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학 -강웅산 교수
<1>
고전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복음을 전할 때 심한 저항과 거부가 있다.
거리끼는 것. 걸려 넘어뜨리는 돌부리 같은 것.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리스도가 걸려 넘어뜨리는 돌부리가 된다.
세상에 그리스도를 가져가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걸려 넘어지는 현상이 이루어져지고 무너져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티며 심하게 거부한다.
세상의 저항에 대하여 타협하는 자들이 생긴다. 그리고 넘어지는 일이 생기지 않게 된다. 깨지지 않고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어떻게 그리스도를 가져가야 하는가? 방법론의 문제.
우리의 방법론은 타협의 방법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이 과정의 목표이다. 타협 없이 그리스도, 말씀을 세상에 제대로 전달하여 세상이 걸려 넘어져 깨지도록 하는 작업.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말씀을 알아야 한다. 모든 신학은 말씀에 집중되고 근거되어 있다. 그리고 실천적인 데에 방향을 두고 있다. 모든 신학은 이론신학이며 동시에 실천신학이다. 이론을 위한 이론 탐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변증학은 기독교 철학이 아니다. 이 변증학은 이론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천적인 학문이다. 변증의 상황에 필요한 학문이다.
말씀은 변하지 않지만, 세상은 변한다.
언어소통이 되어야 한다.
언어라는 매체로 세상에게 말씀을 전한다.
언어는 시간과 관계되어 있다. 언어는 시간의 언어이다. 언어는 그 시대의 언어이다.
우리의 방법론은 통용되는 시간의 언어를 찾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자칫 타협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시간의 언어를 깨고 들어가서 변화지 않는 말씀을 제대로 세상에 제대로 전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목표하는 바이다.
우리는 말씀과 그 수신자인 세상에 대해서 부단히 연구해야 한다.
변하는 대상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노력.
<2>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할 때 충돌이 된다. 두 개의 세계관이 만나는 것은 충돌이 된다. 질적인 차이가 있기에 충돌이 된다. 세계관은 사고의 틀이다. 모든 사람은 세계관이 형성되어있다. 세계관에서 가치판단이 나온다. 세계관은 존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세계관은 신앙과 관련이 깊다.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만들어진 세계관이 세상의 세계관을 깨고 들어가야 한다. 시간의 언어로 들어간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전도이다.
전도의 현장에서도 신관에 대한 충돌이 있다.
우리의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시다. 자족, 자존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창조하셨고, 섭리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은 하나님을 전제하고 시작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전제한다.
태초란 창조가 없고 하나님께서만 계실 때이다. ex nihilo. 교부들의 말이라고 해서 절대적으로 수용할 필요는 없고 비판하고 수용해야 한다. 큰 빈방에 하나님만 계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nothing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보기 때문이다. 태초란 nothing 조차도 없었을 때이다. 하나님만 계셨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기 위해서 nothing이 배경이 될 필요가 없다. 여기서 전제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창조가 있는 것이다. ex nihilo는 질료가 없다는 의미일 뿐이다. 사실은 유에서 유가 나온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창조가 나온 것이다.
없다라는 것, 무 라는 것 자체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 유의 반대의미일 뿐이다. nothing은 thing에 대한 부정일 뿐이다. 아무것도 없는데 하나님만 계신다라는 말이 성립이 안 된다. 이것은 있는 것에 대한 부정일 뿐이다. 피조물 없이 자존하시고 자족하신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셨다. 하나님과 피조물은 구분된다.
(성경의) 하나님
창조 섭리
피조물
나(피조물)의 확대와 확장는 우주 = 신 -> 범신론(pantheism). 내재신관. 신이 나를 포함한 존재 공관에 일치되는 것.
나의 부정과 축소는 신이라는 개념만 남지 아무것도 없다. empty 이것이 이신론이다(deism). 초월신관. 나로부터 이탈해 있는 신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초월과 내재의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신관은 합쳐질 수가 없다. 내재와 초월의 양 극단에 있다. 하나의 원 속에 있다. 나라고 하는 원 속에서 얼마나 확대했느냐의 차이지 한 원안에 있다.
세상의 신은 내가 만든 신이기에 나를 잘 이해한다. 나를 잘 동정한다. 왜냐하면 내가 그 신을 만들기 때문이다.
우주 = 신 -> 범신론pantheism), 내재신관
확대, 확장
나(피조물)
부정, 축소
신(개념) empty -> 이신론(deism) 초월신관
<3>
하나님은 누구신가?
존재론의 변화 -> 인식론의 변화 -> 윤리(삶)의 변화
creaturely reality 피조세계, 피조의 질서.
particular(개체) - universal(보편)
피조세계는 모순과 한계가 있다. 개체와 보편을 다 만족시키지 못한다. 개체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보편이 약화된다. 반면, 보편에 초점을 맞추면 개체가 희생된다. 이것이 피조세계이고 피조의 실재이다.
피조세계는 개체와 보편세계의 갈등가운데 있다. 개체를 안다는 것은 보편 속에서 개체를 알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이다. 그러나 그것이 보편의 끝이 아니다. 더 큰 보편이 있다. 또한 개체도 더 작은 개체로 나눠질 수 있다. 개체는 추상화와 절대화가 될 수 있다. 양 극단인 Being in general과 Prime matter가 될 수 있다(아리스토텔레스).
