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역사
조상제사에서 사자와 영적교류가 이루어지는가?
조상제사 종교적 의례인가 비종교적 의례인가?
죽은 자의 영혼이 오는가? 육체의 부활로 오는가?
제사의식의 상징성과 영들의 실제적 임재
종교적 의식으로서의 식사
조상제사는 우상숭배이다
종교혼합과 종교개혁
역 사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개신교가 유럽에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려고 투쟁하고 있는 동안 천주교의 예수회는 지리상의 발견 후 알게 된 새로운 세계로 정력적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런데 천주교의 세계선교에는 하나의 명확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토착종교와의 혼합화(Syncreticism) 현상이었다.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토착종교와 혼합화를 이루었다. 예를 들어 인도에서는 노빌리에 의해 힌두교와 일본에서는 사비에르에 의한 불교와 중국에서는 마태오 리치에 의해 유교와 혼합화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사비에르에 의해 시작된 예수회의 이러한 적응주의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띄게 되는데 그래서 혼합화, 토착화, 상황화, 이중종교체계 등등의 다양한 용어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그래서 학자들도 어디서부터 혼합화이고 어디서부터는 아닌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다고 말한다. 어쨌든 천주교가 유교의 조상제사를 수용한 내용을 살펴보면 이것이 한국에서 일어난 가장 대표적인 혼합화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천주교의 조상제사 도입은 전형적인 혼합화라는 주장은 앞으로 전개될 내용에서 명확해 질 것이다.
중국에서는 특이한 상황이 벌어졌다. 마태오리치에 의한 유교와의 혼합화가 일어났는데 이 혼합화신학과 선교 자체가 끝장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일본에서도 천주교 선교와 믿는 것을 금지하는 박해가 일어났지만 중국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중국은 선교지에서 문제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바티칸에서 먼저 문제가 발생했다. 즉 일본이 토착 정권의 문제로 천주교의 선교를 금지했다면 중국은 중국정권에서 먼저 문제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바티칸에서 먼저 문제를 발생시켜 그 반작용으로 중국정권이 선교를 금지시키게 된 경우이다. 즉 일본과 달리 중국의 혼합화 신학은 로마교황청에 의해 금지되었던 것이다. 천주교가 전파된 세계 모든 지역에서 혼합화가 일어났지만 중국처럼 혼합화가 로마교황청에 의해 금지되고 이단판정이 내려진 곳은 없었다. 어쨌든 중국전례논쟁(The Chinese Rites Controversy)으로 불리는 이 논쟁은 중국을 넘어 한국천주교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미쳐 1만 명이라 순교자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이 논쟁은 천주교뿐만 아니라 한국 개신교에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
어떤 학자들은 한국 개신교가 조상제사를 금지하게 된 이유가 개신교 선교초기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분명 올바른 지적이다. 그러나 개신교의 조상제사 금지를 단순히 선교사들의 보수성의 탓만으로 온전히 돌리는 것은 원인을 너무 단순화 하는 것일 것이다. 많은 이유들이 있었겠지만 그 중에는 천주교의 영향도 컸다. 왜냐하면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 왔을 때 이미 한국의 천주교인들이 중국전례논쟁의 여파로 조상제사를 금지해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형성된 한국의 개신교도들도 이미 조상제사를 금지하고 있었을 것이다.1) 그러므로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은 중국과 한국에서 천주교가 경험했던 오랜 혼란과 박해와 고민 없이 조상제사 금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당당히 요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천주교의 중국에서의 전례논쟁과 선교의 실패 그리고 전례논쟁으로 인한 한국에서의 천주교의 박해는 한국 개신교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큰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조상제사 금지로 천주교가 혼합화를 못 이루었고 박해받아 세력이 미미한 관계로 한국은 19세기 말 개항을 할 때 개신교와 천주교가 같은 출발선에서 선교를 하게 되었고 이후. 중국과 한국의 개신교도들에게는 동남아와 인도에서와 같이 토착 종교와의 혼합화된 천주교의 혼합화의 위협없이 순수한 복음을 전하고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39년까지 중국과 한국은 천주교의 토착종교와의 적응주의적 혼합화의 씨가 움트지 않은 유일한 지역이 되었다. 특히 한국은 서구제국주의 국가들이 아닌 일본의 공격을 받음으로 서구 국가들에 대한 반감이 적은 상태였고 오히려 일본을 이기기 위해 서구의 힘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개신교를 받아들이려하는 사람들이 많아 복음전파에는 옥토였고 개신교는 급속히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즉 천주교의 조상제사 금지는 개신교의 토착종교와의 혼합화를 방지하는데 큰 힘이 되었음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천주교가 1939년까지 조상제사를 금지하는 칙령을 유지한 덕에 한국에서는 청교도적인 순수한 형태의 개신교를 정착시킬 수 있었다. 개항이후 1939년까지가 한국 개신교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 시기에 한국은 성공적으로 순수한 개신교의 씨앗의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웠고 뿌리가 퍼져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나무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개신교의 성격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은 인도나 동남아와 같이 초기에 천주교의 씨앗이 뿌려졌다. 마태오리치가 유교와의 혼합화의 씨앗을 뿌렸는데 동남아나 인도 등은 씨가 움텄지만 중국은 움트지 못했다. 그 이유는 정치적인 이유였다. 동남아나 인도에서 천주교의 적응주의적 선교가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에는 중국과 같은 통일된 제국, 절대적인 군주와 여기에 수반된 군사력과 정치력이 없어서 일찍이 포루투칼과 스페인 등의 서구나라들의 식민지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천주교의 중국선교의 실패는 중국이 하나의 황제에 의해 다스려지는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라는 사실을 무시하여 신중한 협상을 하지 않고 포루투칼이나 스페인의 식민지에서와 같이 교황청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려다가 쫓겨난 경우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카톨릭 내부의 예수회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국전례논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구교가 먼저 전파되어 뿌린 신앙의 내용이 후에 선교사들을 파송한 신교의 선교활동에 많은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즉 동남아와 같이 천주교의 혼합화가 이미 뿌리를 내린 곳에는 이후에 개신교가 들어가도 토착종교와의 혼합화의 영향력이 거셌고 중국전례논쟁의 영향을 받아 토착종교인 유교와의 혼합화가 금지된 한국은 토착종교와의 혼합화의 영향력을 덜 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마태오리치가 뿌린 혼합화의 씨앗은 썩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잠시 동결된 것이었다. 천주교가 1939년 조상제사금지를 철회하자 이 씨앗은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더욱이 제2차 바티칸 회의에서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면서 혼합주의는 더 화려하게 부활하기 시작했다. 천주교와 일부 진보적 개신교인들의 주도에 의해 토착화 논쟁이 일어났고 종교다원주의 신학이 융성해졌고 그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유교와의 혼합화의 압력을 강하게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유교뿐만이 아니라 불교나 다른 종교와도 교류를 하기 시작했다. 이제 개신교는 더 강한 혼합화의 압력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면 중국전례논쟁의 과정과 그리고 그 결과가 한국에 어떤 영향과 결과를 초래했는지 살펴보자
지리상의 발견 후 포루투칼(1461)은 아시아와 아프리카과 스페인(1501)은 서인도제도와 아메리카에 대한 선교보호권을 교황으로부터 각각 부여 받는다. 예수회는 포루투칼의 후원을 받았고 도미니크회와 프란시스코회는 스페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예수회 선교사 마태오 리치는 1583년 중국에 들어왔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적응주의적 선교를 했다. 그래서 조상제사와 공자숭배를 사회적인 민간의례로 보고 비종교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허용했다.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가 중국에서 열매를 맺어가자 이에 따라 필리핀에서 도미니크회(1631)와 프란시스코회(1633) 등이 뒤따라 들어왔다. 뒤에 들어온 도미니크회(1631)와 프란스시코회(1633)는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선교방법에 놀랐으며 혼합주의의 의심을 품게 되었고 우상숭배라고 비난하게 되었다. 결국 선교단체간의 논쟁은 교황청에 해결을 요구하는 상황으로 갔다. 예수회는 포르투칼의 후원을 받고 있었고 도미니크회와 프란시스코회는 스페인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므로 결국 이 문제는 수도회들과 교황청의 문제에서 국가 사이의 문제로까지 번져 복잡해져가게 된다.
이 논쟁은 도미니크회의 선교사인 모랄레스가 중국에서 추방된 뒤 로마로 가서 1643년에 예수회의 선교방법에 대한 17개항의 질의서를 교황에게 제출함으로써 시작된다. 이에 교황 인노체시오 10세는
이 후 조선의 서학을 공부하던 남인들 중에
개신교는 선교초기부터 입교인의 조건 중 하나로 조상제사 금지를 채택했다. 1904년에 중국 중앙선교협의회에서 추도식을 도입하자 한국의 개신교도 이것을 받아들었다. 이 후 1920년에 경북 영주에 사는
이렇게 공히 신구교 모두가 우상숭배로 금지하던 조상제사를 천주교는 1939년 피우스 12세가 공자를 숭상하고 조상께 제사함은 시대의 변천과 풍속정신이 바뀌어진 현 세대에 와서는 한갓 선조에 효성을 표시함에 지나지 않는 민간의식이라면 다시 부활시킨다. 일본의 요청으로 교황청은 신사참배를 국가의례로 허락하더니 마침내 조상제사도 그렇게 허락하고 만 것이다. 이후 종전 후 신도는 국가법인화에서 종교법인화 되었고 신사참배는 다시 종교의식이 되었지만 천주교는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로 다시 금지하지 않고 그대로 비종교적인 것으로 계속 받아들었다. 이후 천주교인들은 조상제사를 계속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개신교인들은 신사참배를 다시 우상숭배로 여기고 조상제사와 함께 계속 금지하게 되었다. 그러면 왜 천주교인들은 조상제사를 용인했고 개신교인들은 천주교를 따라가지 않고 계속 금지하고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이유는 교리의 차이 때문이다. 우선 개신교의 교리부터 살펴보자 개신교는 성인과 마리아 숭배 그리고 이들의 중보권을 거부했고 연옥을 부인했다. 즉 사자와의 교류를 부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죽은 자에게 드리는 기도와 예배는 금지되고 불필요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신조들을 살펴보면 명확해질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조상제사문제에 대해 적극 반대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가들은 로마카톨릭 신앙의 핵심인 성인숭배 거부했고 유령들(죽은 자의 영혼)이 오는 것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즉 사자와의 교류를 부인한 것이다. 사자와의 통공이나 영적교류의 부인은 죽은 자를 위한 위령기도나 미사 등을 불필요하게 만들었고 조상제사도 불필요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조상제사문제는 종교개혁의 부수적인 문제가 아니라 카톨릭과 개신교를 결정적으로 갈라놓는 핵심적인 문제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예배모범에서는 매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누가 이 세상을 떠나면 죽은 시체는 매장하는 날 집에서 매장지까지 규범있게 옮겨가고 더 다른 의식을 하지 말고 즉시 묻을 것이다. 시체 앞에 무릎을 끓거나, 그 옆에 서서 죽은 시체를 향하여 기도하거나 매장지에 실어가기 전에 안치해 놓고 그 곳에서 하는 그런 행습과 습관은 미신적인 것이다. 그리고 매장지까지 가는 동안 또 매장지에서 기도하고 성경읽고 찬송하는 것도 많이 남용이 되었다. 그것은 죽은 자에게 아무 유익이 없고, 유가족에게 많은 상처를 주는 폐단이 있으니, 모든 그런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매장지까지 따라간 믿는 친구들이 그 경우에 합당한 성경 말씀을 상고하고 상론하는 것은 대단히 편리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목사가 참석하였으면 그런 경우 다른 때나 마찬가지로 저희의 의무를 생각나게 할 것이다.“5)
종교개혁가들은 그때까지 교회에 만연되어 있던 죽은 자들과의 영적교류를 부인했다. 그리고 마리아와 성인, 죽은 영혼들 출현을 마귀의 속임수라고 여겼다. 그래서 종교개혁기의 신앙고백서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음은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는 연옥과 영들의 출현에 대해 말한 것이다.
