벗고 있었지만, 하나님도 그 일을 전혀 언급하지 않으셨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 하나님이 지적하시지도 않았지만 그들은 스스로 두려워했고, 부끄러워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그들이 추웠거나 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벗은 것을 깨달음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창세기에서 첫 죽음이 있었는데,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을 제공하기 위하여 한 짐승이 죽었던 것이다. 그 짐승의 죽음은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 오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가려 주었다. 아담과 하와는 가죽옷을 입었으므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었다.

만일 그들이 선악과를 먹고도 벗은 것을 깨닫지 못하여 전혀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려고 짐승을 잡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선악과를 먹게 되었을 때 선과 악을 알게 됨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게 되고, 그 죄가 마음에 가책을 주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담대함을 잃게 하고, 하나님과 담을 쌓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어야 하는데, 다른 면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 마음이 죄로 인한 두려움과 가책에서 벗어나야만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닭이나 개나 고양이 같은 짐승들은 선악과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간음했거나 도둑질을 했다고 하여 부담을 갖지 않는다. 개가 간음하고 난 다음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자살을 했다든지, 아니면 닭이 옆집의 음식을 훔쳐 먹고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볼 수가 없다. 짐승들은 범죄를 해도, 범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 죄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볼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죄에 매이지 않고, 두려움없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하여 몸은 교회에 나가지만, 마음은 죄가 있어서 하나님과의 사이에 늘 죄의 담이 가로막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죄가 눈보다 더 희게 씻어져서 하나님 앞에 부담없이 나아올 수 있기를 원하신다.


율법과 성막


사람들이 보기에 어느 정도 선한 삶을 사는 것이 신앙 생활은 아니다. 선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볼 때 얼마나 선한가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데 있어서 어떤 척도가 되어질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려고 하면 우리 마음에 손톱만큼의 어두움도 없어야 한다. 마음의 죄가 눈보다 더 희게 씻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과 마음의 교통을 가질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원해서이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 자신이 정말 󰡐�내 죄가 눈처럼 희게 씻어졌다. 지금 죽어도 아무 거리낌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할 만큼 마음이 죄에서 해방을 받았는가? 그렇게 되어야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한 것은 우리에게 양심의 가책을 조금 가볍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범죄하기 전과 똑같이, 전혀 거리낌이 없이 밝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에 장벽이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신다. 로마서 3장 23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지만, 죄를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율법이 와서 죄를 깨닫게 하면, 반드시 그 죄를 해결할 은혜가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출애굽기에 성막에 관한 이야기가 두 번이나 나오는 것은, 인간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율법이 두 번 내려왔다는 것이다. 율법이 처음에 모세의 손에 의해 이 땅에 내려왔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했기 때문에 모세가 돌판을 깨뜨려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두 번째 율법을 주셨다. 율법이 두 번 내려왔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속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여는 성막에 관한 이야기도 두 번 기록되어야 했던 것이다. 출애굽기에 똑같은 이야기를 두 번 기록함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매여 있는 우리가 율법에서 해방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더 잘 알 수 있다.

성막이 세워진 참된 목적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 때문에 고통하는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기 위함이다. 구약 시대의 성막은, 죄인들이 어떻게 죄를 씻는가를 가르쳐주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지 못하는 영혼들의 죄를 씻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5. 세마포장


세마포장


성막을 만들 때 하나님은 제일 먼저 지성소 안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법궤부터 만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여기서는 바깥 부분부터 안으로 들어가면서 차례로 성막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먼저 성막 바깥 부분에 있는 뜰에 대해 살펴보자.

출애굽기 27장 9절에,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남을 향하여 뜰 남편에 광이 백 규빗의 세마포장을 쳐서 그 한 편을 당하게 할지니󰡓�

18절에,

󰡒�뜰의 장은 백 규빗이요, 광은 오십 규빗이요, 세마포장의 고는 오 규빗이요, 그 받침은 놋이며󰡓�

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막은 제일 안쪽에 지성소가 있고, 그 바깥 부분에 성소가 있으며, 그 다음 바깥 부분이 뜰인데, 이 뜰은 모래 벌판 위에 기둥을 세워 남쪽으로 100규빗, 북쪽으로 100규빗, 동쪽으로 50규빗, 서쪽으로 50규빗의 세마포장을 쳐서 만들었다.

그리고 뜰을 둘러싼 포장은 희고 깨끗한 고운 삼베, 즉 세마포로 만들도록 했는데, 성막의 모든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듯이, 세마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희고 깨끗하고 점이 없고 의로운 성품을 나타내주고 있다.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2장 22, 23절에서,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라고 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계실 동안 전혀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사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늘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의로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의로운데 반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성경이 말씀하듯이 우리 인간들은 어느 누구도 의롭지 못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이나 광야 생활을 하였지만 그들의 옷이 해어지지 않았고, 신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이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셔서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고 옷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40년 동안 입은 옷은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때가 묻어 더러웠다. 그러나 그들 중 몇 명만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옷이 더러운 줄을 잘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성막에 가까이 와서 희고 깨끗한 세마포로 만든 성막의 바깥담을 보고서야  그들의 옷이 더러운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더러운 옷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들은 자기가 얼마나 추하고 악한지를 잘 알지 못한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하루는 사람들이 간음중에 잡힌 여자를 돌로 치려고 예수님 앞에 끌고 왔다. 그 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고 하셨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 나아오기 전까지 그들 자신이 얼마나 추하고 악한지를 잘 알지 못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마음 속에 죄가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보게 되었는데, 그들 속에 감추어져 있던 추한 죄가 발견되어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돌을 버리고 도망하게 되었다. 그들이 죄를 지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오지 않았다면 죄를 깨닫을 수가 없었으며, 그들 자신이 얼마나 추한지를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서 자신을 비추어볼 만한 눈이 없기 때문에, 자기와 같이 있는 교인들이나 이웃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추어 보고 󰡐�그래도 나는 김 집사보다는 양심적이다. 이 집사보다는 깨끗하다.󰡑�는 식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는 생각 속에 젖어 있다. 그러나 아무리 깨끗한 자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서 자신을 비추어보면 얼마나 형편없고 더러운 자인지를 알게 된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볼 수 있는 눈이 뜨여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의로움을 바라볼 만한 눈이 없는 사람은 그 무엇으로도 자신의 추한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다. 물론, 우리가 어느 정도는 󰡐�나는 다른 사람보다 추한 사람이다. 악한 사람이다.󰡑�라고 느낄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의로움을 발견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깊이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지 못한 채, 죄를 마음에 두고 그냥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깨끗하게 산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과 비교해 본다면, 자신이 너무너무 추하여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이다.

시몬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이 얼마나 악한 인간인지를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 󰡒�깊은 데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을 듣고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을 때, 그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즉, 주님에 비해서 너무 악한 죄인이기 때문에 감히 그 거룩하고 의로우신 주님 앞에 설 수가 없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이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는 어느 날 하나님을 뵙고 난 뒤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여.󰡓�(사 6:5)

하고 자기의 부정한 모습을 인하여 슬퍼하고 괴로워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그냥 󰡐�추하고 악한 죄인이구나.󰡑�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지 얼마나 악하고 추한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깨닫지 못하다가 희고 깨끗한 성막의 세마포장 앞에 와서 자기의 옷이 더러운 것을 발견하였듯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전에는 자신의 더러움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자마자, 바로 추하고 악한 자신의 모습이 비추어져 마음에 죄를 인하여 괴로워하고 죄를 씻을 때까지는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종교인들을 만나 보면 자신이 죄인인 줄은 알지만 죄에 대해 너무 무감각하여 죄를 인하여 괴로워하거나 슬퍼하는 것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죄를 해결하려는 의지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은 관념적으로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만, 자신이 얼마나 더럽고 악한 죄인인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 속에 죄를 두고도 대수롭지 않게 기도하고, 즐거워하며, 교회에 다니고 있고,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그들이 주위에 있는 죄를 가진 사람들과 자기의 양심을 비교할 뿐이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보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33년을 사시는 동안 한번도 범죄한 일이 없었으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신 적도 없었다. 그분은 십자가 앞에 섰을 때 육신적으로는 많은 고통과 고난이 예상되었지만,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셨다. 주님이 승천하신 이후 하나님께서는 오순절에 성령을 이 땅에 보내주셨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의 일을 마치고 올라가실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기쁘게 받으셨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받으실 수 있었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했으며,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오늘날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려면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의를 행하고 있지만, 그들이 열심히 노력하여 이루어진 의를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예수님은 마태 복음 5장 20절에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계명을 지키려고 열심히 노력하면 그들보다 더 좋은 의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결코 그러한 말이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마포로 만든 법복


출애굽기에서 성막에 관한 말씀을 자세히 읽어 보면,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입는 옷이 있는데, 이것을 법복이라고 한다.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섬길 때 입는 옷은 바로 세마포로 만든다. 제사장이 입는 옷의 재료인 세마포는 성막을 둘러싸고 있는 세마포와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막 뜰의 세마포장은 바로 거룩하신 예수님의 의를 말하는데, 제사장이 성막에 들어갈 때에 그가 입고 있는 세마포가 예수님의 의인 세마포장과 동일해야만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즉,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의 가진 의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행하신 그 의와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의를 가질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범죄하지 않고 거룩하게 사셨으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아들인데, 인간이 어떻게 감히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의를 소유할 수 있으며, 그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가? 여기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애를 쓰는 것을 본다. 그렇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할 수 있는가?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쓸지라도 그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에 불과하다.

결국,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는 예수님의 의인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가질 수있는가?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 2절에서,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고 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열심히 노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의를 구하게 되는데, 한 가지는 자신이 말씀대로 살려고 열심히 노력하여 범죄하지 아니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행위의 의를 말하고, 다른 한 가지는 자기의 어떤 노력으로도 의롭게 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의를 소유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의를 덧입게 되면 우리의 의가 어떠하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 오늘날 자기가 열심히 무엇을 해서 의를 세워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힘입지 아니하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동일한 의


제사장의 법복이 성막 뜰의 세마포와 동일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덧입어야 할 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가진 의와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잘해서 하늘나라에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야 함을 말해 주고 있다.

로마서 10장 4절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고 기록되어 있다. 즉 우리가 노력함으로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의를 이루어 놓으셨다. 또한 로마서 3장 21, 22절에 보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는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방법 외에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그 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4장 5절에,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라고 했는데,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의롭게 해 놓은 사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임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사실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신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감히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고 말하기에는 두려움을 느낀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의를 이루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가진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의를 세우려고 애쓰지 않게 된다. 회막을 둘러싼 세마포장과 제사장의 법복이 동일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우리가 가진 의가 동일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쁘게 받으실 수 있는 것이다.



6. 기  둥


성막의 기둥


성막을 둘러싼 담장은 시멘트도 아니고, 철판도 아니고, 세마포장이다. 그런데 남쪽으로 100규빗의 포장을 칠 때, 매 5규빗마다 기둥을 세워서 기둥 20개를 세우고, 북쪽에도 역시 100규빗의 포장을 치는데 기둥 20개를 세우고, 서편의 담장은 50규빗의 포장을 치는데 기둥 10개를 세웠다. 동쪽 가운데에 문이 있다. 문 오른쪽에 15규빗의 포장을 치는데 기둥 세 개를 세우고, 문 왼쪽에도 기둥 세 개를 세우고 15규빗의 포장을 치며, 문은 기둥 네 개를 세운 뒤 거기에 20규빗의 포장을 쳐서 바깥 담을 만들었다.

성막을 둘러싼 담장의 총길이는 300규빗인데, 매 5규빗마다 기둥이 있으므로 성막에 세워진 기둥은 전부 60개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시내 산 꼭대기에서 하늘나라에 있는 성전을 보여주고 그대로 지으라고 하셨기 때문에 하늘나라 성전을 그대로 본떠서 성막을 짓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성막 기구들의 규격을 정확하게 명시했을 뿐 아니라 거기에 쓰여지는 재료를 금이면 금, 은이면 은이라고  아주 명백하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성막의 다른 모든 기구들은 재료가 명시되어 있지만, 유독 기둥만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 전혀 그 재료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출애굽기 27장 9절에서 19절 사이를 읽어보면 세마포장을 쳐서 담장을 만드는 것이 나온다. 9, 10절에,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남을 향하여 뜰 남편에 광이 백 규빗의 세마포장을 쳐서 그 한 편을 당하게 할지니,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할지며󰡓�

라는 말씀을 보면, 그 기둥의 받침은 역시 스물인데 놋으로,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하라고 되어 있지만, 기둥의 재료는 말하지 않고 있다.

성경에서 어떠한 사실을 알려줄 때에는 그 내용이 중요해서 알려주지만, 전혀 말하지 않는 부분은 그 나름대로 하나님의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

구약 성경 열왕기 하 4장을 읽어보면, 선지자 생도의 아내 중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인은 남편이 죽을 때 남긴 빚으로 인해 채주에게 빚 독촉으로 시달림을 받았다. 결국 이 부인에게서 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채주는 그의 두 아들을 데려가겠다고 했다. 두 아들에게 소망을 두고 살았던 생도의 아내는, 채주의 그 말에 빚을 갚으려고 애를 썼지만 갚을 수가 없어, 결국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가 자기 사정을 고했다. 엘리사가 여자에게,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

고 하자, 여자는,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선지자 엘리사가 말하기를,

󰡒�너는 가서 빈 그릇을 빌어오라.󰡓�

고 했다. 중요한 것은 빈 그릇을 빌어오라고만 했지 그 그릇이 무엇을 담았던 그릇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빈 그릇은 바로 우리들을 가리킨다. 과거에 우리 속에 무엇이 담겨 있었든지 간에 빈 상태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 속에 성령으로 가득 채워 주신다.

독이 비어 있기 전에 김치독이었는지 간장독이었는지 아니면 술독이었는지는 상관하지 않고, 빈 독이왔을 때 그 속에 기름을 채웠다. 이것은 우리가 과거에 어떠한 삶을 살았든지 간에 주님 앞에 나아오면, 그 때부터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성령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둥의 재료


내가 수원교도소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그 교도소에 형제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한 사람을 죽이고 나머지 두 사람을 죽이려다 미수에 그친 살인범으로서 형을 받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교도소에 생활을 하면서도 증오와 원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평범하게 살고 있었던 우리 가정이 아무개 때문에 파괴되었고, 아무개가 내 인생을 망쳤으니까 기왕 버린 몸, 내가 나가기만 하면 그냥 두지 않겠다.󰡑� 는 생각으로, 불만과 증오로 가득찬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 공부 모임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복음을 들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면 정말 악하고 추한데, 그 악하고 추한 모든 죄가 눈처럼 희게 씻어졌다는 말씀을 듣게 되었을 때, 󰡐�내 자신을 바라볼 것인가, 성경 말씀을 바라볼 것인가?󰡑� 하고 갈등하다가, 결국 그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때에 증오와 복수심으로 가득찬 그의 마음에 평안이 오게 되고, 추하고 악한 생각이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거룩한 영인 성령은 그 마음 속에 있는 증오심이나 복수심, 원망이나 불평을 그대로 두고는 그 속에 거하실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러한 마음들이 다 제거되고 성령이 임하자, 그 마음이 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평안과 감사와 기쁨으로 채워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모범수가 되어 교도소를 나온 이후 다른 데로 가지 않고 교회 안에 머물면서 봉사하다가, 지금은 세차하는 일을 하면서 새로이 가정을 꾸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과거 우리의 마음 속에 무엇이 채워져 있었든지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우리 마음을 비우게 되면, 과거에 가졌던 악하고 추한 생각들이 우리와 전혀 상관없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 어떠한 삶을 살았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서 마음을 비우게 될 때, 주님은 그 마음을 성령으로 채워주신다.

누가 복음 8장 16절에,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고 기록된 말씀을 보면, 분명히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둔다고 되어 있지만, 등불을 켠 장소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구원을 받기 전에 어떠한 위치에, 어떠한 처지에 있었든지 간에 우리의 형편에 상관없이 일단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게 되고 거듭나게 되면, 주님은 당신의 원하시는 대로 우리의 위치를 옮겨 준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형편 속에 처해 있었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죄 사함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게 되면 그 위치는 달라지게 된다. 멸망의 위치에서 영생의 위치로, 저주의 위치에서 축복의 위치로, 어둠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지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우리를 당신의 원하시는 위치로 옮겨 당신의 기뻐하는 곳에 두시고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도구


여기 성막의 세마포장을 칠 때 사용되어진 기둥의 재료가 명시되어 있지 않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기둥은 바로 하나님께서 도구로 사용하시는 우리들을 가리키는데, 주님을 만나기 전에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었는가를 전혀 말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어떠한 자격을 갖추어야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때때로 신문에서 사원 모집의 광고를 보게 되는데, 거기에는 학력이나 경력 등 어떤 규정이 있어서 그 규정에 해당되는 사람만 그 회사에 입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어느 회사든지 간에 신입 사원을 모집하게 될 때에 어떤 조건을 제시하지만, 하나님의 성막에 기둥으로 쓰여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조건도 제시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세상에서 만들어진 사람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만들어서 쓰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모세를 사용하실 때, 그가 세상의 지식과 학문으로 갖추어지고 말을 잘한 사람이었지만, 그를 미디안 광야로 보내어 세상적인 지식과 경험들을 제거하여 당신의 뜻대로 쓸 수 있도록 만드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많은 학문과 권세를 가지고 있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쓰실 때는 13년 동안 아라비아 광야로 보내어 그가 가졌던 것들을 모두 버리게 한 후에 그를 새롭게 만드셨다.

어느 날, 바울이 아덴에서 그 곳의 많은 철학자들에게 옛날에 배웠던 지식으로 철학적인 설교를 했는데, 아무런 역사도 나타나지 않았다. 바울은 아덴을 떠나 즉시 고린도로 가게 되었다. 고린도 전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 고백하였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자기의 지식으로 말씀을 전하면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지식에 머무르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나타남으로 전했을 때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지식이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사람을 당신의 방법대로 훈련하고 만드신다. 아무리 훌륭한 신학교를 나오고, 인격을 갖추고, 똑똑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쓰임을 받기에는 부족하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학문을 겸비하고, 도덕적 인격적으로 무엇인가를 갖추었을 때,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귀한 기둥이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으로 쓰여지는 사람은 인간적으로 갖추어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때때로 어떤 사람을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시며, 또한 만물의 제일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하셔서 세상 사람들이 겪지 못했던 어려움도 겪게 하시면서 그 마음을 비워, 다만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채우셔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시는 것이다.


종의 자격


세상에서는 운전 기사가 필요한 곳은 운전 경력과 운전 면허증을 소지한 사람을 필요로 하고, 타이피스트나 컴퓨터 기사를 뽑을 때는 거기에 필요한 자격을 갖추면 되지만, 세상의 그러한 자격으로서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다. 공부를 많이 하여 신학박사가 되고, 외국 유학을 한 사람이라도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것으로 채움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가 없다.

오늘날 주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본다. 그들은 모두 한가지로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위에 더 많이 갖추고 배워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일 속에 하나님이 나타나지 아니하고 인간적인 경험이나 방법이 나타나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쓰시기 위하여 그들을 만들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쓰시기 위하여 오랫동안 사울을 통해 핍박과 어려움을 겪게 했고, 아브라함을 쓰시기 위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으면서 많은 고난을 당하게 했으며, 야곱을 쓰시기 위하여 야곱에게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통해 훈련하셨다. 신명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때 마치 독수리가 그 새끼를 훈련시키는 것처럼 그들을 인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신명기 8장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주리게 하시고, 배고프게 하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데서도 끊임없이 그들을 훈련하셨음을 알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성막의 모든 기구에 대해서는 그 재료를 명시하셨지만, 성막 바깥 뜰의 포장을 치는 데 사용되어지는 기둥의 재료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기둥으로 귀하게 쓰임을 받는 것은 인간적인 어떤 조건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이 비워지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질 때에 가능한 것이다. 그가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지 간에 가문이 좋든 나쁘든지 간에, 돈이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훈련하셔서 성전의 기둥으로 삼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기둥 스스로 󰡐�나는 금이기 때문에, 혹은 나는 은이기 때문에 쓰임을 받는다.󰡑�는 소리를 할 수 없다. 우리가 부드럽거나 강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손에 잡히게 될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양대로, 기뻐하시는 뜻대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성전의 귀한 기둥으로 삼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많이 배웠기 때문에 성전의 기둥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교만한 생각이지만, 반대로 나는 무식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지 못한다는 것도 역시 교만한 생각이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쓰신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익할 뿐이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이 비워져 하나님께 붙잡힌 바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다듬으시고 훈련하셔서 귀한 일꾼으로 쓰시며, 그를 통하여 영광을 거두신다.


7. 놋받침


놋받침


출애굽기 27장 9, 10절에,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남을 향하여 뜰 남편에 광이 백 규빗의 세마포장을 쳐서 그 한 편을 당하게 할지니,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즉, 남편에 있는 포장을 위하여 기둥 스물을 세우고, 북편 포장을 위하여 기둥 스물을 세우고, 서편을 위하여는 기둥 열을 세우고, 또 동편 문 입구 쪽에 기둥 열을 세우는데, 그 60개의 기둥에 60개의 받침을 만들어서 그 위에다 기둥을 세우라고 되어 있다. 기둥은 성경에 재료가 명시되어 있지 않았지만, 기둥 받침은 놋이라고 그 재료가 명시되어 있다.

성경에 놋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 󰡐�놋󰡑�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 민수기 21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여 불뱀에게 물려 고통당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고 하셨다. 놋뱀은 심판을 의미하는데, 불뱀 때문에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든 것처럼, 죄 때문에 멸망받을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이다.

