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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변증학(The Defence of the Faith by Cornelius Van Til))

하나님아들 2016. 3. 23. 21:31

변증학-코넬리우스 반틸 | 코넬리우스 반틸

진실 2009.08.27 01:53  http://blog.daum.net/kkho1105/2067 

 

 

 

<서평>      변증학(The Defence of the Faith by Cornelius Van Til))


  1. 들어가는 말


  코넬리우스 반틸의 저서 「변증학」이 주장하는 요체는 전제와 일관성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인식과 윤리․의식에는 반드시 분명한 전제가 따라야 하며 그 일관성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전제는 절대적 인격체이며 무한한 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타협되거나 가감없이 그 일관성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지상명령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 승천하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8-20).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성경의 그리스도를 전할 때에, 그것이 불신자들에게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세계관과 불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틀인 패러다임이나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 카톨릭 등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가지고 갈 때, 마음대로 세상의 가치와 타협하거나 가감하기도 한다. 그러나, 타협되고 가감된 변증은 자연인이 가지고 있는 요소들 위에 그리스도의 지혜와 공로를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 저자는 본서에서 그것은 참된 구원의 진리에서 벗어났다고 강조한다. 

  저자인 코넬리우스 반틸은 개혁주의 변증학의 선구자이다. 그는 한때 모교인 프린스턴신학교로부터 교수직을 제안받았으나, 그 신학교의 신학적 입장이 변질된 것 때문에 수락하지 않고, 개혁신학을 지키기 위해 설립된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변증학 교수로서 일생을 개혁신학 변증학을 수립하고 가르쳤다.

  본서는 ‘전제와 일관성’의 변증학이라고 불릴 정도로 철저하게, 전제와 일관성이라는 두 용어로써 성경주의적 세계관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 인식의 결과 후속되는 윤리와 의식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어떻게 가지고 가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저자는 존재와 인식, 그리고 전제와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그 해답을 잘 제시하고 있다. 본 글에서는 본서를 읽으면서 느낀 점을 존재론, 인식론, 실천윤리론, 접점과 전제 그리고 일관성 등의 차원에서 서술․평가하고자 한다.


  2. 변증의 내용과 방법론 - 전제와 일관성


  변증학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하면 타협이나 가감 없이 효과적으로 세상의 문화 속으로 가지고 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학문 분야이다. 이에 대해 본서는 먼저 신학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것에서, 변증의 실마리를 풀어 나간다. 우리의 존재와 인식체계는 바른 신학에서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른 신학은 건축물의 기초와 같다. 신학이 바르게 세워져 있으면, 아무리 이단이나 그 아류의 사탄이 불어 닥쳐도 흔들림이 없다.

