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오경

[스크랩] 창세기 3장

하나님아들 2015. 1. 28. 14:51

 

창세기 제 3 장

 

 


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화잇 주석

 

창세기 제 3 장
1-6 타락의 연속―아담이 에덴에서 추방되었을 때 인류가 범죄하는 일을 그쳤더라면, 우리는 지금 육체적으로,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훨씬 더 나은 상태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재난을 초래한 아담의 범죄를 탄식은 하면서도, 그들은 아담같이 하나님의 명령들을 불순종하였다. 사람들이 아담과 함께 타락하는 일을 그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인간은 계속 타락해 왔다. 인간은 아담의 경험으로부터 아무런 경고도 취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식욕과 정욕의 방종에 빠져 듦으로써 하나님의 계명을 직접적으로 범하고 또 동시에 세상에 죄를 가져온 아담의 타락을 계속 슬퍼할 것이다.
아담 때로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마다 범죄의 크기와 종류도 그 전시대보다 더 커지고 더 다양해져 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시대에 우리가 보는 것같이 신체적·도덕적으로 이렇게 유약하고, 외양적으로 이렇게 추한 인간을 만드신 적이 없으시다. 두렵게도 각종 질병들이 사람들에게 점점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현상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따라 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직접적으로 거역하는 데서 일어나는 현상이다(리뷰 1875. 3. 4).
1 사단은 앞잡이를 이용함에덴에서 사단은 뱀을 앞잡이로 이용하였다. 오늘날도 그는 주의 구속받은 자들이 걸어가는 의의 길을 가로막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속임수를 다 써가며 인간 가족들을 이용하고 있다(편지 91, 1900).
5 사단의 선전에는 변함이 없음―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견을 참고로 하거나 우리의 훌륭한 점을 참작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모든 행동의 미래적 결과-을 잘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선은 그분을 향하여야 하며, 사단이 제시하는 세속적 유익을 향하지 말아야 한다. 사단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그에게 주목하면 우리로 아주 높은 수준의 지식에 이르게 해 주겠다고 한다. 그는 하와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께서 금하신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는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시험은 매우 쉬운 것이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고 온 우주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 범죄는 우리 세상에 재난의 홍수가 쏟아져 들어 오도록 수문을 열어 놓은 것이다(원고 50, 1893).
6 가장 가벼운 시험이 주어짐―가장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온 우주는 아담과 하와의 지위를 결정짓게 될 그 투쟁을 지켜보았다. 사단이 그의 생각을 하나님의 명령보다 위에 놓고 그의 기만적 이론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무효화시키려 할 때 천사들은 이 거룩한 부부가 그 유혹자에게 기만당하지나 않을까 그의 간교한 꾀에 넘어가지나 않을까 매우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 보았다. “저 거룩한 부부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에게 가졌던 사랑이 혹시 사단에게로 옮겨지지나 않을까? 사단의 거짓말을 진리라고 받아들이지나 않을까?” 천사들은 초초한 듯 서로 속삭였다. 아담과 하와가 그 열매를 따먹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 할 수도, 창조주의 분명한 명령을 거역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험은 시험 중에 가장 가벼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나 다 준비되어 있었으므로 금단의 열매를 먹어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성경의 메아리 1899. 7. 24).
얻은 것은 죄와 그 결과에 대한 지식 뿐―만약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나무에 결코 손을 대지 않았더라면 주께서는 그들에게 죄의 저주가 없는 지식, 영원한 기쁨을 가져다 줄 지식을 나누어 주셨을 것이다. 불순종으로 그들이 얻은 것이란 죄와 그 결과에 관한 지식 뿐이었다(호주 연합회 보고 1904. 3. 1).
설명이 불가능한 아담의 타락―아담을 강타한 힘은 어디에 있었으며 무엇이 그의 타락의 원인이었을까? 그것은 아담 내부의 죄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품성을 따라 아담을 곧고 순결하게 지으셨기 때문이다. 첫째 아담 속에는 부패한 원칙이나 나쁜 버릇, 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등이 없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천사들과 같이 흠이 없었다. 이런 모든 점들로 볼 때 그의 타락을 쉽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지금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사실들은 주께서 지금 우리를 아심같이 우리가 알게 될 때에야 모든 것이 명백해질 것이다(편지 191, 1899).
(전 1:13-18)―시대마다 사람들은 호기심에 이끌려서 지식의 나무를 찾는다. 그리고 흔히들 가장 핵심적인 지식의 열매를 따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솔로몬이 깨달은 바와 같이 그 모든 것이 하늘 문을 열어주는 참된 경건의 과학과 비교해 볼 때 다 헛되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간의 야망은 자신들에게 영광과 존귀와 최고의 영예를 가져다 줄 그러한 종류의 지식을 찾아 왔다. 이리하여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영향 아래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그분께서 금하신 지식, 즉 그들의 죄의 결과를 알기 위하여 거짓말장이 교사 밑에서 교육받게 되었다(원고 67, 1898).
타락은 순종의 황금사슬을 끊어 버렸음―아담은 유혹에 굴복하였다. 우리가 죄와 그 결과의 문제를 우리 앞에 놓고 볼 때, 우리들은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읽을 수 있게 되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죄의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명백하게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 것, 즉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분의 정부를 거절한 것임을 깨달게 된다 …
우리들의 시조가 타락함으로써, 인간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과 연결시키는 보이지 않는 순종의 고리가 끊어졌다. 순종은 더 이상 절대적인 필요로 간주되지 않게 되었다(원고 1, 1892).
아담: 할 수 있는 대로 멀리 치워진 유혹―구속의 계획은 이같이 마련된 것이었기 때문에 아담이 시험을 받았을 때, 유혹은 될 수 있는대로 그에게서 멀리 치워져 있었다. 아담이 유혹을 당했을 때, 그는 배고픈 상태에 있지 않았다(사인즈 1900. 4. 4).
자유 의지의 소유자인 인간―하나님은 아담이 금단의 나무에 손을 대지 못하게 붙드실 수 있는 힘을 갖고 계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하셨더라면 하나님의 율법은 독재적 율법이라는 사단의 비난이 인정을 받게 되었을 것이며,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도덕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기계에 불과했을 것이다(리뷰 1901. 6. 4).
어떤 유혹이 와도 충성할 수 있었음―사람이 죗된 모습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하신 바가 확실히 아니었다. 그는 사람을 순결하고, 고상하게 그리고 악으로 기우는 성향이 전연 없게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유혹이 와도 충성되게 순종할 만한 환경인 에덴에 그를 두셨다. 또 하나님의 율법으로 아담을 두르심으로써 그를 보호하는 안전 장치가 되게 하셨다(리뷰 1901. 6. 4).
7 무화과 나무 잎사귀가 죄를 가리우지는 못함―아담과 하와는 둘 다 그 과일을 먹고 하나의 지식을 갖게 되었는데, 이 지식은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했더라면 결코 갖지 않았을 지식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경험이요, 불충성의 경험 곧 그들이 벌거벗었다는 지식이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겉옷, 곧 그들을 두르고 있었던 순결의 두루마기는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무화과 잎을 한데 엮어서 앞치마를 만들어 하늘의 옷을 대신하였다.
