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선생의 기독교 신앙
1. 기독교의 수용
島山 安昌浩(1878-1938)는 장로교의 세례교인이었다. 본인이 작성한 이력서에 종교를 장로교라 하였고, 또 일제의 심문에도 '기독교 장로파의 신자'라고 밝힌 바 있다. 안창호는 1894년 8월 청일전쟁으로 피난을 갔다가 서울에서 노자가 떨어지자 외형적으로 기독교를 신봉할 생각으로 정동의 閔老雅學堂에 입학하여, 宋淳明이라는 접장의 설득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안창호는 1894년 말에 민로아학당에 입학하고, 세례는 그 해나 다음 해나 받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서양문화와 함께 새로운 윤리관에 대한 관심의 소산으로 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민로아학당에서는 국문과 한문의 작문, 산수·철학·음악·지리·성경과 교리문답 등을 교수하였고, 실업교육도 실시하였다. 그는 재학 중에 조교로 선임되었다. 안창호는 1898년에 독립협회의 평양지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1898년 12월 조칙으로 해산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교육활동과 전도활동에 나섰다. 그가 1899년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세운 漸進學校는 민로아학당의 교육내용이나 체제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드러지지는 않았더라도 기독교와 무관하지 않은 교육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같은 시기에 안창호는 灘浦里敎會(뒤의 岐陽敎會)의 설립도 주도하였던 것 같다.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에는 이 교회가 1894년에 설립되었다고 하는데, {新韓民報} 1935년 3월 21일자 등에는 안창호에 의하여 설립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의 교회설립연도는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평양에서 마페트가 설립한 널다리골교회(板洞敎會)에 출석하였다.
마페트가 안창호에게 교회의 일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받았다는 것도 그의 기독교 신앙과 활동이 남달랐던 데에 연유하였다고 보여진다. 또한 1900년을 전후한 그의 약혼과 결혼에서도 그의 적극적인 신앙이 잘 드러나고 있다. 1902년의 도미를 안창호는 "미국에서 교육학을 연구하고 돌아와 국내에서 교육사업에 종사하려는 생각과 기독교의 奧義를 연구"할 목적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였고, 실제로 그는 로스엔젤레스 소재 기독교 경영의 신학강습소에서 영어와 성경을 교수 받았다고 한다.
1907년 초 귀국한 안창호는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인 新民會를 결성하면서, 1908년에 大成學校를 설립하였다. 여기에서 성경 등은 교수하지 않았으나, 기독교와 전혀 무관하게 운영되지는 않았다. 당시 제자에 따르면 교내에 성경연구회가 설치되었고, 주일에는 교회 출석을 권장하였다고 한다. 또 그는 가끔 성경을 인용하여 제자들을 가르쳤고, {신약전서}를 중시하였다는 증언도 있다.
2. 기독교 신앙의 형태
안창호는 국내에서 선교사들과의 관계가 원만치 못하였다. 선교사들이 來世를 강조한 것과는 달리 그는 교육사업과 과학보급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1907년 전개된 대부흥운동에 대해서도 안창호는 비판적이어서, "교인들이 예배당에 모여 죄를 자복한다 하여 울부짖고 땅에 구는 것을 보고 저 어리석은 백성을 어떻게 깨우칠꼬 하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는 민족현실이 일제의 식민지화를 눈앞에 두고 있는 실정에서 政敎分離를 내세우며 내세만을 강조하는 경건주의·복음주의의 선교사들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안창호 역시 선교사들의 공로에 인색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한국사회에 끼친 '愚民化'에 대해서는 잘못을 지적한 바 있다.
안창호는 내세보다 민족현실을 먼저 생각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관념적이고 미신적인 신앙체험을 쉽게 인정할 수 없어, '신령'한 기도보다 약을 사서 구원하는 것이 더 낫다고 비판하였다.
선교사들과 불화를 빚고 있던 안창호의 신앙은 한국 기독교의 일반적인 신앙형태와는 상이한 모습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우선 그는 助事나 장로 등 교회의 직분을 맡은 적이 없었다.
또한 흔히 교인들의 의무로 인식되었던 정기적인 교회출석도 하지 않았다. 1920년의 경우 그는 전체 일요일의 1/3만을 교회에 출석하였다. 한국 기독교가 술과 담배의 금지를 교인의 의무로 인식하고 있던 상황에서, 그는 이를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적으로 모범적이지 못한 교인이던 안창호는 스스로도 설교에서, "내가 일찍이 … 교인다운 생활의 경력이 없습니다" 라고 밝히고 있었다. 李光洙는 안창호가 신앙에 있어서도 합리성과 실천성을 강조하였다고 지적하였다.
1920년대 미국에서 정통과 개혁의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나, 1930년대 국내에서 성경해석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안창호가 보인 자세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렇지만 안창호는 기독교를 벗어나 있지 않았고, 나름대로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음은 확실하다. 그는 정기적이지는 않았지만 교회에 출석하였고, 가끔 설교도 하였다. 그는 『성경』 특히 『신약전서』를 가까이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설교가 대부분 복음서를 인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교파의 문제는 별달리 중시하지 않았고, 기도하는 신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신앙에 있어 합리적이고 겸손하였으며, 다른 사람에게 그의 신앙을 강요하지 않았다.
3. 기독교 신앙의 내용―'회개'와 '사랑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고 한 안창호의 사상과 생활은 도덕적이었다. 그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참됨'과 '사랑'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 같은 도덕적인 방법을 통하여 사회개혁을 추구하였는데, 그 근간에는 기독교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안창호의 기독교 신앙은 '회개'와 '사랑'이 주축을 이루었다. 그는 먼저 회개할 것을 내세웠는데, 회개를 통하여 개조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또한 그는 사랑을 주장하였다. "독생자 예수를 내려 보내여 사랑으로써 피를 흘렸다"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안창호는 1936년 10월 평양의 감리교연합예배에 참석하여 [基督敎人의 갈 길(進路)]이라는 설교를 하였다. 이 설교에서 그는 하느님의 뜻이 곧 사랑이고, {성경} 전체의 골자가 사랑이며, 기독교인의 나아갈 길 또한 사랑을 목표로 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기독교의 정수를 이해하고 실제 그 가르침대로 살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33년 대전형무소에서 미국에 있던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인생의 최고 진리가 사랑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개인-가정-사회-인류의 평화와 행복이 사랑에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하느님의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갈 길이라는, 전형적인 기독교인의 태도를 보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는 사랑의 대상을 "우리를 리해치 못하야 악평하고 중상하는 이"까지 포함시키고 있었다.
안창호는 회개와 사랑을 강조하며,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이를 통하여 새 사람으로의 자기혁신을 요구하였다. 그가 주장한 인격혁명은 바로 회개와 사랑이었다. 즉 안창호는 사랑을 개조로 이해하면서, 민족의 장래를 '사랑'에서 찾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교계체제에 순응하지도 기독교의 지도자로 그치는 인물도 아니었지만, 결국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인 '회개'와 '사랑'을 통하여 민족의 장래를 논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적인 회개와 사랑은 표현은 다르지만 그의 사상 전반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생각된다.
4. 맺는말
본고는 필자의 신학적 지식의 한계와 능력부족으로 안창호의 기독교 사상을 천착하지 못하였다. 또 당시 사회상황과 연결시켜 기독교를 이해하지도 못하였다. 그렇지만 안창호를 기독교인으로 국한시켜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는 여러 사조를 받아들여 수용하였으며, 그의 사상의 한 부분으로 삼았다. 그가 기독교인인 것은 틀림없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그보다 훨씬 큰 모습으로 독립운동을 이끌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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