“죽은 자들에 대하여 지나치게, 그리고 터무니없이 관심을 쏟는 사람들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이방 사람들처럼 죽은 자를 위하여 슬퍼하고 통곡하며 , 죽은 자를 위하여 미사를 올리고 삯을 받고 기도문을 중얼거림으로 사랑하는 죽은 영혼들을 연옥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신자들이 육체적인 죽음 직후에 직접 그리스도에게로 간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찬양과 기도와 예배를 올릴 필요가 없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불신자들은 직접 지옥으로 던지움을 받아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이들을 위하여 어떠한 예배를 올려도 이들은 이 지옥으로부터 나올 수 없다.“
“죽은 사람들의 영 혹은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에게 나타나서 어떤 의무수행을 요구함으로 이 의무수행에 의하여 자신들이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요, 악마의 속임수와 술책에 불과한 것이다. 악마는 자신을 빛의 천사로 둔갑시킴으로 참 신앙을 뒤집어 업거나 회의로 바꾸어 놓으려고 애쓰고 있다. 구약에서 주님은 죽은 자들로부터 진리를 찾지 말라고 하셨고, 죽은 자들의 영과 어떤 교제도 해서는 안된다고 하셨다.”6)
그래서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에서는 성인을 기념하는 것은 설교 안에서 사람들에게 권하는 방법으로 하라고 한다.
“한편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적당한 시간과 장소에 따라 성자를 기념하는 것은 설교안에서 사람들에게 권하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며 성자들의 거룩한 모범은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것이다.”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 성인들에게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하늘에 있는 성자들이나 다른 신들을 숭배하거나 예배하거나 기도를 위해서 부르짖어서는 안된다. 이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우리의 중보자가 될 수 없고, 우리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올리는 자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하나님과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사나 성자나 그 어떤 피조물들도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타락 이후의 우리 모두는 중보자 없이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다. 이 중보자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뿐이시다.
“살아 있는 사람들과 장차 출생할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되 죽은 자들을 위해서는 할 필요가 없다.“8)
이렇게 개신교는 그 근본부터 죽은 자와의 영적 교류를 거부하고 그에게 어떤 경배를 드리는 것도 거부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개신교에서는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교리가 어떻게 천주교에서는 감히 선언되고 받아들여지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조상제사에서 사자와 영적교류가 이루어지는가?
먼저 취급 되어야 할 문제는 조상제사에 조상의 영혼이 오는가 또는 조상의 영혼과 영적교류를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조상제사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조상제사에는 조상의 영혼이 온다고 믿지 않으며 조상의 영혼은 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 중에는 천주교인들과 유교인들이 많은데 이런 주장은 천주교와 유교의 교리와 학문에 모순되는 문제점이 있다. 과연 유교는 조상제사에서 조상의 영혼이 오지 않는다고 주장했을까? 또는 사자와 어떠한 영적 교류도 없다고 주장할까?
물론 공자시대와 같은 고대에는 조상제사에 사자의 영혼이 오는 것은 더 정확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올라가 상제의 신하로 있으면서 자손과 상제 사이에 중보자 역할을 하면서 후손들을 돕는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후대에 나타난 유교인 성리학이다. 유교의 조상제사에서 조상의 영혼이 오는 것을 부인하는 이들은 성리학에서는 사자의 혼이 소멸되어 결국 원기로 돌아가기 때문에 유교의 조상제사에서는 사자의 영혼이 오지 않는다고 과장한다. 마태오리치는 혼이 소멸된다는 성리학의 주장을 지나치게 받아들여 유교에서는 혼이 소멸되기 때문에 유교인들은 사후세계나 영혼불멸을 믿지 않으며 조상제사에는 조상의 영혼이 오지 않는다고 믿는다고 과장했다. 이런 주장은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유교인들은 조상의 영혼이 온다고 믿고 제사를 지냈기 때문이다. 즉 성리학에서도 조상제사에 조상의 영혼이 온다거나 정신이 온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 조상의 영혼이 없다면 강신례로서의 조상의 영혼을 초빙하는 것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성리학은 조상의 영혼이 4대의 기간을 거쳐 천천히 소멸하는 것으로 상정함으로써 제사를 살려냈다고 한다.9) 또는 유교의 제사는 고대의 영혼관념을 반영하며 무속의 영혼관념이 유교와 공유되는 부분이라고도 말한다.10) 마태오리치도 조상제사에 조상의 영혼이 오지 않는다면 조상제사는 공허한 놀이일 뿐이라고 말한다.11)
주희는 죽은 자의 영혼은 빨리 원기로 사라지지 않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사라진다고 말한다. 즉 4대까지는 영혼이 원기로 완전히 화하지 않고 제사 때 찾아온다고 말함으로 조상의 영혼이 오며 조상의 영혼과 감응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현재 대부분의 한국 가정에서는 1대밖에 제사지내지 않는다. 4대까지 제사를 지내는 가정은 많지 않다. 어쨌든 1대는 제사를 꼭 지내기 때문에 1대 조상에 대한 제사 때는 조상의 영혼이 오는 것이 신유학적으로도 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상의 영혼이 오지 않는다는 주장은 대부분의 한국가정에서 행하는 제사에는 현실적으로 그리고 신유학적으로 틀린 주장이 되는 셈이다. 결국 조상제사에는 사자의 영혼이 오는 것이다. 그리고 한 마디 더한다면 신유학은 인간의 영혼이 완전히 소멸되어 원기로 돌아가더라도 사자의 정신과는 감응할 수 있다고 한다.12) 왜냐하면 성리학은 인간과 자연과 우주가 모두 하나의 전체주의적 범신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상에게 대한 제사나 공자에게 대한 제사나 하늘에 대한 제사나 모두 동일하게 하나의 전체적인 정신과 감응한다는 것이다.13) 그러므로 4대 이상 또는 공자와 같이 고래에 죽었고 또 나의 직계 조상이 아니더라도 지성으로 제사하면 정신적으로 감응한다.14) 즉 어찌보면 성리학의 영혼은 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서양식으로 말하면 우주혼이요 절대정신이요 절대이성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어쨌든 유교의 제사에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감응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리학적으로 신주에도 진짜 조상의 영혼이 깃드는 것이지 사모하는 마음의 의지처만은 아니다.
중국선교 초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은 사자의 영혼들이 천국, 지옥, 연옥 등에 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아닌 한 그 곳에서 나올 수 없어서 조상제사에 조상의 영혼들이 오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 대신 귀신이 조상이라고 속이고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회의 이런 주장은 현재에 한국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천주교는 사자와의 영적교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즉 성인숭배, 마리아 숭배, 죽은 성도와의 성령 안에서의 교통,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등 천주교는 죽은 자와의 영적 교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조상제사에서는 조상의 영혼이 오지 않는다고 주장하는가? 조상제사에서 조상의 영혼이 오지 않는 이유로 든 것은 중국인이 기독교인이 아닌 이방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아니면 이방인으로 죽은 자와 영적인 만남을 가질 수 없다. 이방인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니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 교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순은 이방인으로 죽은 조상이 아니라 기독교인으로 죽은 조상에게 제사 드릴 때 드러난다. 이때는 교리적으로 조상의 영혼과 영적교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천주교에서 행하는 유교식 조상제사를 대체한 천주교식 조상제사 시안이나 위령미사, 명절에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 예식서들을 보면 조상과의 영적교류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15) 천주교를 따르는 경동교회 같은 일부 진보적 교회의 추도식을 제외한 대부분의 보통 개신교의 추도식 예식서를 살펴보면 개신교는 영적 교류를 부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천주교의 예식서들은 마태오리치의 조상제사에 죽은 자의 영혼이 오지 않는다는 주장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낸다.
천주교회 추도예식
1989년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에 제시된
1) 개식 해설: 추도예식(제사)의 취지 설명과 함께 개회를 알린다.
2) 성호경과 성가 : 성가를 부르는 동안에 고인의 영정을 내모실 수 있다.
3) 분향제례: 祭主가 분향한 후 참석자 모두는 제주와 함께 再拜한다.
4) 시작기도: 시작을 알리는 기도를 드린다.
5) 시편송도: 시편 27:1-11,
6) 성경봉독: 집회서
7) 주례자의 말씀: 예식 주례자가 봉독한 성경말씀을 바탕으로 제사의 의미, 선조의 유언, 가훈 등에 대하여 되새긴다.
8) 신앙고백
9) 신자들의 기도 : 신자들의 기도는 자유롭게 바칠 수 있으며 기도문으로 대신 드릴 수 있다.
10) 분향과 배례: 술, 과일, 음식, 꽃 등을 봉헌 할 수도 있다. 참례자가 많을 경우에는 대표자 몇 명만 할 수도 있다.
11) 독축
12) 묵념: 참예자가 침묵 중에 고인께 감사드리면서 잘못에 용서를 구하며, 새로운 삶 의 결의를 다진다. 아울러 필요한 은혜에 대하여 선조께 전구를 청한다.
13) 화해와 사랑의 인사
14) 주의 기도와 영광송
15) 작별고함
16) 마침성가 : 마침성가를 부르는 동안 영정을 본래 위치로 모셔갈 수 있다.
17) 음복: 사랑과 일치의 잔치로서 선조와의 통교, 가족 간의 일치를 더욱 돈독하게 한다.
한국개신교회 추도식
예수교 장로회(통합) 추도식
1) 개식사: 주례자가 지금부터 故 *** 씨의 *주기 추도식을 거행하겠습니 다.
2) 신앙고백: 다같이 사도신경을 암송함으로 신앙을 고백한다.
3) 찬송 :534장이나 다른 적절한 찬송을 부른다.
4) 기도: 기도 맡은 사람이 기도한다.
5) 성경봉독: 히브리서
6) 말씀: 추도식 인도자가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설교한다.
7) 기도: 순서맡은 이가 기도한다.
8) 고인의 양력보고 , 추모사, 고인의 유물, 유언 등을 소개하고 추모한다.
9) 찬송 531장이나 다른 적절한 소망찬송을 부른다.
10) 축도: 목사의 축도로 추도식을 마친다.
