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이성
믿음과 이성은 교회 안과 밖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킨 예민한 항목이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어느 한 쪽으로만 치우칠 때에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이 두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다음은 딕 스찬요(Dick Sztanyo)의 “The Nature of Biblical Faith”와 “Faith is the Substance”에서 발체한 것이다.
1.믿음의 여러 가지 근거
믿음이라는 헬라어 피스티스(πιστις)와 피스테오(πιστεω)는 페이또(πειθώ)라는 단어와 관계된다. 페이또는 ‘설득하다’ ‘설득하여 믿게 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세 단어는 각각 244회, 248회, 그리고 55회 사용되었다. 동사인 피스테오는 믿음의 행위와 관련된다. 믿음은 초자연적으로 또는 자연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되어 사용되는 말이다(히 11:1,3,6, 시 19:1-14, 롬 1:18-22, 10:9-17). 믿음을 성경에서는 적어도 7가지의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중 5가지는 사람의 구원에서 절대로 필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첫째로, 믿음은 ‘신념(belief)’으로 묘사된다(요 12:42, 히 11:6). 둘째로, 믿음은 때로 ‘신뢰(trust)’를 의미한다(요 14:1, 롬 4:17-20, 눅 7). 셋째로 믿음은 ‘순종(obedience)’를 의미한다(민 20:12, 요 3:36, 히 10:39, 롬 1:5,8, 16:25,26). 넷째로, 믿음은 충성 또는 ‘신실함(faithfulness)’를 의미한다(합 2:4, 갈 3:9, 히 10:23, 38, 계 2:10). 다섯째로 이 말은 객관적으로 믿음의 내용과 관련되어 ‘믿음(the faith)’을 의미한다(롬 10:9, 유 3, 갈 1:11,23). 여섯째로 믿음은 때로 강한 ‘개인적 확신(personal conviction)’을 의미한다(롬 14:2,230. 일곱째로, 믿음은 영적 은사를 말하기도 한다(고전 12:8-9, 마 17:20, 고전 13:2). 믿음은 때로는 보는 것(고후 5:7, 히 11:1), 의심(약 1:6), 율법의 행위(롬 3:28, 갈 3:2-5) 등과 대조되지만 지식과는 결코 대조되지 않는다. 믿음은 성경적으로 증거에 근거한 지식으로 묘사되기도 한다(눅 1:1-4, 행 1:3, 2:36, 9:22, 13:38).
성경을 통하여 지식에 이르는 다양한 방법들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지식에 이르는 합법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a)유용한 증거를 모으는 ‘귀납적 방법’(induction)이 있다.
b)결론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증거를 정리하는 ‘연역적 방법’(deduction)이 있다(막 3:4).
c)어떤 대상(예를 들면 문)이나 사건(예를 들면 외부적 날씨)의 직접적인 경험인 ‘경험적 자료’(empirical data)를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눅 12:34-56).
d)증거가 의심할 여지가 없다거나 믿을만한 것으로 여겨지는 확증으로부터 온 증거인 ‘확실한 증거’(credible testimony)가 있다(요 20:25-31, 벧전 1:8-11, 고전 15:1-8 등).
e)예감이나 추측과는 구별해야 하는 ‘직관’(intuition)이 있다(마 12:24-28). 지식은 감각적 이해나 경험의 방법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f)잠재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는 추론에 연관된 ‘형이상학적 추론’이 있다(눅 17:20-21, 히 11:3).
로빈슨 크르소의 경우처럼 바다가에서 발자국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발자국이 자신의 것이
아님이 분명한 경우 추론할 수 있는 것은 a)이 섬에 어떤 존재가 있다. b)그 존재가 사람이다. 크르소는 프라이데이를 만남으로써 이 증거를 확인하게 된다. 이와 같은 추론을 하나님의 실존에 적용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발자국을 세상에 남긴다(행 14:17). 사람들은 이 확실한 증거로부터 온당한 분석을 하고 올바른 결론을 내야 하는 책임이 있다(롬 1:19-22, 시 19:1-6, 히 3:4).
1)믿음의 현대적 개념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두 가지 사항을 다루어야 한다. 첫째는 믿음과 이성의 현대적 내용의 철학적 배경과 둘째는 이들 내용이 교회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현대 믿음의 내용은 수많은 영향을 받아왔다. 칸트는 그의 대표작인 “순수 이성 비판”에서 “믿음에 대해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서 지식을 부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쓰고 있다. 키이르케고르는 “우리의 이성이 반복적으로 침체되고 있는 완전한 한계는 ‘알 수 없는 존재(the unknown)’ 즉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이다.”라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이성은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열렬한 위임’(passinate commitment)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합리성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칸트 이후 많은 사상가들은 믿음과 이성을 구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분리하였다. 그래서 믿음과 이성은 각각의 영역을 가지게 되었다. 믿음은 가능성, 신비적 체험, 초합리성, 비합리성, 지식 너머의 것 등으로 제한하며, 지식의 한 형태로는 보지 않는다. 이러한 가정은 매우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서 교회 안에서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웹스터 사전에는 믿음을 “증거가 없는 것을 확고하게 믿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과학적 증거를 얻을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믿음이라는 공간을 두고 있다는 생각은 믿음의 현대적 개념으로 굳어져 있다.