성막에 쓰이는 기둥은 반드시 놋받침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 이유는 기둥의 받침이 튼튼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기둥이라도 견고하게 설 수 없으며,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둥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놋받침 위에 튼튼하게 세워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귀한 기둥이 되는 사람들은 그의 신앙을 놋받침 위에다 견고하게 세워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밑받침이 엉뚱한 곳에 있기 때문에 신앙의 밑받침이 온전치 못하여 그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이 흔들린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믿음을 자기의 감정에 세워서 기분이 좋을 때는 믿음이 좋은 줄 알고, 기분이 나쁘면 믿음도 나쁜 줄로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믿음을 자기의 행위에다가 세워서 행위가 좋을 때는 믿음이 견고하게 서 있지만, 행위가 나빠질 때는 믿음도 흔들리면서 나빠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우리가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곳은 놋받침 외에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


신앙의 밑받침


아무리 구속함을 받은 형제 자매라고 할지라도 실수를 하거나 범죄할 경우가 있다. 우리가 놋받침 위에 견고하게 서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우리가 범죄를 하거나 실수하게 되었을 때, 사단은 우리의 허물들을 하나님 앞에 참소할 뿐아니라 우리 양심에다가 󰡐�네가 그런 허물이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느냐?󰡑�고 정죄한다. 그래서 행위에 서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행위가 좋을 때는 그 믿음이 견고하게 서 있지만, 실수하거나 범죄했을 때 사단이 참소하게 되면, 그가 내세울 만한 행위 자체가 흔들리기 때문에 그 믿음은 중심을 잃고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에 서야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할 수 있는가? 놋받침은 바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우리가 죄를 범하거나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이지만, 우리를 위하여 심판을 받은 주님 위에 서 있을 때에라야만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 하면 우리가 연약하고 범죄하고 실수했지만, 그 죄는 이미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았고, 능력을 상실한 죽은 죄이기 때문에 그 죄가 우리의 믿음을 흔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 위에 서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교회, 즉 성막의 기둥이 되려면 기초가 견고해야 한다. 사단은 어디에서든지 우리의 믿음을 흔들 수 있지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심판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 있을 때에는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단이 비록 우리의 허물이나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참소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보시고 사단의 참소를 기각할 것이다. 사단이 참소하는 죄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은 죄이기 때문에 그 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멸망으로 내려가게할 수가 없으며,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조금도 손상을 주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어떤 죄를 범했을 때, 그 죄에 대하여 예수님이 심판을 받지 않으심으로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 죄는 살아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담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하여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믿음이 자기의 의지나 결심, 선한 행위에 서 있다면, 사단이 쉽게 우리의 믿음을 넘어뜨릴 수 있겠지만, 우리를 위해 심판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그 위에 서 있다면 결코 넘어뜨릴 수 없다.


이미 끝난 심판


어떤 사람이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하는데, 갑자기 산에 불이 났다. 산 밑에서 불이 나서 산 위로 불길이 점점 타올라 오는데, 불길이 얼마나 거센지 이 사람이 도저히 불길을 뚫고 산을 내려올 수 없었다. 이제는 별도리 없이 불에 타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는데, 갑자기 이 사람 마음 속에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곧 자기 주머니 속에 있는 부싯돌을 꺼내 자기가 있는 주위에다가 불을 놓았다. 그 불이 그 사람 주위를 태우기 시작하여, 그는 불에 타 재가 되어버린 안에 서 있게 되었다. 산 밑에서 일어난 불이 계속 타올라 오다가 이 사람이 불을 놓은 장소까지 이르자 다 재가 되어 탈 게 없으니까 불이 그대로 꺼져 버렸다. 만일 그가 불을 끄려고 했다면 오히려 불에 타 죽었을는지도 모르지만, 그는 불을 피한 것이 아니라 불이 타고 난 흔적 위에 있었기 때문에 살아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 그렇다. 하나님의 성소의 기둥은 놋받침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쓰임을 받는 기둥감이 되는 사람들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그 죄에 대한 심판을 끝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확고하게 믿음으로 서 있어야만 어떤 죄의 심판도 피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다. 광야에서 불뱀이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었을 때, 그들은 그 불뱀을 피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물려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회개하고 돌이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그것을 쳐다보면 살리라.󰡓�고 하셨다. 불뱀에 물린 사람의 몸 속에는 이미 뱀의 독이 작용하고 있는데, 놋뱀을 쳐다본다고 그 독이 없어질 리가 있겠는가? 논리상으로는 도저히 맞지 않는 이야기지만, 민수기 21장에서는 그 불뱀에 물린 자들이 놋뱀을 쳐다본즉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범죄할 때마다 죄의 독소가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의 마음을 파괴하고,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믿음을 파괴한다. 마치 우리가 뱀에게 물리면 뱀의 독이 우리 몸 속에 들어와 혈관을 따라 돌면서 몸의 각 부위를 파괴하듯이, 죄악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담대함도 잃어버리게 되고, 부끄러움과 두려움 등 악한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뱀에 물린 자가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봄으로 나음을 입었던 것처럼,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될 때, 죄에 대한 모든 심판이 이미 끝났으므로, 다시는 심판을 받을 수 없다는 믿음이 우리 마음 가운데 확고하게 세워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여러 부분에 믿음이 약하지만, 가장 약한 부분이 자기 죄에 대해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씻으셨다고 성경 곳곳에서 이야기하는데도, 정말 내 죄가 눈처럼 희게 씻어졌다는 말씀을 믿음으로 마음이 죄에서 해방을 받는 일은 보기 드물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자기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 마음이 죄에서 해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놋뱀을 장대 위에 달았지만, 이스라엘 백성 중 많은 무리가 놋뱀을 쳐다보지 아니하여 나음을 입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다.


십자가의 능력


만일, 내가 범한 죄가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두렵게 하고, 양심의 가책을 주고, 담대함을 잃게 한다면, 그 죄가 아직까지도 내 마음 속에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바로 십자가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능력은 내 마음 속에 역사하는 어떤 죄의 독소도 능히 소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죄에 얽매이고, 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일지라도 십자가 앞에 나아오면, 분명하게 그 죄에서 해방을 받고 나음을 입을 수가 있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죄 때문에 고통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심령이 있다면, 그는 아직도 스스로 죄를 이기려고 애쓰는 사람이며, 십자가의 능력이 마음 속에 임해서 죄의 세력을 멸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성막에 나타난 놋은 심판을 가리키는데, 우리가 앞으로 성막에 대해 계속 살펴보면, 받침만 놋이 아니라 제단도 놋으로 만들어져 있고, 물두멍도 놋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성소에 들어가기까지 성막의 모든 기구는 놋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성소 안에서 사는 삶을 지나 더 깊은 지성소에 들어가면 금과 은으로 된 것을 보지만, 처음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일수록 그 마음이 자주자주 놋에 부딪혀야 한다.

제단이 놋이고 물두멍이 놋인 것처럼, 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받으신 심판에 자주자주 부딪혀서 내 속에 있는 모든 죄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죽은 죄라는 사실을 마음에 깨달아 죄에서 해방을 받고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성소의 기둥이 되는 사람들은 놋받침 위에 서야 한다. 물론, 든든한 돌 위에 설 수도 있고, 금이나 쇠 위에 설 수도 있고, 나무 위에 설 수도 있지만, 놋받침 위에 세우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해 심판을 받으신 주님의 심판 위에 서라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을 흔들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강한 것은 죄이다. 죄가 우리 마음 속에서 항상 우리의 믿음을 흔들기 쉽지만, 십자가의 보혈로 죄의 값을 치룬 심판을 바라볼 때, 이미 심판을 받은 죄는 효력을 잃은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도둑질을 했거나 간음을 했거나 살인을 하여 재판을 받게 되었을 경우, 재판의 결과에 따라 벌금을 냈거나 형을 받았다면, 그 죄는 이미 효력을 상실한 죽은 죄인 것이다. 그 죄는 더 이상 나를 끌고 다닐 수 없고, 괴롭힐 수 없으며, 구속할 수 없다.

바로 우리가 그러하다. 우리가 여러 가지 죄를 짓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 죄는 우리를 지옥으로 보낼 만한 힘이 없다. 그 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더 이상 갈라 놓지 못하며, 우리를 괴롭히거나 불행하게 만들지 못한다. 즉, 모든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아 효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믿는 믿음 위에 서 있을 때, 어떤 죄도 우리를 두렵게 하거나 넘어뜨리지 못한다.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을 벗어버리고, 다만 우리를 위하여 심판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 위에 견고하게 서 있을 때에, 하나님께 귀한 기둥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는 일꾼이 되는 것이다.



8. 갈고리와 가름대


가름대의 역할


출애굽기 27장 9절에,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남을 향하여 뜰 남편에 광이 백 규빗의 세마포장을 쳐서 그 한 편을 당하게 할지니,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할지며󰡓�

라는 말씀이 있다. 성막의 포장은 남쪽에 백 규빗, 북쪽에 백 규빗, 동쪽에 오십 규빗, 서쪽에 오십 규빗의 직사각형으로 쳐지게 되는데, 그 포장을 치기 위하여 남쪽에 20개, 북쪽에 20개, 동쪽에 10개, 서쪽에 10개 하여 총 60개의 기둥을 세우게 된다.

60개의 기둥은 60개의 놋으로 만든 받침 위에 세워지는데, 그 60개의 기둥이 놋받침 위에 세워졌다고만 해서 튼튼하게 서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기둥의 받침은 그 기둥을 지탱하기에는 충분하겠지만, 바람이 불 때에는 그 받침만으로는 포장이 쳐져 있는 기둥을 견고하게 세워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27장 11절에,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기둥의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할지며󰡓�

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기둥과 기둥을 서로 붙들어 주고 연결해 주는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하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해마다 여름 수양회를 하는데, 해마다 집회 장소로 이용해 오던 솔밭이 너무 좁아 천 평 가량 되는 넓은 땅에 인조그늘을 만들기로 했다. 그 일을 맡은 형제들이 기둥을 곳곳에 세우고, 그 위를 차광막으로 덮었다. 차광막은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땅을 파고 콘크리이트를 이겨 넣어서 기둥을 아주 튼튼하게 세웠다.

그러나 사람이 흔들면 조금씩 기둥이 움직여서, 기둥을 다 세운 뒤에 기둥과 기둥 사이를 케이블로 연결해 엮어 놓았다. 그렇게 하자 비로소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약한 기둥이 있을지라도 다른 기둥과 연결되어 튼튼하게 서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성막의 기둥 밑받침도 중요하지만 받침뿐 아니라 옆의 갈고리와 가름대가 얼마나 기둥을 튼튼하게 붙잡아 주는가 하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기둥과 기둥 사이가 가름대로 연결되어 있어서 이쪽 기둥이 저쪽 기둥을 붙들어 주어 견고하게 서 있게 된다는 것이다.

성막에 나타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또 다른 면으로는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의 삶을 나타낸다. 여기에서 기둥이 튼튼하게 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도록 유지시켜 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날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심판을 받으셨다는 믿음 위에 설 때에 우리가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지만, 그 믿음 위에 서 있다고 해서 구속함을 받은 형제 자매들이 시험에 들거나 범죄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즉,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심판을 당하셨다는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사단의 유혹을 받거나 세상에 빠져 범죄하거나 실수하여 넘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 인간이 어떻게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는가? 성막에 보면,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갈고리와 가름대가 연결시켜 주어서 기둥들이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은으로 되어 있었다.


은으로 된 가름대


성경에 나타난 모든 것은 다 의미가 있다. 즉 󰡐�금󰡑�은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하고,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성품󰡑�을, 󰡐�놋󰡑�은 󰡐�심판󰡑�을 의미하는데, 󰡐�은󰡑�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의미하고 있다. 기둥이 놋받침 위에 서 있지만, 넘어지지 않기 위하여 은으로 된 갈고리나 가름대로 기둥을 서로 연결시킨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고 신앙 생활을 하면서 때때로 실수하고 넘어질 때마다 구속의 대가인 은혜가 우리를 붙들어 준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3장 12절에 보면,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고 되어 있다. 우리가 구속함을 받고 난 뒤에 의인이 되어 거룩하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의아해하면서 󰡐�그러면 당신들은 죄를 짓지 않습니까?󰡑�라고 묻는다. 우리가 견고하게 흔들리지 않고 믿음에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온전해서가 아니라 부족한 우리를 붙드시는 주님의 능력이 온전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깨끗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것은, 그 아이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그 부모가 어린아이를 돌보아 주어서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죄를 짓지 않는다든지, 흠이 없어서가 아니라 허물투성이이고,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붙드시는 주의 은혜가 온전하기 때문이다. 즉, 은혜로 우리가 믿음 위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이지,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닌 것이다.

히브리서를 읽어보면, 초대 교회의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이 많은 환난과 핍박을 당하면서, 때때로 시험에 들어 믿음에서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범죄하게 되었을 때, 죄에 대한 가책 때문에 두려워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우리가 놋받침 위에-우리를 위해 심판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 있지만, 절대로 범죄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범죄를 하게 되면, 사단은 즉시 우리를 정죄하여 하나님 앞에서 부담을 느끼게 하여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없도록 한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령한 은혜와 영적인 공급이 끊어지고, 그로 인해 우리는 무기력해져서 즉시 사단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사단은 우리가 범죄하자마자 우리를 송사해서 양심의 가책과 두려움 속에 빠지게 하고, 구원이 아닌 것처럼 느끼게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아 하나님 앞에 기도할 마음, 성경을 읽을 마음, 예배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적 공급을 끊어서,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은 죄 속에 빠지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 은혜 가운데 있음으로서, 하나님의 지키심과 돌보심 가운데서 점점 죄와 멀어지고 죄에서 벗어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백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눈물로 애통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히브리서는 은혜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보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고 말하고 있다.

초대 교회의 유대인들은 유대 교회의 율법과 종교적인 의식 속에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믿음의 길을 달려나갔다. 그런데 그들이 많은 핍박과 환난을 당하자 때때로 두려움 속에 빠져 죄를 범하고 다시 신앙 생활을 회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왜냐 하면, 죄를 범하게 될 때에 사단은 양심의 가책과 두려움을 주어서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만한 담대함을 잃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범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가지고 당당히 나아오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범죄했다고 해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는 점점 더 사단의 계략 속에 빠져들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즉시 하나님의 고치심과 돌보심이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고, 이기게 해 준다는 것이다.


은혜의 보좌


죄를 범한 자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올 수가 있는가? 그것이 바로 은혜이다. 은혜는 모든 것이 온전한 사람이 받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연약하며 추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만일 허물이 없고 부족함이 없다면 은혜를 받을 만한 아무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고 했다. 누가 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가? 범죄하고 실수한 사람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은 이후에 범죄했을 때에는 주의 은혜의 손길이 우리를 붙들어 준다. 우리가 구속함을 받은 이후에 지은 죄나 구속함을 받기 전에 지은 죄나 동일하게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 그러므로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주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 받으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은 이후 범죄했을 때에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괴로워하여 성경도 읽지 아니하고, 기도도 하지 아니하고, 교회에도 나오지 않게 되면, 하나님과의 사이가 더 멀어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것을 공급받지 못하게 되고, 점점 더 죄 속에 깊이 빠져들 뿐 아니라 마귀의 유혹을 이기기가 어렵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실수하고 범죄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게 되면 즉시 그 죄에서 벗어날 수가 있으며,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될 수 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와 범죄한 이후에 두려워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의 방법으로 죄를 가리워 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점점 더 깊은 죄 속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느 날 나단 선지자가 나타나 냉정하게 다윗의 죄를 책망하고 난 뒤,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였으니󰡓�(삼하 12:13) 하고, 멀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다윗을 이끌어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과 다윗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인도해 준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에 다윗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게 되었고, 다시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가 회복되었던 것이다.

어떤 죄를 범한 이후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은혜의 보좌이다. 󰡐�은혜의 보좌󰡑�라는 말은 죄를 범한 연약하고 악한 인간도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6절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고 말씀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 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어서,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공급받기 때문에 다시 사단에게 휘말려들지 않고 밝은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 죄가 사해진 것을 믿는 믿음 위에 섰을 때에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다, 또한 그 후에 우리가 범죄할 경우라도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고 받으시는 은혜가 성막의 기둥들을 붙들어 주는 갈고리와 가름대처럼 우리를 붙들기 때문에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교만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교만해지면 은혜를 받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야말로 은혜를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연약하고 부족한 자임을 알아야 한다. 비록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양심의 가책을 받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자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은혜와 긍휼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구속받은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고 난 이후에 타락하는 경우를 보는데, 하나님은 구속 받은 성도들이 범죄하고 실수할지라도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를 통해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은혜를 입어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길을, 성막을 통하여 보여주신 것이다.

9. 문을 통과해야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


성막의 바깥 담장은 동쪽과 서쪽이 각각 50규빗씩, 남쪽과 북쪽이 100규빗씩으로 그 둘레가 전부 300규빗이며, 성막의 동편은 가운데 20규빗의 문과 문 좌우로 15규빗씩의 담장으로 되어 있는데, 특히 가운데에 있는 20규빗의 문은 청색, 자색, 황색실과 고운 베실로 수를 놓아서 주위의 흰 세마포 담장과 선명하게 구별이 되므로 누구나 쉽게 문을 발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성막의 높이는 5규빗인데, 5규빗을 m로 환산하면 2m 25cm정도가 된다. 이 높이는 보통 사람이 그 너머로 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넘어갈 수 없는 높이다. 즉 성소 안에 들어가려면 어느 누구도 담을 넘어서는 갈 수가 없으며, 반드시 문을 통하여 들어가야 한다. 이 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 요한 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요 10:9)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들은 각기 나름대로 그 종교의 어떤 계율이 있어서 대부분 선한 생활을 강조하고 성실하고 참되게 살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신앙은 종교와 다르다. 종교는 선하고 도덕적인 삶을 통해서 교주나 신의 요구에 따라줄 것을 요구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성실하게 살아서 어떤 위치에 도달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피를 흘리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는 자기 스스로의 도덕적인 행위, 또는 적선으로 말미암아 어떤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가 수고하고 애써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신앙은 우리의 수단이나 노력으로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과 종교의 차이점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 예수를 믿는 신앙도 다른 종교들과 같이 󰡐�선을 행하라󰡑� 󰡐�사랑하라󰡑� 󰡐�참아라󰡑� 󰡐�성실하게 살며 남에게 모범이 되라.󰡑�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이 명백하게 말하는 바는 설령 우리가 종교적으로 선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저지른 죄를 손톱만큼도 희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진실하게 살았다 할지라도 살아오면서 지은 죄는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이 죄의 문제를 처리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이유는 우리의 어떤 수고나 노력으로도 우리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씻어주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모든 종교는 자기 나름대로 선을 지향할 수는 있겠지만, 그 종교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저지른 죄를 해결받을 수는 없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저지른 죄의 대가로 어린 양이 죽어야 하는 것처럼,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죽음 외에는 절대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깨끗케 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죄를 범한 사람은 누구든지 똑같이 죄를 범한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이다.


종교와의 차이


주님께서 󰡐�나는 문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가 문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건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하나님이 원하는 위치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 땅의 많은 종교들은 예수 없이 자기들의 선행으로 말미암아 어떤 상태에 도달해 보려고 한다.

나는 어떤 특정 종교를 판단하거나 비판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유명한 종교인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속이 좁고 옹졸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어떤 선교사가 인도에 가서 인도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 인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예수님이여, 하나님이여, 당신도 내가 섬기는 다른 신들과 함께 나를 도와주소서.󰡑� 라고 했다. 그들은 여러 신들을 믿어왔는데, 예수 신 하나 더 믿는다고 특별히 부담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선교사가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므로 하나님 한 분만을 믿어야 한다.󰡓�고 하니까 󰡒�무슨 놈의 신이 그러냐? 예수라는 신은 속이 그렇게 좁으냐? 우리가 믿는 신들은 마음이 넓어서 다른 신들과 사이좋게 지내는데, 예수는 자기밖에 모르는 속이 좁은 신이다. 그런 신은 싫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핏 들으면 그 많은 신들은 서로 잘 이해하고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 같고, 예수는 속이 좁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진리는 유일한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서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이들은 󰡐�불교도 좋고, 천주교도 좋고, 기독교도 좋다.󰡑�고 한다. 우리가 넓은 마음으로 남의 신앙도 이해를 해 주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들은 굉장히 마음이 넓고, 생각이 깊은 것 같지만 냉정하게 따져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떠나 있는 것이다.

성경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고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죄를 짓지 아니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공로 외에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절대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의 문제는 예수를 종교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위치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와 같이 내가 선을 행하고 도덕적으로 남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도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 문이 어떤 문이기에 그길을 통과하기만 하면 더러운 죄인이 의롭게 되어질 수 있는가? 어떻게 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게 될 때 우리의 많은 문제와 고민이 해결되고 기쁨으로 변하게 되는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비밀을 깨달아 그를 통과함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해야 한다. 기독교가 타락하게 될 때마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 비밀을 깨닫지 못하여 인간적 선행을 요구했고, 도덕적인 면으로 착실하게 살 것을 가르쳐 왔다.

만일 우리가 성실하게 살고 선을 행함으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면, 구태여 예수를 믿어야 할 필요가 없으며, 예수 믿는 것도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없다. 다른 종교도 선을 요구하고, 우리가 가진 신앙도 선을 요구한다면 다른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신앙이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은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게 될 때, 그분이 흘리신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눈보다 더 희게 씻어지고, 정결하게 되어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문을 통과해야 된다.


