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 보혜사 하나님!!

[스크랩] 도널드 메크레오드(스코틀랜드 개혁주의 교회)의 성령론

하나님아들 2012. 9. 5. 14:06

도널드 메크레오드의 성령론에 관해 쓴 글이 있어서 옮겨 왔습니다. 이분이 성령론을 어떤 견해의 이해 속에 있었는지와 함께 먼저 소개한 다른 분들의 성령론과도 비교해 볼 수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바라기는, 성령론에 대하여 가져온 다양한 견해 속에서 지금의 우리들이 가져야 성령론에 대한 이해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성경(또는 성경신학)의 관점에서 더 공부하고 연구하여서 성령론의 바른 이해 속에 있을 수 있도록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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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널드 메크레오드의 성령론


<저자 이해>

   도널드 메크레오드의 이름은 매우 생소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는 매우 저명한 학자이며 특별히 스코틀랜드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매우 영향력 있는 조직신학자이다.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우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78년부터 에든버러에 위치한 프리처치 대학[Free Church College]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 중에 있다.

   도널드 메크레오드의 성령론을 살펴보는 것은 스코틀랜드 개혁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성령론에 대한 입장이다. 로이드 존스는 누구보다도 프리처치 교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프리처치 교단은 청교도 개혁주의를 지금도 이어가고 있는 중요한 교단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크레오드의 입장은 영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성령론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에 대한 메크레오드의 입장은 단순히 한 개인의 입장보다도 영국 개혁교회가 견지하고 있는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다.



1. 성령 세례는 회심과 구별되는 특별한 경험인가?

    오순절 신학에 있어서 성령 세례는 회심과 구별되는 경험이란 신념은 오순절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교리이다. 그리고 이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오순절 교리를 받아들인다. 1) 메크레오드는 성령의 인침은 성령의 내주 자체를 말하고 있으며, 세례를 받는 것과 충만하게 되는 것 그리고 성령을 받거나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도록 하는 것 사이에는 엄격한 구별이 없다고 보고 있다. 특별히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언제나 의식할 수 있는 것이며, 경험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음을 지적한다.

    첫째 성령 세례가 언제나 의식할 수 있는 경험이라는 사실을 사도행전으로부터 추론해내는 것이 타당하다면, 회심 역시 의식적이고 기억될 만한 것을 당연히 추론해 낼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2)

    둘째로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제2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에 대해서는 거의 말해주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시대가 있었으며, 또한 뒤이어 오는 모든 시대와 구별되는 사도들의 시대가 있었다. 또한 다른 모든 날과 구별되는 오순절 날이 있었다. 사도행전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초기 시대에 관한 것으로 그것들과 연관된 경험들은 필수적으로 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2세대의 관해서는 그러한 극적인 모습이 없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과 성직자들이 초대 교회 성도와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이들의 성도됨을 의심해야 할 수 는 없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이러한 경험 없는 이들도 하나님의 자녀임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음을 본다.

    메크레오드는 이러한 예로 어머니 모태에서 성령으로 충만했던 세례 요한의 경험을 든다. 그것은 분명히 의식적이고 기억될 만한 경험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디모데의 경우이다. 그 역시 극적인 회심을 기록하고 있지 않았지만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알고 있었다.(딤후3:15),3) 결국 이러한 경험이 없다고 성도됨을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 번째, 확신의 근거에 대한 신약의 태도이다. 영혼이 스스로 자기의 신앙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뿐만 아니라 성령이 우리의 자녀 됨을 증거하는 일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13:5)고 말함으로써, 자기 성찰을 통해 확인을 분명하게 지시하고 있다. 만일 회심이 극적이거나 기억될 만한 경험이라고 한다면, 확인을 위한 자기 성찰이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자기 성찰이 지향하는 것은 어떤 극적인 것이 아니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극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네 번째, 왕국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특별히 천국을 씨(a seed)에 비교하신 주님의 비유이다. 주님께서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각 개인이 천국을 보고, 들어가며, 또 천국을 받아들일 때, 그가 경험하는 것이 크게 다를 수는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모르는 채, 천국을 받아들인다.4)