2)합리적 믿음의 철학적 근거
월터 카프만(Walter Kaufmann)은 그의 저서 “Critique of Religion and Philosophy”에서 “왜 사람은 그들이 하는 것을 믿으려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고 시도했으며 7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여기에 그 내용을 소개한다.
‘하나님의 존재’, ‘예수의 교회 설립’, ‘영혼의 구원에 세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가?’ 하는 등의 주제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믿어지는 것이다.
a)이를 지지하기 위해서 논쟁이 일어났으며,
b)책이나 논집 등으로 만날 수 있으며 이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 없다.
c)수많은 요소가 작용될 것이다(문화적 환경에서 상식적인 믿음이 될 것이며, 일종의 ‘삼투성’(osmosis)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d)새로운 믿음은 이미 형성된 믿음에 잘 맞아들어갈 것이다.
e)믿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불이익이 생길 것이다(사회적 貝殼 추방, 부모에 대한 실망, 고문 등).
f)이러한 믿음을 받아들이면 긍정적인 보상이 있을 것이다.
g)그 믿음을 받아들이면 만족스러워지거나 철학적 필요에 답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첫번째 믿음과 나머지 6가지 믿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성경적 가르침을 총 망라하여 하나님은 오직 첫번째만 받아들인다(살전 5:21, 벧전 3:15). 이러한 이유의 속성에 근거하여 믿음은 (합리적인 믿음과 비합리적인 믿음으로) 두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합리적인 믿음은 사건에 근거한 이성적 믿음이며, 비합리적 믿음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a)믿음은 이성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비합리적인 원인들 즉 감정, 선입견, 기득권, 권위, 습관 등에 근거한다.
b)믿음은 부적당하고 불충분한 이유에서 나온다.
3)합리적 믿음의 성경적 근거
그리스도교 안에서 합리적인 믿음의 중요성을 다루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제시한다.
베드로 전서 3:15: 이 본문에서 베드로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했다. 여기에서 ‘대답하다’라는 말의 헬라어 απολογια는 여격을 수반한(고전 9:3) 공식 또는 비공식인 변증 또는 어떤 종류의 대답에 연관되어 있다. “이유를 묻는”은 모든 문명화한 사람이 합리적으로 또는 지나치지 않게 행동하거나 견해에 관한 질문을 토론할 준비가 된 것으로 헬라인들에게 기대되는 사실과 연관이 있다. 베드로는 이 ‘합리적 믿음’의 책임을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게 지운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 및 하나님 안에서 가지는 희망에 ‘합리적인 책임’을 지움으로써 방어벽을 만들어야 한다.
데살로니가 전서 5:21: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것을 증거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문자적으로는 “모든 것을 시험하라”). 그는 증거 대신 또는 증거의 반대로 믿음의 개념을 마음에 둔 것은 아니었다. 믿음이 개연성의 문제라는 점을 논의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Œ사례가 증거된 것처럼 행동하고, 증거가 없는 것에 대해 무언가를 믿는 행동을 할 것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도키마조(δοκιμάζω, 시험하다)라는 말의 사용은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것을 증거하거나 시험해 보아야 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눅 14:19, 롬 12:2, 고전 16:3, 고후 8:8, 살전 2:4, 5:21, 딤전 3:10, 벧전 1:7, 요일 4:1).
빌립보서 1:7. 확정함(베바이오시스, βεβαίωσις)이라는 말은 지지된 위치가 정당화되도록 의도되었음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막 16:20, 히 2:3, 6:16-17 등 참조). 베드로는 이 말을 확정된 위치를 설명하는 데 두 번 사용하였다(벧전 1:10, 19). 첫번째 구절은 하나님은 누군가가 살아가는 삶의 유형에 의하여 증거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고, 두번째 구절은 예언의 성취는 신적 초과학성을 증거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언의 성취에 대해서 다른 가능한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이사야 41:21: 고대의 거짓 신들과 진정한 유일 하나님 사이에 시험의 내용을 담은 본문은(고전 10:4-6 참조)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형상이 어떠한가, 하나님은 누구신가 등의 문제가 증거라는 바탕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영감된 기록의 증거는 우리에게 이들의 확실성을 아는데 유용하다(눅 1:4, 행 1:3, 2:36, 9:22, 13:38).