반드시 문으로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고, 또 󰡐�나는 문이니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문으로 들어가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없는 종교는 구원을 줄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해도 문을 통과하여 모든 죄를 벗어버리지 않은 사람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다름이 없이 애쓰고 수고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세마포장의 높이가 5규빗, 즉 2m 25cm로 상당히 높은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가 문으로 통과하기를 요구하고 계심을 의미한다. 사도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자기가 죄인임을 깊이 깨닫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며 자신을 발견했듯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부딪히게 될 때 자기를 볼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앞에 서지 아니하고, 주위 사람들과 비교하여 볼 때는 선하고 잘났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예수 그리스도 앞에 비추어 보면 얼마나 거짓되고 악하고 더러운 인간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과하여 죄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결코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얻을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비추어 보아서 자기가 추하고 더러운 죄인임을 안다면, 아무리 많은 돈이나 지위나 명예를 가졌어도 죄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마음에 진정한 만족이나 평안을 누릴 수가 없을 것이다. 세마포장의 담은 뛰어넘을 수 없을 만큼 높다. 거룩한 것과 더러운 것,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해 놓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담 밖에는 더러운 것이 용납될 수 있어도 담 안에는 거룩해야만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비행기를 탈 때 무기를 가지고 전자 장치가 있는 문으로 들어가면 삑삑 소리가 나므로 무기를 버려야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와같이 거룩한 장소에 들어가기 위해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는 사람도 먼저 그 마음 속에 더러운 죄를 깨닫고 버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죄가 눈처럼 희게 씻어진 상태가 되면, 거룩함을 입기 때문에 거룩한 성 안에 거하기에 불편하거나 부담스럽지 않게 되어진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마음 속에 모든 죄가 눈처럼 희어지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지 않은 사람이다. 사도 바울이 죄인 중에 괴수였던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런데 내가 의롭게 되어졌다.󰡑�고 하는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함으로 죄인의 괴수였던 자신이 긍휼을 입었다는 말이다. 성막 바깥의 더러운 곳에 있던 죄인이 거룩한 곳으로 들어가면서 의롭게 되면 더 이상 그 속에서 죄를 발견할 수 없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통과만 하게 되면, 누구든지 모든 죄를 씻음받고 죄에서 해방을 받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어떤 노력으로 의로워지려고 애를 쓰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문 밖에 있는 사람이며,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의 다른 종교인과 다를바가 없다.

이 세상 종교의 어느 신이 우리를 대신해 죽어줄 수가 있는가?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를 위해 대신 죽어 주셨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과할 때, 그 죽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눈처럼 희게 씻어지고 거룩함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을 통과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절도요 강도라고 했다. 외형적으로 아무리 선하고 진실해 보여도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라는 것이다.


10. 문의 안과 밖


예수 그리스도의 맛


지금까지 성막의 바깥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해 왔는데, 외형적으로 보면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성막이지만, 그 문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가면 황금으로 찬란하게 꾸며져 있듯이, 겉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버림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이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놀라운 영광을 보게 된다. 성막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해야 하며, 예수님을 통과하지 아니하면 절도요, 강도며,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

출애굽기 27장 16절에,

󰡒�뜰 문을 위하여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짠 이십 규빗의 장이 있게 할지니, 그 기둥이 넷이요, 받침이 넷이며󰡓�

라고 말하고 있다. 성막을 둘러보면, 사방이 아주 고운 세마포로 5규빗, 즉 225cm의 높이로 담이 처져 있는데, 유독 성막의 문만은 흰 세마포가 아니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다. 그래서 누구든지 쉽게 문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어떻게 예수를 믿어야 할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길이 어디인지 모르는 채 그냥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연보하고, 주일에는 예배드리는 차원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성막의 문이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아주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기 때문에 성막을 한 바퀴 둘러보면, 아무리 눈이 나쁜 사람이라도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하나님께서 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해 놓으셨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자를 고치신 것이나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깨끗한 생애를 사신 모습도 발견해야 하지만, 우리가 정말 발견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문 되신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무슨 문 되신 부분이 있고, 안에 있는 부분도 있느냐?󰡑�라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성막에 들어가는 문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문 되신 부분도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서 󰡐�그와 더불어 먹는󰡑� 놀라운 축복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막 바깥에 서성거리면서 성막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경우가 참 많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맛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나는 지금까지 세계여러 곳에 여행을 다녔고, 좋은 음식을 먹었으며, 결혼을 하여 사랑하는 아내와 즐거운 시간을 가져보았다. 또 자녀들로 인하여 기쁨을 얻었고, 여러가지 기쁨을 맛보았다. 그러나 세상적인 기쁨을 다 합친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맛본 기쁨과 행복, 감사에 비하면 만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맛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말을 할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억지로 애를 써서 세상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맛을 본 사람은 세상의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와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세상의 것을 버리는 것이지, 억지로 버리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고, 교회에 다닌다고 하지만, 세상의 즐거움이나 쾌락에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맛보게 되면, 세상의 모든 것이 무의미하며 무익한 것임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수박 겉핥기󰡑�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혀가 예민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수박껍데기를 핥는다면 수박의 참 맛은 보지 못한다. 그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지 아니하고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참 맛을 알 수가 있겠는가!

지금까지 복음 안에 살아오면서 사람들이 자기의 마음을 잡지 못해 죄악 속에 빠져 번민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맛을 본 후 주님 앞으로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을 보아왔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명예나 권세, 쾌락이 기쁨이 될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맛본 사람들은 세상의 것이 더 이상 기쁨이 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기쁨이 되는 것이다. 그런 기쁨을 가진 사람은 남보다 가난하고 지위가 낮다 해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표현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보면 이 세상의 금은 보화와 비교할 수 없는 지혜와 진리가 감추어져 있다.


죄를 사하는 과정인 문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문 되신 부분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고 진실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는 더러운 것이나 악한 것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려고 할 때 죄인된 몸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죄가 있어도 예수 안에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죄인이고, 사단의 자식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죄가 없고 거룩하며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편 1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의인의 길은 인정하신다.󰡓�고 했고, 󰡒�의인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한다.󰡓�고 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의 차이는 바로 죄를 씻었느냐 씻지 않았느냐 하는 것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성실한 사람이라도 죄인이다.

성막의 문은 바로 우리 죄를 사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문은 길이가 20규빗으로 된 포장으로 되어 있으며, 그 포장은 바로 성막 안과 밖을 구분해 놓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성막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 포장을 젖히면 바로 제단을 볼 수 있는데, 문 앞에 놓여 있는 제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못박혀 죽으신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문으로 통과하게 될 때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눈보다 희게 씻어지게 된다. 마치, 󰡐�천로역정󰡑�에서 기독도가  십자가 앞에 이르렀을 때에, 그를 무겁게 누르던 죄의 짐이 등에서 떨어져 굴러가버린 것처럼 우리의 죄도 십자가 앞에서 씻어져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어떤 죄인이든지 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게 될 때에 모든 죄가 눈보다 더 희게 씻어져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부담스럽지 않게 된다.

문을 통과한 사람들은 누구든지 모든 죄를 씻음받고 죄에서 벗어나 해방을 누리는 것이고, 아직 문을 통과하지 아니하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죄 가운데 머물러 죄로 더불어 먹고 마시고, 죄와 싸우고 있는 상태이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기 위해 전자 장치가 된 문을 통과할 때, 어떤 무기나 금속을 지니고 가면 삐삐 소리가 나서 그대로는 통과할 수 없는 것처럼, 죄를 가지고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과할 수가 없다. 문을 통과하는 순간에 조금 전까지 죄인이었던 사람이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죄가 그를 떠나게 되어 의인이 되고, 말 그대로 성도가 되어진다. 그리고 그 문을 통과한 사람들은 다시 죄에 얽매이지 않는다. 거룩함을 얻었기 때문에 의롭다함을 얻게 된다. 이제는 죄와 상관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먹고 마시며 생활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죄인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거하실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있다. 과연 죄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먹고 마실 수 있는가? 만일, 내가 죄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먹고 마실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함께 할 수 있는  추한 분이지 거룩한 분이 아니다.


문을 통과하라


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죄와 더불어 먹고 마시며 고통하고 싸우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통과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을 받아 죄와 상관없이 주님과 교제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다. 우리가 바깥 부분만 보아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가 없다. 문을 통과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보아야 예수 그리스도의 귀하고 아름다운 부분을 비로소 발견할 수가 있다.

예수님의 교훈을 따라 살려고 하고, 예수님을 믿어서 삶에 변화를 받으려고도 하지만, 그것은 문 밖에서 애쓰는 것에 불과하다.

마르틴 루터가 그 문을 통과해서 씻음을 받고 의인이 되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외쳤고, 요한 웨슬레도 그 문을 통과해서 󰡒�내 모든 죄가 씻어졌다.󰡓�고 담대히 증거했으며, 사도 바울도 󰡒�죄인 중에 내가 괴수였는데, 그 문을 통과함으로 말미암아 씻음을 받아서 거룩함과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간증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 문을 통과함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모든 죄를 씻음받고 거룩함을 입고 의롭다 하심을 얻어 하나님께 영광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 모두가 바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말고, 문을 통과하여 모든 죄를 씻음받고 그리스도를 맛보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남은 생애를 살게 되기를 바란다.



11. 문의 색깔


섞일 수 없는 색깔


성막의 문은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되어 있어서, 쉽게 발견되어질 수 있듯이, 문 되신 예수 그리스도도 세상의 사람들과 달라서 쉽게 구분할 수가 있다.

출애굽기에 나타나는 유월절 이야기를 보면, 정월 14일이 유월절인데, 정월 10일에 어린 양을 구별해서 4일 동안 지켜본다. 이 양이 흠이 없는가, 점이 없는가?󰡑�를 살펴서 점이나 흠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을 때, 정월 14일에 유월절 양으로 잡아 고기를 먹고 피를 문설주에 발랐다. 4일 동안 지켜보았을 때 아무 흠이 없었던 어린 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지켜보았지만, 그에게서 죄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삶과는 구별되었다. 성막의 다른 부분은 흰 세마포로 되어 있지만, 문은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되어 있어 금방 드러나듯이,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흘러가지 아니하고, 세상을 거슬렸기 때문에 그분의 삶은 쉽게 드러났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과 전혀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과 달랐다는 것을 바다 위를 걸었다거나,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일,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일로 알기 쉽다. 예수님의 색깔 있는 삶이란 그렇게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이 달랐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와 전혀 달랐다. 마태 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이 말씀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사람들이,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다.󰡓�

며 놀랐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좋고 아름다운 이야기인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들은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었다.

인간의 생각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씀들을 하셨기 때문에 어떤 말씀은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내용이며, 어떤 말씀들은 사람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예수님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했다.

만일,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땅에 와서 세상 사람들과 잘 섞일 수 있었을 텐데,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색깔을 가지고 계셔서 정치와도, 종교와도, 어느 누구와도 섞일 수 없으셨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능력을 행하면서 그 당시의 종교인들, 서기관, 바리새인, 대제사장들과 자연스럽게 섞였다면, 예수님은 굉장히 인기가 있었을 것이고, 영화를 누리며,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선한 일을 하시면서도, 십자가에 못박히게 된 원인은 바로 그들과 색깔이 다른 것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바알이나 아세라 같은 다른 신을 섬겼기 때문에 그들과 섞이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들도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은 너무 달라서 섞여질 수가 없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무론하고 인간에게서 나온 생각은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도 하나님의 생각과 합하여질 수가 없고, 섞여질 수가 없다. 사람들은 좋은 말이나 도덕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 선행에 대해 관심을 갖고 마음이 끌려들지만, 인간적인 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귀하더라도 하나님은 거기에 동조하시지 않는다.

우리는 능력있는 예수님께서 왜 서기관과 제사장들의 종교 안에 들어가서 그들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지 않으셨는가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예수님이 정말 능력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서기관과 대제사장,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도 변화시켜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기 위해서는 그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일을 해야 할 것이 아니냐?󰡑�

하고 반문할지 모른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고 위하셨지만, 그들과 섞여서 그들과 함께 일을 하실 수가 없었다.

마르틴 루터는 카톨릭의 신부였지만, 어느 날 그가 예수님과 동행하게 되었을 때 도저히 거기에 섞일 수가 없어 카톨릭에서 나와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갔다.

요한 웨슬레는 거듭나기 전, 영국 성공회의 목사였다. 교회의 종교적인 의식에 잘 섞이던 그가, 어느 날 모든 죄를 눈처럼 희게 씻음받고 거듭난 뒤에는 종교와 섞일 수가 없어서 쫓겨났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당시 종교와 합하지 아니하여 배척을 받고 멸시를 받은 것처럼, 사도 바울이 그러했고, 마르틴 루터나 요한 웨슬레가 그러했다. 오늘날 이 시대에도 참으로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이라면 거듭나서 주님께 속한 자들에게는 환영을 받지만, 종교인들에게는 배척을 당하고 멸시를 당하는 것이다.

오늘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신다면, 참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환영을 받으시겠지만, 종교인들로부터는 여전히 멸시와 배척을 당할 것이다.

종교인들은 누가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분별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쉽게 저 사람이 종교인인지 아니면 정말 거듭난 그리스도인인지 분별할 수가 있다.

오늘날 목회자들 중에는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분별하지 못하여 외형적으로 볼 때, 착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고,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봉사를 잘 하면 구원받은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러나 중요한것은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다. 정말 그 마음이 죄에서 해방을 받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경험이 있는지 그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목회자라야만 그리스도께 속하지 아니한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도록 인도할 수가 있다.


배척을 받는 색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33년 동안 사셨지만,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들의 생각 속에서 만들어 놓은 종교의 흐름 속에 함께 흘러가지 아니하셨다. 예수님의 색깔은 항상 달랐기 때문에 배척을 받고 멸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만일, 예수님도 인간들과 함께 흘러갔다면, 멸시와 배척을 받지 않으셨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 종교와 전혀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나님께 속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부서뜨려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한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떠나 있는 동안에 참으로 죄악된 길을 걸어왔고, 하나님과 빗나간 삶을 살아왔다. 인간들은 죄를 짓고 난 후, 양심의 가책을 받아 종교라는 것을 만들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참으로 마음이 부서져 죄 사함을 받지 못했을 때는 거대한 종교 집단에 불과할 뿐이지 예수 그리스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숨기워질 수가 없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되면, 그는 다른 색깔을 나타내고, 세상과 다르기 때문에 세상에서 멸시를 받고 핍박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13:12)

고 말하고 있다.

성막의 문의 색깔처럼 예수님은 이 세상 종교인들이나 공자와 같은 위대한 인물들과는 전혀 다른 색깔을 가지고 사셨기에, 어디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가시면 쉽게 구별되고 거부감이 일어났다. 이와같이 오늘날 참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세상과 색깔이 달라서 세상 사람들에게 배척과 멸시를 당하는 것이다.



12. 자색실, 가는 베실


문의 네 가지 색깔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나, 예수 안에 있는 것과 밖에 있는 것을 구분하는 선(線)이 분명하지가 않다. 예수 안에 들어가는 방법이 분명하지 않아서 󰡐�십일조를 냈느냐?󰡑�, 󰡐�주일을 지켰느냐?󰡑�, 󰡐�집사가 됐느냐?󰡑�,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주 분명하게 대답을 잘해도, 󰡐�그 문을 통과한 적이 있느냐?󰡑�,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들어갔느냐?󰡑�, 󰡐�언제 죄를 씻었느냐?󰡑�, 󰡐�언제 거듭났느냐?󰡑�고 물으면 대답을 잘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신앙 생활은 하는데도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애매한 이유는, 󰡐�언제 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여 들어갔는가?󰡑�, 󰡐�언제 죄를 씻었는가?󰡑� 하는 부분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 부분을 슬그머니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성막의 다른 곳보다 문이 휘황찬란하고 명백하게 두드러진 것을 보더라도,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정확하고 명백해야 한다. 문의 색깔이 특별히 다르다는 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있는 어떤 종교인들과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것을 말했는데, 이제 문의 네 가지 색깔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하려고 한다.

성막 문은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의 네 가지 실로 되어 있는데, 네 가지 색은 예수 그리스도의 네 가지 다른 면을 보여주고 주고 있다. 마치 마태 복음, 마가 복음, 누가 복음, 요한 복음의 4복음서가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지만 각기 다른 부분의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이 네 가지 색실은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면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청색실은 바로 하늘 색깔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홍색실은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자색은 옛날에 왕들이 입었던 옷의 색으로 예수님이 왕이심을 나타낸다. 가늘게 꼰 베실은 바늘 끝에 끼워져서 실이 원하는 곳이 아니라 바늘을 따라 바늘이 머무르게 하는 위치에 머무르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의지가 없는 하나님이 종이심을 타나내고 있다.

마태 복음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마태 복음 2장에서 동방의 박사들이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특히 마태 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왕은 말씀으로 모든 일을 하기 때문에 말씀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 마태 복음은 어느 복음서보다도 예수님이 직접 하신 설교를 많이 기록해놓았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싶을 때마다 마태 복음을 펴서 산상보훈이나 씨 뿌리는 비유나 배 위에서 하신 말씀을 듣곤 한다.

마가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종으로 표현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마태 복음에는 왕으로서 예수님의 족보가 나타나지만, 마가 복음엔 예수님의 족보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종에게는 족보가 없음을 의미한다.

요한 복음에도 역시 족보가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요한 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고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에겐 역시 족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 복음에는 족보가 나오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아들로 나타내고 있어서 마태 복음의 족보와는 다르다. 누가 복음에 나오는 족보를 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아담이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아들이라는 부분을 나타내는 것이다.


종이신 예수님


한번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자기의 종이 병들었는데 고쳐달라고 부탁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병든 종을 고치기 위해서 가시려고 하자, 백부장이,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라고 대답했다.

이 백부장은 자기가 군대 백부장으로 있으면서 윗사람의 명령에 순종하고, 또 자기의 아랫사람에게 명령할 때 그가 명령을 순종하는 것처럼,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구태여 오셔서 고칠 필요없이 말씀만 하셔도 병이 낫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 백부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왕이실 뿐 아니라 만왕의 왕이심을 깨달았던 것이다. 백부장이 깨달은 것과 같이,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만왕의 왕이셨다.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셨기 때문에 풍랑을 보고 잔잔하라고 명했을 때 풍랑이 그에게 순종했고, 귀신에게 명할 때 귀신도 순종을 했으며, 만물이 그에게 순종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면을 살펴보면, 그는 온전한 종이셨다. 주님은 요한 복음 5장에서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고, 다른 곳에서는 󰡒�아들이 아버지가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주님이 바로 종이신 것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되 왕이시면서 종이신 분이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게 되길 원하옵나이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라고 기도하셨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그는 온전한 종으로서 당신이 기뻐하시는 일을 전혀 나타내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셨다. 마치, 가늘게 꼰 베실이 바늘에 끼워져서 어디든지 바늘이 가는 곳으로 따라다니듯이, 주님은 당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오셨다

주님은 모든 능력을 행할 수 있었으나, 그는 하나님의 종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 안에서 모든 능력을 행하셨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행할 수 있는 왕이 되신 것이다. 바울은 그 부분을 빌립보서에서 아주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5-11)

위의 말씀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면서 사람과 같이 되었으며, 또 죽기까지 복종한 종이면서 모든 무릎이 꿇어지는 왕이심을 나타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네 가지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장 9절에 보면,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라는 말씀이 있다. 󰡐�이러므로󰡑�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극히 높은 위치에서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 아래 꿇기 이전에 󰡐�그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므로󰡑�이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 되시고, 만주의 주가 되셔서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 아래 꿇게 되기 이전에 주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복종하신 온전한 종이셨다. 그러므로 당신의 뜻을 나타내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셨다. 온전한 종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시며, 만왕의 왕으로 만주의 주로 삼으셨던 것이다.


능력의 비결


성막의 문 색깔이 그러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모셔들인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 장차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 육체의 쾌락이나 사욕을 위하여 쓴다면 참된 자유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고, 걸어가고 있는 길이 하나님의 길과 동일하다면, 하나님의 모든 능력을 쓰는 것이 얼마나 자유롭겠는가? 하나님은 그러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만일 하나님이 주신 권능을 자신의 이름을 내는 일이나 육신의 안일을 위해 사용한다면, 하나님이 그러한 사람에게 권능을 주실 리도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빼앗지 않으시겠는가?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에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아담에게 주셨다. 아담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권세로 모든 것을 다스릴 수가 있었지만, 그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일에 사용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권세와 능력이 아담에게 더 이상 순종하지 않고, 심지어 만물까지도 그를 대적하며,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능력을 우리들에게 그냥 주신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그 능력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거나 육체와 마음의 욕구를 채우는 데 사용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권능을 주시기 전에 먼저 우리 마음을 꺾으시고 낮추시며, 우리 마음이 정말 악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셔서, 우리의 생각과 계획을 버리게 하신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같게 되고, 하고자 하는 일이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는 바로 그 일이 될 때, 하나님은 그러한 자에게 하늘나라의 능력을 베풀기를 주저하지 않으신다. 사도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능력을 소유한 자가 된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주님의 능력을 입었을지라도 그 능력으로 자기의 육체나 마음의 욕구를 채워나간다면, 아담의 경우처럼, 그 능력이 그에게 순종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거스리고 대적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아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으면서도 능력 가운데 쓰임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우리의 욕망을 좇게 될 때,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지만 그 능력이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미약하고 연약한 삶 속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은 먼저 참된 종으로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어떤 기쁨을 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을 만족하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모든 권세와 능력으로 충만케 하시고, 모든 무릎을 예수님 앞에 꿇게 하셨다.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 주님이 그 마음에 계신 사람으로서 그 능력에 사로잡히기를 원하는 사람은 주님처럼 자기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여, 그 뜻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때 비로소 충만한 능력이 모두 그 사람의 것이 될 것이다. 성막의 문에서 나타나신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시면서 하나님의 온전한 종이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의 온전한 종이 되어 그 능력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능력의 일꾼들이 되기를 바란다.




