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세푸스 2권 유대고대사 AD 92년경 저술
고레스 원년부터 로마총독 플로구스까지 646년11개월간의 기록
8장 1.번 5번
알렉산더 대왕
Alexander the Great 뜻- ‘사람들을 변호하는자’
메게도냐의 필립과 에피로테의 공주 올림피아스 사이의 아들 BC 356년에 출생했다. 그는 성경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다니엘서에서 는 묵시적으로 즉 서편에서 왔고 두눈 사이에 현저한 뿔이 달린 “숫염소”로서 묘사되었댜. 그 숫염소는 강가에 서 있는 두 불 달린 숫양을 대적하여 승리했다. 그리고 그 숫염소가 강대해지면서 큰 뿔이 꺾이고 그 대신에 현저한 네 개의 뿔이 났다. 단 (8;5-8) 그예언을 메대와 바사의 왕을 숫양으로 초대 헬라 왕을 큰 뿔 달린 염소로 표현했다. 그 초대 왕이 죽은 뒤에 네 명의 왕이 일어났다. (단 8:18-22) 이 예언은 역사적으로 놀랍게 성취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BC334년에 헬라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트를 건너 소아시아로 진군했다. 그들이 그라니쿠스 강가에서 바사(페르시아)군과 충돌했으나 승리했다. 군데 이동의 신속성은 놀라울 정도(그영소는 “땅에 닿지아니하며” (단 8:5)였다. 알렉산더는 바사군을 다시만나 앗수르에서 패배시켰다. 그는 이어서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수리아 해안을 따라 이집트로 진군하였으며 특별한 저항없이 함락시켰다. 그는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다리우스군과 마지막 일전을 벌였다. 그 결과 그는 티그리스강의 동부 아르벨라 전투에서 다이우스를 물리쳤다. 그는 그 즉시로 바멜론을 , 그다음은 수사와 바사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함락시켰다. 후에 알렉산더는 자신의 군대를 동쪽으로 끌고가 대전투에서 승리한 인도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 군대는 더 전진할 것을 거절했으며 알렉산더는 강제로 페르세포리스에 돌아가야만 했다. 그는 여전히 좀더 정복할 계획을 세우는 동안에 열벙(말라리아)에 걸렸다. 격렬한 종군과 심해지는 방탕으로 쇠약해졌기 때문에 그병을 고칠수 없어 BC 323sus 33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러자 그의 제국은 네 명의 장군들에게 분할 되었다.
알렉산더가 본 구절은 다니엘 7:6 8:3-8, 21.22: 11:3이었을 것이다. 이 구절들의 일부 혹은 전부는 알렉산더의 정복과 그의 휴계자들을 매우 분명하게 예언하고 있다. (단 8:18-22)(8;5-8 )(단 8:5)
프톨로미 (Ptolemy) BC 323년 알렉산더대왕의 죽음으로부터 BC30년 율리우스 시이저와 클레오파트라사이에서 태어난 프톨레마이오스 15세 대왕의 암살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왕조를 확장한 이집트의 15명의 카케도냐인 왕들을 가리키는 일반적 이름. 초대 왕은 소테르(BC323-285)였고 2세필라델푸스(BC 285-246) sms 70 인역 성경을 번역하게 했으며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황금시기를 누린 자 였다. 3세 유에르케테스(BC246-222경), 4세 필로파토르 (BC222-205) 5세 에피파네스 (BC205- 181) 6세 필로메토르(BC 181-145) 7세 피스콘 (BC145-117)이었으며 11세 왕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초대 왕의 피를 이은 마지막 사람으로서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에 의해 살해 되었다. 12세 와 ( BC51-47)은 로마로 달아났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13세 왕의 아내는 클레오파트라였다.
. 헬레니즘 세계의 형성
1. 알렉산더의 정복과 정책
a. 알렉산더의 통일제국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둔 알렉산더 대왕이었다.
주전 336년에 약관의 나이 20세에 필립 2세의 뒤를 이어 마케도니아 왕이된 알렉산더는 헬라의 통일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그는 주전 334년경 막강한 장비와 무기를 갖춘 정예 3만5천의 병력을 이끌고 페르시아로 진군하여 소아시아, 두로, 가사등 주요 지역을 단숨에 공략했다. 그가 정복한 곳곳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웠으며 나일강 멜타지역에 세운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시대의 이집트의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그 외 그의 정복 사업은 이오니아 바다로 부터 인도의 푼잡까지 그리고 코카사스 산맥으로부터 리비아 사막과 애굽 국경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지배하였다.
