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스크랩] 근본주의 2

하나님아들 2015. 7. 4. 22:46

 

근본주의(Fundamentalism)

 

1. 근본주의는, 정통적 개신교의 신앙을 수정하거나 성경의 무오류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모든 자유주의적 시도에 저항하는 20세기 초엽에 나타난 운동을

가리킨다. 이 이름은 개신교 교리를 정의하고 옹호하려는 목적으로 1912-14년에 발행된 일련의 소책자의 이름-<근본적

원리들>(Fundamentals)-으로부터 유래하였다. 가장 중요한 근본 교리들은 다음과 같다: (1) 성경의 영감과 무오류성,(2) 삼위일체의 교리, (3)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신성, (4)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5)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승천, 재림(파루시아).

 

그런데 이 다섯 가지의 교리들은 역사적으로 늘상 정통주의의 교리였었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과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교리들에 대하여 과격하게 반박하는 것에서 근본주의의 독특성을 찾으려 하고 있다.

20년대와 30년대에 있어서는 인간의 기원에 관한 진화론이 창세기의 기술과 어긋난다는 점에 공격의 초점이 맞춰졌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근본주의는 모든

비평적인 탐구에 대한 맹목적인 반대와 동일시 되게 되었다.

 

이러한 무조건적인 거부에 반대하면서도 위에 기술된 신앙들을 공유하는

일단의 신학자들은 "근본주의자"라는 이름 대신에 "복음적 보수주의자"(evang-elical conservatives)라고 불리우기를 좋아하면서 그 신앙의 조항들을 이성적으로 옹호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성경을 절대적이고 무오류한 신앙과 실천의 규준으로 삼는 것을 거부하는 신개혁주의 신학과 같은 신학과

에큐메니칼 정신을 반대한다.

 

2. 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 교회들은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교회들의 혼합

그룹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그룹들은 성경의 완전하고 흔히 축자적인 영감을 강조하며 신앙과 실천에 대한 성경의 완전한 권위를 강조하였다. 그들은 복된 영생이 오직 철저한 회심과 구세주인 그리스도에 대한 위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서만 획득된다고 설교하였다.

 

(1) 성격과 의의: 이 그룹과 교회들은 1920년대에 미국에서 발생한 교회들로 몇몇 프로테스탄트교단들 내에 존재하였던 불화와 분열의 씨앗이 전반적인

원인이 되었다. 직접적인 계기는 일단의 분리자들이 자기들을 근본주의자들이라고 칭하고 정통 기독교의 표준들을 수호한다고 주장한데서 이루어졌다. 이에

반대하는 그룹은 자유주의자 혹은 현대주의자라고 불리웠는데 이들은 19세기의

성서비평의 업적을 흡수하고 교회로 하여금 그 시대의 사회적 딜레마에 적응케하려고 시도하였다.

 

근본주의자들은 현대주의가 기독교를 배반하고 새로운 과학을 좇아 복음을 포기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비해 현대주의자들은 교회 자신을 낡아빠진 신학으로 감싸고 현대사조를 무시하는 교회에 희망이 있을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같은 시대에 진화론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으며, 근본주의자들이 이 운동에 참가하였는데, 특히 1925년 테네시주의 데이튼(Dayton)에서의 스코프스(John T. Scopes)의 유명한 '원숭이 재판'(공립학교에서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주 법률에 관한 재판)에서 그러했다.

 

50년이 지난 후 현대주의나 자유주의는 실제로 사라져 버렸고 이 사상을

계승한 신학들은 샤일러 매튜스(Shailer Mathews), 찰스 브릭스(Charles Briggs), 맥기퍼트(A.C. McGiffert)경 등 이전의 현대주의자들의 사상을 성찰하는 정도의 역사적 관계만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지금도 존속하며 번창하고 있다. 근본주의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옛 이름에 붙은 경멸적인 인상 때문에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근본주의자들의 수를 알려주는 종교적인 통계자료는 없다. 다만 미국의 보수침례교연합회(Con-servative Baptist Association of America) 같은 소수의 교단이나 또는 미국독립근본주의교회들(Independent Fundamental Churches of America)과 같은 보다

조직이 치밀하지 않은 교단들은 분명하게 근본주의자로 분류할 수 있겠다. 주로 근본주의자들에 의하여 조직된 협력적이요 범교단적인 기구인 복음주의전국연합회는 1971년에

회원수를 약 30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수적으로 많다고 하여서 이들이 많은 주요 프로테스탄트교단들에서 유난스러운 근본주의적 입장을 내세우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잘 알려진 격언인 "프로테스탄트교인을 찾아서 그 껍질을 벗겨 보면 그가 근본주의자라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말해주듯이 모든 프로테스탄트교도가 결국 근본주의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그들이 그들이라는 뜻).

 

(2) 역사: 1) 기원: 근본주의의 근원은 미국의 천년왕국운동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1830년대와 1840년대 미국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결과로써 일어나는 평화의 천년(천년왕국)에 대한 기대 때문에 큰 흥분이 야기되었다.

당시 뉴욕의 농부였던 윌리엄 밀러(William Miller)가 재림은 1843년 혹은 그

이전에 올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 말을 따른 한 그룹의 목사들의 설교가 대체로 위의 흥분을 자아냈다. 이 재림주의자들은 5만명 내지 10만명에 이르는

신봉자들의 호응을 효과적으로 얻어냈다.

 

그러나 그 예언이 실패하자 실제로

그 운동은 해체되었으며 천년왕국 이론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후 몇십년동안 천년왕국에 대한 비판자들은 재림주의를 좋지 않게 간주하였고 재림주의의

허점을 지적하여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관한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일반인의 신뢰심을 깨뜨려 버렸다.

 

밀러파에 대해 알려지기는 했으나 그들의 영향력은 없었던 영국에서는 1825년에 시작한 천년왕국운동은 영국국교 내의

복음주의 일파 가운데서 급속하게 파급되었고 가톨릭사도교회(Catholic Apost-olic Church)나 플리머드형제단(Plymouth Brethren)과 같은 새로운 비국교파들을 형성하는 데 공헌하였다. 이러한 영국적 분위기가 밀러의 전성시대에 미국에 의미있는 영향을 미쳤으며, 그렇지 않았다면 사라졌을지도 모를 재림에 대한

관심을 지속시켰다.

