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식 목사 / 서울신학대학교 연세대학교 대학원 졸업, 독일 베델 신학대학교에서 조직신학으로 박사학위,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와 계명대학에 출강
1. 종교신학이란, 타종교에 대한 신학적 판단작업이다. 이 점에서 종교신학은 종교철학이나 종교학과는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종교신학은 여러 종교에 대한 일반적인 서술이나, 종교라는 현상에 대한 공통점들을 기술하기 보다는 이를 넘어, 하나의 종교의 입장에서 타종교에 대해 평가하는 신학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2. 종교신학의 타종교에 대한 신학적 판단과 관련해서 일반적으로 세가지 종교신학적 모형들이 제시된다.
첫째는 배타주의를 말할 수 있다. 배타주의란, 종교의 진리와 관련해서는 자기종교의 진리의 절대성을 주장하면서, 타종교의 진리성을 부인한다. 구원과 관련해서는 자기종교의 구원론적 주장을 타당하게 여기는 대신, 타종교의 구원의 길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배타주의의 대표적인 예로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extra ecclesia nulla salus>라는 교리적 주장을 들 수 있다. 흔히들 현대신학자 칼 바르트의 <종교는 불신앙>이라는 주장을 배타주의의 한 형태로 본다.
둘째는 포괄주의를 말할 수 있다. 포괄주의란, 종교의 진리와 관련해서는 자기 종교의 진리의 우월성, 온전성을 주장하면서, 타종교의 진리성에 대해서는 상대적인 가치를 인정한다. 즉, 타종교의 진리를 부인하거나 부정하기보다는 그 진리성을 인정하면서, 타종교의 진리의 온전성이 기독교에서 완성된다고 보는 것이다. 구원과 관련해서도 타종교의 구원제시를 부정하기 보다는 긍정하고, 타종교의 구원의 길이 궁극적으로는 기독교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다고 본다.
포괄주의의 대표적인 예로 칼 라너의 익명적 그리스도인을 들 수 있다. 라너는 타종교의 진리와 구원가능성에 대해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타종교의 진리와 구원의 합법성은 그리스도의 진리와 구원에 근거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타종교인에게 구원의 주로서 등장하며, 비록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의식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타종교인에게 그리스도는 무의식적으로 구원의 주로 역사하신다.
셋째는 다원주의를 말할 수 있다. 다원주의를 표방하고 등장한 종교신학자의 대표로서 존 힉을 들 수 있다. 그에게서 다원주의란 종교의 진리와 관련해서는 제종교의 진리를 원칙적으로 긍정한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다원주의가 <모든 종교는 다 동일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든 종교의 동일성 주장을 우리는 다원주의적 주장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상대주의적, 무차별주의적 주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의 상이성, 차이점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종교의 다양한 진리주장들 중에서 어느 하나만이 절대적이거나, 우월하다고 주장하기 보다는 종교의 다양한 진리주장들이 원칙적으로는 모두 옳으며, 진리라고 주장한다. 동시에 다원주의는 인식론적인 관점에서 진리의 상대적 "인식"을 주장하며, 진리판단의 기준으로서 윤리적 잣대를 제시한다. 여러 종교의 구원과 관련해서, 다원주의는 다양한 구원의 길들 각각의 독립적인 가치를 긍정한다. 이 점에서 다원주의 신학은 한편에서는 제종교의 절대성주장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서로 갈등할 수 밖에는 절대성주장을 종교 인식론적 측면에서, 다시 제 조율하고자 한다.
3. 세가지 종교신학적 모형의 완전성과 논리성에 대해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 페리 슈미트 로이켈은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어떤 종교신학이든 위의 세가지 유형 중에 하나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위의 세가지 중에 어디에도 들지 않을 수는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물론 종교신학적 모델들을 세부적으로 더 나눌 수는 있겠지만, 결국은 세가지로 분류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4. 종교신학의 세가지 유형에 대해 그리스도 신앙은 어떤 모델에 속하는가? 어떤 신앙인은 배타주의를 택할 것이다. 그는 예수 외는 구원의 길이 없다고 말하고, 그리스도교의 진리만이 참 진리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신앙인은 포괄주의를 택할 것이다. 그는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지만, 다른 종교인도 그 종교의 구원의 길을 통해 결국 예수에게 온다고 믿는다. 그는 구약과 신약을 약속과 성취의 도식으로 읽으며, 구약의 율법이 신약의 믿음으로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즉, 구약의 하나님이 희미하게 비추이신 구원과 진리의 길이 신약의 그리스도를 통해 밝히 드러났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어떤 신앙인은 다원주의의 길을 걷는다. 그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효성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타종교의 구원을 인정한다. 결국은 모든 종교인은 신을 찾고 있으며, 신은 다양한 모습으로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신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 구원의 길이며, 그리스도인에게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나 다른 종교인에게는 그들을 위해 유일한 구원의 길이 있다는 사실과 그 가치에 대해 긍정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의 길과 일치한다.
