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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내게로 돌아오라 (스가랴)

하나님아들 2015. 7. 18. 15:10
 

내게로 돌아오라 (스가랴)                                    신학과    이 완영

내용

서론에 슥1:1-6은 스가랴 전체의 서론인 동시에 제1부(1:1-6:15)의 서론이 되며 스가랴 메시지의 의도와 그 배경을 암시해준다 그다음 등장하는 여덟 환상들은 상호 유기적 연관성을 보여준다.

첫째. 환상(다양한 색깔의 말들과 세상의 평온)과 여덟째 환상(다양한 색깔의 말들과 하나님의 평온)은 각각 말들의 출현과 평온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둘째. 환상(열방의 삼판)과 일곱째 환상(바벨론에 대한 심판)은 이스라엘을 괴롭힌 바벨론과 같은 열방의 심판에 초점을 두고 있다.

셋째. 환상(예루살렘 척량)과 여섯째 환상(예루살렘 정화)은 예루살렘의 회복과 정결을 다루면서 하나님의 도성“예루살렘”에 관심을 기울인다.

넷째. 환상(여호수아와 메시아 약속)과 다섯째 환상(스룹바벨과 메시아 약속)은 포로 귀환 공동체의 두 지도자,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에 대한 약속을 제시하며 특히“순”고 “머릿돌”과 같은 메시아적 용어들을 각인시키고 있다.

끝으로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상징행위를 보여주는 6:9-15은 성전 건축의 완성을 약속하면서 스가랴환상을 마무리 짓는다.

그러므로 슥1-6장은 성전 건축의 중대한 과업에 앞서 아직도 준비되지 못한 포로 귀환 공동체를 향해 그들에게 절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낙담한 백성들에는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스가랴는 누구인가?

슥 5:1과 6:14에는 스가랴를 “잇도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다. 과연 스가랴는 누구인가? 잇도의 아들인가 아니면  베레갸의 아들인가?

스가랴는 누구의 아들인가 스가랴가 누구의 아들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어 왔다.  첫째, 전통적으로 제롬과 같은 학자들은 베레갸는 육신의 부모, 잇도는 영적인 부모라고 주장한다. 어떤 학자들은 스가랴의 부친이 조기에 사망한 후 조부가 실제적인 부모가 되었다고 하고 또 다른 학자들은 두 스가랴가 존재하며, 서로 다른 부모가 있다고 주장 한다  볼드윈과 같은 학자는 수5:1과 6:14의 “아들”이라는 말은 엄격하게 “부모의 자식”이라는 개념뿐만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로서 “자손” 혹은 “후손”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스가랴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름은 아마도 “여호와께서 기억하시다”는 의미를 내포하며 예수는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바가랴의 아들 사가랴로 소개하고 있다.(마 23:35;눅11:5)

스위니와 같은 학자는 아시아의 증인 “스가랴”와 스라랴의 “스가랴”를 연장선상에 해석하려 한다. 아마도 느12장에 언급된 이 스가랴가 바로 스가랴서의 스가랴와 동일 인물이라고 한다. 그는 포로 귀환 공동체 가운데 영향력 있는 지도자였을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이 절망적인 순간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했던 선지자이기도 했을 것이다.

스가랴의 시대적 배경

슥 1:1-7, 그리고 7:1은 다리오 왕 2년 그리고 왕 4년이라는 연도 공식을 말해준다. 이 시기는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 1세의 초창기 시대를 의미한다.

현재 스가랴가 거하는 과거의 그 장엄한 제국의 수도가 아닌, 초라하고 볼품없는 멸망의 장소였다. 더욱이 이곳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산재해 있었다. 첫 번째, 어려움은 재정적인 문제 , 두 번째는 사회적인 문제, 세 번째는 정치적인 문제였다.

이런 위기의 상황 속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스가랴의 메시지였다.

스가랴의 장르: 예언인가, 묵시인가?

스가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스가랴를 예언보다는 묵시의 장르로 규정한다. 아모스나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서 본문들보다는 훨씬 더 묵시적인 성향들을 내포하고 있다. 볼드윈은 스가랴에서 “환상”외에도 그 밖의 다른 특징적인 묵시적 요소들을 언급한다. 그녀는 동물 상승(슥1:8-21),상징의 수 (2,4혹은 7이라는 숫자), 역사와 종말론의 혼합(7-8장), 예언적 종말론의 전형적인 이미지 사용(9,14장) 및 계시록에서 취해진 다른 여러 모티브와 이미지들을 스가랴서의 묵시적 특징으로 제시한다.

볼드윈은 지진(14:4-60, 여호와의 기적적인 개입(9:8; 12:7; 14:1-8), 탄식에 이은 궁극적 기쁨(9:9; 14:16)과 같은 요소들을 묵시적 특징으로 해석한다.

요약하자면 스가랴서는 예언에서 묵시적 종말론으로 넘어가는 사상적 발전 단계를 암시해주며, 환상과, 상징과 종말론적인 표현을 담고 있는 묵시적 예언 본문으로 규정될 수 있다,

스가랴의 중심 신학

하나님 =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 스가랴서를 관통하는 중심 주제는 “회개”이다( 1:1-6) 스가랴는 현 이스라엘이 당면한 문제들(공의 상실[7:8-10; 8_16-17], 우상숭배와 거짓 선지자들[13:1-3], 약탈을 일삼는 통치자들[9:8]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며, 그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회개”를 촉구한다. 회개의 은총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스가랴는 이런 회개의 은총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점을 밝힌다.(12:10-14) 스가랴에 나타난 회개는 인간의 책임적 반응과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을 동시에 포함한다.

언약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은 스가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의 회복을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소개한다. 1:16-17에서 “돌아오다”라는 히브리어“슈브”가 완료형으로 쓰이고 있음은 하나님 귀환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암시함으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음을 암시한다. 2:10-11에도 나타난다. “함께 거 한다”는 표현과 8“8-7,9:7은 회복의 보편적 관점을 나타낸다. 13:9절은 남은 자와의 언약 관계를 강조하고 14:16절은 새 언약의 보편적 범위를 보여준다.

정화시키는 하나님은 스가랴는 정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임재는 백성들의 정결 혹은 거룩과 연결된다. 첫째, 여호수아는 자신의 정결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정화된다. 둘째,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정화는 전체 공동체의 정화를 상징한다. 셋째, 희생 제사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용서함을 받는다. 넷째, 여호수아는 제사장직을 수행하기에 앞서 반드시 정화되어야 한다. 다섯째, 여호수아 복위와 제사장직은 메시아적 인물, “순”(8절)을 예표 한다. 여섯째, 이순과 일곱 눈을 가진 돌은 이 땅의 죄악을 제거하는 것과 연결된다.(9절). 그러므로 3:1-10절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반드시 공동체의 정화 및 그 필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5:1-4는 심판/저주를 상징하는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다룬다. 3절에 사용된 “저주”(히, 알라)라는 말은 신 29:12,14,19절에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와 관련된 단어이다. 9:7절은 이방인 가운데 정화된 민족으로 등장하는 블레셋 족속에 초점을 둔다. 12:10-14은 하나님의 성령이 부어질 때. 백성들이 그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여 정화된 백성이 될 것임을 강조한다. 13:1-6에 특정적으로 등장하는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은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부각시키고 있다.

메시아 “순”으로서 메시아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임직은 장차 도래할 다윗과 같은 왕, 즉 메시아의 시대를 예고해 준다. 6:10-15에서도 “순”이 등장한다. 이 ”순‘은 제사장적 사역보다는 성전 건축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다.

