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선교사! 목회자란!

[스크랩] 대화 설교란?

하나님아들 2016. 3. 10. 13:55
대화 설교란?

 

 

 

 

 

 

 

                                                                조달진목사 


 

  목차 

머리말  

1. 설교에 대한 반성 : 목회 현장과 설교자의 고민 

2. 설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요청  
3. 기본적인 개념과 용어  

4. 대화 설교의 철학적 근거  

5. 대화 설교의 신학적 근거 

6. 대화설교의 실제


머리말


예수가 선포하고 실천했던 하나님 나라의 운동은 2000년의 교회 역사의 물줄기를 따라 흐르고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목회 현장의 모습을 보면서
복음 선포에의 순수한 열정을 가진 설교자들은 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성장과 성공이란 이데올로기를 하나님의 지상 명령으로 생각하는 목회 현장인 교회의 현실에
설교자는 누구를 향해서 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길 잃고 헤매는 양 한 마리의 가치를 우리 안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과 동일한 가치를 갖고 있다고 가르친 예수의 마음을
우리는 잊고 있지는 않습니까?  
복음의 전도자보다는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설교자가 되려는 유혹에 잡혀있지 않습니까?
성서를 회중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의 재료로 이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존재와 대화”의 설교 테이프를 통해서 “대화 설교”를 주창(主唱)해온 조달진 목사와 함께 생각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우리의 과거를 함께 돌아보면서 디지털 문화에 짓눌린 현대인들에게
아날로그로 표현되는 새로운 설교의 형식을 함께 찾아보려고 합니다.

1. 설교의 반성 : 목회 현장과 설교자의 고민


    1. 설교자는 교회 성장 신화의 굴레에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 성장의 표면적인 척도로 교인의 숫자와 재정입니다.  
목회자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대중의 인기를 집중시킬 수 있는 방법에 집착하게 됩니다.  
목회자를 위한 세미나의 주제는 “교회 성장”이란 주제가 주종을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설교는 교회 성장의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설교는 내용보다는 전달 기술적인 면에 치중하게 됩니다.  
그 결과 설교는 그 본래적 의미를 점점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1) 대중에의 접근을 용이하도록 예배와 설교 구성에 오락적인 요소를 가미합니다.  
마음 문을 열기 위한 준비 찬송이란 미명하에 부르는 복음성가는
신앙 고백적 의미보다 유흥적 의미가 암묵적으로 강조됩니다.  
찬송가나 복음성가 연주자의 이러한 태도는 반성의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2) 성서의 신화적인 표현의 용어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신앙을 이데올로기로 만들게 됩니다.  
신비주의의 언어 표현들은 일반인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줍니다.  
대표적인 예가 성서의 본문을 주술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특히 종교적 경험과 관련 쳬계화된 신비주의적 용어들은 대중을 오도할 가능성이 큽니다.
설교는 하나님 나라 즉 Kingdom of God 의 성취가 아니라
목회자 개인의 통치 즉 Kingdom of the Pastor 의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3) 회중의 인기를 독차지하고자 강단을 독점하려는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그 결과 부담해야할 설교의 회수가 과중해 집니다.  
강단의 독점은 회중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내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인간적 욕망의 다른 표현이라고 봅니다.  
교회의 주인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면 모든 목회자들은 함께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담임자와 부담임자가 강단의 임무를 분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봅니다.

    2. 회중은 설교를 경청하던 입장에서 방관하는 구경군의 자세로 변하고 있습니다.  
회중의 지적 수준 향상으로 인해서 설교 언어의 무게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회중은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표면적으로 듣는 연기를 하면서 내면적으로 설교에 대한 비난을 하게 됩니다.  
설교를 예배의 순서의 일부로 간주합니다.  
더욱 부정적인 것은 설교를 목회자의 스트레스 해소나 강단에서 일방적으로 내리는 훈계 또는 교인 세뇌를 위한 잔소리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피땀어린 설교는 허공으로 흩어지는 연기처럼 회중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경건한 신앙을 소유했다고 믿는 평신도나 열광적인 신자들은
사려없이  “하나님의 종의 말이니 무조건 거룩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신앙적 태도는 책임적인 신앙인의 태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회중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의지를 가진 목회자는
자신의 윤리적 비행까지도 신앙의 이데올로기로 신성한 것으로 위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이란 구호아래 설교 내용의 진실성보다는 설교를 듣는 분위기를 더욱 중요시합니다.  
설교 구연자는 설교의 내용에 상관없이 아멘, 또는 할렐루야라는 화답을 회중에게 강요합니다.  
회중도 이러한 열광적인 분위기를 은혜 받은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회중은 메시지를 통한 자기 반성과 사유를 위한 마음의 여유를 상실하게 됩니다.
청중에게는 사려있는 경청이 요구됩니다.  
사려있는 경청이란 건전한 비판을 전제로 하면서 열린 마음으로 설교를 듣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3. 목회자는 배타적인 케리그마와 포괄적인 삶을 요구하는 목회 현장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에서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계명은 유일신 신앙을 강조합니다.
사도행전4:12절은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 구절들은 기독교 메시지의 배타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 현장은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일과 교회가
다원적 사회 안에서 공동체적 삶을 영위해야 하는 것과의 신학적 고리를 찾고자 고민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회자는 절대적 배타주의를 포기하고 포괄적 보편주의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기독교의 배타주의적  케리그마를 상실하지 않으면서 포괄적인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을까? 에대해서 고민하게 됩니다.

