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새벽기도 전통(이덕주 교수)
새벽기도회는 "한국교회의 초창기에 성도들의 경건생활을 일깨우
고 주도한 아름다운 전통을 갖고 있어, 세계의 교회에 자랑할만한 기
도회"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회는 시작 때부터 기
독교인들의 개인적 경건 신앙 훈련 및 교회의 부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한국 교인들의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의지로 시작된 토
착 신앙양태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새벽기도 전통은 종교의 역사만큼 오래다. 매일 새벽 혹은 이른 아
침에 드리는 기도 행위는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에도 있다. 유대인
들은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이교도로 태어나지 않은 것과, 노예로 태
어나지 않은 것과,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드리나이다"는 내
용의 '아침 기도'(birkhot ha shahar)를 드린다. 이슬람교도들도 새벽
4-5시 경 성지 메카를 향하여 비슷한 내용의 '파즈르'(fajr) 기도를 드
린다.
불교 수행자들은 매일 새벽, 독경과 배례로 이루어지는 아침 예
불(禮佛)로, 천도교인들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심고'(心告)를 드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우리 조상들도 예로부터 먼 길 떠난 가장의
평안을 비는 부인들의 '정화수'(井華水) 기도도 이른 새벽에 드려야
효험이 있다고 믿었다. 새벽이 맑은 영혼으로 신과 대화할 수 있는
오염되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새벽기도 전통
기독교의 아침 기도 전통도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이미 3세기 교
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는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를 '합법적인
기도'라 칭하여 박해시대 초대 교인들이 아침 저녁으로 정기적인 기
도모임을 하고 있음을 증언하였고, 히폴리투스(Hippolytus of Rome)
도 아침마다 주교가 지정한 장소에서 사제들의 인도 하에 성서봉독과
기도를 드리고 있는 신앙 공동체를 증언하였다. 313년 기독교가 공인
받은 후 신자들이 급증하자 주교들은 아침과 저녁에 시간을 정해 교
회에 모여 기도하도록 지도하였다.
이같은 기도 전통은 수도원 중심의 경건생활을 통해 더욱 확고하
게 수립되었다. 고대 수도자들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사도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은 먹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시간을 기도시간으로 사용하고
자 하였다. 3-4세기 이집트의 '사막 수도자'들이 광야로 나간 이유도
"잡념 없이 기도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노동을 하면서도 시편을
암송하는 기도를 드렸고 길을 가면서도 '화살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이같은 이집트 사막 수도자들의 '완벽주의식' 기도 생활은 기대만큼
의 효과를 얻지 못했다.
이에 하루일과 중에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방식으로 바뀌었
다. 중세 수도원 운동과 규칙을 정비하여 오늘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
는 베네딕투스(Benedict, 480경 - 547)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수
도자들의 하루 일과를 노동(labor)과 독서(lectio divina)와 기도(opus
Dei)로 삼분하고 기도생활에 대해서는 하루 여덟 번, 즉 낮에 일곱
번, 밤에 한 번 시간을 정해 기도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러한 수도자들
의 기도 생활을 '성무일도'(聖務日禱, officium divinum) 혹은 '성무일
과'(聖務日課)라 했으며 시간을 정해 드리는 기도라 해서 '시과경'(時
課經) 혹은 '시간경'(時間經)으로도 불렸다. 성무일도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새벽에 드리는 '아침기도'(lauds)와 해질녘에 드리는 '저녁기
도'(vespers)다.
