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친밀함은 물론이거니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차단하는 것이 죄입니다.
죄는 마귀에게는 우리를 괴롭힐 수 있는 발판은 제공하는 것이며, 하나님과는 단절을 만드는 장애물이 됩니다.
이 죄는 우리가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죄 속에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많은 성도들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죄의 처리에 대해서 너무도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를 고백하면 주님은 미쁘시기 때문에 용서해주십니다”(요일 1:9). 죄는 고백으로 처리가 됩니다.
성경은 수 많은 곳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마 3:6, 약 5:6, 시 32:5, 레 5:5, 느 9:2, 에 10:2, 잠 28:13, 시 32:3 등).
죄는 원칙적으로 고백함으로써 사함을 받습니다. 그
러나 이 고백이라는 수단이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먼저 알아야 합니다.
죄의 처리에 대한 절차와 방법에 대한 자세한 조건들을 기록한 성경이 레위기입니다.
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처리하는 절차와 조건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기록하고 있는 레위기를 통해서 우리는 죄를 처리하는 방법의 다양함과 죄의 종류에 따른 처리 방법이 다름을 알게 됩니다.
신약을 사는 우리에게는 그 방법들이 이제는 별로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제사의식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며, 죄를 처리해줄 제사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기가 우리에게 여전히 존재하는 까닭은 죄의 처리에 대한 기본 정신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께서 피흘림으로써 더 이상의 희생제는 의미가 없으며 그리고 외형적인 형식은 예수로 대치되었고
믿음으로 변환되었지만 그 정신은 그대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십일조는 폐지되었지만 의와 신의 십일조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며, 구약의 산술적 십일조보다 더 강도가 높게 우리 가진 것 모두를 드려야 하는 의와 신의 십일조가 우리에게 요구되었듯이 죄의 처리를 위한 짐승의 희생은 더 이상 의미가 없지만 예수의 피값으로 치러지는 대속하심 속에는 우리가 예수를 위해서 그 분이 요구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는 “희생의 삶”이 따라야 하고 짐승을 잡는 단순한 희생제보다 더 강도 높게 자신의 삶을 희생시켜야 하는 요구 앞에 우리는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죄의 처리는 단순히 대속하는 희생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유지해야 하는 자신을 드리는 “산 제사”가 따라야만 그 효력을 얻게 되는 더욱 힘들고 어려운 조건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입술로 고백하면 죄가 사함을 받는다는 말씀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병 들었을 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막 16:18)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여러분이 환부에 손을 얹었는데 그 병이 낫습니까? 아닙니다. 단순한 이 말씀대로 손을 얹고 기도한다고 해서 병이 낫는 것이 아닙니다. “믿기만 하면 낫는다”고 말씀하시지만 병든 사람이 병이 나을 것을 믿어도 낫지 않습니다. 병이 치유함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살펴야 할 부분이 너무도 많고 복잡합니다. 단순한 병조차도 치유를 받으려면 절대로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그 병을 주님에게 가져 오지 않고 먼저 병원을 찾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주님에게 병을 치유 받는다는 것이 결코 말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을 병이 들어 의사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을 때에만 죽을 힘을 다해서 주님에게 매달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병이 다 낫는 것도 아니지만 다른 수단이 없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병을 치유하는 문제 역시 단순하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일도 그렇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며”(행 19:13)라는 말씀 역시 단순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일은 진리이지만 여기에도 너무도 복잡한 원리와 조건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귀신을 쫓는 일이 단순하지 않으며 복잡한 원리들을 알아야 하고 상황과 조건들에 대한 면밀한 연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경험이 필요하고 숙달된 기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말처럼 그렇게 쉽게 귀신을 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듯이 모든 말씀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까지 넘어야 할 구체적인 조건과 지식들이 많은 것입니다.
죄의 처리 역시 그렇습니다.