 


2. 설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요청

설교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네 개의 용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용어들은 “설교는 특정 목적을 가진 행위”라고 보고 선택된 동사들입니다.

    1. 예언(propheteia)으로서의 설교
이 단어는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형식을 말합니다.  
영어에서 사용하는 설교라는 용어로 Preaching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라틴어의 Prae-dicare에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
독일어의 Predigen도 동일한 어원입니다.
이 단어는 “공중에게 알게 하다”라는 기본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희랍어의 propheteia와 유사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언으로서의 설교는 일방적으로 던져주는 인상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2. 선포(keryssein)와 증언(martyria)으로서의 설교
세례 요한은 유대 광야에 나타나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습니다. (마가1:4)  
예수는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는 것이 복음의 내용이었습니다.  
사도들에게서 선포(keryssein)는 증언(martyria)으로 바뀌게 됩니다.  
사도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버림받은 예수가 만민의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증언했습니다.
선포와 증언은 초대 교회 성립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3.가르침(didaskein)으로서의 설교
마태 5:2은 “예수께서  입을 열어서 가르치셨다”는 말로 산상 설교를 시작합니다.
신앙의 공동체가 형성된 후에 선포로서의 설교는 가르침 즉 교육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신약 성서에서 바울 서신들을 보면 전반부에 증언의 성격이 강한 교리적 내용을,
후반부에 교훈적 성격이 강한 윤리적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마28:19-20에서 설교의 교육적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제도화된 교회의 설교는 증언과 가르침을 결합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연설(sermon)로서의 설교
Sermon으로서의 설교는 라틴어인 “연설하다”라는 개념에서 시작합니다.  
설교란 성경에 있는 특정 종교적 진리에 관해서 대중에게 연설하는 것으로서
대중을 설득시키려는 목적으로 정교하게 다루어지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설교의 네 가지의 특징들이 상호 결합되어 다양한 종류의 설교 양식들이 만들어 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에서 설교 행위 자체의 신학적 의미에 치중한 설교학이 발전되었고
미국에서는 의사소통이론에 근거한 메시지 전달 방법론에 치중한 설교 기술학이 발전되었습니다.  
동사로 표현된 설교 행위의 다양한 강조점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성서가 기본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구약 시대 당시의 예언자들도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기준으로 그들에게 선포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신약 성서 기록 시대에는 그들의 증언의 근거로 구약성서를 인용했습니다.  
그 이후의 시대에는 구약성서와 함께 신약 성서가 모든 설교의 기초로 이용되었습니다.

둘째로 성서에 대한 주석 또는 해석 과정이 따랐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석 또는 해석 과정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이 항상 그 중심에 세워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셋째로 설교에는 회중의 삶의 정황과 성서의 메시지를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함께 있어 왔다는 점입니다.