13. 청색실, 홍색실


사단을 이기신 예수님


자색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이심을, 가는 베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종이심을 나타낸다면, 청색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으며, 홍색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면서 또한 완전한 인간이셨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 유대인들에게서 배척을 받은 이유 중의 하나는, 유대인들이 볼 때 예수님이 분명히 사람의 아들인데,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참람하도다󰡓�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대적하고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으며, 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또한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마 3:17)라고 하나님께서 직접 하늘에서 음성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 백부장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모습을 보고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고 증거했다.

하나님의 아들은 곧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완전했고 모든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마귀를 이기셨는데, 그 때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마귀를 이기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죄악을 이기신 것도 인간의 몸으로서 죄악을 이기셨으며,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도 분명히 사람으로서 부활하셨고, 승천하셨다. 성경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막 13:26)

고 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으로 표현하지 아니하고 인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셨지만,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서 사신 데에는 몇몇 가지 깊은 의미가 있다. 사단은 맨 처음 에덴 동산에서 아담을 꾀어서 자기 종으로 만들었다. 그 이후, 아담에게 속한 모든 인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사단의 종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길과 어긋나게 되었다. 또한, 사단은 거짓말하는 자로서 어떤 선행이나 도덕으로 참된 신앙을 대신하도록 인간을 속이는 데 별로 어려움을 겪지 않고 성공해 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고 하지만, 사단의 꾀임에 빠져 문 되신 예수님을 통과하지 못하고 종교나 도덕이나 인간적인 선행 속에 빠져 있는 것을 본다.

모든 인간들은 사단에게 속을 수밖에 없으며, 사단의 속임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주님은 인간으로서 처음으로 사단을 이기셨다. 사단이 인간과 싸워서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는데,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사람이신 예수님에게 패배를 당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사단을 이기신 첫번째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을 대표해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을 이루신 모든 것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빌립보서에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


요한 복음을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잘 알 수 있지만, 다른 복음서를 통해서는 예수님이 연약한 인간임을 알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인간의 몸에서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너무 피곤하여 그대로 털썩 주저앉기도 하셨고, 풍랑이 이는 배의 고물에서 주무실 정도로 피곤을 느끼셨다. 십자가를 지셨을 때에 쓰러지는 나약한 모습을 볼 수가 있으며, 채찍으로 때리고 가시관을 씌웠을 때에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피가 흘렀다. 예수님은 인간이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에 죽으실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왕이시면서 종이시듯이,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을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며 우리는 그 다음 열매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인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달리 표현하자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이고, 우리는 인간의 몸 안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모셨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의 연약한 부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치고 쓰러지고 피를 흘리고 죽으셨듯이,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면서 능하신 하나님을 덧입었다는 사실이 바로 주님과 동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육신에 의한 삶을 살면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지만,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 때는 바로 주님처럼 능력있는 사람이 된다. 우리는 능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지닌 반면에 연약한 인간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연약한 자신을 바라보면 연약하고 추한 죄 속에 빠질 수밖에 없지만, 우리 속에 계시는 능하신 주님을 바라보면 누구든지 능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속 받은 그리스도인 중에 절망 속에 빠져 근심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바로 육신을 바라보고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반면에, 담대하고 힘있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강한 면이 있는 반면에 아주 약한 면이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바라보고 그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간다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의 사람이 되지만, 연약한 자신을 바라보면, 작은 문제도 이겨내지 못하는 약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를 보면, 너무 연약해서 계집종 앞에서도 벌벌 떨었는데, 그는 또한 대제사장 앞에서도 담대하게 외쳤다. 그것은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또 빌립보 감옥에 있었던 사도 바울은 매를 맞아서 온몸에 피가 흐르고, 언제 감옥에서 나가게 될지도 모르는 가운데 처해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육신의 모습을 보지 아니하고 자기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깨끗하고 정돈이 잘된 집과 더러운 집이 있다고 하자. 더러운 사람이 깨끗한 집에 가면 깨끗한 방이 더러워지게 될까봐 자기도 모르게 자꾸 발을 씻게 되겠지만, 더러운 집에 가서 지내게 되면 외형만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더러워지게 된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의 의와 거룩함, 주님의 풍성하신 사랑과 은혜를 힘입고 살면 우리의 외형 뿐만 아니라 마음 속도 거룩해지지만, 반대로 추하고 연약한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산다면 조그마한 시험이나 유혹도 이겨내지 못하는, 나약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도 그러하다. 연약한 우리 자신을 보고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가 있겠는가? 다만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사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시고, 왕이시며, 종이신 것을 나타내듯이, 성막 문에 나타난 청색실과 홍색실, 자색실과 고운 베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고 있다. 성막 문의 색깔이 분명하게 나타나듯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갈 때 세상의 빛처럼, 소금처럼 세상에 분명하게 드러나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주님 안으로 들어 올 수 있는 것이다.



14.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구경꾼

휘장을 젖히고


이제 성막의 문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마음의 자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예수 그리스도만큼 밖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보는 것이 다른 분은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속에 든 것은 없어도 밖은 화려하게 꾸미는데, 반대로 그리스도는 겉으로 볼 때 흠모할 만한 것이 없지만 속이야말로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막의 문 앞에서만 기웃거리지 말고 과감하게 문으로 들어가서 성소와 지성소안에 있는 금빛 찬란한 영광을 맛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들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가 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왔으나 모든 죄를 사함받고 하늘의 영광과 기쁨을 맛본 것이 아니라 그냥 밖에서 구경만 하고 말았다.

요한 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 앞에 나아온 사람들이 간음한 여자를 치려고 돌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는 간음한 여자만 죄인인 것이 아니라 그 앞에 나아온 사람들이 다 죄인이었다. 사람들은 자기의 죄가 드러날까봐 두려워서 하나 둘 돌멩이를 버리고 물러갔고, 결국 예수님과 간음한 여자 단 둘이 남게 되었다. 그 때 예수님과 그 여자 사이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주여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라는 대화가 오갔다. 여자를 돌로 치려 했던 사람들도 죄인들이었기 때문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돌아가야 했는데 그들은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 속에는 죄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간음한 여자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하는 주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었기 때문에 다시는 정죄를 받지 않게 되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죄하지 않으신다면 이제 아무도 정죄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간음한 여자가 부러운 적이 있었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옆에 있는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는 것을 보았는데, 십자가의 강도가 정말 부러웠었다.

어느 날 성령께서 내 마음에 역사하셔서 저주를 받고 돌에 맞아 죽어야 할 그 여자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여자는 간음한 죄 하나 때문에 돌에 맞아 죽어야 했지만, 내 속에는 여러 가지 죄악이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여자보다 훨씬 더 악하고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내겐 죄가 별로 없는 줄 알았고, 내가 지은 죄들은 다 이유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지은 죄들이라고 얼버무렸었다. 뿐만아니라 비록 죄를 지었지만 착한 일도 했고, 신앙 생활도 제법 했기 때문에 내가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 십자가의 강도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우쳐 주셨다.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구경꾼


그 말씀을 읽으면서 내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간음한 여자가 있고, 그 옆에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내가 있고, 그 가운데 예수님이 계셨는데,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박옥수를 돌로 치라.󰡓�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다 떠나가 버리고 나와 주님만 남게 되었다. 그 때 주님은 나에게 󰡒�나도 박옥수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 말씀이 바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주님이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면 나는 죄인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주님이 정죄하지 않는데 누가 감히 나를 정죄할 수 있겠는가? 주님이 나를 의롭다고 했는데 누가 나를 송사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난 후에 나는 더 이상 죄에 눌릴 필요가 없었다. 누가 무어라고 하든지 간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주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는 귀한 은혜를 입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간음한 여자가 예수님 앞에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는 말씀으로 죄 사함을 받고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도 거기 뛰어들어가서 그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아니하고, 그냥 구경만 하고 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그것을 어떤 이야기로만 대하지 말고 그 속에서 내 자신을 발견하고, 곧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야곱에게, 모세에게, 다윗에게 하신 말씀은 바로 주님이 나에게 하고 싶은 말씀인 것이다. 이 지구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다 기록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대표자로 아브라함, 야곱 등의 이름을 세웠을 뿐이지 사실 그들에게 세운 약속은 전부 나에게 한 약속이라는 것이다.

내가 성경에 있는 모든 약속을 나에게 하신 것으로 받아들였을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서 하나하나 살아서 움직이게 되었고, 내 삶이 축복된 삶으로 바뀌어지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그건 그 당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지, 내게 하신 약속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 고치시는 것을 보고도 자기 병을 고치지 못하고 구경만 하고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몇몇 사람에게만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은혜 베풀기를 원하신다.

종종 병든 사람들이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나는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할 때마다 옛날에 문둥병자, 소경, 혈기 마른 자, 절뚝발이들을 보시고 한번도 그냥 지나가지 아니하시고 일일이 그들의 병을 고쳐주신 주님을 기억한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기 때문에 그 때 주님이 지금 이 자리에 계신다면 분명히 이 사람의 병을 고치고 지나가지 그냥 지나가지 아니하시리라는 사실을 알고, 그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기도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병에서 낫게 되는 것을 경험할 수가 있었다.

왜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아왔지만 은혜를 입지 못하는가? 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마음에 몇몇 가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성막은 세상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익숙치 않아 성막문을 열고 들어가기를 주저한다는 것이다. 우선 문의 방향에서 세상의 집들과 성막은 정반대이다. 성막의 문은 동쪽을 향하고 있어서 우리가 성소에 들어가려면 동에서 서로 가야 한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셨을 때 동방에서 박사들이 왔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서쪽으로 계속 찾아왔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앙이 떠오르는 동쪽, 즉 육신적인 기대가 커지는 쪽을 향해 가기를 원하는데, 이와 반대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길은 성경 여러 곳에서 해가 지는 서쪽, 즉 육신적인 기대가 소멸하는 쪽으로 되어 있다.

성막은 문의 방향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이 세상의 집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과 주관으로 보면 성막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가 성막에 들어가기 위한 첫째 조건은 우리의 생각을 버려야 한다. 참 많은 사람들이 성막 문 앞에 와서 자기 생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구약 열왕기 하 5장에서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가 󰡒�요단 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이 병이 낫는다.󰡓�고 말했을 때, 그것이 자기의 생각과 맞지 않아 그냥 돌아가려고 했다. 우리의 생각은 항상 주님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이사야 55장에서,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을 가지고는 절대로 그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다. 문 앞에 나아와서 자기의 생각을 벗어버린 사람만이 그 문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주의 사랑을 맛보면


신앙 생활이 무겁고 힘든 이유는 자기 생각을 버리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려 하기 때문이다. 만일 자기 생각을 버리고 자신을 부인한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만큼 쉽고 은혜로운 것이 없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희생을 당하며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았던 사람들이 많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았지만, 그들은 주를 위하여 기꺼이 죽을 수 있었다. 우리가 성막 문을 열고 황금, 보석으로 찬란한 성소에 들어가서 그리스도의 놀라운 영광을 맛보고 경험하게 된다면, 그리스도가 세상의 무엇보다도 귀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해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주님을 위해서 핍박을 받는 것이나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나 자신을 절제하는 것을 싫어한다. 술을 끊지 못하고, 담배를 끊지 못하고, 죄악을 버리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적은 것도 드리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귀함을 맛보지 못해서이다.

만일 누구든지 문 안에 들어가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사함받고, 크고 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기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죄악을 버리는 일이나 세상을 멀리하는 일이 전혀 부담이 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귀함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세상의 시시한 것에도 마음이 빠져 그리스도를 섭섭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형식적인 신앙인에 불과하다.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서 죄인임을 깨닫고 죄 사함의 은혜를 맛본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릴 수 있는 귀한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5. 제  단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담


성막 바깥뜰에서 안뜰로 들어가는 곳에 문이 하나 있는데, 그 문은 네 개의 기둥에 가로 세로 5규빗 되는 포장을 네 개 쳐 놓았다. 또한 청색, 홍색, 자색실과 고운 베실로 그룹들을 수놓아 쉽게 눈에 띄도록 되어 있으며, 그 문의 휘장을 젖히고 들어가면 바로 성막 안이 된다.

이제 그 안에 들어간 사람은 성막의 주인공이고, 밖에 있는 사람은 구경꾼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잘 모르고 있는데,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서 성막 문 안에 들어간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고, 성막 문 밖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성막의 안뜰로 들어가면 바로 앞에 제단이 나타나는데, 누구든지 성막 안에 들어가면 백성의 죄를 위하여 어린 양이 피를 흘리고 죽어서 불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제단에서 불타고 있는 어린 양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다. 왜 제단이 성막 문 입구에 있어서 누구든지 성막 안에 들어가려면 먼저 제단을 보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도록 되어 있는가?

인간들은 범죄한 이후에 계속하여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왔다. 인간들이 처음에는 죄를 미워하다가, 죄와 더불어 오래 사는 동안 죄와 친숙해져서 죄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데에 아주 익숙해져 버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기보다는 범죄나 불의한 방법으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한다. 인간들이 즐거워하는 모든 곳에는 불의가 역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멀어졌고, 죄가 항상 우리의 마음을 눌러 왔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려고 할 때마다 이 죄는 우리의 마음을 막아 왔다. 우리가 죄와 더불어 먹고 마실 때는 부담이 없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할 때는 그 죄가 우리 양심 속에서 우리를 정죄하고 괴롭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담대함을 잃게 만든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지 못하고 죄에 눌려 살고 있다.

우리가 죄를 범함으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의 담이 가로막히게 되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지 못하면 어둠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죄와 더불어 사는 것을 마음 아파하시며 안타깝게 여기셔서, 우리가 속히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죄를 범했든지 어떠한 어둠 속에 있든지 간에 항상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다. 그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다.

인간이 범한 죄가 아무리 클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씻을 수 없는 죄는 없고, 인간의 일이 아무리 복잡하게 얽혀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풀 수 없는 매듭은 하나도 없으며, 인간이 아무리 깊은 수렁 속에 빠져 있다 할지라도 주님은 능히 건져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지어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인간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수 있는 길을 마련하기에 충분한 분이시다.


예수의 피를 힘입은 사형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을 누르고 있는 그 죄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기를 원하신다. 왜냐 하면 그 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을 막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담대함을 잃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 전에 대구 교도수에서 복역 중인 어떤 사형수와 가깝게 지낸 적이 있다. 시간이 있을 때면 그를 찾아가서 면회하곤 했는데, 그는 사형 언도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는 초조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자기가 곧 죽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침이 되면 󰡐�오늘 저녁에 내가 죽는 것이 아닌가?󰡑� 저녁이 되면 󰡐�내일 아침에 내가 죽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늘 초조하고 불안한 가운데 세월을 보내다가, 마침내 그 마음마저 쇠약해지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조그만 전도지 한 장을 받게 되었다. 그 전도지에서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별 흥미가 없어 찢어 버리려고 했는데, 독방에 있으니까 너무 심심하고 외로워서 한 번 더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 그것을 다시 읽게 되었다. 다 읽어 보았지만 전도지의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할 일이 별로 없으니까 틈만 있으면 그 전도지를 읽게 되었다. 종이가 다 닳아질 때까지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자 교도관에게 성경을 한 권 구해 달라고 부탁하여 읽게 되었다. 그는 누가 복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십자가 옆에 못박혀 있던 한편 강도와 주님이 주고받았던 대화를 읽게 되었다. 그 강도가 주님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라고 말했을 때, 주님은,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 대답하셨다. 그는 󰡐�대부분 사람들은 전과자라고 하면 무시하고 가까이하길 꺼리는데, 더욱이 사형수라면 얼마나 꺼리겠는가? 그런데 도대체 예수님은 누구시기에 사형수인 십자가의 강도를 데리고 그 나라에 가려고 하시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내용을 읽고 그의 마음에 변화가 왔는데, 그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왔던 것이다. 그 후, 우리가 가서 그에게 복음을 전하여 죄 사함을 받게 되었다. 그 이후 그는 교도소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한번은 내가 그분을 면회하러 가면서 󰡐�무슨 말로 위로를 할까?󰡑�라는 생각 속에 빠져 있었는데, 막상 그를 만났을 때, 그 생각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형수로서 언제 죽을는지 모르는 삶을 살면서도 슬퍼하거나 근심하는 기색이 전혀 없고, 참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내가 사형 언도를 받고 이 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이 귀한 구원을 경험했겠습니까? 나는 지금 죽어도 하늘나라에 가지만, 만일 내가 이 땅에 살아남을 수 있다면 땅끝까지 다니며 이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라고 간증을 했다.

그 후, 나는 대구 교도소의 담당 목사님으로부터 그분이 사형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사형당하기 전에 그 앞에 있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습니까?󰡓�

라고 물으니까,

󰡒�당신들이 볼 때는 내가 내 명에 죽지 못하고 사형을 당하니까 불쌍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볼 때는 당신들이 불쌍합니다. 당신들은 대한민국의 법으로는 죄가 없지만, 하나님의 법에는 죄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들도 언젠가는 죽지 않겠습니까? 대한민국의 법은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사형을 시키지만, 하나님의 법 앞에서는 내 모든 죄를 사함받았기 때문에 나는 지금 죽는다 하더라도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주와 함께 앉을 수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라는 찬송을 기쁘게 부르며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짓고 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그 죄로 인해 담대함을 잃고 부끄러워 나아가질 못했다. 그러나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했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새롭고 산 길


히브리서 10장 20절에 보면,

󰡒�거기는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라고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소에 들어갈 때 문 앞에 드리워진 휘장을 열고 들어갔듯이,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법으로 애를 쓰고 노력해서 당신 앞에 나아오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는 새롭고 산 길을 휘장 가운데 열어 놓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시고, 다시는 사단의 정죄에 빠져서 고통하는 삶을 살지 않기를 원하신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늘 그 마음이 사단의 정죄에서 벗어나질 못하기 때문에 죄에 눌리고 고통스러워하며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담대함을 잃고 있다. 인간들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늘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송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으려면 죄가 해결되어야만 한다.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는데, 우리는 그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사단의 정죄 속에 빠지거나 죄의 고통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죄를 해결해 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기뻐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사는 참된 믿음의 삶은 우리를 죄를 사해 주신 주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 죄를 사해 주신 데 대하여 감사하고 기뻐하며 쉬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고 이야기하고 있다. 죄를 지은 인간들이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진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다. 즉,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범죄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믿음뿐인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수고하고 괴로워하며 눈물을 흘리고 매일 회개(?)하지만, 수고와 눈물, 가책이나 두려워함이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줄 수 없다. 어린 양의 피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죄에서 참으로 해방시켜 주지 못한다. 아직 죄 속에서 고통하고 있다면, 그것은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판하는 곳-제단


하나님께서도 예수의 피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기를 원치 아니하실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다. 우리가 성막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곧바로 제단이 보이고, 그 제단 위에는 우리를 위하여 피흘려 죽은 어린 양이 보이며, 어린 양이 불타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그 광경은 바로 우리가 성소 안 즉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때 처음 목격해야 할 사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쏟아야 할 모든 진노, 우리에게 내려야 할 심판과 형벌을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쏟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으심은 곧바로 우리의 죽음이요,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심은 곧바로 우리의 못박힘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두려워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하고 죄를 범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만일 우리 죄를 위해 희생을 당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 죄가 우리의 마음을 눌러서 한시라도 평안하고 담대한 믿음의 삶을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죄 때문에 마음이 눌리고 가책이 되고 두렵고 고통스러운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를 위해 피흘리고 죽어 불타고 있는 어린 양이 바로 우리의 모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 복되고 기쁜 삶을 살 수가 있다.



16. 조각목


아름다운 것이 없는 조각목


출애굽기 27장 1절에 보면,

󰡒�너는 조각목으로 장이 오 규빗, 광이 오 규빗의 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고는 삼 규빗으로 하고󰡓�

제단은 조각목으로 만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단뿐만 아니라 떡상이나 향단, 법궤, 성소를 세우는 널판도 모두 조각목으로 만들었다.

한국어 성경에는 조각목으로 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King James Version)에서는 이 조각목이 아카시아 나무로 번역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 제단이나 성막의 떡상, 향단, 널판, 법궤 등을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라고 하셨는가?

사사기 9장을 보면, 나무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나무들은 바로 사람들의 모습을 가리켜 주고 있다. 성경에 나타난 레바논 백향목 같은 나무는 곧고 굵고 튼튼하고 모양이 좋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나무들이 있는데, 그 나무들마다 각기 나름대로의 특색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나무들 가운데 특히 이 아카시아 나무는 곧거나 아름답지도 못하고 우아하거나 품위가 있는 나무도 아니다. 성막에서 제단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데, 이 예수 그리스도는 아카시아 나무처럼 우리 보기에 흠모할 만큼 인간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나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주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모습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인데, 주님은 모든 사람보다 낮은 위치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말 구유에서 나셨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주님께서 그 천하고 더러운 말 구유에 나신 것은 인간들에게서도 천히 여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로 오셨다는 것이다.