Absolute Personality(절대 인격)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이 절대이다. 절대란 다른 것을 통해서 상대적으로 이해되거나, 존재되는 것이 아닌 것이 아니다. 절대가 천지를 창조했다. 이 의미는 관계성의 의미, 즉 인격을 가지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자이면서 인격자, 즉 관계의 하나님이시다. 절대는 관계를 필요치 않는다. 관계를 한다면 절대가 아니다. 그러므로 절대와 인격은 서로 배타적이다. 절대 인격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Trinity (three persons in one being).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삼위일체 하나님은 존재, 본질, 속성에 있어서 같다.” 하나와 여럿의 문제. 개체와 보편의 문제. 근원과 답이 삼위일체에 있다. 삼위일체는 합리적 이성으로 수용가능한 문제가 아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인간의 모든 이해는 틀렸다. 삼위일체가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신비 그 차제이다. 이것이 피조 세계에 반영이 되어 있다. 이 세상에 개체와 보편의 문제가 상극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이 자체가 신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개체와 보편의 문제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과 속성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소화하지 못하는 것처럼 개체와 보편을 소화하지 못한다. 이것이 피조적 실재이다.
피조세계의 현상을 볼 때 존재론적인 특성과 한계를 보게 된다. 하나님께로 가야 답이 온다. 인식론의 답은 존재론에서 나온다. 삼위 일체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이 세상의 개체와 보편의 문제가 해결된다. 이것을 알아야 인식론 적인 전환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인식론적인 전환이 되어야 행동이 전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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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지식은 Analytical한 지식이다. 분석, 해석적 지식이다.
인간의 지식은 Analogical한 지식이다. 반영, 유추적 지식이다.
창세기 3:1~7. 이 본문은 해석학에 있어서 중요한 본문이다. 로마서 5장이나 고린도 전서 15장을 보면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시킨다.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가 언약신학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언약의 머리는 아담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두 번째 아담으로 말한다. 이렇게 결과에 대한 강조를 하다 보니 이 본문에 대한 인식론적인 의미에 대한 접근을 하지 못한다.
창세기 3:1~7을 통해 하나님의 지식과 사람의 지식이 어떻게 다른지 알게 된다.
Thinking after God's thought. 하나님의 사고를 따라 사고한다. 성경의 사고를 따라 사고한다. 신학의 훈련은 사고의 훈련을 포함한다. 단순한 논리의 훈련이 아니다. 스스로가 해석자가 되어서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과학적 사고라고 하여 우리는 교육받아 왔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하는 사고의 방법은 반영적 유추적 사고이다.
1차적 지식은 하나님만이 가능하다. 사람은 2차적 지식, 반영, 파생, 의존적 지식을 가질 뿐이다. 달이 태양의 빛을 반사하듯이.
창세기 3장을 이해하기 위해 전제가 되는 하나님의 지식이 있다.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할 때, 이것을 계명이라고 한다. 계명이라 할 때, 이것은 무언가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담이 이 열매를 먹는 것이 수고가 필요한 일인가? 이 열매는 덫인가? 아담은 타락하기 전 우리보다 의롭고 자유로운 존재였다. 의로운 아담에게 있어서 이 계명, 그 지식은 아담을 속박하고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이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에덴동산의 옥의 티가 아니다. 이 열매는 아담에게 귀찮은 존재가 아니라, 매우 좋은 것이었다. 타락 전 아담은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충분했다. 그러나 보다 더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상기시키는 장치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였다. 이 열매가 피조물과 창조자와의 다름과 관계를 나타냈다. 아담에게 모든 것이 허용되었지만, 하나님과 피조물은 다르다는 것은 망각하는 것을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열매의 존재가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배려의 장치가 이 열매이다.
하나님께서 이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셨지만, 뱀은 죽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지식을 부정한다. 그리고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 ”이라는 가상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아담은 이 열매를 먹는 것에 대해서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지식을 제시한다. 뱀은 실제가 아닌 것은 실제 인양 가상하고 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창조(일반계시) 외에 추가적으로 주신 계시는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외에는 없다. 뱀은 이 열매를 먹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 것처럼 부추긴다. 아담은 처음 듣는 애기를 들었다. 뱀은 하나님이 주신 지식에 종속이나 전제하거나 신앙하지 말고, 직접적, 객관적, 중립적으로 알아보라고 말한다. 주어진 지식이 아닌 직접 1차적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뱀의 논리이다. 이 열매를 먹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 결과이다. 이 열매를 먹는 것은 처음부터 제시된 조건이 아니다. 이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만이 아담이 받은 지식이었다. 이 열매를 먹는 것은 아담이 받은 지식이 아니다. 뱀이 말하는 것은 아담이 받은 지식을 부정하는 지식인 것이다. 하나님의 지식만 지식이었는데, 다른 지식도 있다는 착각이 생긴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사고가 생긴다. 종속 관계가 벗어난 사고가 생긴다. 이 열매를 먹는 것은 그 결과일 뿐이다. 하나님의 지식 외에 중립적인 지식이란 없다. 하나님의 지식을 부정하는 지식이 있을 뿐이다.
갈5:16, 17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에게 주시는 길을 선택이 아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의 관계는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어길 때 나타나는 것이 육의 소욕이다. 하나님께서는 선택의 여지를 주신 것이 아니라, 사는 길을 주신 것이다. 사는 길만 주셨다. 이것만이 하나님이 주신 지식이다. 성령을 따라 사는 것만이 사는 길이다. 육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대등하거나, 중립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거부하는 것이 육의 소욕일 뿐이다. 의도 아니고 죄도 아닌 순간은 없다. 의 아니면 죄일 뿐이다. 롬14:23 “...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의지의 자유라는 것에 대한 오해. 하나님께서 인격체이시기에 우리가 인격체이다. 인격체는 의지의 자유함이 있다는 데에서 인격체가 되는 것이다. 인격체는 자신의 의지로 임의대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 문제가 자유의 문제와 다르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자유가 없다. 인간의 자유의 파생적, 2차적 자유이다. 이 열매를 먹지 않는 것 안에서의 자유이다.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의지의 자유를 말한다. 루터와 칼빈, 조나단 에드워드는 인간 의지의 자유가 없다고 말한다.