넷째로 회중으로 하여금 교회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의 생활에 순응케 하려는 목적을 암묵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설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요청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는 설교에 대한 전통적 이해를 버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대화 설교는 설교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의 재해석을 통해, 성장 신화의 굴레에서 무력해진 설교를
초대교회 사도들이 베풀었던 힘있는 설교에로 회복하려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설교하다”라는 동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주어질 때에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1. 동사의 주어입니다.  “누가 설교하는가?” 또는 “설교의 주체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여기에서 필수적입니다.
2. 동사의 직접 목적어로서 “무엇을 설교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복음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3. 동사의 간접 목적어로서  “누구에게 설교하는가?”는 설교행위의 대상자가 누구인가를 문제시합니다.
4. 설교 행위의 목적입니다.  “왜, 또는 무엇을 위해서 설교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5. “설교하다”라는 행위 그 자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여기에서 설교의 주체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입니다.  
설교 행위의 대상자는 설교 구연자와 설교 청취자인 회중입니다.  
설교 구연의 목적은 하나님 말씀 그 자체의 목적과 일치합니다.  
요약해서 말하면 설교는 회중이 과거의 사건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에 개입하신 구원의 사건을
현재의 시점에서 회상함으로써, 미래의 윤리적 행위의 방향을 찾고 실천하기를 결단하고 실천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설교의 주체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입니다.  
설교 행위의 대상자는 설교 구연자와 설교 청취자인 회중입니다.  
설교 구연의 목적은 하나님 말씀 그 자체의 목적과 일치해야 합니다.  
요약해서 말하면 설교는
회중이 과거의 사건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에 개입하신 구원의 사건을 현재의 시점에서 회상함으로써,
미래의 윤리적 행위의 방향을 찾고 실천하기를 결단하고 실천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인은 여기에서 설교 갱신을 위한 새로운 이해의 방향을 두 가지 관점에서 제시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설교 구연을 “행위로서의 진리” 그 자체로 보려고 합니다.
예수는 자신을 곧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세 단어들은 희랍어에서 여성 명사입니다. 이 단어들은 물건이 아니라 사건을 가리킵니다.  
케리그마로서의 예수는 곧 길과 진리와 생명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건으로서의 설교는 곧 진리입니다.  
진리는  사건으로서 사실을 드러내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설교 구연은 “행위로서의 진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는 진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실을 언어로 표현함으로서 드러나게 과정 전체가 곧 설교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설교 구연자 개인의 단순한 사상 피력이 아니라
구연자와 회중이 공동으로 의미에 동참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일방적 선포가 아니라 구연자와 회중이 함께 경청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는 모든 설교자 즉 구연자와 청중이 함께
진리(전통적인 의미의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희랍적인 의미의 진리,aletheia)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와 밀접하게 연결된 진리의 표출은 곧 언어의 장인 대화의 과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설교자의 고민에서 제시했던 문제 중, 진리를 은폐하는 행위로서 설교의 왜곡 요인 가운데 핵심적인 것은
“설교 구연자의 청중을 지배하고자 하는 의지(욕망)”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설교 구연자 자신이 진리를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지배 의지의 포기를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지배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알 수 있습니다.(막10:42-45)  
전통적인 설교 형태는 일방적인 선포 속에 설교 구연자의 지배 의지가 강하게 노출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설교의 준비 과정과 동기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구연의 방법과 암묵적으로 정해진 목적에 치중하는 경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교회 교육의 암묵적 목적 가운데, 예수의 교훈을 따라 섬김의 신앙을 실천케 하기보다는,
교회 조직에 순응하는 “순종의 신앙 이데올로기”로 훈련시키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설교자는 대화의 정신을 회복함으로써 설교를 왜곡하는 지배 의지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본인은 여기에서 지배 의지가 강하게 표출되는 선포 형식의 설교에서
섬김의 정신이 담긴 경청의 설교 즉 “대화 설교”로 바뀌어야 한다고 제창합니다.

3. 기본적인 개념과 용어

    1) 대화 설교 : 대화 철학에 근거하여 작성되고 구연되는 설교를 지칭한다.  

    2) 설교자 : 구연자와 청취자로 구분한다.  양자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 즉 상호 협력자의 관계이다.  

    3) 설교 구연자 : 전통적으로 설교자에 해당한다.

    4) 설교 청취자 : 회중 전체를 가리킨다.  넓은 의미로는 설교 구연자도 청취자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5) 대화의 축 : 대화 설교에서 주도적으로 대화에 참여하는 또는 관계하는 모든 존재자들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 성서의 단위 본문들의 저자, 예화로 인용된 자료들의 저자, 등을 가리킨다.  

    6) 함께 듣는다. : 구연자는 설교 준비과정에서 듣고 , 청취자는 구연 과정에서 듣는다.  
대화 설교의 핵심적인 개념으로서 “언어가 말한다”는 개념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7) 대화의 형식 : 직접 대화와 간접 대화로 구분한다.