왜 주님은 말 구유에서 나셨는가? 주님께서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왕궁이나 부잣집에서 태어나실 수도 있는 분이지만, 아카시아 나무와 같이 사람들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나 외형상 아름다운 것이 없는 낮고 천한 모습으로 말 구유간에 오셨던 것이다.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위치, 말할 수 없이 천한 위치로 오셨던 것이다. 주님은 외모도 아름답고 품위와 권위가 있는 육신을 가지고 오지 않으셨다. 즉, 인간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전혀 취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누가 봐도 머리가 숙여질 수 있는, 아주 품위가 있고 고상한 육체를 가지고 오실 수도 있는 분이고, 또한 세상적으로 어떤 권세나 존경을 받을 만한 조건들을 갖추고 오실 수 있는 분이셨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때 인자해 보이고 엄숙해 보이는 미남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과는 거리가 멀다.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는 종


나는 어떻게 해야 훌륭한 목회자가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덕망이 있고, 믿음직하며 사람들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목사가 되기 위하여 나 자신을 꾸미고 다듬는 데에 마음을 많이 썼었다. 나는 정말 누구보다도 많이 배우고 싶었고, 또 나는 남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싶었고, 많은 것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누가 나를 보더라도 정말 내게 나타나는 인품이나 아름다움, 명예등 인간적으로 볼 때 귀한 것들을 통해 사람들이 저절로 나를 따르고 존경할 수 있는 그런 목사가 되기를 원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을 읽으면서 그러한 나 자신에 대하여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왜냐 하면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남들보다 많이 배우고 잘나고 뛰어나도록 외형적인 부분을 꾸민다면 그만큼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은 가리워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이 당신을 통해 귀하게 나타나지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적인 모든 부분은 철저하게 가리웠던 것이다.

이른 봄에 아내와 같이 차를 타고 시골로 가다 보면 아주 연한 초록색 버들잎이 싹터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내 아내는 그 색깔을 참 좋아한다. 그래서 가로수 밑을 지날 때마다 버드나무에 피어오르는 연한 새싹, 그 고운 빛깔을 보고 감탄하는 것을 자주 듣곤 했다. 그런데 만일 내 아내가 그 색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림을 그릴 때 연한 초록색만으로 그림을 그렸다면 그것은 그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빨간 장미빛이 곱다고 해서 빨간 색만으로는 그림을 그릴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아는 대로 초록색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주위에 녹색과 반대되는 보색을 써서 그 녹색을 더욱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육신을 아름답게 꾸미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이 조각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러한 부분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찾아보려고 성경을 찾아 보았는데, 이 성경 66권 가운데 다만 이사야 53장에서,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우리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무 아름다움이 없었다.󰡓�

고 기록된 것밖에 없었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보면 주님은 미남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귀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아름다움이나 똑똑한 것, 뛰어난 부분을 나타내는 데에 마음을 쏟고 있는지 참 안타깝다. 그러한 사람들은 참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종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부끄럽게도 나는 처음 사역을 하면서 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기를 바라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볼 수 있는 목사가 되려고 단장하는 데 마음을 썼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할수록 내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와 멀어져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수 있는 종이 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정말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원한다면 사람들이

󰡒�저런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가? 저렇게 형편없는 인간 속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참 놀랍군!󰡓�

하고 말할 정도로 내가 형편없이 추하고 못난 것만큼 하나님의 영광은 더 커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때부터 나는 조금이나마 내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까봐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아도 나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광을 받으시고 찬미를 받는 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타내지만 자기도 나타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자기에게도 영광을 돌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된 종인 예수님은 가장 천한 존재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부분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아름다움, 자기의 귀함, 자기의 육신적인 부분을 꾸미지 말고, 그를 통해서 참되신 하나님이 나타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육신은 쇠하여져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고 말씀하셨다. 또 예수님은,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느냐?󰡓�

고 하셨다. 하나님과 나 자신, 이 둘은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하나님도 영광을 받고 자기도 영광을 받는다면 그것은 신앙인의 참된 길이 아니다. 세례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겠다.󰡓�

고 말한 것처럼,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삶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를 믿는지 모른다. 자기 부의 성취를 위하여, 명예를 위하여 믿고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낮아지고 천대를 받으려는 사람보다도 높아지기를 원해서 󰡐�집사님󰡑�, 󰡐�권사님󰡑� 등 많은 직분들을 만들어서 그 명예나 위치에 만족스러워 하고 있는 것을 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왜 믿음 생활을 잘 하지 못하는가? 오늘날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가? 이것은 주님의 생각, 주님의 모습과 너무나 거리가 먼 곳에 마음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지만 자기도 영광을 받기 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그 영광을 버리셨고, 가장 천하고 낮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던 것이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육체의 소욕과 육체의 정욕과 육체의 기대 속에 살면서 주를 믿는 것이다. 그 육신의 소욕을 채우기 위하여 주님을 믿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와서 우리 죄를 사함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나라의 영광을 버렸듯이 자기 자신을 철두철미하게 포기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단에게 속아 자기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뛰어난 줄 알고, 의로운 줄 알고, 깨끗한 줄로 알아 자신을 꾸미려는 데 마음이 빠져 있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하는 부분이 익숙하지 않아,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영접하기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죄도 자기가 사하려고 애를 쓰고, 선도 자기가 행하려고 애를 쓰는 등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을 동시에 취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을 당하셨는데, 그 죽음은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절대 겪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고, 모든 무릎이 당신의 이름 앞에 꿇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된 것이다. 참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가 잘한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속에 하나님의 역사만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성막에서 제단이 아무 자랑할 만한 것이 없는 조각목으로 만들어진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적으로는 아무런 아름다움이 없는 모습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 예수님처럼 자신이 천하면 천할수록, 못나면 못날수록, 추하면 추할수록, 악하면 악할수록 그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은 더 아름답게 드러나고 그를 구원하신 주님께 더 큰 영광이 되기 때문에, 이제 자기를 꾸미는 데서 벗어나 주님만이 아름답게 나타나는 참된 신앙이 되어지기를 바란다.




17. 놋


심판의 흔적


󰡒�너는 조각목으로 장이 오 규빗, 광이 오 규빗인 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고는 삼 규빗으로 하고, 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 그 뿔을 그것을 연하게 하고, 단을 놋으로 쌀지며󰡓�(출 27:1,2)

출애굽기 27장에는 조각목으로 제단을 만든 뒤에 놋으로 싸라고 되어 있다. 성막의 모든 물건들은 조각목으로 만드는데, 어떤 물건은 조각목을 놋으로 싸고 , 또 어떤 물건은조각목을 금으로 쌌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조각목󰡑�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놋󰡑�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대신 심판을 받았음을 의미하고 있다. 󰡐�금󰡑�은 예수님께서 심판을 받으신 이후에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 부활하시고 도마가 없는 자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셨다. 도마가 왔을 때,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얘기하자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

고 했다. 며칠이 지난 후, 주님이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손의 못자국을 보고 손을 내밀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고 하시면서 주님이 상처 받으신 그 부분을 도마에게 직접 보여주셨다.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는 몸의 모든 상처가 회복되어 그 못자국과 창자국도 능히 없앨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그냥 몸에 가지고 계신 이유는 우리를 위해 심판을 받으신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이다. 요한 계시록에는

󰡒�어린 양이 있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는 말씀이 있다. 우리가 장차 그 나라에 가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 흔적을 보게 될 것이다. 그 흔적은 우리 모두에게 영원히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때, 사단은 우리가 범한 여러 가지 죄를 하나님 앞에 고소하게 될 것이다. 그 때 우리가 할 말을 잃게 되면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우리를 위하여 심판을 대신 받으셨다는 증거, 즉 옆구리의 창자국과 손의 못자국을 보여주심으로서 우리가 다시 심판을 받을 필요가 없음을 증거하실 것이다. 특히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

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신 이유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이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되었고, 부활하셔서 우리가 의롭게 되었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몸에 심판의 흔적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다.


죄의 권세를 이기는 완전한 보혈


이 제단은 십자가를 의미한다. 즉 제단에서 어린 양이 죽임을 당하여 불태워지고 제단뿔에 그 피가 발려지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을 나타낸다. 성막은 모세가 고안해서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부르신뒤 40일 동안 하늘에 있는 성전을 보이셨고 그 모양 그대로 이 땅에 성막을 만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성막은 하늘에 있는 성전의 모형이다.

왜 하늘에 있는 성전 그대로를 땅에도 지어야 했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사해진 사실을 당신만 알기를 원치 않으셨고, 인간도 알게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있는 성소와 똑같은 모양의 성소를 땅에도 만들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지을 때마다 매일매일 제단에 와서 제사를 드렸는데, 단순히 죄를 씻기 위하여 그 제단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있는 참 성소에서 어떻게 우리 죄를 씻었는가를 보여주셔서, 우리 마음이 죄에서 해방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에 기록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땅에 속한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하늘에 속한 참 장막에 들어가셔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처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은 끝이 났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는 더 이상 우리에게서 죄를 찾아낼 수가 없다. 성소의 휘장을 젖히고 들어가면 제일 먼저 제단이 보인다. 놋으로 싸여져 있는 제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받으셨다는 것을 예표해 주고 있다.

심판은 십자가에서 끝이 났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간에 십자가의 심판만으로 충분하다. 구약 시대에 제단뿔에 흘려진 어린 양의 피가 그 사람의 죄를 씻기에 충분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보혈은 우리 죄를 씻기에 넉넉하다. 만일 우리 죄를 씻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으로는 우리 죄를 씻기에 부족하단 말밖에 안 된다. 우리가 다시는 우리 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려야 할 필요가 없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 죄를 완벽하게 씻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 외에 어떤 행위를 더하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사했다는 믿음이 우리 마음에 들어온다면 의로운 상태에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알지만 날마다 짓는 죄에 대한 가책이 생기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 의지하여 의롭다고 말하지 못하고 죄인이라고 여기게 된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사실을 알아도 십자가의 능력보다 죄의 권세가 더 크게 부각되면 죄인이라 생각하여 고통과 가책 속에 빠져 버리고 만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하기보다는 죄인이라고 하는 편이 더 부담이 적은 이유도 죄의 세력이 그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죄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믿게 되었을 때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죄를 몰아낼 수가 있다. 우리가 범죄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서 마음에 있는 죄의 세력을 물리 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죄가 완벽하게 해결된 사실이 마음에 믿음으로 임할 때에, 죄는 더 이상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의가 충만하게 임하는 것이다.


편철을 만들라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성전에서 당신을 희생하신 것으로도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땅에 성막을 만들어서 제사를 드리게 하신 까닭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진 것을 보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인정치 아니하시지만, 인간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성막을 만들게 하시고 거기서 속죄 제사를 드리게 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지만, 그것이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함이었던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의(義)의 위치에 서 있고 싶어도 죄를 지을 때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인의 위치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믿음으로 의의 위치에 견고하게 세워 놓기 위하여 당신의 몸에 우리 죄를 위하여 받으신 심판의 흔적을 가지고 계신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 53:5)

심판받은 흔적을 주님이 가지고 계신다면 누가 우리 죄에 대해서 송사할 수 있으랴!

민수기 16장에는 고라와 아비람과 다단, 온이라는 네 사람이 당을 지어서 모세를 대적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네 사람을 좇는 250여 명의 사람들도 󰡐�우리도 거룩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다.󰡑�고 해서 향로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분향을 하였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땅이 입을 열게 해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에 사는 모든 무리들을 삼키게 하였고, 하늘에서 불을 내려 분향하던 250명도 소멸해 버렸다. 그들이 죽고 난 뒤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너는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을 명하여 붙는 불 가운데 향로를 취하여다 그 불을 타처에 쏟으라. 그 향로는 거룩함이니라. 사람들은 범죄하여 그 생명을 스스로 해하였거니와 그들이 향로를 여호와 앞에 드렸으므로 그 향로가 거룩하게 되었나니, 그 향로를 쳐서 제단을 싸는 편철을 만들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표가 되리라.󰡓�(민 16:36-38)

고 말씀하셨다. 고라의 당들은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심판을 받아서 죽임을 당했는데, 사실은 그들을 대신해서 심판을 받아줄 자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 죄로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경을 보면 고라 자손 외에도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이 참 많은데,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떠나 있었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만일 그들이 자기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갔더라면 죽임을 당치 않았을 것이다. 고라의 당들은 죄에 대한 보응을 자신들이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았음을 깨우치고 증거하기 위해서 그러나 심판받았던 그 놋향로를 제단의 편철로 만들라고 하셨던 것이다.

비록 우리는 범죄도 하고 악을 행했지만 그런데도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죄에 대한 모든 심판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지 아니하셨다면, 우리가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영원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제단을 바라볼 때마다 어린 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제물이 되어서 우리를 위해 심판을 받으셨음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이다.




18. 희생 제물


흠 없는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


󰡒�너는 조각목으로 장이 오 규빗, 광이 오 규빗의 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고는 삼 규빗으로 하고…󰡓�(출 27:1)

제단은 조각목으로 장이 오 규빗, 광이 오 규빗, 고가 삼 규빗으로 네모 반듯하게 되어 있다. 성막 안에 보면 제단이 있고, 물두멍이 있으며, 또 성소에 들어가면 떡상, 등대, 향단, 법궤 등 여러 가지 기구들이 있다. 이 제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에 제물을 태우는 곳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33년동안 사셨던 생애를 보면 우리와 다른 여러 가지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면서 바다를 잔잔케 하셨고 아니면 병든 자를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등 여러 가지 능력을 행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사단을 이기셨다. 특히, 마태 복음과 누가 복음 4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는데,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으로 사단을 이기시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보다도 특기할 만한 사실은, 주님은 33년 동안 세상에 사시면서 단 한번도 죄를 범치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아무도 사단을 이기고, 나아가서 죄를 하나도 범치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2장에서,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는 궤사가 없으셨다.󰡓�(벧전 2:22)

고 이야기하고 있다. 히브리서에서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총독이었던 빌라도도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요 9:16)고 이야기하고 있다.

주님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죄를 범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거룩한 하나님의 제물로서 제단에 드려지기 위해서였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번제나 화목제, 속죄제를 드릴 때는 반드시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제물을 써야 했다. 만일 다리를, 절거나 눈이 멀거나 상처 있는 제물을 드린다면 하나님은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다.

구약 시대에 유월절 양을 잡을 때는 정월 십일에 모든 떼 중에서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양을 골라 놓았다가 정월 십사일 해질 무렵에 잡았다. 정월 십일부터 십사일까지 나흘 동안 골라 놓은 양을 자세히 살펴보아 전혀 흠을 찾을 수 없어야 제물로서 합당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33년 동안 죄없고, 흠없는 삶을 사셨다. 물론, 예수님은 당신 속에 악이나 죄가 없기 때문에 죄를 범할 수도 없는 분이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다 죄를 범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물로 드려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실 때는 물론이고 성경을 기록한 여러 기자들이나 빌라도가 보았을 때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는 전혀 흠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성경 여러 곳에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을 보셨을 때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고 하실 만큼 만족하게 여기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죽음은 하나님이 보실 때뿐만 아니라 인간이 볼 때도 온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향하여 닫혀져 있던 마음의 문을 여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인간들을 심판하고 저주해야 하셨는데도 그 인간들을 의롭다고 하셨으며,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제단 위의 속죄 제물


범죄한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저주와 멸망을 받아야만 했는데, 흠없고 점 없는 양이나 염소가 제단에 피를 흘려 죽은 뒤 그 몸이 하나도 남김없이 불태워짐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주었던 곳이 바로 제단이다.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들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창세기 6장 5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함을 보시고…󰡓�

라는 말씀이 있다. 인간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물로 심판하신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보셨을 때도 인간들이 너무 깊은 죄 속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 성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인간들의 마음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여 율법을 주어도 지킬 수 없음을 아시고 그들을 심판하셨던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와 동일한 눈으로 이 시대의 인간들을 보신다면 어떠하겠는가?

소돔과 고모라 시대 때와 동일하게 오늘날도 이 세상은 죄악이 팽배해 있다.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나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하신 것처럼, 오늘날도 동일하게 죄악에 물들어져 있는 인간들을 심판하셔야만 하는데 왜 심판하시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 죽음이 완악한 인간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잠재웠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은 십자가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말씀하고 계시며, 우리의 죄를 다시 기억지도 아니하겠다고 하셨다.

구약 시대에 성막 안 제단에서 이루어졌던 속죄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때, 양이나 소를 끌고 성막에 와서 속죄제사를 드리면 모든 심판이 양이나 염소에게 내려졌었다. 오늘날도 동일하게 모든 악한 죄들이 범하여지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 모든 심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내려질 심판을 끝내셨다. 비록 죄를 지은 기억은 날지라도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죄에 대한 진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렸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의 죄를 발견하실 수가 없다.

제단은 제물이 불태워지는 곳이다. 레위기 1장에 보면 제물의 고기만 불사르는 것이 아니라 머리와 정갱이, 내장 전부를 단 위에서 태운다고 되어 있다.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다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그 내장과 정갱이는 물로 씻을 것이요,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 1:8,9)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며 처참한 죽음을 당하셨음을 기억할 때마다 주님께 감사하고, 우리의 마음이 숙연해진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주자주 당신이 죽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을 보면, 주님은 늘 당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계셨다.

십자가에서 고난받는 것은 잠깐이지만, 마음에서 죽음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오랫동안 주님의 마음에 고통으로 남았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죽음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못박혀 죽으시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죽어야 했고, 평안을 원하거나 안일을 원하는 마음이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만일, 자신의 안일이나 쾌락, 육신의 평안함을 원하는 마음이 죽지 않았다면, 주님은 절대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실 수가 없었을 것이다.

주님은 당신 스스로 육신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평안을 원하는 마음을 못박았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하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주님은 육신은 십자가를 원치 않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 수 있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의 뜻 앞에 주님의 모든 생각이 죽임을 당하고 불타서 재가 되어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제물이 되어진다는 것이다.

머리와 기름, 내장과 정갱이가 전부 불태워져서 드려지는 제사라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인데, 이것은 육신의 고깃덩어리가 타야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육신의 소욕이 재가 되어야 함을 의미하고 있다. 󰡐�머리󰡑�는 인간의 생각, 지식을 뜻하고, 󰡐�내장󰡑�은 자신의 경험이나 지금까지 살아온 철학, 자기의 주장을 가리킨다. 이런 것들이 온전하게 불태워지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주(主)로 행하실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기뻐 받으실 귀한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번제물의 머리, 정갱이, 내장, 기름 전부가 불태워져야 하는 것처럼, 주님의 뜻이 하나님 뜻 앞에 여지없이 부서져 제물로 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제단 앞에서 우리의 잘난 것, 똑똑한 것, 선한 것, 우리의 경험, 생각 등 모든 육신의 소욕들이 불태워지고 제거되어야 한다.


불태워져야 할 육신


주님 앞에 나아가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릴 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추하고 악하고 가증스런 부분은 제거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 즉 깨끗하고 착하고 좋다고 여겨지는 부분은 살려두기를 원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사무엘 상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사울 왕에게 보내어,

󰡒�아말렉의 모든 소유를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고 말씀하셨다. 사울 왕은 아말렉 성에 이르러 그 백성을 진멸하였다. 그런데 사울은 왜 결국 저주를 받았는가? 그것은 바로 가치없고 낮은 것은 진멸했지만, 양이나 소같이 자신이 보기에 좋고 귀한 것은 살려두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자신의 추하고 가증된 모습, 가치없고 낮은 것이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려지는 것에 대해서 마음에 별로 부담이 안 된다. 그러나 자기 보기에 선하고 아름답고 귀한 부분을 드리는 것은 부담스러워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가치없고 천하고 쓸모가 없어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가장 귀한 아들이셨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유일한 종이셨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성취하는 선지자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스럽게 하실 수 있는 분이셨던 것이다.

주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병자를 고치고, 귀신에게 매인 자를 풀어주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고, 풍랑을 잔잔케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등 하나님의 귀한 종으로서 해야 할 일이 참 많았다. 하나님은 가치없고 쓸모없는 인간을 제단에 불태우기를 원치 아니하셨다. 하나님은 당신이 가장 아끼신 아들, 아름답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위한 제물로 보내셨다. 그러므로 내가 가장 옳다고 여기는 생각, 주장, 경험, 지식, 선 그 모든 것이 흔적도없이 불태워져야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 받으신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것이 가장 바른 것인 양, 자기 생각이 가장 옳은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는 있어도 제단이 없는 것이다. 자기 생각에 귀하게 여겨지는 모든 것을 불태워드리는 참된 제단이 없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교회가 인간의 생각으로 운영되고, 인간의 방법과 주장, 경험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대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제사가 아니다.

하나님은 가장 아끼시는 아들을 제물로 삼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셨다.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정결한 양을 불태워서 제사를 드렸던 것처럼, 우리 속에서 좋고 아름다운 생각들을 흔적도 없이 불태워 버리고, 다만 하나님의 뜻만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게 될 때, 하나님이 우리를 기쁘게 받으실 줄 믿는다. 각 교회 안에, 각 심령 안에 이 제단으로 말미암아 육신의 생각과 소욕이 불태워지는 역사가 일어나 육신의 생각은 무너지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만이 살아 역사하게 되기를 바란다.




19. 단 뿔


제단 뿔에 피를 발라야


󰡒�너는 조각목으로 장이 오 규빗, 광이 오 규빗의 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고는 삼 규빗으로 하고 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 그 뿔이 그것에 연하게 하고󰡓�(출 27:1,2)

이 말씀에 보면 제단 사각 모퉁이에다가 뿔을 만들어 연하게 하라고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성막의 뿔들에 대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성경에서는 무엇보다 단뿔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사람들이 죄를 지어 두려움 속에 빠졌을 때 그 죄를 사함받기 위하여 제단뿔을 잡았다는 이야기를 가끔 발견할 수 있다.

