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살았던 시대는 춘추시대(B.C 722~481)로 이때는 이미 제철기술의 발달로 농기구 수공구 등 일반적인 생산용구들이 철제품으로 사용되어 농업과 수공업이 커다란 발전을 이룩하고 있었다. 농업과 수공업의 발달에 따라 상업도 발달하여 사회 경제의 급격한 발전과 아울러 사회 전체에 커다란 변혁이 일어나고 주나라의 봉건제도는 서서히 붕괴하게 되었다. 크고 작은 제후국가들은 명목상으로는 주나라 천자의 속국이었으나 실제로 는 자주적 또는 반자주적인 독립국이었다. 사회 경제의 발달과 함께 각국의 귀족들은 서로 토지를 탈취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고 이러한 전쟁으로 많은 나라가 멸망하고 많은 귀족들이 몰락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천인으로부터 해방된 자나 몰락한 귀족이나 하층 귀족출신들이 서서히 士라는 사회 계층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士계층은 빈번한 전쟁 속에서 군사 외교 정치 활동을 통 하여 널리 그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포착하였다. 그들은 당시 사회변혁의 시세에 적응하면서 사회변혁의 추진작용을 수행하였다.
공자는 인본주의적이며 새로운 사회제도 확립을 위하여 고대의 전통문화를 정리 비판 개조하여 신체계를 수립하려는 당시의 일부 진보적 지식계층의 대변자이었다. 그 이전 시대에 문화는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으나 격심한 사회변동이 일어나자 이러한 문화 독점현상은 변화가 요구되어지고 몰락귀족과 하층 귀족출신은 이러한 변화의 교량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들은 문화 학술 및 각 방면의 지식을 습득하려는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여 개인적으로 학생을 가르치고 문화를 전수하는 새로운 교육제도를 창시하였는데 공자는 이러한 사회적 조건하에서 태어난 탁월한 교육자였다.
공자사상의 근본적인 이념은 먼저 전통의 재인식이었다. 즉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서 이상적 사회를 찾아내고 그러한 사회를 건설할 새로운 철학을 세우는 것이었다. 모든 존재의 본질과 근원은 역사 속에서 추구되어야 한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살펴봄으로서 공자는 현재의 선악을 구별할 수 있었으며 과거의 사실 중에서 기억해둘 가치가 있는 것과 피해야 할 것을 찾아내었으며 이러한 역사관은 자연히 비판적인 역사관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과거와 외형적으로 동일한 체제를 세움으로서 선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단순한 과거의 모방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의 반복을 도모하였다. 영원한 개념은 과거 속에 명료하게 나타나며 공자는 과거를 조명함으로서 어두운 현재에 빛을 가져오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공자야말로 영원한 진리의 전통에서 나온 새로움을 삶의 본질로 여긴 최초의 철학자였다.
진리가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서 발견될 수 있다면 과거를 연구하여야 하고 과거를 연구함에는 선악을 구별하여야 한다. 이러한 구별은 단순한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옛 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려는 진정한 마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溫故而知新) 그러면 공자가 역사적 사실에서 찾아낸 새로운 철학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첫째로 당시까지는 일반적으로 평민층보다 높은 계층에 속했던 조상의 후예와 명문출신의 사람을 가리키던 君子라는 말을 선과 진리와 미를 다 같이 갖춘 이상적인 인간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출생과 관계없이 군자가 될 수 있다고 믿어 신분에 관계없이 사람들을 제자로 받아들였다.(有敎無類) 그러나 그들의 지적능력에 대하여는 매우 엄격하였다. 공자는 말하기를 스스로 하고자 하지 않으면 알려주지 않으며 깨달은 이치를 표현하고자 하지 않으면 펴주지 아니하며 한모퉁이를 들어보여서 세 모퉁이를 알아내지 못하면 반복하여 가르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不憤不啓 不비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
그는 군자의 성격 사고형태 및 거동을 소인과 비교하여 기술하기를 군자는 정의를 추구하고 소인은 이익을 추구하며 (君子喩 於義 小人喩於利) 군자의 마음은 언제나 조용하면서도 넓지만 소인의 마음은 언제나 불안에 쌓여있다.(君子단蕩蕩 小人長戚戚) 군자는 교만하지 않으면서도 위엄이 있고 소인은 위엄이 없으면서도 교만하다.(君子泰而不驕 小人驕而不泰) 군자는 슬픈 일을 당해도 자제할 줄 알지만 소인은 조그만 슬픈 일에도 자제심을 잃는다. 군자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하지만 소인은 언제나 남에게서 구하려고 한다.(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 군자는 남에게 의지하지 않으며 영화뿐만 아니라 불행도 잘 참으며 두려움 없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자신의 무능을 탓하지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人不知而不온 不亦君子,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군자는 말이 행위를 앞서는 것을 삼가기 때문에 언제나 먼저 행하고 행동에 따라서 말을 한다.(先行 其言 而後從之)
둘째로 공자는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당시의 어지러운 사회를 버리고 자신의 깨끗한 삶만을 추구하는 은둔자들처럼 은자의 길을 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개조하려고 노력을 할 것인가 하는 선택에서 단연코 후자를 택하였다.(鳥獸不可與同群 吾非斯 人之徒與而誰與 天下有道 丘不與易也) 그리하여 그는 사회변혁과 질서유지의 수단으로서 예를 중시하게 되었다. 예는 관습에 의하여 보존되고 관습은 집단 전체의 영혼을 창조하고 또 관습은 집단 전체의 영혼으로부터 그 생명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 시 말하면 관습에 대한 교육을 통하여 인간은 보편적인 것을 발견하고 보편적인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가 있다. 그러나 공자는 지금까지 타율적으로 행하여지기를 강요되었던 예에서 보편성의 근거를 인간에서 발견하고 인간의 자아에 내재하여 있는 도덕률을 자각하여 바야흐로 그 사상의 기초를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데 두었던 것이다.(天命之謂性) 공자는 인간의 본성을 仁이라고 하다. 仁은 인간성이며 도덕성이다. 仁이라는 글자는 원래 二人의 합자로서 사람의 기본적인 존재구조인 너와 나라는 인간 관계를 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본성을 첫째로 인간이 무엇이며 또 인간이 무엇이어야 하는 사실성과 당위성의 문제로 토론하고 둘째로는 인간존재의 다양성의 문제로서 토론을 한다.
