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제사는 어떻게
글을 올려주신 분 최창학 목사님(http://chc130.wo.to)
儒敎와 祖上 祭祀
먼저, 조상 제사가 효의 척도인 것처럼 알면 안 된다. 제사가 없는 민족은 미개하거나 우매하거나 불효 막심한 막나니라고 말하면 안되며, 또한 조상 제사만 하면 효를 다 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착각인 것을 알아야 한다. 조상제사에다가 자기의 효심을 모두 건 것 같이 행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런 자들은 실상은 불효자였던 것을 왕왕 볼 수 있다.
1. 祖上 祭祀는 輸入된 禮法이다.
대개 제사를 우리 나라의 고유한 전통인 줄 알지만 실상은 외래에서 수입된 것이다. 외부에서 들어왔어도 오랜 세월이 지나면 문화 전통이 된다고 하면 할말은 없다. 그러나 제사의 오랜 뿌리는 중국의 고대부터이다. 그런 제법이 우리 나라에 전래된 것에 대하여 사가(史家)들의 연구한 바에 의하면, 고려조 말기 이전까지는 제사흔적을 찾을 수 없다가, 고려 말기에 나타난다고 한다.
중국의 제사 기원은 공자 이전, 하 나라와 상 나라 때부터라고 하며, 시황제는 천제(하나님께)를 드렸는데 그것이 조상 제사, 그것도 왕의 조상 제사로 발전되고, 유교 사상이 정립되면서 그 기틀이 잡히고. 주 나라 때에 와서 성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조상 제사도 지금처럼 죽은 자 위한 제사가 아니고, 종손을 높이는 의미로 부모를 높은 곳에 앉히고 제사 형식의 예를 올렸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도 모든 백성이 아닌 황제에게만 적용되던 제사가, 그렇게 해야 후손이 잘 된다는 유혹을 받은 제후들이 따라서 하게 되었고, 춘추전국시대에 무너지는 사회질서 속에서 평민들도 자기의 신분을 높이기 위하여 다투어 실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후에 죽은 부모에게로 발전된 것으로서, 제사 관습은 계급 제도의 결과인 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제사에 대한 이론적 뒷받침이 되기는 훨씬 후대인, 송 나라 때에, 주자학(朱子學)을 창안 한 주희(주자)였다고 한다. 이것이 주자학과 함께 우리 나라에 도입되어 이 퇴계에 의하여 '성리학'으로 정립되고 아울러 제사 법이 성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엔 특수한 사람에게만 제사가 들여지다가 유교를 국교로 삼은. '이 태조(이성계)'에 의해 민간에 널리 장려되었고, 이후에도 제사문제는 많은 굴곡을 겪으면서 지금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이 제사이며, 그것도 처음엔 죽은 조상이 아니라 산 부모에게 제사 하여 존숭의 한 예였다는 것이다.
2. 祖上 祭祀의 擴散
그렇게 전래된 제사가 전 국민에게 확산된 데는 부모에게 효를 하게 하기 위함이라기보다 정치적 안정을 노린 정치적 술수였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집권자가 자기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민 정책을 쓰기도 한다.
고려말의 왕씨 정권을 무력으로 탈취한 이성계가, 도덕성이 문제되어 민심이 이반되자 정권의 유지를 위한 묘안으로 내 놓은 것이 온 국민을 제사할 수 있게 한 것인데, 그 묘안은 이성계의 자문이며 우인이요 국부로 여기는 '무학대사'가 제안했다고 하는데.