슥 1-6장의 맥락에서 볼 때, 이 “순”이라는 표현은 포로기 공동체의 역사적 인물인 스룹바벨에게 적용될 수 있다. 슥 4“14도 스룹바벨의 메시아적 위치를 부각시키고 있으며, 스가랴는 스룹바벨을, ”순“의 예언을 궁극적으로 성취할 메시아로 이해하지 않았다.

왕과 목자로서의 메시아 9:9절은 예루살렘에 도래할 양 같은 메시아적 인물을 소개한다. 신약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여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9:9의 성취로 이해한다. 스가랴는 거짓 목자들과는 달리 백성들로부터 거절을 당하는 또 다른 한 목자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성전을 건축할 “순” 그리고 왕과 목자로서의 메시아 개념을 제시하는 스가랴서는 신약의 메시아사상에 중요한 신학적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성령 성전 재건을 완성하도록 감동하시는 성령님

스가랴서는 성령의 독특한 사역을 강조하고 있으며 스룹바벨로 하여금 성전재건의 임무를 완성할 수 있도록 감동시킨다..

회개의 심령을 부어주는 성령님 스가랴는 12:10절에서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을 향해 은총과 간구의 심령을 부어 주실 것이라고 선포한다. 스가랴는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찾으며, 간구하는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새롭게 변화될 것임을 강조한다.

스가랴서와 신약 스가랴서는 신약의 저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가운데 특히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공생애 사역과 수난 기사는 스가랴서를 배경으로 펼친다.

제1부 환상이 전하는 메시지들(1-6장) 필자는 스가랴서 전체를 세 개의 주요 단락으로 나누고 여덟 환상을 소개하는 슥 1-6장은 첫 주요 단락에 해당한다. 각 환상의 중심 사상들은 교차 대구 구조를 형성한다.


결론 (6:9-15) 슥 1-6장은 성전 건축의 중대한 과업에 앞서 아직도 준비되지 못한 포로 귀한 공동체를 향해 그들에게 절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낙담한 백성들에게는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여호와의 진노와 회개 촉구 (1:1-6)

개요  옛 조상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1:2)을 언급한 뒤, 현 세대를 향해 다시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을 촉구한다.(1:3)

본문 해석 선포된 시기와 그 계시의 수납자의 신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1:1절은 스가랴의 구체적인 족보를 소개한다.

옛 조상들의 악한 길 , 악한 행실  “길”이라는 히브리어“데레크”과 “행실”이라는 “마알랄”은 옛 조상들의 죄악이 지속적이고 꾸준히 진행되었던 것임을 암시해 준다. 마빈 패트와 학자들이 제시하듯이, 옛 선지자들이 지적한 고소의 내용은 (1) 위선적 의식주의 (2)사회적 불의 (3)우상숭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언약 적 파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그리고 백성들이 신명기(모세)의 언약을 얼마나 깨뜨렸는지를 강조해 준다.

말씀을 듣지 않음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상태를 “귀머거리”로 비유한다.(사 6:9)이는 스가랴의 맥락과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회개 거부 옛 조상들의 심판 원인은 이런 악이나 말씀에 대한 무관심 때문만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로 돌아오기를 거부했다. 이제 1:5-6에서 여호와는 두 가지 질문을 나란히 던진다. 첫째 여호와는 조상들이 어디 있는가와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 수 있는 가 이다. 스가랴는 옛 조상들에 임한 심판은 신28:45의 경고대로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지 못한 결과로 말미암은 것임을 상기시킨다.

현대적 적용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이와 같은 회개 촉구는 신약에서도 중요한 이슈로 다루어진다. 신약의 회개는 종종 구약 적 의미와는 다른 방식으로 취급된다. 구약의 “회개”는 죄악으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감”을 뜻한다. 신약에서 “회개”는 다시 돌아가는 것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반응하는 것, 즉 “회심”을 가리킬 수도 있다. 구약과 신약의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행한 언약 백성들의 필수적인 반응이다.

‘우리“를 향한 메시지 스가랴의 외침은 단지 과거의 “그들”만을 위한 경고의 메시지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살아있는 권위적인 말씀으로 다가온다. 스가랴의 외침은 누구를 위한 메시지인가?  그 외침은 바로 “우리”를 위한 메시지이다.

붉은 말을 탄 여호와의 사자(1:7-17)

개요 1:7은 서론적 선언이며 1:8 환상의 배경을 제시 1:9-13은 본격적인 등장인물들 간의 대화 1:14-17은 천사가 선포한 두 개의 메시지로  구성 된다

본문 해석  여기서 등장하는 “스밧”이라는 달의 명칭은 바벨론 달력에서 나온 말이다. 이와 같은 바벨론 달력에 대한 언급은 바벨론의 달력을 채용한 페르시아 제국의 영향력을 그대로 반영해 준다. 1:7의 표현은 온 만물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그의 통치를 다시 수행하실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1:8스가랴가 환상을 본때는 밤이었다고 소개한다. 등장하는 “밤”이라는 표현은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으로서의 선지자 상을 암시한다. 또한 이방 제국의 식민지 통치와 같은 고통과 고난의 때를 암시할 수도 있다.

스가랴는 붉은 말을 탄 한 사람을 본다. 이 붉은 말의 원어는 “갈색의 말 ‘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어떤 학자들은 스가랴에 말하는 천사(9,13)와 동일한 존재로 간주하지만 본문에서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선자“와 ”내게 말하는 천사“라는 표현이 계속 구분되어 묘사되기 때문에 동일한 존재로 취급하기는 어렵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이 말들이 복수형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세 마리의 말보다는 세 종류의 말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본문에 등장하는 말들의 색깔에 대해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이런 색깔들은 실제 말들의 색깔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어떤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실제로 고대 근동 지역에서도 이런 색깔을 지닌 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말들의 색깔에 숨겨진 상징적 의미를 찾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색깔의 수 역시 상징적 의미를 갖지 않는 것인가? 여호와의 사자가 언급한“칠십년”이란 기간은 예루살렘의 멸망(주전587년)으로부터 스가랴 환상의 때(주전 520년)까지를 포함하는 시기일 수도 있고, 록은 예루살렘 제 1성전 멸망의 때(주전587/586)로부터 제2성전 완성의 때 (주전 516년)까지의 기간을 뜻할 수도 있다. 어떤 학자들들 상징적 표현으로 보기도 한다. “칠십년”이라는 표현을 너무 엄격하게 문자적으로 접근하는 태도는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이 “칠십년‘이라는 표현은 예루살렘의 멸망(주전 587년)으로부터 시작하여 현재 스가랴 환상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어왔던 고통의 세월을 가리키는 역사적 기간으로 보는 편이 가장 바람직해 보인다. 스가랴가 선포한 두 번째 희망의 메시지는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해 진노하고 계신다는 것이다.(15) 실제로 이 “긍휼”이란 뜻의 히브리어 “라하밈”과 “돌아오다”라는 뜻의 “슈브”는 언약 적 배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신 13:17; 시71:29-85;7 렘 12:15; 미가7:1920; 슥8:15) 이와 같은 언약 관계의 회복은 여호와의 임재를 보장해 주기 때문에, 여호와는 이제 자신의 임제 처소인 성전의 건축을 선포하신다. 여호와는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고 말씀하신다. “먹줄”로 번역된 히브리어“카베”는 종종 여호와의 심판 혹은 멸망을 상징하는 메타포로 사용된다.(왕하 21:13; 사 34:11; 애 2:8)

현대적 적용

만왕의 왕은 누구인가?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진정한 왕은  페르시아 황제가아니라 여호와  이심을 강조한다. 신약의 기자들에 의해서 복음서 기자들은 하나님의 절대 권위를 높인다.