    마지막으로,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양육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잠언 22:6, 시78:5) 신약 시대의 초기에도 같은 상황이 일어났다. 즉 사도들과 그들 세대의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의 경험과 비교할 만한 극적인 일을 겪었지만, 그들의 후손들은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렀다. 그들의 경험은 아브라함보다는 사무엘의 경험과 더 가깝다.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그 믿음이 어떻게 발전되어졌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믿음이 실제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끌었는가 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무관한, 믿음의 생생한 정도 자체가 중요시 될 수는 없다.(요일5:12)5)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영적 체험이나 영적 성장에 극적인 요소나 감격적인 요소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거기에는 오히려 더 깊고 높은 체험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삶은 이것의 본보기이다. 성령 세례에 대한 특별한 견해를 부인하는 것이 이런 경험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런 경험들이 성령 세례라고 말하는 주장을 부인할 뿐이다. 그것은 또한 영적 체험의 진위 여부를 단지 그 체험의 깊이와 강렬함으로 평가하려는 주장도 부인한다.6)

2. 성령 세례

  1) 성령 받음과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

    메크레오드는 성경에서 성령 세례라는 말은 신약 성경에 없다고 언급한다. 다만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에 대하여 3번 언급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마3:11,행1:5,고전12:13) 그렇다고 교리의 중요성이 결코 성경에 나타난 빈도수에 따라 측정된다고 말할 수 없음도 분명히 하고 있다.

    성령 세례는 성령이 믿는 자들 안에 주거를 정하게 됨으로 해서 생겨나는 초기의 중요한 몇 가지 경험들 중의 하나이다. 이들 문제의 핵심은 성령 세례와 중생 및 회심과의 관계에 있다. 오순절주의자의 신학은 그 두 가지가 분명히 다르다고 주장하는데, 즉 성령 세례는 흔히 회심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며 따라서 사람이 거듭났다 하더라도 아직 성령 세례를 받지 않을 수가 있으며, 실제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이 축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1)

    그러나 이 교리에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한 난점은 신약 성경에서 사용된 용어에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는 일’과 ‘성령을 받는 일’을 분명하게 구별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단어들은 서로 교체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다. (사도행전 2:4) 또한 별개의 경험이라고 말할 수가 없게 된다. 다른 한편, 같은 경험으로 사도행전 1:8, 2:38이 기술되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메크레오드는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 성령을 받는 것,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 그리고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는 것은 마찬가지의 경험이라고 보고 있다.2)

    또한 성령 세례의 용어상의 문제 외에도 신약에는 모든 믿는 자들이 성령 세례를 경험하였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있다. 우선 첫째로, 성령의 은사의 보편성은 요엘의 예언(2:28~32)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즉 모든 믿는 자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행2:4). 베드로의 설교를 통한 3,000여 명의 회개자들에 대한 경험의 묘사도 분명 이것과 일치한다. 그는 자신의 메시지에 응답하는 자들은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행2:38). 그러나 그는 이것을 구원에 대한 기본적인 경험에 부수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성령의 선물은 회심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인 결과라고 말하였다. 즉,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은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성령 안에서 세례 받는 상태는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결론지어도 좋을 것이다.(행2:41) 죄를 뉘우치는 모든 이와 용서받은 죄인들은 성령 세례를 받았다.3)

    메클레오드는 고린도전서12:13도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이에 대한 문법적 표현은 행1:5절과 같다.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는다기보다는 성령에 의하여 세례 받는 것이다. 바울이 성령으로 세례 받는다는 생각을 표현하기를 원했다면, 그는 전치사 엔(in)을 사용하기보다는 휘포(by)를 사용함으로써 모호하지 않게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하였더라면 그는 신약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는 어떤 새로운 것을 말한 셈이 된다. 그러나 성경 구절들의 한결같은 교훈은 세례를 주신 분이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다. (마3:11, 행2:23,행1:4)4)

    성령 그 자신은 세례를 주지 못한다.5) 그는 우리가 그 안에서 또는 그로 인해 세례를 받게 되는 존재이다. 그렇지 않다면 성령 세례와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을 대조 할 수 없게 되며, 성령 세례와 불세례를 관련지을 수 가 없을 것이다.