즉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그리스 세계와 오리엔트 세계와의 통합이 이루어 졌으며 그리고 그의 동서 융합 정책으로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두 문화권의 융합을 가져오게 되었고 그래서 이 지역이 하나의 문명권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10여년이란 짧은 시일에 전무한 세계 최대 제국을 건설했던 알렉산더도 열병을 이기지 못하고 B.C 323년 33세로 별세하고 말았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 로마가 그리스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시기까지의 약 3세기 동안의 역사를 헬레니즘 시대라고 구분한다. 알렉산더의 정복결과 이루어진 융합 정책으로 그리스와 동방의 여러 요소들이 혼합된 문명이 형성되었다. 이 문명을 고전적 그리스 문화와 구분하여 헬레니즘 문화라 구분한다. 이러한 헬레니즘 문화의 탄생은 전적인 그의 융합 정책으로 이루어 졌는데 그 첫째로 결혼 정책으로 자신의 병사들로 하여금 원주민 여자들과 결혼 시킴으로써 융합 정책을 폈으며 둘째로 동서의 인종이 함께 거주하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다. 또한 많은 교통로를 개척하고 통상을 원활하게 하였으며 흠정화폐를 발행하여 그의 지배 영역에서 사용하게 하였다.
b. 알렉산더의 동서 융합정책
동서 문화가 융합 되는 가운데서도 정치, 경제, 풍속, 제도 등의 면에서는 동방의 전통이 견지 되었다. 알렉산더 자신도 동방의 제도를 답습하여 폐르시아식 의관을 사용 하였고 신하들에게 엎드려 절하게 하였다. 그러나 언어, 학문, 예술의 분야에서는 그리스의 영향이 압도적이었다. 특히 그리스어는(코이네 헬라어)는 그의 전 영역의 공통어로서 동방 세계 전역에 널리 보급되었다. 이 언어는 지중해(동부) 세계의 공용어가 되어 거의 6세기나 지속되었다.
2. 헬레니즘 세계의 주요 국가
알렉산더 대왕의 뜻하지 않은 죽음은 그가 이룩했던 대 제국의 붕괴를 초래했다. 그의 제국은 그의 장군들에 의해 크게 3분 되었다. 안티고누스의 후계자들은 마케도니아를 셀류커스의 후계자들은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에 그리고 프톨레미의 후계자들은 에집트를 지배하였다. 이들 국가중 가장 강력했고 직접적으로 유대에 영향을 미친 것은 에집트의 프톨레미 왕국과 시리아의 셀류커스 왕국이었다.
a 프톨레미 왕국 (에집트)
마케도니아의 장군들 중의 하나인 프톨레미 소테르 (Ptolemy I Soter B.C 367-282))는 알렉산더가 별세한 후에 에집트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헬레니즘 시대의 다른 통치자들보다 심리적으로 유리한 강점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알렉산더의 시신(屍身)을 입수하여 알렉산드리아 시(市)에 안치 하였다는 것 때문이다. 그는 B.C 305년 자신을 왕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영토확장에 힘썼으며 이후 프톨레미 2세 3세 4세에 걸쳐 확장정책을 계속 추구하였다.
당시 에집트는 다수의 에집트 원주민과 자유로운 폴리스의 전통을 가진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 인들이 섞여 있어서 그 통치에 어려움이 있었다. 왕은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에집트인 통치에는 에집트 고대의 파라오 정책을 그리스 인들에게는 신성시된 군주로 행세하였다. 당시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문화적으로나 상업으로나 헬레니즘 세계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 였다.
알렉산더와 테바이 명가의 부인인 티모클레시아의 일화를
묘사한 그림 17세 기 이탈리아의 화가 이루도메니키노 작품.
2.알렉산더 시대(332-301 B.C.)
이수스(Issus)와의 전쟁과 다리우스(Darius)를 동쪽으로 몰아낸 후에 알렉산더는 파사인을 다시 한번 전쟁터에서 맞아 싸우기 전에 수리아와 팔레스틴과 애굽을 정복하려고 했다. 지중해 동부지방 여러 나라들은 알렉산더와 그의 업적에 의해 영향받은 바 실로 크다.