그러므로 예수회 선교사들은 조상제사에 조상의 영혼이 안 오는 비종교적인 민간예식이라고 주장하기보다는 차라리 기독교인으로 죽은 조상에게는 조상제사를 드려도 된다고 했어야 했다. 천주교인들이 유교의 조상제사를 비종교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카톨릭식 조상제사는 종교적인 예배로 여긴다. 이것은 모순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유교 조상제사는 오직 조상에게만 경의를 표하고 예배하지만 카톨릭 제사 예식 안에서는 조상과의 영적인 교류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예배드리기 때문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두 예식을 본 사람이라면 천주교식 조상제사가 종교적인 것이라면 유교식 조상제사도 종교적인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결국 이런 천주교의 예배는 두 신을 섬기는 이중종교체계가 혼합된 형태의 예배일뿐이다. 어쨌든 학자들은 성인들과의 통공에 관한 교회의 교리는 지역의 조상 숭배와 비슷하다고 말한다.16) 개신교의 진보적 학자인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왜 예수회가 조상제사에 조상의 영혼이 안온다고 끝까지 주장했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다시 역사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도미니칸 선교사들은 조상제사가 흠숭지례이고 종교의식이며 중국인들은 조상제사에 조상의 영혼이 온다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이런 타 선교단체들의 비판과 고발에 예수회는 교황청에 마르티니를 파견해 다른 선교단체들이 무식한 사람들을 상대로 선교해서 유교와 제사를 잘 모르고 오해했다고 거짓말을 한다.17) 즉 유교인들은 제사에 조상의 영혼이 온다고 믿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마태오리치에게 유교학자들은 조상제사에 조상의 영혼이 온다고 분명히 말했다. 안온다고 본 것은 마태오리치의 자기중심적인 의도를 가진 해석일 뿐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리학의 학설에 따르면 조상제사에는 조상의 영혼이 오게 되어있었다. 그러므로 도미니칸의 비판은 정당하고 옳은 것이었다. 백번 예수회의 주장을 인정한다고 해도 도미니칸의 주장처럼 미신적으로 기복적으로 믿는 무식한 이들이 있다면 이는 금지되어야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므로 파리대학의 결정은 옳은 것이었다. 사실 지금도 한국에서 조상제사에 조상의 복을 구하는 것은 많이 배운 자나 적게 배운 자나 다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실이 그렇게 기복적으로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일부 몇 명 때문에 오도해서는 안된다. 역사적으로도 기복적인 조상제사가 먼저였지 공자나 성리학자들이 먼저는 아니었다. 조상제사는 일부 학자들이 만든 종교가 아니라 고래로부터 내려와 그들보다 먼저 중국에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종교의식이다. 그러므로 고래로부터 내려온 기복신앙을 어떻게 없앨 수 있었겠는가? 그러면 예수회가 끝까지 중국인들은 조상제사에는 조상의 영혼이 온다고 믿지 않으며 조상제사에는 사자의 영혼이 안오며 또 조상제사는 흠승지례가 아니고 공경지례고 종교의식이 아닌 비종교적인 시민의례라고 주장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만약에 예수회가 중국인들은 조상제사에 사자의 영혼이 온다고 믿는다고 인정한다면 조상제사는 더 이상 비종교적인 시민의식이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즉 하나님께 드려야할 제사예배를 인간에게 드리는 것, 즉 도미니칸의 비판처럼 하나님께 드려야할 흠숭지례인 종교예식 즉 제사를 인간에게 드리는 것이 되는 것이다. 물론 천주교인이 사자에게 그런다면 예배를 나누는 법에 따라 공경지례로 허용의 여지가 있겠지만 이방인들인 중국인이 천지만물과 사자에게 드리는 제사는 분명 우상숭배인 것이다. 그러면 예수회가 이때까지 중국에서 이루어 놓은 적응주의적 선교업적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회는 타 선교단체의 주장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고 타 선교단체가 불학무식한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서 잘못알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런 식의 혼합주의적 선교정책은 예수회의 특징이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예수회는 타종교단체에게서 똑같은 비난을 받았다.
개신교는 사자와의 영적 교류를 부인한다. 사람이 죽으면 천국과 지옥에 가 있으므로 산자와 죽은 자가 서로 교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조상제사는 실체가 없는 비인격적인 존재에게 하는 것이므로 우상숭배라고 말한다. 부언하면 천국과 지옥에 간 영혼은 그곳을 벗어날 수 없고 또 천주교처럼 산자와 영적교류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조상제사에서 만약 조상의 영혼이 나타난다면 당연히 사단이 속이고 나타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어찌됐던 간에 실제 조상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은 많은 영적인 체험을 한다. 조상의 영혼이 오는 것을 영적으로 체험하고 조상의 도움을 요청한다. 어떤 이는 제사를 받아먹으러 온 아버지의 영혼이 호랑이로 보이고 제사하는 자식은 개로 보였다고 한다. 또 기독교인이 있어서 조상의 영혼이 못 들어온다고 다툼이 있었다고도 한다. 아무리 일부학자들이 조상제사에서는 조상의 영혼이 오지 않는다고 주장해도 제사에서 영적인 체험을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현실감이 떨어진 탁상공론처럼 보일 뿐이다.
조상제사 종교적 의례인가 비종교적 의례인가?
조상제사의 비종교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국민적 의례, 사회적 관습, 전래의 좋은 풍습. 등의 단어들을 종교와 대비되는 비종교적이다는 의미로 쓴다. 그러나 여러 문화권에서 이런 용어들은 종교적인 것과 비종교적인 것으로 구분하여 사용하진 않았다. 옛날에는 종교의 시대였다 그러므로 국민적 의례, 전래의 관습이나 풍습에는 많은 종교적 요소가 포함되었거나 종교적인 것 그 자체로 되어있었다. 이슬람 문화권, 힌두교 문화권, 유교적 문화권 등에서는 종교적 의식이 곧 국가적 의식이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정치의 최고의 통치자가 곧 종교의 최고의 사제였다. 유교문화권에서 하늘에 대한 제사는 황제만이 드리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이후 동로마 황제는 곧 기독교의 최고 사제였다. 기독교의 국가 사회의례의 지배현상은 서로마제국의 후신인 서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즉 서유럽인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모든 인간의 삶이, 왕이든 가장 낮은 자든 기독교 의식의 지배를 받았다. 마태오리치가 중국에 선교하던 시절의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와 같이 종교가 국가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종교의 시대에는 모든 의식이 종교적 의식인지 아닌지 구분하지도 않았고 구분할 필요도 없었다. 그럼 의례, 관습, 풍습, 의식을 종교적 의식과 비종교적 의식으로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아마도 프랑스혁명 때부터라고 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지 않을까 한다.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대리자로 자처했던 절대왕정의 지배하에 있던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 이후 비기독교화, 세속화가 추진되었다. 기독교 교리는 인권선언으로, 교회법은 국가헌법으로, 십자가 대신 삼색기로 바뀌었다. 한때 거의 모든 교회성당이 문을 닫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1805년의 제3공화국은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규정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물론 이전에도 국가와 종교의 영역에 대한 논의가 어거스틴, 루터 깔뱅 등에 의해 논해졌지만 19세기의 여러 사상들 자유주의, 국민주의 등처럼 실제로 현실에 적용되지는 못했다.18) 미국도 1791년 수정헌법 제1조에 정교분리를 입법화했다. 그러나 이런 시대의 조류에 역행하는 나라도 있었는데 일제는 정반대로 정교일치의 방향으로 갔다. 일제는 신도를 국가신도로 만들어 신도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신사참배를 종교적 의례가 아니라 국가 의례라고 주장하며 강요했다. 그러나 종전 후 신도와 국가를 분리하는 정교분리를 입법화하여 결국 국가신도가 종교였고 일제는 정교일치의 나라였다는 것을 증명했다. 우리나라도
어쨌든 종교를 이용해서 왕에 대한 충성과 나라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시도는 역사에서 항상 있어 왔다. 그러므로 국민의례이기 때문에 종교적 행위가 아니다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잘못된 것이다. 국민의례와 종교적 의미를 적대적인 것으로 하나가 있으면 다른 하나는 없어져야한다는 흑백논리의 이분법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종교적 의식을 사용했다면 이 종교적 행위에 국민의례라는 의미를 하나 더한 것이지 종교적 의미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지금도 일본 정치인들이 하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이러한 경우이다.
공자의 저서에서 보듯 제례전문가였던 공자는 효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조상제사를 이용했다. 조갑이 조상제사를 왕권수호에 이용했듯 공자는 자신의 예교적 사상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조상제사를 이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조상제사의 종교적 의미들 속에 효라는 의미가 하나 더해진 것이지 효라는 의미가 더해졌다고 다른 종교적인 의미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즉 조상제사에 효라는 의미가 더해졌다고 조상제사가 비종교적인 의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도 이분법적인 해석은 금물이다. 조상제사가 효도라면 종교적이 아니다. 즉 종교적이라는 말과 효라는 말을 서로 적대적인 관계로 여겨서 이것이면 저것이 아니라는 사고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공자는 효를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승화시킨 장본인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현상들을 종교적인 국민의례 그리고 종교적인 효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유교의 조상제사는 효를 사후에 까지 연장하는 사후의 효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게 된다. 기독교도 유교와 비슷한 효사상이 있다. 인간들을 위하여 주어진 첫 계명인 제5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한다. 그런데 기독교의 효는 특히 개신교의 효는 사후까지 이어지지 않고 현세에서 끝난다. 즉 살아있을 때만 효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적 진리라는 것이다. 아무리 부모라도 죽은 자에게 산자가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는 연옥론을 통해 산자가 죽은 자에게 영향력을 끼치므로 이런 사후의 효를 적용할 수 있다. 이것이 천주교는 조상제사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고 개신교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이다.
그리고 유교의 도덕을 강조하는 이들은 이 예교성을 내세워 유교에 포함되어있는 종교성을 무시하려고 한다. 어느 종교나 예교성은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도 그들의 구약을 살피면 10계명 중 6계명은 인간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율법에는 많은 제사제도에 대해 자세히 설명되어있고 신과 인간 사이에 대해, 또 인간과 인간 사이에 대해 많은 법률이 나온다. 어쩌면 제사장 그룹인 사두개인은 자신들이 제례전문가인데도 불구하고 영적인 문제보다는 오히려 공자와 같이 인간적인 문제에 더 관심했을 수도 있다. 어느 종교나 어느 문화권이나 안정기에 접어들면 예교성이 발전하게 되어있다.