이 옷은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한 그 날 이후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사람들이 늘 사용하는 가리개이다. 그들은 무화과 나무잎들을 한데 엮어서 범죄로 인하여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웠다. 그 무화과 나뭇잎들은 불순종을 가리우기 위하여 상투적으로 늘어놓는 이론들을 표상한다. 주께서 사람들의 주의를 이끄셔서 진리에 관심을 갖게 하실 때, 사람들은 그 영혼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우기 위하여 무화과 잎사귀로 앞치마를 만드는 일을 시작할 것이지만 죄인의 벌거벗은 것은 가리울 수가 없다. 이같은 허망한 일에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이론들을 역어서 만든 모든 논리는 아무것도 아님이 드러날 것이다(리뷰 1898. 11. 15).
10,11 무지의 두루마기를 입음―아담과 하와가 창조주를 절대로 거역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온전히 정직한 길에 서 있었더라면, 하나님을 알고 이해할 수가 있었으련만! 그들이 유혹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범했을 때 죄 없는 하늘 사람들이 입는 빛의 두루마기는 그들에게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옷이 그들을 떠나갔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의 검은 두루마기를 걸치게 되었다. 이제까지 그들을 두르고 있었던 밝고 완전한 빛은 그들이 접근하는 모든 사물들을 밝게 비추어 주었었지만, 그 하늘의 빛을 잃고 난 다음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작품들 속에서 더 이상 그분의 품성을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리뷰 1904. 3. 17).
15 아담은 율법의 원본을 알고 있었음―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지음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율법의 원본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가슴에 새겨져 있어서 율법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바를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순결무구의 행복한 상태에서 떠나 죄인들이 되었을 때, 타락한 인류는 단 한 줄기의 희망도 없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고, 그리스도께서 몸소 죄짐을 지심으로써 그들을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셨다. 땅과 사람에게 저주가 선포되었을 때,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와 소망이 있다는 약속도 아울러 주어졌다. 암울함과 흑암이 죽음의 장막처럼 드리워져 그들의 미래를 어둡게 하였지만 구속주의 약속 곧 소망의 별빛이 그 어두운 미래를 비추어 주었다. 복음은 최초로 그리스도에 아담에게 의해서 전파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죄에 대한 진정한 후회와 슬픔을 느꼈다. 그들은 하나님의 귀한 약속을 믿었고 완전한 파멸로부터 구원함을 받았다(리뷰 1875. 4. 29).
그리스도, 즉각적인 보증―죄가 있자마자 곧 구세주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고통을 당해야 할 것을 아셨지만 인간을 대신하기로 하셨다. 아담이 죄를 범하자마자 하나님의 아들은 그가 갈바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 가지셨던 동일한 능력으로 범죄자에게 선고된 운명을 막기 위하여, 당신을 인류의 담보물로 제시하셨다(리뷰 1901. 3. 12).
하늘 본토―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들을 온전히 순종하였기 때문에 세상의 구속주가 되셨다. 그는 아담의 수치스러운 타락을 속량하셨고, 죄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갔던 이 지구를 하늘 본토와 연결시키셨다(성경의 메아리 1894. 8. 6).
영광의 세계와 연결시키심―비록 지구성이 길을 잃고 빗나가서 하늘 본토에서 떨어져 나가고 하늘과 교제가 끊어졌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이를 다시 영광의 세계와 연결시키셨다(사인즈 1887. 11. 24).
인간을 대신하기로 하심―인간이 사단의 유혹을 받아 들이고 하나님께서 하지말라고 하신 바로 그 일을 했을 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서셔서 말씀하시기를 “나로 그 형벌을 받게 해 주소서. 제가 사람의 자리에 서겠습니다. 사람에게 기회를 한번 더 주소서”라고 하셨다(편지 22, 1900. 2. 13).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발자국에 그의 발을 두심―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영광의 왕께서 타락한 인류의 위치까지 당신을 낮추기로 제안하시다니! 그분은 아담의 걸어 갈 발자국에 자신의 발을 두실 것이었다. 그는 타락한 인성을 입으시고 아담을 이긴 강한 원수와의 싸움에 돌입하실 것이었다. 그는 사단을 이김으로써 아담의 실패와 타락으로부터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실 것이었다(리뷰 1874. 2. 24).
16,17 형 집행 유예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선고하신 사형 집행을 잠시동안 보류하셨다. 사단은 하늘과 땅을 연결짓는 사슬을 영원히 끊어 버렸다고 좋아했었지만 이 일로 그는 크게 실패하였고 낙담하였다. 아버지께서 그 아들에게 세상을 주셔서 그로 아담의 실패로 인한 저주와 수치에서 구속케 하셨다(리뷰 1874. 2. 24).
17,18 삼라만상에 임한 저주―모든 자연은 혼란해졌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본래 계획하셨던 그 목적을 땅이 수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저주가 삼라만상에 머물렀고 해마다 그것은 더욱 절실히 느껴졌다(원고 76a, 1901).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첫번째 저주가 아담의 후손들과 땅에 선고 되었다. 가인이 그의 동생 아벨을 살해했을 때, 두번째 저주가 임하였고, 하나님께로부터 임한 세번째 저주는 가장 두려운 것으로서 노아의 홍수 때에 땅에 임하였다(4영적 121).
땅은 점점 더 깊이 그 저주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홍수 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땅 위에 떨어진 나무 잎사귀들을 볼 때 깊은 슬픔에 잠기었다. 오늘날 우리가 친구가 죽었을 때 슬퍼하듯 그들은 그 낙엽들을 보고 애도하였다. 썩어가는 낙엽 속에서 그들은 저주의 증거를 볼 수가 있었다(4영적 155).
(롬 8:22)―인간의 죄는 그 확실한 결과 곧 부패와, 불구와 죽음을 가져왔다. 오늘날 세상은 치명적 질병으로 인해 썩고 오염되어 있다. 땅은 사람들의 계속적인 범죄로 신음하고 있다(편지 22, 1900. 2. 13).
하나님의 저주는 땅과 사람 그리고 짐승들과 바다 속에 있는 고기들 위에 머무르고 있다. 범죄가 거의 전 세계에 미치게 될 때에 그 저주는 그 범죄 만큼이나 깊고 광범위하게 만연되도록 허용될 것이다( 편지 59, 1898).
하나님의 계속적인 사랑의 증거들―아담이 범죄한 후에 주께서는 돋아나는 새싹들과 피어나는 꽃들을 모두 쓸어버릴 수도 있으셨고, 우리의 감각을 그토록 감미롭게 하는 그 향취를 거두어 가실 수도 있었다. 저주로 인하여 망가지고 못쓰게 된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의 정죄를 읽을 수가 있다. 하지만 꽃들의 미묘한 색깔과 향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직도 우리를 사랑하시며, 그분의 자비를 땅에서 온전히 거두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배울 수가 있다(리뷰 1898. 11. 8).
3:17-19―하나님은 아담과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때 후로 사람은 죄의 악한 영향하에 있는 땅을 가꾸어야 되었고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낼 것이기 때문이었다(원고 84, 1897).
그 뱀의 지나간 자국이 보이지 않는 곳이나 그 무서운 독의 쏘는 것을 느끼지 않을 곳은 이 땅에 한 곳도 없다. 온 땅은 거기 서식하는 동물과 사람들로 인해 더럽게 되었다. 범죄가 증가함에 따라 저주도 커지고 있다(편지 22, 1900. 2.13).
18 잡종 교배로 독초가 남―주의 저 크신 동산에는 단 한포기의 독초도 심겨지지 않았지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로 독초들이 돋아났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종들은 주인에게 와서 묻기를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하였다. 악한 자가 모든 가라지를 뿌린 것이다. 그가 모든 독초를 뿌린 것이며 영리한 잡종 교배로 땅을 더럽혀 왔다(원고 65, 1899).
22-24 생명 나무를 먹는 조건은 순종(계 22:2,14)―하나님의 요구에 불순종함으로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었다. 그분은 생명나무 둘레에 화염검을 두셔서 사람이 손을 들어 그것을 따먹고 죄를 영존하게 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는 조건이었다. 불순종으로 인하여 아담은 타락하였고, 죄로 인하여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을 주는 과일과 만국을 소생케 하는 그 잎사귀들을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권리들을 잃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통한 순종은 인간에게 완전한 품성과 그 생명 나무에 대한 권리가 주어진다. 생명 나무에 다시 참여하는 조건은 요한에게 하신 예수의 증언 속에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원고 72, 1901).
24 우리의 생명 나무 앞에는 화염검이 없음(마 4:4; 요 6:63)―“기록되었으되”라고 하신 성경 말씀이 우리가 전파해야 할 복음이다. 이 생명 나무 앞에는 화염검이 둘려 있지 않다. 이 생명과를 먹지 못하도록 금지된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또 어떤 권세도 그렇게 하지 못 한다. 모든 사람이 다 먹고 영원히 살 수가 있다(편지 20, 1900).

