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기준 세우기 - 11. 믿음
하나님의 기준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기준을 읽고 다른 사람이 보이고, 다른 교회들이 보이면,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보게 되면, 자기 자신이 천리만리 주님 앞을 떠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자기 코가 석자인데, 남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 글이 자신 이외에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데 사용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모습의 가짜신앙을 따르고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믿음에 의한 삶”(여주봉) 이란 책을 정리하는 것이 믿음에 대한 잘 된 정리라 생각되어서 나름대로 책을 중심으로 정리합니다. 어떤 부분은 책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였습니다.
믿음의 중요성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믿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도,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말씀과 같이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도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와 같이 주님이 내 안에 사시는 것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갈 3:2,5) 와 같이 진정한 성령의 역사도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더욱이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도, 열매 맺는 삶도,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도, 은사를 받는 것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경험하는 것도 모두 다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열심히 많이 해야 하고 정성을 많이 쏟아 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소나무 뿌리를 몇 개 뽑을 정도로 기도해야 받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모든 것이 믿음으로 가능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그렇게 사모하지만 믿음에 의한 삶을 살지 못한 것은 믿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문제는 바리세인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말의 의미가 가려졌듯이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이 가려질 수 있다는 겁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전 존재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절대 신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반드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라합은, 자신이 숨긴 정탐꾼들이 들키면 자신과 가족 모두 죽습니다. 하나님께 자신 전체를 걸었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인격체이신 하나님께 자기 전체를 거는 것” 입니다.
잘못된 믿음과 하나님의 음성.
마14:29에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위로 걸어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해외토픽에 나이지라아 폭포 위를 뛰어내렸다 죽은 사람이 소개된 적 있었습니다. 베드로처럼 뛰어내리라 하였다면서 뛰어내렸지만, 살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와 이 사람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한 사람은 믿음이고, 한 사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확신이 있었고 다른 사람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이렇게 생각하느냐면, 오늘날 많은 사람이 마음의 확신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기도하느냐하면, 내 마음에 확신이 들 때까지 기도합니다. 확신이 들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믿으므로 밀고 나갑니다. 그러다 완전히 망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한국식 믿음(거짓)입니다.
그럼 베드로와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믿음은 자기들이 스스로 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지 않는 것은 어떠한 확신도 믿음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확신에 불과합니다.
에필로그
사업을 시작합니다. 성공하게 해주세요! 하면서 십일조, 특별기도, 일천번제, 작정기도 다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가운데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한 사업인데, 망했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대부분 찾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다며 원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죄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천번제에 며칠 빠진 것 때문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작정기도때 정성이 부족한 것을 탓할 때도 있습니다. 또, 안 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서 망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업을 시작하라고 하신 적이 없으셨는데, 혼자 난리를 친 것입니다.
특히 사업하시는 분들 중에는, 하나님 제가 이번에 사업을 시작하는데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십일조를 잘 드리고, 또 십의 일조는 선교헌금을 드리겠습니다,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라고 합니다. 이것은요, 전혀 믿음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 외에는 뒷받침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건축할 때도 그렇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건축에 대한 로망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너무 빨리 건축 혹은 구조 변경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축의 이유를 성경 속에서 충분히 뽑아냅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확신이 듭니다. 그래서 그렇게 시작합니다. 성공할 수도 있지만,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는 것은 절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만 뒷받침합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이실 때 그것을 따라가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말씀하셔야 합니다. 내가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믿~습니다.”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셔야 합니다. 또한 말씀하신 것을 옳게 분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 생각을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셨는데 안 되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들었거나, 때가 안 된 것입니다.
믿음은 성경지식을 믿는 것이 아니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믿고 환경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그분 자신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면, 그분의 일을 보이시고, 그때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일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사역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야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성령의 조명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만큼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믿음이 아닌 것
믿음에 의한 삶을 살기 위해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믿음의 성격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믿음의 성격을 올바로 이해하지 목하여 믿음이 아닌 것들을 믿음으로 잘못 붙잡고 있으면, 거기에는 어떠한 믿음의 열매도 맺히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아닌 것들을 살펴보는 주된 이유는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믿음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이 아닌 것들은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날 널리 팽배해 있는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단순히 지식적으로 동의하는 것.
“우리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임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실 만큼 우리의 필요를 아시며, 그것을 채우시는 분이심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모든 약속을 지키시는 분임을 믿습니까?” 이 모든 질문에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모두 아멘으로 화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고, 잘 믿는 사람들을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 즉 하나님의 모든 진리에 단순히 지식적으로 동의한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당연히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진리를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매만 보더라도 우리는 이 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며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임을 믿는다고 말하는 많은 성도들은 막상 그들이 필요에 처하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이나 세상적인 수단이나 인간적인 방법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도 그 필요가 채워지지 않을 때 그들은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다릅니다.