인간의 의지를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바탕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악을 자유롭게 선택하지 않는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식으로 만족하고 그 자유함을 누리는데 지장을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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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머리인 아담이 지은 죄가 모든 사람의 죄가 되었다. 이것은 언약 신학의 구도이다.
인식론적인 타락이 있을 때 윤리적인 타락으로 이어진다.
존재론적인 전제가 무너질 때, 인식론적인 타락은 이어진다.
윤리 <- 인식론 <- 존재론
receptive reconstructive
인간의 지식활동은 하나님께서 해석을 해준 대로, 받은 해석으로 나의 실존에서 내 말로 옮길 때 그것이 올바른 지식활동이요 신학 활동이다.
창 2장 17절 -> Given Knowledge
여기서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종속적이다. 이 말씀을 벗어나서 존재하지 못한다. 이것이 존재론적 전제이다. 아담의 존재론적 전제는 창2장17절이다. 즉 하나님을 전제하는 것이다.
존재론적 전제가 안 될 때, 인식론적 측면에서 무너지게 된다.
3장에서 존재론적으로 인식론적으로 무너지자 윤리적으로 무너지게 되었다.
creatively constructive
아담과 하와는 창의적으로 의미를 주었다. 창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우리는 창의적이라는 말은 신앙적이지 않고 종교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즉 우리가 의미를 주는 대로 의미를 갖게 된다고 교육을 받아 왔다.
우리는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을 배제한 사고를 해왔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도 완벽한 자유스러운 인간이었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과 앞에서 자유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따먹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인식론적으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므로 행동 또한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방종이다.
윤리의 근거, 기준은 하나님이시다. 선악의 기준, 죄의 기준은 하나님이시다.
사람이 중생하기 이전에는 죄에 매여 있는 존재이다. 종의 종노릇하는 존재이다. 여기서 의의 종으로 되는 것이 중생이다.
17세기 개혁주의는 중생이 우리에게 새로운 능력, 원리가 작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능력이란, 하나님의 신적, 영적인 것에 대해서 이해하지도 보지도 좋아하지도 않았으나, 이제는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원리가 삶을 다스리게 된다. 다스림을 받게 된다. 원래 없던 기능이 추가된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전에 못하던 기능을 하게 된 것이다. 인격의 성령이 내주하시는 것이 중생이다. 그 성령께서 나의 기능을 돕는 것이 중생이다. 영적으로 죽었던 상태에서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하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좋아하고 바라게 되는 것이 중생이다.
중생할 때 물질적 물리적으로 무언가를 주입된 것(infusion)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비 인격이 아닌 인격의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것이다. 인격의 하나님이 내주하시며 다스리시는 효과가 은혜이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가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하라’이다. 성령의 지배하에 자신을 굴복하라. 인격적인 것이다.
중생은 전에 없던 새로운 능력, 원리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생긴 것이다.
어떤 이는 윤리의 기준이 선(Good)이라고 한다. 선(Good)은 추상의 절대화이다. Idea. 이것은 인격이 아닌 비인격의 절대화이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고 하셨다. 칸트는 인간의 보편적 특성으로써 도덕성을 보았다.
인간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존재적 한계, 존재론적 한계 때문이다.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인간이 무한하다면 한계상황에 부딪히지 않을 것이지만, 유한하기에 한계 상황에 부딪히게 된다. 그래서 인간에게 죄가 있기보다 인간의 그러한 한계 상황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이란, 유한한 상태를 극복하는 것을 말한다. 즉 신이 되는 것이다. deification. 세상의 구원의 개념은 신화되는 것을 말한다. 플라톤은 인간이 죽을 때 육체를 벗어나 자유해진다고 말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제안하는 이상국가는 플라톤의 존재론적 이해에서 오는 것이다. 플라톤은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철학자란 이데아의 세계와 물질계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다. 1~18세는 체육, 미술, 음악을 정부에서 시킨다. 18~20세에는 군사훈련을 시킨다. 20~30세는 고등 수학을 가르친다. 30~35세 변증학 논리학을 가르친다. 35~50세는 정부기관에서 일을 하게 한다. 50세 이상은 왕을 보좌, 자문하게 한다. 이렇게 교육으로 신분이 높아지는 것은 세상이 말하는 구원개념과 연결된다. 그러나 플라톤은 사회 문제를 답할 수 있는 답은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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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 인식론, 윤리의 관계성
한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는 인식의 지배를 받는 것이고, 인식은 어떤 존재론적 이해를 갖고 있느냐이다.
하나님을(존재론) 전제하는(인식론) 행동을(윤리) 해야 한다.
우리에게 아직 옛 세계관이 작용하여 알지만 그렇게 살기 쉽지 않다.
사실상 이것이 나의 세계관으로 고정되기 까지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반복된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의 사고의 훈련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존재론) 전제하는(인식론) 행동을(윤리) 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의 사고도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실질적인 삶속에서 그 우리가 일관성을 지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인간은 자유(Free), 자율(Autonomous), 자의(self-determinative)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염원하는 것은 인간의 속박을 벗어 자유스러운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일관성(consistency)의 문제이다.
인간이 자신이 하나님이 아님을 유지하고 가느냐, 아니면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느냐의 문제. 인간은 일관성 있게 자신이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임을 고백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일관성을 깨고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 한다.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기독교의 진리는 전체가 하나의 system이다. 그러므로 전체가 하나이고 하나가 전체이다. 작은 것 하나를 양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일관성의 문제는 생명과도 같은 문제이다.