 


 

SDA 성경 주석

 

창세기 제 3 장

1. . 뱀과 더불어 이 이야기 가운데는 새로운 존재, 곧 이후에 계속되는 세계의 역사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자가 등장한다. 모세는 낙원의 완전한 상태에 대한 묘사에서 타락의 역사로 주의를 돌리는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 지구가 행복과 사랑과 완전의 세상에서 슬픔과 증오와 악의 세상으로 전환되었다. 모세는 에덴에서의 축복에 넘치는 기간, 곧 자연의 역사를 연구하며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대로 정원을 돌보며 저녁 서늘할 때에 창조주와 더불어 날마다 교통하던(3:8), 완전한 행복 속에서 보냈던 시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로 남겨 둔다.

들짐승 중에…가장 간교하더라. 뱀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간교한 피조물로 소개된다. “간교하다”는 단어, 아룸(‘arum)은 성경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품성의 경향을 나타내기 위하여 몇 차례 사용되는데(욥 5:12; 15:5), “영리하다” 또는 “교활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나 대개는 “신중하다”는 호의(好意)적인 의미로 사용된다(참조 잠 12:16, 23; 13:16; 14:8, 15, 18; 22:3; 27:12). 여기서는 후자의 호의적인 의미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왜냐하면 뱀은 하나님이 “좋았더라”, 심지어는 “심히 좋았더라”(1:25, 31)고 선언하였던 피조물들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뱀의 악한 특성은 타락과 그에 뒤이은 저주의 결과이지, 그것이 창조되었을 당시 그 동물의 특성은 아니다.
뱀은 실재한 동물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존재였다는 반대 주장은 그것이 진정으로 동물이었다는 명백한 진술에 비추어 볼 때 심각하게 반박할 필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온 성경은 뱀 자체가 인간의 타락에 책임이 있지 않고, 오히려 사단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매우 명백히 한다(참조 요 8:44; 고후 11:3, 14; 롬 16: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인간을 속이기 위한 시도에서 뱀을 매개체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때때로 비유적인 의미에서 뱀으로 불린다(참조 계 12:9; 20:2).
하늘의 천사들 가운데 가장 뛰어났던 루시퍼의 타락(사 14:12, 13; 겔 28:13~15)은 명백히 인간의 타락보다 앞서 일어났다(참조 부조와 선지자, 36). 에덴 동산에서 매일 인간과 대화를 나누었던 하나님은 인간이 하늘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모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고 사단과 다른 천사들의 배도에 대해 알려 주었으므로, 아담은 그의 침입을 경계해야 하였다. 아담과 하와는 사단이 천사로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예상하였을 것이며,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단을 맞아 그의 유혹을 거절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대신 사단은 뱀을 통하여 하와에게 말했고, 그리하여 그녀를 기습하였다. 하지만 비록 하와가 그것에 속은 것이 사실일지라도, 이것이 결코 우리의 첫 어머니의 죄를 면할 수는 없다(참조 딤전 2:14; 고후 11:3).
우리의 첫 부모의 시험은 그들의 충성과 사랑에 대한 시험으로 허락되었다. 이 시험은 그들의 영적 개발과 품성의 형성에 필수적이었다. 만일 그들이 상처를 입지 않고 시험을 통과했다면, 그 결과는 그들에게 영원한 행복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견뎌낼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험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고전 10:13), 그는 사단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또는 이 한 나무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그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영적 선물,Ⅰ, 34). 그러므로 사단은 하나님보다 훨씬 열등할 뿐 아니라 인간 자체보다 훨씬 저등한 한 피조물의 형태로 왔다. 아담과 하와는 단순한 동물의 매개체를 통하여 사단이 그들을 설득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게 하도록 허락함으로써 이중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뱀을 자기의 매개체로 사용한 사단은 여자에게 단독으로 말할 수 있을 때를 찾았다. 한 개인이 자신을 보호해 주는 환경으로부터 떠나 있을 때, 나쁜 일을 저지르도록 그를 설득하기가 항상 더 쉽다. 하와가 남편 곁에 머물러있었다면, 남편의 존재는 그녀에게 보호막이 되었을 것이며, 그 이야기는 의심할 바 없이 다른 결말을 맺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참으로…하시더냐. 사단은 순진해 보이지만 매우 교묘한 질문을 그녀에게 했다. 그 질문은 (1) “너희들이 먹지 말아야 할 실과 나무들이 동산에 있느냐?”라는 뜻에서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로 번역해야 할지 혹은 (2) “동산의 어떤 나무의 실과도 먹어서는 안 된다”로 번역해야 할지 논란이 되어 왔다. 히브리어는 두 번역이 다 가능하므로, 다소 모호한 점이 있다. 사단은 자신의 말이 불명확하고 모호하도록 의도하였다. 그의 목적은 명백하였다. 그는 여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명령의 진정한 어법과 정확한 의미에 관해서, 특히 그러한 명령의 타당성과 공정성에 관해서 의심의 씨를 뿌리기 원했다.