스가랴는 우리들을 향해 눈에 보이는 절대 권력보다는 보이지 않지만 온 땅을 다스리는 만왕의 왕을 전적으로 신뢰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네 뿔과 네 장인 (1:18-21

개요 스가랴는 먼저 이스라엘과 유다를 흩어버린 네 뿔들을 보고, 이어 이 뿔들을 깨뜨리기 위해 등장한 네 장인들을 본다.

네 뿔의 등장 (1:18)

뿔에 대한 스가랴의 질문과 천사의 대답 (1:19)

네 장인의 등장 (1:20)

장인에 대한 스가랴의 질문과 천사의 대답 (1:21)

구약에서 히브리어 “케렌”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1) 뿔은 종종 힘 혹은 권력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된다.

(2) 뿔은 전투에서 승리를 상징해 준다.

(3) 뿔은 짐승들을 대상으로 공격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매우 거친 군사적 공격을 상징해 준다. 그렇다면 이 네 뿔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탈굼은 ‘네 뿔들’을 네 왕국으로 해석한다. 4라는 숫자는 전체성을 뜻하기 때문에 유다와 이스라엘을 괴롭힌 이방 제국 전체를 포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정해진 복음의 승리 이와 같은 스가랴의 승리의 신학은 하나님 나라의 승리가 이미 정해져 있음을 시사해 준다 .

본문 해석

여호와는 예루살렘의 불 성곽이 되셔서 온 우주의 통치하심을 상징하며, “영광‘이라는 말은 성전에 거하는 신적인 임재를 나타내주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그의 눈동자처럼 동일시한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행위는 그의 눈동자를 공격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친밀한 관계성을 암시해 주는 표현이다. (렘 30:16; 겔 39:10;)  하나님의 백성들을 노략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눈동자를 공격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여호와의 심판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현대적 적용

종말의 아브라함 자손과 시온의 새 백성 스가랴는 2:4절에서 예루살렘 거민들의 넘쳐 날 것이라고 예언하며 2:11에서는 장차 뭇 나라 열방들이 여호와의 백성들이 될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바울 역시 아브라함의 참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언약이 궁극적으로 성취된다고 단언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구약의 종말론적 성취의 중심이 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를 경험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종말의 시온은 여호와를 경배할 온 열방의 예배 처소로 회복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스가랴에서 나타난 시온 사상의 궁극적인 성취이다.

여호와 우리의 안식처 스가랴는 회복될 예루살렘에는 성벽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친히 불성곽이 되실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와 같은 여호와의 보호하심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놀라운 신학적 의미가 있다.

여호수아의 의복과 관 ( 3:1-10) 본 단락은 크게 두 부분 3;1-5과 6:-10로 나눌 수 있다. 저자는 여호수아에 대한 고소 사건이 벌어지는 천상을 배경으로 하는 반면 후자는 그의 동료들에게 전달되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초점을 두고 있다.

본 단락은 제사장의 직무와 성전의 회복이 “순”으로 상징되는 다윗과 같은 메시와의 도래와 새 시대의 평화와 번영을 예고하고 있다.

본문 분석 여호수아와 사탄은 여기서 처음 등장하므로 우리는 여호수아와 사단의 정체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여호수아는 어떤 인물인가?

대제사장 여호사닥의 아들이었다. 포로 귀한 공동체 가운데서 그가 차지하는 정치적 영적인 리더십을 시사해주는 듯하다.

구약의 사탄 사탄의 정의

히브리어 명사 “사탄”은 동사형 “사탄”과 연관이 있음에 틀림없다. 이 동사는 구약에서 단지 여섯 번 등장한다.(시 38:20; 71:13; 109:4,20,29; 슥 3:1)

이 동사는 대체로 “고소하다”“비난하다”와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스가랴3:1에서 나타난 사탄은 천상적 법정을 그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피고를 송사하며 고소하는 검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사탄은 왜 여호수아를 고소하고 있는가?

3절에 묘사된 여호수아의 더러운 제사장 복장은 사탄의 고소 내용을 짐작케 한다. 이것은 여호수아의 현제 상태와 부정한 상태를 상징한다. 여호와는 사탄에 고소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오히려 여호와는 여호수아의 부정함을 고소하는 사탄을 책망하신다. 흥미롭게도 사탄을 책망하시는 여호와는 “예루살렘을 택 한자”로 소개한다.

더욱이 여호와는 사탄을 향해 여호수아를 “불에서 그을린 나무”에 비유한다.

3:4-5에서 오물로 더럽혀진 여호수아의 복장은 그이 부정한 상태를 상징하는 바, 좀 더 구체적으로 그의 죄악을 상징한다. 히브리어 “아온”은 여호수아의 제사장으로서의 자격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일반적으로 죄를 뜻하는 이 단어는 윤리적 범죄나 그 이 이후의 범죄 상태를 가리킬 때에 사용된다. 하지만 이 단어는 개인의 직접적인 범죄보다는 이전 조상들의 죄를 뜻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된다.(삼상 25:24; 사 53:6,11)

욥 29:14과 사 62:3에서 “짜니프‘는 회복의 영광을 상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짜니프“의 용법을 고려할 때 슥 3:5에 등장하는 ”짜니프“ 역시 회복의 영광을 상징한다. 욍족의 지위와 같은 고상한 신분을 암시한다.

3:6-7에서 여호와는 새로운 예복과 의관을 정제한 여호수아에게 권고의 말씀을 전하신다. 여호와의 권고는 두 개의 조건절과 두 개의 귀결절로 구성된다. 


여호와는 그의 “종”을 보낼 것이며 그는 “순”으로서 돋아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이순은 누굴 가리키는가? 개역성경서 “순”으로 번역된 히브리어“째마흐”는 “가지”혹은 “싹”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대체로 선지서 에서 메시아적 용어로서 사용된다.

현대적 적용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스가랴 시대의 포로기 후 공동체는 예루살렘 멸망 이후 줄곧 성전파괴와 제사장 직무와 중단으로 인해 정체성의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나아가 슥3장에 나타난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사역과 임무는 완전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바라보게 한다.

신약의 저자들은 인류의 죄악을 대속해 줄 이 대제사적 메시아를 예수 그리스도로 증거 한다. 먼저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죽음으로 성소 휘장이 찢어진 사건을 소개한다. 요한은 17장에서 대제사장으로서 기도하는 예수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바울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이미지를 강조한다.(롬5:2; 엡2:18; 3:12) 더욱이 히브리서 기자는 인류의 죄악을 담당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과 그 우월성을 구체적으로 논증한다.

순금등대와 감람나무(4:1-14)

개요 스가랴는 금으로 된 등대의 환상과 그 등대 곁에서 기름을 공급해주는 두 감람나무의 가지를 본다. 스가랴는 이 순금등대 곁에 있는 두 감람나무의 의미를 알고자 천사에게 질문을 던진다.

천사는 순금등대에 기름을 공급하는 이 두 감람나무의 의미를 밝혀준다. 이 환상은 성전 건축의 방식과 성전 건축을 이끄는 두 지도자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한 영적인 원리 들을 우리들에게 잘 제시하고 있다.

특히 이 단락은 천사와 선지자의 질문과 대답으로 진행되는 전후 단락의 표현방식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신탁형식을 이루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더해주고 있다.

본문 해석 4:2절에서 우리는 천사의 등장에 대해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이 천사는 주로 스가랴의 질문에 대답하거나 해석해 주는 역할을 했으나, 여기서는 주도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스가랴가 본 것은 순금 등대(2절)와 그 곁에 있는 두 감람나무(3절)이다.