단순히 죄를 고백하면 죄가 처리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죄를 처리하는 문제 역시 복잡한 원리를 포함하고 있음을 우선 이해해야 하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죄의 처리를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에 있는 제사장을 찾아야 했고, 죄의 종류에 따라서 희생을 드릴 제물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여기에는 까다로운 주문이 있었습니다. 이런 조건들을 제대로 갖추고나서 제사장이 절차에 따라서 처리할 때에만 죄가 사함을 받았습니다. 신약을 사는 우리에게는 죄의 처리에 대한 조건이 성경 어느 곳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조건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조건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것입니다.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병마다 해야 하는 조건이 다릅니다. 단순히 믿음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병이 낫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현실에서 잘 알고 있듯이 말입니다.
치유 사역을 오래 행한 저의 경험으로 보아도 사람마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조건이 다양합니다.
이 조건들이 충족되었을 때 치유의 효과가 나타납니다.
때로는 금식해야 하고 때로는 작정해야 하며, 때로는 중보기도해야 하는 등의 여러 가지 요구되는 조건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주의 영광을 위해서 군중 집회를 찾아가야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병마다 지니는 다양한 조건과 그에 따른 치유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과 지식의 말씀이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죄의 처리 역시 이런 조건들이 있습니다.
죄의 처리는 기본적으로 입술로 고백해야만 합니다.
그 고백이 진실한 것임을 입증할 수 있는 조건들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때로는 여러 날 애통해야만 하기도 하고, 때로는 금식해야만 하기도 하고, 때로는 상대방을 찾아가 용서를 빌어야만 하고, 때로는 손해를 배상해 주어야만 하며, 때로는 오랜 기간 동안 죄를 묵상하면서 그로 인해서 해를 입은 자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드려야 하며, 때로는 죄로 인한 악습을 인내하면서 단절해야 하는 등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실제적 조건들이 앞에 놓여 있으며, 주님이 원하는 수준의 강도로 회개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죄는 용서되지 않은 체로 그대로 남아 있어서 자신을 괴롭히는 올무가 되는 것입니다.
죄의 처리는 주님이 원하는 방법과 수준으로 행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어려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릴 때도 역시 주님이 원하시는 수준으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의와 신의 십일조”라는 더 깊은 헌신을 필요로 하는 조건 앞에 놓여있습니다.
신약의 “믿음의 원리”는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절대로 알 수도 없고 이룰 수도 없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심은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필수적이며 생략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성령을 떠나서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령을 대신하는 것들로 우리의 삶을 채우려고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보다는 더 쉬운 교리의 인도를 받으려고 하고 제도와 법으로 이를 대신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어려서 성령의 인도하심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지도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사람의 도움과 법과 제도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스스로 성령의 인도하시는 손길을 의식하고 그 말씀하시는 다양한 기술적 방법들을 익혔다면 스스로 주님 앞에 서서 그 인도하심을 받아야만 합니다.
지도자는 미숙한 성도들을 이런 부분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도와야 하며 성숙하면 스스로 주님 앞에 서서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일깨워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언제까지나 젖만 먹을 수 없으며, 언제까지 지도자의 도움만 받는 어린 아이로 남아있을 수만 없는 것이 아닙니까?
죄의 처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그 방법과 절차를 깨닫고 그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는 절대로 처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죄가 처리되지 않으면 마귀에게 발판이 제공되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혼잡해집니다.
성령의 생각보다는 마귀의 유혹에 시달리게 되고 그것이 깊어지면 어려운 문제가 생기고 질병에 걸리게 되며, 불행한 일이 생기며 마음은 갈등으로 인해서 괴로움을 당합니다. 생각이 어수선하고 마음의 갈등이 생기며, 주님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마귀의 방해를 받게 되기 때문에 생각이 단순하지 못하고 복잡해지며 갈등이 생깁니다.
마귀의 유혹으로 인해서 마음 속은 전쟁판이 되어 괴로움을 당하게 되는 것이지요.
죄의 처리는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죄를 주님 앞에 내어놓고 그 처리를 성령님께 의뢰하십시오.
먼저 자신의 죄가 떠오르게 해 주시기를 성령님께 구하십시오.
이 부분은 간절한 마음과 죄를 처리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절박한 심령으로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건성으로 의례적이고 습관적인 마음으로는 절대로 죄의 처리가 되지 않습니다.