Naturalists-Supernaturalists
Naturalists 중에는 펠라기우스가 있다.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Supernaturalists 중에는 어거스틴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펠라기우스는 자연으로 주어진 능력으로 스스로 죄를 짓지 않고 살수 있다고 한다. 자율적인 능력을 강조한다. 아담의 죄와 나와는 무관하며(원죄 부인), 원죄란 단지 처음 지은 사람, 선례이고 악영향이 될 뿐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Roman Catholic, 둘째는 Protestants. 여기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일관성의 문제를 말한다.
Roman Catholic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구원은 세례를 통해서 주어지고, 세례는 교회에서 사제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은혜가 교회(세례)를 통해서 개인에게 전달된다. 그러므로 교회가 없으면 은혜가 전달이 되지 않는다. 개인의 구원에 교회는 절대적이다. 구원이 직적접이 아닌 간접적이고, 즉각적이지 않은 지연적인 은혜의 작용(operation of grace)이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 구원은 세례를 통해서 구원의 시작이 이루어진다. 구원의 진행은 궁극적으로 내가 하는 것이다. 이때 은혜가 주어진다(infusion). 이 구원은 created grace이다. 물체적 개념의 은혜이다. 그러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구원이 아닌 구원이 시작된 것이다. 개인이 구원을 활용한다. 중세의 슬로건은 ‘facere guod in se est’(네가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하라). 네가 가진 것은 은혜이다(natural ability). 이 은혜로 최선을 다해서, 마지막에 구원으로 건져 올려주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Roman Catholic이 Naturalists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에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나중에 가면 Roman Catholic은 알미니안과 흡사해진다.
Protestants 가운데 두 종류로 나뉜다. Universalists와 Particularlists.
Universalists의 주장.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은혜이지만, 어떤 사람은 은혜를 거부해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 인간의 의지의 결정으로 은혜가 수용되거나 거절될 수 있다.
Particularlists은 제한속죄설(특정속죄설)를 주장한다. 예수님께서 위하여 죽으신 사람들과 구원 받은 사람들은 일치한다. 대표적인 주장 인물은 Calvin이다. 나의 자유스러운 결정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믿음을 주셔서 내 인격, 의지가 그것을 수용하도록 의지가 이미 움직여져서 믿게 되므로(이것이 은혜), 100% 하나님의 주권이고, 100% 인간의 책임이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힘을 주셔서(100%), 내 인격 온전히 반응한다(100%). Sola Gratia는 일관성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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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int of Contact
이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회교도에게 전도하려던 열정이 많았다. <<Summa Contra Gentiles>> 신학 변증 방법론. 회교도들에게 전도하려면 먼저 이성으로 접근해서 접촉점을 만들어 대화를 트인 다음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소개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렇게 생각한 데에는 아퀴나스의 인간론이 작용을 한다. 그의 인간이해에 의하면, 자연 상태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져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께서 자연존재에게 추가적으로 주신 선물(donum superadditum supernaturalae)이라고 한다. 그러나 타락한 이후 이것을 잃었다고 한다. 타락한 자연 상태의 인간에게 남는 것은 이성이라고 한다. 즉 타락이전의 아담과 타락한 이후의 인간의 같은 점은 이성이다. 그래서 그는 이성으로 이교도에게 접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불신자와 신자가 이성이 공유된다는 것은 신학적 해석이다. 이것은 로마카톨릭적인 해석이다.
상식
신자와 불신자 사이의 상식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18세기의 상식 철학(Common Sense Realism)에 의해서 이것이 대두되었다. 상식철학은 경험주의 철학의 반동으로 나온 것이다. 체험이 곧 지식의 근거라는 경험주의 철학은 곧 회의주의를 낳았다. 그 자체가 지식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의 반작용으로 나온 것이 상식이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상식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것이 옳은 지 그른 지를 판단할 수 있다. 이 상식이 지식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미국으로 건너간다. 프린스턴의 삼대 총장인 조나단 에드워즈. 그가 있을 때도 프린스턴은 칼빈주의였다. 그의 사후 스코틀랜드에서 John Witherspoon 목사가 총장으로 온다. 그가 상식 철학을 가지고 온다. 그는 이 상식철학으로 프린스턴의 커리큘럼을 개편한다. 같은 칼빈주의라고 해도 방법론이 바뀌어 진다. 그 후 이것은 실용주의 철학을 낳는다. 성경의 특성 가운데, 꼭 배운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해가 가능하다는 특성이 있는데, 이것은 상식에 부합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경의 권위가 상식에 의해서 판단된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이것 종교적 표현으로써 하늘 숭배 사상을 전제하고 있다. 이것은 위헌적이며, 비성경적이다. 문제의식을 갖으라.
칼빈주의의 접촉점은 Imago Dei 이다. 인간은 만들어 질 때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아담은 만들어진 순간부터, 하나님과 땔 수 없는 관계였다.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은 떨어질 수 없다. 카톨릭처럼 하나님의 형상이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인간이 아닌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을 통해 나를 알고, 나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다. 나에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들어 있다. 이것은 일반 계시이다. sense of deity. 신적 의식. 아담은 존재하는 순간부터 신적 감각이 있었다. 아담은 존재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을 의식했다. 하나님을 의식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피조물이라는) 자신을 이해한다. 이것은 언약적 지식이라고 한다. 아담은 하나님 앞에 있는 존재이고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를 포함한 지식을 갖고 있는 존재이다. 아담으로 하여금 이것을 알 수 있게 해준 것이 선악과(타락 이전의 특별계시, 타락 이후의 특별계시는 구원 계시이다.)이다. 일반지식을 보충 보강해주는 추가적인 지식이다. 궁극적으로 선악과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더 강화하는 목적으로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신자나 불신자나 모두에게 똑같이 있는 지식이다.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있다. 이것 때문에 인간에게 종교성이 있다. 이것을 통해서 접촉점을 삼아야 한다. 이 하나님의 형상을 접촉점으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전도, 선교의 방법이다. 변증학의 문제이다. “당신은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고, 지금은 타락해서 그리스도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그 접촉점을 다르게 한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형상을 접촉점으로 삼게 한다.