2.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하와는 그 질문을 위에서 논의된 두 번째 의미로 이해했음이 명백하고, 따라서 돌이켜 남편에게로 달아나는 대신에 망설임과 의심의 표시를 나타내고, 그 주제를 뱀과 더불어 더 깊이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선언하였다. 하와는 이 말을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로 바꾸었다. 왜냐하면 계명을 범함으로 이르러 오는 죽음의 형벌을 충분히 확신하였으므로, 그 여자는 그러한 행동에는 죽음이 뒤따를지도 모른다고 선언한 것이다. “~할까 하노라”에 해당하는 단어 펜(pen)은 치명적인 것으로 판명될지도 모르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장난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오는 내적인 경각심을 나타내는데, 그것은 그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 취해진 냉소적인 태도 아래 숨겨져 있다. 하와의 말 속에 담긴, 뱀의 말을 반영하는 의심과 머뭇거림은 그녀의 자비한 창조주에 대한 본래의 사랑보다는 오히려 현저히 죽음에 대한 공포가 순종의 동기가 되게 한다. 하나님의 명령의 절대적인 공의에 대하여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또 다른 징후는, 하와가 자신에게 분명하게 알려진 그 나무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나무를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라는 식으로 그것의 위치를 일반적인 용어로 언급함으로써,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에덴 동산의 가정에 있는 다른 나무들과 거의 동일한 부류 가운데 두었다.

4.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사단의 첫 번째 질문이 정말 그러했듯이, 의심을 불러일으키고자 의도된 것이라면, 그가 뒤이어 한 진술은 권위적인 선언의 모습을 띤 기만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진실과 거짓이 가장 교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이 주장은 히브리어로 할 수 있는 최고의 강조법으로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을 반박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 사단은 공공연한 거짓말로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에 도전하였다. 그런 이유로 그리스도가 그를 거짓의 아비라고 부른 것(요 8:44)은 옳다.

5. 너희 눈이 밝아. 사단은 한 발 더 나아가 하나님이 금지한 이유를 그럴듯하게 제시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비난하였다: (1) 그는 피조물의 행복을 시기하였다. 사단은 사실상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내 말을 믿어라. 그 나무를 금한 것은 그 열매를 먹음으로 너희가 죽을 것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너희의 주인과 경쟁자가 될 것을 염려해서이다.” (2) 그의 말은 거짓말이다. 사단은, 그 과일을 먹으면 죽음이 이르러 올 것이라고 하나님이 거짓말을 했다고 비난하였다. 하나님의 요구가 가장 가증스럽고 괘씸한 양상으로 제시되었다. 진실에 거짓을 뒤섞음으로써 사단은 하와의 마음을 혼란시켜 하나님의 말과 그의 말을 분간하기 어렵게 만들고자 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한 말(2:17)과 유사하게 들린다. “선악을 알 줄”이라는 구절도 마찬가지다. “너희 눈이 밝아질 것이라”는 약속은 현재의 제한된 시야가 뱀의 충고를 따름으로써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 「제임스왕역」에서 “신들”(gods)로 번역된 동일한 단어 엘로힘(’elohim)이 1, 3, 5절에서는 “하나님”(God)으로 번역되고 있다. 여기서 「제임스왕역」의 번역자들은 「70인역」과 「불가타역」을 따랐다. 올바른 번역은 “너희가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이다. 이것은 사단의 말(참조 사 14:12~14)의 신성모독적인 성격과 그의 속임수의 심각성을 가장 예리하게 나타낸다.

6. 여자가 본즉. 여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 싹튼 다음에는 그 나무가 매우 다르게 보였다. 그것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세 번씩이나 언급되고 있다. 그것은 그녀의 미각과 눈 그리고 지혜의 증가를 바라는 그녀의 갈망에 호소하였다. 열매를 따먹고자 하는 욕망으로 그 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사단의 유혹에 동의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마음에 하나님의 명령을 범하는 죄를 지었다. “탐내지 말지니라”(출 20:17). 그 열매를 따서 먹는 행위는 범죄의 길에 들어서는 일의 자연스런 결과일 뿐이었다.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신에게 권리가 없는 것을 탐함으로, 그 여자는 계명을 하나씩 차례로 범했다. 그녀는 다음에 하나님의 소유를 훔침으로 여덟째 계명을 범했다(출 20:15). 금지된 열매를 먹고 그것을 남편에게 줌으로써 그 여자는 또한 여섯째 계명을 범했다(출 20:13). 그런 다음 그녀는 사단을 하나님보다 높이 평가하고 자신의 창조주보다도 오히려 그의 말에 순종하였기 때문에 첫째 계명을 위반하였다(출 20:3).

남편에게도 주매. 자신이 즉시 죽지 않는 것, 즉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는 유혹자의 단호한 주장을 확증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사실을 목격하고, 하와는 기만적인 의기양양한 감정을 경험하였다. 그녀는 또한 남편과 그 느낌을 함께 나누기를 원했다. 이것은 성경이 아담을 “남편”이라고 부른 첫 번째 경우이다. 그러나 “돕는 배필”이 되는 대신에 그녀는 그를 파멸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여자가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었다는 진술은 남편이 유혹의 현장에 내내 말없이 그녀와 함께 서 있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녀는 남편을 다시 만났을 때 “자기와 함께” 먹고 예상되는 유익을 함께 나누도록 그 실과를 그에게 주었다.