역사적 해석 첫째, 올렌비거와 같은 학자는 이 순금등대를 솔로몬 성전 입구의 두 기둥의 관점에서 해석하려 한다. 어떤 학자들은 로마 티투스의 기념문에 그려진 등대를 이 순금등대의 배경으로 이해한다. 둘째. 로버트 노스와 같은 학자들은 이집트의 팔레스타인의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여러 형태의 등대와 등잔에 대해 연구한 바 있다. 이 고고학자들은 동일하다고 볼 수 없지만, 가장 유사한 면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볼드윈은 고고학적 유물로 발굴된 도자기 등대의 형태를 염두에 두면서 스가랴가 본 순금등대의 모양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아마도 스가랴의 등대는 위쪽으로 갈수록 약간 뾰족해지며 그 꼭대기는 접시가 있는, 도자기 형태의 기둥모양을 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순금등대는 과연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일까? 여호와 혹은 여호와의 임재로 이해한다. 이와 같은 해석을 받아들이면, 여호와께서 두 감람나무의 기름을 공급 받아 빛을 비추는 자가 되기 때문에, 상당한 문제를 야기 시킨다. 다시 말해 여호와께서 두 감람나무의 기름에 의존하는 분으로 오해될 수 있다.

4:4-5에서 스가랴는 천사에게 “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이것들”이란 표현은 스가랴가 본 순금등대와 감람나무에 대한 이상 전체를 모두 포함함 지시대명사인가> 11-13절에 또 다시 등장하는 스가랴의 질문을 고려해 볼 때, “이것들”은 두 감람나무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4:6절에서 여호와는 먼저 스룹바벨에게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선포하신다. “힘‘으로 번역된 ”하일“은 막강한 노동력을 뜻하며, ”능“이란 뜻의 ”코아흐“는 노동자들의 강한 ”힘“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메시지는 성전 재건이 인간의 힘이나 노력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해준다. 오히려 성전 재건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히 루아흐)으로만 가능하다.

먼저 우리는 두 지도자가 왜 감람나무의 이미지로 묘사되고 있는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 감람나무는 풍요와 아름다움과 중요한 가치를 강조한다. 슥4장에 등장하는 두 감람나무 가지는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풍성한 결실을 안겨 줄 중용한 영적인 지도자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편 “기름 발리운자”의 히브리어 “베네 하이쯔하르”인데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기름의 아들들” 이 된다.  메시아에 부어지는 기름을 뜻하는 “쉐멘”보다는 나무의 기름에 해당하는 “이쯔하르”가 사용되고 있음은 매우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본문에서 메시아와 관련된 용어들이 등장하지 않지만 이 두 가지가 상징하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다윗의 후손이자 대제사장의 직분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기름의 아들들”이란 말에는 메시아적 뉘앙스가 함축되어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거대한 두루마리와 언약 적 저주 (5:1-4)

개요 스가랴는 계속해서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을 본다. 이 두루마리는 율법에 기록된 언약의 저주를 연상시키며, 그 언약의 계명을 깨뜨린 죄인들의 심판을 반영한다. 이것은 스가랴의 환상이 성전 건축과 아울러, 성전 건축을 수행할 이스라엘 공동체의 순결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두루마리 환상은 성전 건축을 감당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언약 준수 의무와 언약 백성으로서 순결성을 강조한다.

본문해석

5:2절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천사는 스가랴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라는 질문을 던지자 스가랴는 날아가는 두루마리의 크기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5:1-4은 포로기 후 귀한 공동체 안에 여전히 만연되어 있는 죄악의 심각성을 부각시키며, 그 죄에 대한 심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두루마리의 거대한 크기는 백성들의 죄악의 만연함과 그에 대한 저주의 엄청난 심판을 반영해 준다고 볼 수 있다.

5:3에서 스가랴가 천사의 질문에 대답을 하자, 여호와의 천사는 이 두루마리에 대한 설명을 제시한다. 그는 이 두루마리를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고 설명한다.

스가랴의 환상에 나오는 두 유형의 범죄는 십계명의 제8계명과 제9계명을 연상시키며, 이것은 스가랴가 속한 이스라엘 공동체에 퍼져있는 언약 적 불순종으로 인한 사회적 불의와 죄악의 심각성을 암시한다.

현대적 적용

언약 백성의 순결성 이스라엘의 율법 준수는 언약 백성으로서의 표지가 되며, 이방인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거룩의 신학적 근거가 된다. 불법을 행하는 이방인과 달리. 제8, 9계명에 나오는 이러한 죄악들은 신앙 공동체를 파괴하는 부정적인 요소들로 간주한다.(레 19:11; 신5:19;사1:29;렘7:9) 스가랴 시대에 도적질이나 거짓증거와 같은 죄악들이 언약 백성의 순결성을 무너뜨리는 요소였듯이, 바울 시대에 이러한 불법들은 회심 이전의 옛 생활 방식을 가리키며,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이런 죄악들을 범하는 것은 새 언약 백성으로서의 순결성을 파괴하는 행위였다.

에바는 무엇을 뜻하는가?  먼저 학자들은 히브리어를 수정해서 본문의 의미를 해석하고자 한다. 천사는 에바를 “그들의 모양”이라고 해석한다.(5:6)

메릴과 같은 학자는 본문의 단어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해석하여 “그들의 눈”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밝히고자 한다. “그들의 눈”을 여호와의 통치애 맞서 온 세상을 통치하려는 “악의 권세” 권세를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올렌버거와 같은 학자는 “그들의 눈”이라는 표현을 유다를 착취하는 이방의 열국들을 상징 한다는 말로 해석한다.

구약에 등장하는 에바는 규범화된 측량 단위이기 때문에, 정확성 혹은 공정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슥5;6의 에바는 이와 같은 잘못된 불의 적 행위를 암시한다.

슥5:6애 나오는 “온 땅에 있는 그들의 눈”이란 표현은 이러한 죄악이 이스라엘 밖의 여러 지역에서 자행되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그러므로 슥5;6의 에바를 뜻하는 “그들의 눈”은 유다 백성을 포함한, 세상 전역에 그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이방세력의 죄악을 의미하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악의 세력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슥5:9절의 두 여인은 악을 신속히 제거하는 천사들의 사역을 상징적으로 묘사해 주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적 적용 스가랴 시대에 바벨론의 전재들 특히 우상숭배는 성전 건축의 큰 장애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스가랴는 시날 땅으로 옮겨지는 에바의 환상을 본다. 이 환상은 이스라엘 사회에 배여 있는 바벨론의 정신들, 특히 우상숭배가 모두 제거될 것임을 상징한다. 이것은 성전 건축을 수행하기에 앞서 먼저 과거 죄악의 잔재들이 청산되어야만 함을 말해준다.

네  병거와 말들(6:1-8)

개요 이 환상은 스가랴의 여덟 개의 환상들 가운데 마지막 환상에 해당하며, 첫 번째 환상과 다음과 같은 면에서 유사성을 보여준다.

이 마지막 환상은 첫 번째 환상과는 달리 말들뿐만 아니라 말들이 끄는 네 병거의 출현으로 시작함으로써 우리들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또한 이 네 병거들을 끌고 있는 네 말들은 각각 네 종류의 색깔을 지니고 있다. 천사는 이 네 병거들을 하나님의 바람으로 비유하며, 그들의 임무는 온 땅을 두루 살피는 일이라고 대답한다. 흑마는 북쪽으로, 백마는 서쪽으로, 그리고 어룽진 말은 남쪽 지역으로 향한다. 놀랍게도 북방으로 간 자들로  인해 하나님의 영은 비로소 안식을 얻게 된다.

