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강
계시
요한계시록 1:1-3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자신도 알게 모르게 지식이란 여러모로 쌓여지게 됩니다. 그래서 나이가 많이 들면 지식도 많이 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험이 그만큼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극복해 보려고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잡다한 지식들을 더 채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삶의 대부분이 지식 쌓기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누가 더 많이 아는가 하는 싸움입니다. 많이 아는 자가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많이 알지 못하는 자는 많이 아는 자에게 지배를 당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지식도 하나의 힘입니다. 많은 지식을 축적해 놓으면 많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쓰는 격언 중에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세상은 힘의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에 얼마든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세상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장 힘의 논리에서 지면 지배를 당하고 힘의 논리로 이기는 자는 군림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지식을 가능하면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 보여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신이 아는 지식으로 노하우를 얼마나 축적하느냐 하는 것은 자신이 세상에서 살아남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는 지식과 정보의 싸움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지식과 정보의 전쟁터에 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현대를 살면서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남에게 알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물론 별로 돈이 되지 않는 것은 쉽게 알려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청소년들에게는 연예인에 대한 신상정보도 돈으로 거래된다고 하는 것을 며칠전 뉴스를 통해서 본 적이 있습니다. 유명 가수들의 휴대폰 번호는 얼마, 주소는 얼마, 생일은 얼마 등으로 거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소년들이 10만원 이상을 주고 그런 정보를 사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 저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하여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상황은 돈이 되는 것이라면 뭐든지 사고 팔고 하는 시대입니다. 그러기에 돈이 되지 않는 정보는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한 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사 55:1-5).
그리고는 때가 되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후손으로 보내셔서 언약을 남김없이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히 성취되었고 그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나타내시고 온전히 성취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은 우리의 힘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타내 주셔야만 알 수 있고 또한 믿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여기에 계시라는 말이 나옵니다. 계시가 무엇입니까? 계시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깨우쳐 보이는 것’ 또는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진리를 신이 가르쳐 알게 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감추인 것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누가 계시하며 무엇을 드러내시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감추인 것을 드러내고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누가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히브리서 1:1,2에 보면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즉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란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주신 것이고 또한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신 것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약속으로 주신 것과 또한 그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십자가의 대속을 이루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본문에서 ‘속히 될 일’이라고 한 것도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1절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될 일에 대해서 계시로 주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시간적으로 남아 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십자가로 이루셨고 또한 그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란 앞으로 더 밝혀져야 할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취되어 말씀을 통해 다 드러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실 우리의 관심은 요한이나 혹은 천사에게 더 집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위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과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면 인간의 사명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꼭 걸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다 이루신 것을 믿는다고 것이고 또한 그분이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제가 설명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일하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 주님의 일은 반드시 사람을 통해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을 통해서 하실 수도 있고 심지어는 동물을 통해서도 일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돌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만드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주님의 일하심에 있어서 사람을 통해서 하신다면 그 사람을 보지말고 일의 원동력이고 근원이 되시는 주님만 이야기하자는 것입니다. 사람은 도구에 불과하므로 사람을 보지말고 주님의 능력만 보고 증거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이나 천사는 우리가 관심가져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요한은 그냥 밧모 섬에 있었고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요한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불현듯 하나님의 계시가 요한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을 흠모하고 요한을 위대한 사도로 보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에게 우리의 관심을 빼앗기는 경우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병고치는 이적을 나타내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나 계획을 환상이나 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방언을 하고자 하는 마음도 같은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주님의 일하심을 믿지 않고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결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요한 사도가 보고 들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기한 것과 미래의 일들을 모조리 다 보았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것 또한 그 약속대로 십자가에서 온전히 성취하신 것에 대해서 보고 들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요한 사도는 자기의 체험이나 계시를 받은 자기 자신을 증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것을 다 증거하였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2절).
요한 사도는 주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증거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아는 데 있어서 모자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생명을 누리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하고 완벽하게 나타내 주셨습니다. 부족한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추가해야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있어서 다른 계시란 있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완벽한 계시가 기록된 말씀으로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잡동사니들을 하나님의 계시의 수준에 올려놓고 지키고 따라가려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만이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졌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무엇인가 늘 부족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를 성장시키는 비결을 찾습니다. 누군가 교회를 짧은 기간 내에 엄청난 교인수를 자랑할 정도로 부흥을 시켰다고 소문이 나면 누구나 그 비결을 배우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교회를 부흥시키는 계시가 된 증거입니다.
기도원 가서 40일 금식 기도하여 어떤 일을 이루었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계시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문제가 있어서 고민을 하면 40일 금식 기도할 것을 권유하는 것입니다. 새벽 기도를 통해 문제 해결을 하였으면 새벽 기도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계시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을 곧 계시로 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씀이 어떻게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경험을 계시로 삼고자 할 뿐입니다. 그것이 마귀가 우리를 올무에 거는 방식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대부분의 교인들은 모르는 듯 합니다.
인간은 한 번 어떤 경험을 하게 되면 그것이 자신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지식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또 그와 비슷한 일을 만나게 될 때에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문제를 해결하여야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세 제자와 함께 변화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동안 제자들에게 어떤 사람이 귀신들린 자식을 데리고 와서 고쳐주기를 요구하였지만 그 아이를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내려 오셔서 그 아이를 고쳐주시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막 9:28). 한 마디로 전에 우리도 귀신을 쫓아내는 경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통하지 않습니까 하는 물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쉽게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렇지! 기도하면 되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매사에 기도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아니면 안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경험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을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근원이 된다는 것을 알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즉 인간이 기도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내 경험과 종교적 열심으로 어떤 문제를 풀어내려고 하지말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주님께 맡기는 것이 주님을 믿는 자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누가 얼마나 쌓느냐 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성경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살아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경험, 종교적 열심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에 관심 가져야 할 이유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누가 기도해서 어떤 일을 이루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믿는 믿음에 의해 나오는 삶인 것입니다.
3절 말씀도 자주 오해되어 많이 인용되고 있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흔히 이 말씀을 가지고 읽고 듣고 지키면 복이 있다든지 아니면 읽는 것과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지키는 것까지 하는 자가 진정 복된 자라는 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것은 말씀을 지켜야 하는 인간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 해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읽는 자와 듣는 자 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를 한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 사도가 본 서신을 기록할 당시에 성경은 우리처럼 이렇게 책으로 되어서 모두가 다 가지고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적 예배 시간에 앞에서 한 사람이 두루마리로 된 성경을 읽었고 회중들은 그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읽는 자는 단수로 표현하고 있고 듣는 자와 지키는 자를 ‘듣는 자들’ 또는 ‘지키는 자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요한 사도는 회중을 이루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낸 이 서신의 글을 한 장로가 크게 읽는 것을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온전히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까?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에 우리는 복 없는 존재입니다. 복 없는 존재란 저주와 멸망 가운데 있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와 대조되는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셨습니다. 말씀을 온전히 지키신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진정 복 있는 자는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단순한 한 사람의 의로운 죽음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해 죽는 대속의 죽음이었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복 있는 자가 된다는 것은 오직 그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고 그분 안에서 사는 삶이 진정 복 있는 자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 있기 때문에 그분의 몸된 교회로서 말씀을 읽고 들으며 또한 지키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를 장악하고 계시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성도의 삶이며 또한 그것이 바로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분께 장악 당하고 그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에게 다른 계시란 있을 수가 없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더 이상 다른 것에 관심을 빼앗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약속이 성취된 이것이 우리 안에 계시로 남아 있기 때문에 늘 예수 그리스도로만 만족하며 감사하는 신앙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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