중국전례논쟁에서 처음에는 예수회선교사와 다른 선교사 단체들 간에 흠숭지례인가 아니면 공경지례라인가의 논쟁에서 보듯 아직 조상제사를 종교적인가 비종교적인가의 개념보다는 예배의 분류에 더 초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당시에 천주교 선교사들은 유일신에게 드리는 예배만 종교적인 것이요 그 외의 존재에게 드리는 것은 비종교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명확히 갖고 있었던 것 같아보이지는 않는다. 당시에 동서양 막론하고 비종교적인가 종교적인가라고 나누려는 명확한 개념이 없었다고 보여진다. 이는 오직 기독교만이 존재하던 서유럽인들이 지리상의 발견이후 비기독교지역에 들어서면서 토착종교와 부딪치면서 점점 명확해진 개념같다. 우리는 중국전례논쟁에서 천주교 선교사들이 유교와 유교의 제사에 대해 종교적이다와 비종교적이다는 개념을 만들고 적용하는데 많은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비단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중국인들도 혼란을 겪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유럽인들이 유럽에만 있을 때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성인들에게 드리는 기도나 예배를 흠숭지례와 공경지례로 나누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성인에 대한 기도나 공경지례가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며 금지했던 콘스탄틴 5세의 금지령은 동로마제국에서 성화상숭배파가 승리한 9세기 이후에는 성인숭배가 정통이며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유럽 안에 있을 때는 이것이 종교적인 것인다 비종교적인 것이다라고 굳이 나눌 필요가 없었다. 이는 조선이나 중국의 사람들이 조상제사를 종교적인 것이지만 효도라고 여기며 이해하는 것과 같다. 즉 종교적인 의미는 공기와 같이 당연히 있는 것이기에 논의에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서양의 두 종교가 만났을 때는 종교적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표면으로 떠오른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천주교식의 영혼불멸의 영혼이 오지 않기 때문에 유교가 종교가 아니고 조상제사나 공자제사가 공경지례요 제사가 아니고 시민의례라고 억지주장을 했다 심지어는 하늘과 땅에 지내는 제사도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 일뿐이라면 모든 유교적 제사의 비종교화를 시도했다. 이는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다. 하늘과 땅에 드리는 제사를 단지 감사의 표현이요 비종교적인 행위라는 시각은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억지주장에
조상제사가 종교적이다. 아니다라는 질문이나 토론은 어찌보면 우문우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사’라는 용어자체가 종교적 용어이고 종교학자들이 말하듯이 제사의식의 형식과 내용 자체가 사자의 영혼을 부르는 전형적인 초혼의식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현문현답은 유교가 종교적인가 비종교적인가(철학적인가)? 묻는 것일 것이다. 유교라는 철학 안에 종교적인 것에 대한 언급이 있고 그 중 하나가 조상제사에 관한 것이라고 보면 문제는 한결 쉬워진다. 플라톤이나 유명한 철학자들도 자신의 철학 저서에 종교적인 것에 관하여 언급한다. 또 고대의 세계관이 종교와 구분할 수 없이 섞어있는 경우가 많았고 종교가 곧 세계관인 경우가 많았다. 이 둘을 분리하여 다루기란 지난한 일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중국전례 논쟁에서 예수회는 중국인들은 조상제사에 조상의 영혼이 오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조상제사는 정식제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상제사는 흠숭지례가 아닌 공경지례이고 비종교적인 의식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다른 선교단체들은 중국인들은 조상제사에 조상의 영혼이 온다고 믿기 때문에 우상숭배요 미신이다. 그리고 조상제사는 하나님께 드려야할 흠숭지례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태오리치는 공자의 저서인 서경과 시경을 인용하면서 고대에 중국 사람들은 하늘에 상제가 있다고 믿었고 죽은 조상은 이 하늘나라에 가 있으며 산자와 상제사이를 중재하며 영원히 사는 것으로 믿었다고 주장하므로 신유학의 영혼이 원기로 돌아간다는 사상이 최근에 이루어진 사상임을 밝혔고 고대로부터 내려온 조상제사가 사자의 영혼을 부르는 초혼술이었음을 드러내어 제사가 종교적인 행위였음을 드러냈다. 더욱이 고대의 중국성인들을 기독교의 성인과 똑같아 천국에 갔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면 성령 안에서 고대의 성인들과 통공이 이루어져야하는데 조상제사에서는 유교 성인들과 영적교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모순된 주장을 펼쳤다. 어쨌든 이렇게 유교제사는 이방인에 의해 조상의 영혼과 정신과의 만남도 감응이 일어나지 않는 종교성이 철저히 배제된 이상한 종교의식을 가진 비종교적인 종교의식이 되버리고 만다.
여기서 두 적대 단체들이 자신들의 주장으로 펼치기 위해 그 근거로 끌어들인 신학적 이론인 예배를 구분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이 이론은 예배를 하나님께 바치는 흠숭지례(Latria), 성인들에게 바치는 공경지례(Dulia), 마리아에게 바치는 특별공경지례(Hyperdulia)로 구분하는데 공경지례와 특별공경지례는 우상 숭배나 제사나 예배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예배를 정확하게 나눌 수 있을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다만 예배의 형식보다는 예배의 대상이 누구냐에 달린 것 같다. 이 이론은 8-9세기 동로마제국에서 일어나 성화상 숭배금지 논쟁 가운데 파생됐는데 성인이나 마리아 숭배는 우상숭배라는 주장에 반대파들이 해결책으로 내놓은 이론이다. 동방정교회나 카톨릭이 가지고 있는 이런 개념이 중국전례 논쟁에서 다시 부활한 것이다. 동로마제국에서 성인이나 마리아에게 드리는 예배가 우상숭배라는 주장에 대항하기 위해 제시된 이 이론이 이제는 중국전례논쟁에서 조상제사가 우상숭배라는 주장에 대항하기 위해 다시 인용되게 되었다.
그러면 여기서 잠깐 개신교의 입장을 들어보자 개신교는 마리아와 성인의 중보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성인숭배와 마리아 숭배가 비성성적이요 우상숭배로 본다. 즉 귀신이 천사나 성인이나 마리아로 위장하고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이나 마리아에게 드리는 기도나 예배자체가 없기 때문에 예배를 구분하는 이론도 필요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외에 다른 영적존재에게 기도하고 경배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규정한다. 그러므로 한국의 개신교도 예배면 예배, 제사면 제사 용어 그자체로 모두 종교적인 것이지 어떤 특별한 예배와 제사는 비종교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어쨌든 흥미로운 것은 이런 천주교와 서구의 다양한 사상의 영향으로 유교의 비종교성을 그리도 주장하던 유가들이 스스로 유교의 비종교성을 포기하고 유교를 종교법인화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신도를 비종교법인화 해 신사참배가 국가의례라면 강요하던 일제가 패망 후 신도를 다시 종교법인화 하여 신사참배가 다시 종교행사가 되었다는 것은 유교의 종교법인화와 함께 조상제사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쨌든 제사가 종교적인가 비종교적인가를 나누는 근거는 예배를 나누는 이론에 있고 예배를 나누는 이론의 근거는 성인숭배와 사자와의 영적교류 즉 통공에 관한 이론에 있다. 그러므로 성인숭배와 사자와의 영적교류가 성서적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것이 조상제사가 우상숭배인지 아니지를 판별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 알아보자.
죽은 자의 영혼이 오는가? 육체의 부활로 오는가?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자신의 어머니 모니카가 죽과 빵과 술을 가지고 순교자들의 기념사당에서 바쳤다고 한다. 그런데 감독 암브로시우스가 이런 기념행사가 이교도들의 미신과 흡사하다는 이유로 금지시키자 이에 순종했다고 적고 있다.21) 그리스인들은 죽은 유명한 영웅들을 신으로 여겨 제사를 드렸고 로마인들의 자신들의 조상에게 제사를 드렸다. 우리는 그리스, 로마의 사자숭배가 순교자 숭배로 즉 성인숭배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구약이나 유대교에 없던 성인숭배가 로마제국에서는 번창했던 이유는 토착종교와의 종교적 혼합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현재 한국의 천주교가 유교의 조상제사를 카톨릭 제사로 전환하여 흡수한 것과 같은 것이다.
현대 신학자들은 히브리적 개념은 인간을 영육이 하나로 여기는 전인적인 개념이고 그리스적 사고는 인간을 영과 육으로 나눈다고 한다. 그리스적 사고는 육을 감옥이요 버려야할 것, 악한 것으로 보고 영은 신적인 것 영원히 사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오스카 쿨만22)과 같은 학자들은 성경은 육체의 부활을 이야기 했지 그리스적인 영혼불멸을 이야기 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천주교의 성인숭배도 결국은 그리스적인 영혼불멸적 사고의 결과이며 초혼적 영적교류를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천주교가 성인숭배의 성서적 근거로 제시한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리스적 초혼적 영적교류가 아니라 육체를 가진 부활의 몸으로 오는 것을 더 지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인숭배의 근거로 제시된 마27:52-53절에서 예수가 죽은 후 성도들이 많이 부활한 몸으로 성안에 들어왔다고 했지 성도의 영혼이 성에 나타났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또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 유대종교지도자들과 몇 가지 논쟁을 벌이는 데 그 가운데 부활 논쟁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인들과 같이 영혼불멸에 관해 논쟁하지 않았고 부활에 관해 논쟁했다. 이 부활 논쟁은 유대인들이 그리스인들과 다르게 영혼불멸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천주교가 성인들의 기도에 의지하는 증거로 내세운 대상29:18절의 “우리 열조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라는 구절은 부활 논쟁에서는 오히려 부활의 증거로 인용된다. 막12:26-2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초혼행위는 구약에서 금지된 것이었고 이런 행위를 하는 신접한 자, 무당은 죽이도록 되어있었다.
성경에서 산 인간이 죽은 자를 다시 만나는 사건은 죽은 영혼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한 예수님처럼 육체를 가진 부활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부활하지 않고는 다시 산 자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에 죽은 영혼이 올 수 있다면 구약의 선지자들 중에는 죽은 영혼을 소환하는 선지자들이 나타나야 하지만 구약에서는 단 한 명의 선지자도 죽은 자의 영혼을 소환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영혼과의 만남은 비성서적이요 마귀의 속임수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8장 19절에는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라고 말한다. 사울 왕이 율법을 따라 자기가 쫓아냈던 무당을 다시 찾아가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내 사무엘을 만나는 장면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우선 우리는 이것이 적법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사장도 아니요 선지자도 아닌 율법에서 죽이라고 명령한 귀신을 섬기는 신접한 자가 강신 행위를 해서 불러낸 사무엘을 우리는 정상적인 사무엘이라고 볼 수 없다. 그 사무엘은 바로 마귀의 속임수이다. 마귀가 사무엘로 변장하여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사울은 그를 보지 못한다. 단지 무당이 보고 설명해준다. 사울은 무당의 입을 통해 그와 대화를 나눈다. 우리는 구약의 선지자가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장면은 볼 수 있다. 선지자들의 부름은 강신행위와는 다르다. 강신행위에는 육체가 없다. 엘리야는 왕상17장에서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려내고 엘리사는 왕하4장에서 수넴여인의 아들을 살려낸다. 온전히 육체를 가지고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이 두 선지자는 절대 영혼만을 소환하지 않는다. 죽은 자를 부활시키지 영혼만을 부르지는 않는다. 예수님도 죽은 자를 부활시키신다. 죽은 자를 육체를 가진 상태로 부활시키시지 그 영혼만을 불러내는 행위를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곧 육체의 부활이다. 영혼만의 소환이 아니다. 예수님은 장례를 치르러 성을 나가는
하나님은 영혼으로서의 인간을 절대 보내시지 않는다. 성경에는 이러한 예가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성경적으로 보면 죽은 자와의 영적교류, 즉 초혼의식은 귀신을 섬기는 행위인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경은 죽은 자의 영혼은 올 수 없고 부활한 육체로 온다고 하기 때문이다. 결국 죽은 자의 영혼이 온다는 것은 귀신이 자신이 죽은 자의 영혼이라고 속이고 온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귀신과 대화하는 것이 기도요 또 제사요 그를 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편에서는 기도가 곧 제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들에게 하나님께 부탁해달라는 대도의 요청의 간접기도를 하든 성인에게 도움을 구하는 직접적인 기도를 하든간에 결국 기도의 상대는 즉 대화의 상대는 성인이 됨으로 성인에게 하는 모든 기도는 귀신의 속임수에 빠져 귀신을 섬기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수한 기독교와 혼합화된 기독교를 나누는 기준 중 하나가 영혼에 관한 이해라고 본다. 카톨릭이나 그리스정교회 사람들은 “산 자들이 죽은 자의 영혼을 만나고 영적인 교류를 나누는 것은 모든 종교에서 보편적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것을 보편타당한 진리로써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것이 대부분의 제 종교에서도 공통된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사자와의 영적교류 즉 초혼의식을 한다. 그러나 개신교는 사자와의 영적 교류를 하지 않는다. 이것이 개신교가 다른 종교들과 구분되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결국 모든 문제의 근저에는 사자와의 영적교류 즉 초혼의식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개신교는 부활의 종교이지 초혼술이나 강복술의 종교가 아니다.