<8>
변증의 일은 궁극적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Direct Method(직접적 방법)
Indirect Method(간접적 방법)
인간이 취하는 방법론은 이 두 가지 밖에 없다.
직접적 방법은 창세기 3장의 내용처럼, 사람이 직접 해석하는 것이다. 뱀의 유혹,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네가 직접, 중립적으로 해석하라.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받아온 교육방법이다. 어떤 전제도 하지 말고, 신앙은 집에 두고 어떤 편견 없이 중립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과학적 방법이라는 것이다.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과학은 사고하는 방법론의 문제이다. 이것이 직접적 방법론이다. 사실 직접적 방법론은 없다. 허구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이 해야 하는 방법론은 간접적 방법이다. 왜냐하면 어떤 특정한 하나의 개체에 대한 해석을 우리가 직접적 해석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제해야 알기 때문이다. 내가 A를 직접알지 못한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이것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은 전제한 가운데서 알 수밖에 없다. 간접적 방법은 하나님을 전제(presupposition)해야만 아는 것이다. “하나님(존재)을 전제(인식)하는 행동(윤리)” 존재론과 인식론과 윤리가 하나의 축으로 연결되어 있다. 어느 것도 하나님께서 만드시지 않거나 통치영역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이 배제된 가운데서의 지식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지식은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지식이 간접적 방법이다. 신을 전제함으로 유신론적 방법이다. 이것은 꼭 기독교만의 방법이 아니다. 범신론, 이신론 등... 기독교의 하나님의 전제는 성경의 하나님을 전제하는 것을 말한다. 이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고, 그분은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분이 자존자족하신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간접적 방법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이런 간접적 방법이 이루어지기 위한 방법. 반틸이 제시한 방법.
1. 상대입장에 서라. 상대의 전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논쟁의 목적상 상대의 입장을 쫓아가라. 그들의 논리에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그들의 전제가 무엇인지, 신을 전제했더라도 그것이 어디에서 포기되는지(일관성이 지켜지지 않는 지)를 알기 위함이다. 상대의 사고를 쫓아가며 그들의 사고를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2. 그러므로 성경을 가르칠 때도 상대방을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오류를 드러내주고, 그들을 하나님이 전제되실 수밖에 없음을 보여줘야 한다.
과학의 방법은 가설(hypothesis)을 세운다. 실험(experiment)을 한다. 그 실험을 바탕을 이론(theory)을 만든다. 이 이론이 가설과 일치하는지를 본 다음 가설을 수정하고 다시 실험을 해서 이론을 만들고 다시 수정을 한다.
이 과학 방법은 일정하게 움직일 것이라는 동질성(uniformity)을 전제하고 있다. 16세기부터 현재 과학이 태동하면서 이러한 것을 전제하였다. 이 우주는 동질한 법칙을 통해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흔히 자연의 법칙이라 말한다.
그러나 과학은 이러한 동질성을 증명한 적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다. 인간의 모든 데이터는 이미 해석이 된 것이다. 과학도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과학도 직접적 해석이 아닌 간접적 방법이다. 과학도 전제에 의한 것이고 순화논리에 빠진다. 세상에는 직접적 방법은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 창조와 섭리의 하나님을 전제하는 지식만이 바른 지식이 된다. 결국 모든 논쟁은 전제의 싸움이다. 모든 논쟁은 신앙의 대립이다. 하나님은 전제하는가? 부인하는가?
창조를 통해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을 얻는 것이 일반계시이다.
<9>
한국교인들은 실존주의경향이 강하다. 그 철학을 영향 받은 것이 아니라 정서자체가 그러한 경향이 강한 것이다.
“은혜 받았습니다?”
실존적 차원에서 의미가 있을 때 이러한 말을 하곤 한다.
설교는 계시를 다루는 것이다. 계시의 선포이고 증거이다.
그러나 청중들은 그것이 자신과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가가 그 설교를 판단하는 잣대가 되고 있다.
은혜에는 실존적 차원이 있다. 하나님 역사의 구체성(concreteness). 그러나 이것으로만 잣대가 될 때는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Barth의 주장과 비슷해진다. 계시가 나의 영역에 들어 올수 없다. 그러므로 이 계시가 나에게 은혜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나의 실존적으로 의미가 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말한다. 이것을 사건(event)라고 한다.
실존이라는 필터로 메시지를 받아서 실존에 의미를 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판단한다.
설교문화라 바뀌어야 한다. 설교를 계시의 선포로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은혜를 받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교인들이 실용주의적이다. 설교의 적용이라는 데에서 실용주의가 나타난다. 청교도의 설교도 적용이 있었다. 적용은 오래된 설교의 전통이다. 설교자는 계시를 증거하는 자들이다. 설교에서 우선적으로 되어져야 할 것은 계시 선포이다. 이것이 설교자의 권위이다. 이때에만 설교자의 권위가 인정된다. 지나치게 실용주의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적용이 계시를 잡아먹어버린다.
설교는 흙탕물을 뒤 흔들어, 마음에 찔림을 주는 것이다. 안보였던 죄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말씀은 선포와 적용이 함께 가야하는데, 오늘날은 적용이 앞서가게 되었다.