그도 먹은지라. 아담이 먹기 전에 그와 그의 아내 사이에 대화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가 죄와 불순종의 길에 들어선 아내를 따라야 할까 아니면 하나님이 어떻게든지 그의 깨진 행복을 회복시켜 줄 것임을 믿고 그녀를 포기해야 할까? 그녀가 그 실과를 먹은 결과로 죽지 않았으며 어떤 명백한 해(害)도 그녀에게 이르러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담을 미혹하지는 못했다.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았다(딤전 2:14). 그러나 아내에 대한 그 자신의 사랑과 더불어 그녀의 설득의 힘 때문에 그는 어떤 일이 닥치든 타락의 결과를 함께 나누기로 하였다. 치명적인 결단이었다! 그가 그 비극적인 문제 전체를 하나님과 함께 의논할 기회를 갖기까지 기다리는 대신에, 그는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결정하였다. 아담의 타락이 더욱더 비극적인 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심하지도 않았으며 하와처럼 속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무서운 위협이 실현될 것이라는 어떤 예상을 갖고 행동한 것이다.
하와의 범죄가 통탄할 만하고 인류에게 잠재적인 불행을 가져왔지만, 모든 인류가 반드시 그녀의 선택으로 인한 형벌에 연루(連累)되지는 않았다. 죄와 죽음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게 한 것은 하와의 선택 때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명백한 계명을 분명히 이해하고 행한 아담의 고의적인 선택이었다. 하와는 꾀임을 받았으나, 아담은 꾀임을 받지 않았다(참조 롬 5:12, 14; 고전 15:21; 딤전 2:14; 고후 11:3). 하와의 불충성에도 불구하고 아담이 하나님께 충성했다면, 하나님의 지혜는 그가 처한 궁지를 해결해 주고 인류에게 임한 재난을 피하게 해주었을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56).

7. 그들의 눈이 밝아. 사단의 모호한 약속의 성취를 기록한 이 말 속에 얼마나 풍자가 담겨 있는가! 그들의 지성의 눈이 열렸다-그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무구(無垢)하지 않음을 알았다. 그들의 육체적인 눈이 열렸다-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게 되었다.

치마를 하였더라. 서로의 면전에서 부끄러운 상태로 서 있었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면하고자 애썼다. 무화과 잎으로 만든 치마는 그들이 상실한 무구(無垢)한 빛의 의복을 대신한 가련한 대용품이었다. 양심은 일깨워졌다. 이 부끄러운 감정은 감각에 그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다는 의식에 뿌리를 둔 것임은 그들이 그분을 피해 숨었다는 사실로 볼 때 명백하다.
성경에서 언급된 인간의 타락에 대한 이야기와 유사한 내용을 보여 주는 고대의 유일한 명각은 수메르와 아카드의 이중 언어로 된 시인데, 그것은 “그 처녀가 금지된 것을 먹었으며, 그 처녀, 곧 죄의 어머니는 악을 범했고, 죄의 어머니는 고통스런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A. 제레미아스, 고대 동양의 빛으로 본 구약[라이프찌히, 1930], 99).

8.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 조용한 저녁 바람이 정원을 상쾌하게 하는, 하루가 끝날 무렵의 하나님의 정기적인 방문은 그 행복한 부부에게 항상 기쁨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가까이 오는 소리는 놀람의 근원이 되었다. 두 사람은 감히 그들의 창조주를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두려움의 원인은 겸손이나 정중함이 아니라 깊은 죄의식이었다.

9. 네가 어디 있느냐. 항상 하나님의 접근을 환영하였던 아담은 이제 숨었다. 그러나 마치 그가 숨은 곳을 몰라서 아담을 부른 것이 아니라, 자복하도록 하기 위해 부르는 하나님을 그는 피할 수 없었다. 아담은 자신이 벗었음을 알고 당황하여 스스로 숨었다고 하나님에게 말함으로써 죄를 그 결과 뒤에, 자신의 불순종을 자신의 수치심 뒤에 숨기고자 하였다. 죄의 결과에 대한 그의 의식은 죄 자체보다도 예민하였다. 여기서 처음으로 우리는 타락한 상태에 처한 인간의 특성인, 죄와 형벌 사이의 혼동을 목격한다. 인간은 죄 자체보다도 죄의 결과에 더 민감하며 그것을 더 혐오한다.

12. 하나님이 주셔서 함께 하게 하신 여자. 하나님은 당신이 아담의 범죄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질문을 함으로써 그에게 죄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 주고자 하였다. 아담의 대답은, 자신의 곤혹스러움에 대한 우회적이고 회피적인 변명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비난이 되었다. 아담의 품성은 불순종의 길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와 같이 변하였다. 자신의 아내를 그처럼 소중히 여겨 그녀와 분리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의도적으로 범했던 그 사람이 이제는 그녀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라며 냉담하고 무정한 반감을 가지고 말한다. 그의 말은, 아버지에게 요셉에 대하여 “아버지의 아들”(창 37:32; 비교, 눅 15:30)이라고 말한 야곱의 아들들의 말과 닮은 데가 있다. 죄의 쓴 열매들 가운데 하나는 “무정하”고(롬 1:31) 가혹한 마음이다. 그처럼 연약하고 유혹적인 피조물에 속박됨으로 인해 생긴 자신의 비통한 곤경에 대해 하나님이 책임져야 마땅하다는 암시는 배은망덕의 타락의 심연까지 내려간다.

13. 뱀이 나를 꾀므로. 여자도 자신을 속인 일에 대하여 뱀을 비난하면서 한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담도, 그의 아내도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다른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씌움으로 비난을 피하려고 하였다. 어느 쪽도 회개의 증거를 보여 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고백 가운데는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차이점이 있다. 여자는 자신이 속았다고 항의하였으나, 아담은 자신의 행위가 그 결과를 충분히 아는 가운데 행해진 의도적인 것이었음을 넌지시 인정하였다.