본문 해석

두루마기와 여인에 대한 환상을 체험한 스가랴는 계속해서 새로운 환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의 환상에 등장한 첫 대상은 네 병거다. 그런데 스가랴의 환상에서 이 병거가 출현하는 원 근거지는 “두 놋산”으로 묘사되고 있다. “두 놋산”이라는 표현에는 구약에서 오직 이 곳에만 등장한다. 학자들은 이 두 놋산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해석들을 제시해 왔다.

그렇다면 각각의 네 말들의 색깔은 과연 어떤 의미들을 상징하고 있는가?  어떤 이들은 말들의 네 색깔이 태양의 빛깔, 혹은 다양한 도덕적 특성을 상징한다고 주장했으며, 어떤 학자들은 세상의 네 제국으로 이해했으며, 특히 북은 바벨론 혹은 페르시아, 남은 이집트 혹은 에돔이나 에디오피아로 해석하였다. 또한 어떤 이들은 계시록의 표현을 빌 어 흰 색 승리(계6:2)로 붉은 색을 전투와 피(계6:8)로, 검은 색을 기근(계6:5-6)으로 회색을 죽음(계6:8)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하지만 말들의 색깔과 그 상징적 의미에서 너무 집착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6:4절에서 스가랴는 자신이 본 환상이 무엇을 뜻하는지 천사에게 질문을 던진다. 천사는 네 색깔의 말들이 끄는 네 병거들을 “하늘의 네바람”으로, 그리고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던 존재들”로 소개한다.(6:5) 그렇다면 천가가 말하는 “하늘의 네바람”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 바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흐”는“숨결”, “호흡”혹은 “영”이란 뜻으로 대개 사용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네 바람은 여호와의 심판과 구원의 사역을 수행하는데 사용되는 도구로서 여호와의 사자와 비교될 수 있다.

특히 이 네 바람이 여호와의 전에 서 있다는 표현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여호와의 천사들의 역할을 연상시킨다.(욥 1:6-2:1)

현대적 적용

심판을 수행하는 네 말들과 거룩한 전투

슥 6:1-8에 등장하는 네 말들과 병거들은 여호와의 강림을 나타내며, 온 땅의 열방에 대한 심판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네 병거와 네 말들의 환상은 네 말들이 등장하는 계 6:1-8의 메시지를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슥6:1-8의 말들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심판과 연관성을 지닌다. 계 6:1-8에 나오는 말들은 슥6:1-8에 나오는 흰색의 그 색깔을 통해 상징적인 의미를 전달한다. 특히 요한은 슥6:1-8의 말들의 이미지를 채용하면서도 말들의 색깔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슥6:1-8과는 달리, “아롱진 말”을 “청황색의 말”로 변경시켜 색깔을 통해 상징적인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선지자는 혼돈의 세력을 무찌르기 위해 능력과 권능으로 무장하여 싸움에 임하는 전사처럼 여호와께서 제2의 출애굽을 일으켜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처럼 출애굽 사건과 시온의 귀한 사건은 여호와께서 악을 물리친 거룩한 전사로 보는 것은 매우 적절한 해석이다. 그런 예수는 물리적인 전투를 수행하는 정치적 메시아가 아닌, 악의 실체인 사단을 물리칠 거룩한 전사로 이 땅에 오셨다.

이와 같은 스가랴의 메시지는 영적인 전투를 수행해야 할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한 위로를 전해 받지만, 거룩한 전사의 명령에 따라 무장하며(엡 6:14-16) 복음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딤후 2:3)

여호와의 순(6:9-15)

개요 6:9-15절은 6“1-8의 주요대상이었던 북방 바벨론의 귀환자들과 그들의 성전 건축 참여를 강조하기 때문에6:1-8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의 형식은 선행 환상들과는 달리 전형적인 상징 행위를 담고 있는 신탁을 취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선행 환상과 구별하여 다루고자 한다. 이사야는 애굽을 신뢰하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벗은 몸과 벗은 발“로 (사 20:2-4)과 예레미야의 유다 멸망을 그의 목에 멍에를 메었다.(렘 27:2-7) 에스겔도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 유수를 상징적으로 예루살렘 벽을 뚫고 그의 짐을 메고 옮겨 갔다 (겔 12:1-12) 스가랴는 바벨론에서 온 자들로부터 금금과 은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고 그 면류관을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운다. 여호수아에게 주어지는 ”순“에 관한 신탁(12-13), 그리고 다른 면류관에 관한명령(14)으로 세분할 수 있다.

면류관에 관한 여호와의 명령(10-14)

성전 건축에 대한 약속(15)

6:12에서 여호와는 스가랴에게 “순”이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것임을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선포하라고 명하신다. 먼저 여기에 등장하는 이 “순”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스가랴가 여호수아에게 순이라는 사람을 표현할 때 2인칭이 아닌 3인칭을 사용하고 있음은, 이 “순”은 스룹바벨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5절에 “먼데 사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레호킴”은 과연 누구를 의미하는 것인가? 이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일컫는 말인가? 2:11은 여호와의 통치와 다스림의 범위가 디아스포라의 유대인 들 뿐만 아니라 뭇 열방에까지 확대된다.

현대적 적용

다윗의 순과 초민족적 성전건축

슥6:12-13절은 성전 건축의 궁극적 완성이 장차 도래할 “순”의 사역으로 성취될 것임을 암시해 준다. 이 “순”은 이미 슥3:8에 언급된 바로 그 메사아적 인물이며,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의 언약을 성취할 자이다.

신약의 관점에서 볼 때, 성전은 더 이상 건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헤롯이 건축한 성전을 대신하여 3일 만에 다시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선언하셨다.(요 2:18-21) 이제 건물로서의 성전이 손으로 짓지 아니한 새 성전으로 대치되고 있는 것이다.(막14:58)  그 성막이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거 한다.(요 1:14)

금식이 변하여 경축으로(7-8장)

벧엘에서 온 이들은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그 슬픔을 토로하기 위해 줄곧 지켜왔던 금식의 절기를 계속 지켜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바벨론 포로 민들이 귀환했으며 성전 건축도 완공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들은 통곡과 금식의 기간이 사실상 종료된 것이 아닌 가 궁금했던 것이다. 여호와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 먼저 금식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회복할 것을 촉구한다.

현 시대를 향한 회복의 약속(8:1-23)

개요 실패와 그에 따른 심판에 초점을 둔 스가랴의 메시지는 이제 희망의 약속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이것은 여호와와 그이 백성 간의 언약관계가 완전히 회복됨을 의미한다. 이 회복의 시대에 열방의 백성들은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그에게 은혜를 구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놀라운 회복의 약속은 백성들의 합당한 윤리적 행위와 공의 실현에 전제한다.

본문 해석 8:6에서 예루살렘의 회복을 약속한 여호와는 이제 불확실한 믿음의 문제를 다룬다. 비록 여호와는 1-5에서 예루살렘의 미래에 대해 놀라운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으나, 남은 백성들의 눈에는 믿기 힘든 약속들로 비춰진다.

 8:7-8에서 여호와는 본문에서 남은 백성들을 향한 여호와의 세 가지 계획을 선포하신다.

(1)여호와는 그의 백성들을 동방과 서방에서 구원해 낼 것이다.