설교자는 계시에 대한 의식과 인정함이 있어야 한다.
Barth는 계시를 너무나 인간과 먼 것으로 생각한 나머지 개혁주의와 다르게 되었다.
오늘날 교인들은 체험주의적인 성향이 강하다. 읽고 듣고 이해하기보다, 한번 행동하는 것이 쉽다. 읽는 것 보다 그냥 기도하는 것이 더 편하다. 우리는 왜 성령의 임재를 말씀 읽기가 아닌 기도를 통해서만 경험하는가? 말씀으로 우리의 체험적 욕구를 충족하기 힘들기에 우리는 너무나 빨리 기도로 가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은혜는 감성적인 충족에 맞추고 있다. 딱딱한 말씀을 읽으며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계시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기도보다 중요한 것이 성경이다. 말씀이 없는 기도는 개혁주의가 아니다.
기도를 통해 인격적인 하나님과 교통을 하는가? 아니면 나의 종교적 감성을 채우는가? 슐라이에르마허는 신앙이 "절대의존감정"(absolute felling of dependence)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성경이 이것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없이도 이런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러한 영성은 매우 조심스럽게 봐야한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영성인지, 아니면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보편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몸부림인지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사역이란 대상을 분석하고 진단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대상은 실존, 실용, 체험의 잣대로 의미를 부여한다. 이것이 직접적 방법이 될 수 있다. 성경에 대한 판단 여부가 자신에게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뱀의 꼬임을 받은 하와와 같은 상황이 된 것이다. 간접적 방법은 하나님을 전제하는 방법이다. 설교에서 간접적 방법이란,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은 믿음으로밖에 수용되지 않는다. 교인들을 가르쳐야 한다.
<10> 이제부터 밴 틸의 책을 읽으라.
Evidentialism(증거주의)
전제주의 변증은 20세기에 밴틸을 통해 학문으로 정립되었다. 그전에는 전제주의 변증은 없었는가? 학문적인 측면에서 20세기에 정립이 되었지만, 전제주의 방법은 그 전에 이미 있었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전제주의이다. 칼빈도 전제주의이다. 바울의 변증의 방법도 전제주의이다. 전제주의 변증은 성경적인 변증의 방법이고, 개혁신학이 말하는 변증의 방법이다. 이것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방법론적인 인식은 최근에 와서 명확하게 들어난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교회 역사 가운데 변증은 증거주의 방식을 사용하는 아쉬운 면이 있었다. 증거주의 방법이 교회역사의 변증의 주류를 이루었다. 1세기 정황에서 기독교 전파란, 전도와 선교만이 아니라 대변, 변론, 방어, 싸움이었다. 그때 자신들이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법정의 분위기로 갈 수 밖에 없다. 헬라 로마의 분위기 속에서 법정에서 시시비비가 가려지는 분위기는 복음을 방어하는 방법으로써 작용하였다. 처음부터 변증이라는 것은 큰 문제의식 없이 헬라 로마의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 자체가 증거주의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20세기에 들어서 밴틸에 의해서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가 인식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지금도 증거주의 변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증거주의 방법을 사용하는 출발점.
그리스도인과 불신자 사이에 어느 정도의 공감대(common ground)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증거가 그리스도인과 불신자 사이에 중립적(공유적)이라고 생각한다. 전제주의의 전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증거주의의 전제는 여럿이다. 전제와 공리와 가설을 가지고 있다. 수학은 많은 공리들이 있다. 과학은 많은 가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없이는 진행이 될 수 없다. 나름대로의 전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묻지 않고 이 증거는 공유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것을 밴틸은 해석되지 않은 사실(brute fact)이라고 표현했다.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아직 해석하지 않은 사실이 있어서 공유되는 것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밴틸은 그러한 해석되지 않은 사실은 없다고 주장했다. 해석이 들어가 있지 않은 해석은 없다. 데이터의 모음 자체가 해석이 들어간 방법이다.
증거주의자들은 종교적 편향성을 뺄수록 복음을 전하기에 좋다고 말한다. 이들의 초점은 불신자의 입장에 너무나 많이 가있는 것이다. 상당한 양보를 한 것이다. 말로는 증거주의이지만, 사실상 이것은 많은 양보를 해주는 것이지, 더 이상 증명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접고 불신자에게 맞추어서 불신자가 불편하지 않도록 일단 두 사람 사이에 공유할 수 있는 증거를 많이 만들어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바른 성경적 방법이 아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모로 가도 서울에 가는 것이 아니라, 개혁신학은 우선적으로 방법론적인 면에서도 개혁주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증거주의자들은 자신의 주장과 다르게 무언가가 생긴다. 공유하는 증거를 많이 찾은 후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하지만, 결과는 의도한데로 되지 않는다. 이들이 사용한 방법은 애초에 하나님을 제외시킬 때 가능한 방법이다. 하나님과 신앙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말 자체가 방법론 자체에서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된다. 중세에 아퀴나스가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집의 기초가 부실하다.
증거가 아무리 많다고 해서 증거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눅 16장의 거지 나사로의 비유. 눅16: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즉 사람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증거를 보여줘도, 그 사람들은 여전히 불신에 거한다. 아무리 많은 증거를 확보하더라도 그것이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사람의 바꾸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능하시다. 하나님만이 사람을 회심시키실 수 있다.
전제주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근거한다면, 증거주의는 인간의 판단능력에 근거한다. 사람이 직접 판단하고 해석하라, 자유의지로 전제 없이 너 스스로 판단하고 해석하라는 것이 증거주의의 방법이다. 이것은 뱀의 유혹이었다.