2.신앙 신봉 주의(fideism)
예를 들어 나는 단순히 내 아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어떠한 인격적인 특성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녀가 진정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거나) 믿지 않고 사랑한다는 것은 바보와 같은 짓일 것이다. 이처럼 그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어떠한 사실을 믿는다는 것(히 11:6, 요 12:41-42, 약 2:19)은 믿음이 근거한 합리적 기초인 것이다(약 2:20, 26, 롬 10:10-17).
만약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강한 신념도 하나님을 존재하게 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신념은 무흠한 것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기초는 실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긍국적인 목표는 ‘구원 받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 진리의 기초가 없이는 그리스도의 위임이 다른 종교의 위임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할 길이 없다. 알리 후우버(Arlie Hoover)는 “검증없는 위임은 공상이다. 또한 위임없는 검증은 모든 행위의 마비일 뿐이다. 칸트 학파의 용어를 사용하여 믿음 없는 이성은 공허하며 이성 없는 믿음은 장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The Case for Christian Theism, 1976, p. 37)
기독교 신앙에서 이성의 역할을 부인하는 한 대부분의 믿음에 대한 현대적 사고는 신앙 수호적이다. “철학 백과 사전”에서 ‘신앙 신봉 주의’를 “종교적 진실은 이성적이나 증거적이라기 보다 긍국적으로 믿음에 근거한다는 관점”으로 정의하고 있다. “신앙 신봉 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는 데 근원을 두고 있으며, 이러한 태도의 논리적 상황은 회의론이다.”라고 폽킨(Popkin)과 스트롤(Stroll)의 “Philosophy Made Simple”에서 언급하고 있다.
오늘날의 많은 종교가들은 신앙 신봉 주의자들이다. 이러한 내용을 방어하려고 하지 않으며 이것이 성경적 입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부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불가지론자(agnostic)는 “나는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알 수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신앙 신봉자들은 거기에 덧붙여서 “그러나 나는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라고 말한다. 이는 ‘합리적 믿음’에 대한 요구를 부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사 41:21, 벧전 3:15, 살전 5:21, 빌 1:7). 이 역시 정당한 증거에 근거하기 보다 어떤 이성에 대한 믿음의 개념을 수반한다. 그러나 객관적이고 인식론적 입장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어떤 믿음의 내용은 성경적 가르침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3.믿음과 이성
믿음과 이성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묘사하기 위해 ‘합리적 믿음’이라는 기술적 구절을 선택했다. 이들 관계성을 다루기 위해 몇가지 다이어그렘을 채용한다. 수평적 화살표는 a)같은 증거가 모든 사람에게 사용될 수 있고, b)그 증거는 믿음의 대상을 지적하는 것이지 믿음 자체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며, c)그 증거는 사람의 지능을 불어넣는다는 점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각기 주어진 다이어그램에 묘사된 개인에게서 생겨난 화살표는 얼마나 다양한 사상가들이 그 증거를 이용하였는가를 보여준다. 직선으로 표시된 것은 열거된 특별한 것이 특별한 사고 구조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짐을 나타낸다. 점선으로 된 화살표는 특별한 것이 무력한 것임을 나타낸다.
1) ‘..인 것처럼’의 가설
이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아는 방법이 없음을 지지한다. 그러므로 아래 다이어그램에서 수평선은 하나님으로부터 지능을 분리하는 통과할 수 없는 벽을 나타낸다. ‘믿음’은 그 추구 대상에 이를 수 없음처럼 ‘진짜 믿음’은 어딘가에 믿음의 대상이 진짜로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사도들이 가진 믿음과 같은 믿음을 지속할 수 있는 이상 이는 사도적 믿음과 실행을 회복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인 것처럼의 가설”
? 믿 음------- ------- 믿음의 대상
이 성………… 믿음의 대상
______________
증 거
2) ‘가능성’ 가설
이 가설은 언뜻 보면 상당히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 하면 비교리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특별한 위치는 기타의 것들보다 더 위험하다. 이는 이러한 관점의 지지자들이 위선적이기 때문이 아닐 뿐더러 그들의 신념에 심리학적인 위임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 만도 아니다.
‘..인 것처럼’의 가설에서 ‘?’는 주관적인 면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관점에서 ‘?’표는 객관적인 면을 나타낸다. 만약 믿음의 대상이 오직 ‘가능성’만으로 존재한다면 통과할 수 없는 장벽은 믿음의 대상에 이르는 것을 방해한다. 결국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장벽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가능성을 의미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신념을 가진 사람은 아무런 행동도 요구되지 않는다. 대신에 존재 대상의 가능성만 강조될 것이며, 결국 행동을 할 것인지의 여부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만약 장벽의 양쪽에 ?표를 두는 ‘인 것처럼의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가장 나쁜 위치의 가능성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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