14. 네가…저주를 받아. 뱀이 그의 동료들보다도 더 큰 죄의 저주를 감당해야 했지만, 죄의 저주는 그에게만 아니라 모든 동물들에게도 내린다. 원래 피조물들 가운데 가장 영리하고 아름다웠던 뱀은 이제 날개를 빼앗기고 이 때부터 먼지 속을 기어다닐 운명에 처하였다.
이렇게 하여 생각이 없는 짐승들이 복수심에 불타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저주는 멀리까지 미치는 죄의 결과를 그에게 각인(刻印)시켜 주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아담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 그가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지만 그의 죄의 결과를 담당해야 하는 이 피조물들을 바라보았을 때, 그것은 그의 마음에 격렬한 고통을 가져다주었음이 틀림없다(부조와 선지자, 68). 언제나 악의 상징이 되어왔던 뱀에게는 고통을 당하도록 하기보다는 오히려 사람 앞에서 죄의 결과에 대한 상징이 되도록 하기 위해 저주가 더 무겁게 임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뱀 앞에서 극도의 불쾌감과 공포를 느끼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흙을 먹을지니라. 뱀은 실제로 흙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비평적인 주석가들은 고대인들이 오류를 범했다고 선언하였는데, 이는 고대인들은 뱀이 항상 배로 기어다니며 심지어는 거의 어떤 음식도 구할 수 없는 사막에서 흙을 먹고 산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된 개념이 창세기의 저자에게 영향을 미쳐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이 신념과 조화되게 뱀에게 선언된 저주를 공식화하도록 했다고 주석가들은 말한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뱀이 자신의 먹이를 먹을 때는 약간의 흙도 먹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다소간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땅에서 그들의 먹이를 취하는 많은 동물들에 대해서는 그 말이 사실이 아닌가? 이 문제는 “흙을 먹을지니라”는 구절을 비유로 간주할 때 사라지게 된다. 그것은 최근에 발견된 고대인들의 문학과 편지들이 나타내는 대로 그들에 의해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계(下界)로 내려간 이쉬타르(Ishtar)에 대한 이교의 신화는 “흙이 그들의 음식이요 진흙이 그들의 식물”인 저주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말한다. 원수들에게 선언된 저주들 가운데는 그들이 흙을 먹게 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거듭 반복되고 있다. “할렉 사람들의 행진”이라는 오래된 웨일즈의 전쟁 노래에서 “그들은 흙을 씹을 것이다”라는 조롱이 원수들에게 퍼부어진다. 이러한 빛에 비추어 볼 때,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는 표현은 단순히 “네가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큰 저주를 받을 피조물이 될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15. 내가…원수가 되게 하고. 여기서 여호와는 하와에게 말을 건넨 실제적인 뱀에게 말하는 데서 돌이켜 옛 뱀 곧 마귀에게 심판을 선언한다. 예언적인 언어로 표현된 이 심판은 그리스도 교회에 의해서 구원자의 도래(到來)에 대한 예언으로 항상 이해되어 왔다. 비록 이러한 해석이 의심할 나위 없이 옳지만, 그 예언은 또한 문자적으로도 사실임을 지적할 수 있다. 뱀과 사람이 어디서 만나든지 그들 사이에는 무서운 적의가 있다.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사단의 “후손” 즉 그의 추종자들(요 8:44; 행 13:10; 요일 3:10)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영속될 투쟁이 언급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놀랍게도 “후손”으로 불려진다(계 12:1~5; 참조 갈 3:16, 19). “마귀의 일을 멸하려”(히 2:14; 요일 3:8) 온 이는 바로 그였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상하게 하다”는 히브리어로 슈프(s∨up)이다. 이 말은 “분쇄하다” 또는 “누워 기다리다”라는 뜻이 있다.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은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임이 분명하다. 비록 예언된 적의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있게 될지라도, 분쇄되어야 할 것은 뱀의 머리요 그의 후손이 아님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복으로 뱀은 단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밖에 상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후손”이 단수형으로 말해진 것은 여자의 무수한 후손들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일에 연대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개인이 이 일을 성취할 것임을 나타낸다. 이러한 관찰 결과들이 분명히 보여 주는 대로, 그 선언 속에는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에 있는 대쟁투, 곧 하늘에서 시작된 전쟁(계 12:7~9)은 그리스도가 다시 그를 패배시킨(히 2:14) 세상에서 계속되었으며, 마침내 천년기 끝에 사단의 멸망과 더불어 끝날 것(계 20:10)이라는 기록이 압축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이 전쟁에서 상처를 입지 않고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손과 발에 난 못자국과 그의 옆구리에 난 상처는 뱀이 여자의 후손을 상해한 격렬한 투쟁(요 20:25; 슥 13:6; 초기문집, 53)을 영원히 상기시켜 주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선언은 하나님의 법도에서 떠나 그분 앞에 서 있는 실의에 빠진 두 죄인에게 큰 위로를 가져다 주었음이 틀림없다. 충성되게 남아 있는 한, 지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었을 아담은 그의 충성심을 하나님에게서 뱀에게로 옮김으로써 그의 권세를 사단에게 양도하였다. 사단은 자신이 찬탈한 이 세상에 대한 “권리”가 아담의 굴복을 통해서 얻은 것임을 충분히 알고 있었음이, 시험의 산에서 그가 그리스도에게 한 진술(눅 4:5, 6)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담은 자신의 손실의 범위, 곧 이 세상의 지배자에서 사단의 노예가 된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에 대한 선고가 선언되는 것을 듣기 전에, 그의 산산이 깨어진 영혼에 소망의 치료하는 향유가 발라졌다. 그는 이제 자신의 타락에 대한 책임을 씌웠던 여자에게서 구원-하나님과 사람의 대적(大敵)을 정복할 권세가 있는 약속된 후손-을 찾아야 할 것이었다.
하나님은 얼마나 친절하신가! 하나님의 공의는 죄가 그 형벌을 치를 것을 요구하였으나, 하나님의 자비는 이미 타락한 인류를 구속할 길, 곧 하나님의 아들의 자발적인 희생에 의한 길(벧전 1:20; 엡 3:11; 딤후 1:9; 계 13:8)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지불해야 할 대가를 이해하도록, 시각 교재를 제공해 주기 위한 방편으로 제사 의식을 제정하였다. 무죄한 어린양은 인간의 생명을 위하여 생명의 피를 흘려야 했으며, 죄인의 벌거벗음을 가려주기 위하여 그의 가죽을 주어야 했다. 그리하여 인간이 항상 하나님의 아들을 상징적으로 상기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그는 인간의 범죄를 속하기 위하여 그의 생명을 내놓아야 할 것이었으며 그의 의(義)만이 인간을 덮어주기에 충분할 것이었다. 우리는 아담이 구속의 계획을 얼마나 분명하게 이해하였는지 모르나, 죄가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며 구속주가 여인의 후손으로 태어날 것이고 잃어버린 통치권을 다시 얻으며 에덴의 행복이 회복될 것이라는 사실이 충분히 계시되어 그에게 보증이 되었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구원의 복음은 성경의 중심 주제이다.

16. 내가 네게…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잉태하는 고통”이라는 구절(문자적으로는 “너의 고통과 너의 잉태”로 되어 있음-역자 주)은 일반적으로 유사한 두 구절로 하나의 사상을 표현하는 문학 형태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너의 잉태의 고통”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바로 시초부터 인간은 “생육하고 번성하라”(1:28)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계속되는 잉태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되도록 의도되었다. 그러나 죄의 유입은 그때부터 잉태에 고통이 수반될 것임을 의미하였다.