전쟁을 좋아하는 아버지 필립의 뒤를 따라 철학자 아리스토틀과 협의하며,알렉산더는 그의 아버지보다 더 위대한 전쟁의 천재가 되었고, 그의 선생 아리스토틀 보다도 어떤 점에서 월등했다. 그의 당시의 전략 목적은 캘커스(Xerxes)의 지도아래 파사가 헬라를 침략한데 대한 보복이었으나 그의 원대한 목적은 동양을 헬라화 하려는 문화적인 것이었다. 전쟁에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그를 수행했다. 헬라 태생의 식민지 개척자들이 그의 군대의 뒤를 따랐다. 알렉산더는 동 서 헬라인과 야만인의 격차를 연결하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정복한 파사인을 높은 지위에 올리고 그도 동양여자들과 결혼했다.
알렉산더가 팔레스틴으로 옴으로 전략상 중요한 땅은 헬라화(Hellenization)의 물결에 쏠리게 되었고, 이로 인해 유대인의 독특성도 해체되고 후에 국가는 완전히 갈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팔레스틴 정복은 그가 다른 곳에서 받은 개인적인 숭배를 요구하지 않았기에 종교적인 위기를 불러 일으키지는 않았다.
알렉산더의 정력적인 생명은 30대 초반인 323년에 끊어졌다. 이 때문에 제국 통치 문제로 인한 헬라의 장군들간의 오랜 싸움은 끝이 났다. 그중 넷은 비록 톨레미는 실제로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입수스(Ipsus) 전쟁(B.C.301)에서 적을 섬멸하자고 결속했다. 이들 중에 동쪽 넓은 영토를 통치한 셀레쿠스(Seleucus)와 수리아 애굽을 통치한 톨레미(Ptolemy)만이 유대인들의 운명에 영향을 끼쳤다. 팔레스틴은 톨레미가 한 세기간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니 수리아는 그를 끊임 없이 괴롭혔으므로 파레스틴은 두 왕국의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알렉산더 제국
1. 알렉산더 제국
(1) 알렉산더 제국의 성립
① 그리스의 멸망 : 기원전 4세기 후반, 마케도니아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②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 : 마케도니아의 왕위에 오른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 334 년 동방 원정에 나서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인도까지 계속
진군하여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③ 알렉산더 제국의 건설 : 서로는 그리스로부터 동으로는 인도 서부에 이르기까지
대제국을 이루었다.
알렉산드리아
알렉산더 대왕은 정복한 지역마다 도시를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알렉산더의 도시)'라고 이름 붙였다. 그 대부분은 병참 기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 도시들이 그리스 문화를 오리엔트에 전파하는 거점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로 이름 붙여진 도시는 70여 개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이집트의 나일 강 지류에 세워진 것이다.
(2) 알렉산더의 동서 문화 융합 정책
① 정복지에 그리스 인을 이주시켰다.
② 그리스 인과 정복민의 집단 결혼을 추진하였다.
③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곳곳에 세워 그리스 문화를 보급하였다.
(3) 제국의 분열 : 알렉산더의 사후 제국은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로 분열되어
각각 발전하다가 모두 로마에 의해 정복당했다.
2. 헬레니즘
(1) 헬레니즘 시대 :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에서 시작하여 알렉산더의 사후 분열된
세 왕국이 로마에 흡수되기까지 약 300년 간의 기간을 헬레니즘 시대라 한다.
(2) 헬레니즘 시대의 의의
① 그리스 문화와 동방의 문화가 융합되었다.
② 헬레니즘에 녹아든 그리스 문화는 로마에 전해지고, 결국 로마 제국에 의해
서양 문화의 기틀이 되었다.
헬레니즘 문화
1. 헬레니즘 문화의 성립
(1) 헬레니즘 문화의 탄생
①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으로 인해 그리스의 언어와 이념, 문화는 세계 각지로
전파되었다.
② 알렉산더 대왕의 동서 문화 융합을 위한 정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ㆍ페르시아의 동방 군주정을 계승한다.
ㆍ페르시아 인을 관료로 채용한다.
ㆍ그리스 병사와 페르시아 여성을 집단 결혼시킨다.
ㆍ그리스 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③ 헬레니즘 문화 :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으로 인해 탄생한 문화로 그리스 문화와
동방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된 문화이다.