이 부분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 - 1. 이론적으로 하는 것, 신학적인 지식
2. 자서전적인 지식
3. 교육과 공부를 통해서 습득
4. 신앙의 본질을 위한 수단
5. 삶의 변화를 주지 못함
주님을 아는 것 - 1.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하는 것.
2. 저자와의 교제
3.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습득
4. 신앙의 본질
5. 삶의 근본적인 변화
표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다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본질은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 즉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그대로 믿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즉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믿음이 좋은 것으로 알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위 도표의 좌측면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위에서도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관한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 기 위한 수단에 불과 합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 가지 예
1)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가장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의 모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내용을 다 일점일획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그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인생을 건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누구보다 좋다고 자부하였습니다. 사실 로마서 2장에서 볼 수 있듯이 자부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정반대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믿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요5:45-47)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믿음에 대한 그릇된 이해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에 관한 모든 사실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들을 잘 지키려고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믿음이 좋은 자들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로는 하나님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삶 속에 나타난 열매를 보아도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성경적인 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이 항상 우리의 진정한 믿음을 반영합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당연히 그들이 전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2) 귀신
여러분은 우리 하나님이 유일하신 전능자이심을 믿습니까? 당연히 믿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참 잘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믿음은 귀신들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
귀신들은 그 사실을 그저 믿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들은 무서워서 벌벌 떨 만큼 그 사실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회원 중 한 사람 속에 들어있던 귀신이 그 곳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예수님에 대해서 더 잘 알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예수님에 관해 더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귀신은 그 사실을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서 두려워서 벌벌 떨었습니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 하나가 있었다. 그가 큰 소리로 나사렛 예수님,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임을 압니다. 라고 외쳤다.” (마 1:23-24)
이렇게 귀신들이 하나님에 관한 사실을 다 믿는다고 해서 믿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야고보서 2장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특히 그 구절은 참된 믿음에 대해서 말하는 구절임을 기억하십시오. 야고보서 2장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에 관산 사실들을 그대로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삶 속에 진정한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3) 여리고성의 백성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여리고성을 치실 때, 그 곳에 살던 기생 라합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 여인은 하나님의 행하심,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0)
그렇다면 그 당시 여리고성에 있던 사람들 중 오직 기생 라합만 하나님의 행하심을 들었습니까? 아닙니다. 그 성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던 라합과 믿음이 없어 구원을 받지 못했던 나머지 여리고성 사람들과의 어떠한 차이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행하심,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기생 라합은 그 사실을 믿은 반면, 나머지 여리고성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여리고성 사람들은 그 사실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저 믿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확실히 믿었기에 기절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 정찰병들이 잠들기 전에 라합은 옥상으로 올라가 그들에게 말 하였다. `나는 당신들의 하나님이 이 땅을 이미 당신들에게 주신 줄로 압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두려운 존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이스라엘이란 말만 들어도 무서워 떨고 있답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이집트를 탈출해 나오던 때에 여호와께서 당신들 앞에서 홍해 물을 말리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 우리는 당신들이 요단 동쪽에 있는 두 아모리 왕, 시혼과 옥을 어떻게 처치했는지도 다 들었습니다. 그런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당신들이 무서워 정신을 잃고 말았답니다. 정말 당신들의 하나님 여호와야말로 천하에서 제일가는 신이십니다. (수2:8-11)
보십시오. 그들 모두는 하나님의 행하심,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뿐 아니라 간담이 녹고 정신을 잃을 만큼 그 사실을 정확하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이 믿음을 가졌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그들 모두를 구원하셨을 것입니다.
위의 세 가지 예에서 선명히 볼 수 있듯이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사실을 이론적으로 그대로 믿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에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는 어떠한 참 믿음의 열매도 없습니다.
2. 환경에 대한 믿음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이 아닌 것 중 하나는 환경에 대한 믿음입니다. 당연히 환경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부분을 살펴보는 이유는 오늘날 매우 많은 성도들이 실제로는 환경을 신뢰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불신의 대표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히3:7-19). 또한 그들의 불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심각한 죄였는가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히 3:15)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히3:16-19)
이렇게 불신의 대명사처럼 묘사되고 있는 그들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그들의 믿음에 대해서 말하는 구절도 있습니다.