간절함과 절실함이 있는 산 제사를 드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하게 구하십시오.
인내를 가지고 성령이 임하실 때까지 부르짖으면서 기다리십시오.
여러분이 간절한 만큼 주님은 여러분을 찾아오실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임하면 우리는 자신이 알지도 못했던 죄를 고백하게 되며 그 처리를 위해서 자신이 해야 할 지식의 말씀이 머리 속에 또는 가슴 속에 스며들 것입니다.
주님이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강력한 느낌이 자신의 심령 속에 스며들 때에야 비로소 죄가 용서된 것입니다.
용서 받기 위한 조건들이 주어지면 그 것을 행해야만 합니다.
화해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면 찾아가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죄의 용서에 대한 효과가 나타납니다.
죄를 용서 받았지만 그 효력이 나타나기까지는 그 죄에 의해서 생긴 악습을 제거하는 피나는 노력이 따라주어야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이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느낌이 들어 감사하고 만다면 그 죄의 효과는 들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라는 주님의 구속 원리를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이 죄를 용서했지만 그 효과는 아직 아니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결혼식을 했지만 법적으로는 아직 부부가 아닙니다.
혼인신고를 마쳐야만 부부로서의 효력이 나타나는 것처럼 주님이 죄를 용서해주셨지만 그 효력을 얻기까지 치러야 할 조건들을 성실하게 행하였을 때 죄의 처리에 대한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효과가 있어야 그 다음 그와 같은 죄를 짖지 않게 됩니다.
죄의 처리가 완벽하게 되면 주님은 우리의 환경을 바꾸어주시어 그런 죄에 다시 물들지 않도록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돕는 천사를 보내주셔서 죄의 유혹을 막아주며, 죄의 유인자를 제거해주십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그와 같은 죄의 올무에 걸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처리된 죄 처리의 효과입니다. 그러나 죄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우리는 머지 않아 다시 그 죄를 반복하게 됩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 죄가 주님에게서 완전하게 처리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완전한 처리는 다시는 그 죄가 생각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죄의 유혹을 받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그 죄를 다시 반복하는 일이 절대로 없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완전한 처리는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의 처리를 제대로 행할 때 우리는 죄를 이기는 힘을 주님으로부터 얻게 됩니다.
죄가 더 이상 우리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죄의 처리의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죄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동일한 죄를 거듭 반복하면서 죄를 처리했다는 속임수에
말려듭니다.
하나님의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어물쩡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이며 자세하고 면밀합니다.
우주를 이처럼 정교하게 창조하신 분이 대충 넘어가는 일을 허락하시겠습니까?
영의 일을 전문으로 오래 사역해오면서 느낀 점이 이것입니다.
주님은 너무도 세밀하게 우리를 다루어가시는데 우리는 너무도 주님을 대충 알려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너무도 건성으로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우리의 태도를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는 무지 속에 있습니다.
2000년 동안 교회는 이제 겨우 그리스도론의 틀 하나를 만들어냈을 뿐입니다.
성령론은 그 곁에도 제대로 가지 못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만 해도 우리는 초보적 수준에 머물러 있고, 신유, 축사, 예언, 영분별 등 다양한 성령의 직임들에 대해서 솔직히 무지의 수준입니다. 교회가 이 부분에 대한 신학적 고찰을 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2000년 동안 해 온 것이라고는 고작 조직 신학의 틀을 갖추는 일에만 매달렸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틀을 벗어나 본질에 접근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젊고 학구적인 지도자들이 성령의 본질에 접근해서 구체적인 각론을 쓰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죄의 처리만 해도 우리는 원론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보다 구체적인 각론들을 만들어내야 하는 절박한 과제 앞에 서 있습니다. 죄의 처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막연한 것이 아니며 대충 넘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면밀하고 세부적인 요소들이 그 속에 있습니다. “입술로 고백하는 죄의 고백” 속에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세밀한 부분들이 감추어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젊은 세대들이 풀어가야 할 숙제입니다.
이제 이 부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다루어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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