수고하고. 참으로 출산의 고통은 성경에서 육체와 정신의 극심한 고뇌에 대한 상징(참조 미 4:9, 10; 살전 5:3; 요 16:21; 계 12:2)이 될 만큼 격렬할 것이었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사모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슈크(s∨uq)는 “쫓아가다, 어떤 것을 간절히 열망하다”는 뜻으로, 그것에 대해 있을 수 있는 가장 강한 열망을 나타낸다. 비록 남편에게 억압되고 출산의 고통으로 괴로움을 당할지라도, 여자는 여전히 남편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느낄 것이었다. 주석가들은 이것이 형벌의 일부냐 아니냐에 대해서 의견이 엇갈려 왔다. 이 “사모함”은 여성의 고통을 경감시키고 남편과 아내의 마음을 더욱더 밀접하게 연합시키기 위하여 주어졌다고 결론짓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그 여자는 하나님이 정해 준 남편과의 관계를 깨뜨렸다.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이 되는 대신에 그녀는 그를 꾀는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남편과 동등했던 그녀의 지위가 박탈되었다. 남편은 지배자와 주인으로서 그녀를 “다스릴” 것이었다. 성경에서 아내는 그녀의 주인에 의해 “소유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대부분의 비(非)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여자는 수세대를 통하여 신분의 저하와 실질적인 노예 상태에 처해 왔다. 하지만 히브리인들 가운데서도 여성의 조건은 비록 압제나 노예의 상태는 아닐지라도 명백히 종속적인 것이었다. 그리스도교는 복음의 축복에 관하여 여자를 남자와 동일한 위치에 두었다(갈 3:28). 비록 남편이 가정의 머리가 되어야 할지라도, 그리스도교의 원칙들은 남자와 그의 아내가 진정한 동반자 관계를 경험하도록 이끌 것이며, 각자가 다른 사람의 행복과 복리에 헌신하므로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다스리려”는 시도를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참조 골 3:18, 19).

17.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처음으로 “아담”이라는 명사가 관사 없이 고유 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2:19, 23; 3:8, 9에 나오는 하아담(ha’adam)이 「제임스왕역」에서 인명(人名)으로 번역되어 그 사실이 분명치 않아 보이지만, 각 경우에 있는 관사 하(ha)는 그 단어가 “그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형벌을 선고하기 전에 하나님은 왜 그 일이 필요하고 적절한지 설명하였다. 아담은 하와의 설득력 있는 주장에 따라 행동함으로 그녀의 말을 하나님의 말보다 더 우위에 두었다. 그리하여 그는 최고의 애정과 충성심을 하나님으로부터 거둬들였으며, 삶의 축복들, 심지어는 생명 자체까지도 상실하였다.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보다 높인 후에, 아담은 하나님을 떠나 독립한다는 것은 보다 고양된 삶의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배워야 하였다. 그러므로 죽음은 그에게 그 자신의 본성의 무가치함을 보여 줄 것이었다.

땅은…저주를 받고. 하나님이 아담이나 그의 아내를 저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주목해야 한다. 저주는 오직 뱀과 땅에게 선언되었다. 그러나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는다고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했다.

너는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잉태와 관련된 고통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동일한 단어가, 이제 저주받은 땅으로부터 빈약한 생계를 꾸려갈 때 직면하게 될 난관을 아담에게 알려 주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그가 생존하는 동안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날 소망은 없을 것이다. “종신토록”이라는 표현은 죽음이 확실히 이르러 올 것이지만 그 사건이 얼마간은 연기될 것임을 나타내는 첫 번째 암시이다.

18. 가시덤불과 엉겅퀴. 타락 전에는 음식으로 사용할 수 있거나 보기에 아름다운 식물들만이 땅에서 자랐으나, 이제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도 낼 것이었다(교회증언, Ⅵ, 186). 땅을 경작하는 데 필요한 증가된 노동은 사람의 생존에 따른 불행을 증가시킬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독립된 생활은 기껏해야 슬픔과 고통의 생활임을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배워야 하였다.

채소. 1:11, 29 주석을 참조하라. 하나님의 형벌은 식사에도 부분적인 변화를 가져 왔다.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곡류와 견과와 과일의 양과 질은 저주의 결과로 매일의 식량을 위하여 인간이 채소로 눈을 돌려야 할 정도로 감소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런 변화는 또한 부분적으로는 생명나무로부터 얻는 어떤 요소들의 상실, 그리고 기후의 변화 때문에 이르러 왔을 수도 있고, 어쩌면 대부분은 생계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힘든 노동을 하도록 인간에게 내린 선고에 따른 결과였을 수도 있다.

19. 얼굴에 땀이 흘러야. 인간의 수고로운 삶에 더해질 고생이 이제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다루기 힘든 땅에서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식물을 끌어냄으로써 살아가야 하는 농부를 구체적으로 가리키지만, 다른 모든 직업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인간의 성취는 오직 수고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형벌은 사실상 죄된 인간들을 위해 변장된 축복이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사람이 일을 하면 한가하게 시간을 보낼 때보다 죄를 훨씬 덜 짓게 될 것이다. 수고와 노동은 품성을 계발시키며 사람에게 겸손과 하나님과의 협력을 가르쳐 준다. 이것은 그리스도교회가 일반적으로 노동자 계급에서 가장 충성된 추종자와 지지자를 얻게 되는 한 가지 이유이다. 일은 고된 때에라도 멸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 안에 복이 있다.”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여호와는 아담에게, 무덤이 그의 확실한 종착지임을 알려 주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구속의 계획(15절)이 그의 현재의 생명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을 보증해 주는 것임을 이해하였다. 조건적 불멸에서 죽어야 할 운명으로 옮겨진 아담의 본성 가운데 일어난 변화와 더불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무서운 예언이 성취되기 시작하였다. 인간이 자비로 은혜의 날을 허락받지 못했다면, 죽음은 즉시 일어났을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의 생명을 요구하나, 그분의 자비는 인간에게 생명을 다시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이 성경 구절은 어떤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타락과 그 결과에 대한 이야기의 문맥에 삽입되어 혼란을 일으키는 구절이 아니다. 그것은 아담이 여인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믿었으며 이 믿음을 그가 지금 그의 아내에게 준 이름을 통해 나타냈음을 보여 준다.
하와 (h.awwah) “생명”을 뜻하며, 여기서 「70인역」은 조에(Zo-e-)로 번역한다. 그것은 또한 고대 페니키아의 명각들에서 발견되는 고대 셈어 형태이지만,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히브리어에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이것은 아담이 고대 셈어를 말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제안되었다. 만일 모세가 당대의 히브리어에 상응하는 말을 사용했다면, 그는 여자의 이름을 하와(h.awwah)라고 하는 대신에 하이야(h.ayyah)로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색다른 고어 형태의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지식이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보여 준다. 4:1에서 하와(h.awwah)는 「70인역」에 의해 유아(Eua)로 대충 음역되었는데, 여기서 영어의 이브(Eve)가 유래하였다.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아담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선고가 막 선언되었을 때에 그녀를 “모든 산 자의 어미”로 보면서 믿음으로 그의 아내에게 “산 자”라는 이름을 주었다. 또한 그는 무덤 너머를 바라보고 그의 아내에게 약속된 후손에게서 그 날 그들이 빼앗겼던 불멸을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회복시켜 줄 한 분을 보았다. 우울과 낙담-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도 있었으나-속에서 그녀를 “모든 죽을 자의 어미”라고 부르는 대신에, 그는 믿음으로 자신의 눈을 그의 심판자에게 고정시켰으며, 그녀가 첫 아이를 출산하기 전일지라도, 소망을 가지고 그녀를 “산 자”라고 불렀다. 그에게 믿음은 진정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였다.