“그가 홍해를 꾸짖자 물이 말랐으니 그가 자기 백성을 인도하여 사막을 지나듯이 바다를 지나가게 하셨다. 저가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출하셨고 그 원수들은 바닷물에 휩쓸려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그러자 그들이 그의 약속을 믿고 그를 찬송하였다.” (시106:9-12)
물론 그들의 믿음은 참다운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이 믿음이 참다운 믿음이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유업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이 나오는 시편 106편만 하더라도 그 구절 앞뒤로 그들의 불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들은 실제로는 참다운 믿음이 아닌, 어떤 종류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들의 믿음은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환경을 의존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이 질 될 때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찬송을 불렀지만 환경이 어려워지면 이내 곧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하고 낙심하고 좌절하였습니다.
참다운 믿음은 하나님 외에 의지할 것이 없는 상황에 처해야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는 그들을 시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신8:2-3). 그리고 그 시험하시는 것 중 하나는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시험을 시험하시기 위해 광야로 인도하셨습니까?
그것은 광야에 가야 그들의 믿음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외에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 되어야 우리들의 실제로 하나님을 의지하는지 혹은 그렇지 않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런데 광야는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바로 그러한 곳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 그들을 반복적으로 하나님 외에 의지할 것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홍해 앞으로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는 곳으로 사막 한 가운데서 먹을 것이 떨어진 상황 등등.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체적으로 그러한 상황으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모든 상황의 공통적인 점은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해결책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리기를 원하셨습니다(시78:22, 106:13). 그러나 그 때마다 그들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전혀 구원의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불신했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불신에 대해 하나님은 분노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분노가 맹렬하게 불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시78:21). 그러나 하나님은 곧 바로 그 분노를 돌이키시고 다시 그들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시기를 열 번, 그래도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서지 않자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서 흩으시기로 결단하셨습니다(민14:22-23).
오늘날 어떤 성도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문제를 해결할 여러 가지 방안들을 생각해 냅니다. 그러나 자기가 기대했던 그 방안들이 하나하나 실패로 돌아갈 때 그들은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것은 전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 몰라도 그것은 실제로는 그 방안들을 믿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러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또 어떤 성도들은 “일이 잘 될 때는 그래도 내 믿음이 괜찮았는데 어려운 일을 당하고 보니까 내 믿음이 떨어졌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틀린 말입니다. 그들의 경우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어려움이 닥치니까 믿음이 없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참다운 믿음은 환경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환경에 의존하는 믿음은 참다운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로는 환경을 믿는 것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은 상황에서 처해 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모세가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그들의 리더였기 때문입니다. 집에 쌀이 떨어지면 똑같이 먹을 것이 없을지라도 부모가 자녀들보다 더 어려운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을 만났을 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홍해 앞에서의 모세의 모습에서 이 부분을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 눈에 보기에 전혀 구원의 여망이 없는 상황에 처하자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하며 낙심하여 좌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달랐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극명한 대조를 보십시오.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요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0-14).
어떤 성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 동조하면서, “그런 상황에 닥쳤는데, 그렇게 하지 않을 사람 누가 있어?”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목사님은 제가 처한 상황에 닥쳐보지 않아서 모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이 매우 어려운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세들과 말들은 모두 다 불신의 표시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했던 상황에 비하면 오늘날 성도들이 처하는 상황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참다운 믿음은 환경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3. 단순한 마음의 확신
일부에서는 믿음을 단순한 마음의 확신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참다운 믿음이 아닙니다. 물론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성경에 나오는 믿음 중에는 성령의 은사로서의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행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초자연적으로 부어지는 것을 말합니다.(책의 저자인 여주봉 목사님는 믿음의 은사를 존웸버 목사가 정리한 성령론에 입각하여 정의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해는 가지만 좀더 신중한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 확신에 기초해서 말하고 행동할 때,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은 성령의 은사로서의 믿음과는 다릅니다.
믿음을 단순한 마음의 상태로 이해하는 성도들은 그 초점을 하나님께 두기보다 자신의 마음의 상태에 둡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 마음속에 확신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 초점이 자기 마음의 상태에 있는 한 절대로 참다움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들은 아마 그렇게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확신보다는 더 많은 의심이 생기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입니다. 설령 그렇게 해서 자기 마음속에 확신이 생겼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 최면에 불과하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아닙니다.