 

1870년대에 이르러서는 천년왕국에 대한 관심이 개혁교회 전통에 관련된

교회들 특히 미국성공회장로교회와 화란개혁교회 중에서 증대되었다. 이러한

견해들은 목회자들이 그 시대를 풍미하는 신학서적들을 탐구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던 세인트 루이스, 시카고와 같은 도시권과 동부와 북동부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의 주제에 대한 산재되었던 관심은 주로 나이애가라성서대회(Niagara Bible Conference)를 통해 하나의 운동으로 집약되고 체계화되었다. 이 대회는 뉴욕시 침례교 목사인 제임스 잉글리스(James Inglis)에

의해(1872년 그가 사망하기 바로 직전에) 창설되어 세인트 루이스 장로교 목사요 영향력 있는 천년왕국운동 정기 간행물인 <The Truth>의 편집자인 제임스 브룩스(James Hl. Brookes, 1830-97)에 의해 계속되었다.

 

이밖에 초기의 천년왕국운동의 지도자들로는 침례교 부흥사인 조오지 니드햄(George C. Needham,

1840-1902), 성서주석가로서 명성이 높았던 윌리엄 어드맨(William J. Erdman,

1834-1923), 1873년 성공회와 결별하여 작은 개혁성공회교단의 주교가 된 윌리엄 니콜슨(William R. Nicholson, 1822-1901)이 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이 운동은 유명한 보스턴 침례교 목사였던 고든(Ado-niram J. Gordon, 1836-95)과 캐나다 교회 후론(Huron)의 주교였던 모리스 볼드윈(Maurice Baldwin, 1836-1904)과 같은 지도자들을 끌어들였다. 이 그룹은 매년 하계대회를 열었는데, 그 대회는 일반적으로 1899년까지 온테리오의 나이애가라 호수에서 모였다. 나이애가라대회와 관련을 맺은 천년왕국론자들은 또한

뉴욕시 성서 및 예언자대회와 같이 1878년에 시작한 주요한 도시에서의 일련의

공적인 대회들을 후원하였다.

 

2) 근본주의자들의 견해의 발전: 교회와 사회의 조건이 대체로 경악할 상태에까지 타락하고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재림 외에 어떤 것도 기독교인을

구원하거나 이 지상의 운명을 개선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으 재림은

성경 속에 약속되어 있으며 어느 때나 기대될 수 있다는 천년왕국론자들의 신념들이 그들을 묵시론적 전통 속에 확고하게 가두어 놓았다. 이에 대한 비판자들은 천년왕국론자들을 밀러파라고 불렀다. 그러나 천년왕국론자들은 자신들이

재림의 시기를 정하는 일은 아주 삼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천년왕국론자들은 '전천년왕국론자'들이라고도 하는데, 이들과 반대되는 입장을

견지하는 천년왕국론자들을 '점진적 천년왕국론자'들 또는 '후천년왕국론자'들이라고 하였다. 전천년왕국론자들은 후천년왕국론자들보다 덜 낙관적이었다.

후천년왕국론자들은 전통적으로 교회들은 복음전도사업에 성공하고 있다는 것과, 사회적.도덕적.경제적 향상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세상에서(특히 미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과, 또한 그리스도께서 세상이 그와 같은 왕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하게 될 때, 즉 그리 멀리 않은 미래의 시점에 재림하시리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이 천년왕국운동은 미국의 운명에 대한 확신이 처음으로 몇몇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 사이에서 감퇴하기 시작하였을 때, 즉 그들이 노동의 불안정.사회적 불만, 로마가톨릭의 점증되는 이민 등에 직면하였을 때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천년왕국운동의 호소는 단순히 미국의 꿈에 대한 확신이 상실된 데에 기인하지는 않았다. 성경해석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또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천년왕국운동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19세기 초반에 대개의 프로테스탄트교회들은

성경을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호하였다. 그러나 성경의 권위는 천녕왕국론자들에게 어떤 특수한 것을 의미하였다.

 

그들은 성경이 기독교세계에서의배교와 사회의 타락이 마지막 때에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과, 성경 저자들에 의해 예언딘 유일한 구제책은 19세기 천년왕국론자들이 바로 그들 자신의

세대라고 확신했던 그 시기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믿었다. 천년왕국신학은 성서비평이 성서본문의 의미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하기 전에 형성되었다.

많은 미국 프로테스탄트들은 19세기 성서비평의 결과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신앙을 성서의 권위에 대한 새로운 이해 위에서 견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으나, 천년왕국롡나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1880년대 말과 1890년대에 성서에 관한 널리 퍼졌던 가정들에 대한 도전은

천년왕국론자들에게 심각한 문제를 산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근본주의 논쟁은 그 당시에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에 그 논쟁은 한 세대 동안 지연되었다.

천년왕국론의 지도자들은 성서비평의 진보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절망하지 않았다. 그들의 묵시론적 신학은 그들에게 세상의 어떤 진보도 기대하지 말 것을

가르쳤다. 천녕왕국설을 신봉하는 많은 교회들이 이탈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천년왕국운동은 그것의 가장 큰 전성기시대를 맞아 국가적인 영향력을 획득하였다.

 

19세기 말경에 프로테스탄트의 부흥사인 무디(Dwight L. Moody, 1837-99)는 그 운동에 동조하였으며, 노드필드(Northfield)대회에서 천년왕국적인 표현을 위한 영향력 있는 강령을 제시하였다.

천년왕국론자들은 해외선교사업을 지원하였고 선교적인 정열을 급증시키는 영향력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선교적

정열은 마침내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이라는 단체를 결성시켰다. 또한 천년왕국론자들은 뉴저지주의 프린스턴에 있는 프린스턴 신학교 내에서 성서의 권위와 영감을 옹호하는 한 그룹의 학자들과 보조를 맞추게 되었다.

 

천년왕국론자들은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수들을 그들의 대회에 초빙하였고

성서를 변호하는 그들의 논증을 채택하였다. 실제로 프린스턴 신학요의 교수단중 어느 누구도 천년왕국설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어떤 교수들은 그것을 강력히 반대하였으나, 양측은 성서의 권위문제에 대한 상대방의 지지를 기꺼이 수락하였다.

 

복음적인 프로테스탄트교 내의 보수적 전통에 끼친 천년왕국설의 영향은

천년왕국론자들이 1902년에 미국성서연맹(the American Bible League)를 설립하고 <The Fundamentals>(근본주의)라는 제목을 가진 12권의 팜플렛 시리즈를 씀으로써 다른 성경무오옹호자들과 협력하였을 때 그 정점에 이르렀다. 이 팜플렛 각권의 25만부 이상이 라이맨(Lyman)과 밀턴 스튜어트(Milton Stewart) 형제의 자선을 통해서 1909년부터 1915년까지 목사들과 평신도들에게 무료로 배부되었다. 이 형제들은 캘리포니아에서의 석유산업을 통해 재산을 모은 사람들이었고 이들의 신학은 천년왕국설이었다.