증거주의는 전제주의변증을 변증이 아니라 신학이라고 말한다. 변증을 할 때는 신학이 아닌 증거를 가지고 하라고 한다. 증거주의는 가시적, 체험적인 것을 중시한다. 그러나 전제주의는 비가시적이고 비체험적이다.
귀납적 성경 공부도 증거주의 방법론이다. 귀납법가 다 나쁜 것은 아니다. 귀납법에는 사용 범위가 있다. 우리가 주해를 할 때, 단어의 용례를 찾는 것은 증거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결론을 내린다. 주해자체가 증거를 모으는 것이다. 그러나 증거를 많이 모았다고 설득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귀납적 성경공부에는 변증학적인 문제가 있다.
증거->공감대. 일단 들리는 설교를 해야 한다는 주장. 듣는 사람과 읽는 사람에 중점을 둔 해석. 설교는 계시를 다루는 것이다. 계시는 증명되지 않는다. 계시는 증거를 찾아 열거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믿음이 없는 탁월한 주해학자들이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믿음’으로만 수납될 수 있다. 증명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설교는 선포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귀납법과 주해를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제하는 주해를 해야 한다. 우리가 강조해야 하는 증거의 방법은 유신론적 증거 사용(Theistic use of evidence)이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이 증거를 제시한다는 관점.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제한 증거 사용이 바른 방법이다.
우리는 사용하는 방법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제한 가운데 방법들을 평가하고, 다시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신학적 판단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신학적 책임이다.
<11>
Amsterdam Philosophy
New Amsterdam -> New York ^^
개혁주의의 차이점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의 전통과 화란의 카이퍼 학파(암스테르담)
Herman Dooyeweerd(1894-1977)
D. H. Th. Vollenhoven
F. G. Stoker
암스텔담 학파
시간과 공간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강조.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되심(Lordship)이 드러나야 한다.”
아브라함 카이퍼로부터 출발한다.
카이퍼와 그 후계자들을 신 칼빈주의라 불린다.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한다.
형식적인 예배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전부가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삶이 예배라면 성속(聖俗)의 구분이 없다. 모든 직업은 하나님의 소명이다. 모두가 Kingdom Work 이다.
기독교 학교, 기독교 NGO, 기독교 정당, 기독교 나라가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신문사, 대학, 정당을 만들어 수상까지 한다.
이들의 이러한 정신과 이념은 종교개혁적이고 성경적이다.
특별히 문화영역의 적용, 접목에 있어서 많은 강조를 해주고 있다.
이들의 문제점.
그들의 이론 속에서는 명확치 못한 부분, 성경적이지 못한 부분이 있다.
Herman Dooyeweerd는 Cosmonomic Idea를 말한다. 시간대의 실제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의미가 시간대의 모든 것을 통해 나타나야 한다. 시간대의 모든 실제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의미를 담고 있다. 개체 하나하나가 하나님 세계의 일부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을 묶을 수 있는 하나의 체계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실제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신 의미로 전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 이것이 ‘기독교 철학’이다. 세상 철학과 반대되는 것이 기독교 철학이 아니다. 시간대의 실제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 안에 일부이다. 그렇다면 개체 하나하나를 묶을 수 있는 사고 체계가 가능하다. 생물학자와 법률을 하는 사람이 한 가지 동일한 사건을 놓고 말할 때, 다를 수 있다. 그렇다고 그 사건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똑같은 상황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시간대에 있는 삶 속에서 진행되어지고 되어지는 일들이 별개의 조각조각 사건과 내용으로 보이지만, 이것들은 결국 하나님의 세계라는 점에서 하나의 관점으로 묶을 수 있다. 이렇게 묶어서 설명할 수 있는 철학적 체계가 필요하다. 이것이 기독교 철학이다.
그들이 제시한 방법은, 사람의 관점은 불연속, 분리적이지만, 하나님의 계시된 의도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바로 창조와 타락과 구속이다. 바로 이것을 아는 것이 기독교적 관점, 접근이다.
Herman Dooyeweerd, <<in the twilight of western thought>> 서구 사상사의 몇 개의 패러다임을 설명한다. 고대에는 form-matter의 이분법적 사고를 가졌다. 중세시대에는 nature-grace(자연을 초월한 은혜)라는 이원론적 구도로 대체된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nature-freedom(자연을 극복하는 인간의 가능성)이 된다. Herman Dooyeweerd가 제시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은 Creation-Fall-Redemption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제시하는 세계관이다. 모든 사고는 불가피하게 종교적이라고 말한다. 모든 사고는 antithesis(반립)이 있다. 더 이상 좁혀지지 않는 차이가 있다. 이것이 종교적 대립이다. 이것은 VanTil(1895-1987)이 한 말과 같다. VanTil도 화란사람이다.
Herman Dooyeweerd를 통해서 실질적으로 제시되는 암스텔담 학파 철학의 방법은 15개의 사고의 최소 단위를 설정한다(15 mode). 이것들은 구분은 되지만, 서로 연결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다 어우러져 하나님의 세계에 속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통해서 서로간의 유추적 방법으로 15 mode를 서로 연결된다고 하는 것을 확보한 다음, 궁극적으로 우리 사이의 서로 연결되는 지식체계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이 모든 것이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근원을 두고 있다는 종교성을 확인한다.