    이 세례의 목적은 바울이 규정한 대로 “한 몸이 되기 위한”것이다. 그는 전치사를 관용적으로 사용하여, 즉 “…하기 위하여”라는 의미로 썼다. 이것은 분명 성령 세례가 소수의 사람들의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엘리트주의자들의 해석을 거부하는 것이다. 모든 믿는 자들은 한 몸의 지체들이며 그런 자들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성령으로 흠뻑 젖은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이들은 한 몸으로 기능하기에 적합한 영적 선물을 가지게 되어 아무도 우월하게 느끼는 자가 없으며 또한 아무도 열등하게 느끼는 자가 없게 되며, 더 나아가 아무도 지나치게 많이 받는 자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상호 연관성과 의존성에 대한 인식에 있어 만일 한 몸이, 어떤 이는 성령 세례를 받고 어떤 이는 성령 세례를 받지 않았음으로 해서 구별 지어져 나누어질 경우가 생긴다면, 바울의 논증이 계속 유지되기가 어려울 것이다. 바울은 몸 가운데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분명 피하고자 했을 것이다.(고전12:25)6)

  2) 신학적 논쟁

    이것은 신학적인 면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메크레오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중생은 하였으나 아직 성령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주장은 해석상의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신학적인 면에서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 그런데 성령과의 연합이 없이도 이것이 가능할 수 있다고 인식하는 것은 역사적인 삼위일체 신학과 모순 된다는 것이다.(요14:10,18,고전3:7)1) 이것은 신성의 공동의 속성 교리에 어긋난다. 어떤 식으로든, 아들이 아버지 없이 존재한다거나 성령이 아들과 불호한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만일 이 공동의 속성에 관한 교리가 사실이라면, 성령과 아버지와 아들이 따로따로 성도와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 아들 안에서 충만하게 되는 것은 성령 안에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는 것은 동시에 우리의 속 사람에 그분의 성령이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에게 충만하게 하시는 것이다.(엡3:16~19) 이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과 영적 교제를 갖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우리가 그분이 가지신 모든 것 안에서 충만함을 나누어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의 가장 귀한 선물들은 성령의 충만함과 성령의 내재이다. 오순절주의자의 주장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아직은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을 공유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2)

    메크레오드는 또한 믿음에 대하여 신약이 밝히는 것은 신약성경은 성령 세례가 구원의 일부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신약은 믿음과 성령의 선물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맹백히 주장하고 있다.(갈3:2,엡1:13) 특별히 갈3:14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았음을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이 흥미를 끄는 것은 성령과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성령의 선물은 아브라함과의 계약에서 약속된 축복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믿음은 약속된 성령을 선물로 받게 해준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지 못하는 믿음이란 있을 수 없다. 믿음이 없다면 성령도 받지 못할 것이고, 믿음이 있다면 성령을 받을 것이다.(골2:10)

    또한 그리스도인의 섬김에 있어서 일부의 그리스도인만이 성령 충만 받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메크레오드는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중생을 하였으나 섬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 조화 할 수 없으며 신약 신학의 곡해이다.(마5:13,롬6:18,갈5:22이하, 벧전2:9,히4:14,빌2;16,벧전3;15,행1:8)3)

    뿐만 아니라 사도들 역시 교회에 보낸 서신들을 통하여 성령세례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지 않다. 결국 이러한 논증을 통하여 결론을 내리는 것은 성령 세례는 구원에 관한 기독교 교리에 있어 절대적으로 근본적이 요소이다. 성령 세례의 경험은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게 만들며, 그것 없이는 전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우리는 그분의 충만함 가운데 성령을 받게 됨으로써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하고 말할 수 있다.4)

3. 성령 세례를 주장하는 신약적 증거에 대한 논증

    메크레오드는 오순절 주의가 가지고 있는 성경 해석과 신학적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신약 성경의 증거로 자신들의 관점을 내세우고 있는 점에 대하여 신중하게 검토하고 논증하고 있다.

  1) 그리스도의 세례가 성령의 이중 경험의 증거이다.

    리그스(Ralph M. Riggs)는 성령의 이중 경험의 증거로서 이것을 인용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야 가장 역동적인 사역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다음의 문제를 인식하여야 한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경험을 죄인 된 인간의 경험과 직접 관련시키는 것에는 늘 위험이 따른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성령 세례와 중생의 관계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주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중생을 경험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두 번째, 주께서 세례를 받기 전에는 성령으로 충만해 있지 않았다고 믿기는 어렵다. 세 번째, 현대 학자들은 공적 사역의 시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분의 세례 받음으로써 시작되지 않았다. 이러한 결론에 따라 메크레오드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세례는 이제 막 시작하려고 하는 그의 사역의 새로운 국면으로의 전이를 나타내주는 것이었으며 그에게는 이중의 위로가 주어졌다. 첫 번째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의 아버지의 사랑과 도움, 그리고 인정을 확신하였다. 두 번째, 성령이 그와 함께 계시어 그에게 머물러 계셨다. 하강하는 비둘기는 그리스도가 왕국을 시작할 과업을 짊어졌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올 시대에 대한 권능을 갖추었다는 신성한 증거였다.1)

  2) 오순절 이전 이후의 제자들의 상태가 성령 세례의 증거이다.