아침기도 전에 드리는 기도를 '독서의 기도'(matins)라
하고 저녁기도 다음에 드리는 밤 기도를 '끝기도'(compline)라 했으며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 사이에 네 차례 낮 기도를 드리는데, 오전 6
시에 '일시경'(一時經, prime), 오전 9시에 '삼시경'(三時經, terce), 정
오에 '육시경'(六時經, sext), 오후 3시에 '구시경'(九時經, none)을 각
각 드렸다. 중세 이후 이같은 베네딕투스 기도 규칙은 수도원 뿐 아
니라 교회의 일반 사제들에게도 의무 조항으로 지켜졌다. 그리고 '조
과'(朝課), '조도'(朝禱) 혹은 '찬미경'(讚美經)으로 불리는 아침기도와
'만과'(晩課), '만도'(晩禱) 혹은 '만과경'(晩課經)으로 불리는 저녁기도
에는 일반 신자도 참여하도록 권장하였다.
이외에 가톨릭 교회에서는 '삼종기도'(三鐘祈禱, angelus)라 해서
아침, 낮, 저녁, 하루 세 차례 교회 종을 세 번씩 칠 때 교인들이 있는
곳에서 기도를 드리는 전통이 있다. 이 기도는 '성모 마리아'에게 드
리는 기도인데, 11세기 십자군운동 때 전장에 나간 군인들의 안전을
기리는 기도로 시작되었다. 처음엔 금요일에만 행해지다가 16세기 이
후엔 매일 행해졌다.
이처럼 기독교회는 초대 교회 이후로 아침, 저녁 기도회를 중요시
하였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에서도 이런 기도 전통을 중
요시하였다.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의 규칙적인 기도
생활이 종교 개혁과정에서 용기와 지혜의 근원이 되었으며 18세기 독
일 경건주의 운동가들과 웨슬리를 중심한 영국 감리교 신앙운동가들
은 아침 기도를 종교적 의무처럼 실천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개신교회의 아침, 혹은 새벽기도는 가톨릭
전통의 천주교회나 정교회, 성공회처럼 수도규칙에 다른 의무 규정이
라기보다는 개인적 차원에서 행해지던 자율적 기도였다.
이화학당 학생들의 새벽기도
19세기 말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개신교 선교사들도 개인적으로
아침 기도를 드리기는 했으나 교인들을 상대로 아침 기도 집회를 열
거나 권장하지 않았다.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회 전통은 외국인 선교
사들에게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한국에서 이루어진 기독교인들의
독특한 신앙 체험과 부흥운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03년 원산 부흥운동에서 시작되어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에 이
르는 초기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인들은 중생과 성결이라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신앙을 체험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여러 가
지 형태의 기도 모형이 나타났다. 여러 사람이 소리내어 함께 기도하
는 '통성기도'(通聲祈禱), 밤을 새워 기도하는 '철야기도'(徹夜祈禱), 남
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기도'(中保祈禱) 등이 그것이며, '새벽기도'도
그중 하나다.
새벽기도회에 대한 선교사의 첫 보고는 이화학당 교장 프라이(L.
E. Frey)의 '1905년 선교보고'에 나온다.
"학교를 개학했을 때, 전에 다니던 학생 말고도 스무 명 정도가 새로
들어왔는데 대부분 교인 집안 출신입니다. 하디(R. A. Hardie) 박사께서
고맙게도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학생들을 위해 정동제일교회에서 부흥
회를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흥회가 열리기 두 주일 전
부터 매일 세 차례 예배를 드렸습니다. 마지막 주간 집회 때, 저는 페인
(Paine) 양과 함께 저녁 집회에 참석했는데 학생들은 매일 밤 자정까지
자기 죄를 자백하며 우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우리는 이른
아침에 학생들이 하나 둘 몰래 예배실로 들어와 기도하는 것을 목격하
였는데, '언제, 어느 때 죄를 사함 받았느냐'고 물으면 그들 중 대다수는
'어느 날 아침 예배실에서 혼자 기도하다가 확신을 얻었노라'고 했습니
다. 부흥회 여파는 1년 내내 지속되었습니다."