Herman Dooyeweerd는 지식을 두 종류로 나눈다. Pre-theoretical knowledge(선이론 지식)과 theoretical knowledge(이론적 지식)이다. Pre-theoretical knowledge(선이론 지식)은 학습이 필요하지 않는 일차적이고 질료적 지식이다. theoretical knowledge(이론적 지식)은 학습적 지식이다. 어린아이는 꽃을 보고 단순히 즐긴다(Pre-theoretical knowledge). 그러나 꽃에 대해 논문을 쓰는 식물학자는 어린아이와 다른 측면으로 꽃을 본다. 꽃을 보고 연구하며 학습하고 실험한다(theoretical knowledge).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상대적일 뿐 명확한 구분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하나님에 관한 실제, 지식은 이론지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모두가 Pre-theoretical knowledge(선이론 지식)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창조-타락-구속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실제이며 선이론의 지식이다. 신학은 이론지식이다. 신학은 science이다. 신학과 성경은 구분된다. 신학은 이론적 지식의 결과이며 이론적 추상이다. 신학은 하나님의 실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철학이 필요하다. 철학은 선이론 지식으로부터 신학자에게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말하지 않는지 말해주어야 한다. 신학자가 교리를 설명해 준다. 교리는 신앙고백의 공동체(교회)로부터 온다. 교회의 신앙고백이 교리이다. 이것이 소위 신학적 지식이고 이것을 다루는 것이 신학이다. 교회가 교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말하지 않는지를 판단해 주는 것이 철학이다. 신학은 철학의 말을 들어야 한다. 신학을 철학의 아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신학을 공부하는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도 이렇게 생각한다.
이러한 15 mode를 통해서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을 확인하고 15개의 mode는 일부는 Pre-theoretical knowledge이고 일부는 theoretical knowledge이다. 이것들을 먼저 확인하고 너와 나 사이에 이러한 mode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 mode들은 하나님을 전제하고 있다라는 것을 말함으로써 한 가지를 말하고 있다라는 방법론을 취하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문제는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공유할 수 있는 이성을 통해서 공감대를 통해 계시로 나아가자고 한데에 있다. 암스텔담 학파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칼빈주의며, 하나님 전제를 말한다. 지식의 최소 단위들이 하나님을 향하고 말하고 있다라고 하는 나름대로의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전제가 이 과정에 있어서 유지가 되느냐는 일관성의 문제를 낳는다. 일관성을 상실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들은, 형식적인 의미에서, 성경 외에는 신학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구속사를 강조한다(Pre-theoretical knowledge). 이것은 구프린스톤의 Vos와 내용적 측면에서 일치하는 면이다. 암스텔담은 성경신학을 부인한다. 바빙크도 그의 개혁주의신학서론에서 성경 신학을 부인한다고 말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것이 카이퍼학파의 특징이다. 원리적인 면에서 같은 얘기를 한다. 성경은 Pre-theoretical knowledge을 말하는 것이지, 성경신학은 theoretical knowledge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구속사를 말하므로 Vos와 일치한다. 이렇게 신학에 있어서 방법론적 차이가 있다.
VanTil이 볼 때 Herman Dooyeweerd와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해서 Herman Dooyeweerd에게 자신의 학생을 유학보냈다. 그러나 나중에 같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지식의 최소단위들에 대한 특징들이 하나님의 세계에 속해있는 것이므로, 이러한 지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 하나님을 전제하는 데로 나아갈 수 있다.
15 mode를 나눈 것 자체가 인위적인 면이 있고, 방법론에서 모호함이 있다.
하나님을 전제하는 것이 일관성 있게 유지되는가가 중요하다.
일반계시의 한계와 특별계시의 한계를 구분해야 한다.
강웅산 교수의 죽산 강좌 논문을 읽어 보라.
적은 차이 같지만, 큰 차이를 낳고 있고, 이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는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12>
밴틸의 전제주의 변증방법
전제에 의한 변증 방법
전제는 하나님의 존재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을 전제해야 인식론적인 바른 이해가 되고
인식론적으로 바로 돼야 바른 행동, 윤리가 나온다.
우리의 질문 : 서두부터, 전제로 하나님을 얘기하는 것이 변증으로써 통하겠느냐?
접촉점 : 하나님의 형상. 칼빈은 신적 감각이라고 말했다. 이것을 기정사실로 전제하고 접근하는 방법만이 피차가 같은 얘기를 하는 방법이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 증거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은 불신자들과 공감대를 이루기 위해 쓰는 방법이 하나님을 배제하는 방법이므로 이것이 모순이다.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생기(네솨마) : 생물의 기식, 전능자의 기운(욥32:8). 하나님의 도덕적 영적 성품을 담는 의미가 있다. 사람의 영혼(잠20:27) 하나님의 형상은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이것이 접촉점이다.
인간의 타락한 현실을 지적하는 방법은 당신이 죄인이라고 지적하는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된 현실을 지적할 수 있다.
전도할 때, 액면적으로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하는 것이 전제적 방법론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개발해야할 숙제이다.
인간의 바램, 도덕성 문제, 영원에 대한 갈망, 인간의 한계 등 모든 것이 영적인 문제임을 지적한다. 이 세상은 해결점이 없다는 것이 쉽게 드러난다. 행17장의 사도바울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필요를 도출하라. 절대적 선, 하나님을 제시하라.
전제주의 변증학이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칼빈이 한 것이 전제주의 변증학이다. 조나단 에드워즈, 바울도 전제주의 변증이다. 보스, 메이첸도 전제주의 변증이다.
증거주의 방법을 다시 검증하며 전제주의 변증학이 부각된다. 보다 성경적인 변증이다. 개혁주의와 개혁원리에 부합되는 변증학이다.
증거를 사용한다고 해서 증거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증거 사용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이 심어 질 수 있다. 이것도 전제주의적 방법. 증거주의는 증거가 신자와 불신자가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며 그 순간 하나님을 배제시킨다. 하나님을 부인해야 그 증거가 의미를 갖는다.
<기말시험> 밴틸의 전제주의 변증학에 대해서 설명하시오.
cf. 존재론, 인식론, 윤리 순으로 시작하며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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