다윗 왕이 나이 많아 늙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기 원하셨지만, 아도니야는 자기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왕이 되려고 했다. 아도니야의 뜻대로 되어 가는 찰나에 다윗이 솔로몬을 왕으로 지명해 세우자, 아도니야는 솔로몬 왕을 두려워하여 제단뿔을 잡고 죄의 용서를 구하게 되는데, 그 때 솔로몬은 아도니야에게 만일 선한 사람이 된다면 죽이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얼마 후 아도니야가 수넴 여자 아비삭과 결혼해서 다른 음모를 꾸미려고 하자 솔로몬은 아도니야를 칼로 쳐 죽이게 했다. 열왕기 상 2장 28절 이하에 보면, 솔로몬이 그를 쳐 죽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도니야와 같이 음모를 꾸몄던 요압은 성전으로 가서 제단뿔을 잡고 두려워 떨고 있었다. 그 때 솔로몬은 군대 장관 브나야를 보내어 요압을 죽이라고 했다. 그 때 요압은 제단뿔을 잡고 자기가 거기서 죽겠다고 하여 결국 제단뿔을 잡은 상태에서 칼에 맞아 죽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이 아도니야나 요압은 왜 제단의 턱이나 제단을 꿰는 채를 잡지 아니하고 제단뿔을 잡았던가?

레위기 4장을 보면, 제사장이 범죄했을 때나 이스라엘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때에는 향단 뿔에, 족장이 죄를 범했을 때나 평민이 죄를 범했을 때에는 번제단 뿔에 짐승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서 바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왜 속죄 제사를 드릴 때마다 제사장이 번제단 뿔이나 향단 뿔에다 피를 발라야만 했는가? 속죄 제사를 드릴 때 속죄 제물의 피를 향단 뿔이나 제단 뿔에 바르지 아니하면 죄가 사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피를 제단 뿔에 발라야 죄가 사해지는가? 예레미야 17장 1절에 보면,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

이라는 말씀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대로 제단의 높이는 삼 규빗이다. 우리나라 도량형으로 환산하면, 1규빗은 약 45cm이니까 약 135cm 정도 된다. 그 제단에 연결되어 세워지는 것이 뿔이다. 뿔의 높이는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람의 키가 보통 170cm에서 180cm 정도라면, 제단 건너편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떠오르게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제단 위에 있는 제단의 불을 바라보게 될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도 보이게 된다. 즉 제단의 불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중간에 서게 되는 것이다.

예레미야 17장 1절에 보면 이 제단뿔에는 우리 죄를 기록해 놓았다고 했다.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 안에 거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단 건너편의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경우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제단뿔이 가로놓여 있어서, 평상시에는 그들의 죄를 기억지 않다가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기만 하면 제단뿔에 새겨진 죄가 생각나 마음에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속죄 제사를 드릴 때에는 죄를 범한 사람이 어린 양에게 안수한 뒤 그 어린 양이 죽음으로써 죄가 사해졌는데, 마지막으로 죄의 기록을 지우는 일을 해야 한다.그래서 제단뿔에 어린 양의 피를 바름으로써 우리 보기에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가 전혀 보이지 않게 했다는 것이다. 아도니야나 요압이 죽게 된 것은 제단의 뿔에 기록된 그들의 죄를 지우기 위해서는 속죄 제물의 피를 발라야만 하는데, 그냥 손으로 그들의 죄를 가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단 뿔의 피로 도말된 죄


예레미야 17장 1절을 자세히 읽어 보면 또다른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

는 이 말씀에 보면,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제단뿔에다 기록하고, 또 하나는 마음판에 기록했다고 되어 있다. 아담, 하와는 범죄했을 때에 그들 스스로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했고, 하나님 또한 그들 마음 속에 새겨진 죄를 보고 그들을 저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우리 편에서도 마음에 문제가 되지만 죄가 가로막혀 하나님 편에서도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장사를 하는 사람이 거래처에서 물건을 사올 때에는 현금을 다 주는 경우도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일부분만 현금을 주고 나머지는 다음에 주기로 하고 거래를 한다. 그 때 두 사람이 각각 외상 장부를 만들어서 잔금을 서로 기록해 놓았다가, 한 달에 한 번씩 오백만 원이나 오천만 원을 갚게 되었다고 하자. 이 때는 한쪽편 장부에 기록된 금액만 지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편 장부에 기록되어 있는 금액도 지워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죄에 대해 하나님과 우리는 각각 딴 장부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의 장부는 우리의 마음판이고 하나님의 장부는 단 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의 장부인 제단 뿔에 우리의 죄를 기록하게 되고, 우리는 우리의 마음판에 죄가 기록되기 때문에 언제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보실 때에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의 기록은 지워져 버렸다. 구약에서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인데, 하나님은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에 우리 죄를 다 사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기록하셨던 모든 죄의 기록 자체를 도말하셨다.

히브리서에서는,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히 10:17)

고 말씀하셨다. 단 뿔에 기록된 우리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온전히 도말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 죄의 기록을 발견하실 수가 없다.

골로새서 2장 13절에는,

󰡒�또 너희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는 말씀이 있다. 여기에 보면, 십자가에서 우리를 거스리고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우리의 모든 죄의 기록은 도말되었기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제로는 죄가 있는데도 그냥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실제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다.


마음판에 새겨진 죄를 도말한 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는 죄가 있지만 의롭게 봐 주신 거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의인을 의인이라고 하시지, 절대로 죄인을 의인이라고 거짓말 할 수 없는 분이시다.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죄가 사해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 죄에 대한 모든 기록까지 도말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말씀하시며, 다시는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신다. 문제는 우리 마음판에만 죄에 대한 기록이 있기 때문에, 우리 마음 속에 죄를 지은 기억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단 뿔에 기록된 죄는 어린 양의 피로 사해지지만, 우리 마음판에 기록된 죄는 어떻게 사함을 받을 수 있는가?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가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비록 죄에 대한 기억은 날지라도 그 죄는 이미 해결된 것이기 때문에 내 마음 속에 죄의 권능이 남아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제단 뿔에 새겨진 죄를 지워 버렸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마음판에 새겨진 죄를 지우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 우리 마음판에 새겨진 모든 죄를 영원히 사하셨다.

제단에는 여러 가지 귀한 영적비밀들이 있지만, 이 뿔에 대해서는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제단뿔에 피를 바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편에서는 죄의 기록이 온전히 제거되고 도말되었기 때문에 더이상우리 죄를 찾으실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는 의로운 것이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죄가 사해지고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따라서 죄에 대하여 영원히 자유롭게 된다. 로마서 4장 4절이하의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

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 우리가 보기에는 우리 자신이 경건치 않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리스도의 피로 이미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담대하게 살아가게 되기를 바라신다.



20. 5 규빗


은혜의 수 5


모세가 성막을 지으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지으라󰡓�(출 25:40)

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성막을 지을 때 아주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에 인간의 생각이나 방법이 첨가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셨다. 그래서 모세가 시내 산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하늘에 있는 성전을 보이시면서 그 모양 그대로 짓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그 규격대로 지으라고 하신 것이다.

󰡒�너는 조각목으로 장이 오 규빗, 광이 오 규빗의 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고는 삼 규빗으로 하고󰡓�(출 27:1)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제단의 규격을 분명하게 정해주어 그 규격대로 제단을 만들라고 하셨다. 출애굽기 39장 43절에 보면, 성막이 모두 만들어졌을 때,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되었으므로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

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해 주신 이유는 성막의 모든 부분들이 한 부분도 남김없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신 뜻대로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 성막의 모든 부분을 손톱만큼도 인간의 생각을 섞지 말고 하나님 뜻대로 지으라고 말씀하셨으며, 그 규격을 말씀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귀한 구속의 비밀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성막에는 구석구석마다 하나님의 깊은 마음이 감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이 인간의 생각에 의해 변경되거나 덮여지지 않기를 원하셨다. 또한 그 뜻이 나타나서 인간들 스스로 보기에는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없다고 생각되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말씀을 통해 도리어 더욱 담대히 나아올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원하신다.

제단은 장이 오 규빗, 광이 오 규빗, 고가 삼 규빗이 되도록 만들라고 하셨다. 다시 말하면, 길이와 넓이가 오 규빗이며 높이가 삼 규빗 되는 단을 만들라고 하셨는데, 단의 규격에서도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제단을 왜 사방 오 규빗으로 만들라고 했는가? 일 규빗이 약 45cm이니까 오 규빗은 약 225cm 정도가 되는데, 물론 오 규빗은 되어야 거기에다 제물도 태우고 제사도 드릴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오 규빗을 통해 또 다른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려고 하시는 것이다.

지난번에도 말한 바와 같이 성경에 나타난 모든 숫자에는 깊은 뜻이 있다. 예를 들어, 3은 하나님을, 4는 고난을, 6은 인간의 성품을 나타내고 있으며, 완전을 나타내실 때는 7이라는 숫자를 사용하셨다. 5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낼 때 사용하셨다. 오순절에 성령을 값없이 은혜로 받았다는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누가 복음 7장에는 500데나리온 빚진 자와 50데나리온 빚진 자가 탕감을 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탕감을 받는 부분에 대하여 5라는 숫자를 사용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값없이 그들을 탕감해 주셨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또한, 요한 복음 5장에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행각 다섯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다섯 행각이라는 부분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은혜냐? 대가냐?


하나님께서 은혜를 나타낼 때는 항상 5라는 숫자를 사용하셨는데, 제단의 사면 길이가 오 규빗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단을 통해 인간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제단은 동쪽에서 보든 서쪽에서 보든 어느 면에서 보든지 간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제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은혜󰡑�라는 말은 아무 데나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듣다가 마음에 감동을 받거나 감사한 부분이 있으면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손톱만큼의 대가라도 지불되어지면 그것은 절대로 은혜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은혜󰡑�라는 단어가 쓰일 수 있는 조건은 한정되어 있는데, 노력이나 대가가 전혀 포함되지 않은 상태 속에서 무엇을 받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은혜는 값없이 받는 것이기 때문에, 이 은혜는 반드시 베푸는 측과 받는 측이 있다. 은혜를 베푸는 측은 은혜를 받는 측과 상관없이 모든 것을 다 준비해야 하고, 받는 측에서는 손톱만큼도 자신의 노력이나 수고가 배제되어야 은혜를 받을 수 있다.

민수기 6장에 보면,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민 6:24, 25)

라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수고나 노력의 대가로 당신의 귀한 복을 주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왜냐 하면,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시지 않는다면 능력 있는 자는 받을 수 있지만, 능력 없는 자는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 󰡐�은혜󰡑�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자기가 무엇인가 열심히 노력하여 은혜를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은혜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실제로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잘했거나 열심히 노력해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은혜는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가 전혀 첨가되어지지 아니한 것을 값없이 받는 것이다.

성경에는 구원받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러 곳에 나타나 있는데, 한결같이 아무런 대가없이 은혜로 받는 것을 볼 수 있다. 열왕기 하 5장에 보면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서 나음을 받았는데, 이 문둥병은 죄를 가리킨다. 문둥병에 걸린 나아만 장군이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어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고통하던 우리가 그 죄에서 깨끗함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은 후 엘리사에게 와서 여러 가지 예물을 주려고 하자, 엘리사는 한사코 그 예물 받기를 거절했다.

엘리사가 그 예물을 받을 수 없는 이유는, 죄 사함은 우리의 어떤 수고나 대가가 지불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은혜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뜻을 알지 못한 엘리사의 시종 게하시는 나아만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다가 문둥병에 걸리는 비참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큰 구원을 값없이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누가 복음에도 십자가의 강도가 구원을 받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구원받기 위해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자의 이야기를 보아도, 강도 만난 자는 구원을 받기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다만 어떤 사마리아인이 수고를 했고 대가를 지불했을 뿐이었다. 요한 복음 8장에는 간음하던 여자가 현장에서 잡혀 예수님 앞에 끌려와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서 은혜를 입고 구원을 받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도 동일하게 그 여자는 아무 수고한 것 없이 은혜로 죄 사함을 받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복을 주실 때에는 우리가 수고한 대가를 따라서 주는 것이 아니라, 값없는 은혜로써 우리들에게 베풀어주기를 원하신다. 이 제단은 십자가를 가리키는데, 그 십자가를 볼 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과 은혜를 받는 인간 사이에 받는 자가 아무 대가없이 받도록 은혜를 베푸는 하나님 편에서 모든 것을 다 준비해 주셨다. 즉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고 피를 흘려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측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모든 것을 준비하셨다. 그러니까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죄 씻음을 받을 때 우리가 무엇을 열심히 하고 눈물을 흘리고 각오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는 측인 하나님 편에서 모든 것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제단에서 양이 피를 흘리며 죽어 불태워지고, 그 피가 제단 밑에 뿌려지는 것을 보면, 바로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리며 죽으시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셔야 하는가? 가장 먼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은혜, 죄 사함을 받는 은혜를 베풀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죄를 씻기 위하여 100% 하나님께서 일을 해야만 우리가 온전한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우리가 구원받는 일은 1%라도 우리의 노력과 수고가 포함된 것이 아니라, 100%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나의 나 된 것은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은혜󰡑�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은혜를 받기 위해서 무엇인가 자꾸 노력하는 것을 본다. 자기가 좀더 기도하고 노력하고 봉사해서 은혜를 입으려고 하다 보니까, 결국 은혜를 입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이다.

나도 구원을 받기 전에는 신앙 생활을 잘하기 위하여 내가 무얼 열심히 노력하고 애를 써야 하는 줄 알고 열심히 노력했었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잘 되어지기는커녕 자꾸 죄 속에 더 깊이 빠져드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어느 날 이제 도저히 나 스스로는 죄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내가 노력하던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은 것은 내가 남보다 죄를 적게 지었다거나 노력이나 수고를 많이 했다거나 하나님께 열심히 봉사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나같이 더럽고 추한 죄인을 건져주셨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속을 받은 후에도 나는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하며 허물이 많은 인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셔서 나로 하여금 늘 주 앞에 견고하게 설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다.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열심히 노력하고 수고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입혀 주시기 때문이다.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도 나의 각오나 결단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의 유혹을 이길 만한 힘을 주시기 때문이요, 내가 거룩함을 입은 것도 남들보다 죄를 적게 지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깨끗하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제단의 규격을 사방 오 규빗으로 정하신 것은 어느 방향에서 보든지 간에 우리가 은혜의 숫자인 5를 보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은혜를 입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제단에서 불타고 있는 양을 보면서, 우리를 대신해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그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오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다만 󰡒�나의 나 된 것은 주 예수의 은혜로다.󰡓�라는 바울의 간증처럼,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바란다.



21. 산 제사


형체가 없어지다


지금까지 제단에 대해서 이야기해 왔는데, 한마디로 제단은 우리를 위한 어린 양의 피가 뿌려지며, 제물의 고기가 불타 없어지고 피와 재만 남는 곳이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드렸던 제사에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등 여러 가지 제사가 있다. 레위기 1장에서부터 성경을 상고해 보면, 이러한 제사들이 모두 제단에서 드려졌다, 여기서는 제사에 관한 이야기보다 성막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한다. 먼저 제사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번제󰡑�는 양이나 소의 가죽을 다 벗기고 각을 떠서 그 각 뜬 고기를 불에 태우고, 그 피는 단 사면에 뿌리는데, 짐승의 내장은 전부 물로 씻어서 제단 위에 태워버리는 제사를 말한다. 이 번제가 바로 제단 위에서 드려지는데, 양이나 소의 고기가 불태워져 재만 남고, 그 피가 뿌려지는 부분을 제단이라고 말한다. 이 번제는 제단 사면에다 피를 뿌리게 되어 있다.

소제의 제물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소제󰡑�는 고운 가루에 누룩을 섞지 아니하고 기름을 섞어서 소금을 치고, 유향을 놓은 소제물을 제단 위에 전부 불태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다.

󰡐�화목제󰡑�는 우리가 아는 대로 소나 양의 암컷이나 수컷을 드리는데, 그 고기는 제사장이 먹지만 그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은 단 위에서 불태워지고, 그 피는 제단뿔이나 제단 사면이나 제단 밑에 흥건하게 뿌린다.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도, 하나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심을 입은 귀한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기 자신의 흔적을 남김없이 온전하게 불태워 드리셨는데, 그 모습을 이 제단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자주 이야기했듯이, 이 제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타낸다. 그 어린 양이 번제물로 드려졌을 때, 가죽이 벗겨지고 각이 뜨여져서 전부 불태워지고 재만 남아 더 이상 어린 양의 모습이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제단인 것이다.

우리는 이 제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지 않으셨다. 특히,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라고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간절한 기도를 볼 수 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육신의 소욕이나 뜻을 좇았다면,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 아니하시고 다른 방법을 취했을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나는 내 뜻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알지 아니하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고 자주 말씀하셨다. 주님은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많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성경 여러 곳에서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특히, 요한 복음 5장에서는 그 부분에 대하여 아주 강하게 말씀을 하셨다. 주님이 걸어가신 발자취 속에서는 손톱만큼도 육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인간들이 걸어가는 발자취를 보면, 자기의 습관이나 태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좇아간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마치 어린 양이 불타 없어져 흔적도 없는 것처럼,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흔적도 발견할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요한 복음 19장에 보면,

󰡒�이렇게 행하심은 그에게 기록된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하심이라.󰡓�

는 내용이 몇 군데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뜻을 따라 살지 아니하셨다.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구약의 말씀(뜻)에 따라서 십자가를 지시고 희생을 당하셨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은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가운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는 말씀에서도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셨던 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우리의 뜻이 불타고


구약 시대에 제단에서 수없이 많은 양들이 희생을 당했을 때에 그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던 것처럼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당신의 생각이나 뜻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의 뜻은 모두 사라져 버렸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고정 관념이나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대할 때가 참 많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자기 마음에 맞을 때는 온 마음을 다 쏟아 봉사를 하지만, 내 생각과 맞지 않으면 그것이 비록 성경 말씀이라 해도 묵살해 버리는 것을 본다. 그러한 모습들은 예수님의 모습과 너무 다르다.

나는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 생각이 참 잘못된 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내가 성경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하나님의 뜻을 떠나 내 생각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말씀을 가까이 대하면서, 󰡐�아, 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생각대로 되어졌구나.󰡑� 할 때가 많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면, 자기 뜻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자기 마음에 좋은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은 것인 줄 알고 속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나님의 귀한 뜻을 알려면 예수님처럼 자기 생각을 다 버려야 한다. 자신의 소욕이 꺾여지고 죽임을 당해야만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는 고백이 이루어질 수 있다.

제단에서 드려지는 제사는 어떠한 제사든지 간에 양이나 염소나 황소와 같은 제물의 요구대로 드려지는 제사가 없다. 황소가 아무리 살고 싶고, 평안하고 싶어도 그 모든 조건은 다 무시된다. 아무리 튼튼하고 아름다운 황소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피를 흘리고 죽어서 불타 재가 되어야만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제물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제물이 되기 위하여 손톱만큼도 당신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다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온전한 희생을 당하셨다. 마치 털 깎는 자 앞에 끌려가는 양처럼 입을 열지 아니하고 잠잠히 끌려가셔서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죄에 대한 심판을 그 몸에 받으셨다.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그 육체에 받으시고 우리를 참 복되고 평안하게 하셨다. 우리가 제단을 보면, 다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희생을 당한 어린 양이나 소나 염소의 형체를 볼 수 없고 재만 남아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전한 희생 제물이 되어주셨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려지려면, 우리의 뜻이나 쾌락이나 습관이나 취미 따위가 다 불태워져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귀한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만이 우리 마음 속에 서 있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담력을 주는 곳


어떤 사람들이 신앙 생활하는 것을 보면 그 신앙 속에 자기의 성격이나 자신의 요구가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도 지금까지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 내 자신을 드린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인간적인 생각이나 육체의 소욕들이 내 마음 속에 그대로 있는 것을 자주 발견한다. 그 때마다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른다. 그래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마다,

󰡒�주님,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내 육신적인 소욕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라는 기도를 종종 드리곤 한다.

우리가 제단을 찾아가면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온전히 희생된 어린 양과 제단 밑에 뿌려진 어린 양의 피만 볼 수 있다. 바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 죄를 가리우고, 우리 죄에 대한 기록을 덮어버려서, 우리의 죄가 사함받았다는 확실한 증거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 피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쁘게 받으셨다는 약속으로 흘려져 있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 중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차례씩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그 손에 피가 있어야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만일, 그 손에 피가 없으면 지성소에 들어가는 즉시 그는 죽고 만다.

제사장이 살기 위해서는 어린 양이 죽어서 흘린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야 했듯이,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살리시려고 피를 흘려주신 것이다. 그 피가 제단 사면에 고여 있고, 단뿔에 발리워져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갈 담력을 얻는 것이다. 만일, 어린 양이 제단에서 죽임을 당해서 흘린 피와 불태워진 재가 없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받으실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를 위하여 희생당한 어린 양이 우리를 위하여 흘린 피와 불타 없어진 재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받으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우리가 잘한 것, 연보한 것이나 기도한 것, 하나님 앞에 충성한 것이나 구제한 것이 아닌, 우리를 위하여 희생당한 어린 양의 피를 보고 나아가야 한다. 우리 마음 구석구석마다 내가 잘한 것으로 채워져 있는 자기의 선한 것을 지워버리고, 우리 마음에 어린 양의 피로 채워서 그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은 우리를 받으셔서 사망을 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귀한 은총을 더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십자가 밑에서 주님의 육신의 모든 소욕이나 생각이 불타버리고 하나님의 뜻만 세워졌듯이, 우리 육신의 모든 소욕이 불타고 생각이 불타 없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으신다. 우리 육신의 제물은 빈약하기 때문에, 우리를 대신하여 드려진 어린 양의 피와 재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마음에 가득히 쌓여 있는 심판과 모든 진노를 쏟아버림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함을 주는 장소가 바로 제단이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이다.