 

<근본주의>라는 저서는 당시의 성서비평이론들을 공격하였으며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발전시킨 논증을 사용하여 성서의 권위를 거듭 단언하였다. 이 팜플렛 시리즈는 논증을 통해 성서비평과 현대주의를 패배시키려던 이전 세대의

시도를 요약한 것이었다.

 

나이애가라대회를 열었던 지도자들의 대부분이 1914년대 이전에 사망하였다. 새로운 지도자 세대는 그들의 선배들만큼 확고하게 그들의 교파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천년왕국운동에 대한 그들의 변호는 더욱 전투적이었으며

비타협적이었다. 19세기 말의 마지막 몇해 동안 예언적 해석에 대한 불일치가

표명되었으나, 부룩스(James H. Brookes)는 의견을 달리하는 분파들을 통합시켰다. 그러나 브룩스가 죽은 후 몇년 내에 나이애가라대회는 폐지되었고, 그후얼마 안가서 천년왕국설의 주도적인 두개의 정기 간행물이었던

<Watchword and

Truth>(표어와 진리)와 <Our Hope>(우리의 소망) 사이에 지상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이 천년왕국운동을 깊이 분열시켰다.

 

3) 근본주의자들과 현대주의자들 사이의 논쟁: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천년왕국론자들은 자유주의의 성장에 의해 경각되고 더욱 일반적인 사회타락의 징후에 동요되어 뉴욕시와 필라델피아에서 많은 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들은 1919년에 더욱 크고 포괄적인 조직인 '세계기독교근본주의연맹'(World's

Christian Fundamentals Association) 의 형성을 격려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연맹의 결과로 천년왕국운동은 그 운동의 근본적인 성격의 변화없이 그 명칭을

보수주의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

 

나아가서, 1919년 대회는 천년왕국을 주장하는 근본주의운동이 향후 30년 동안 서게 될 그들의 강령의 조항을 공고히 하였다. 이 운동의 지도자들은 그 운동의 강령의 기초를 반복하여 설정하였다. 그

신조는 특징적인 성경 및 천년왕국론적 조항들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현대주의와 그에 관련된 모든 악령들(특히 진화론)의 추방을 요구하였고, 실제로 자유주의적인 대학들을 거부하고 그들의 신앙을 최근에 설립된 성서학원에 의존시켰으며, 미국교회협의회가 대표하였던 연합적 및 협동적인 정신을 비난하였고, 또한

만일 이러한 형태의 영적 퇴보가 계속된다면 분열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릴레이(W.B. Riley; 미네아폴리스에 있던 제일침례교회의 목사),

딕슨(A.C. Dixon; 침례교 목사였으며 부흥사임)과 토리(R.A. Torrey; 부흥사였으며 무디성서학원의 교장) 등의 지도력에도 불구하고, 이 연맹은 결코 잘 되지

않았다. 십여 차례의 대회가 열려서 진화론이 정죄되었고 미국의 교육제도가

성서교육을 폐지한 데 대하여 비난이 있었으나, 이 모임들조차 1928년 이후까지는 지속될 수 없었다.

 

19세기 후반에 교회의 자유주의파는 오직 소수에 불과하였으며, 이 적은

수의 대부분도 신학교나 대학교의 교수들이었다. 이들이 고등비평을 받아들인것을 그들이 속한 교단의 교구민들과 성직자와 간부들은 염려스러운 것으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장로교 교단에서 행하였던 바와 같이 새로운 학설들을

조사할 수 있는 법적 기구가 있는 곳에서는, 성서신학자인 브릭스(Charles A.

Briggs, 1841-1913)같은 자유주의자들의 혁신에 반대하는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몇십년 이내에, 성서의 새로운 이해에 대한 증거가 증진되고, 새로운 세대의 신학도들이 자유주의적 운동에 참가하게 되자 그와같은 항의들은 폐기되었다. 1914년에 이르러서는 북미에 있는 성공회.감리교회.침례교회.북장로교회등의 교단에서 자유주의가 많은 신봉자를 얻게 되었다. 이 새로운 견해의 수용및 전파를 방지하려는 투쟁은 실패하였던 것이다. 1920년대에는 자유주의자들을 그 교파에서 축출할 것이냐에 관한 문제를 결정하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1920년대의 10년간은 많은 미국인들의 과격한 행동으로 특징지어진다. 제1차 대전은 미국 내에 긴장과 좌절을 불러일으켰고, 1918년의 휴전도 이러한 것들을 감소시키지 못하였다. 전쟁 이후 즉시 공산주의의 위협, 노동의 불안정,

폭력 등에 대한 두려움들이 설교 속에 반영되고 있었다. 국제연맹에 대한 미국인들의 거부는 많은 미국인들이 새로운 세계의 국제정치가 그들이 좋아하지 않는 방향으로 간다는 것을 발견하였음을 보여 준다. 1920년대의 근본주의자들은

이 공포와 지적 고립주의의 분위기에 참여하였다.

 

1920년대에 있었던 논쟁이 모든 프로테스탄트교파들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남침례교(Southern Baptist) 같은 몇몇 교파에서는 현재주의가 아직

득세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교파들, 즉 감리교회와 성공회 같은 교파들에서

현대주의는 많은 추종자들을 얻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대는 충분히 구체화되지 않았으며, 교파들의 정치구조 때문에 그 논제에 초점을 맞추는 데 필요한

캠페인을 벌이기에 부족하였다.

 

그러나 심한 논쟁이 미국 북부주에 있는 북침례교회(Northern Baptist)와 장로교회들에서 발발하였다. 장로교내에서는 프린스턴 신학교의 신학적 입장을 반영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천년왕국론자들의 도움을 받아 1910년에 장로교회의 일련의 기본적인 교리들을 설정하였다. 즉 이 교리들은 성서의 무오영감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 필숵인 그리스도의 속죄(구속적 역사)와 부활과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선포하였다.

 

1922년 뉴욕의 한 목사인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 얼마후 주도적인 현대주의의 대변자가 되었다)이 <근본주의자들이 승리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설교속에서 해외선교에 있어 천년왕국론자들의 행위에 항의하였을 때, 장로교의 보수주의자들과 천년왕국론자들은 침례교도였던 포스딕을 뉴욕시 제일장로교회의

목사직에서 압력을 넣어 쫓아냈다. 브룩스와 같은 천년왕국론자들과 프린스턴신학교 교수였던 메첸(J. Gresham Machen) 같은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의

퇴진만이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믿고 있었다.