어떤 성도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주의 종으로 부르셨으면 베드로가 물위로 걸었던 것처럼 자기도 물 위로 걷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물 위로 뛰어내리려고 하니까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더욱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여 주께서 저를 물위로 걷게 하실 줄 믿습니다.”그리고 난 다음에 확신을 가지고 그는 한탄강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몰에 빠져 죽을 뻔 했습니다. 다행히 지나가던 사람이 그를 구조해서 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오래 전 신문에서 외국의 어떤 한 사람이 그렇게 강에 뛰어내려 죽었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을 이해하는 성도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 중 하나가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것을 본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2-24)
그러나 이 구절에서도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우리 마음의 상태가 아닌 하나님께 두라고 명백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이 구절은 우리가 자기중심적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그저 마음속에 의심만 갖지 않으면 그것이 주어질 것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그러한 식의 기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을 이렇게 그릇되게 이해하는 또 한 가지 형태는 하나님의 약속을 임의로 취해서 믿음으로 그것을 주장하면 그것이 자기에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를 우리는 흔히 “그것을 붙잡고 믿음으로 주장하라”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좋은 약속을 취하라.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주장하라. 그리하면 그 약속이 너희 삶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태도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임의 대로 택하는데 있습니다. 성경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보편적인 약속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신다는 요한1서 1장 9절과 같은 말씀입니다. 또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요한복음 3k장 16절의 말씀입니다. 반면에 성경에는 특정한 경우에 특정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약속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약속들은 우리가 임의대로 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좋은 것을 붙잡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임의대로 택합니다. 그것도 선별적으로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것들을 택합니다. 예레미야서에 보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에는 아랑곳없이 그저 성경에 나와 있는 좋은 약속들을 그들에게 선포하는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의 말을 거짓이라고 강력하게 성토하고 있습니다(렘5:31, 6:13, 7:8, 14:14등등).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라고 할지라도 그곳들은 자동적으로 성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보증이라기보다는 그것으로의 초청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통치권에 온전히 순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들이 그러한 삶에서 떠나면 아무리 하나님께서 주신 역속이라 할지라도 그 약속들은 거두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엘리 제사장의 삶 속에서 그 점을 잘 볼 수 있습니다.
4. 밀어붙이기식 믿음
믿음을 단순한 마음의 확신으로 이해하는 또 하나의 형태는 제가 “밀어붙이기식 믿음”이라고 부른ㄴ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성도들 중에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대단히 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하나님을 위해 큰 계획을 세웁니다. 그 일이 이루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신뢰하고 “믿으므로”밀고 나갑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주님을 위해 이 일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어주시면 제가 이렇게 저렇게 하나님께 헌신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줄 믿습니다.”
특히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계획을 세워놓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들을 그 근거로 제시합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눅 18:1-8)
그러나 이와 같은 구절들은 그저 우리가 임의대로 계획을 세워놓고 간절히 밤낮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선, 성경에서 말하는 올바른 기도 자체가 우리가 우리의 뜻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여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조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구절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 구절에 나오는 과부의 경우 정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재판관에서 관철시킨 경우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이 비유는 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 강청하는 기도와 같은 맥락의 기도입니다.
이 두 강청하는 기도가 의미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그들이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요청했을 때 악한 재판관이나 약한 이웃이 그 요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구하면 악한 재판관이나 악한 이웃이라 할지라도 그 요청을 들어주지 않겠느냐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들이 구하는 옳은 기도를 속히 들어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면서 누가복음 11장은 그 강청하는 기도를 성령을 구하는 기도가 곧 바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이 강청하는 기도들은 엘리야의 기도와 같은 기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3년의 가뭄 후 다시 지면에 비를 내리시겠다고 이방 선지자들을 처단하고 난 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다가오는 큰 빗소리를 들려주십니다(왕상18:41). 그런데 엘리야는 그 때부터 그 약속을 붙잡고 머리를 양 무릎 사이에 넣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실제로 그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임의대로 계획을 세우고 간절히 기도하고 밀어붙이기식의 믿음은 참다운 믿음이 아닙니다. 심지어 아무리 좋은 동기를 가지고 그렇게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참다운 믿음이 아닙니다. 또한 나름대로 큰 확신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앞서 가셔야 비로소 믿음이 필요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간절히 기도하고 물위로 걸으려다 죽을 뻔 한 사람과 베드로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그 차이는 그 사람은 자기 임의로 물 위로 걸으려 했고 베드로의 경우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 위로 걸어오라고 말씀을 듣고 걸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주님께서 앞서 가셔야 비로소 믿음이 필요합니다.
참된 믿음이란
1.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인격체이신 하나님께 두는 것 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어떤 사실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인격체이신 주님께 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참다운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믿음이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열심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많았을지 모르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아는 만큼 가지는 게 아니라,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만큼 가지는 것입니다.
2.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모든 것을 거는 것)
믿음은 성령의 조명으로 발견된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중요한 한 가지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히11장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께 자신을 다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노아에게 하나님은 운동장보다 더 큰 방주를 만들라 하셨습니다. 그 당시 전기톱, 전기대패도 없었습니다. 나무한그루 자르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겠습니까? 또 비가 올 기미도 안보였습니다. 만약 비가 안 오면 자신의 인생 이상한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치부될 뿐더러, 자신의 인생의 수많은 시간을 허비한 것입니다. 그가 가진 것 이라고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한가지입니다. 노아는 말씀하신 그 하나님께 자기의 모든 것을 걸었던 겁니다.