22. 물두멍

죄 사함을 받은 후에는…?


우리는 지금까지 성막 안의 제단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낼 뿐 아니라 성도들의 신앙도 나타내고 있으며, 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명확한 길도 된다. 그러므로 성막을 이야기하면 이야기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가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깊이 느낄 수 있다. 또한, 성막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수록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잘못된 부분이 드러나게 되고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갈 수가 있었다.

지금까지 성막의 바깥에 있는 울타리에 대한 이야기와 울타리를 지나 들어왔을 때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제단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이 제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한다. <천로역정>에서 기독도가 천성을 향해 갈 때 십자가 앞에서 그의 모든 죄짐이 떨어져 다시는 그를 괴롭게 하지 않았던 것처럼, 제단에서는 우리의 죄가 단번에 영원히 씻어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제단에서 단번에 모든 죄를 영원히 씻고 의롭게 된 성도는 이제 하나님의 지성소를 향하여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발을 내딛게 되는데, 제단을 거쳐서 지성소를 향해 들어가는 한가운데 물두멍이 놓여 있다. 이 물두멍은 제사장들이 제단에 와서 하나님을 섬길 때에 그 물두멍에 손과 발을 씻어서 죽음을 면케 하는 역할을 한다. 이 물두멍 자체는 우리의 손과 발을 씻는 곳이지 목욕을 하는 곳이 아니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만일 죄 사함을 받고 난 후 범죄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죄를 사함받고 난 다음에는 죄를 막 지어도 괜찮습니까?󰡓�라는 질문들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을 때, 어떤 죄는 씻어지고, 어떤 죄는 씻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든 죄를 영원히 완전하게 씻음받았다.

요한일서 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서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총망라해서 단번에 깨끗하게 씻어주신다.

이제 󰡐�죄 씻음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가 다시는 범죄하지 아니하는가? 다시 범죄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문제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죄 속에서 헤매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도리를 깨닫고 단번에 모든 죄가 눈과 같이 희게 씻어지는 귀한 경험을 하고 나면 놀랄 수밖에 없다. 우리의 모든 죄가 눈과 같이 희게 씻어져서 단번에 해결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의인이라고 말할 수가 있으며,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확신 가운데 서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죄 사함을 받았으니까 이제 죄를 막 지어도 괜찮다고 쉽게 단정해 버린다. 그래서 죄를 사함받았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간혹 방종으로 흘러 죄 사함을 받기 전보다 훨씬 더 악한 죄 속에 빠지고, 죄의 가책도 없는 상태 속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요한 일서 2장 1절에 보면,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자녀󰡑�는 죄 사함을 받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는데, 이 말씀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도 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죄를 범하기를 원치 아니하신다는 두 가지 사실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죄 속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한 일서는 그 부분을 명백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단이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꾀어 죄 속에 빠지도록 한 목적은, 아담과 하와가 죄 속에 빠지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멀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우리가 범죄하게 되면 우리 편에서 스스로 마음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된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멀어지고 나면, 사단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쉽게 우리를 죄악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우리가 죄의 가책으로 인해 고통하고 괴로워하며 어떤 각오나 선한 결심을 하면 죄를 적게 지을 줄 알지만,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거나 애를 쓰며 결심하는 일은 바로 사단에게 속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그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죄를 적게 짓는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죄가 우리 인간보다 힘이 세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강한 결심을 하더라도 죄가 우리를 끌고 다니면 꼼짝없이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범치 않으려면, 죄를 이길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가까이 함께 거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만 이기셨을 뿐 아니라 사단의 시험을 이기셨고, 죽음을 이기신 분이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고, 죄를 범치 않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아무 장벽이 없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깨끗하고 거룩한, 흠과 티가 없는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면, 그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창세기를 보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떨어져 있었을 때 범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하와는 아담과 떨어져 있을 때 범죄했다. 만일 하와가 아담과 같이 있었다면 사단이 그들을 꼬일 수가 없기 때문에 범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그 자체가 그들이 범죄하게 된 근본 원인인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범죄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인간적으로 노력을 한다든지 각오를 한다든지 양심에 가책을 주어 괴로워하고 슬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깝게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범죄하게 되면, 사단이 우리를 속여 끌고다니기가 쉬어진다. 일단 사람들이 범죄하게 되면 말씀을 대하거나 기도하기가 싫어진다. 사단은 그 때 우리 마음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해서 죄에 빠지게 한다 요한 일서 2장에 보면,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에는 우리 자신이 그 죄를 처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이 사람이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지만, 이 죄도 십자가에서 그 형벌이 끝났습니다.󰡓�

하고 대언, 변호해서, 그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틈을 만들지 않도록 해 주신다.

사단은 우리의 범죄를 이용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으려 하지만,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서 그 죄가 이미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제가 다시 회복된다.

요한 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려 하였다. 그 때 시몬 베드로가,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요 13:8)

라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 13:8)

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요 13:9)

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

고 말씀하셨다. 요한 일서 1장 7절의,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는 말씀처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되는 죄 사함 받고 구원받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거듭난 이후에도 범죄할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앞에 항상 대언자로 계셔서 그 죄도 해결해 주신다.그러므로 󰡐�손발을 씻는다󰡑�는 것은 󰡐�내가 범죄하였지만, 그리스도께서 이 죄까지도 다 해결하셨구나.󰡑� 하는 믿음으로 께끗함을 입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죄를 막 지어도 괜찮겠네?󰡑�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사단으로부터 온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목욕과 발씻음


사단은, 우리가 죄를 짓고서도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된다면, 죄에 대한 감각이 둔해져서 죄를 더 많이 지을 것이라는 생각을 넣어 준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수고나 노력이나 각오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가까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보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다. 제단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음받고 목욕하는 곳이라면, 물두멍은 우리의 손발을 씻는 곳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영원히 씻음받은 뒤에 범죄했을 때에도 여전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서 더욱더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은혜를 입어야 한다. 우리가 범죄한 것을 통해 사단이 우리를 속이지 못하도록 󰡒�하나님, 나는 이럴 수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범죄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라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항상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어야 한다. 범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진 것은 사단이 노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책이나 두려움 속에 빠져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 아래, 은혜의 보좌 앞에 머물러 있게 된다면 사단은 더 이상 우리를 속이거나 유혹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거듭난 이후에 범한 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몰라 방황하고 있다.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를 향하여 항상 마음을 열고 계시는데도 스스로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에 어둠을 갖고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을 본다. 그리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신령한 은혜를 공급받지 못해 약해지고 다시 더러운 죄 속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비록 죄를 범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영위할 수가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의 신앙은 죄의 고백으로 점철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라고 말씀하셨는데, 목욕도 하지 아니한 채 물두멍에 가서 계속 발만 씻으려 하니까 한평생 그 죄가 씻어지지 아니하는 것이다.

우리는 목욕하는 것과 발 씻는 것의 차이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사함받고 거듭나는 일이 목욕이라면, 신앙 생활을 하면서 짓는 죄는 우리의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항상 우리를 위해 대언하시는데, 그것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은 발을 씻는 것이다. 요한 일서에서도,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신다는 말씀이 목욕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하는 말씀은 발을 씻는 것을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 일서 1장 9절만 알기 때문에, 목욕한 적도 없으면서 매일매일 죄를 씻으려고 날마다 죄타령만 하는 것을 본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미 목욕한 사람에 한해서 발만 씻으라고 하셨다. 하지만 목욕하지 않은 자는 발을 씻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목욕을 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죄가 흰 눈처럼 씻어진 것을 경험하지 못한 채 죄를 고백만 하고 있는 사람은 신앙 생활을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목욕도 하지 아니하고 발만 씻으려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자신의 모든 죄를 사하신 그 은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사함받아야 한다. 즉 목욕부터 해야 하는 것이다. 목욕을 한 이후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 실수를 하고 죄를 범하게 될 때는, 주의 은혜 앞에 나아가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시고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작은 어두움도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종종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다 씻으셨지만, 날마다 죄를 짓는데 어떻게 감히 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바라보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아니다. 사람에게는 눈이 두 개가 있지만, 항상 같은 방향으로 바라보게 되어 있지, 각기 다른 방향을 주시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 마음의 눈도 한쪽 방향 외에는 볼 수가 없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바라보든지,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든지 어느 한쪽 방향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다. 은혜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는 행위를 볼 수 없고, 반대로 행위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는 주의 은혜를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거룩함을 입은 것은 자신의 행위나 노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된 것처럼, 설령 구속함을 받은 이후에 범죄하게 되었을지라도 우리를 위하여 대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문제를 완벽하게 변호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 위에 굳게 설 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제사장이 제단에서 모든 죄를 씻은 뒤 다시 물두멍에 들어가서 그의 손과 발을 씻는 것처럼, 우리가 거듭난 이후 신앙 생활을 하면서 죄를 범했을 때에는 그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이 죄를 사해 주십시오.󰡓� 하고 고백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가 거듭나기 전에 지은 죄와 거듭난 이후에 짓는 죄까지도 모두 해결하셨음을 믿는 믿음 안에 거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놓으신 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인이라고 여기지 않으시는데, 죄를 지을 때 우리 편에서 스스로 마음의 가책을 느껴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그 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함을 얻게 하기 위해서는 물두멍에 손발을 씻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온전케 하신 사실을 믿음으로 어떤 상황에서든지 항상 담대히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제단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눈과 같이 깨끗하게 씻어져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난 뒤 삶 속에서 범죄하게 될 때는, 물두멍에서 손발을 씻는 것처럼, 이미 그 범죄까지 씻으신 사실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23. 규격이 없음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출애굽기 30장 17, 1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죄의 장벽을 허는 문제이다. 실제로, 우리가 죄를 범하여 마음이 죄에 눌리게 되면, 두려움이 생겨서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죄를 사함받아야 할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죄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이나 축복을 입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문제가 없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그 사람의 마음에 흐르게 되고, 하나님의 성령이 그 마음에 충만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 말하고 생각하고 사물을 보는 모든 것은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되며, 하나님의 입술로 말하게 된다. 생각하는 마음이나 말하는 입이나 보는 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지만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원래의 것과는 달리 죄로 말미암아 비뚤어졌고 어긋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과 지각이 건전하게 되려면 마음을 덮고 있는 죄가 씻어져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이 없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속에 흐르게 되면 지금까지 전혀 갖지 못했던 생각이나 마음을 갖게 된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에서 빌립보 교회에 대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고 기록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잡아 죽였는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어떻게 그렇게 사모하게 되고, 빌립보 교회를 사모하는 자로 바뀌었는가? 그것은 분명히 바울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라고 간증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 올라가기 이전의 사울, 다메섹에 올라간 이후의 바울로 나눌 수 있는데, 다메섹에 올라가기 전의 사울은 자기의 방법과 자기의 주관대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에 올라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자기의 생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대로 움직였기 때문에, 똑같은 사람이지만 그의 삶은 전혀 달랐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거듭난 이후에 사울(큰 자)이란 이름을 버리고 바울(작은 자)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옛 사람이 아닌 새 사람이라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거듭나게 되면 새 사람이 되는데, 그 때부터는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마음을 주장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그리스도께서 주신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거듭나게 되면 성경이 읽고 싶고, 기도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베드로가,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라고 말했던 것처럼, 죄 사함이 온전히 이루어지면 성령은 자연히 우리 마음 속에 임하시게 된다. 죄 사함은 어떻게 받는가? 그것은 마음에 있는 죄를 씻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씻어지지 아니하고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어떻게 믿어야 우리의 죄가 사해지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믿음이 역사할 때이다. 즉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피로 자신의 모든 죄가 씻어졌다는 믿음이 마음에 와야 한다는 것이다.


규격이 없는 물두멍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죄를 사함받은 사람이 아니다. 만일 나에게 빚이 있는데, 누군가 그 빚을 갚아 주었다고 해도 그것이 믿어지지 않을 때는 여전히 빚에 대한 부담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빚을 다 갚았다는 사실을 믿게 된다면 더 이상 빚 때문에 염려해야 할 필요가 없고, 빚 때문에 마음이 눌릴 필요도 없다. 그렇듯이 내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졌다는 믿음이 오게 되면 온전히 죄에서 해방을 받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기 죄를 사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이 믿지 않으면 여전히 죄악에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국내외로 다니면서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란 주제로 복음을 전하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어떻게 사했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죄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 왔다. 성경 말씀은 우리의 마음이 죄에서 해방받기에 충분한 모든 사실을 다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올바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죄를 다 사했다는 성경의 증거를 들을 만한 귀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는 사단의 음성을 듣게 된다.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죄를 다 씻지는 못했다고 속여서 우리 마음을 계속 죄악 속으로 이끌어가려고 한다.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씻었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것을 믿게 될 때 영원히 죄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일을 막으려고 수없이 시도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는 일을 막지 못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때 사단은 베드로를 통해 그러한 일이 절대로 있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 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을 원치 아니하는 것은 사단이었다. 그러나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사단은, 우리가 죄에서 해방을 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죄를 다 씻지는 못했기 때문에 죄가 아직 남아 있다고 속이고 있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이 󰡒�`예수님이 우리의 원죄만 사하셨기 때문에 자범죄는 매일 우리가 회개함으로써 해결해야 한다.󰡓�고 설교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속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성경 66권 어디에서도 우리의 원죄만 사해 놓으셨다는 말씀은 찾아볼 수가 없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놓으셨다고 여러 곳에서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골로새서 2장 13절에는,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요한일서 1장 7절에도,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설혹, 우리가 간음을 하고 도둑질을 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신 것이다. 그런데 사단은 아직도 우리의 죄가 남아 있는 것처럼 우리를 속여서 여전히 죄악과 가책 속에 우리를 빠뜨리고 있다. 만일 죄에 대한 가책을 느끼고 있다면, 그는 그 마음에서 느끼는 죄악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통이 불가능하다.

제단, 향단, 법궤 등 성막의 모든 기구에는 규격이 정해져 있지만, 물두멍에는 규격이 전혀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사하는 데는 어떤 제한이나 한계를 두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다.

사단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원죄, 자범죄와 같은 개념을 만들어서 우리가 죄에서 해방을 받지 못하도록 미혹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범죄했을 때 즉시 죄악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는데, 아담 스스로 그 마음이 막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가지 못하고 어두움 속으로 숨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실을 가슴 아파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해결해 놓으셨는데 우리의 마음이 죄에서 자유롭게 되기를 바라신다. 성경 66권 여러 곳에서 죄 사함의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단은 성경 속에 나타난 구원의 깊은 은혜를 깨닫지 못하게 하여 우리의 마음을 죄악 속으로 사로잡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죄 사함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예수님께서 원죄만 사했기 때문에 자범죄는 우리가 씻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을 속여 왔다.

만일, 인간들이 스스로 죄를 씻게 된다면 결코 온전하게 씻지 못하기 때문에 결코 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만일, 여러분이 죄를 씻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면 절대로 온전하게 씻을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전하게 우리 죄를 씻을 수 있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을 믿는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만든다.


제한없는 속죄


이제 사단은 웬만한 죄는 사해진 것 같은데, 어떤 죄는 우리 마음을 너무 강하게 눌러 그 죄는 사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마음을 가지도록 역사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지만 이렇게 큰 죄를 씻을 수 있을까? 󰡐�몇몇 가지의 작은 죄는 씻어졌을지 몰라도, 이 죄는 안 씻어졌을 거야.󰡑� 하는 생각에 매이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그 모든 생각에서 우리를 풀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 물두멍에는 바로 그런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는 성막의 모든 기구에 하나님께서 규격을 다 정해 놓으신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제단은 장이 오 규빗, 광이 오 규빗, 고가 삼 규빗이다. 법궤, 향단에도 규격이 정해져 있는데 그 규격의 숫자마다 다 의미가 있다. 그뿐 아니라 노아가 만든 방주에도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라고 하나님이 규격을 정해 두셨고, 새 예루살렘에도 규격이 있는데, 물두멍에는 규격이 전혀 없다. 하나님이 이 물두멍에만 치수를 정해 두지 않은 까닭은 바로 우리 죄를 사하는 데는 어떤 제한을 두거나 한계를 두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지을 수 있는 어떤 죄든지, 얼마나 큰 죄든지 불문에 붙이고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 모든 죄를 씻을 수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물두멍은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기 위하여 손발을 씻는 곳이다. 죄 사함을 받은 후에도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다가 이런 저런 죄를 짓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눌리게 되는데, 그 때 제사장이 물두멍에 와서 손발을 씻듯이, 바로 그리스도의 보혈이 이 죄도 씻었다는 믿음으로 우리 마음을 씻는 일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한번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하리이까? 일곱 번까지 용서하리이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제한을 두지 말고 얼마든지 사해 주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에게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고 사해 주라고 하신 주님이, 우리가 주님에게 범한 죄를 사하시는데 어떤 한계를 두거나 제한을 둘 리 없다.

오늘날 과거죄, 현재죄, 원죄, 자범죄라는 개념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그것은 사단이 만든 어휘에 불과하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죄를 구분하지 않으셨고, 죄를 나누지 않으셨다. 거기에는 과거죄나 현재죄나 미래죄가 있을 수 없고, 원죄나 자범죄가 아닌 `모든 죄를 사하셨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다. 바로 물두멍은 우리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이든지, 십자가의 강도나 간음한 여자와 같은 인간일지라도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었으므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면, 우리 양심이 자유를 얻는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혹시 우리가 너무나 큰 죄를 짓고, 양심에 가책을 받아 주님 앞에 돌아오지 못하는 심령이 있을까봐 안타까워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씻는 데는 어떤 제한을 두지 아니하시고, 무한한 능력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는 주님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물두멍의 규격을 정해 두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사하는 데 규격을 정해 주신 적이 없는데, 사단이 원죄니 자범죄니 하는 규격을 만들어 놓고 우리의 마음이 죄에서 해방받지 못하도록 우리를 미혹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24. 죽기를 면함


심령을 바꾸는 복음의 능력


출애굽기 30장 19절을 보면,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여호와 앞에 사를 때에도 그리 할지니라.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 물두멍을 만든 이유가 󰡐�죽기를 면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루는 내 아들이 학교에 다녀와서 내 아내와 이야기하는데, 학교에서 장래 희망이 뭐냐고 묻기에 자기는 조종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왜 조종사가 되려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아버지가 복음 전도로 늘 바쁘시기 때문에 자기는 조종사가 되어서 아버지가 복음 전하러 갈 때마다 비행기로 모셔 드리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 내 속에서는 기쁘고 고마운 마음보다는 󰡐�아들이 복음 전도자가 됐으면󰡑� 하는 바램이 더 강하게 일어났다. 나는 복음 전도를 시작할 때 굉장히 서툴었고, 또 생활도 참 어려웠으며 고통스러운 일도 많이 겪었다. 누가 그 어려움들을 어떻게 이기면서 오늘까지 지내왔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변화되는 것을 볼 때, 그 기쁨이 너무 커서 그 기쁨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고통과 괴로움을 이길 수 있었다고 간증하고 싶다.

나는 그 동안 참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이 복음을 확실하게 받아들인 사람치고 변화를 받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있는 사형수나 살인자, 불량배, 또는 술주정뱅이 등 어떤 사람을 불문하고 이 복음이 마음 속에 들어간 사람은 누구나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 사람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는,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고 이야기하고 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하여 선악과를 따 먹었는데도 구백 삼십세까지 살았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2장 16, 17절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하고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선악과를 따 먹고도 어떻게 그토록 오래 살았는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아담과 하와는 그 몸이 죽은 것이 아니라 그 영이 죽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죄가 들어와서 하나님과 그들 사이를 갈라 놓았고,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아담의 마음으로 흐르는 영적인 것들의 공급이 완전히 두절되었기 때문에 아담은 죽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너희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그런데 우리가 복음을 전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린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하나님과 그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의 담이 허물어지면서, 하나님이 그 마음 속에 영으로 들어오시게 된다. 그 때부터 그 사람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죄에서 해방을 받자마자 정말 놀랍게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전에 하나님을 향하여 그들의 마음이 막혀 있었을 때는, 그들이 범죄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고,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썼어도 마음에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았던 사람들이, 죄를 사함받고 난 후 하나님의 마음이 그 속에 들어오자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변화를 가리켜 󰡐�거듭남󰡑�이라고 말한다.


범죄로 인해 생기는 마음의 담


거듭나기 전 우리가 죄에 매여 있었을 때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마음이 가로막혀 있었다. 그 때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 속에 믿음이나 기쁨이나 소망을 공급하실 수가 없어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했지만, 죄의 장벽만 허물어지고 나면, 우리가 기뻐하거나 감사하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마음 속에서 저절로 감사와 기쁨이 우러나온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백 가지 천 가지 어려운 일이나 실망할 일이 있어도, 기쁘고 감사한 일 하나를 보며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이 없다면, 백 가지 천 가지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일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한 가지 문제나 생각으로 인하여도 불평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듭난 후 설령 하나님 앞에 잘못하거나 범죄하는 일이 있어도 그것 때문에 우리를 버리시거나 죄인으로 취급하시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변치 않는데도 사단은 그러한 부분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속여서 다시 우리가 범죄나 허물로 인한 죄의 가책 속에 빠지도록 만들어 버린다. 󰡒�`아론과 그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구약 시대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제사장 직분을 행할 때 그 물두멍의 물을 떠서 수족을 씻음으로써 그들이 범죄했어도 그들의 육체가 죽지 아니하고 살 수 있었던 것처럼, 거듭난 이후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할 때 사단은 우리가 짓는 그런 죄악들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 놓으려고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을 기억하고 그 공로를 누릴 때  영적으로 죽음을 면할 수 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 살 때, 처음에는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아무런 마음의 장벽이 없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아담 편에서 마음이 닫혔던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한 것을 아셨기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죄의 장벽을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이 모든 인간들을 향해 열리셨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사 44:22)

위의 말씀처럼,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를 향하여 마음의 문을 활짝 여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죄인을 의롭게 봐 주시는가?