 

미국장로교회 내의 분열을 피하기

위해 15인 위원회가 타협안을 모색하기 위해 임명되었다. 이 위원회의 보고서는 장로교단은 전통적으로 다양한 의견에 대해 관용해왔고 총회가 기독교신앙의

본질적인 교리를 결정할 권리를 가지는 것을 거부하여 왔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 보고서는 실상 보수주의의 입장을 폐기하였다. 장로교단 내에서 근본주의자들과 현대주의자들 사이의 존쟁은 현대주의자들의 승리가 아니라 근본주의자들의 패배를 의미하였다.

 

북침례교 내에서의 불일치점은 연회에서 나타났다. 그 연회는 정당의 대회와 매우 유사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1920년에 시작된 그들 자신들을 근본주의자들의 전국연맹(the National Federation of Fundamentalists)이라고 불렀던 한 그룹의 침례교인들은 침례교 근본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매해 연회 이전에

나름대로의 대회를 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이러한 조직을 통해서 그들의 견해를 연회에 반영하려고 시도하였다. 근본주의자들의 전국연맹의 방책이 즉각적인 발전을 이루는데 실패하자 더욱 전투적인 몇몇의 침례교 근본주의자들은

침례교성서연맹(the Baptist Bible Union)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장로교인들에게서처럼 침례교인들 가운데에서도 근본주의자들 사이의 분열이 그들의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성서비평이 퍼져 나가는 데 대한 염려와 마찬가지로 진화론에 대한 불만은

1920년대에 기세를 높였다. 근본주의자들은 성서가 찰스 다윈이 가르쳤던 생의

기원에 대한 견해와 조화될 수 없다고 믿었으므로 진화론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진화론을 반대하는 사람들 모두가 근본주의자는 아니었다. 반진화론적 투쟁자들은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막기 위한 입법을 위해서 로비활동을 벌였다.

 

테네시주는 그와같은 법을 통과시켰으나, 이 법은 미국시민자유연합(the 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의 선동으로 1925년 법정에서 도전을

받았다. 데이튼의 작은 마을의 과학교사이었던 스코프스(John T. Scopes)는 진화론 교육에 반대하는 주장에 반대하는 옹호자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그 시대의 가장 유명한 인물들 중의 두 사람인 보수적 장로교 근본주의자인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과 형사재판의 피고측 변호사인 대로우(Clarence Darr-ow)가 각각 기소측 변호사와 피고측 변호사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1920년대말에 이르러 근본주의자들의 논쟁은 거의 종식되었으나 근본주의자들의 운동이

사멸된 것은 아니었다. 근본주의의 역사는 1870년대에 천년왕국운동의 설립과

함께 시작된 것이지 1920년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근본주의자들의 논쟁은

근본주의 역사에 있어서 그 새로운 이름 이상으로 그 운동에 기여한 바가 별로

없었던 하나의 에피소드였다. 비록 1920년대의 10년간이 근본주의에 대한 전국적 관심이 최고조에 달했던 기간이었으나 그 운동이 강화된 시기는 아니었다.

그 이후의 수년 동안은 그 운동의 재건을 위한 기간이었다.

 

4) 제도적 발전: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근본주의자들은 점차로 논쟁과

전국적 관심대상으로부터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현대 근본주의의 제도적 구조가 발전되었다. 어떤 근본주의자들은 그들의 교단에서 분열되어

나와 새로운 교회들을 형성하였다. 그러한 사람들 중에는 1936년 미국장로교회를 세운 메첸이 주도한 장로교인들, 혹은 북침례교연맹을 떠나 정통침례교총연맹(General Association of Regular Baptists)을 설립한 침례교인들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냥 큰 교파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근본주의자들은

작은 교단의 회중에 합세하였다. 이 교단들은 성경의 축자설과 전천년왕국설의

신조에 계속 충실하였던 교단들로서, 선교사연합회(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플리머드 형제단, 복음자유교회, 그 당시 설립되었던 많은 독립성서

교회들과 예배처들이었다.

 

현대 근본주의의 구조는 대부분 성서학원과 성서대학으로부터 제공되었다.

시카고의 무디성서학원이나 로스엔젤레스성서학원과 같은 많은 학교들은 학생들을 교수하는 일 이외에 정기간행물을 출간하고, 라디오 방송을 자가로 운영하고, 대회를 개최하고, 근본주의의 확장을 위해 일단의 설교가들을 기용하는 일등을 하였다. 그들은 교단본부와 매우 유사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러한 작용이 없었다면 소외되었을 회중들 사이에 결속을 제공하고 있다.

 

예술과 과학분야에서 가장 강력한 보루는 오랫동안 휘튼대학(Wheaton College)이었다. 이휘튼대학은 시카고 교외에 있는 학문적 대학이다. 또한 미국사회의 전문직 및

사업 조직에 비등하는 근본주의자들의 일련의 조직들이 있다. 의사.과학자.운동선수.사회사업가.역사가.사업가.간호사.학생.기타의 사람들이 특히 그들의 관심이나 직업부문을 위해 고안된 그룹에 속할 수 있다. '기독학생연맹'(the

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의 분회들과 '대학생선교회'(Campus Cru-)sade for Christ)의 분회들이 수백개의 대학교와 대학 내에 있는데, 이 분회들은 중요한 프로테스탄트교파들과 로마가톨릭의 조직들에 의해서 제공되는 종교적 지원과 비슷한 종교적 지원들을 제공하고 있다.

 

'미국과학자협회'(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는 1970년에 복음적 신앙을 가진 1,437명의 현역 과학자들이 등록한 모임이었다. 이 협회는 지속적인 회합을 가지며 성서와 과학의 조화 및 기독교적 세계관과 과학의 조화를 강조하는 잡지를 간행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의 에큐메니칼 단체들에 대립되는 단체들은 1941년에 설립된 '미국기독교협의회'(ACCC)와 1942년에 설립된 '복음주의 전국연합회' 등이다. ACCC는 (1969년까지) 실상 칼 매킨타이어(Carl McIntire) 한사람에 의한 단체였다.

그는 NCC와 같은 거대한 에큐메니칼 단체들에 반대하였으며 미국을 멸망시키려는 공산주의 음모의 위험에 반대하였다. NAE는 그 구성원들에 의하여 하나의

조정단체로서 일하고 있느나 그 자체의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지는 않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 교회들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준 것은 전후시대의 번영과 1950년대의 종교부흥 및 공산주의의 전복에 대한 위협의 강조 등이었다. 하나의 집단으로서의 복음주의자들은 사회적

혹은 경제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인 자들의 범주에 속해서는 안된다. 전형적인 복음주의자가 교외 공동체에 살고, 새로 지은 멋진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최신형 자동차를 타며, 휴가 때는 유럽이나 팔레스타인을 여행하기까지 하는 시대에 있어서, 근본주의가 가난한 자나 경제적으로 유산을 물려받지 못한자의 종교라고 보는 판에 박은 듯한 견해는 타당하지 못하다.