제사의식의 상징성과 영들의 실제적 임재
우선 종교적 상징행위와 실질적 종교적 내용인 영적인 임재에 대해 논의하기 전에 우상숭배에 대한 정의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우상숭배라는 말 자체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거짓을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조상제사에 사자의 영혼이 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조상제사는 효도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제사가 우상숭배임을 드러낸다. 즉 효도를 하려면 효도의 대상이 있어야하는 데 대상(조상귀신)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없는 것을 위해 제사 지내는 것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이다. 그리고 또 우상숭배는 영광을 마땅히 받아야하는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피조물에게 드리는 것이요, 또 거짓인줄 스스로 알면서 숭배하는 것이다. 모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32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더디 내려옴을 보고 스스로 부패하여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이는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여호와라고 하며 우상숭배를 했다. 그들은 하나님 자신이 계시한 참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기 마음속에서 생각해낸, 자기가 원하는, 자기의 욕망을 채워줄 자기의 구미에 맞는 거짓 하나님을 섬겼다. 그리고서 이 거짓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서 참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의 이름을 붙인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인 십계명의 제2계명 나를 빚대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을 어겼다. 그래서 결국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제1계명까지 어기고 만다. 그래서 성경은 허무한데 굴복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레위인이 자기 동족을 죽이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야 만다. 또 북 이스라엘의 초대왕 여로보암은 자기백성이 예루살렘으로 갈까봐 두려워서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단과 벧엘에 두고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라고 말했다. 여로보암도 이스라엘 백성도 그것이 거짓임을 알면서 섬기기 시작했다. 우상숭배는 모르고 시작하는 것도 아니고 또 모르고 하는 것도 아니다. 학생이 공부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 놀듯이, 사기꾼이 범죄인 줄 알면서 사기를 치듯이, 공직자가 불법인 줄 알면서 뇌물을 받듯이, 돼지머리가 돼지머리인 줄 알면서 절을 하 듯이 그들은 부패한 마음에 알면서 한다. 또 이렇게 거짓인 줄 알면서 하다가 하나님의 저주로 악한 영이 임하고 악한 영의 역사로 그것을 진짜라고 믿게 되어 빠져나오지 못하고 만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해 다른 모든 우상숭배에서 귀신이 자신이 그 우상의 신이라고 속이며 나타나듯이 조상제사에서도 귀신이 자신이 조상이라고 속이면서 나타난다. 어쨌든 공자에 대한 제사에서 공자의 존재가 아주 없어져서 무로 돌아갔다고 여기면서 무에게 경배를 드리고 무를 인격적인 존재처럼 종교적 초혼의식으로 기리는 것은 분명 허황된 것이요 우상숭배인 것이다. 기독교는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하지 다른 존재들이나 무적 존재들에게 영광과 경배를 돌려서는 안된다.
또 우선 종교적 상징과 영적인 임재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먼저 자유주의적인 관점 두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관점은 예배 시에 성령의 임함도 악령의 임함도 부인하는 것이다. 성령의 임함의 부인은 영적인 세계와 하나님의 부인으로 이어지고 결국 교회를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 세운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따라 세워진 종교 기관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는 기독교 예배나 의식에 참석하든지 아니면 이방의 제사에 참여하든지 아무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우상제사에 참여해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귀신이나 악령이 역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의 영이나 귀신의 영이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예배들의 상징행위들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연극이나 다큐멘터리가 되고 만다. 결국에는 종교는 단지 신념체계로 전락하고 만다. 둘째 관점은 기독교 예배에는 성령이 임하지만 우상제사 중에는 악령이 역사하지 않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상이나 우상재물은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효력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우상제사에 참석하고 우상제물을 먹어도 그것은 참 기독교인이 연극에서 빌라도 역을 해도 그가 배교자나 이방인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가 우상제사에 참여해 이런 행위를 했을지라도 예수를 믿고 또 교회에 와 예배드리면 성령의 임함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상숭배에 가서는 ‘저건 가짜야 아무 것도 아니야’. 조상제사에 참여해서는 ‘이것은 효도다’. 또 신사참배를 가서는 ‘이것은 국가의례다’라고 생각하고 '나는 예수만이 참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다'라고 확신하면 된다는 것이다. 또 아무리 우상을 진짜라고 확신하고 믿어도 그것은 거짓이고 아무런 영적 영향력을 주지 않기 때문에 예수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결국 자유주의자들의 두 견해는 다신교 또는 이중종교체계를 가능하게 한다. 즉 교회에도 나오고 무당에게 가서 점도 치고 유교식으로 조상제사도 지내고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은 조상제사에서 음식을 진설하고 절하는 것은 조상의 영혼이 정말 와서 음식을 먹는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감사와 보은의 마음으로 살아있을 때와 같이 대접하는 상징적인 행위일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즉 조상제사의 의식들은 상징적인 것이기 때문에 상징적인 것으로만 이해해야지 종교적인 행위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정하상(丁夏祥)은 상제상서(上帝相書)에서 사람의 영혼은 음식을 흠향할 수 없고 음식은 육신을 위한 것이지 영혼의 양식은 아니기 때문에 술과 음식을 바치는 것은 잘못된 것이므로 조상제사는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주장들을 보면 조상의 영혼이 안온다거나 조상의 영혼은 음식을 먹지 않는다거나 하면서 제사음식이나 제사의식들은 상징일 뿐 아무 영적인, 실제적인 의미가 없다고 똑같이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결론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먼저 주장은 조상제사 의식은 상징적인 것이니깐 조상제사를 효의 고양을 위해 종교의식이 아닌 전례의 좋은 풍습이요 시민의례로 계승하자고 하고 뒤의 주장은 헛된 짓이니 폐지하자고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종교적 상징행위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오는 것 같다. 앞에 주장은 비종교인, 무신론자적인 관점으로 조상제사의식의 종교적인 상징성은 폐기하고 효도의 상징성만을 취하자는 것이고 뒤의 주장은 제물의 종교적 상징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정하상의 주장은 짐승을 잡고 제물을 신에게 드리는 무수한 제사들이 인류의 역사 속에 있었지만 제사지낸 다음에 그 위의 제물들이 신이나 사자의 혼이 먹어서 없어지거나 물리적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전제로 제사를 지낸다는 것을 읽어본 적이 없다. 제물은 제사가 끝난 후 산 사람들이 먹어서 없어질 뿐이다. 모든 제사에서 제물의 진설과 여러 종교적 행위들은 상징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징적인 행위들이 종교적인 행위인 것이다. 즉 종교의식은 당연히 상징적 의식들의 결합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상제사는 효도의 상징적인 행위일 뿐 아니라 당연히 종교적인 상징적인 행위인 것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만약 성찬식에 쓰이던 포도주를 예배 중 성찬식 때 먹지 않고 남은 포도주를 예배가 끝난 후 나중에 집에 가서 먹는다면 그 포도주가 성찬식의 의미를 가진 포도주가 될 것인가? 아니다 그 포도주는 그냥 포도주일 따름이다. 그리고 포도주를 마시는 그의 행위는 예배행위가 아닐 것이다. 포도주가 성찬식 가운데 쓰일 때 성찬식 포도주가 된다. 그리고 예배 가운데서 포도주를 마실 때만 성찬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찬예식 가운데서 포도주를 마셔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된다. 나무가 제단에 있을 때는 우상이고 이 우상을 가져다가 집에서 불을 피우기 위해 쓰면 장작이 되고 집을 장식하기 위해 놓으면 조각품이 된다. 그러나 세 경우 다 나무임에는 변함이 없다. 나무의 가치와 의미는 나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가지고 행하는 인간의 행위에 있는 것이다. 식물은 제단에서 쓰이면 우상제물이 되고 우상제물을 시장에서 팔면 식량이 되는 것이다. 어디에서 쓰든 식물은 변함이 없이 하나님이 낸 선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하는 인간의 상징행위이다. 절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자면 같은 절이지만 이 절을 웃어른을 만났을 때나 명절날 하는 것은 비종교적인 공경의 시민예절이나 이것을 제사에서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또는 효도로써 하는 것은 종교적 상징행위이다. 집에서 살아있는 부모에게 간청하고 부탁하는 것은 비종교적인 행위이지만 죽은 부모에게 간청하고 부탁하는 것은 기도요 제사요 종교적 상징행위인 것이다.
이렇게 종교적 의식들은 상징적 행위인데 그럼 종교의식은 상징적 행위로만 끝나고 마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종교적 상징행위와 비종교적인 예절 사이에는 형식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실질적인 영적내용에는 아무 차이는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물론자들이나 무신론자들의 단지 상징일 뿐이라는 주장이 옳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우상숭배를 하고 제사를 지낼 때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면, 즉 영적인 신이 임하지 않는다면 이때까지 이 책에서 펼친 모든 주장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면 자유주의자들의 견해가 맞게 되는 것이다. 결국 예배나 제사와 같은 이런 종교적 상징행위가 실질적인 종교적 행위가 되려면 영적인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우선 기독교 예배에 대해 말하자면 기독교예배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초청한다. 찬양할 때마다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말하는 이는 네가 아니고 성령이다’라고 말씀하신 성령의 말씀 선포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설교 가운데 역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친근히 하시는 하나님이 성도의 기도 중에 임할 것이다(신4:7). 그러므로 예배 순서 순서마다 성령이 역사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조상제사를 지내면 제사를 지낼 때 각 순서 순서마다 귀신의 영이 역사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10:20).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근래에 일어난 새 신,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신32:17). 이렇듯 성경은 마귀의 영적 임재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상도 우상제물도 아무 것이 아니지만 이것들을 가지고 하는 인간의 거짓숭배 행위에는 악한 영이 임하는 실효성이 있다. 조상제사에 귀신의 영적 세력이 임하는 것을 못 믿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겠다. 우리가 방언을 알고 방언이 성령의 역사임을 믿으며 성령이 임하는 것을 믿을진대 악령도 임하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복도 안 내리고 저주도 안 내린다고 주장하는 불신앙에 대해 성경은 단호히 아니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에게도 하나님이 저주를 내린다(습1:12)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조상제사에 귀신(악한 영)이 임하는 원인은 하나님이 그 곳에 악한 영이 임하도록 저주를 내리셨다는 데 그 근거가 있다. 즉 악령의 임재 유무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관계된 것이다. 다시 말해 악령의 임재는 하나님의 저주이다. 그러므로 우상제사에 악령이 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의 명령인 것이다. 왕상 22장에서는 미가야와 대적한 거짓 선지자 사백 인에게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영을 보낸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리는 악신이 든 사울왕의 이야기에서도 이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은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치 않고 또 경솔히 제사를 드렸기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하나님이 부리는 악신이 들렸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신의 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우상제사에 악령을 내린다. 그래서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는 사울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음이라-(삼상16:22-23)’. 사울이 우상숭배를 안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이 우상숭배와 같다며 악신이 내렸고 그 자신과 자녀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전쟁에서 죽었는데 하물며 실재로 우상숭배제사에 참여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악한 영들을 그 사람에게 임하게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러한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기에 귀신이 역사한다. 