    이러한 제자들의 상태에 대하여 리그스와 앤드류 머레이는 성령에 대한 이중적 경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결코 일반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있었던 커다란 이유는, 그들의 제자 됨이 두 세대를 걸친 것이었으며 완전히 독특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초기 시대에 그들은 구약 시대의 계약의 특권에 대해서만 알았을 뿐이며,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한”(요7:39)시대에 살고 있었다. 그 시대가 계속되는 한 새로운 계약으로 인한 성령 세례는 그들이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순절은 새로운 시대로 가기 위해 한 번 건너가야 할 문지방과 같은 것이었다. 여기서 강조한 점은 오직 한 번만의 필요성이다. 오늘날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경험은 그 사건의 장엄함을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구속의 역사에 있어 결정적인 순간의 하나였으며 십자가에 못 박음, 부활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과 비견될 만한 것이었다. 오순절은 준비의 시대에서 성취의 시대로 가는 전환점이 되었다

    따라서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적인 체험을 검토할 때, 우리는 특별한 존재인 사도들을 검토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오히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3000명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있어서는, 회심과 성령 세례가 뚜렷하게 구별되어 나타나지 않는다.2)

  3) 사마리아인에 대한 모습이 성령 세례의 증거이다.(행8:12)

    이 문제에 대한 논점에 대하여 사마리아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직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한과 베드로의 전도를 통해 그들이 경험한 것은 성령에 대한 두 번째 경험이 아닌 최초의 경험이었다. 성경은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말 대신에 그들이 빌립을 믿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빌립이 설교한 메시지를 따랐다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 문제에 있어서 적어도 그들 중 한 사람(마술사 시몬)은 더욱 그렇다.(행8:212-23)

    설사 이들이 순수한 제자들이었다고 우리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행:14), 그리고 그들이 성령에 대한 2단계의 경험을 가졌다고 우리가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들의 경험이 일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어렵다. 그들의 입장은 오순절에 제자들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것이었다. 복음은 처음으로 유대 사상의 영역을 넘어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변화는 오순절 사건 만큼 중요성을 갖지는 않는다. 단지 그곳에서 일어난 일은 구원에 이르는 정상적인 단계의 첫 출발이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인들에게 찾아가 성령 세례를 받도록 한 것은 당시의 초대 기독교회가 유대교로부터 독립되어 나와야 하는 특별한 필요성에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을, 성령 세례를 구별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3)

  3) 사울의 회심 사건이 성령 세례의 증거이다.

    오순절 신학은 사도바울의 예를 들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하였고 이어 아나니아를 만나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본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 메크레오드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사실상 회심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몇 가지 요소들이 그렇지 않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바울은 압도당한 채 땅에 엎드려 주님을 경외하는 일에 대한 묘사만을 나타낼 분이다. 주님의 말씀만을 기다려야 할 뿐이라는 것이다. 바울에게 나타난 복음의 첫 징조는 아나니아의 말 속에 나타나게 되었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이 순간, 즉 사울이 다시 보게 되었을 때는 분명 회심의 순간이었으며 또한 그가 성령 세례를 받은 때였던 것이다.4)

  4) 고넬료의 회심의 경우가 성령세례 받음의 증거이다.

    고넬료는 참 신자였고, 경건한 자였지만 당시 유대교로부터 완전히 기독교로 개종한 상태는 아니었다. 문제는 어떻게 해서 그러한 사람이 성령 세례의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는가에 있다. 그 대답은 분명 그는 그리스도의 나라 이전의 구약의 신자였으며, 그리스도의 나라가 도래했을 때 그리스도를 새로이 마주 대해야 했으며 그때 그분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 처해 있었던 상황에 있었다. 고넬료나 제자들은 모두 성령 세례가 임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를 대면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성령 세례와 구세주에 대한 인식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았다. 어쨌든 고넬료는 오순절이 가까워 오던 때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으며, 그가 말씀을 받아들이는 순간 성령이 그에게 내렸다. 사도들은 그들에게 성령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처음으로 방언을 통해 이방인의 구원을 가시적으로 증명했던 것이다.5)

  5) 에베소서의 제자들은 성령 세례 받음의 증거이다.