 

1950년대의 근본주의의 부흥에 대한 분석은 이러한 주장을 지지해 준다. 종교적 관심의 시기들이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시대 이후 미국 역사상 매우 규칙적으로 발생해 왔으며 흔히 그 시기들을 제험한 세대의 주도적 가치를 반영해 왔다.

1950년대에 있어서 이 가치들의 보기는 근본주의자 부흥사인 빌리 그레험(Billy

Graham)이었다. 그레험은 젊은 사장과 같은 옷차림을 하고 새로운 텔레비전 기술을 사용하여 미국인에게 그 죄악의 회개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결단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레험의 설교는 근본주의가 과학과의 전쟁을 대부분 그만두었고, 산업-도시 사회와 타협하게 되었으며 기꺼이 과학이 가져온 번영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그레험은 여전히 미국이 만일

그 부도덕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고, 매우 자주 부도덕성을 개인적 죄에 대한 개인적 범과의 범주에 넣곤 하였다. 인용된

예들은 보통 가정문제나 증가되는 번죄율에 관련된 영역에서 끌어낸 것이었다.

 

근본주의자들 중에서 그레험의 계속적인 명성과 인기는 1920년대의 10년간에 비하여 근본주의자들의 공적 이미지가 변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레험은

미국사회 주류의 일부로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전복의

위협을 염려하는 것 역시 현대 근본주의자들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공산주의의 위협은 전통적인 근본주의의 원수들 곧 성서비평과 진화론과 밀접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었다.

 

즉 공산주의의 위협은 외부에서 들어왔으며, 걷잡을

수 없이 파괴적으로 파괴되는 듯 하였으며, 기독교를 침해하는 경향을 띠었다.

또한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잡가기 발전한 경제에서 번영을 누리고 있던 시대에

있어서, 그 위협은 모든 신자들이 의심하지 않는 사단의 활동영역이 이 세상이라는 좋은 근거를 제공하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운동은 실상 1920년대의 반진화론 투쟁의 역사를 되풀이하였다.

 

(3) 교리와 의식: 전통적으로 근본주의자들의 신조는 보통 근본주의의 다섯가지 요점이라고 불리우는 다섯 교리(성경무오영감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속죄, 부활, 기적적인 능력)로 정의되어 왔다. 근본주의자들은 흔히 그들의 신앙을 신조적 진술로 정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다섯 교리 중 어떤

특수한 그룹을 본질적인 것으로 채택하지 않았다. 이 운동의 초기 역사가였던

코울(S.G. Cole)은 나이애가라대회의 14조항 신조를 5조항 선언으로 잘못 기술하였다.

 

장로교는 1910년, 1916년, 1923년에 5요점을 그 교단의 정통성을 위한

필수적인 교리로 확정하였다. 그러나 이 진술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아무것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대부분의 근본주의자들은 1878년 나이애가라대회 때 브룩스가 기초한 신조에 찬동하였다. 그 신조는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포함하고 있다. 즉 성경의축자영감설(즉 성경은 그 원본에 있어서 오류가 전혀 없이 보존되었다)과 삼위일체설과 인간의 전적 타락과 구원을 위한 '신생'의 필요성과 대속과 신자에 대한 구원의 확신과 천년왕국 이전의 그리스도 재림 등이다. 스코필드 관주성서(Scofield Reference Bible)는 전천년왕국적인 성서연구를 독려하는 상세한 각주와 전후 참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근본주의자들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근본주의자들의 신조는 1878년 이후 중요한 변화를 겪지 않았다. 현대 근본주의 역사상의 가장 큰 신학적인 열광은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신학에 의해 야기되었다. 비록 바르트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지만 그가 근본주의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 말기 이후였다. 근본주의 신학자들은 바르트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조하는 데 흥미를 가졌으며, 그들은 바르트의 신학에서 자유주의가 근본주의자들의

성서적 입장에로 복귀하는 징조를 발견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많은 근본주의 신학자들이 바르트와 함께 연구하고자 바젤(스위스)로 갔다. 그러나 비록

바르트가 성서의 권위에 큰 강조점을 두었으나, 성서비평학자들의 연구결과를

받아들였고 따라서 바르트는 근본주의자들에게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출처 : [기타] 임마누엘성경;http://cafe.naver.com/xpoemcity

근본주의

 

A. 정의

 

1. 바른 교리와 바른 생활(실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근본주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

세상에서 ‘근본주의’라고 하는 말이 그리 달가운 용어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바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때문이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9.11 테러나 최근에 일어난 영국 테러와 같은 폭력적인 일들을 저지르고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 코란의 내용 자체가 ‘칼로 정복하라’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러한 일들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 있는 이슬람 교사들이나 이슬람주의자들이 원래의 이슬람은 평화를 가르친다고 아무리 주장을 해도 그것은 다 가면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이 정말로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을 따른다고 한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칼로 죽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코란의 내용을 그대로 실천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로 인해서 ‘근본주의’라고 하는 말이 나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까지도 그런 식으로 바라본다.

자유주의자들이 많이 활개를 치고 있는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근본주의자들을 편협하고, 율법주의적이고, 옹졸한 사람으로 몰아가고 있다.

세상 매스컴도 그들과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근본주의 대학이나 교회들이 많이 있고 근본주의 신학자들이 많이 있으나,

한국에는 거의 없으므로 많은 기독교인들이나 사람들이 근본주의를 모르기도 하지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복음주의가 변질되고 타락되었으므로 변질되지 않은 복음주의가 근본주의인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의 바른 신학 정립을 위해 많이 노력했던 고(故)박형룡 박사는 말하기를,

근본주의는 별다른 것 아니라, 정통주의요 정통파 기독교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근본주의는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적 정통적 신앙을 그대로 믿고 지키는 것 즉 정통 신앙과 동일한 것이니만치, 이것은 곧 기독교 자체라고 단언하는 것이 가장 정당한 정의일 것이다. 근본주의는 기독교 자체다"고 했다(박형룡, "근본주의," 신학지남, 25권 1호 [1960], 16쪽).

 

현재 한국에서 복음주의라고 하는 교회들과 단체들은 대부분 복음주의에서 변질된 신복음주의 교회와 단체들이다. 극히 소수의 교회들만이 복음주의적 교회로 남아있다.