다시 말해 성경 말씀에 위배된, 자기 마음속에 상상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바로 이것이 우상 숭배다. 또 거짓을 쫓는 것, 거짓인 줄 알면서 종교의식을 행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우상숭배인 것이다. 우리가 이런 우상숭배를 행할 때 하나님의 저주로 귀신이 우리에게 임한다. 우리가 참 신인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성령이 임하듯이 우리가 거짓 것들에게 아무가치도 없는 것들(나무, 돌 등)에게 경배할 때 귀신은 우리에게 임한다. 거짓 영들, 악한 영들이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현대의 신학자들은 무신론의 대변자들 같아서 영적인 것을 언급하는 것을 비학문적인 것으로 여기고 터부시하고 두려워한다. 무당이 작두위에서 춤추는 것을 보고 또 이 일이 어떻게 판단되던 간에 할렐루야 기도원 원장이 암을 손으로 꺼내는 것을 보라 우리가 찾고자 하고 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작은 노력만으로도 쉽게 기적을 보면 영적인 세계가 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여기서 성만찬의 상징성과 영의 실재적인 임재의 관계에 대해서도 잠깐 알아보자. 종교개혁기에 쯔빙글리는 개신교 연합을 만들기 위해 루터와 교리의 통일을 위한 회의를 가졌는데 다른 모든 교리에서 일치를 보았지만 성만찬에 관해서는 불일치를 보았다. 그래서 개신교연합은 실패로 끝났다. 쯔빙글리는 성만찬의 상징설을 주장했고 루터는 공재설을 주장했다. 두 사람 모두 빵과 포도주가 겉모양은 빵과 포도주의 모양을 그대로 하고 있지만 그 본질은 성만찬에서 주님의 살과 피로 변화되었다는 카톨릭의 화체설에는 반대했지만 둘의 성만찬론도 서로 달랐다. 천주교에서 성만찬은 자동적인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었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쯔빙글리에게는 구원의 마법약으로 통하는 화체설이 루터의 믿음으로의 구원과 가장 적대적인 것으로 보였을 것이고 그래서 화체설을 깨뜨리는 것이 최고의 과제였다. 그래서 빵과 포도주는 단지 상징일 뿐이라는 상징성을 강조했다. 루터는 단지 상징일 뿐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없었고 빵과 포도주에 예수그리스도 살과 피가 하늘에서 내려와 함께 임재 한다는 공재설을 주장했다. 루터는 불에 달궈진 쇠를 예로 들면서 쇠 속에 불이 있듯이 쇠와 불이 공존하듯이 예수그리스도의 피와 살, 즉 몸이 같이 공존한다고 주장했다. 이 두 주장은 아직은 미완성된 이론들로 굉장히 위험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는 소지를 갖고 있었다. 루터는 쯔빙글리의 주장이 신령한 무엇, 신적인 무엇이 빠진 무미건조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런 것이 빠진 종교의식은 이미 종교적인 핵심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즉 성만찬은 실재적으로는 종교성을 상실하여 성례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만찬은 없애도 될 비종교적인 것이요 인간이 만든 거짓된 의식이자 없애도 될 프로그램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쯔빙글리에게 루터의 공재설은 화체설과 별반 다름없어 보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루터의 공재설은 종교의 본질인 신령한 무엇, 신적인 무엇을 살려냈지만 그의 주장은 빵과 포도주에 집착하여 그 속에 예수님의 몸을 가둠으로써 빵과 포도주를 다시 구원의 마법물질로 만들어서 결과적으로 화체설과 다름이 없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이는 그의 믿음으로의 구원이라는 주장에도 심대한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칼빈은 이 둘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간파하였다. 칼빈의 영적임재설은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변하지 않고 다만 예수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상징한다는 쯔빙글리의 상징설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빵과 포도주에서 가두지 않고 풀었다. 즉 성만찬시에 성령이 임한다고 함으로써 빵과 포도주의 구원의 면죄부로써의 마법물질화를 피했고 종교의 본질인 신령한 무엇, 신적인 무엇을 살려냈다.23) 루터는 쯔빙글리를 무신론자나 자유주의자로 오해한 것 같다. 쯔빙글리도 성령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에 쯔빙글리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자신의 이론을 더 발전시켜서 둘의 오해가 풀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킬 시간이 없었다. 어쨌든 칼빈의 영적
종교적 의식으로서의 식사
제사의례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은 종교의식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식의 한 부분이다. 유교도 이렇게 제사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을 음복(飮福)이라 하면 제사의 한 순서로 부르고 있다. 출24:9-10에도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한 후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장로 70명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기독교도 성찬식을 성례전이라 부르면 중요시 여긴다. 그래서 세례를 받지 않은 성도에게는 성찬을 베풀지 않는다. 유대교의 유월절에서도 성만찬과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는 것이 예배의 중심이다. 그래서 고전10:7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은니라’
우상에 바친 제물을 종교예식에서 나누어 먹을 때 그 제물을 먹는 모든 사람들은 우상에게 예배드리는 것이 될 것이다. 구약에서도 짐승을 잡는 제사 행위를 하는 성소에는 제사장과 레위인만이 들어간다. 일반유대인들은 제사드리는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밖에서 대기한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면 다같이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을 먹는다. 그럼으로써 밖에 있던 자들도 제사에 참여한 것이 된다. 그 제물을 먹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드린 것을 같이 기뻐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교의 일원임이 공표된다. 유교의 조상제사에서도 여자와 아이들은 제사에 직접 참여하지 않더라도 제사음식을 나눠 먹으므로 제사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즉 여인들과 아이들은 제사에 참여하지 않지만 제물을 같이 먹음으로 조상을 섬기는 일에 참여한 것으로 여겨지고 조상을 섬기는 교의 일원임을 공표한다. 그래서 성경은 고전10:16-18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듯 종교행사 중에 쓰이는 우상제물과 시장에서 팔리는 우상제물의 가치를 동일하게 취급해서는 안된다.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요 모든 식물은 다 하나님이 내신 선한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숭배하는 것이 우상숭배요 그러한 숭배의식 중에 아무 것도 아닌 것에게 식물을 바치고 나누는 행위가 종교의식이요 우상숭배 행위이다. 다시 말해 우상과 우상제물이라는 아무 것도 아닌 것과 이러한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행하는 인간의 행위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결국 종교의례의 마지막 순서로써 제물을 나눠 먹는다면 제물로 바쳐진 식물은 하나님이 낸 선한 것으로 변함없이 그대로 있지만 그러한 종교의식에서, 종교축제에서 하는 식사행위는 귀신과 가까이 하는 것이요,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한 식사교제 가운데 있는 모든 자에게 귀신의 영이 임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언급했듯이 고전10:14-21에서 우상숭배의 제단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종교의례의 한 순서요 귀신과 교제하는 것으로 길게 강조한다. 또 바울은 많은 서신에서 구약의 율법을 따라 정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음식을 가리는 것을 거부하고 모든 식물은 하나님이 낸 선한 것이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된다고 역설함에도 불구하고 제사의례에서 우상제물을 먹는 것은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단호히 거부한다. 그러므로 고전8, 10장에서 바울의 논점은 명확해진다. 바울은 제사에서 우상제물을 나누는 교제를 우상숭배로 여기고 제사에 참석하지 말고 그 축제에서 제물을 먹지 말고 그 외에 제사와 상관없이 시장이나 집 초청시에 내놓는 우상제물은 감사함으로 먹으라고 권한다. 바울의 결론은 우상제사를 멀리하라는 권면이다. 그러므로 고전 8, 10장은 다음 두 가지를 전제하고 있다. 첫째, 제사중이든, 제사직후 등 제사축제에 동참하여 우상제물을 나누어 먹는 것은 종교의례이며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둘째, 이방인의 종교의례에는 귀신이 임한다. 결국 바울은 고전 8, 10장에서 전체적으로 우상제물을 적극적으로 “먹어도 된다”, “먹으라”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로 말을 한다. 단지 조건을 붙여 소극적으로 두 가지의 예외를 허락한다. 즉 시장에서 파는 우상제물과 집 초대시에 내놓는 우상제물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에서조차 조건을 단다. 즉 첫째, 묻지 말고 먹으라. 둘째, 제물이라 말하거든 먹지 마라 물론 이때는 남의 양심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도행전 5장의 사도회의 결정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상제물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그는 되도록 우상제물을 멀리하라는 방향으로 글을 쓰고 있다.
제사 의식에 참여하지 않고 제사에 쓰인 제물을 먹지 않지만 그 자리에 있고 제물이 아닌 다른 음식을 먹는 사람에 관하여 오해의 소리를 없애기 위해 언급을 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한국적 상황에서 처음 예수를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 자주 겪는 일이다. 길을 지나가던 그리스도인이 무당이 굿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어 구경했다고 그 그리스도인이 우상숭배를 한 것이 아니듯이 이 사람들도 조상제사에서 절을 하거나 여러 다른 종교행위를 하는 종교의식에 참여하지 않고 제물도 먹지 않고 일반 음식을 먹으므로 우상숭배 하는 자들과 자신을 차별화 한 것은 높이 살만 한다. 그러나 만약에 그가 따로 준비한 일반 음식을 먹지 않고 우상의 제물을 그곳에서 하나님의 음식이라고 생각하고 기도하고 먹는다면 사람들은 그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을 보고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자기들과 똑같은 교를 숭배하는 자인지 구별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가 자신의 것인지 아니지 구별하지 못하고 완전히 자신의 것이라는 판단을 유보할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했듯이 제사음식을 먹는 것은 그 신앙을 가진 신도로서 그 의식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긍정한다는 것이며 그 의식에 동의하고 동참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의 제사는 제사장만이 드리지만 그 음식은 다 같이 먹는다. 그럴 때 그들은 우리가 한 하나님을 섬기는 같은 신앙인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래서 제사 이후에는 그 의식에 참여하지 않은 여인들까지도 다 참여하여 같은 신앙을 가짐을 서로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식을 기뻐하고 축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그곳에서 제물을 먹으면 이들의 행위에 동참하는 것이고 이들도 당신을 그렇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그곳에서 안먹는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자기들과는 다른 신앙을 가진 자로서 이 의식을 기뻐하지도 즐거워하지도 긍정하지도 않는 자로서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당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를 모든 사람에게 공표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도 확실히 당신을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우연히 무당굿을 한번 보는 것이 아니라 정규적으로 계속 굿하는 데 가서 구경하면 문제가 있듯이 초신자들은 예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귀신들이 역사하는 조상제사 자리에 완전히 발길을 끊는 신앙의 결단을 해야 한다. 이러한 신앙의 결단이 없이는 절대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아이들이 창녀촌이나 범죄의 온상인 곳을 자주 접하면 그들의 희생양이 되듯이 우상숭배의 자리에 자꾸 참석하면 악한 영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도 이 한국 땅에 모든 조상제사가 사라지는 것을 바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 중 아무도 이 가증한 조상제사 자리에 참석하지 않기를 바라실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 우상숭배의 자리에 자꾸 참석하여 하나님의 뜻이 빨리 이루어지는 것을 지연시키지 말아야 한다. 이런 신앙의 결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을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당신을 자신의 것으로 인치시고 당신을 더욱 가까이 하시게 하며 당신을 더욱 아끼고 보호하시게 할 것이다. 신앙의 결단을 내리지 않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옛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로 새 사람이 되기 위하여 과거의 자신에 연연하지 말고 과감히 과거의 자신과 자신을 얽매는 것들을 버림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신앙의 결단을 하여야 하겠다.
조상제사는 우상숭배이다
유학자들은 ‘조상숭배 사상은 유학이 광범위하게 유포되기 이전에도 존재하였다. 그렇지만 그 당시 조상숭배사상은 화복(禍福)을 매개로 한 조상신과 자손의 영적교류라는 의미가 강하였다. 유학의 인문정신은 조상숭배 사상에서 이러한 주술적 의미를 완전히 탈각시키고 그것에 도덕적인 의미를 부여하였다. 따라서 복을 빌거나 화를 면할 목적으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초기 기독교도들이 유학의 제례 의식을 우상숭배라고 하여 거부하였고, 아직도 일부 교파에서 그러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유학의 제례의식을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24)라고 주장한다.