    에베소 제자들의 관한 내용은 행19:1-6절의 기록이다. 이 본문은 오순절주의에서 자신의 논증을 증명하기 위하여 제시하는 대표적인 본문이다. 그러나 본문은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정말 필요한 본문이다. 메크레오드는 이 본문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혀 성령에 대한 경험을 하지 못했다. 사실상 그들은 성령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더욱더 이상한 일은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전혀 들어보지 못했기에, 바울은 세례 요한이 그들에게 말한 대로,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야만 한다고 끈기 있게 말해야 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리스도께 회심한 것이 아니라 요한에게 회심하였으며, 따라서 그들이 받았던 세례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도래하기 전의 ‘죄 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였다. 그들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제자 됨은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함으로 시작되었으며, 성령의 시례 역시 그때 즉시로 뒤따르게 되었다.”6)

    이와 같은 논증을 통하여 볼 때 성령 세례는 자연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첫 단계에 해당하는 신성한 사역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4. 성령의 인침

    성령의 인침에 대한 로이드 존스의 견해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는 성령의 인침은 회심에 뒤따르는 어떤 것이지만, 그것이 없이도 그리스도인은 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기 위해 그의 권위를 내걸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특별히 엡1:13절의 말씀이 그 증거본문이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after that ye believed)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로이드 존스 박사는 “믿게 된 이후에”라는 구절의 동사가 과거시제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애써서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그 시제는 부정시제로서 부정 과거를 단순 과거로 너무 단순화시킨 것이다. 헬라어의 시제들은 우선적으로 행위(과거, 현재 또는 미래)의 시간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고 행위의 상태(완료, 미완료, 부정)와 관계가 있다. 부정 과거는 불명확한 행위를 지시하는 시제이다. 결국 믿음은 인침 이전에 오는 것이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 사이에 어떤 간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1)

    그러나 로이드 존스 박사의 해석은 구문상 지지를 받지 못한다. 에베소서의 전체적인 내용은 하나님께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셨다는 1:3의 구절에 의해 좌우된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의 기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며, 그분 안에 있게 될 가능성은 있으나 아직 인 치심을 받지 않았다는 암시를 찾아볼 수가 없다. 성령은 다른 이들에 비해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월등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믿는 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약속으로 말미암아 주어지게 되며 그 이유는 그들이 단지 믿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인침은 소유권의 표시이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소유물임을 입증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들만이 그렇게 입증된다. 그렇다면 그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2)

    성령 세례는 성령이 주신 세례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아서 이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인침은 성령이 주시는 인침이 아니라 그 인침은 바로 성령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안주하심을 즐기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증거 하게 된다. 만일 성령을 결여한 자는 그분을 증거 하지 못하게 된다.3)

5. 성령의 은사

  1) 성령의 은사에 대한 전통적 이해

    성령의 은사에 대한 논증이 오순절 주의와 개혁교회에 대한 좋은 기준이 될 수 있다. 오순절은 성령 세례의 증거로 성령의 은사 특별히 방언을 갖게 되는 것을 강조한다. 이에 대한 개혁교회는 기적의 은사들은 사도들의 시대와 함께 끝났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다. 이 운동에 대한 성경적인 반응은 다음의 두 가지 근본적인 사항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한다. 첫째로, 성령의 어떤 은사는 멈추어졌다는 것과 두 번째로, 오늘날에도 교회는 완전한 성령의 은사 아래 남아 있다는 것에 대해서이다

    오순절주의자의 입장은 사도 시대의 교회들에 나타났던 그와 똑같은 상황이 영속되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의 자질은 결코 반복될 수 없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는 사도들이 결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으며, 뿐만 아니라 후계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격 요건에 대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그들은 복음 전도자들을 위한 새로운 교회의 기초를 닦아 놓았으며 목사와 교사들에게 돌볼 교회를 남겨주는 일에 만족하였다. 결국 사도 시대는 터를 잡는 기간이었음을 시약에서 빠뜨려서는 안 된다.4)