21. 가죽옷.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내보내기 전에, 하나님은 그들 앞에 놓여 있는 힘든 노동과 타락에 뒤따른 극도의 더위와 추위를 막아줄 보호막에 적합한, 보다 내구력이 있는 의복을 그들에게 마련해 주었다(부조와 선지자, 61). 또한 가죽옷은 그들이 잃어버린 순결함과 죄의 삯인 사망과 그분 자신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세상의 죄를 없이 할 하나님의 약속된 어린양을 항상 상기시켜 줄 것이었다. 동물의 보호자가 될 사명을 부여받은 그가 이제는 불행하게도 그 동물들 중 하나의 생명을 그 자신이 취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가 살기 위해 동물들이 죽어야 하였다.
비록 여기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제사 제도가 이때에 제정되었다(부조와 선지자, 68; 참조 시대의 소망, 28). 다음 장에서 언급될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의 첫 아들들이 이 의식(儀式)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만일 하나님이 희생제사에 대하여 명확한 규정을 발표하지 않았다면, 그분이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고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은 사실은 독단적인 처사가 되었을 것이다. 가인이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비난하지 않은 것은 그가 그의 동생과 마찬가지로 요구되었던 바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고대에 보편화된 동물의 희생제사는 이 관습의 공통적 기원을 말해 준다.

22. 우리 중 하나같이. 인간은 자신의 형벌과 구속의 계획에 관해 배웠으며, 옷을 제공받았다. 불순종으로 그는 선악간의 차이를 알게 되었으나, 하나님은 그가 하늘의 뜻에 자발적으로 협력함으로써 이 지식을 얻게 할 작정이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사단의 약속은 이제 인간이 죄의 결과에 대하여 어떤 것을 알게 된 그 점에서만 성취되었다.

그가 손을 들어. 인간이 불멸하는 죄인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생명나무의 열매를 계속하여 취하지 못하도록 금하는 일이 이제 필요하게 되었다(부조와 선지자, 60).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죽음의 권세 아래 떨어졌다. 그러므로 불멸을 주는 열매는 이제 그에게 단지 해(害)만 끼칠 수 있을 뿐이었다. 죄와, 그로 인한 끊임없는 불행한 상태에서 불멸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위하여 계획한 삶이 아니었다. 인간이 이 생명을 주는 나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아담이 당시에는 충분히 깨닫지 못했을지 모르나 장차 올 세상에서는 감사하게 될 하나님의 자비의 행위였다. 거기서 그는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생명나무의 열매를 영원토록 먹게 될 것이다(계 22:2, 14). 그리스도의 희생의 상징들에 동참함으로써 우리는 오늘날 믿음으로 그 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의 낙원에서 모든 구속받은 자들과 더불어 그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게 될 그때를 확신을 가지고 기대하는 특권을 누린다(교회증언, Ⅷ, 288).

24.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이마에 땀을 흘림으로 생계를 유지하도록 아담을 에덴에서 내보냄으로, 하나님은 틀림없이 아담뿐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도 슬픈 의무가 되었을 일을 실행하였다. 원시림을 말끔히 치운다고 하더라도, 잡초와 곤충과 야수들과의 계속되는 투쟁이 상존할 것이었다.

그룹들. “그룹”이란 이름의 기원은 분명치 않으나, 크룹(kerub)이라는 단어는 아마도 “축복하다” 또는 “기도하다”는 뜻의 앗수르어 카라부(kara^bu)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성경은 그룹을 우리가 천사라고 부르는 존재들, 특히 하나님과 그의 보좌에 가까이 있는 천사들의 계급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낸다(겔 9:3; 10:4; 시 99:1). 이러한 이유로 그룹의 형상이 법궤와 성막의 휘장 위에 있어야 했으며(출 25:18; 26:1, 31), 나중에는 성전의 벽과 문들에 새겨졌다(왕상 6:29, 32, 35).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길을 지키고 있는 하늘의 존재들에 대한 기억은 아마도 고대 메소보다미아의 길가메쉬 서사시에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생명의 풀” 즉 불멸을 찾아 나섰던 사람이다. 그 서사시는 “생명의 풀”이 발견되어야 했던 곳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전갈같이 생긴 사람들이 그 문을 지키고 있는데, 그들의 공포는 무시무시하고, 그들의 바라보는 눈길은 죽음이다. 곧 그들의 무서운 영광은 산들을 무너뜨린다”고 하였다. 앗수르의 궁전들은 반은 황소이며 반은 사람인 카리부(ka^ribu)라고 하는, 큰 날개를 가진 거상(巨像)들에 의해 수호되었는데, 아마도 하나님이 지정한 낙원의 수호자들에 대한 기록의 이교적인 와전(訛傳)일 것이다. 애굽의 신전들에서는 그룹을 나타내는 무수한 조상(彫像)들이 발견되는데 인간과 유사한 형상이며 보호하려는 듯이 그 날개들을 신의 전각(殿閣) 위로 펴고 있다.

화염검. 빛은 항상 거룩한 임재의 상징이 되어 왔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셰키나의 영광도 지성소 안의 언약궤를 덮는 속죄소 양쪽에 하나씩 있는 두 그룹들 사이에 나타났다(참조 출 25:22; 사 37:16; 시대의 소망, 464; 부조와 선지자, 349; 각 시대의 대쟁투, 24). “화염검”은 문자적으로 “검의 번쩍임”으로 읽히는 히브리어에 대한 다소 부정확한 번역이다. 낙원의 문을 지키는 실제적인 검은 없었다. 오히려 매우 신속하게 “두루 도는” 검으로부터 나오는 빛의 번쩍이는 반사처럼 보이는 것, 즉 강렬하게 빛나는 중심부로부터 발산하는 번쩍이는 빛줄기들이 있었다. 더욱이 「제임스왕역」과 「개역한글판」에서 “두루 도는”으로 번역된 히브리 동사 미트합페켓(mithappe-ket)“스스로 두루 도는”을 의미한다. 이 동사 형태는 강조형으로, 재귀적인 동작을 표현하는 데만 사용되며, 이 경우에는 “검”이 스스로 빙빙 도는 것처럼 보였다는 결론을 요구한다. 이 찬란한 살아 있는 빛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임재의 현시(顯示) 셰키나의 영광이었다. 수세기 동안 하나님에게 충성된 자들은 그를 예배하기 위하여 그것 앞에 모였다(부조와 선지자, 62 83, 84).

출처 : 빛을 따라
글쓴이 : 빛을따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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