엘리야는 아합왕 앞에 서서 아합의 죄로인하여 이슬도 내리지 않을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당시 아합의 어떤 존재인가하면? 5공의 전두환 대통령보다 더한 존재였습니다. 그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목숨을 걸고 이야기 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으로 아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성경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라고 배웁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믿습니다. 이것이 귀신들도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아닙니다. 반면, 참 믿음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좋은 예가 있습니다.
우리는 조지 뮐러를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고아들을 한꺼번에 2천 명씩 돌보아야 하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는 고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사람들에게 손 한 번 벌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조지 뮐러는 하나님께서는 고아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조지 뮐러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던 것이 아니라, 전능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조지 뮐러는 고아들의 필요를 하나님께서 당연히 채워주실 것을 신뢰했던 것입니다.
조지 뮐러의 예
조지 뮐러의 자서전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약 1,500명의 고아들을 돌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먹을 것이 전혀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총무가 조지 뮐러에게 보고합니다. “목사님, 오늘 점심 때 아이들에게 줄 빵이 없습니다. 지금 시간은 11시입니다. 점심시간 전까지는 한 시간 남았습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조지 뮐러는 조용히 기도실에 갔다고 합니다. 30분이 지난 후 총무가 기도실로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30분밖에 안남았는데요.” 조지 뮐러는 대답하기를 “지금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잖아요. 여러분도 기도하십시오.” 이윽고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조지 뮐러는 기도실에서 나와 총무에게 이렇게 일렀습니다. “종을 치세요. 점심시간이니 아이들을 모으세요.” 총무는 하는 수 없이 조지 뮐러의 명을 따라 종을 쳤습니다. 그런데 종을 치자마자 고아원 문 쪽에서 차소리가 났습니다. 모두들 그쪽을 보니까 트럭 한 대가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트럭은 어느 빵공장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트럭 기사에게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빵공장에서 빵을 굽다가 실수로 빵을 조금 태웠다고 합니다. 먹는데에는 지장이 없지만 상품으로서의 가치는 떨어졌습니다. 빵공장 사장은 하는 수 없이 가까운 고아원에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빵이었기에 그 고아원에서 다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개받은 곳이 조지 뮐러의 고아원이었다고 합니다. 그 때가 오전 11시. 조지 뮐러가 기도하러 기도실에 들어갔던 시간이었습니다.
아마 우리 같았으면 이랬을 겁니다. “아니, 총무가 되어가지고 오늘 점심때 아이들에게 줄 빵이 없다는 이야기를 지금 하면 어떻게 해! 시간이 없잖아 시간말이야. 아이들 불러모아가지고 통성기도해요! 아, 어디 전화할 데 없나. 아,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조지 뮐러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에 관한 사실을 확실히 믿은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고아들의 아버지라는 진리와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의 필요를 기쁨으로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성령의 은혜로 알고 그 분만을 신뢰했던 것입니다.
중국 전도의 영웅 허드슨 테일러의 삶은 기도와 응답의 연속이었다. 사람들이 "테일러가 일어나기 전에 태양빛은 한 번도 중국 대륙을 비추지 않았다." 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기도에 열심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범선을 타고 항해 중일 때 일이다. 바람이 없자 배는 난폭한 토인들이 사는 어떤 섬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배는 점점 물가에 접근하고 바닷가에서는 토인들이 무기를 들고 배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자 배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사색이 되었습니다.
선장은 서둘러 기도의 사람 테일러에게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바람을 보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 말을 들은 테일러는 선장에게 배에 있는 모든 돛을 올리라고 말한 다음 선실에 들어가 테일러가 기도를 드리자 갑자기 바람이 강하게 불어 배는 토인들이 있는 섬을 떠나 안전한 항해를 계속하게 되었다.
잠시 후 선장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바람이 너무 강합니다. 이제 그만 기도해도 되겠습니다.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려 주십시오."
참된 믿음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분께 나의 모든 것을 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되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하나님과 다른 것을 동시에 의지하는 것은 전혀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을 신뢰한다는 말과 대칭되는 말과 연계해서 다시 설명
성경이 말하는 어떤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려면 그 말에 대칭되는 말과 연계해서 이해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중 하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성도들은 자신이 당연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그것이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것과 같이 가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나의 원대로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요5:30)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원대로 한다. 는 말은‘기쁘시게 한다. 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한다고 말할지라도 그것이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것과 같이 가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를 기쁘게 하는 범위 내에서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즉 자기 소원과 목적이 이루지는 범위 내에서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아닙니다. 실제로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평가를 소중히 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평가를 소중히 여긴다고 생각을 합니다.