1904년 9월, 학교 개학을 맞아 배재학당과 연합으로 원산부흥운동
의 주역이었던 하디가 인도하는 학생 부흥회를 열렸다. 그런데 이
부흥회를 위해 준비 집회를 하던 중 이화학당 학생들이 은혜를 받은
것이다. 그래서 저녁 집회 때 참석했던 학생들이 "이른 아침에"(in
the early morning) 예배실에 모여 기도한 것이 새벽기도회의 시작이
되었다. 이 새벽기도회는 선교사나 교사들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학
생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화학당 교사와 학생들은 1905년 '을사5조약' 체결 이후
매일 정오에 '구국기도회'를 열기도 했다. 이로써 1904-5년 어간에
이화학당 학생과 교사들을 중심한 새벽기도회와 정오 구국기도회가
정기적인 기도 모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같은 이화학생들의 새벽기도회는 1912년 프라이의 선교 보고에
도 나온다. 그는 1911년 말 이화학당에서 열린 오기선 목사 부흥회
때 학생들의 자발적인 기도 모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학생들이 어떤 식으로 밤늦게까지 기도하고 또 이른 아침에 모여 기
도하는지 전해 들었습니다. 한 학생이 자기 죄 짐을 벗고 자유함을 얻으
면 그 학생은 도움이 필요한 다른 학생들을 위해 정성을 다합니다. 학교
건물 이곳 저곳에서 길을 찾기 위해 성경을 펴 읽는 학생, 열심히 중보
기도하는 학생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낮 시간에 오는 학생들은
대부분 불신자 가정 출신인데 처음에는 괴로워하며 기도하다가 주님의
은총을 받고 확신을 얻고는 거듭났음을 간증합니다. 예정했던 부흥회가
끝났는데도 많은 학생들이 이른 아침 기도회를 갖고 있으며, 낮 동안에
도 조용한 구석에서 혼자 기도하는 학생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1904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1911년에도 부흥회를 계기로 '이른 아
침 기도회'(the early morning hour of prayer)가 정기적인 새벽기도
회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회는 한국인
교인(학생)들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신앙 행태로 출발하였다.
평양 장대현교회의 새벽기도회
이화학당에서 새벽기도회가 시작된 2년 후, 평양에서도 한국 교인
들이 자발적으로 새벽기도회를 시작하였다. 1906년 당시 평양 장로회
신학교 졸업반 학생이자 평양 장대현교회 조사로 있던 길선주(吉善
宙)가 그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제시대 평양에서 <신앙생활>를
발행했던 김린서가 이를 증언한다.
"先生(길선주)은 入信 처음부터 祈禱와 聖經硏究를 힘썻다. 先生은 祈
禱의 人이엇나니 每日 三回 定時의 祈禱가 이섯다. 特히 새벽에는 일즉
깨여 日日의 事를 祈禱로써 하나님끠 論議하고 二十分間 默示錄 全篇을
暗誦하고 仙修式 體操를 行하고 午正과 밤에 定時 祈禱가 잇섯다. 先生
은 自己 혼자만 祈禱할 뿐 아니라 새벽祈禱會는 先生이 처음으로 創始
하엿다.
一九0六年 秋에 章峴敎會 助事 視務할 때에 朴致祿 長老와 함끠
새벽祈禱를 始作한지 月餘에 크게 恩惠됨으로 이를 堂會에 請願한지 數
次만에 堂會 決議로 全 敎會가 새벽祈禱會를 繼續할새 敎人들이 새벽
鐘 소리만 드러도 울면서 禮拜堂에 나왓다. 이리하야 始作한 새벽祈禱
가 一九0七年 大復興에 準備祈禱가 되엿든 거시니 全世界에 새벽祈禱는
先生으로부터 비롯한 거시다. 또 午笛소리와 함끠 全敎人이 어대서나
一時에 祈禱하는 正午祈禱도 先生이 創始하엿다."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 선도(仙道) 수행으로 '도인' 칭호를 얻었던
길선주는 기독교인이 된 후에도 매일 세 차례 시간을 정해 기도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그가 하루 세 차례 기도한 것이 과거 선도 수행
의 기도 습관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인이 된 후 선교사를 통
해 초대교회와 수도원의 기도 전통을 배워서 한 것인지는 불분명하
다.