`󰡒�우리가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의롭게 봐 주신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잠언 17장 15절에,`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악한 사람을 보고 의롭다고 하는 사람은 미워하시므로, 하나님은 결코 악인을 보고 의롭다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는 악인이지만 의롭다고 간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로 우리 죄가 실제로 깨끗하게 씻어져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볼 만한 눈이 없지만, 하나님은 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계시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 죄가 분명히 씻어진 것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볼 만한 눈이 없고, 우리의 죄가 씻어졌는지 안 씻어졌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우리는 죄를 지은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했다면 그 죄는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보실 수 있는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데, 죄를 볼 수 없는 우리들은 죄가 남아 있다는 사단의 음성에 동의하기 쉬운 것이다.

사단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너는 죄를 지었으니까 죄가 있지 않느냐?󰡑�고 고소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린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했다고 증거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단의 음성을 듣느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느냐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사단의 음성을 듣고 자기는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매일 생활 속에서 죄를 짓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죄를 온전히 씻지 못했다면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는데도, 우리의 어떤 죄가 남아 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정말 무익한 죽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죽기를 면할지니


그래서 성경 66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죄에서 어떻게 해방했는가 하는 사실을 곳곳에서 증거하고 있지만, 눈이 어두워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비밀을 발견하지 못하고 여전히 죄에 매여 있는 것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로마서 1장은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 복음을 듣고 믿게 될 때 비로소 우리 마음에 그 하나님의 의(義)가 임하게 된다.

하늘을 보면 수많은 별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빛의 속도로 100년, 1000년, 몇 만 년씩 달려가야 그 별에 다다르게 될 만큼 먼 거리에 있는 별도 있다. 밤 하늘에 보이는 별이 빛의 속도로 일 년 동안 가는 거리에 있는 별이라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그 별빛은 지금 나온 것이 아니라 일 년 전에 그 별을 떠난 것이다.

만일, 2000 광년(*1광년은 빛의 속도로 1년 동안 가는 거리를 말한다.) 거리에 있는 별을 본다면, 나는 지금 그 별을 보고 있지만 사실은 2000년 전의 별을 지금 보고 있는 것이다. 2000년 전에 그 별을 출발한 빛이 이제 지구에 다다라서 내가 비로소 보는 것처럼,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 죄를 씻었지만, 그 사실이 우리 마음에 도착이 안 되었다면, 나는 죄인이라는 생각 속에 빠져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 사실을 믿게 되면 비로소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의(義)가 임하는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을 향하여 가로막힌 담이 허물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영원한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가 매일매일 고백하거나 노력하여 죄가 사해진다면, 우리가 또 죄를 지을 때는 다시 죄의 장벽으로 가로막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은 우리의 죄를 영원히 씻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실수나 죄를 범했을지라도 그 죄가 나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질 못한다.

아론과 아들들이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하라고 하는 말씀에서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교통되어 우리 속에 영적 생명이 살아 역사하다가도, 우리 마음에 어두움이 오거나 장벽이 생겨서 하나님과 가로막히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영혼이 죽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일일이 고백함으로, 회개함으로 죄가 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내 죄를 사했다는 사실을 믿어야, 우리가 비록 범죄했을지라도 그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그 죄값은 이미 십자가에서 지불되었고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죄가 이미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이 죽지 아니하고 여전히 하나님과 막힘없는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과 능력과 기쁨을 잃지 않고 복된 신앙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범한 뒤 사단에게 속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마음의 장벽을 두고 다시 우리 영혼이 죽음 속에 빠지게 될까봐 염려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막기 위하여 성막에 수족을 씻을 수 있는 물두멍을 준비하신 것처럼, 우리가 거듭난 후에도 종종 범죄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이 생길 것을 미리 아시고, 그리스도의 피가 거듭난 이후의 죄도 이미 해결하셨음을 거듭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지 못할 뿐더러,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힘으로 말미암아 복된 신앙 생활을 하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25. 물두멍의 재료


100% 행위가 아닌 주의 은혜로


출애굽기 38장 8절에 보면,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

라는 말씀이 있다. 이 물두멍은 놋으로 만들었는데, 그 재료는 어디에서 취했는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 회막에는 수종드는 여인들이 있었는데, 그 여인들이 바친 거울을 녹여서 물두멍과 받침을 만들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게 될 때, 사단은 복음에 장애가 되는 많은 것들을 우리 마음에 넣어준다. 복음의 귀한 은혜가 우리 마음에 흐르지 못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린 구속의 보혈로 우리 마음이 죄에서 해방시키지 못하도록 역사한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한 가지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우리가 잘하든 못하든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내가 자동차를 타고 서울에 갔을 때, 나는 운전을 못해서 옆자리에 그냥 앉아 있고, 다른 분이 나를 대신하여 운전을 해 준다면, 내가 운전을 잘하고 못하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운전을 하는 그 사람의 능력에 의해서 내가 서울에 가는 것이므로, 내가 운전을 잘하고 못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운전을 좀 할 줄 아는 사람이든 운전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이든, 운전대를 잡고 운전을 하는 사람이 중요하지, 다른 사람은 중요하지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 생활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은 연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가 노력이나 수고와는 상관없이, 100%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신앙 가운데 잘못된 것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죄를 씻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자신의 행위나 삶도 어떤 수준까지 끌어올린 뒤에 구원을 얻으려는 마음이다.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을 막을 수는 없지만, 우리가 구원의 길로 들어서는 일은 얼마든지 막을 수가 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아니하고 선을 행하려고 하면 사단이 방해를 하여 실패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죄 사함을 얻으려면 100%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바라보아야지, 자신의 선한 행위나 공로에 기대를 두면 자기가 잘못하게 될 때 실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이 뭔가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자기가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기도도 잘 하며, 금식이나 연보도 잘 해야 구원이 이루어져 하늘 나라에 가는 줄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참된 구원의 길이 아니다.

피구원자는 어디까지나 가만히 있고, 구원자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참된 구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그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에 도달하려고 어떤 일을 하려고 할지라도 우리 스스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게 하셨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애를 썼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또한, 죄를 짓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애를 쓰면 쓸수록 점점 더 깊은 죄 속에 빠져드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에 대해서 100% 포기를 하게 되었는데, 󰡐�`나는 정말 악하고 더러운 인간이어서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해도 도저히 안 되는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전까기 나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주님만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주님도 바라보고 내 자신의 행위도 바라보았던 것이다. 이제는 나 자신의 행위를 완전히 포기하고 내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내 마음 속에 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주님 앞에 온전한 믿음이 없는 이유는, 주님만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행위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 속에 언제 온전한 믿음이 생기는가? 자신에 대한 모든 기대와 소망이 끊어졌을 때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 생긴다. 십자가의 강도나 간음한 여자, 38년 된 병자가 나음을 입게 된 경우가 모두 그러했다. 그들 모두가 한결같이 자기 자신에 대한 소망이 없었고, 자기 자신이 잘해봐야 무익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주님의 역사를 맛보았던 것이다.


자기의 노력을 포기해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역사를 간구하지만, 그들 속에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을 의지해도 100%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이 자신 속에 역사하실 수가 없는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맏아들은 자기가 열심히 했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입지 못한 반면에, 둘째 아들은 자기의 모든 것이 포기된 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 큰 은혜를 입었다.

둘째 아들은 집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기 전에 돈을 많이 벌어서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만일 둘째 아들의 마음에 있었던 그대로만 되었다면,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아버지의 사랑을 입을 수 있었던 것은, 부자가 되거나 잘 되어서 아버지 앞에 떳떳하게 나아가려고 했던 모든 것이 포기되고 거지가 된 상태로, 더러운 모습 그대로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다만 아버지의 긍휼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태도를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어도 자기가 뭔가 잘해서 떳떳하게 나아가려고 하고, 자기가 좀 잘못하면 나아가기 싫어하는 마음이 있다. 우리가 선을 행하지 못하고 잘못했을 때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좀더 노력하면 잘 할 수 있다고 여겨 좀더 잘해서 나아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추하고 연약한 가운데 있을지라도 스스로 잘 하려는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지 말고, 추하고 악한 모습 그대로 나아오기를 바라신다.

어느 누구나 자기가 추하고 악하면 좀 좋아진 다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지, 더러운 모습 그대로 나아가려고 하는 마음이 없다. 그러면 누가 악하고 추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가? 자기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해도 형편이 좋아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만이 악하고 더러운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좀더 노력하면 선해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미루고 있다. 언젠가는 그들 마음 속에 있는 죄를 해결받기를 원하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미루고 있는 이유는 자기가 노력하면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은 비록 연보하지 못해도 앞으로 큰 부자가 되면 예배당도 짓고 하나님 앞에 물질로 크게 봉사하겠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결국 자기가 잘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큰 부자가 되어 연보하는 것도 좋겠지만, 하나님은 부족한 모습 그대로 나아오는 것을 원하신다. 왜냐 하면 그 사람은 이미 자기가 포기되어서 자만심도 없고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는 이 귀한 구원의 은혜는, 자기 자신이 포기되어진 자에게 임하는데,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더 좋아진 다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거울이 드려져서 물두멍으로


모세는 오홀리압과 브살렐을 통해서 성막을 짓게 했는데, 그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재물을 가져왔다.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나무나 보석 등 여러 가지 재물을 드려서 성막이 지어지고 있었는데, 그때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회막에서 수종드는 가난한 여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회막에서 수종을 들고 여러 가지 뒷일을 돌보고 있었는데, 이 여인들은 다른 여자들처럼 화려한 여인들이 아니었다. 대부분 과부이거나 어렵게 사는 사람들로서 자기 몸을 다 바쳐 회막에 와서 봉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은 귀한 보석이나 가진 재물이 없었기 때문에, 성막이 세워지는 귀한 일에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생각다 못해서 자기 집에 돌아와서 두리번 두리번 살펴보았지만, 그들이 드릴 수 있는 것은 회막에 나갈 때 자기 얼굴을 보고 머리를 빗을 때 쓰던 거울뿐이었다. 많은 여인들이 회막에서 수종을 들고 있었는데, 한 여인이 거울을 바치자 다른 여인들도 전부 다 거울을 바쳤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꾸미는 데 꼭 필요하고 귀중한 그 거울을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성막 짓는 일을 하는 오홀리압과 브살렐은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을 따로 모아 놓았다가 그것을 녹여서 물두멍을 만들었다.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은 날마다 자기의 잘못된 부분이나 허물을 보기 위해서 거울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거울을 하나님 앞에 바쳤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의 잘못된 점이나 허물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는 그 거울이 드려져서 제사장들의 수족을 씻는 물두멍이 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깊은 비밀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제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은 자기가 자기 모습을 쳐다보며 허물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그 거울은 하나님 앞에 드려져서 제사장들이 수족을 씻고 죽기를 면하게 되는 물두멍이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허물을 보면서 일일이 주님 앞에 고백하며 자신을 다듬던 삶에서 벗어나게 되면 󰡐�물두멍에서󰡑� 우리의 죄가 씻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죄가 많든 적든, 크든 작든 모든 죄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졌다는 사실을 물두멍이 가르쳐주는 것이다.

오늘날도 물두멍의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마치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이 하나님 앞에 거울을 드리기 전까지는 자기의 허물을 보며 그 허물 속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자신의 허물을 보고 그 속에 빠져서 낙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얼굴에 때가 있으면 물로 씻어야 하겠지만, 우리 심령의 죄는 매일매일 들여다 본다고 해서 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죄는 이미 2000년 전에 흘린 그리스도의 피로 해결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을 영원히 온전케 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눈을 돌려서 십자가를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은 하나님 앞에 거울을 드리기 전에 그 거울을 드릴 것인가, 말 것인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런데 일단 거울을 드린 후에는 더 이상 자기의 허물을 볼 수 없다. 이제는 우리가 일일이 허물을 고백하고 고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 죄가 이미 씻어진 사실을 깨우쳐 주는 것이 바로 물두멍인 것이다.

오늘날 사단이 그리스도인들을 약하게 만드는 방법 가운데 한 가지는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짓는 죄 속에 빠져서 탄식하며 그것을 고치려고 애를 쓰게 하는 것이다. 나는 거듭나기 전에 죄악된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죄악된 삶을 고쳐보려고 애를 쓰고 각오도 했지만, 그렇게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깊은 죄악 속에 빠져드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날마다 죄를 짓는 나 자신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나의 모든 죄를 씻어 놓은 사실을 믿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내 마음 속에 있던 죄가 씻어지고 난 뒤부터 내 생활이 달라지게 되었다. 옛날에는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담배를 피우지 않으려고, 나쁜 짓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어도 잘 안 되었는데, 이제는 그 삶과 전혀 다른 거룩한 삶으로 달라져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이 거울을 하나님 앞에 바쳤던 것처럼,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는 눈을 돌려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사단은,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날마다 허물 많은 자신을 바라보도록 한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나무 그늘에 숨었듯이, 자신의 허물진 모습을 보고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지 못하고 어두움 가운데 머물러 있게 한다. 우리가 사단의 뀜에 빠져 어두운 삶을 살게 된다면, 사단은 우리를 자기의 도구로 삼기에 너무나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잘한 것이나 못한 것, 선한 것이나 악한 것 등을 바라보지 말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죄를 적게 지으려고 애를 써야 하는 것이 아니다. 눈과 같이 희게 우리 죄를 씻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나를 깨끗하게 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써만 의(義)의 위치에 설 수 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선해지려고 노력하고, 지은 죄를 회개하며 괴로워한다고 해서 의(義)의 위치에 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회막 안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은 자기의 거울을 가지고 있지 않다. 비록 그들이 거울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 거울이 물두멍이 되자 제사장들이 스스로의 허물을 보지 않은 채 가서 수족을 씻을 때 깨끗함을 입었다. 그처럼 이제 우리도 자신의 허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누구든지 지금이라도 자신을 바라보면 좌절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본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담력을 얻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진정한 신앙은 자기가 잘 하려고 노력하며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회막에서 수종들던 여인들이 자기의 모습을 비추어 보던 거울을 제단에 바쳤을 때 그 거울이 녹여져서 물두멍이 된 것처럼,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감기고 우리를 온전케 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화할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3장 20절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0, 21)

회막에서 수종들던 여인들은 더 이상 자신의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고 괴로워한 것이 아니라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었던 것처럼, 우리도 자신의 못나고 추하고 악한 부분을 보고 실망할 것이 아니라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써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못나고 추하고 악한 자신을 바라보고 낙심하고 실망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변케 하실 주님을 바라보고, 변화될 그 몸을 바라보고 거기에 기대와 소망을 가질 때 우리가 그와 같이 변화되어가는 것이다.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은 하나님께 드려졌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의 모습을 볼 수 없듯이, 성경은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지 말고, 자기를 바꾸시고 변케 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요셉은 애굽에서 종노릇하며 감옥에 있었지만, 그 마음은 항상 자기를 치리자로 바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고 있었지만, 늘 하나님의 약속대로 왕이 될 것을 바라보고 있었듯이, 추하고 연약한 육신을 바라보지 말고 장차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되어질 모습을 바라보면서, 거기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다.



26. 그리스도인들의 양면성


죄에서 벗어나려면


물두멍은 제사장들의 수족을 씻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수족을 씻는다는 것은 제사장들이 손발을 움직이는 동안에 더러워진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만일 제사를 드릴 때에 제사장들의 수족이 더러워지지 않는다면 수족을 씻을 필요도 없고 물두멍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는데, 그때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어도 족하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목욕하고 난 뒤 발이 더러워지지 않는다면 다시 발을 씻어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수족을 씻는다󰡑�는 것은, 성도들이 살아가면서 범죄하거나 실수하거나 더러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죄 사함을 받은 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를 범치 않고 온전하게 살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온전하게 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죄 속에 더 깊이 빠져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자기가 무엇을 잘 하려고 할 때는 주님이 도우실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죄 사함을 받은 후 어쩌다가 범죄했을 때에, 사단은 즉각 우리 마음 속에 `󰡐�거듭난 사람이 이런 죄를 지으면 되겠느냐?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더욱 노력을 해라. 조심해라.󰡑�고 속삭인다. 그것이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리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죄를 짓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이 되고, 그러다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 속에 살아 역사하시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마음 가운데 거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깊은 죄 속에 빠져 있다 할지라도, 죄 사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영이 그 안에 거하신다면 그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죄를 짓게 될 때, 우리가 괴로워하면서 거기서 벗어나려고 애를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주님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바라보게 되면 죄를 짓고 싶어하는 생각을 예수님의 마음이 이겨주신다. 그렇게 될 때 우리 마음 속에서 악한 생각이 죽어버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게 되고 예수님의 인도를 받게 된다.

비록 죄를 지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주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 나가야 하는데도, 사단은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집착하게 만든다. 죄에 대한 가책을 느끼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지.󰡑� 하는 각오와 결심을 하게 되면, 그 결심이 강하게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예수님을 기억할 수 없게 된다.

주님에 대한 생각이 우리 마음에 가득차게 되면,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죄의 유혹도 이기게 해 주시며, 사단의 시험이나 환난을 이기게 해 주신다. 그러면 죄를 짓지 않으려고 각오를 하지 않을지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죄에서 멀어지는 삶을 살게 된다. 난로와 가까이 하게 되면 따뜻해지고 난로와 멀어지면 추워지듯이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생각이 가까워지면 자연히 우리는 죄와 세상의 유혹에서 멀어진다.


주의 영광을 보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굉장히 놀라운 말씀을 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7, 18)

즉, 우리가 주님과 같이 영광스러운 현상으로 변하는 까닭은 거울로 내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의 영광을 보기 때문이다.

놋은 심판을 나타내는데,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이 여태까지 그 놋거울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는 것은 심판 위에 자기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이 거울을 볼 때마다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여 자기를 고치려고 애를 써왔던 것처럼, 우리 모습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심판을 피할 수 없는 허물과 죄가 나타나기 때문에 근심하고 괴로워하며 낙심할 수밖에 없다.

고린도 후서 3장 18절에서 말하기를, 지금까지 우리는 거울로 보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보아왔는데, 이제는 거울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의 영광을 바라봄으로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참된 신앙은 `󰡐�내가 또 죄를 지었구나. `내가 또 거짓말을 했구나. `내가 또 성경을 못 읽었구나. `내가 또 기도를 못했구나.󰡑� 하면서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변케 하실 능력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분께 기대와 소망을 두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목회를 해 오면서 시험이나 죄 속에 빠져 고통하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이고, 늘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송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주를 바라보는 사람들임을 보아왔다.

성경에 보면, 베드로의 양면성이 잘 나타나 있다. 한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계집종 앞에서도 주님을 저주했던 베드로이지만, 한편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하루에 삼천 명이 구원받는 베드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예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가 하면, 또 다른 면으로는 술에 취하여 벌거벗고 장막에서 자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아가는 아브라함을 볼 수 있는가 하면, 반대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또 계집종과 동침해서 불의의 씨를 낳는 아브라함도 볼 수 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 이러한 양면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인간적인 면을 볼 때는 한결같이 더럽고 가증스러운 사람들이지만, 반대로 그들 속에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볼 때는 너무나 놀랍고 귀한 것이다. 그처럼 오늘날의 신앙인들도 모두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주님께 사로잡혀 그리스도의 빛을 발할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자기의 생각에 사로잡혀 너무 추하고 가증스러운 모습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양면성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다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바라보면 너무 추하고 부족하지만, 그러한 인간을 거룩케 하여서 하나님의 나라에 앉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자로 바꾸시는 주님을 볼 때에는 소망과 용기가 생긴다.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은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들이 자신을 바라보던 거울을 전부 다 녹여서 물두멍을 만들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 모두는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우리를 온전케 하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 날에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원히 거룩케 하실 그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나아가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위치에서도 주님께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으며, 주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릴 수 있다. 어떤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이 드린 거울은 다시는 그들의 손에 들리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도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감기워지고, 우리를 온전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눈이 뜨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참 귀한 삶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는 이제 옛날의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 이상 죄악 속에 빠졌던 옛날의 우리를 바라보지 말고 우리를 바꾸시고 새롭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 날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변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악을 이길 뿐더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이길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왕의 자리에 앉아서 영원히 다스리게 될 것이다. 참된 신앙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이 자신들을 들여다보는 거울을 녹여서 물두멍을 만들었던 것처럼,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돌려서 물두멍, 즉 십자가에서 우리를 영원히 깨끗케 하신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바라보면서 자기 허물에 얽매이지 말고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기를 주님은 원하신다.

우리가 실수하거나 어떤 죄를 범했을 때,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 16)

고 성경은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좌절과 두려움, 가책 속에 빠지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오게 되기를 원하신다.

거듭난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든지, 현재 어떠한 모습이든지 간에 그는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치리자로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요셉이 감옥에 있든지 종으로 있든지 그는 결국 치리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삼으시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다윗은 잘했든 못했든 결국 왕이 되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만드시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그 날에 그리스도와 같이 변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내 자신의 모습에 집착하지 말고 그 날에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입게 될 영광스러운 그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담력을 얻게 될 것이다. 그 믿음으로 담대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란다.



--- 끝 ---

 

 
출처 : 성막 황금의집
글쓴이 : 조각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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