그러한 복음주의적 교회들은 교회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찾기가 거의 힘들다.

근본주의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한다.

 

근본주의가 무엇인가?

 

기독교 근본주의는 사랑과 긍휼과 사람들에게 나아가기를 원하며 성경 전체를 절대적이고 무오하고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교리와 거룩의 실천에 헌신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근본주의자이다.

Orthodoxy(오도닥시) : 바른교리

Orthopraxy(오도프락시) : 바른 실천, 바른 생활

 

근본주의자 : 바른 교리와 바른 생활을 주장하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자들

근본주의자는 ‘성경의 절대적 영감성’을 믿는다.

신자유주의자들이나 신정통주의자들은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본다.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의 문자 자체는 정확하게 영감된 말이 아니라고 한다.

성경의 내용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입장은 근본주의와 전혀 상반된다.

‘성경에 대한 절대적 수용과 순종’이 바로 근본주의자의 입장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무엇이든지 과연 그러하다고 절대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그냥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

성경에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하셨으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천하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름 이름을 주신 일이 없고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시다’ 라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극단적인 것인가? 물론 아니다.

성경의 어떤 가르침에 있어서나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순종하는 자가 근본주의자이다.

근본주의자들에게 ‘그렇다면 당신들은 성경을 100% 순종할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하는 사람은 마음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다. 순종을 다 하지는 못할지라도 기도하고 노력하는 사람과 성경에 있는 내용을 부인하고 행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큰 차이가 있다.

 

2.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가 밝힌 “근본주의자”의 정체

 

삼위일체의 교리, 성육신, 처녀탄생, 대리적 속죄, 그리스도의 신체적 부활

 

1976년 6월에 스코틀랜드 지역에서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근본주의자란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고 정의한 내용들을 밝혔다.

 

1) 정확하고 무오하고 축자적으로 영감된 성경에 대해 변치 않는 충성을 고수하는 사람.

다시 말해서 성경은 완전히 영감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

2) 성경이 말하는 바는 무엇이든지 다 그렇다고 믿는 사람.

‘사도 바울이 여자에 관해서 말한 것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아니하는 사람.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시다’라는 것을 ‘그것은 우리 시대가 아닌 이전 시대의 잘못된 가르침이고 오늘날과 같은 종교다원주의 시대 속에서는 모든 것을 수용해야 된다’라고 하지 아니하는 사람.

근본주의자는 ‘하나님께서 엿새동안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하신 말씀을 ‘아! 6일동안 천지를 창조하셨구나’라고 그냥 받아들인다.

3) 성경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며 오직 성경에 의해서만 판단을 받는 사람

성경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고 하는 것은 내 모든 행위와 판단과 사고방식의 기준을 성경 말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아무리 괜찮다고 할지라도 성경기준에서 벗어나면 잘못된 것이다.

4) 다음과 같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근본 진리들을 확언하는 사람

 

* 삼위일체의 교리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처녀 탄생, 대리적 속죄, 신체적 부활과 영광스러운 승천, 재림

 

*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또한 완전한 사람이시다.

 

* 성령에 의한 회심을 통한 신생.

 

성령님을 인격체가 아닌 어떤 세력이나 힘으로 보는 것은 바른 정통 교리가 아니다.

 

* 영생을 향한 성도들의 부활

 

* 최종적 심판과 영원한 사망을 향한 불경건한 자들의 부활 (제칠일말일성도 예수그리스도 교회에서는 악인의 부활을 부인한다. 영혼수면설을 주장한다)

 

이러한 진리를 확언하는 자들이 근본주의자이다.

 

기독교의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진리는 기독교가 기독교이기 위해서 꼭 필요한 필수적인 기초석들이다. 그중에 어떤 것을 빼버리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이러한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진리를 보수하고자 하는 사람이 바로 근본주의자이다.

기독교의 근본주의자는 이슬람의 근본주의자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5) 그러한 신앙(믿음의 도)에 대한 충성을 실천하며 모든 피조물에게 그것을 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우리는 칼을 들고 전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랑과 긍휼로 다가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

 

6) 그러한 신앙(믿음의 도)에 대한 모든 교회적인 부인, 오류와의 타협, 그리고 진리로부터의 배도를 폭로하며 그것들로부터 분리하는 사람

여기에서 근본주의의 특성이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분리’ ‘성별’이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신학적 오류로부터 분리해야 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 근본주의가 신복음주의와 크게 다른 것이다.

 

7) 단번에 주신 그 믿음의 도를 성실하게 옹호하는 사람

 

 

3. 구령의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전투적 정통주의

 

근본주의는 “구령의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전투적 정통주의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근본주의자들을 ‘수구세력이다, 협소하고 전도도 안 하는 사람이다, 자기들끼리만 모여있는 존재들이다’라고 몰면 안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나라의 초기에 복음을 전하러 들어왔던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근본주의적 입장에 서 있는 선교사들이었다.

현대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은 ‘한국 교회에 있는 미국 선교사들이 망쳐놓았다’라고 얘기를 한다.

물론 초기에 들어왔던 근본주의적 입장을 가진 선교사들 가운데에서도 오류를 가진 자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자유주의자들이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바로 초기 한국 교회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자들이 대부분 근본주의적 선교사였기 때문에 반발하려고 한 것이다.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성경의 세밀한 부분에 있어서 해석이 조금은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믿음의 도와 복음 전파라는 공통목적과 일치된 마음을 갖고서 연합한다.

1970년대에 있었던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에서 발표한 ‘근본주의자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는 내용이 지금 현재의 입장에서는 더 보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논쟁은 100년전의 논쟁보다도, 20년전의 논쟁보다도 훨씬 더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논쟁들과 맞서기 위해서는 더 자세하고 세밀한 내용들이 필요하다.

 

B. 기원

 

1. 1920년. Watchman Examiner의 편집장이 “근본주의자”라는 용어 사용

1920년 침례교에서 발행하던 간행문인 “Watchman Examiner”의 편집장이 처음으로 ‘근 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당시에 미국 북침례교 교단 내에 현대주의가 들어와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로 그 교단 내의 현대주의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사람들이 뉴욕의 버팔로에 있는 델라네오 침례교회에 모였다.

이렇게 모인 이들을 지칭할 때에 ‘근본주의자’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2. 미국 근본주의의 뿌리는 제 3차 대각성 운동

 

모든 근본주의의 뿌리, 특별히 미국 근본주의의 뿌리는 1857년~1859년까지 미국의 도시들과 마을들을 휩쓸었던 기도회 부흥운동, 즉 제 3차 대각성 운동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자유주의, 현대주의에 맞서서 정통적 기독교의 교리를 유지하고 보수하고 복음을 전하려는 부흥운동이 바로 제 3차 대각성 운동이었다.