무학이 왈 "정권은 칼고 잡을 수 있으나 이반 된 민심은 칼로 잡을 수 없으니 간접적인 방법을 쓰세요' 자고로 이 백성은 조상에 대한 효가 극진하오니 이를 장려하면 옳게 여길 것이외다" 하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조상 제사를 더 많이 하도록 권장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3. 祭禮의 內幕
국민들에게 제사를 권장하면서 아울러 제사 床의 규례도 제안했다는 것이다. 젯상의 필수와 여타를 제시했는데, 그 필수 제수 품은 '대추 밤 감'이란 것이다. 거기에는 의도가 있는데, 대추는 씨가 하나라 "이 나라의 임금은 오직 하나다" 라는 것이요. 밤은 한 송이에 세 알맹이로서 "삼 정성을 둔다"는 것이며. 감은 씨앗이 여섯 개라 "육 판서를 두어 나라를 통치하겠다"는 의도로 그렇게 하게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백성들이 제사를 지낼 때마다, "홀로 하나이신 왕이시여! 삼 정승, 육 판서를 거느리시고 왕의 나라가 태평성대하소서"하고 기원하는 예가 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 수 없는 우매한 백성들은 제사 때마다 삼 실과가 빠지면 정성이 부실하고 여겨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음식은 적당하게 하드라도 그것만을 기필코 챙긴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전수된 것이 오늘의 제사인데, 유독 우리민족, 자신만이 효성스런 자손이라고 자부하면서 제사를 울려 먹는다. 제사하는 자손이 거기 맡는 행실을 하는가 보라? 얼마나 보모 가슴을 후벼파고 욕되게 하고 가문을 어지럽히는가. 사람된 도리를 다 못하면서 효자일 수는 없다.
그러면서도 제사를 신조(信條)처럼 여기면서 고집하는 것은, 아직도 태조 이성계에게 속고 있는 것이요 사대주의 사상에 젖어있는 것이 아닌 지 모른다.
儒敎 根本에 대한 이런 見解
유교가 수 천년 동북아시아 사람들의 전신적 지주가 되어왔음에도 그 근원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업었다. 춘추시대 말에 노 나라의 공자가 당시 유학 서적들을 집대성하여 오늘날 유교회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은허의 갑골문 발견은 유교회 기원에 대한 설명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이에 대하여 상명대의 김경일 교수는 그의 저서 "감골문이야기(서울:바다,1999)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서울: 바다, 2000)"에서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갑골문에 나타난 儒敎의 根源
1899년, 중국 베이징에 살던 공무원 왕이롱은 학질에 걸려, 특효약으로 알려진 묵은 거북 뼈 조각(敗龜版)을 사들였다. 그리고 식객으로 살던 한의사 리유 티 의원에게 점검을 부탁했다. 리유는 짐슴의 뼈 조각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왕이롱은 이 글자가 주(周)나라 문자 이전에 존재했던 은(殷)나라의 갑골문자라는 것을 알았다. 이 발견으로 중국 허난 성 안양 지역의 발굴이 시작되었고, 여기서 다량의 갑골문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이 갑골문의 2기와 5기에, 유교의 근원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주전 1324년에 중국 황하 유역의'은.' 지금의 안양에서 쿠데타가 있었는데, 공자(주전 551-479)의 시대보다 800년 전에 있었던 사건이었다. 쿠데타의 전모는 이러했다.
중국 황하 유역에 상(商)과, 동이(東夷)가 있었다. 이 두 종족은 앙숙으로 전쟁에 전쟁을 거듭했다. 상은 황하神, 산신, 조상신, 천신 등을 수호신으로 삼았고, 동이족은 새를 토템으로 삼았다. 후에 상은 동이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고 내륙인 은(殷)으로 들어왔다. 상의 왕인 반경은 미신을 대단히 신봉한 사람으로 온갖 잡신을 다 거느렸다. 그가 죽자, 아들 무정이 역시 그 잡신들을 다 거느리고 날이면 날마다 제사를 지냈다. 무정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는데, 장자인 조강에게 왕위를 물려 주면서 똑똑한 또 다른 아들 조갑은 먼 곳으로 보내버렸다. 그러나 조갑은 결국 형 조강을 처치하고 왕위에 올랐다.
구데타, 조상 신...
왕이 된 조갑은 가장 먼저 제례문화를 정비했다. 그는 토템이나 황하신이나 천신 등의 잡신들에 대한 제례는 모조리 페지하고, 자신의 직계 혈족들에 대한 제례만을 강화했다. 즉 조갑의 조상신에 대한 제례만이 남게 된 것이다. 조갑은 자신의 조상신들이 전쟁, 농사, 날씨, 질병을 조절 할 수 있는 전능의 존재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위상을 강화했다. 이 조상신 숭배가 훗날 공자에 의해 유교 문화의 단초로 사용 되었다.