만약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평가를 소중히 여기십니까? 라고 무르면 그들은 뭐라고 대답을 했을까요? 당연히 그들은 그렇다고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고 율법을 준수하고 기도와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평가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에게서는 서로 칭찬을 받으려고 하면서도 한 분밖에 계시지 않는 하나님에게는 칭찬을 받으려고 하지 않으니 어떻게 나를 믿을 수 있겠느냐?” (요 5:44)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성경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평가를 소중히 여기려면 사람의 평가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이 같이 가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평가를 소중히 여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의 평가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그렇듯이 그들은 사람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가 서로 상충될 때 사람의 평가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실제로는 하나님의 평가를 진정으로 소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평가를 진정으로 소중히 여기셨기 때문에 “ 나는 너희가 인정을 하던 하지 않던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는다.”(요5:41)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을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였으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오직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 2:4)
그런데 이것은 믿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대부부의 성도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려면 하나님만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믿고 다른 사람이나 수단이나 환경을 믿으면 그것은 실제로는 전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그 다른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빌립보서 3장에 나오는 할레당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할레도 믿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할레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선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개들이요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강력하게 성토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되 자기가 원하는 만큼 사랑하고, 하나님의 통치권에 순복하되 자기 생각에 좋게 보이는 부분만 순복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되 다른 것을 겸하여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3. 하나님을 의지 하되 부분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전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다른 것을 동시에 의지하는 것은 전혀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오직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감옥에서 나갈 것을 기다린 나머지 술맏은 환관장에게 ‘나를 기억하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봉사와 헌신과 구제가 있어도,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비록 자신들 스스로는 믿음이 있다고 여겼을지라도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잘못된 믿음 즉 그릇된 믿음의 이해 때문에 생겨난 현상입니다. 자기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되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삶을 살려면 반드시 믿음이 요구됩니다.
4. 믿음은 매번 새롭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 때마다 새롭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리하며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한 번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했다고 해서 그것이 지속적으로 지속되지 않습니다. 다음 순간 하나님의 인도에 전적으로 순복하려면 우리는 또 다시 그 때까지의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이제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요단강의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강에 들어가서 서 있으라고 하여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였다. "이 곳으로 와서, 주 당신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여호수아가 말을 계속하였다. "이제 이루어질 이 일을 보고, 당신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당신들 가운데 계셔서,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히위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기르가스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당신들 앞에서 쫓아내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온 땅의 주권자이신 주님의 언약궤가 당신들 앞에서 요단 강을 건널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각 지파마다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뽑으십시오. 온 땅의 주권자이신 주님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강 물에 닿으면, 요단 강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줄기가 끊기고, 둑이 생기어 물이 고일 것입니다."” (새번역, 여호수아 3:8-1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여호수아에게 명한 명령은 8절의 말씀과 같이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는 겁니다.
또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시한 방법은 도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두 차례 모두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신실하신 하나님께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순종했습니다. 만약 그 일에서 실패한다면 그것은 여호수아에게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백성들 앞에서 망신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모든 지도력을 잃게 되고, 백성들의 희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여호수아가 가진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약속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알았기에 신실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고 그분의 인도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여리고성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여호수아는 바로 얼마 전에 요단강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앞에 섰을 때 그는 또 다시 그 때까지의 그의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 앞에 새롭게 서야 했습니다. 얼마 전의 승리가 이번의 승리를 전혀 보장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번 싸움에서 실패한다면 이전의 승리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에 의한 삶은 매번 새롭게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고 서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믿음에 의한 삶을 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부분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대단한 영적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쉬운 길을 택하기 원합니다. 예측 가능한 길을 택하기 원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서기보다는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을 의지합니다.
구체적으로 믿음에 의한 삶을 어떻게 살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잘 알지도 못하는데(지식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닌), “아! 믿음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하며, 흉내 내면 망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믿음이 아닌 것을 깨달았으니, 오늘부터라도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찾아야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함 관계가운데 있으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통치하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종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시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따라올 수 있도록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 얻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얻을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주도권을 가지시고 성령님을 통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십니다. 모세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목적을 알리시고, 모세를 그 일로 초청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그 일은 하나님의 자원과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꿔 말해서, 모세 편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따라올 수 있도록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모세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모습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출 3:6).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 3:14-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신 것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신 하나님의 일(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시는 일), 그 모든 약속들을(큰 민족을 이루고, 천하 만민이 그를 통해 복을 받게 될 것을 포함하여) 이루실 분으로 자신을 모세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계시하신 것은 스스로 존재하시고, 유일하시며, 초월적인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언약의 백성들과 늘 함께하실 분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늘 그들과 함께 하셔서 그들을 구속하시고(출20:2), 그들을 용서하실 뿐 아니라(출 34:6), 그들을 도와서 그 일을 이루실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면서 모세와 함께 하시며 도우시겠다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십니다(출 3:12; 4:12,15).
