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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와 방법 / 정성구 교수

하나님아들 2016. 3. 12. 13:37

Ezra 2010.05.26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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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설교의 원리와 방법

 


필자: 정성구교수
제목: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와 방법
1. 서설

실천신학의 시대인 오늘날은 선교학과 교회학 뿐 아니라 설교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최근에는 강해설교의 붐이 조성되고 있다. 설교의 형태는 본문설교, 주제설교, 본문 주제설교, 강해설교 등이 있는데 이중 강해설교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러나 강해설교는 신학의 입장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해설교의 방법 중 구속사적 설교의 방법론을 제창하고자 한다.

2. 최근의 구속사적 설교의 관심
구속사적 설교 방법은 아직은 한국 교회에 널리 알려진 개념은 아니다. 이것에 관한 연구로는 시드니 글레다누스:[오직성경], Edmund P. Clowney:[설교와 성경신학], 더 그라아프:[언약사], 고재수:[구속사적 설교의 실제], 박종칠:[구속사적 성경해석], 김영철:[여호와 신실하신 우리 하나님] 등이 있다. 이제 이런 면에서 개혁주의 신앙을 지키고 풍성한 강단을 추구하는 돌파구가 될 수 있으리라.

3. 구속사적 설교의 발원
일반적으로 '구속사'란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따라 모든 것을 계획했으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구원하실 것을 계시하시고 섭리하시고 간섭하신다는 신학적인 입장이다.
구속사적 설교를 처음 말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말 화란 칼빈주의자들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당시까지 예증적 설교를 지켜오던 자들의 반발도 있었다. 이런 면에서 한국 교회도 이 설교 방법이 아직은 어색하게 느껴질 것이다.
구속사적 설교를 낳게한 배경은 a> Karl Barth의 변증법적 신학에 대한 반응 때문이었다. 여기에 대표자인 스킬더 박사는 계시사를 바로 깨닫지 못하는 한 성경해석을 바로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b> 1930년대를 전후해서 화란 교회에서 일어난 이른바 주관주의(Subjectivism)에 대한 반작용에서 시작되었다.

4. 예증적 설교에 대한 반성과 문제점
우리가 성경을 잘못 사용하면 윤리적 모범을 보여주는 책으로 전락시키기 쉬운데 이것이 예증설교의 문제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초기부터 중세를 거쳐 개혁주의자들까지도 답습해 왔다.
예증설교 지지자들은 지적하기를 구속사적 설교는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강의가 될 뿐이며 무미건조한 설교라고 한다. 또 예수님이 구약을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발견하도록 했으니 예증설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진정한 의미에서 예증적 설교는 순전히 인간 중심적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전기적 인물을 고찰하고 거기서 교훈을 얻는 것이 옳은가하는 것이 문제이다. T. Hoekstra의 지적대로 강단에서 전파될 자는 베드로, 모세, 아브라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설교가 도덕적 교훈으로 전락해 버리기 쉽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런 설교를 위해서는 본문을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오류에 빠지기가 쉽다. 뿐만 아니라 예증설교는 구속역사를 세속사로 전락시켜 버리게 된다.

5. 구속사적 설교의 윈리
1) 하나님 중심사상
구속사적 설교를 하는 사람은 항상 역사적 본문은 하나님 편에서의 접근을 우선으로 시작한다.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이므로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인물의 성공적 삶을 말하기보다 하나님께서 그 인물을 통해 무엇을 하셨는가에 촛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2) 역사적 점진성의 원리
구속사적 설교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운동을 구체적인 역사 가운데 진행시켰다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다시말하면 구속사는 그 본질적 요소로서 역사성을 가진다. Barth를 중심한 초역사주의는 기독교를 공중누각 같은 초월 종교로 만들어 버렸다.
또한 구속사는 역사 속에서 여러 사건을 동반하면서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간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통일성과 점진성을 전제하고 학문적 발전을 시켜나가는 것을 성경신학이라고 한다면 구속사적 설교는 바로 성경신학적 설교 방법론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구속사적 설교란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역사의 축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적 특성을 가질 뿐 아니라 구원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구속사적 설교의 방법은 어떤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든지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명백히 드러내야 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선포한다는 것은 은혜만 전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에 대한 분명한 선포와 함께 은혜가 선포되어야 한다.