위에서 유학자들은 유교는 '제사의 주술적 의미를 탈각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유교의 가장 발전한 형태인 성리학조차 아직은 주술적으로 남아있다. 성리학의 조종인 주자는 주자어류(朱子語類) 귀신론 편에서 사람이 죽은 후 한 동안(4대 까지) 영혼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존재하여서 조상제사에 온다거나 원한 맺힌 영혼들은 소멸되지 않고 요귀가 되어 구천을 떠돌고 있기 때문에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언급들을 보면 아직은 유교가 종교적인 미신적인 생각을 완전히 탈각하지 않은 것 같다. 조상제사 문제는 제처 두고라도 하늘과 산천에 드리는 유교의 제사들도 주술적인 것을 아직 못 벗어난 것 같아 보인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공자는 자신의 저서에서 은나라와 주나라의 사람들은 조상들이 죽어서 상제의 신하로 있으며 자신들을 돕고 있음을 믿는다는 내용을 실었고 이런 사상이 공자 당시에 일반적인 생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례전문가였던 공자는 자신의 사상을 세우고 전파하는 데 당연히 조상제사와 같은 종교를 이용했다. 그래서 유교는 종교적인 의식인 조상제사를 받아드렸고 그 종교의식에 기복 신앙 외에 사후효라는 의미를 하나 더 추가 한 것이다. 그러므로 조상제사는 효도이기 때문에 비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 죽은 자(조상)에게 까지 가서 영향을 미치려는 종교적인 방법의 효도인 것이다. 기복 신앙에 관해서도 지금도 사람들은 조상제사를 지내면서 지금도 조상의 도움을 구하고 있고 황제나 왕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나라의 안정과 왕실의 안정을 간구했다. 그러므로 효도 때문에 유교의 기복신앙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효도의 의미가 더해진 것뿐이다. 아무리 학자들이 기복신앙을 버리자고 해도 고래로부터 내려온 신앙관습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종교의식에는 영적인 존재에게 간구하고 비는 것은 없앨 수 없는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또 ‘유학자들은 제사란 단지 효의 연장선상에서 살아 계실 때 부모를 모시듯이 돌아가신 다음에도 조상들을 생각하고 모시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또 자신들은 죽음 뒤의 세계나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도 믿지 않으며, 사람이 죽으면 혼백으로 나뉘어 원래의 기운으로 돌아갈 뿐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제사 지낼 때에 조상의 신을 영접하고 대접해서 보내는 것도 조상의 영혼이 실제로 온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다만 조상이 이 자리에 계신 듯 제사지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25)’
이런 주장은 조상제사가 우상숭배인 것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제사 드리는 사람들을 미치광이나, 정신병자로 만드는 것과 같다. 사라져 없는 존재를 있다고 생각해서 있는 것처럼 대하는 연극을 매년 하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어떤 영화에서 어머니와 아들 단둘이 살았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무덤에 장사지내지 않고 침대에 눕혀 놓고 산 사람처럼 매일 인사를 하고 말을 걸고 이야기를 나누는 괴기스러운 영화를 본 일이 있다. 이 사람은 제정신인 사람은 아닐 것이다. 유교의 제사에서도 죽은 부모를 살아 있는 것처럼 인사를 하고 절을 하고 복을 달라고, 지켜달라고 축문을 읽고 음식까지 차려놓고 드시라 하는 것이 과연 효도인가? 아니면 정신병인가? 그러므로 이러한 종교적 상징행위들(齊戒, 設位, 降神禮, 焚香, 獻酌, 再拜, 讀祝, 再拜, 侑食, 啓門, 辭神, 徹, 飮福)로 치러지는 조상제사가 우상숭배요 종교적 신앙행위가 아니라면 이러한 제사행위는 효가 아니라 미친 짓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위대한 조상에 대한 추모는 종교적인 의식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예수회의 영향이다. 예수회는 조상제사뿐만 아니라 공자, 하늘과 땅에 지내는 유교의 모든 제사를 비종교화하려고 노력했다. 조상제사는 효도와 보본의 감사의 표현이고 하늘과 땅에 대한 제사도 종교의식이 아니라 단지 감사의 표현이라는 이런 주장은 그러나 너무 지나쳤다. 누구도 하늘과 땅에 지내는 제사를 단지 비종교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조상제사도 비종교적이라는 말도 거짓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예수회에서 시작된 유교제사들의 비종교화는 흑을 백이라고 부르는 것만큼 상식적으로 지난한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즉 ‘제사’란 용어 자체가 종교적 용어인데 이 용어 자체를 없애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예수회의 과장과 억지 주장이 지금도 큰 영향력을 형성하면 가장 합리적이고 정통적인 주장이양 인정되는 것은 한마디로 역사의 코미디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상숭배라는 것은 거짓을 섬기는 것이다. 근래에 새로 생긴 새 신 즉 거짓인 줄 알면서 없는 존재인줄 알면서 있는 것처럼 경배하는 행위 이것이 우상숭배라는 점에서 조상제사는 딱 들어맞는다. 성경은 산자와 죽은 자의 교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죽은 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려는 효도행위는 진리를 벗어난 거짓을 섬기는 우상숭배인 것이다. 그리고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받아서는 안 되는 존재에게, 조상의 영혼이 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없는 존재에게, 성경적으로 진리가 아닌 거짓 존재에게 돌리며 허황된 거짓 숭배행위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의 특징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런 거짓을 좇는 우상숭배행위에는 하나님의 저주로 마귀가 임하고 역사한다. 즉 조상제사를 행하면 거기에는 마귀의 영이 역사하는 것이다.
종교혼합과 종교개혁
로마 카톨릭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그것은 카톨릭이 전파된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에서 일어난 혼합주의 또는 이중종교체계라 불리는 문제 때문이다. 이러한 지역의 토착종교와의 혼합화된 제3세계 카톨릭들은 어디서부터 로마의 정통 카톨릭과 구분되는 지, 즉 어디서부터 이단이라고 칭할 수 있는 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26) 이 주제는 카톨릭의 다수가 된 중남미 카톨릭인들의 가장 큰 딜레마였다. 제2차 바티칸 회의의 주제도 바로 이 문제를 푸는 것이었다. 이는 제국에 급속히 광범위하게 퍼져 토착종교와 급속히 혼합된 기독교를 개혁 하려는 제국황제의 종교개혁들이 무너지고 성화상 숭배 등 혼합화 신학이 정통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된 제7차 에큐메니칼 공의회(787)와 비견되는 것이다. 그러면 왜 로마 카톨릭은 자기 자신과 제3세계의 토착종교와 혼합된 카톨릭을 구분짓지 못하는 것일까? 이것은 로마카톨릭이 제3세계의 카톨릭들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일 것이다. 즉 로마카톨릭 자신이 이미 유럽의 토착종교들과 혼합된 기독교이기 때문이다. 한번 혼합화된 기독교는 어디를 가든지 다시 혼합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개신교 + 유럽의 토속종교 = 로마카톨릭
개신교 +(-) 유럽의 토속종교 + 타지역의 토속종교 = 제3세계 카톨릭
그러면 역사적으로 있었던 기독교의 혼합화와 혼합화를 벗어 버리려는 종교개혁들을 살펴봄으로써 한국 개신교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보자
구약은 다신교적 종교관념을 가진 인간과 유일신적 종교관념을 가르치려는 하나님과의 싸움이었다. 구약시대에는 지구상에 유일신론적인 관념이 거의 없었을 때이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신론적인 신론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당연시 여겼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신을 다른 모든 신들과 다른 특별한 신이요, 또한 유일한 신이라고 가르쳤고 다른 모든 신들은 귀신이요 하찮은 존재요 무익한 것이요 존재하지 않는 허무한 허상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오직 자기만을 섬겨야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출애굽 후 광야에서 유일신 신앙 훈련을 받은 신앙의 1세대가 거의 죽자 가나안의 다신론적 토착종교의 영향을 받고 자란 다음 세대의 이스라엘인들에게는 다신론적 신앙보다 유일신 신앙이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이런 가나안의 다신론적 문화와 신관를 깨뜨리고 유일신론적 신관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기간이 바로 구약이라 하겠다.
사사시대에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려는 이스라엘인들과 하나님 자신만을 섬기도록 하려는 하나님과의 투쟁은 왕정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왕정이 시작되기 전 사무엘은 미스바에 이스라엘을 백성들을 모아놓고 이방신들을 떠날 것을 요구한다(삼상7:3-4). 사울, 다윗, 솔로몬의 등극으로 오직 여호와만 섬기는 신앙의 형태를 굳히는 듯했지만 결국 솔로몬의 타락은 이것을 다시 원점으로 돌렸다. 솔로몬이 아무 스스럼없이 다신론으로 전환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다신론적 신관이 매우 뿌리 깊은 것이라는 반증인 셈이다. 이후로 남유다는 사사기의 역사를 다시 반복한다. 배교와 고난, 회개와 하나님께 부르짖음, 용서와 구원의 반복은 남유다가 멸망할 때까지 반복된다. 남유다가 멸망할 때의 상황을 보면 성전에 가나안의 신들 뿐만 아니라 바빌론의 신들까지 들어와 있었음을 알 수 있다(겔8장).
우리는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남유다의 종교상황을 보면 이스라엘인들의 종교관이 다신론, 혼합주의 등의 복잡한 모습을 보여줌을 알 수 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 전의 성전의 모습과 남유다 멸망시의 성전의 모습은 많은 이방신들이 성전에서 여호와와 같이 있는 전형적이 다신론의 모습이었다. 여호와의 성전은 만신전이 되어있었다. 여호와도 섬기고 이방신들도 섬기는 모습은 전혀 히브리인들에게는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고 당연시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대제사장 힐기야가 성전에서 성경을 찾기 전까지는 요시야 왕도 힐기야도 성전의 만신전의 상황에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을 찾고 읽고 깨닫고 회개하고 그리고 개혁을 착수한다.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하게 된 원인은 성서의 발견이었다. 만약에 힐기야가 성전에서 성경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요시야는 성전의 만신전 모습과 다신론적 신앙에 대한 어떠한 문제점도 찾지 못하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런 다신론적 신앙사상은 대다수 히브리인들의 사고방식이었던 것 같다. 소수의 선지자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결국 히브리인들이 야웨 유일신앙을 확립하게 된 것은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오고 난 이후였다.
남유다가 다신론적이었다면 북 이스라엘은 종교 혼합주의적 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둘이 완전히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슬람교처럼 그들이 제시한 하나님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하나님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우상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북이스라엘의 초대왕 여로보암은 소의 형상을 만들어 단과 벧엘에 두고 이를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이런 죄악은 이미 시내산에서 저질러졌던 큰 죄었다. 시내산에서는 이 일로 많은 유대동포 동족상잔의 비극을 당했다. 소는 가나안의 가장 강한 신 바알의 상징이었다. 소는 바알과 비견되는 하나님의 강한 능력을 표현하기 위해 쓰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바알 신앙과 야웨신앙을 동일시하는 혼합화의 방향으로 나아갈 위험성이 있었다. 어쨌든 자신을 비겨 어떠한 우상도 만들지 말라는 제2계명을 어기며 이방신들의 우상을 채용함으로써 야웨신앙은 비틀어지고 꼬이기 시작했다.