(2)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고, 여호와는 그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이 선언은 여호와와 이스라엘 간에 맺어진 언약 공식을 연상시켜준다.(출 6:7; 레 26:12; 렘 7:23;)

남은 백성들을 위한 복(8:9-13)

9-13절은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라는 표현으로 시작해서 끝을 맺고 있는 인클루지오 형식을 이룬다. 즉 이 공식은 주로 전투에 임하는 전사에게 주어지는 위로 혹은 구원의 신탁이다. 본문의 이 메시지를 듣는 대상을, 성전 지대를 쌓던 날에 일어난 선지자들의 말씀을 듣는 자들로 규정한다.(8:9) 그렇다면 성전 지대를 쌓던 날에 메시지를 선포했던 선자지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학개와 스가랴가 이 그룹에 포함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스가랴의 메시지는 옛 선지자들이 선포했던 예언의 말씀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10절에서 성전 건축 이전의 힘든 경제적 상황이 소개된 후 11절은 “그러나 이제”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이 표현은 새로운 방향의 전환을 암시해 준다.

공의 실현을 촉구 받는 현 세대들(8:16-17)

이제 본문의 방향은 “여호와께서 행하실 계획”에서 “이스라엘이 반드시 행해야 할 의무”로 전환된다. 14-15절이 여호와의 주권적 계획을 강조하고 있다면, 16-7절은 인간의 반응과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금식에 관한 응답(8:18-19)

18-19절은 벧엘에서 온 사람들의 질문(7:3)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을 제시한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라는 표현은 이와 동일한 7:4의 신탁 선언을 연상시킨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은 5월의 금식에 초점을 두고 있으나. 스가랴는 기간이 아닌 모든 금식의 동기와 그 목적에 동기를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7:9-9절과8:16-7의 조항들을 요약해 준다.

스가랴의 본문은 여호와를 사랑한다는 것이 여호와가 요구하는 성품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열방의 예루살렘 방문(8:20-23)

스가랴는 이전 환상에서 열방을 향한 여호와의  심판을 소개한 바 있다.(1:15;18-21; 2:9) 열방의 민족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압제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심판을 초래하였다. 가러나 스가랴는 열방의 심판에만 초점을 두지 않는다. 열방의 예루살렘 방문과는 다른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즉 침략을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열방의 나라들은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전과 같은 반목과 갈들의 시대는 사라지고 화합과 평화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이다.(사 2:2-4) 특히 23절은 열방의 백성들이 유다 사람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고 말한다.

왕의 도래와 열방의 구원(9-14장)
슥9-14장은 스가랴의 세 번째 주요 단락이 된다. 서론에서 논증 했듯이, 스가랴의 전체는 하나의 통일된 본문으로 취급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1-8장과 9-14장은 문체, 구조 및 주요 이슈들에 있어서 다소 차이점을 나타낸다.

9-11장의 구조는 여호와의 심판 이후에 나타날 왕의 도래와 그에 따른 영광스런 회복의 다스림을 잘 드러낸다.

12-14장의 구조는 고난 받는 목자의 죽음에 대한 애통함과 회개에 대한 강조점이 부각되고 있다. 이는 종말론적 회복이 회개를 통해 이루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열방이 심판(9:1-8)

개요 9장에서 여호와는 거룩한 전사로 묘사된다. 그리하여 핸슨은 9장 전체를 “거룩한 전사의 노래”라로 칭한 바 있다

본문 해석

9:1은 해석하기 가장 난해한 문장 가운데 하나로 인식된다. 이 구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마싸” 라는 표제로 시작한다. “마싸”의 의미는 다양하다. 하지만 본 절에서 이 단어는 “선언”혹은 “선포”라는 표현으로 번역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마싸”의 전달대상은 “하드락”과 “다메섹”으로 소개된다. 9장에 묘사된 하나님의 왕국은 유다 백성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참여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왕국이다.

현대적 적용

열방의 백성들을 향한 준엄한 심판을 소개하는 스가랴의 메시지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던져준다. 오늘날 심판의 메시지가 사라져 간다는 것은 심판의 때가 다가옴을 의미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심판의 메시지를 담대하게 선포하고 있는가? 오히려 심판의 메시지를 낯설게 대하지는 않는가? 스가랴는 심판의 메시지에 둔감한 현대인들을 향해 죄의 심각성과 그 심판의 결과를 올바로 직시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다.

왕의 도래(9:9-17)

본문해석 본문은 이 메시아적 인물의 특징을 묘사한다.

그는 공의로 통치할 것이다.

그는 구원을 체험할 것이다.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탈 것이다. 본문은 “겸손히” 라는 히브리어 “아니”를 통해 나귀를 타는 왕의 겸손한 상태를 강조하고 있다. “아니”는 주로 심적 경제적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는 이스라엘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그는 온 열방을 다스릴 왕이시지만 나귀의 새끼를 타는 비천한 신분으로 나타날 것이다. 10절은 이 비천한 왕의 통치적 특성과 그 영역을 묘사한다.

현대적 적용

나귀를 탄 메시아의 도래 알렉산더의 정복이 슥9장의 성취를 했다고 보는데 슥9장은 알렉산더의 정복보다는 하나님의 도래와 승리, 그리고 다윗 왕조의 재건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그 회복을 가져올 메시아적 인물의 출현과 관련이 있다. 그리하여 전통적인 유대교는 이 구절을 왕적인 메시아사상의 근거로 이해한다. 그러나 신약의 기자들은 이 메사아의 도래를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과 연결시킨다.(마 21:1-11; 막11:1-10; 눅19:28-38; 요12:12-15)

예수 그리스도는 악을 정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르는 승리의 왕으로 오셨으나, 그의 승리는 십자그이 고난과 희생을 통해 완성된다. 나귀를 타신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승리의 입성보다는 오히려 고난의 입성임을 암시한다. 나귀를 타신 예수의 겸손은 이기적 성공주의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참된 승리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를 바라보라

스가랴가 묘사한 이 언약의 피 개념은 생소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옛 조상들과 맺어진 언약이다. 즉 언약은 계약 당사자들이 죽음을 감수하고라도 그  언약에 충성해야만 하는 피의 언약인 것이다. 이와 같은 언약의 피 개념의 대표적인 사례가 출24:8절에서 등장한다.

이 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체결을 의미하며, 나아가 이스라엘 공동체의 언약 적 결속, 즉 피로 맺어진 언약 적 특징을 강조해준다. 그러므로 언약의 피에 근거하여 포로 된 자들이 자유 함을 누리게 될 것임을 선포하는  스가랴의 메시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을 어긴 모든 죄인들을 대신하여 친히 저주를 당하신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를 바라보게 한다.

왕의 다스림(10:1-12)

개요 9장이 전사이신 여호와의 거룩한 전투와 그 승리를 미래적 혹은 종말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면, 10장은 승리의 왕이 도래하여 그의 다스림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를 보여준다.

9:!7에서 여호와는 그의 백성들에게 풍성한 수확과 결실을 약속한 바 있다. 여호와를 우상으로 대체시켰던 북 이스라엘은 다시 여호와를 그들의 하나님으로 섬길 것이며, 이전의 언약 백성의 지위를 다시 회복할 것이다. 또한 드라빔과 점술과 꿈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주의 백성들은 이 잘못된 방식들을 버리고 오직 여호와께 문제를 아뢸 것이며, 여호와는 회복된 언약 관계에 근거하여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이다.