6. 구속사적 설교의 방법 문제
1) 역사적 본문의 범위 문제
구속사적 설교는 역사적 본문을 기초로 한다. 그러나 그 역사적인 본문들 가운데서 사람들의 전기를 소개하는 설교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도리어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속적인 행위를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2) 역사적 설교의 본문 선택
설교 본문을 선택할 때는 적어도 하나의 완전한 사건을 다루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역사적 본문이 하나의 잘 짜여진 단위여야 한다. 이 본문을 여러 개의 다른 본문과 혼합해서는 안된다. 물론 이 말은 병행구나 신약의 성취 내용조차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3) 역사적 해석
예증설교는 역사적 본문을 오늘날과의 시간적 Gap을 무시한 채 오늘의 삶에 바로 적용함으로서 실존적 설교, 영해설교, 도덕적 설교를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역사적 해석은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여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4) 유기적 해석
설교자는 본문해석에 있어서 문맥을 중시하여야 한다. 어떤 본문이든지 간에 그것이 하나의 파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큰 흐름 속에 있는 사건이라는 것을 깨달아 통일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5) 본문적 주제설교
구속사적 설교는 그 형식에 있어서 본문적 주제설교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다른 말로 강해설교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강해설교가 구속사적 설교방법을 쓰지 않으므로 강해설교라 해도 만일 구속의 통일성과 계시의 점진성을 알지 못한다면 바른 설교를 할 수가 없게 된다.
사실상 설교는 어떤 형식이 좌우한다기보다는 설교자가 그 성경 본문에 계시된 구속사적의 의미를 바로 파악하고 있는가에 촛점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6) 상황적 설교
구속사적 설교에 있어 그 진리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구속사적 설교자도 본문해석에 있어 설교자 자신과 그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그때 거기'와 '지금 여기'를 연결해야 한다.
그 원리는 이렇다.
a> 삼위 하나님은 언제나 상황적이다 - 영원토록 살아계신 삼위 하나님을 전해야 한다.
b> 하나님의 말씀은 상황적이다 -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말씀이다.
c> 하나님의 계시를 증거하는 설교 자체가 구속활동의 한 연장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설교는 적용적 해석이므로 상황성을 지닌다.
그러나 설교자가 역사적 간격을 무시한 채 적용에만 끝없이 노력하면 예증설교와 같은 오류를 범하게 된다.

7. 구속사적 설교와 타설교와의 비교
구속사적 설교와 종래의 다른 설교를 비교하기 전에 먼저 구속사적 설교의 착안 사항을 알아보자.
① 성경은 언제라도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를 계시하셨는가를 먼저 찾고 또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셨는가를 찾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② 중보자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발견하는 일이다. 인간은 죄로 어두워졌고 중보자를 통한 은혜의 계시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것이 신,구약의 계시의 내용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에스더서를 설교하건 삭개오 이야기를 보건, 또 베다니 마리아 사건을 보건 간에 그 속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③ 하나님의 계시는 그의 백성과 맺은 언약 속에 나타났다. 예를 들어 요셉이나 다윗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보다 이 인물을 통해서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적 뜻이 무엇인지를 문제삼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한국에 있어서 설교 현실과 구속사적 설교의 접근을 비교하여 생각해 보자.

1) 첫번째 성결교 목사로서 제목설교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김응조 목사의 설교를 생각해보자.
그는 사 35:1-7에서 "사막의 생수"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였는데 설교의 내용은 매우 복음적이나 설교 전편에 걸쳐 그리스도를 말하는 곳은 단 두 줄 뿐이고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계시를 바로 증거한 곳은 한 곳도 없다. 가슴뛰는 구속의 계시에서 고작 단순한 교훈만을 찾는다면 그것은 도덕적 설교에 지나지 않는다.

2) 강해설교 운동에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장두만 박사의 "성탄에 대한 세 가지 태도"(마 2:1-12)를 살펴 보자.
중심내용 : 성탄에 대한 태도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준다.
① 어떤 사람은 적대적이다. 왕권이 불안하던 헤롯은 성탄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오늘날도 인생의 주도권을 빼앗길까봐 적대적인 사람이 있다.
② 어떤 사람은 무관심하다. 종교 지도자들은 관심이 없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그리스도 없는 행사위주의 성탄절을 보낸다.
③ 어떤 사람은 경배한다(7-12). 동방박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도 참된 경배자는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의미있는 예배를 드린다.
* 여기서 첨부하여 우리는 동방박사를 베들레헴으로 불러들인 하나님의 웅장함을 드러내고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할 것이다.