사사기와 왕정시대의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혼합화된 종교적 상황은 초대기독교가 로마제국에 퍼지자마자 뒤따라 나타난다. 그래서 신약에서도 이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영지주의 이단들이 주로 언급된다. 가현설 적이고 육체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이 이단은 초대교회의 가장 큰 적이었다. 이외에도 여러 이단이 나왔는데 초대교회는 이런 이단들과의 투쟁 중에 정경을 이루는 등 기독교의 체계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의해서 공인되어 갑자기 엄청나게 팽창하게 되자 참된 신앙이 없는 자들이 기독교로 대거 들어오면서 초대교회의 신실한 신앙은 급속히 타락하기 시작했고 더 이상 이단을 저지할 수 없게 되었고 지중해의 토착종교 문화와 혼합되기 시작했다. 우상에게 절하며 섬기는 종교문화는 여기서도 성화상 숭배의 종교형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다신론적 신앙관과 죽은 이들 특히 위대한 인물들이나 조상을 섬기던 신앙형태는 성인이라는 이름의 신들로 재창조 되었고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만들어 냈다. 성인 숭배에는 성서에는 나타나지 않던 모습이다. 성서는 어떠한 사자숭배도 보여주지 않는다. 성서는 어떠한 죽은 왕이나 죽은 위대한 선지자도 숭배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결국 히스기야나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을 했듯이 동로마제국의 황제들도 다시 종교개혁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종교개혁은 실패하고 만다. 8-10세기 레오 3세와 그 후계자들에 의해 추진된 종교개혁은 성물과 성화상 숭배, 성인과 동정녀에게 중보기도 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이것에 대항해서 반종교개혁 세력들은 하나님과 성모와 성인들에 대한 제의 또는 존경을 여러 단계로 구별했고 예수님의 성육신을 근거로 성화상 숭배를 정당시했다. 그래서 최초로 혼합주의 신학들이 일어났고 정통신학으로 정착하게 된다. 그래서 현재 동반정교회에서는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마리아, 성인들, 죽은 부모에게 기도를 한다.27)
게르만 인들의 땅이 된 서유럽에서도 기독교는 게르만, 켈트 같은 이교적, 토속적 요소와 혼합화되어 성장해 왔다. 토속적인 다신교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갑자기 유일신 신앙에 귀의 시키는 것보다는 토속적인 신이나 사자에 대한 숭배, 성인숭배를 내세우는 편이 훨씬 빠르고 쉬운 길이었다. 기독교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다신교적인 성인숭배를 신앙의 골자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성인숭배 혹은 성유물 숭배가 토속적인 신들의 기독교화에서 비롯했다는 것은 카톨릭 신앙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까지 유럽의 기독교는 오로지 성인숭배가 신앙의 핵심이었다. 처음에 기독교는 사자의례에 대해서는 매우 냉담한 편이었고, 죽은 자 앞에 음식물 따위를 바치는 것을 이교적 풍습이라 하여 몹시 비난했다. 그러나 이러한 금령이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자, 정반대로 사자의례를 적극적으로 기독교에 받아들이려고 했다.28)
결국 1517년에 루터에 의해서 시작된 대종교개혁이 있기까지 기독교의 혼합화는 더 심화되어갔다. 1517년의 종교개혁은 성공했다. 왜 성공했을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인쇄기술의 발달이 결정적인 요인이었을 것이다. 인쇄기술의 발달은 성경의 보급과 개혁사상의 빠르고 광범위한 전파를 가능케 했다. 이젠 아무나 성서를 가질 수 있었고 종교개혁의 논쟁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1517년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의 성공은 성서와 개혁사상의 급속한 보급에 기인한다. 이는 모든 개인들이 성경과 개혁사상을 읽고 스스로 판단하게 만들었다는 데 기인한다. 우리는 여기서 성서의 무한한 가치를 알 수 있다. 그 이전의 고대의 종교개혁은 극소수만이 논쟁의 근거와 문제점을 알 수 있었다. 즉 고대에서는 성서를 쉽게 구할 수 없었기에 성경의 내용을 알 수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개개인은 스스로가 판단 할 수 없었고 그들은 자신의 지도자의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성서대로 신앙생활 할 수 없었고 주위의 영향에 의해 혼합주의와 다신교로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전의 종교개혁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에 성경과 개혁사상의 광범위한 보급이 이루어 질 수 없었다면 1517년의 종교개혁은 겨우 몇 십 년을 지속했을 뿐이며 이전의 종교개혁에서처럼 다시 원점으로 회귀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보급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종교개혁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모든 성도가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개신교요 종교개혁인 것이다. 성전에서의 성서의 발견이 요시야로 하여금 종교개혁을 하게 만든 것처럼 기독교인은 누구나 성서를 읽고 각자 스스로가 종교개혁을 하는 것이다. 이런 스스로 개혁한 자들이 모인 모임이 개신교회인 것이다.
역사는 또다시 반복되는가 보다 기독교가 처음 지중에 지역에 전파될 때 영지주의와 같은 많은 혼합주의 이단이 일어났고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 이후에 갑자기 급팽창한 기독교가 토착종교와 급격히 혼합화한 역사는 신세계의 발견과 천주교의 세계선교과정에서 또다시 전지구적인 규모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천주교는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제3세계로 전파되면서 또다시 그 지역의 토착종교와 혼합화가 이루어진다. 제3세계의 혼합주의를 재촉한 첨병은 예수회 회원들이었다. 예수회에 의해 추진된 혼합화 과정은 처음에는 다른 선교단체들에 의해 이단으로, 우상숭배로 여겨져 배척되고 금지되었다가 나중에는 모두 허가되는 2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일본에서는 자비에르에 의해 혼합주의가 추진되었다. 일본인의 눈에는 로마 카톨릭은 다신교로 비쳐졌다. 자비에르의 시대에 일본에 전파된 천주교는 몇 백 년이 흐르는 동안 지역 토착종교와 혼합화되었다. 그들은 기독교인임과 동시에 신사의 우지코이며 절의 단토(檀徒 :신자)이다. 이들은 또한 헛간신, 고진(부억신) 등 여러 가지 민간신을 믿는 신앙인이기도 하다. 기독교인 집안에는 가미다나(神棚:신을 모시는 제단)는 물론이고 천조황대신궁이나 기타 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불단에 조상의 위패를 모시며, 추석 때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다. 신도나 불교 등 기성종교 외에 신흥종교도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천리교에 귀의하는 기독교인도 있다. 29)
인도에서는 로베르토 드 노빌리라는 예수회 선교사가 토착화를 시도했다. 그래서 힌두교의 많은 것을 받아들었다. 그는 브라만의 스승으로 살았고 힌두교의 문화적 종교적 행위들을 하나도 정죄하지 않기로 했다. 과부가 된 여성이 남편이 화장될 때 장작더미로 몸을 던지는 수티라는 힌두의식 조차도 정죄하지 않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결과 힌두교의 최고 계급인 브라만이 기독교로 개종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노빌리 때문에 인도교회에 문제가 계속 생긴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는 카스트제도를 인정했고 카스트제도는 더욱 강화되었다.
사람들은 ”천주교가 라틴아메리카의 종교를 정복하고 다시 라틴아메리카 종교에 재정복당했다“고 말한다.
“수도사들은 ‘아코모다시오네스(acomodaciones, 적응)‘라는 방법을 통해서 원주민들의 생활, 관습 그리고 이념체계에 융통성을 가지고 적응하고자 노력했다. 종교 영역에 있어서 원주민들의 신들이 카톨릭의 성인들로 대체되는 과정도 이 아코모다시온의 결과이다. 예수회는 우상숭배를 철저히 배격했던 프란체스코회 등의 다른 수도회와는 달리, 원주민들의 기존 믿음체계, 예배의식 등을 포용하려고 했다. 따라서 원주민들의 기존의 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들에 대한 의식 등이 카톨릭 의례 속으로 자신의 자리를 잡을 수 있었고, 점차 카톨릭 속으로 융화되었다. 예수회는 프란체스코 교단이 우상숭배로 배척했던 과달루페 성모의 기적적 발현을 종교적 현시로 받아들였고, 원주민의 개종을 위해서 성모 마리아 신앙과 원주민의 민족의식을 융합시켰다.30)”, “원주민들은 비록 형식적으로는 기독교를 받아들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자신의 토착종교를 버리지 않고 있었다. 신크레티즘의 전형적인 모습이 바로 여기서 일어났다. 원주민의 기독교에 대한 태도는 이교도에 배타적이 아닌 자신의 신과 기독교의 신을 동일시하는 것이었다. 원주민들은 새로운 종교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 대신 그들의 토속신앙을 계속 유지하면서 종교적 혼합을 이루어 나갔다. 결국 원주민들은 카톨릭의 상징과 형식을 수용하고 교회는 원주민들이 믿는 이단 요소들을 용인하는 상호간의 적응 과정이 일어난다. 이와 같은 카톨릭과 토착종교의 융합은 중남미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쿠바의 라 까리닷 델 꼬브레 성모가 그렇고 베네수엘라의 꼬로모또 성모가 그러하다.31)”
이제 정리하자면 출애굽한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가나안 종교를 따르고 가난안 종교와 혼합화했다가 망했다는 것이 구약의 역사다. 즉 가나안의 종교와 혼합화를 버리라는 것이 구약의 메시지인 것이다. 요시야의 종교개혁, 9세기 동로마제국 황제들의 종교개혁, 그리고 16세기의 종교개혁도 토착종교와의 혼합화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천주교와 일부 진보적 개신교는 토착종교인 유교의 조상제사를 받아들여 종교의식의 혼합화를 하고 있고 개신교 내부에서도 조상제사도 드리고 점도 치고 굿도 하고 교회에도 출석하는 이중종교체제를 가진 신자들이 많다. 한국에서의 종교 개혁도 마찬가지로 지역 토착종교와의 혼합화를 이겨내는 것이고 그 첫 시발점은 조상제사를 거부하는 것이 될 것이다. 지금 많은 선교지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이 부딪치는 문제들도 토착종교와의 혼합화 문제이다. 이전에 전파된 기독교인 천주교가 뿌려놓은 혼합화된 신앙행태들과 신학들은 성경적인 복음전파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선교사들은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피하거나 타협하려하지 말고 자신의 선교지역에서 행해지는 혼합화를 깨뜨리는 신학을 정립하고 가르치고 행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혼합화된 카톨릭 신앙을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간 유럽의 종교개혁을 본받아 모든 선교지에서 토착적 종교개혁 신학을 만들어야 하겠다. 우리에게 희망은 분명히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가 전파되는 모든 곳에서는 항상 대규의 혼합화가 존재해왔지만 그렇다고 모든 곳에서 항상 혼합화가 승리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중해에 전파된 기독교가 영지주의 이단을 극복하는가 싶더니만 로마제국의 기독교공인 이후로 곧바로 혼합화가 급속히 진행되었고 로마황제들의 종교개혁은 실패로 끝나고 최초로 혼합화 신학이 정통으로 인정되며 출현했고 이 신학이 기독교 왕국 유럽을 지배하면서 모든 희망이 사라져버린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16세기에 발생한 종교개혁은 놀랍게도 이런 혼합주의를 이겨냈다. 그리고 천주교가 신세계로 혼합화된 기독교를 전파하며 또 다시 토착종교와 혼합화 할 때 개신교는 북미에서 효과적으로 토착 종교와 혼합화를 피하면서 순수한 개신교 왕국을 세워 나갔다. 사람들은 미국에서 개신교의 정착을 인디언을 죽이면서 한 문화정복주의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비판을 피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혼합화를 거부한 순수한 기독교 정착의 성공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즉 한국에서는 종교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다른 여러 종교와 공존하는 가운데 개신교가 순수성을 지키며 놀라운 성장을 이룬 것이다. 한국에서 일어난 순수한 개신교의 성장은 이 시대 혼합화를 피하고 순수한 복음이 세계에 전파될 수 있다는 가장 훌륭한 역사적인 모범적 예인 것이다. 그리고 또 기독교 왕국이었던 서유럽이 많은 이민자로 인해 여러 종교인들이 주위에 살기 시작하면서 겪게 된 종교다원주의적인 사회 상황 속에서 기독교는 어떻게 존재하며 대처해야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16세기의 종교개혁, 북미에 개척된 순수한 개신교, 그리고 종교다원주의 상황 속에서 성장한 순수한 한국의 개신교는 혼합화를 거부하고 성경대로 순수한 교회를 새 선교지에 이식시키는 데 큰 모범이 될 것이며 선교사들은 이 모범들을 따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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