이 부흥운동으로부터 성경연구를 위한 수많은 신자들의 모임이 생겨났다.

그러한 운동의 결과 후에 ‘나이아가라 사경회’라고 하는 모임으로 발전된 것이다.

 

3. 나이아가라 사경회

 

1895년 나이아가라 사경회가 시작으로 하여 큰 사경회들이 확산되고 성경대학들을 세우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대부분의 신학교나 대학교들이 자유주의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던 시대에 성경적 가르침과 정신을 가지고 가르치는 신학교, 대학교들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 바로 미국 근본주의의 초기 운동들 가운데에 큰 운동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우리나라는 성경적인 신학교를 세우는 것 보다 교단별로 신학교를 세우는 데에만 초점을 두고 있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러한 문제로 인하여 한국에서는 근본주의가 아직까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올바른 성경적 가르침이 있는 학교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C. 근본주의의 초교파적 성격

 

미국 근본주의의 초창기 역사를 살펴보면 핵심적인 지도자들이 여러 교단에서 나왔다.

침례교인들도 있었고, 감리교인들, 장로교인들도 있었다. 심지어 루터교인들도 있었다.

이들이 함께 모일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의 근본이 되는, 즉 기독교가 기독교로 존재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근본적 교리들을 지키고 보수하자는 데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근본주의는 초교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1. 나이아가라 사경회의 14개 신조 발표

 

1895년 나이아가라 사경회에서는 14개의 신조를 발표했다.

 

2. 장로회 총회의 5가지 요점 선언

 

나이아가라의 신조 14개의 요점들 중에서 근본주의자들에게 영향을 크게 끼친 5가지 요점들을 장로교 총회가 1910년에 수용했고, 1923년에 그것을 재확인했다.

 

3. 교제의 기초는 교단적 특성들을 초월한다.

근본주의는 어느 특정 교단의 선언이나 수용에 제한되지 않고, 또 제한될 수 없다.

교제의 기초들은 교단적 특성들을 초월하는 것이다.

각 교단의 특성들을 약화시키거나 타협하지 아니하면서도 교제할 수 있는 것이다.

감리교인이라고 하면서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영감된 무오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 감리교인이 아닐뿐더러 기독교인도 아니다.

침례교단이든, 장로교단이든 어느 교단에 속했든지간에 이러한 기본적인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속 좁은 편협주의자들이 아니다. 바르게 알고 바르게 교제해야 한다.

잘못된 것에 저항하고 싸우고 분리하는 사람이 바로 근본주의자이다.

우리 교제의 폭이 사실은 넓은 것이다.

근본주의는 교단적 교제를 위한 어떤 기준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데 그 기준은 바로 성경이다.

 

♠ 근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 : 어떤 교회적 교제를 하려고 할 때에 그 표준을 성경으로 삼는다. 그리스도와 성경에 대한 참 신앙과 지속적인 순종을 표준으로 삼는다.

 

D. 교단적 교제를 위한 성경의 표준들

 

1. 불순종으로부터 분리하라는 가르침은 근본교리

 

근본주의자는 성경의 분리의 교리(성별의 교리)를 그 기준으로 삼는다.

세속주의로부터, 거짓 교사들로부터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모든 의도적인 불순종으로부터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근본주의이다.

근본교리가 무엇인가? 기독교가 기독교답게 서 있도록 떠받치는 기초이다.

근본주의자들은 불순종, 세속주의, 거짓교사들, 배도, 이단... 이러한 것들로부터 분리하라는 가르침을 근본교리들 가운데 하나라고 믿는다.

즉 성별, 분리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를 부인하는 것으로 여긴다.

실제로 그것이 근본교리인가, 아닌가를 생각해보자.

분리의 교리를 근본교리로 생각하지 않을 때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는가?

성경의 교리를 부인하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자들. 분리하라고 하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아도 기독교는 여전히 기독교답게 존속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이것은 마치 집에 있는 대들보를 밤 중에 갉아먹는 쥐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과 같다.

이러한 쥐를 쫓아내라는 것이 바로 근본교리이다.

쫓아내지 않으면 결국에는 집이 무너지게 되어있다.

하나님은 ‘절대적 거룩’이라고 하는 기준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것은 성경적 교리의 필수적인 한 부분이다.

모든 종교적 타협에 대해 근본주의자들은 전투적인 자세를 취한다.

 

2. 분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근본주의의 신앙노선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바로 분리, 성별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분리하고 함께하지 말아야 한다.

분리하는 것이 기독교를 기독교로 남아 있도록, 존속하도록 지지해주는 근본 기초석, 근본 교리들 중의 하나이다.

거룩이라는 말 자체가 분리를 요구한다.

(고후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고후6: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고후6: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요이1:9)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요이1: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유대 사회에서 서로 간에 인사한다라고 하는 것은 친구요, 우호관계라는 의미이다.

지내쳐 : ‘지나치다. 어떤 선을 넘어가다’라는 뜻이다.

고전4장6절 중반절에 보면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라고 하셨다.

우리가 기준으로 삼는 것은 기록한 말씀이다.

기록한 말씀 안에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지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나치는 것이다.

기록한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 바로 기록한 말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갈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주의를 배격하고 있다.

율법주의가 무엇인가?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공로를 쌓아 의와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율법주의적 종교, 행위구원적 종교이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이 율법주의가 특별히 할례에 관한 것이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뿐만이 아니라,

할례까지도 받아야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자들이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인본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인간의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딤전6:20)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딤전6:21)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신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과 대화를 통하여 서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지만 성경의 원리는 바로 ‘피하라’이다.

사랑을 핑계로 그들과 교제하려고 하면 안된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죄악이다.

하나님께서 피하라고 하신 것을 피하지 않고 그것을 끌어 안으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죄악이다.

(마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에 대한 해결과 분리에 대하여 우리에게 크게 교훈해 주시는 말씀이다.

(고전5: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고전5: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고전5: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고전5:9)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고전5: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고전5: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고전5:13)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

 

자칭 믿는 자라고 하면서 믿는 자답게 행동하지 않는 자들과는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

(살후3: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살후3:14)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이와 같이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거룩에 위배되는 것에서는 분리하라고 명령하셨다.