  그 신학의 해답은 물론 성경이다. 우리가 증거하는 그리스도가 바른 신학에 입각해서 증거되지 않으면, 그것은 사상누각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제일주의에 입각한 개혁신학이 진정한 복음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저자가 책의 서두에 신학을 강조한 것은, 신학이 본서의 강조점인 전제와 일관성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지식과 사고의 출발점은 절대적 인격적이며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존재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우리의 존재나 지식․인식 자체가 어떤 의미가 없다. 하나님 안에서만, 인간은 모든 가능성과 능력을 가진다. 하나님은 자족하시고 자존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어떠한 것도 안다고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고서야 가능하다.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참된 지식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식은 결코 중립적(neutral)일 수 없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 하나님의 지식은 자기 분석적(analytical)이며 자기해석적이나, 인간의 지식과 인식은 하나님께 의존적이며 유추적(analogical)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인식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한에서, 수용적이고 재구성적(receptively reconstructive)이지, 이성에 근거한 창조적이어서는(creatively constructive)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와 어떻게 접촉할 것인가? 이 때 발생하는 문제가 접점(point of contact, 공통적 출발점)의 문제이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과 불신자들 사이에 접점은 없으며, 그 접점을 찾으려 하는 순간 진리의 체계는 무너진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가지고 간다는 것은 그 동안 그들이 쌓아온 이성이나 경험 등 기존의 세계관에 그리스도의 세계관을 덧입히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기존가치와 세계관을 완전히 허물고 처음부터 기초를 쌓는 일이다. 이것은 성경적 세계관으로 그들의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리는 혁명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는 세상과 타협하거나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으로 덧입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일관성의 문제이다. 그 일관성이라는 것은, 우리의 구원은 자연을 통해 오지도 않고, 로마 카톨릭교회의 가르침대로 교회나 신부를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지지도 않으며, 오늘날 일부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듯이 인간의 이성이 개입하여 계시되지도 않으며, 오직 우리의 구원은 성령과 성경 말씀의 진리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왜 개혁주의를 고수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구원에는 로마 카톨릭이나 알미니안들처럼, 인간의 이성이 작용할 수 없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제한적 선택으로 인한 전적인 은혜의 결과라는 점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이 개혁주의가 다른 복음주의자나 로마 카톨릭 등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본서는 일관성의 중심에는 바로 이러한 개혁신학이 자리를 잡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을 접촉할 때, 개혁주의적 하나님을 전제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접점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고 인간의 상식이나 이성, 경험을 접점으로 삼게 되면, 참된 그리스도를 전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핫지나 벤틸은 이성을 면도칼이라고 말했다. 이성 그 자체는 좋은 것이나 그 칼이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성은 중생한 사람의 손에 의해 사용될 때 바로 사용된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것은 전제로 귀결된다. 우리의 변증은 성경 안에서 절대적인 권위로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와 성자, 성령을 처음부터 전제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을 전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전제는 주관적인 나를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 불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전제, 이를테면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 등으로 불신자들과 접점을 이루려 한다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려 한다면 이는 또 하나의 우상을 만드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본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인식과 윤리, 행동은 물론 그리스도를  변증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전제하고 그 전제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일관성은 언제나 개혁교회적이고 성경적이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본서의 말미에 있는 내용인 ‘일반은총과 스콜라주의’, ‘암스테르담과 舊프린스턴’ 등에 대한 서술도,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전제와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접근되고 있음을, 독자들은 흥미롭게 발견할 수 있다고 하겠다. 


  3. 결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존재하고 모든 것을 인식함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제해야 한다. 또한 그 전제는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 일관성은 성경에 입각한 개혁주의의 신학이 잣대가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바른 신학이 필요하다. 그 신학은 성경에 입각해야 한다. 성경에 입각하지 않은 신학은 바른 진리체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본서는 일관되게 전제와 일관성이라는 주제로서 책의 전체적 흐름과 강조를 잘 이끌어내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우리 지식의 한계 그리고 인식의 방법 등이 왜 개혁적이며 성경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본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어떻게 가지고 가야 하는가에 대한 바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방법에 관하여, 존재론에서 인식론을 거쳐 불신자와 접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접점과 충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준수해야 할 전제와 일관성의 유지에 대해 잘 서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가 횡행하고 심지어 종교다원주의까지 판을 치고 있는 이 시대에, 이 책이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바른 신학을 확립하는데 필독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저자도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 책이 한국의 많은 교회에서 읽히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지금이야말로 한국땅에 바른 신학인 개혁주의 신학이 가장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다만, 본서는 일반 그리스도인들이 읽기에는 철학적인 배경이나 용어 등의 어려운 점이 있어서 아쉬운 점이 있다. 또한 일반 성도들이 읽기에는 너무 많은 학자들의 견해 등이 인용되어서, 처음 접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책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기는 한다.

  우리가 증거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만이어야 하며, 그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 입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증거는 성경 안에서 찾아야 한다. 따라서, 본 서평자는 마지막으로 개혁주의 노선만이 가장 성경에 입각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칼빈의 다음 글을 인용․강조함으로써 본 글을 마치고자 한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것은, 성경에 금하고 있는 법만큼이나 금지의 법이다. 성경이 가는 곳에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 멈춘다.” <끝>.

출처 : 생명나무 쉼터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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