2. 헬레니즘 문화의 특징과 내용
(1) 헬레니즘 문화의 특징
① 동방(오리엔트)의 문화와 서양(그리스) 문화가 융합된 성격의 문화이다.
② 폴리스를 초월한 세계 시민주의와 공동체보다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적 경향이 강하였다.
(2) 철학 : 공동체보다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의 철학이 발달하였는데,
에피쿠로스 학파(쾌락주의)와 스토아 학파(금욕주의)가 대표적이다.
(3) 자연 과학의 발달 : 자연 과학이 발달하였는데 아르키메데스, 유클리드 등의
뛰어난 학자가 나왔다.
(4) 미술
① 특징 : 그리스의 이상적인 미보다 현실적인 미를 추구하였다.
② 대표작 : 밀로의 비너스, 라오콘 상, 승리의 여신상 등이 있다.
③ 영향 : 인도에 영향을 주어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불교 미술인 간다라
미술을 탄생시켰다. 간다라 미술은 중국과 우리 나라에도 영향을 주었다.
알렉산더 대제와 유대인
일반적으로 “ 신구약 중간기” 라고 불리는 때는 B.C.200~A.D.100년으로 이때 기독교와 랍비적 유대교에 출현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진 중요한 시기였다. 이 기간 동안은 유대인들을 그리스 문화와 문명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특히 이국땅에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Diaspors) 인들이 사용하던 언어와 문화적인 이유로 헬레니즘에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놀랍게도 그들의 독특한 유대교 신앙을 고수 할 수 있었다. 유대 민족주의는 정치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깊은 신앙심과 강한 신학적 확신에서 출발을 하였다.
헬레니즘과는 달리 유대교는 삶의 방식보다는 민족적인 종교운동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또한 유대교는 유일한 길 그들에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로 인도하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새 시대로 인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B.C. 333년 알렉산더 등장이후 헤브라이즘은 헬레니즘과의 숙명적인 싸움을 해야만 했다. 알렉산더 (Alexander)는 B.C. 356년에 태어났으며, 고대 세계의 영웅인 마게도냐의 알렉산더 Ⅲ세 알렉산더 대제로 알려 졌다.〔헬〕(「인간의 수호자」란 뜻이고, 외경에서는 두 사람, 신약성서에서는 다섯 사람에게 주어진 희랍어의 이름.
[마게도냐 (Macedon)의왕 필립 (Philip) 이 오레스태 가문 (the fam-ily of Orestae)출신인 케라스테스 (Cerastes)dml 의 아들 파우사니아스 (Pausanias)의 반역으로 에개 (Eaae)에서 살해당하고, 그의아들 알렉산더 (Alexander)가 왕위에 올랐다.알렉산더는 헬레스폰드해협 ( the Hellespont)을 건너 그라니쿰 (Granicum) 전투에서 다리우스 왕의 군대를 격파했다. 그후 그는 리디아 (루다아. Lydia)너머로 행군하여 이오니아 (Lonia)를 정복하고 카리아 (Caria)를 장악하고 팜필리아(밤빌리아, PamphyLia)를 숩격하였다. ]
(요세푸스 제2권 8장 1번 )
페르시아 마지막 왕 다리오3세 왕 재임기간에 로마는 근동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으며, 그 근동세계는 헬라 마게도냐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알렉산더 대제의 부친 마게도냐의 왕 “ 필립 Ⅱ왕 ”은 헬라세계를 통합시켰다. 모든 국가들이 헬라동맹(Hellenic League)에 가담 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연합을 성취한 이는 마게도냐 ‘필립’ 이었으며. 이 동맹은 페르샤 제국을 정복하는데 하나의 힘이 되었고, 필립왕은 헬라문화에 대단한 긍지를 가졌다. 그는 아들인 알렉산더를 심마쿠스( Symmachus)라는 스승한테 알렉산더를 맡기기도 했는데 그는 그에게 호머의 일리어드(Iliad)를 알게 해주었다. ‘일리어드’란 ‘Troy' 즉 소아시아 북서부의 고대도시의 공방전을 노래한 그리스의 ‘장편 서사시’ 인데 이 내용은 계속되는 불행「고난」의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알렉산더가 13세때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그의 스승이 되었는데 그로부터 그는 그리스문학과 예술을 배우고 이해하게 되었으며, 그리스 종교와 문화, 문명에 대한 존경심을 갖게 되면서 “헬레니즘의 사도” 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BC. 336년에 알렉산더는 약관의 나이에 필립의 왕좌를 계승하여 그는 부왕이 계획했던 일들을 실행하면서 여러 나라와 전쟁을 하여 그들이 항복을 얻어 내기도 했으며, 알렉산더는 희랍에 대한 페르시아의 위협을 종식시키기로 결심했다. 이 결심에 따라 B.C 334년에 그는 마게도냐인의 거의 절반이 되는 3만의 보병과 5천의 기병을 이끌고 그 유명한 동방원정길에 올랐는데, 그는 많은 나라를 그의 제국에 합병시켰다.