그가 새벽기도 후에 선도에서 하는 맨손 체조를 했다는 점에서
전자일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이처럼 개인적으로 하던 새벽기도에
1906년 가을부터 같은 교회 박치록 장로도 참여하였고 한 달 후에는
정식으로 장대현교회에 청원하여 얼마 후, "당회 결의로" 전 교인이
참여하는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다. 이로써 새벽기도회가 교회 단위
의 정기적인 집회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것이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을 촉발시킨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부흥운동과 새벽기도회
이처럼 1904-6년, 서울의 이화학당과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시작
된 새벽기도회는 1907년 대부흥운동과 1909년 백만명구령운동 등 부
흥운동 열기를 타고 전국 교회로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1910년대에
접어들어 새벽기도회는 한국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 양태의 하나로 널
리 시행되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우선 강화 교인들의 '마리산부흥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리산 부흥회는 강화도 교인들이 매년 음력 5월10일부터
보름간 장봉도 옹암교회에서 시작하여 강화 본도의 여러 교회를 순회
하고 마지막 날에는 마리산에 올라 기도회를 하는 것으로 마치는 일
종의 순회 부흥회였다.
이 부흥회는 1914년에 시작되어 1960년대까지
계속되었는데 토착적이며 민족주의적인 부흥회로 한국 교회사에 중
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런 마리산 부흥회가 시작된 계기가 새벽
기도회에 있었던 것이다. 1914년 부흥회 과정을 기록한 <마리산부흥
회 일긔>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主降生一千九百十四年 五月十日에 장봉 옹암교회의셔 부흥회를 여
러 十五日에 페회되여스니 그 부흥된 사실은 여좌함.
부흥원인은 새벽긔도의 효력이오 새벽긔도 원인은 번[본] 교회내 김
속장 순셔씨가 강화 하도 두곡교회 뎡윤화씨의 부탁으로 즉시 나려와
자긔 집 식구로 더부러 시작하여스며 그후 몃 날이 못되여셔 렴슌일 교
감끠셔 강화 흥텬교회 뎐병규씨의 새벽긔도 하라는 부탁으로 되고 그후
차차로 리양긔 리양운 리원션 쟝동식 렴현슈 졔댁이 열심으로 긔도
함"
이처럼 옹암교회 교인들이 새벽기도를 드리며 부흥회를 준비하다
가 5월 10일 두곡교회에서 내려온 정윤화 권사가 인도한 부흥회에서
교인들이 죄를 회개하고 병자들이 고침을 받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마리산 부흥회가 장봉도 옹암교회 교인들의 새벽기
도회 모임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히고 있는 위 기록으로 이미 강화도의
두곡교회와 흥천교회에서 새벽기도회가 실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곡교회의 정윤화나 흥천교회의 전병규는 선비 출신으로 민족의식
이 강했던 강화 초기 교인들이었다. 이들은 선교사들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은 상태에서 주체적이고 토착적인 신앙 양태로 새벽기도회를
실시하였던 것이다. 이 부흥회를 계기로 강화 지역에 새벽기도회가
정규 집회 형태로 정착하였음은 물론이다.
1910년대 후반부터 부흥사로 활약하기 시작한 김익두 목사도 집회
를 하면서 새벽기도회를 강조하였다. 1917년 12월 평북 강계에서 열
린 산서노회 사경회에 대한 <기독신보>의 보도다.
"평안북도 강계읍(江界邑)에 산서(山西) 대사경회로 모혀 사경하는 중
황해도 계신 김익두 목사가 새벽긔도회를 쥬쟝하야 지나간 十二月 二十
二日브터 一月 二日까지 남녀 四百여명이 새벽마다 례배당에 모혀 합심
긔도하난대 죄를 압하하는 통곡이 진동하야 강계 셩안을 한번 들엇다
놋는대 잠쟈던 자의 밋음이 경동하야 다시 작졍한 이도 만흐며 새로 밋
는 쟈도 만흐며 슯흔 눈물로 담배를 끈코 十一됴를 작뎡한 쟈 만흐
며...."