    8) 직접 대화 : 사람과 사람 사이에 동시 또는 시차를 두고 언어 표현을 통해서 주고받는 대화를 가리킨다.  
Multimedia를 이용한 모든 의사소통이 포함된다.  

    9) 간접 대화 : 내적 대화라고도 한다. 또는 일상적 용어로 사유에 해당한다.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단계인 심상(Image)을 이용한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대화는 “대화 설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설교 구연자의 설교 준비 과정은 간접 대화라고 할 수 있다.
    
    10) 설교문 : 간접 대화 내용을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4. 대화 설교의 철학적 근거

    1.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란 두 종류의 개념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일치(correspondence)로서의 진리입니다.  
이것은 언어와 사물의 일치를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언어는 기호적 성격이 강합니다.  
다른 하나는 개시(disclosure)로서의 진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존재의 집”인 언어를 통해서 존재(Being)가 드러나는 과정을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언어는 기호적 성격보다는 사용적 성격이 강합니다.  
고정적이 아닌 유동적 성격을 가진 언어는 진리 그 자체를 완벽하게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진리는 언어 사건으로서 하나의 행위 (行爲)입니다.  
희랍어에서 진리를 의미하는 Aletheia는 덮여진 것을 벗긴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덮개를 치워버리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설교(Keryssein)는 곧 “행위로서의 진리(Aletheia)”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언어 사건으로서의 진리는 언어의 사용자인 인간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합니다.  
하이데거는 언어 사용자인 인간 존재 자체를 현존재라고 칭하고 기초존재론을 전개했습니다.  
현존재는 존재와 진리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입니다.  
현존재로서의 인간은 일상 언어를 통해서 질문하고 해명합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자는 언어로 표현됨으로써 그 존재가 드러납니다.  
여기에서 언어로 표현된 모든 것들을 진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그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 표현 행위에는 진리를 은폐하거나 왜곡시킬 수 있는 인간의 의지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Searle은 언어 표현의 근원을 의향(Intentionality)이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의향은 특정의 심리적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들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의향은 언어 표현 행위의 윤리성 또는 책임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 구연자는 자신의 의향에 의한 언어 표현들에 대해서 윤리적 책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3. 언어 표현 행위는 공동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개인의 의향은 언어로 표현되어 공동체의 삶 즉 대화를 통해서 전달되어집니다.  
대화는 언어가 존재하는 장으로서 “언어의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이란 바로 이러한 대화 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1)  
희랍어에 어원을 둔 dialogue는 dia라는 전치사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대화의 성격을 암시해 주는 이 전치사는 의미(logos)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움직이는 형상을 보여 줍니다.  
의미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진정한 대화(genuine dialogue)라고 한다면
그 흐름을 막는 행위를  반-대화 (anti-dialogue)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대화는 진리를 진리로 드러나게 합니다.  
대화로서의 설교는 개인적 체험보다는 공동체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개시(disclosure)로서의 설교는 진정한 대화가 되어야 합니다.  

    4. 언어는 빛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대화에서 인간의 다양한 언어 표현 행위들은 무대 위의 조명과 같습니다.  
특정 사물에 대한 다양한 언어 표현들은 사물의 의미를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다양한 언어의 빛들이 중복되면서 사물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각각의 조명등은 대화의 축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대화의 축으로서의 설교 구연자와 설교 청취자는 대등한 대화 상대자로 나서야 합니다.  
진리는 양심(syneidesis,  conscience,  지식 또는 인식의 공유)을 통해서 그 존재를 드러냅니다.  
대화는 인식 공유 행위의 동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진정한 대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타자를 향한 지배의지를 배제해야 합니다.  
Paulo Frerie는 “눌린 자를 위한 교육”에서
대화는 양보나 선물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타자를 지배하기 위한 전략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세계를 명명하기 위한 만남으로서의 대화는 진정한 인간화의 근본적인 전제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대화로서의 설교는 제도적 교회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함으로써,
인간 해방의 성취를 그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화적인(anti-dialogical) 설교는 교회에 내재하는 구조적 모순을 신화로 만듦으로써,
직접적 또는 암묵적으로 교회의 모순을 숨기고,
기득권을 보호하기에 유리한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회중의 지배를 그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예수가 성전을 향해 비판의 채찍을 든 사건은 반-대화적인 성전 제도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6. 대화 설교는 진리 추구에서 보편적 지혜를 지향합니다.(2)  
진리의 핵심은 자유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언론 조작을 통해서 진리를 왜곡할 수 있습니다.  
대화 설교에서는 진리를 왜곡하는 근원적인 힘을 설교 구연자의 “타자를 향한 지배 의지”라고 규정합니다.  
“대화 설교”는 설교 왜곡의 근본인 이러한 지배 의지를 설교 구연자에게서 발본색원함으로써
무력해진 설교의 힘을 회복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5. 대화 설교의 신학적 근거 참고서적