알렉산더는 소아시아의 이오니아에 있는 여러 도시들을 공략하여 이따금 그들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해방”이 되었다.
B.C 334년 에베소(Ephesus), 밀레도(Miletus), 할리카낫수스(Halicarnassus)를 함락시키고 B.C 334년 그라니쿠스와 B.C 333 잇수르에서의 지역을 정복하게된다 . 알렉산더보다 수배에 달하는 페르샤군도 패주하였고, 이패전으로 인하여 대 페르샤 제국의 퇴락이 시작 되었다. 한편 페르샤를 격퇴시킨 그는 지중해의 동편 연안 도시들을 정복해 나갔다. 또한 해상무역에 있어 경쟁상태에 있던 예루살렘이 멸망하자 두로는 해상군을 장악하여 엄청난 무역흑자를 보았다. 에스겔 (26 :4~5, 12~14)보면 두로는 이웃나라의 멸망을 슬퍼하고 애도하기는커녕 자기 이익에 눈이 어두워 즐거워하고 있는 두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볼 수 있습니다. 두로는 “ 바다 물 가운데 ” 던져지고 먼지까지 깨끗이 쓸리어 “ 말간 반석 ”이 되었고 바다 가운데 그물을 치는 곳이 되었다. 7개월 공략 끝에 두로는 B.C 332년 8월에 함락되고, 두로인 8천명이 죽고 3만명이 노예로 팔려갔다.
두로가 함락되자 푀니키아인(Phoenicians)의 해상 독점과 상업상의 우월함에 종말을 고하고 유다가사 애굽을 점령하면서 알렉산더의 감독아래 B.C 331년에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란 도시를 건설하였다.
알렉산더는 동 지중해의 상업적 대도시였던 두로를 능가한 그리스의 상업적 이익을 촉진 시키기 위하여 이 도시에다 훌륭한 항구를 설치하였다. 알렉산더는 대제사장(야두아 Jaddua) 을 자기의 꿈속에서 본 일과 대제사장이 알렉산더에게 그가 그리스 최초의 왕이 되고 페르샤 제국을 징벌하리라는 예언이 기록된 다니엘서의 구절들을 보며 그것이 자신에 예언임을 믿고 그 후로부터는 유대인의 친구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 도시의 별도의 구역에 거주하며 자기들의 관습을 영위하고 자신들의 종교생활을 누리도록 허락받는 특별한 배려가 행하여 졌다. 알렉산드리아에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 하였다는 사실은 그 후에 하 애굽(Lower Egypt)에 살았던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의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성전에서 예배한 후에 그의 영역 안에 있는 유대인들의 자율성에 대해 특혜를 베풀기도 하였다.
알렉산더는 B.C 331년 앗수르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 까지 정복을 하였다. 또한 알렉산더는 막대한 보물을 노획하면서 페르샤 제국을 정복하려는 그의 꿈을 달성하기 이전에 자기가 정복한 나라와 국민들에게 그리스 문화를 장착시키려 하였던 원래의 생각을 바꾸고 유럽인과 아시아인을 결합시켜 하나의 세계제국을 만들어서 모든 지역의 신민들이 동일한 기회에 동참하도록 하려는 계획을 채택하면서 아르벨라(Arbela 또는 Gauqamela) 전투 이후 자신도 동방의 복장을 하였고 그의 부하들이 동방의 관습에 따라 절을 하게 하였으며 이러한 사실에 대해 그리스와 마게도냐 군인들에게는 납득할 만한 일이 못되었다. 그는 명실상부하게 다리오를 격파하였고 다리오의 영토를 통치하였다.