첫째로 인간은 되어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동물과 같이 이미 완성된 존재가 아니고 의식적인 사고를 무시하고 본능적으로 사 는 존재가 아니라 삶을 적극적으로 추구하여 본능을 초월한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여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욕망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 동시에 이 본능적인 욕망을 극복하고 일반적으로 요구되어지는 예를 실행하여야 한다.(克己復禮) 그러나 이 예는 인간을 구속하고 질곡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내재하여 있는 도덕률의 자발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먼길을 가려는 사람이 자동차나 기차나 비행기를 이용하면 훨씬 편하고 빨리 갈 수 있듯이 오히려 인간을 편하고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리 하여 예를 바르게 실행하기 위하여 예 실현의 도구로서 형식을 익혀야 하며 예 실현의 주체로서 개인의 수양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한다.
둘째로 인간의 본성은 실제적인 인간존재에 있어서 여러가지로 나타난다. 모든 인간이 본질적인 면에서 선을 지향하고 있다 는 점에서는 서로 비슷하나 개인의 습관 성격 연령 발전단계 지식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다.(性相近 習相遠) 연령의 차이에 대하여 공자는 젊을 때는 혈기가 안정되지 않아서 여색을 경계해야 하며 장년에는 혈기가 왕성하기 때문에 싸움을 경계하여야 하고 늙어서는 혈기가 쇠하였기 때문에 탐욕을 경계하여야 한다고 하 였다. (君子有三戒 小之時血氣未定戒之在色 及㏃壯也血氣方剛戒 之在鬪 及其老也血氣旣衰戒之在得) 그리고 공자는 인간을 네 가지의 유형으로 구별하였다. 첫째로 날 때부터 지식을 가지고 태어난 성인이 있고, 둘째는 배워서 지식을 얻는 사람이 있고, 세째는 배우는데 어려움을 느끼지만 계속하여 노력하는 사람이고, 네째는 배우기가 어렵기 때문에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다.(生而知之 學而知之 困而學之 困而不學) 이중에서 둘째 세째 사람은 실패를 할지 모르지만 계속하여 노력하는 사람이고 네째의 사람은 자만하여 배우지 않거나 스스로 용기를 잃어 노력을 포기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自暴自棄)
세째로 공자사상의 또 하나 중요한 개념은 道라는 개념이다. 그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朝聞道夕死 可矣)고 할 정도로 도를 절실하게 갈구하였다. 그러나 이 도는 과거에는 구체적인 일상용어로 사용되었던 것을 공자에 의하여 원리적인 의미로 전환이 된 것으로서 인간의 내면성을 탐구할 때 보이지 않는 궁극적인 신념과 모든 행위에 있어 기본이 되는 준칙이며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생명까지 바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그것은 모든 원리의 원리요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그러나 공자는 관념적인 사색보다도 실지로 우리가 생활하는 현실의 토대 위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실천적인 것을 문제삼았기 때문에 형 이상학적인 이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평범한 가운데 일상행동에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인간이 살아나가야 하는 길인 人道를 사상의 중심과제로써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귀신을 섬기는 방법을 묻는 제자에게 사람도 능히 섬기지 못하는데 어떻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으며 죽음을 물으니 삶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귀신이나 죽음에 대한 그의 이러한 태도는 경험세계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그러한 문제는 엄밀한 의미에서 객관적으로 고찰할 수 없다는 것이고, 또 알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막연한 상상으로 표현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이러한 생각은 당시의 봉건제후들이 하늘에 있으면서 후손들의 운명을 감찰하는 그들의 조상들의 힘을 입어 통치한다는 종교적 권위와 특권에 대한 간접적인 부정이며 그 대신 그는 통치의 자격을 출생의 신분과는 관계없이 인품과 역량과 학식의 함수관계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자사상은 당시의 시대사조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아주 혁신적인 것이며 권세가들에게는 자신들의 신성한 지위를 위협하는 사상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공자는 어떠한 통치자와도 타협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아주 짧은 기간만을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자신의 포부를 생전에 실현하는 데는 실패한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교육에 몸을 바치게 되었고 그의 사상을 제자들에게 전하는데 전념을 하였다. 그 결과 그는 실패한 생애를 보냈지만 그의 사상을 길이 후세에 남겨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는 당시의 어느 누구보다도 공자의 이름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