  
(1) 예언

     우리는 사실상 예언의 은사가 멈추어졌다는 사실을 확신 있게 주장할 수 있다. 선지자들은 계시를 말하는 자들이고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마음을 알려 주시고는, 그들에게 그분의 대변자로서의 권한을 주셨다. 그 계시는 예언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명령이었으며, 또한 때로는 다양한 논제와 다양한 교리, 권고의 말 그리고 말세에 관한 하나님의 마음을 복잡하게 드러낸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을 현대 설교에 비추어 보면 예언이 사도 시대 이후는 계속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그 이유이다.5)

     첫째로, 사도의 자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예언은 터를 이루는 것이다.(엡2:2-20) 그러므로 터가 이루어지면 그 소임은 끝나는 것이다. 두 번째, 신약 자체 내에서도 예언적인 임무의 재회복은 단지 일시적인 것이라는 증거가 있다.(고전12장-14장). 세 번째, 계시적인 성격의 예언 사역은 정경의 발전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정경이 충분하지 못할 때, 교회는 다른 방법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접근해야 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예언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정경이 완전한 때에는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은 성경 속에서 찾을 수 있으며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대로 성경으로부터 필요한 결론을 얻어낼 수 있다. 여전히 예언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이 불충분하고 불완전하므로 보충되어질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6) 

    (2) 방언

     방언 역시 은사주의자들의 모든 주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은사가 사도들과 함께 끝이 났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부인할 수 없다. 이 은사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이 은사에 대한 주장이 1세기와 19세기 사이에는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에 관한 주장은 산발적이고 국한된 것이었으며 아직도 미해결 중에 있다.(1세기의 교부인 아다나시우스,어거스틴,버나드,크리소스톰과 개혁자들인 루터, 칼빈,쯔빙글리,녹스, 그리고 워필드,스펄젼,로이드존스등)7)

     오순절주의자의 견해에 심하게 반대하게 되는 또 다른 사실은 방언의 은사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 확신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즉 사도 시대 이후의 방언의 불확실성을 갖게 되는 데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이다. 첫째로, 사도행전 2장에 서술된 현상은 고린도전서 14장에 서술된 것과 같다고 볼 수가 없다. 두 번째, 방언의 본질 그 자체에 따르는 불확실성이다. 즉 신약에 나타난 방언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도 일치점을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오순절주의자의 집회에서도 방언에 대한 일치된 견해를 찾아보기가 어렵다.8)

     메크레오드는 이에 대하여 지금 당장 방언을 규정하는 문제는 중요하지가 않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주시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신약의 학자들과 오순절주의자들 중에서 방언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치점을 찾아볼 수 없으며, 그것에 대한 의견이 부분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방언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방언을 하고 있는 셈이라 하였다.

     또한 크게 두 번째로 신약 자체 내에서조차 방언의 중요성이 감소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신약은 사도행전과 고린도에 보낸 첫 번째 서신과는 달리 목회서신에서는 비록 바울이 성무(방언은 포함되지 않는다)를 행할 자질을 주장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또한 공적 예배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인들의 행위에 대해 상세히 훈계를 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해도, 어쨌든 방언에 대해서는 언급하는 바가 없다. 요한이 성령의 사역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의 서신(계 2-3장)의 속에서는 방언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것은 방언은 사실상 정경이 완성되는 동안 다른 것으로 대치되었다고 보는 것이다.9)

     계시는 점진적이며 누적되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전에 계시한 진리를 결코 부인하시지는 않지만, 부족한 면은 다른 구조나 관례로 대치되도록 규정하신다. 따라서 방언을 언급하지 않는 디모데후서도 고린도전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규범이 되어야 한다. 방언이 점진적으로 사라져가는 이유는 예언이 사라져가는 이유와 똑같다. 그것은 계시적인 은사이다. 오순절주의 신학자들에 따르면, 통역을 겸하게 되는 방언은 예언과 같은 것으로 즉 “성령 안에서 신비를 말하는 것이다.” 방언은 예언과 마찬가지로 정경이 형성되는 동안에 교리의 요구를 충족시켰다.