이처럼 1910년대 새벽기도회는 주로 부흥운동 및 사경회와 연관을
맺으며 신앙 갱신운동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마리산 부
흥회나 강계읍 사경회의 경우에서처럼 새벽기도회가 강사의 요청에
의해 실시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새벽기도회가 아직은 특별한 기간 중
에 특별한 목적 의식을 지니고 실시된 '한시적' 신앙집회였음을 알 수
있다. 새벽기도회가 한국 교회 전반의 보편적 신앙 집회로 자리잡은
것은 1930년대 이후로 추정된다.
계시와 응답의 새벽기도회
새벽기도회가 한국인들의 토착적인 기도와 종교 전통을 기독교적으
로 해석하여 실천한 신앙 행태가 된 것은 그 기능에서도 잘 드러난다.
기복적(祈福的)인 성격이 강했던 민간 신앙의 새벽기도 전통을 하나님
의 계시와 응답을 받는 기독교적 경건 체험의 기회로 재해석하였던
것이다. 이 경우에는 집단적인 기도회가 아닌 개인적인 기도로 실행되
었다.
1930년대 부흥사로, 후에는 감리교 감독으로 활약했던 김종우(金鍾
宇) 목사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는 1911년 배재대학에 다니다가 목
회자가 되기로 결심한 후 "신의 능력을 얻기 위해" 1백일 새벽기도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야 그때부터 그는 백일 동안을 한번도 빼지 아니하고 날마다
니른 아참에 남산 우에 올너가 긔도를 시작하엿다 한다. 긔도 할 곳이
엇지 남산뿐이리오마는 그[김종우]는 오직 한적한 곳을 차저 간 것 뿐이
엇다. 쳐음 남산으로 긔도하러 가던 날은 신의 능력과 은혜를 충족히 밧
기를 결심하고 날이 채 새기 전에 올나가셧다 한다........
그때까지도 그
는 자기가 의인이거니 하는 생각이 마음 쇽에 남어 잇서서 '어려서부터
남의게 해끼침이 업고 술 취함이나 음란한 일이 업셧스니 나는 죄인이
아니요 의인이라' 하야 하 님의 은혜를 밧음에 큰 장애가 되엿다가 그
생각을 버리고야 비로소 하 님을 맛나보게 되엿다 한다. 하로 새벽에
는 하 님이 그에게 나타나사 '나를 봐라. 너는 나를 봐라! 나는 거륵하
고 온젼하고 께끗하다. 네 마음이 거륵하고 온젼하고 깨끗하냐?' 하셧다
고 한다.
그 말삼을 듯고 그는 죽은 사람이 되엿셧다 한다. 그는 눈물이
쏘다지며 그때까지 의인이라고 자칭하던 그는 과연 참말로 자긔가 죄인
임을 깨닷고 '육신이 지은 죄는 오히려 가볍거니와 마음 쇽으로 지은 죄
는 엇지할고' 하는 생각이 나매 그는 붓그러음을 견디지 못하야 만일 이
셰샹에 피할 곳이 잇다 하면 곳 피하고 십흔 생각이 낫셧다 한다. 백일
동안이나 남산으로 다니며 바리새인의 긔도를 하던 그는 그제부터야 셰
리의 긔도를 드리기 시작하엿다."
특별한 목적을 갖고 시작한 김종우 목사의 새벽기도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은혜의 기회가 되었다. 특이한 것은 그의 새벽기도
는 1백일 기한을 정한 '작정 기도'였고 기도 장소도 교회가 아니라 남
산에서 드리는 '산(山) 기도' 형태였다는 점이다. 한국인들의 전통적
종교 수행방법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이처럼 특별한 목적 의식을 갖고 새벽기도를 실천한 예는 다른 곳
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1913년 <그리스도회보>에 실린 "새벽긔도의
효력"이란 글이다.
