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에 대한 로마 가톨릭 견해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1) 구원의 불 확신성을 초래한다.
만약에 거룩함을 구원의 열매가 아니라 조건으로 보기 시작하면 어떤 문제가 생기겠는가? 먼저 구원의 확신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우리의 거룩함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조건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러므로 만일 신자가 심각한 죄(mortal sin), 치명적인 죄에 빠지면 칭의의 은혜조차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칭의 은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
만약 거룩함이 구원의 조건이라면 우리는 도대체 얼마만큼 거룩하게 되어야 구원을 받게 되는가? 이렇게 되면 구원 얻는 기준이 사람의 상태에 따라 주관적으로 마음대로 정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영적으로 무딘 사람은 쉽게 마음이 편해질 수 있을지 모르나 영적으로 밝은 사람은 자신이 거룩해져 갈수록 자신의 부족함, 추함만을 발견하여 자신이 이룬 거룩함의 수준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기준과는 간격이 점점 벌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자신이 원하는 확신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죄의식과 불안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구원관에 있어 각종 오류에 빠지게 되기 쉽다.
거룩함이 구원의 조건이라면 구원의 확신의 문제가 야기되는 것이다.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고 오히려 죄의식과 불안에 빠져 점점 침체하고 마는......것이다. 이는 루터 자신의 경험이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의 구원관에 따라서 자신의 노력으로 경건함에 이르기 위해, 거룩함의 기준을 달성하기 위해서 정말 비참하게 노력하였다. 한 겨울에도 담요 한 장 덮고 딱딱한 침대 위에서 자고 음식도 하루에 한 끼 먹으면서 고행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원하던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받지 못했다. 노력하면 할수록 자꾸 하나님의 은혜는 산 위의 무지개와 같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상에 도달했다 싶으면 저 멀리 또 다른 정상이 보이고, 또 그 다음 정상이 이어지고.......그가 시편과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칭의의 진리를 발견하기 전에 기록한 그의 일기를 읽어 보면, 비참하다.
로마 가톨릭의 구원관에 의하면 신자들이 신앙생활 하는데 너무나도 중요한 구원의 확신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오히려 그것을 앗아가는 근본적인 문제가 발견된다. 사람을 완전히 영적으로 지치게 만든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만 구원 얻는다는 사실을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믿음을 통해서 신자는 법정적 칭의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 됨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신자 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이 열매로 나타난다.
2) 하나님의 사랑의 아가페적 특성을 상실하게 한다.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의 논리를 따르면 하나님의 사랑의 아가페적인 특성이 온전히 부각되지 못한다. 로마 가톨릭의 칭의의 은혜는 인간의 거룩함에 어느 정도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이 조건적인 사랑으로 흐려지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에 의하면 평신도들은 구원의 확신을 누릴 수 없다. 하나님의 주입되는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할 만한 조건이 있을 때 사랑하신다는 생각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보다는 자신이 잘하는 것, 기도 많이 하고, 선행, 합당하게 사는 것, 은혜 가운데 사는 것, 희생적인 삶을 사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우리는 이런 오류에 빠지기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우리가 비록 합당하게 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인정할 만한 선함과 경건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은 전혀 변화와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의 부패성, 율법주의적인 성향 때문에 우리는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참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 얻을 때, 그 순간에만 아가페적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아가페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다는 점을 잘 알아야 한다. 우리는 경건하게 살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할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의 범죄 함이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을 감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적게, 크게 만들 수 없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더 약화시킬 수 없고, 우리들의 경건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더 크게 만들 수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온전하게 우리에게 임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첫 번째 근거는 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잘 깨닫는데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 아니라 역 조건적이다. 무조건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조건이 없다는 말인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조건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죄악 때문에 우리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고 증오하시기에 충분한, 저주하시고 멸망시키기에 충분한 상황 가운데 처해 있다. 이 역 조건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한 역 조건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변함없는 사랑이 우리를 지탱하고 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소망은 역 조건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이것이 우리의 감사의 근거이며 신앙생활의 바탕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는 신자의 신앙생활을 감사의 삶으로 규정한다.
3) 율법주의적인 영성을 조장한다.
로마 가톨릭 구원론은 신자로 하여금 율법주의적 영성에 빠지게 한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계속 유지,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이것이 율법주의이다. 강박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경건의 노력을 기울이려고 할 때 우리는 율법주의에 빠진다. 믿음으로 출발해서 왜 율법주의에 빠지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내 경건으로 살 수 있는가? 우리가 기도할 때도 이런 부패한 심리가 얼마나 우리를 많이 사로잡는가? 기도 한 시간 하면 그 대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우리 안에 이런 생각이 팽배해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려고 하는가? 이는 우리의 부패성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내가 사려는......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율법주의적 성향이 우리 안에 딱딱한 껍질을 형성해서 하나님의 그 부드러운 사랑과 은혜가 우리 안에 스며들지 못하게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은혜의 세계와 정 반대 되는 비(非)은혜, 즉 율법의 세계 속에서 익숙하게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잘 한 만큼 보상받는 율법주의적 보상 세계 속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예수 믿고 은혜의 세계로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이전의 익숙함이 그대로 남아 있다. 비 은혜의 원리, 보상의 원리에 따라서 하나님과 거래(deal)하려는 경향이 우리에게는 남아있다. 그렇지 않은가? 이런 율법주의적 성향, 비 은혜의 성향의 딱딱함 때문에 우리는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우리는 성령으로 이 비 은혜적인 얽매임을 벗어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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