5. 종교신학의 세가지 유형 자체가 어떤 이에게는 도전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세가지 유형 자체가 어느 한 유형에 속해 있는 자신의 신앙을 상대화시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대체적으로 배타주의적 신앙유형이 지배적이라고 보인다. 동시에 신약과 구약의 관계에 대해,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포괄주의적인 성향이 보인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 종교신학으로서가 아니라, 종교사회현상으로는 다원주의적인 성향이 지배적이다. 모든 종교는 다 똑같다는 종교적 무차별주의, 냉소주의, 무판단주의도 성행한다.
6. 개인적으로는 세가지 유형 중 하나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입장정리의 압력"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그리스도인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개인적 관계 안에서 이웃사랑의 길이 무엇인지를 물을 때, 자유와 해방, 평화와 섬김의 십자가정신이 종교신학적으로 결실을 거둘 수 있지는 않을까 전망해 본다.
여기에는 타 종교자체에 대한 입장보류와 동시에 자기자신에 대한 신랄한 신앙적, 실존적 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타인을 판단하는 잣대가 아니라, 바로 나를 판단하고 나의 기독교를 판단하는 날카로운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에 나와 나의 기독교가 못박히지 않고서는 종교신학적 판단은 참다운 의미에서 "종교적" 판단이 될 수가 없다. 이 때, 십자가는 단순히 승리주의적, 영웅주의적 찬가로서 타종교의 귓전에 울려 퍼질 것이 아니라, 인류의 고난과 그 고난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아픔의 사랑으로서 타종교인과 인류 앞에 서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그 십자가의 사랑을 따르는 자로서 인류의 고난의 현장 앞에서 함께 고통 받는 자로, 동시에 십자가의 사랑의 해방을 신앙하고 희망하는 자로, 타종교인과 온 인류의 형제로 서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더 이상 종교신학적 판단이 앞서기 보다는 종교신학적인 "연대"가 우선시된다. 이 종교신학적 연대는 매 순간 현장의 경험을 반추하면서 새로운 사유 속으로 들어간다. 이 때, 타종교에 대한 판단은 때로는 배타적으로, 때로는 포괄적으로, 때로는 다원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종교신학적 판단은 이 때, 고정적일 수가 없으며, 역동적으로 이루어진다. 배타적인 판단에서는 나 자신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
배타주의는 결코 <내가 옳다>는 종교적 신앙지상주의, 승리주의가 아니다. 배타주의는 바르트적인 의미에서 종교비판적인 칼날 앞에 자기 자신의 종교, 기독교를 포괄한 모든 종교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전제해야 한다. 포괄주의는 종교신학적 연대의 실천에서는 우월주의가 아니라, 초대와 동참으로서 등장한다. 포괄주의는 여기서 <너의 부족을 내가 채우마>라는 식으로가 아니라, <함께 더 넒은 진리의 길을 걷자>는 사랑과 협력의 초대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원주의는 여기서 타종교에 대한 무비판적인 긍정이나 냉소적인 무차별주의로서가 아니라, 상호긍정과 협력의 징표로서 읽힐 수 있다.
7. 기독신앙은 여러 종교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우리 한국에서는 더욱 십자가의 깊이로 들어가야 한다. 의도적으로 본인은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지 않고, 기독신앙이라고 표현했다.
기독신앙이란, 그리스도를 믿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믿음을 의미한다. 기독신앙에서는 기독교, 교회가 중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십자가의 길이 중심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자신의 죽음, 자신의 철저한 죽음을 발견해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바울 선생님의 고백은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다. 한국의 기독교가 십자가 신앙을 오해하거나 망각하고서, 패쇄주의, 염세주의 또는 자본주의적 시녀로서의 축복주의에 빠져 있을 때, 거기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십자가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서 한국교회가 지탄을 받기 이전에, 하루 속히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교회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부활의 교회로 자신을 새로이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교회는 타종교"인"을 못 박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사랑 없음, 고집스러움, 우월의식, 절대주장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다. 니체가 교회를 "신의 무덤"으로 언급한 것은 어떤 점에서는 옳다. 신이 없는 세상, 신에 대해 목말라하는 세상, 신의 무덤이 팽배해 있는 세상 한 복판에 교회는 신의 죽음을 대리해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못 박는 교회는 신의 죽음을 대리하는 동시에 신의 부활을 증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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