스가랴는 이사야와 예레미야에 나타난 회복의 모티브를 사용하여 에브라임의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9-10절에서 여호와는 흩어진 그의 백성들을 애굽과 앗수르로 부터 이끌어 내어 길르앗과 레바논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씨 뿌림의 메타포를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과 번영을 회화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흩어진 이스라엘을 길르앗과 레바논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표현은 다소 이래 적이다. 즉 스가랴는 회복될 이스라엘의 인구가 옛 영토로는 충분치 못할 정도로 크게 번성할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목자의 심판

개요 본 장은 목자로 부름 받은 선지자의 소명, 참 목자를 따르지 않은 양들의 잘못된 태도, 그리고 거짓 목자들에 대한 심판을 초점을 두고 있다.

본문해석 많은 학자들은 11:1-3을 10:1-12의 결론부로 취급해 왔다. 특히 11장의 조소를 띤 탄식 시로 시작되고 있음은 매우 흥미롭다, 1-3절은 “문을 열라, 애곡하라, 들으라”는 탄식의 명령, 탄식의 음성 그리고 탄식의 이유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1-3절에 깔려있는 심판의 분위기를 잘 드러내고 있다. 1절은 먼저 “문을 열라”는 명령형으로 시작한다. 2절에는 “애곡하라”는 명령이 거듭 등장한다. 2절에서 애곡이 대상들이 나무들로 묘사되었다면, 3절은 애곡의 대상을 목자로 묘사한다.

목자는 하나님이 세우 지도자를 뜻하며, 양떼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6절의 “이웃”과 “임금”이라는 표현에 근거해 볼 때, 이들은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이방 통치자들을 의미할 수 도 있다.  6절에 여호와는 목자들이 양떼들이 불쌍히 여기지 않듯이, 더 이상 이스라엘의 거민을 불쌍히 여기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현대적 적용

특히 목자와 양의 이미지로 가득한 11장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겔34장을 연상시켜준다. 비록 이 두 본문이 매우 유수한 목자- 양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지만, 각각의 메시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첫째 겔34장에서 여호와는 양떼들을 악한 목자로부터 구원하지만(겔 34:9-16), 슥 11장에서 여호와는 그들을 양떼들을 거짓 목자들에게 넘겨 줄 것이다.(슥 11:6) 둘째 겔34:23절에서 여호와는 양떼들을 먹일 선한 목자를 일으키지만, 슥11:16절에서 여호와는 양떼들을 위협할 거짓 목자를 일으킬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양떼들의 고난과 멸망이 그들의 목자를 거절한 결과로 인해 초래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스가랴는 신실한 하나님의 선지자를 거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을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듯하다. 산약의 기자들, 특히 마태는 하나님의 목자를 거부한 옛 이스라엘의 어리석은 예수를 참 목자로 인정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적용시킨다.

열방의 구원

9-11장과 같이 히브리어 “마사”로 시작하는 12-14장은 9-11장과 유사한 주제를 취하는 반면 9-11장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들도 보여준다. 또한 여호와의 도래와 정복을 묘사하는 14:1-8은 9:1-8의 주제와 연결되고 있으며, 여호와를 왕으로 표현하는 14:9-11은 9:1-10에서 강조한 바 있다. 12:10-14과 13:7-9에 묘사된 메시아적 단락들은 그 독특성을 더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 왕의 도래에 초점을 둔 9-11장 이후에 등장하는 12-14장은 왕의 도래에 따른 열방의 구원을 강조한다.

본문해석

12:1은9:1절과 마찬가지로 첫 서두에 “마싸”로 시작한다. 이것은 12-14장이 세부 독립 단락임을 암시해주며,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계획과 관련이 있음을 말해준다.

창조와 관련된 “펴다, 세우다, 짓다”라는 동사들이 여호와의 새 창조의 역사를 강조하는 이사야에서도 집중적으로 반영되고 있음은 주목해 볼 만하다.

이사야와 마찬가지로 스가랴 역시 창조주로서의 여호와의 속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새로운 창조 질서의 회복, 즉 새 창조의 구속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슥11:4-7에서 여호와의 언약 적 단절을 상징하기 위해 사용된 선지자의 막대기를 연상시킨다. 즉 슥11:4-7에서는 이 막대기가 부러짐으로써 은총의 자리가 사라지지만, 슥 12:10에서는 이 은총이 다시 주어짐으로써 이전의 상태가 다시 반전됨을 알 수 있다. “간구”를 뜻하는 “타하누님”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행위를 암시하고 있다.(시 28:2,6) 또한 이 단어는 백성들의 참회하는 태도 혹은 반응과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대하 6:21; 31:9 단 9:3,17,18,23)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두 단어는 하나님의 영의 사역과 그 측면들을 강조해준다. 즉 회복된 관계를 통해 그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허락하시며 그들이 회개로 반응하도록 간섭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부각시켜준다. 이제 우리는 “그 찌른 자”의 정체에 대하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그 찌른 자: 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피터센은 희생제물로 바쳐진 아이들로 해석한다. 올렌버거는 요시아나 그달리야처럼 무참히 살해당하는 한 왕족으로 이해한다. 스위니는 성전 건축자인 :스룹바벨“로  어떤 학자들은 죽음과 애통의 의식을 바알 의식과 연결시킨다. 메릴은 여호와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찔림을 당하다는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그의 성품이 훼손당했음을 묘사해주는 일종의 메타포가 된다.  메이어스와  메이어스는 백성들이 여호와와 찔림을 당한 자를 동시에 바라본다고 이해한다. 필자는 (2),(3),(5) 의 입장을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찔림을 당한 자를 여호와 자신을 가리키는 1인칭 화법의 “나”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 찔림을 받은 자는 3인칭으로 묘사되며, 백성들의 애곡의 대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찔림 당한 자의 정체를 왕족의 후손에 속하는 여호와의 대리자적 인물로 해석하며 이 인물의 고난과 죽음은 여호와의 고난과 죽음과 동일시되고 있다고 이해한다.

13:2에서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그것들을 제거하실 것임을 천명하신다. 이스라엘이 안고 있는 심각한 죄악의 요소들은 무엇인가? 본문은 이 요소들을 우상의 이름과 거짓 선지자와 부정한 영으로 소개하고 있다. 여호와는 우상의 이름을 제거하실 것이다. 여호와는 우상뿐만 아니라 거짓 선지자와 부정한 영을 제거하실 것이다. 거짓을 예언한 선지자는 장로들 판결에 따라 죽임을 당하였지만, 본문은 부모의 판단에 의해 즉각적으로 처결될 것임을 강조한다. 특히 거짓을 예언한 자의 죄목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십계명의 죄악과 동일시되고 있음은 주목해 볼 만하다.(20:7) 그러므로 스가랴는 이런 위선적인 태도에 대해 비난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으며, 종말의 “그날”이 이르면 이런 위선된 태도들이 모두 사라질 것임을 강조한다.

현대적 적용

목자와 종의 고난

슥 12:10에서 찔림 당한 자는 3인칭과 1인칭으로 반복적으로 묘사된다. 그러므로 스가랴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부터 고난을 받아 죽음에 이르는 한 목자의 고난을 여호와의 고난과 동일시한다. 흥미롭게도 고난을 받아 죽음에 이르는 이 고난의 종은 스가랴에 묘사된 찔림 받는 고난의 목자와 사뭇 유사하다. 목자의 고난 뒤에 백성들의 탄식과 회개가 뒤따르듯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던 민족들의 회개를 불러일으킨다.

요한은 주님의 강림을  목격할 자들의 대상 가운데 “메시아를 찌른 자”를 언급하고 있는데)계1:7), 여기서도 요한은 주님의 강림의 때를 슥 12:10의 맥락과 연결시키려고 한 것 같다. 예수를 찌르고 회개하는 이방의 로마 병사를 가리키기 위해 슥12:10을 인용했던 요한(19:37)은 이 “찌른 자”의 대상 범위를 이방인에게로 확대시킨다.