알렉산더는 B.C 330년~B.C 325년에 이르는 기간에 동북부의 페르샤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의 서부와 남부로 알려진 지역을 그의 제국에 귀속시킴으로써 정복자로서의 그의 승리적 전훈을 계속 쌓아갔다. 그는 힌두-쿠쉬 산맥을 넘어 속디아나로 진군하여 옥수르 강과 작사르테스 강 사이에 위치한 러시아-터키스탄 (중앙 아시아)의 광대한 지역을 정복하였다. 그는 중국에 연한 터키스탄 지역의 타쉬갈에서 삼백마일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게 되는데 이것은 가장 먼 알렉산드리아 ( Alexandria the Ultimate) 라고 불리웠다.
그는 힌두-쿠쉬 산맥을 넘어, 키벨 관문( Khyber Pass)을 통과하여 인도 땅에 들어가 푼잡( Punjab)을 정복하고 더 멀리 황해까지 진군하고자 하였으나 자기들이 노략한 전리품을 운반 할 수가 없어서 B.C323년 알렉산더는 지금의 발루키스탄( Baluchistan) 이라 불리우는 게드로시아( Gedrosia)를 거쳐 인도에서 바벨론으로 귀환하였는데 유럽인들이 밟아보지 않은 땅을 통과하기도 하였다.
알렉산더는 바벨론에서 동양과 서양의 사람들을 하나로 합하려는 그의 계획들을 진행 시키기도 하였고 아시아에 유럽인의 식민지를 세우고, 유럽에 아시아인의 식민지를 세워 서로 다른 민족간의 국제결혼을 진작시킴으로써 이 계획을 실행하길 원했으며 그 첫 번째 계획은 자기의 진로에 따라 70개 이상의 안렉산드리아를 건설하고 그 도시들에 원주민과 통혼한 자기의 군대를 주둔시킴으로써 부분적인 성취를 보았다. 이때 마게도냐 군인들에게 아시아 민족의 여인들과 결혼 하도록 명령을 하였으며, 알렉산더 자신도 수사궁의 박타리안계 공주인 록산나( Roxanna) 와 다리오 3세의 딸인 스타티라 ( Statira)와 결혼함으로써 마게도냐 병사들이 인정하지 않았던 풍습인 국제결혼( 이민족과의 통혼)을 시작케 하였고, 그는 또 다른 페르샤의 공주인 파리사티스( Parysatis)와도 결혼을 하면서 그의 부하들의 모본으로써 이러한 결혼을 통한 동맹을 택하였다.
알렉산더는 동양과 서양의 민족들과 문명의 융합에 노력을 보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유럽과 아시아의 식물들을 교합시키는 일도 원하였다. 한편 그리스인들은 알렉산더가 하나의 신으로 숭배되기를 원한다는 소식에 분개 하였고, 그의 동양화 정책의 실행 때문에 폭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B.C 323년 남부 아라비아와 아프리카, 서부 유럽을 정복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던 중 알렉산더는 33세라는 나이로 열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그는 13년에 걸친 그의 통치를 마쳤으며 짧은 기간 동안 역사상의 어떤 통치자보다 더욱 방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통치하였다.
알렉산더는 허영과 야망이 대단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손으로 세계를 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새긴 아토스 산( Mount Athos)을 갖는 꿈을 가졌었다. 그는 하나의 신으로 인정받기를 원했으나 지상에서 그의 죽음은 그가 지닌 더 이상의 모든 야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알렉산더가 이룩한 정복은 유익한 면과 나쁜 면을 모두 갖고 있다
♣ 좋은결과 ♣
1. 헬라 문명을 애굽과 서부 아시아에 확산 시켰다.
2. 그리스인과 이방인(야만인) 사이의 구별을 어느 정도 완화시켰고 기독교 복음을 위한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3. 헬라어가 개화된 사람들이 말하고 쓰는 세계적 통용어가 되었다.
4. 유럽에서 인도에 이르는 바닷길이 발견되었다.
♣ 나쁜 결과 ♣
1. 페르샤 제국의 막대한 보화를 소유한 이후에 야기된 그리스인들의 비도덕화
2. 동양의 악덕과 사치 풍조에 접합으로써 야기된 그리스인들의 나약해짐
제 4 장
프톨레미 왕조와 유대인
B.C. 323~30년 이집트를 통치한 헬레니즘계 왕조에 특별히 붙혀진 이름이며, 이 왕조에 속한 왕들을 원주민들은 파라오라고 불렀으며, 그들은 이집트의 유일한 입법자였다.