     결국 이러한 논지에서 볼 때 오순절주의의 신학체계는 비성경적이다. 세 가지 면에서 말할 수 있다. 첫째 방언이 회심이후의 거룩한 삶을 위한 성령 세례의 필수라면 우리가 이미 보아온 대로 사도 시대의 교회 이후에 위대한 인물들은 결코 방언으로 말하지 않았으며, 그러하기에 오순절주의의 교리가 사실이라면 그들은 보잘 것 없는 그리스도인으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 둘째 오늘날의 방언을, 이슬람교와 같은 이방 종교의 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방언을 탁월한 영성의 증거라고 말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와 똑같은 문제는 로마교 신자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셋째 마지막으로, 신약에서는 방언이 특별한 영성의 표시라는 암시를 찾아볼 수가 없다.

2) 진정한 교회는 은사적이다.

그렇다면 오늘 날 교회는 은사와 관계없는가? 이에 대하여 메크레오드는 진정한 교회는 모두 정통적이고 보편적이며 또한 은사 적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즉, 정통성은 단지 기독교의 진리를 고백하는 것이며, 보편성이란 우리가 오직 한 교회에 속해 있으며 그리스도는 단시 한 분이시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은사 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우리의 생존을 위해 성령의 은혜에 의존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회는 성령의 은사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교회가 은사 적이라고 하는 말하는 것은 교회가 신령한 은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 은사에 의존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는 영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신령한 성전을 구성하고 있다.10)

이들 은사 중에 몇몇 은사, 즉 계시적인 은사는 멈추어졌다. 그러나 대다수의 은사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것들은 지혜, 지식 가르치는 것, 상담, 통치, 지도력, 섬김, 위로, 훈계, 관대함, 행정의 은사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1세기의 신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교회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것들이다.11)

첫째로 성직자와 관계된 성령의 은사이다. 둘째는 예배에 있어서 성령의 은사이다. 특별히 예배에 있어서 설교, 기도,찬송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신자들의 일상적인 삶 역시 은사 적이다.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데 사용되는 은사를 가지고 있다. 각 그리스도인이 그 자신의 위급한 영적 상태를 급고하는 능력도 은사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은사 적이라는 사실이다.12)

6. 성령의 사역

    성령의 사역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성령의 은사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다면 이제 성령의 사역에 대한 바른 이해로 나가야 한다.

  1) 성령과의 관계

    성령의 사역은 우리의 개인적인 신앙에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관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성령의 사역은 매우 중요하다. 메크레오드는 이러한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여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성령은 믿는 자 안에 내재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내재가 특별한 경우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단속적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하는 일이다. 성령은 영구적이며 지속적으로 내재한다. 둘째 성령은 죄를 깨닫게 한다. 이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소생할 시기에 중요한 것이다. 대다수에 있어서 죄에 대한 회개는 그들의 영적인 삶의 초기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령이 그들을 깊은 구렁텅이에서 구해날 때 일어나게 된다. 셋째 성령은 우리를 인도한다. 롬8:14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영적인 인도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어려움이나 위험, 시련, 삶의 고통스러움에서 탈출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를 정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넷째 성령은 우리를 돕는다. 성령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짐을 나른다. 다섯째 성령은 우리의 자녀 됨의 증인이다. 여섯째 성령은 위기에 빠져 있을 때 우리를 돕는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예배에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은사들의 원천이다.13)

  2) 성령의 역할

    특별 계시가 없는 상황에서 성령이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성령의 역할에 대하여 메크레오드는 특별히 세 가지를 언급한다. 우선적으로, 성령이 없이는 우리는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바를 이해할 수가 없다. 두 번째,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일에 있어서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다.14)세 번째,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행하도록 하는 성령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15)

    메크레오드는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하심은 멈추었다는 신앙고백서 전통을 따르고 있다.16) 그러나 대부분의 이단들과 오순절주의자들은 자신이 직접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오늘 이단들과 오순절주의자들 가운데도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존 머레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충분한 실천 규정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의 새로운 성령의 계시를 받을 수 없다거나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고의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경우는 성령이 어떤 말이나 환상의 형태를 가진 특별한 계시를 준다고 믿을 때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가 특별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는 어떤 직접적인 느낌이나 인상, 또는 확신을 우리에게 줄 수도 있다.”17) 폴 올리 교수 역시 동일한 입장을 가졌다.18) 결국 계시에 대한 복음주의적 관점은 어떤 것인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중요한 일인 것이다. 신앙고백서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이전의 방법은 지금은 멈추어졌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신의 현현, 몽상, 환상, 예언적인 말의 언급, 사도의 전통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다. 오늘날 직접적인 계시를 주장하는 복음 전도자들은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있는 의식 상태, 복잡한 감정들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19)

    메크레오드는 어떤 기이한 경험이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그의 뜻을 온전하게 분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강조한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교회는 여전히 계시를 받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며 여전히 우리에게 분명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고해야만 한다.”20)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의 지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력을 정화시키고 적용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생각하셨던 것을 우리도 생각해 보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21)그러나 이러한 중생한 지력뿐만 아니라 지혜의 은사를 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은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우리를 인도하는 성령의 역할이다.