Reuel L. Howe       The Miracle of Dialogue
            Partners in Preaching : Clergy and Laity in Dialogue
Henry J. Eggold    Preaching is Dialogue : A Concise Introduction to Homiletics
George W. Swank    Dialogic Style in Preaching : More Effective  Preaching Series


대체로 설교에서 성서의 본문을 강조하면 성서적, 복음적 또는 보수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본문보다는 본문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들은 과거에 성서에 관해서 어떻게 해석했는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의 문제점은 과거의 것을 현재의 상황에 일방적으로 적용시키려 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부분적 이해를 전체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견해를 절대적인 진리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견해들을 배척하는 태도를 취합니다.  
이러한 태도로는 성서의 근본적 진리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설교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려하지 않습니다.  
목회자 개인의 사상을 발표하는 것으로 간주하거나, 연예 오락물처럼 단순하게 즐기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대화의 정신이 결여된 설교는 청중을 관객이나 방관자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대화 형식을 설교에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설교 구연자의 질문에 청중이 대답하거나 청중의 질문에 구연자가 대답하는 형태입니다.  
이러한 대화 형식의 설교는 구연자의 의도대로 청중이 대답해야 하기 때문에 진정한 대화 관계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연자가 질문과 대답의 내용을 미리 결정해 둔 상태에서 진행되는 것은
구연자 자신의 의견을 청중을 통해서 말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설교가 끝난 후에 청중들이 모여서 설교를 들은 소감에 대해서 토론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설교 구연자와 청중간의 진정한 대화보다는
구연자의 의도를 청중들에게 명확히 전달하는 방편으로 이용될 수 있을 뿐입니다.  
의사 소통 이론(communication theory)은 메시지 자체보다는
설교자가 만든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에 초점을 둡니다.  
그래서 의사소통이론은 설교 구연자가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 자체의 문제점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방법으로는 진리의 개시로서의 설교의 기능을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본인이 제창(提唱)하고자 하는 “대화 설교”는 설교 구연의 외적 형식에 대화 형식을 도입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설교 준비와 구연 그리고 청취와 실천에 이르기까지 “대화의 정신”을 담는다는 것이 대화 설교의 핵심입니다.  

    1. 대화의 정신이란 무엇인가?
Reuel Howe는 대화가 진리 탐구에 필수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대화는 인생의 비밀을 발견하고 노정(露呈)하는 기적을 만든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대화는 교회와 세상간의 간격을 채워주는 교량의 역할을 합니다.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화적 인격을 소유하는 일입니다.
Howe는 대화적 인격으로 1) a total, authentic person, 2) an open person 3) a disciplined person 4) related person을 제시했습니다.  
   대화적 인격은 대화의 정신을 소유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 즉 대화적 언어(dialogical word)는 개방된 말로서
“응답에로 초대하는 기다림의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화 설교에서 설교의 목적은 신앙 고백의 내용 즉 지식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회중으로 하여금 신앙 고백을 실천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복음을 설교하는 목적은
그 지식을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으로 살아가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대화의 정신”의 핵심은 개방성(theory)과 실천성(praxis)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개방성(openness)이란 부분(部分)에서 전체(全體)를 보지만 부분을 전체라고 주장하지 않고,  
전체(totality)에서 부분을 보지만 부분(partiality)의 개별성(individuality)을 인정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실천성은 윤리적 책임성을 의미합니다.
개방성과 실천성은 설교 구연자와 설교 청취자에게 함께 요구됩니다.  

대화의 정신에 필수적인 포괄성(inclusion)은 개방성의 다른 표현입니다.  
설교 구연자와 회중의 상호 협동적 활동으로서 “대화 설교”는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대화 설교”는
설교 구연자가 회중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회중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건입니다.  