B.C.323년에 알렉산더가 죽으면서 제국을 통치할 계승자를 남기지 않았다. 그가 죽은 후에 알렉산더의 박타리안 왕족인 아내 록산나에게서 한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의 친가나 처가에서는 제국을 통치하는 계승자가 되길 원했으며, 심지어는 위대한 정복자가 장사되기도 전에 그의 왕국을 소유하고자 하는 자들의 전쟁이 시작 되었고. 알렉산더의 후계자들 (diadochoi) 은 그의 제국을 소유하기 위한 경합을 벌렸다.
B.C. 315년까지 프톨레미, 카산더, 리시마쿠스(Lysimachus)는 제2의 알렉산더가 되려는 안티고누스(Antigonus)의 야심적인 음모를 분쇄하기 위하여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라구스의 아들인 프톨레미에게는 애굽이, 리시마쿠스에게는 수리아가, 셀류쿠스니카터(Seleucus Nicator)에게는 바벨론 속주들이 할당 되었다. 대다수 성경 학자들은 이러한 사건이 다니엘 11:4의 예언을 성취시킨 것이라고 믿고 있다. “ 그러나 그가 강성할 때에 그 나라가 갈라져 천하 사방에 나누일 것이나 그 자손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또 자기가 주장하던 권세대로도 되지 아니 하리니 이는 그 나라가 뽑혀서 이 외의 사람들에게로 돌아갈 것임이니라. 알렉산더의 제국의 분열은 애굽인과 메소포타미안이 벌인 팔레스틴의 장악을 위한 오랜 동안의 쟁투에서 재연 되었다.
1. 프톨레미 1세 라구스의 아들, 소테르 ( B.C. 323~ 283 )
소테르(구원)라고 불리우며 프톨레미 왕조의 창설자로서 라구스의 아들이다. 그는 이집트의 사트랍(satrap, B.C 323-305)으로 있다가 B.C 305 - 283 까지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죽기 전까지 자기 후계자들을 위하여 국가를 잘 정비해 놓았다. 알렉산더 원정 당시 탁월한 후계자들 중의 한사람이었던 그는 알렉산더대제를 계승하였다 . 소테르는 알렉산드리아의 박물관과 도서관을 건축하였고, 알렉산더 대제의 원정사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프톨레미 1세는 페니키아와 팔레스타인을 세 번씩이나 점령했으나 매번 그 땅을 넘겨주어야만 했다. 그는 B.C.320년 안식일날 유대인들의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또한 유대 땅을 이집트에 합병시켰으나 아시아의 셀류커스 왕조의 안티고누스가접근해 오자 그의 땅으로 되돌아가가야만 했다.
그의 통치하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전쟁 포로로서, 도는 이주자로서 알렉산드리아에 왔으며 외국인 용병으로 고용되기도 했다.
B.C. 312년 프톨레미 1세는 안티고누스의 아들인 데메트리우스를 패주 시키고 그 땅을 다시 점령했으나 1년 후 코일레-시리아에서 철수 해야만 했다. 그대 그들 사이에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B.C.302년 프톨레미 1세는 세 번째로 팔레스타인을 침범했으나 B.C. 301년 시리아가 셀류코스 왕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그는 유대 땅이 이전에 맺은 조약으로 인하여 자기에게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B.C. 301년 프톨레미는 네 번째로 팔레스타인을 점령했으나 유대땅의 영유권 문제는 여러세대를 거치는 동안 셀류커스 왕조와 프톨레미 왕조 사이에 오래도록 해결 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입수스 전투 후에 그들은 코일레-시리아를 얻었고 헬레니즘을 장려하였다.
유대인들은 프톨레미 왕조의 커다란 제국 내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왕조의 마지막 여왕은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였는데 그녀는 헤롯과 싸워서 여리고를 장악했다. 요세푸스의 책에 보면 그는 유대인들에 대한 태도는 호의 적이었고, 세라피스상을 안렉산드리아로 가져 왔다고 한다.