3) 다음으로 창 22:10-19 본문을 두고 이병돈 목사의 "아브라함의 신앙", 임사순 목사의 "온전한 제물이 되자", 최지덕 목사의 "제물은 어디에 있나이까" 등의 설교가 있는데 우리는 이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우선적으로 다루어서는 안된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제사는 하나님이 만드신 제사의 모방이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아브라함이 대답했던 대로 하나님은 언제나 스스로 제물을 준비시키신다. 그는 약속의 아들 즉 언약의 말씀 자체를 희생시키신 것이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언제나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8. 평가와 결론
설교는 단순히 교회 성장을 위한 방편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재래식 설교보다는 구속사적 설교 방법을 터득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성경 전체의 구속사의 흐름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성경을 가지고 부분적으로는 예증적 설교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참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며 삼위 하나님의 구속의 사실을 힘있게 증거하는 것이다.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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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목사님의 세상을 향한 소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종교에서 보여 지고 있는 신앙의 특성들은(-인간이 신을 찾아서 그 신에게 어떤 정성과 성의를 다하면 그 신으로부터 노여움을 피할 수 있다는-) 일반적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기독교 신앙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을 오해했고 성경을 오해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의 대전제(大前提)는 그 어떠한 인간의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거룩하지 못한 것에 진노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지 못한 것들은 그 모습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저주와 심판과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때 거룩하지 못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을 받을 사람들이 제아무리 정성과 성의를 다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에는 도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죄인들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에 도달하려면 하나님께서 주시고 허락한 방법이 있는데, 우리들은 그 하나님의 방법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그 유일한 방법이 바로 죄인을 그냥 벌하여 죽이지 않고 대리자(代理者)를 죽임으로 당사자(當事者)를 살리는 구속의 비밀과 그 비밀로 인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입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 자리에서 내 대신 죄 없고 흠 없는 어린양이 희생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 속죄의 비밀이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됩니다.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들이 한 마디로, 과거에 하나님과 맺어놓은 관계와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역사는 언제나 타락에 대한 죄를 심판하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사무엘상 초반부는 엘리라는 제사장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제사장 엘리의 모습을 통하여 그 시대가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보여 줍니다.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아들의 방탕과 타락조차도 제어할 수 없는 무기력한 사람으로 비춰지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이제 더 이상 여호와로부터 말씀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러도 정작 엘리 제사장은 듣지 못한 상태가 되어져 버렸습니다.
제사장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백성의 죄가 용서되는 현실 속에서 제사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는 것은 그 제사장 밑에 있는 이스라엘 전체를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서를 기록한 기록자는 철저하게 제사장 엘리의 몰락을 증거 함으로 말미암아 그 당시 이스라엘 전체의 타락과 패역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은 곧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지고 그 시대 몰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 생명적 의식인 제사를 모르는 이방 나라 백성들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 하나님의 원수요, 대적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중요한 생명적 의식인 이 제사가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얼마나 모독을 받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합니다(삼상 2:17).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을 하기까지 스스럼없이 범죄합니다(삼상2:22).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모독을 받았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백성들이 죄 용서를 받는 길이 차단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여 엘리 시대는 끝을 맺고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삼상4:2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제사장을 통한 바른 제사의 회복에 있었습니다.
그 제사는 죄를 범한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중요한 생명적 의식이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과 우리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만 예수님이 피 흘리신 십자가만을 높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생각하면서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아는 신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벧전4:12-13)고 말함으로써 성도가 이 세대에서 손해를 보고, 고난에 처하게 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은 자로서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 성도들 삶의 목적임을 잊지 맙시다. 세상으로 부터 당하는 불이익과 고난, 그리고 죽음을 이상하게 여기지 맙시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자신의 유익을 따라가는 무능한 우리 자신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죄를 고백하면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감사합시다. 우리에게 되어 진 일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면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며 살아갑시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말하는 것이지 입술이나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지식과 입술은 그리스도의 길에 있으면서도 삶은 그리스도와 다른 길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믿음을 말한다면 믿음 앞에서는 자신의 유익에 대해서 마음 두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은 남을 살리기 위해서, 남에게 유익을 주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자신을 스스로 죽음으로 밀어 넣으신 분이십니다. 스스로 손해 당함을 기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는 자신의 유익보다 더 큰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내 편함과 유익을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기보다는 자신을 죽이시고 나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서 믿음의 형제에게 유익이 되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신자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출처 : 생명나무 쉼터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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