유(儒)는 은에서 출발한 주의 제례자들
조상신을 숭배하는 조갑의 나라를 은이라고 하는데, 이 나라는 다른 시들을 모시는 부족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았다. 이런 부족들 가운데 주(周)가 으뜸이 되어 결국 은을 멸했다. 이때 무(武)가 주의 왕이었고 은의 왕은 주(紂)였다. 그런데 주는 은의 제례 전문가들을 살려 두었다. 중원의 패자가 된 주는 외교, 전쟁, 농업, 수렵 등에 따른 제례 관련자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유(儒)는 주 때에 나온 글자인데, 이것은 바로 은의 제례 전문가들을 말한다. 유는 人과 수(需)를 합한 말이고, 수는 우(雨)와 이(而)를 결합한 것이다. 이 글자들의 뜻은, 비를 다스리는 성인 남자인데 즉 무당을 말한다. 유란 결국, 은 나라 출신의 무당 집단으로 주나라의 제례를 관장하던 사람들이었다.
유와 천자와 종법제도
주나라에서 자리를 잡은 유는 주나라의 족보를 제계화 했다. 이들에 의하여 주나라의 왕은 하늘이 되었고, 초월적 존재로 인식되었다.
여기서 천자(天子)란 말이 나오게 되었다. 천자는 정치적인 존재이며 아울러 종교적인 존재였다. 천자는 자신의 아들들을 각 지역에 정치 책임자로 보냈는데, 이들이 제후들이다. 이 제후는 근본적으로 혈연을 바탕으로 하는 종법(宗法) 정치의 핵심으로 훗날 동양 사회의 혈연주의의 시발이 되었다. 그런데, 제후들을 보낼 곳은 많은데 한 천자의 부인이 낳는 남자의 수는 한정되어 있었음으로 자연스럽게 축첩제도가 생겨나게 되었다.
유교와 공자
공자는 주나라의 종법제도가 중원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던 때에 태어났다. 그는 주나라의 종법제도에 심취해 있었고 이를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종법제도가 완벽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은나라의 모든 역사적 정치적 사건들을 미화했다. 결국 공자는 허구의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쳤고, 공자의 유교가 새로운 질서로서 대두되었다.
유교, 동중서에 의해 한(漢)의 정치력이 되다.
공자의 사상은 훗날 漢 에 전수되었다. 그 전수에 있어 큰 역할을 한 사람이 한 무제 때의 '동중서' 였다. 동중서는 대일 통론을 주장하면서 중앙집권 강화, 불필요한 사상 논쟁 금지를 역설했다. 유교의 가르침은 공자의 교훈이며 공자의 교훈의 요점은, 과거 무결점주의, 조상숭배, 수직윤리, 인과 의 등이라 했다. 동중서는 공자의 과거 숭배, 제례문화에 주술적 분위기를 첨가했고, 수직윤리와 조상숭배는 천명사상과 혼합시켰고, 인과 의는 대 국민 순화용으로 사용했다. 이로써 유교는 한나라에서 정치력을 확고히 얻게 되었다.
송의 주자 그 패배의식
이후 송나라 때 주자라는 사람이 자신의 우주론적 에세이에 담긴 서글픈 고독과 우울로 주자학을 주창하고 나섰다. 주자는 여진족의 금나라에 땅을 빼앗기고 짱시 성에 내려온 송나라 사람이었다. 짱시는 중국에서 가장 가난하고 숲이 깊은 지역이다. 주자는 이곳에서 좌절의 시를 읊었는데 이것이 조선 500년을 탁상공론으로 세월을 보내게 한 주자학이다. 이 주자학의 정치적 이슈인 '존왕양이'는, 조선시대 내내 왕실과 사대부들을 지배했고 이것은 쇄국정책으로 이어져 조선이 일본에 망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이상의 글은 김경일 교수의 두 저서를 요약한 것이며 선교사파송연구소는 이에 대하여 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를 밝혀둔다.
(이 글은 "월간 선교사 파송연구소"에서 발행한 '여호수아와 갈렙', 2001년 5월 1일, 제3호, P 8-9에서 따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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