2. 프톨레미 2세, 필라델푸스 ( B.C. 283~247 )
필라델푸스는 그의 누이이며 아내인 아르시노에에게 붙여진 이름이었으나 프톨레미2세를 지칭하는데 사용된 이름이다. 그의 치세기간 동안 알렉산드리아 왕궁의 물질적이고 문학적인 영화가 증진 되었으며 헬레니즘 문명에 대한 열광가로 인정되었다. 왕성한 무역 관계와 경제적인 상황과 페니키아와 유대지방에 대한 프톨레미왕조의 통치체제를 확립하고 , 성서에 나오는 「암몬 사람들의 랍바 」지역에 자기 이름을 따라 필라델비아( 빌라델비아) 라는 성읍을 재건했으며 그곳을 헬레니즘화했다. 성서에 나오는 아크레 라는 성읍 역시 그의 시대에 프톨레미마이스 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그는 게네사렛 호수가에 필로테리아(Philoteria)를 건설하였다. 필라텔푸스는 그의 전 통치기간 중에 애굽의 통치자로 일관하였으며 그의 지시로 모세오경이 헬라어로 번역 되었는데 이 번역본은 70인경 ( Septuagint)을 만들어내는 번역사업을 촉진시켰다. 이 번역 사업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와 탈무드(Meg. 9a)설명 되어있고 이 번역은 아마도 프톨레미 필라델푸스의 문학적 관심과 토라를 이집트의 구어로 번역함으로써 토라에 대한 지식을 보존하기를 원했던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의 필요에 의하여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는 과학을 진흥시킨 왕으로 알려졌으며 유대인의 율법에 경탄하였다. 그는 많은 유대인 전쟁 포로들을 석방시켜 주었고 그들은 여러 가지 직업에 종사하면서 자기들 나름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는 자기 딸 베레네케( Berenice)를 셀류커스왕 안티오쿠스 2세와 결혼을 시켰다.
톨레미 3세 ,유에르게테스(B.C. 247~221 )
프톨레미 3세는 그의 선조들과 달리 셀류커스 왕조와 전쟁을 벌였다. 그는 누이 베레니케를 죽인 자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코일레-시리아를 침범하였지만 ,그의 초반 승리에도 불구하고 셀3. 프류커스 2세가 B.C. 242년 그를 격퇴하였다. 다만 유대지역은 셀류커스 왕조와의 조약에 의하여 프톨레미 왕조가 계속 소유하게 되었다. ( 다니엘 11: 7-9)
그는 학문 ,특히 순수과학의 발전에 있어서 그의 선친들의 선례를 따랐으며 과학적 지원에 연구를 하여 “ 그림자의 계산법” 으로 지구 둘레를 계산하였는데 25,000 마일로 생각했으며, 과학적인 중력과 지렛대의 원리를 발견 하였다 그는 아니컬하게도 필로파토르( Philopato : 아버지를 사랑하는 ) 라고 불리우는 그의 아들 프톨레미 4세에게 살해당하였다.
4. 프톨레미 4세 ,필로파테르 ( B.C. 221~203 )
이시기 이르러 프톨레미 왕조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B.C.220년에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3세가 코일레-시리아를 침공 하였으나, B.C. 217년에 이집트인들이 안티오쿠스 3세 군대를 격파 하였다. (단 11: 11-12) 프틀레미 4세는 승리 이후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성전안의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생각하고 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고서 성전 안에 들어 가려 했으나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의하여 격퇴 당하였다. 이집트에 돌아온 그는 유대인들에게 화풀이를 하였으며 그들을 벌하고 그들을 노예화하라는 칙령을 공포하였다.
프톨레미 4세는 색을 탐하고 나태한 왕 이었으며 도덕적으로 악하고 사치스럽게 살았으며 , 그에게 어린 후계자가 있었는데 아들이 B.C. 205년에 그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5. 프톨레미 5세, 에피파네스( B.C. 203~181 )
B.C. 199 년에 안티오쿠스 3세가 세 번째로 코일레 -시리아를 침범하였다. 그는 이집트 군대에 큰 승리를 거두었고, 유대 땅은 다시 시리아에 귀속되었다. B.C. 192년에 안티오쿠스 3세와 프톨레미 5세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정략결혼에 의하여 강화된 “평화협정”을 체결 하였다. 안티오쿠스3세의 딸인 클레오파트라는 애굽의 어린 왕과 결혼을 하였지만 B.C. 173년에 세상을 떠났다. 유대의 정치적인 상황은 이러한 외교 정책상의 내적인 갈등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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