마태는 슥 12:10에 묘사된 찌른 자의 대상을 모든 족속으로 확대시킨다. 슥 12:10에 등장하는 “지른 자의 애통”은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애통으로 예수 시대에는 예수를 찌른 로마 병사의 애통으로, 종말에는 예수를 거절하여 죄책을 느끼는 모든 족속들의 애통으로 적용된다. 백성들이 자신의 죄악 된 행위,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떤 이를 핍박하고 고난을 가한 죄악에 대해 참회하는 기적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스가랴는 뉘우치고 깨닫고 죄를 고백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새 시대를 고대했던 것이다, 신약의 기자들은 바로 이 새 시대의 날이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성취된다고 선언한다.

정결의 샘

스가랴는 죄를 씻는 “샘”이 흘러나와 백성들의 부정한 죄악들이 정결케 될 것임을 예고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정한 죄악을 깨끗이 씻어주는 이 “샘”이 자신으로부터 흘러나온다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을 그 종말의 성전과 동일시한다. 요한은 이 생수를 “성령”으로 이해한다. 스가랴의 “샘”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는 생수, 즉 정결의 성령을 통해 이루어진다.

목자의 고난 (13:7-9)

개요 목자와 양들의 운명을 다루는 13:7-9은 목자와 양들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11“4-7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11:4-17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목자의 심판과 13:7-9에서 찔림을 당하는 목자를 동일하게 취급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13:7-9를 반드시 11”4-17과 연결시킬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필자가 앞서 제시한 통과할 남은 자들의 회복을 예고하고 있다. 과연 이 고난 받는 목자는 타락한 지도자 혹은 악한 목자인가 아니면 선한 목자인가? 마빈 스위니는 이 목자를 페르시아 제왕, 특히 고레스로 해석한다.  마크 보다는 페르시아 종교를 취했던 유대인들 렉스 메이슨은 심판 받아 마땅한 악한 지도자들로 해석한다. 에드가 콘래드는 주님께 기만하여 대적했던 어떤 한 선지자로 해석한다. 이처럼 (1),(2),(3),(4)의 입장은 이 목자의 정체를 부정적으로 간주한다, 반면에 어떤 학자들은 이 목자를 긍정적인 모습으로 평가한다. 올렌버거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한 회원으로 케롤 스툴무엘러 고난 받는 선한 목자로 이 본문은 승리와 구원의 메시아적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종말론적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배리 웹은 사53:10절의 고난 받는 종과 연결시킨다. 슥13;7-9에 등장하는 목자의 정체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간략히 정리해 보았다. 나는 본문의 목자를 악한 목자로 해석하는 전자의 입장보다는, 선한 목자로 해석하는 후자의 입장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 목자는 여호와로부터 “나의 동료”로 소개되고 있다. “동료”라는 뜻을 지는 명사 “야미트”는 구약에서 오직 레위기에만 11회 등장한다. 여기서 이 단어는 이웃 간의 상호 관계성을 속에서 살아가는 한 공동체의 회원을 암시해 준다.(레 19:11; 23:17)

열방의 심판과 예루살렘의 회복(14:1-21)

개요 12-14자의 구조는 종말의 심판과 회복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14장의 결론뿐만 아니라 스가랴의 전체의 결론으로 작용되고 있음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특히 14장은 “그 날에”라는 종말론적 표현을 6회에 걸쳐 집중적으로 사용하며, 온 열방이 예루살렘에 참여하는 초민족적 예배 공동체를 극적인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슥14장을 여호와의 전투에 초점을 두는 14:1-15과 열방의 장막절 준수를 강조하는 14:16-21로 구분하고자 한다.

본문해석

“보라 주의 날이 도래할 것이다”라는 종말론적인 표현으로 시작하는 14:1-3은 “거룩한 전투”를 연상시켜주는 단어들을 사용하여 외부의 공격에 노출된 예루살렘의 형편을 묘사해주고 있다. 슥 14:1-3에 묘사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환란은 잘 알려진 단 12:1에 언급된 종말의 대 환란을 연상시킨다. 여호와의 날은 반드시 도래할 것이며, 그의 우주적인 왕권은 온 땅 위해 수립될 것이다.

본문은 옛 창조의 낮과 밤의 주기와는 다른, 새로운 창조 개념을 소개한다. 즉 여호와께서 창조 하실 새 날은 밤이 없고 빛만 비추는 날이 될 것이다. 또한 본문은 다른 본문들과는 달리, 이 예루살렘의 물줄기가 계절과 상관없이 흘러넘칠 것이라고 말한다.

심판과 여호와의 간섭(14:12-15)

14:12-15은 열방에게 임할 여호와의 심판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1) 첫째, 열방의 민족들은 전염병으로 고통 받을 것이다.(2) 예루살렘을 침략한 이방 족속들은 혼란에 빠져 서로를 공격하게 될 것이다. (3) 유다도 이 전투에 참여할 것이다. 그 결과로서 전투의 약탈물들이 거두어 모아질 것이다. 14:1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재물들은 대적들에 의해 약탈되어 나누어졌으나, 본문은 그 반전을 보여준다.

열방의 순례여행과 초막절 준수 (14:16-21)

예루살렘을 공격한 열방들은 여호와의 심판으로 패배할 것이며, 이 심판에서 살아남은 열방의 족속들은 여호와를 경배하는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 않는 두 부류의 그룹으로 분리될 것이다. 본문은 초막절의 참여 대상뿐만 아니라 기존의 거룩한 대상 범위를 더욱 확대시킨다.

본문은 여호와를 경배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고기를 삶을 수 있다고 말한다. 성전에 가나안 사람이 사라질 것이다. 더 이상 성전을 이익의 도구로 삼는 상인들도 사라질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제 여호와를 향한 예배는 누구에게나 개방된다. 그러므로 오직 우주의 왕 여호와를 경배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현대적 적용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하라

예수 그리스도 재림 이전에 반드시 큰 환난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하는 환난은 어느 특정한 시기로 제한될 수 없다. 역사상 악의 세력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며 심지어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비록 성도들이 지상에서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큰 환난을 당할 수 있지만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끝까지 증거하며 죽음을 아끼지 아니할 때 사실상 그들은 이악한 세력들을 이미 정복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초막절의 생수를 맛보라

슥14장은 종말의 주의 날에 열방의 백성들이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할 것이라고 예고한다. 흥미롭게도 초막절 절기 때에 예수가 선포한 가르침(요7:33-34)은 슥 14장에서 예언한 종말의 초막절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그러나 예수는 목마른 자는 물을 마시라고 말씀하면서 자신을 종말에 부어질 초막절의 생수의 공급자로 간주한다.

예수는 슥14장에 예고된 종말에 솟아날 초막절의 생수는 오직 자신을 통해서만 경험될 수 있다고 선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전을 재건하라

스가랴는 종말의 주의 날이 도래 할 때 온 열방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초막절 축제를 즐기게 될 것이라고 선언 한다 또 마 21:12-17에 소개되는 예수의 성전 청결 사건은 슥 14장에 등장하는 성전의 가나안 상인들을 연상시킨다.

슥14:21은 종말의 주의 날에 메시아가 도래하여 예루살렘의 성전을 정결케 할 것임을 예언한 바 있으며, 예수는 자신이 종말의 성전을 새롭게 정화시킬 바로 그 메시아임을 간접적으로 일깨워주고 있다

 

저자  장세훈 구약학 교수(국제신학 대학원 대학교)

출처 : 강원숯가마(싹난지팡이)
글쓴이 : 싹난지팡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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