Henry Egggold는 하나님 말씀 그 자체의 존재 양식을 대화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 즉 대화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기 때문입니다.  
설교 구연자가 “대화 설교”를 실천하기 위해서 먼저 수행해야 할 과제는 구연 습관의 교정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설교문 작성 과정에 대화의 정신을 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대화의 축(axis of dialogue)이란 무엇인가?
한 편의 설교가 완성되기 위해서 대화에 참여하는 대화의 축은 다양합니다.  
대화 설교는 다음과 같은 대화의 축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설교 구연자에게 주어진 본문들의 저자를 들 수 있습니다.  
저자는 기록된 문서를 통해서 대화에 참여합니다.  
설교 구연자가 읽을 수 있는 모든 문서들(신문, 방송 매체, 문학 작품들, 타종교의 경전들, 등)의 저자도
대화의 축으로 참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설교 구연자와 설교 청취자인 회중도 개별적으로 대화의 한 축이 됩니다.
이러한 대화의 축을 설정함으로써, 설교의 준비, 구연,  청취 그리고 실천에 이르는 전 과정에
“대화의 정신”이 포함된 “대화 설교”가 만들어집니다.

    3. 대화 설교의 정의
“대화 설교”란 다양한 대화의 축들간의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개시(開示) 하고
공동으로 경청(敬聽)하는 사건(事件)을 의미합니다.  
“대화 설교”는 행위로서의 진리이며 하나님 말씀의 개시(開示) 행위입니다.  
“대화 설교”는 구연자와 청취자 사이에 신앙적 언어의 공유 영역을 확대하려는 행위입니다.  
“대화 설교”는 설교 청취자인 회중과 설교 구연자인 목회자가
성서에 제시된 진리를 개별적인 언어의 빛을 통해서 함께 드러내는 사건(事件)이면서 동시에 함께 깨닫는 과정입니다.
“대화 설교”는 목회자가 회중에게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행위가 아니라  
회중(會衆)과 설교 구연자(口演者)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행위 그 자체입니다.
한 편의 “대화 설교”는  구연자(목회자)가 성서와의 내면적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서 시작되고
구연자(口演者)의 구연(口演)을 통해서 회중(會衆)이 듣고 실천함으로서 완성됩니다.
그래서 설교의 결론과 제목은 회중의 몫입니다.  설교 구연자 자신의 결론과 제목은
한 사람의 회중으로서 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설교 왜곡의 근원은 무엇인가?
설교의 왜곡은 개별성과 전체성에 대한 설교 구연자의 혼돈에 기인합니다.  
다시 말해서 설교 구연자의 개별적인 종교 경험을 절대적, 보편적 진리로 착각하고
청중에게 용인(容認)을 강요할 때에 설교는 왜곡됩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설교 구연자는 대화의 정신이 결여된 설교를 베풀게 됩니다.  
구연자는 자신의 청중에 대한 지배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청중의 복창을 반복 강요합니다.  
그러므로 대화의 정신이 내포된 설교 구연에서는
구연자의 선창과 청중의 복창을 반복하는 구연 형식을 배제(排除)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연 형식은 구연자의 지배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화 설교에서 청중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려(思慮)있는 자발적인 공감(共感)입니다.

설교 왜곡의 근원은 설교구연자의 타자를 향한 지배 의지의 발동(發動)에 있습니다.
그래서 “대화 설교”는 원고 작성과 구연 과정에서 구연자의 지배 의지를 제거함으로써
대화의 정신을 담은 설교를 베푸는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5. 대화 설교의 실제

대화 설교에서 설교문을 작성하는 이유

    1. 구연자 자신의 언어 남용과 오용을 절제함으로써 잘못된 언어 습관을 수정한다.
    2. 언어의 절제를 통해서 구연자의 지배의지를 설교에서 배제한다.

대화 설교의 원고 작성과정에 대해서  

    1. 본문의 선택과 내적 대화
    구연자가 본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구연자에게 주어진다는 점이 “대화 설교”의 특징입니다.  
왜냐하면 설교 구연자가 본문을 선택할 경우에 회중에 대한 지배 의지가 설교 구연에 침투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대화 설교”에서 최소한 두 개의 본문을 선택함을 기본으로 합니다.  
교회력에 근거한 Lectionary에 제시된 본문을 3년 주기로 사용하는 것이 무난하리라고 봅니다.  
본문은 구약, 신약, 시편 신약의 서신에서 각각 한 단위식 선택할 수 있습니다.  
본문 선택 방법은 회중의 공동 작업으로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설교 구연자가 일방적으로 선택하는 일은 지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 선택에서 구약과 신약을 반드시 포함시키는 이유는
성서에 제시된 하나님의 말씀이 편파적으로 해석되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희랍 철학과 현실적 삶의 측면을 강조하는 히브리 철학의 만남을 통해서
예수의 교훈에 통합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봅니다.  