7. 성령 충만

   1) 성령 충만함의 표적

     이미 성령 충만을 받는 것과 성령세례를 받는 것, 성령을 받는 것은 같은 경험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이 계속하여 충만을 받는 다는 것이 가능한가? 특별히 엡5:18절의 말씀은 계속하여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메크레오드는 행4:8절의 베드로의 경험을 통하여 그 답을 주고 있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받았지만 다시금 위기의 순간에 성령의 특별한 충만을 받았다. 이러한 베드로의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분명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에 겸손하게 의지하면서 과감히 나아간다면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위급 상황에도 대처하도록 능력을 주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행6:5,요11:16,마7:7,요15:4)1) 이것이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이다.

     특별히 엡5:18절을 보면 성령 충만한 사람의 표적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술 취함의 증후로부터 멀어진다. 술 취함은 엉뚱한 행동으로 이끌며 자기 통제를 상실하며 스스로를 과장하게 한다. 그러나 성령 충만함은 오히려 인격적이며 상식적이 된다. 자기의 통제의 능력이 강해지며 우리의 정서를 훈련시키는 것이다.(고전14:32) 또한 성령의 충만함은 도덕적이며, 영적인 자질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하면서 비도덕적이고 비인격적인 행동을 나가며 비성경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은 결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가 아니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도적인 삶과 인격적인 삶에 있어서 더욱 충실한 자가 되는 것이다.2)

   2) 성도의 영적 체험

    그렇다면 성도의 영적 체험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성도의 영적 체험에 대하여 두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첫째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회심 이후에 잊을 수 없는 영적 경험을 가졌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이러한 경험들을 오늘날 성령 세례 또는 성령의 인침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부인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경험 그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는다.3)

    둘째 엡5:18절의 바울의 말을 보면 많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낮은 영적 수준의 삶이 있음을 말하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사람들은 성령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의 반증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성령 세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엡5:18절의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바울의 교훈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4) 결국 경건하고 능력 있는 삶이 되지 못한 것은 성령 세례의 문제가 아니라 늘 성령을 의지하지 않는 즉 성령 충만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8. 결 론

    이상에서 도널드 메크레오드의 성령론을 살펴보았다. 현재 영국 개혁교회의 신학을 주도하고 있는 메크레오드의 성령론을 통하여 적어도 두 가지는 살펴 볼 수 있다.

    첫째는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에 대한 개혁 교회의 이해가 무엇인가이다. 대부분의 개혁교회를 말하고 있는 한국 교회는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을 비판 없이 수용하고 있다. 그의 설교와 성품 그리고 학식은 누가 보아도 견고하고 아름답고 본받을 좋은 스승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성령론에 있어서는 견제를 받아야 함이 필요하다. 이러한 견제함을 도널드 메크레오드를 통하여 볼 수 있었다.

    둘째는 성령에 대한 신앙 고백적 이해이다. 공교회 공동체는 성령에 대한 신앙 고백적 이해를 함께 해왔다. 오순절주의의 출현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혼란스러움이 있지만 공교회가 어떻게 성령에 대하여 이해하고 고백하였는지를 보여 주었다. 특별히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충만과 성령 사역에 대한 신앙 고백적 이해는 성경이 보여주는 성령에 대하여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특별히 메크레오드는 오순절주의자의 뿌리가 개혁 교회에 있었음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이 어떤 면에서 이 탈하였는가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다시금 오직 성경과 오직 믿음의 교리로 개혁되어야 할 것을 제시하였다.

    우리 시대에 뿌리 없이 진행되고 있는 성령론 논의에 메크레오드의 신앙 고백적 이해의 성령론은 뿌리를 찾는 좋은 길잡이라 생각한다.

출처 : 보길예송교회
글쓴이 : 김완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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