심지어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신 증거로 주신 것이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 3:12)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주도권을 가지시고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십니다.
우리 편에서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도권을 가지시고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도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항상 간절히 찾고 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 부분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9).
“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실 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대하 15:2).
믿음을 이론적으로 알고 있다고 해서 믿음을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론은 실제가 아닙니다. 본질이신 인격체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임하실 때 그것이 실제가 됩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는 것과 믿음에 의한 삶
“바로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고개를 들고 보니,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추격하여 오고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크게 두려워하며, 주님께 부르짖었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말하였다. "이집트에는 묘 자리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에다 끌어내어 죽이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여기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하다니,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십니까? 이집트에 있을 때에, 우리가 이미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광야에 나가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더 나으니,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세가 백성에게 대답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가만히 서서, 주님께서 오늘 당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지켜보기만 하십시오. 당신들이 오늘 보는 이 이집트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구하여 주시려고 싸우실 것이니, 당신들은 진정하십시오." (새번역, 출14:10-14 )
오늘 홍해 앞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서로 정 반대의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차이가 어디에 있느냐하면, 바로 하나님과 친밀함의 차이입니다.
1절에서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올 것과 하나님께서 그 군대로 영광을 받으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 상항에서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친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행하심도, 하나님의 의도도 전혀 알지 못했던 겁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리로 인도하셨는지,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눈에 보이는 환경뿐이었습니다. 그 환경은 한마디로 절망적이었습니다. 때문에 원망과 불평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불평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백성들을 향하여 나를 불신했다, 하나님을 대적했다, 악심을 품었다, 하나님을 배반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믿음에 의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는 것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지 않고는 성경이 말한 믿음에 의한 삶은 사는 건 불가능합니다.
1. 먼저 우리의 신앙에 대하여
우리가 믿음에 의한 삶을 살려면 먼저 성경이 말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게 고 그럴 때 믿음으로 순종하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는데 신앙에 대한 이해부터 달리하고 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에 의한 삶은 우리의 신앙이 올바르지 않으면 절대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의한 삶은 우리가 한 부분을 배우서 믿음에 의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신앙생활로 우리의 신앙이 전환될 때 믿음에 의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믿음의 의한 삶이 가능한 이유는 믿음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 잘 배워서가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서 믿음의 삶 이전에 성경이 말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믿음의 삶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먼저 신앙이 무엇인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신앙은 크게 두 가지인데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1)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영역에서 통치하는 것. =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
2) 앞서가시는 주님을 따라가는 것. (온전한 순종이 필요. 전적인 신뢰가 필요.)
이러한 신앙을 살아갈 때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는 말씀처럼 생명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도우심, 임재, 지키심, 능력…….하나님의 모든 생명이 성경이 말한 신앙생활을 해나갈 때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제 주일성수, 십일조, 예배, 헌금, 기관이나 위원회 봉사 등등, 이 모든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고 종교생활입니다. 종교생활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생활을 잘하는 것이 신앙생활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위한 수단입니다.
우리가 결혼해서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옷을 다리고, 시장을 보고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혼생활은 아닙니다. 결혼생활을 위한 수단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입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 지식이나 교리적 지식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내 개인적으로 실제적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포함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인격체 이신 하나님을 나의 전 존재로 사랑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떨어질 수 없이 연관되어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요 목적아 되는 것입니다.
호세아서를 보면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아침안개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안개가 끼면 온 대지에 가득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의식은 그렇게 많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조금만 어려우면 이네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사랑하였다는 겁니다.
얼마만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얼마나 세상을 사랑했는지 창녀 고멜로 비유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남편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네 다른 남자를 좇아 바람을 피우는 시대라고 말합니다.