    주어진 단위 본문들의 저자들은 대화 설교 준비 과정에서 “대화의 축”이 됩니다.
단위 본문을 문학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원전을 이용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자만 다양한 번역판을 비교하면서 본문의 의미에 접근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석이나 성서 사전 등을 이용하여 본문이 제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합니다.  
    단위 본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듣게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문 작성에서 중요하게 이용됩니다.
단위 본문들이 공통적으로 제시하려는 말씀의 방향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드러난 공통 지향점이 곧 그 설교의 주제가 되고
구연자와 회중이 함께 듣게될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2. 내적 대화의 외면화로서의 원고 작성 과정
    1. Word Processor를 이용한다.
    2. 대화의 축으로 제시된 본문(1)을 펴놓고 읽으면서 자유로운 연상에 의해 원고를 작성한다.
문장의 논리성에 구애되지 말고, 뇌리에 스치는 이미지를 그대로 원고로 옮긴다.  
이 때에 가급적 성서의 본문을 보면서 연상하도록 한다.
    3. 준비 과정에서 읽은 자료들을 자유로운 연상에 의해서 연결시킨다.
가급적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지 말고, 그 내용을 자신의 말로 바꾸어서 쓰도록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서 창의적인 설교문을 작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에 설교 구연자의 동시대적 상황에 대한 분석 내용도 함께 입력시킨다.
     4. 본문(2)와 (3)도 동일한 방법으로 원고를 작성한다.
    5. 원고를 인쇄한다.
인쇄된 내용을 보면서 대화의 축을 중심으로 상관성, 또는 통일성을 염두에 두고 원고를 재정리한다.  
이때의 작업은 필기도구를 이용하여 자유롭게 가감한다.
    6. 검토된 내용(문장들) 중에서 통일된 주제를 중심으로 취사 선택하여  
Word Processor의 오려붙이기 기능을 이용하여 재배열한다.
    7 문장을 재정리한다.
강단에서 실제로 구연되는 언어 표현을 사용한다.  실제 상황을 연상하면서 설교문을 작성해 내려간다.
    8. 가급적 한 줄에 하나의 문장이 종결되도록 서술한다.
한 문장은 2줄 이상을 넘지 않도록 한다.  
복문이나 장문은 피하고 가급적 단문을 사용한다.  
특히 주관적 견해를 강조하는 표현들은 쓰지 않는다.    
                나는 확신합니다.
    믿습니다.
    분명히 보았습니다.
    체험했습니다.
    할 모양입니다.
    할 것 같습니다.
    했으면 합니다.
청중에게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
    해야 하겠습니다.
    해야 합니다.
    믿으세요.
    확신하세요.
    아멘 하세요.
    믿습니까?
    믿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예화(例話)의 도입과 인용은 간결하게 한다.
예화를 접하게 과정을 장황하게 설명하지 말고 과감하게 생략한다.

자신의 주관이 개입된 문장 표현보다는 객관적 서술형 문장을 사용한다.
간결한 문장을 쓰기 위해서는 주관성을 내포한 수식어 사용을 자제한다.
왜냐하면 수식어는 주관적인 서술에 치중하게 됨으로 문장을 가볍게 느끼게 한다.
    9. 원고를 인쇄한다.
   10. 청중의 입장에서 설교문을 검토하여, 구연자의 지배 의지를 내포한 문장을 수정한다.  
   11. 원고를 인쇄한다.

대화 설교의 특징
    1. 제목을 제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설교의 구연 과정이 대화라고 본다면
결론적인 제목은 당연히 마지막에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화 설교는 설교 구연자와 모든 회중의 공동 작품이기 때문이다.
  제목은 청중 각자가 결정한다.  
    2. 본문이 구약 성서와 신약 성서에서 택한 각각 1개 이상의 본문이 제시됨을 원칙으로 한다.
    3. 준비 과정, 구연, 경청, 실천의 제단계를 통합적인 한 편의 설교로  본다.
    4. 구연 과정에서 구연자의 지배 의지를 절대적으로 배제한다.
    5 청중에게는 사려있는 경청이 요구된다.
사려있는 경청이란 건전한 비판을 전제로 열린 마음으로 설교를 듣는 태도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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