"평남 진남포 배형식씨의 통신을 거한즉 이곳 윤부인 신덕씨는 쥬를
독실히 밋는대 다만 아들 하나이 잇스나 그 아들은 생애로 인하야 쥬를
밋지안코 함경도 북쳥으로 가고 이 부인은 이 곳에 잇셔 육신은 곤고하
대 밋는 쟈의 집으로 단니며 슉식을 하며 개인젼도를 열심으로 하는 즁
에 三삭 동안을 혼자 회당에셔 새벽긔도를 하더니 그 아들이 쥬의 감동
을 밧어 쥬를 밋고 그 모친의게 회개한 편지를 보내고 또한 집에 도라
와 모친을 모시고 쥬를 섬기겟다 하엿스니 누가 十五쟝의 말삼과 갓흐
며 이는 윤부인의 밋고 긔도한 효력이라 하엿더라."
"혼자 회당에서 새벽기도를 하더니"란 기록에서 아직은 교회의 정
규 집회로 정착하지 않고 개인적인 기도로 실행되고 있는 새벽기도의
초기 형태를 확인하게 된다. 진남포교회 윤심덕 부인의 '30일 작정'
새벽기도도 위의 김종우 목사의 경우처럼 '특별한 목적을 갖고' 실시
한 기도였다.
1919년 3 . 1운동 때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던 신석구 목
사의 새벽기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친구 오화영 목사로부터 민족
대표로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고, '목사로서 정치문제에 참여하는 것
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지, 교리가 다른 천도교인과 불교인과 합작하
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지' 알기 위해 대답을 유보하고 새벽마다
기도하였다. 그 자신의 증언이다.
"그後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이 일을 爲하야 祈禱하난대 二月 二十七
日 새벽에 이런 音聲을 드럿다. '四千年 傳하여 나려오던 疆土를 네 代
에 와서 잃어바린 것이 罪인대 차질 機會에 차저보랴고 힘쓰지 아니하
면 더욱 罪가 아니냐'. 이 直刻에 곳 뜻을 決定하엿다."
그에게 새벽기도는 자신과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기도였다. 그리고 새벽기도에서 받은 응답으로 그는 일제시대 민족
신앙인으로 올곧은 자세를 보여줄 수 있었다.
이처럼 새벽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종교적 경건 체험의 기회로 활용되었다. 민간 신앙의 기복적인 기도
행태가 기독교의 구도와 헌신의 기도 행태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회는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
하나님의 임재와 계시를 체험하는 종교적 '은혜' 체험의 계기였다.
맺음 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새벽기도회는 서양 선교사들의 지시나 훈련
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한국인 교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시작
되었다. 그 결과 새벽기도회는 주체적이고, 토착적인 신앙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새벽기도회가 뿌리를 내린 시기가 한말로부터 일
제시대에 걸친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민족 수난 상황이었기에 민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민족주의적 성격도 지니게 되었다.
이같은 초기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회 전통은 해방 후 전쟁과 불안
의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확고한 신앙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새
벽기도회가 교회 부흥과 성장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
다. 다만 세월이 흐르면서 새벽기도회가 종교적 경건의 체험보다는
기복적인 기능이 강조되고 자발적인 신앙보다는 의무감에 의해 참석
하는 형식적 종교 행위로 그 의미가 퇴색된 것은 교정되어야 할 부분
이다.
오늘의 한국 교회 위기가 세속화로 인한 사회적 지도력 상실과
정체성 상실로 인한 신앙적 공허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한
국 교회의 영적 기능 회복의 실마리를 경건과 신앙 갱신이라는 새벽
기도회의 기능 회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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