이 시대의 살길이 무엇이었습니까?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는 것 =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 하나님을 아는 것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다윗의 유일한 목표는 하나님의 전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유일한 목표도 예수님이 돌아가신 십자가를 아는 것이었고 , 예수님을 아는 것이 가장 고귀해서 다른 모든 것은 배설물로 여기는 삶을 살았던 것처럼,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내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2.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면 하나님이 앞서 가심을 보이십니다. 이때 믿음으로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앞서가신 주님을 따라 가려면 온전한 순종과 전적인 신뢰가 있어야합니다. 여기서 믿음이 나옵니다. 즉 우리가 주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거할 때 하나님께서 앞서 가심을 우리에게 보고시고 그때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때 거기에 믿음에 의한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서 응답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경이 말한 믿음에 의한 삶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특히 모세와 같은 상황에서는 더욱 가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믿음에 의한 삶을 살려면 성경이 말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무언가를 했는데 안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확신이었던지, 자기 스스로 움직였던지, 하나님의 때가 아닌데 자기가 앞서갔던 지입니다.
성경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라고 하였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보는 것만큼 확실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믿음에 의한 삶을 배우려면 믿음에 의한 삶에 초점이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믿~습니다.”하고 시작하는데,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만 뒷받침하십니다. 하나님의 행하심, 인도하심 가운데 있게 될 때 하나님의 뒷받침하십니다. 따라서 믿음과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는 것은 나누어 질 수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는 것이 바로 비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 못하면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열심히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마치 태평양 한 가운데서 열심히 풍랑을 헤치며 가기는 가는데 어디로 가는지 전혀 모름, 목표가 없으니…….
잔 렉스웰은 이러한 자를 가리켜 방랑자라고 불렀습니다.
비전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는 것이 비전인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께로 몰려드는 자들을 바라보시며 목자 없이 유리방황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얼마나 목자가 많았습니까? 그런데 목자가 없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리고 인도하는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목표가 있었습니다.(빌3:7-14) 나의 원하는 한 가지는 예수님을 더 알기 원함이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구하면 주님이 행하심을 보이십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보이신 것이 무엇입니까? 이방인의 사도, 터를 닦는 자, 이것이 바울이 있어야 할 자리였던 겁니다. 바울은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내가 왜 태어났는지, 나의 존재의 이유가 무엇인지, 어디에 있기를 원하는지, 이 모든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이 바울 개인적 비전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흉내 낸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 있어서 푯대였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나갈 방향이었습니다.
바울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사랑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 토대위에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가를 알았습니다. 이것을 알고 그 가운데 행하게 될 때 하나님의 뒷받침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일성수, 예배, 헌금……. 이 모든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생활이 아니고 종교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물을 담기 위한 컵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원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적, 목표인 삶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의 얼굴을 보기 원하고, 주님의 의도와 의중을 알기 원하고, 그분이 계신 곳에 같이 있기를 원하고, 그분의 열망이 나의 열망이 되길 원하고, 그분의 능력을 알기 원하고, 그분의 기뻐하시는 것이 나의 기뻐하는 것이 되길 원하고, 그분의 고난에 나 또한 동참하길 원하고, 그분의 일에 자신의 삶을 기꺼이 드리기를 원해서 주님만이 자기의 유일한 목표요 목적이 되는 삶을 살 때 이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행하심을 보이십니다. 나를 부르신 소망을 보이십니다.
주님 그분만을 구하는 만큼 더 또렷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영광을 보며 주님을 아는 것이 우일한 목적이요 목표이며 주님이 계신 곳에 같이 있길 원하며, 주님의 열망이 나의 열망이 되고, 주님이 추구하는 바를 자기도 추구하길 원하며 그렇게 주님을 구하면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이 보여집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은 내 문제 해결과 자기목적 이룸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개인이나, 교회가 이처럼 신앙의 본질로 돌아갈 때, 하나님의 행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어디로 부르셨는지. 무엇을 위해 태어나게 하셨는지, 무엇을 위해 교회를 세우셨는지, 무엇을 위해 이곳에 보내셨는지, 오게 하셨는지, 지금까지 인도해 오셨는지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푯대요 이때 믿음으로 동참하는 것이 믿음에 의한 삶인 것입니다. 이때 이것은 우리가 시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성경이 말씀하신 그대로의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앞서가면서 주님을 끌고 가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앞서 가실 때 그 앞서가신 주님을 따라갈 때 믿음이 필요합니다.
왜? 하나님의 사이즈는 우리 사이즈와 다르기 때문, 믿음은 나의 사이즈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이즈입니다. 하나님의 자원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분이 역사하실 때 우리가 믿음으로 동참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정리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저를 위해서 시작한 일입니다.
카페 회원들이 하나님의 기준위에 영적인 자극이 될 수 있다면, 이 글이 유익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저 혼자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기준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좋은 충고와 가르침이 이 글을 더욱 알차게 할 것 같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댓글 등을 통해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위 내용을 정리하면서 지속적으로 조금씩 내용이 발전하고 다듬어 질 것을 소망합니다.
김바울 선교사 // 다음카페 // 빛과 흑암의 역사 http://cafe.daum.net/aspire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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