 

한마디로 근본주의는 성경의 근본 원리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어떤 교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신학 사조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 글은 ifca에서 따온 거구요..

http://ifca-international.cyworld.com 에 가면 더 정보가 많을 것 같습니다.^^

출처 : http://ifca-international.cyworld.com

 

 

 

근본주의 보수주의

 

근본주의 신학이란 현대 과학과 과학적 세계관에 보조를 맞추려던 극단적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20세기 초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고수하려는 보수주의 신학운동입니다. 이것은 특히 미국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교회에서 격렬한 논쟁을 일으켜 마침내 근본주의와 신 보수주의로 교파의 분열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기본적인 교리로 삼는 5가지 교리는 그리스도의 처녀탄생·그리스도의 육체부활·성경의 문자적 무오설(無誤說)·그리스도의 대속적(代贖的) 죽음 및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 등이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재한(在韓) 미국선교사 가운데서 이 신학사조에 호응한 사람이 나타나

 

선교직을 사면하고 만주 지방으로 가서 전도하다가 1945년 해방 후 한국에 다시 돌아와 부산에서 고려신학교를 세우고 전통주의(傳統主義) 신학을 표방하고 신학사상의 투쟁을 개시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장로교 분열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부시 정권의 특징은 기독교 근본주의와 신보수주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칵테일한 것입니다.

부시는 잘 알려져 있듯이 텍사스 출신으로 이른바 ‘성경벨트’라고 불리는 미국 남부 지역(텍사스, 캔사스, 사우스캐롤라이나, 앨라바마, 조지아, 뉴올리안즈 등)을 배경으로 한 기독교우파 세력을 등에 업고 있습니다.

 

사회문화적으로 볼 때, 기독교 근본주의는 1960년대 반전운동, 흑인민권운동, 여성해방운동, 히피운동에 대한 역사적 반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공립학교에서의 ‘성경과 기도의 자유’, 마약․ 동성애․ 낙태 반대, 남녀평등 헌법수정안 폐기 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그러니까 수정하지 말고 옛날식으로 하자는 것이죠.

 

1970년대 이후 새롭게 공업지역으로 부상한 미국 남부 지역의 경제력이 이들의 물적인 토대입니다. 부시 행정부 내에서 이들 기독교 근본주의를 대변하고 있는 이는 존 애쉬크로프트(John Ashcroft, 61) 법무장관입니다. 애쉬크로프트는 오순절교회(여의도 순복음교회와 같은 교파라 한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예일대와 시카고대에서 학위를 마쳤습니다.

 

미주리 주 법무장관과 상원의원을 역임한 인물로 클린턴의 탄핵을 가장 목청 높여 외쳤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조지 부시 대통령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신보수주의자는 이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는 성장 배경이 다릅니다. 신보수주의자들은 주로 동부 해안 출신이며 대부분 유대계이다! 아침에 성경이 아니라 시사잡지를 읽는 사람들입니다.

 

사회문화적으로도 임신 중절을 금지하고자 하거나 학교에서 예배를 강요하려고 하지 않는다. 부시 행정부 내 신보수주의자의 대표는 폴 월포위츠(Paul Wolfowitz, 59) 국방부 부장관이다. 월포위츠는 교직자 가정에서 성장한 유대인입니다. 뉴욕 출신이며, 코넬대와 시카고대에서 학위를 받았다. 이후 예일대와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눈에 띄는 이력으로는 1983년부터 86년까지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현재 제임스 켈리), 1986년부터 89년까지 인도네시아 대사, 1989년부터 93년까지 국방부 정책담당 차관. 1993년 국방대학의 국가안보전략 교수,, 등,,입니다. 이라크 전쟁이 일어난 뒤 사람들은 이 전쟁이 부시 1세 때부터 계획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1992년 폴 월포위츠가 당시 딕 체니 국방장관(현 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2000년 9월 <미국 방위의 재건--새로운 세기를 향한 전략, 힘, 자원>, 2001년 <21세기를 위한 전략적 에너지 정책>(체니 보고서), 2002년 9월 <미국국가안보전략>(부시 독트린)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단 기독교 근본주의가 하는 행동이나 내용부터 설명을 하자라면

 

1. 성경 무오론

2. 예수는 신

3. 동정녀 수태

4.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속함.

5. 예수의 재림과 천년왕국

6. 성경에 대한 학문적 해석 반대, 문서비평을 인정하지 않음.

7. 현대 신학에 대하여 적대적임

8. 특정 버젼의 성경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음 (KJV 등등)

9. 카톨릭을 이단시

10. 원죄와 예수 믿음을 통한 구원을 강력히 주장

11. 창조론을 강력히 주장 (6000년 창조론, 젊은 지구론)

 

등등이 있겠습니다.

머 대강 보시면 우리나라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원래 이 근본주의 기독교라는 것은 일단 19세기말 20세기초에 미국에서 발생합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소위 말하는 자유주의 신학이 움트는 시기입니다.

 

이때 미국 남부는 경제상황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북동부는 강력한 산업체계로 발전을 하고 있었지만, 남부는 그렇지 못했죠. 또, 기존의 사회구조가 각종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변화에 반하여 종교적으로 과거로 회귀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고, 이것이 미국 남부의 기독교가 근본주의 성향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근본주의 성향의 기독교는 우리나라에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수입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기독교는 그 계보를 따져보면, 거의 대부분이 근본주의에 뿌리를 가지고 있다라고 봐도 됩니다.

 

현재 미국의 신보수주의 혹은 네오콘들은 이러한 근본주의 사상을 종교적인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미국의 부시인 것이죠. 올해 미국 선거를 봐도 미국 대륙의 한 가온데와 남부는 전부 부시를 찍었습니다. 동부와 서부는 케리를 찍었죠.

 

이러한 근본주의는 주로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 도덕주의를 내세웁니다. 전쟁광인 부시가 도덕적이라는 것은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들에게 있어서 부시는 근본주의 기독교식 도덕관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이교도와 전쟁하는 것 자체가 도덕적인 행동이며, 그것이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 보다는 이교도를 개종시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사회적으로는 인종차별 (자기들은 아니라고 하지만, 꽤 많은 미국의 남부 근본주의 교회는 KKK 단과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권위주의등과 연관이 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러한 기도교 근본주의는 한기총을 대표로하는 거의 모든 기독교 교파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이에 비교되는 세력으로는 KNCC 가 있지만, 수적으로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세입니다. 우리나라 근본주의는 주로 친미, 보수, 극우, 반공등을 주로 내세우고 있으며, 각종 기독교가 이르키는 사회 문제 뒤에는 거의 대부분 근본주의가 배후세력으로 있습니다.

 

참고로 http://www.rathinker.co.kr/paranormal/creationism/creationsimcritic1.htm 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출처 : 효덕의 신앙과 신학(이경남 목사의 블로그)
글쓴이 : 비느하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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