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머레이(John Murray: 1898-1975) 介紹神學者,哲學者(철학과 신학)
-존 머레이(John Murray: 1898-1975) 참고 자료
존 머레이의 생애
그 이후 1924년에 프린스턴 신학교에 유학하여 당대의 유명한 워필드와 메이첸으로부터 개혁주의 신학의 깊은 영향을 받고, 고향인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다시 돌아와 계속 공부하던 중 1929년에 프린스턴 신학교의 부름을 받고 조직신학자 카스퍼 핫지 교수를 돕는 강사로서 신학교와 인연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가 프린스턴에 돌아온 그 이듬해에 프린스턴은 좌경화 문제로 인해 둘로 나뉘어지게 되었고, 그 역사의 현장에 서있던 머레이는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고 철저히 역사적 기독교를 옹호하는 존 그레샴 메이첸을 따라서, 1930년 오스왈드 앨리스(Oswald T. Allis) 그리고 R. D. 윌슨(R. D. Wilson),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등과 함께 필라델피아에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설립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메이첸이 설립한 정통장로교회의 목사로 안수를 받고(1937넌), 1966년 은퇴하기까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고, 은퇴 이후에도 줄곧 웨스트민스터에서 강의를 하다가 1975년 사망을 하였다.
그러한 그의 신학적 입장은 그로 하여금 한번도 애매모호한 언어유희로 신학적 도전을 피해가는 비겁한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말하기를 “가장 합당한 신앙적 교훈은 인식적인 앎뿐만이 아니라 실천적 경건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여 기독교 교육의 원리를 강조하였다.
성경 주해에 있어서 머레이의 신학적 강조는 ‘로마서 주석’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듯이 그리스도를 중심한 ‘구속론’에 있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되는 양자됨을 구속적인 특권의 극치로 묘사하고 있다.
2차 대전에서 한쪽 눈을 잃은 그였지만 문제의 핵심을 바로 꿰뚫는 안목을 가지고, 경우에 합당한 말로 전파하는 그의 설교는 ‘선명한 설교의 모델’이 되었고, 스코틀랜드 칼빈주의자의 주목할만한 ‘언어 사용’을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학문과 함께 경건을 겸비했던 존 머레이 교수는 구프린스턴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찰스 핫지-워필드-메이첸으로 이어지는 미국 장로교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의 맥을 잇는 탁월한 조직신학자로서 길이 남아 뒤를 따르는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으로 자리잡고 있다.
머레이의 저술들
이러한 책들을 제외한 그의 논문과 강연, 강의, 설교들은 그의 사후에 총 4권(1권: 진리의 주장, 2권: 조직신학, 3권: 살아계신 하나님 섬기기, 4권: 신학의 연구들)으로 구성된 선집(Collected Writings, 1976-1983)으로 출판되었다.
머레이의 신학 저술들에 전반적으로 드러나는 신학적인 강조점들은 첫째, 기독교 윤리의 근거를 창조 질서에 두고, 둘째 성경적인 언약을 맹세할 의무가 있는 약속으로 이해함으로써 개혁주의 신학의 이중 언약의 개념을 채용하기를 꺼려하였다. 셋째, 성화의 교리를 성화적(Progresseive)인 것 뿐만 아니라 결정적인(Definitive) 것으로 설명하였다. 넷째, 그는 죄의 전가를 즉각적인 것으로 해설하였다.
<고려신학교 연수원>
참고)이안 머레이(진리의 깃발;청교도 서적관련)가 존 머레이의 동생이다. ===============================================================================
사형제도의 존폐에 대하여 ( J.Murray 연구)
현재 한국에는 64명의 사형수가 있지만 1997년 12월 이후 집행을 하지 않고 있다. 1948년부터 1997년 문민정부 말까지 집행된 사형수는 998명. 범죄 유형에 따른 사형 비율이 강도 살인(151명) 다음으로 공안 사범(116명)이 많았다.
역사적 개혁주의는 사형제도 존치를 주장한다. 그것은 보편언약인 아담언약과 노아언약의 취지와 부합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위한 십자가의 당위성과도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람을 고의로 죽인 자는 사형이라는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 개혁주의 윤리학자들의 공통적인 살핌이다.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강의한 존 머레이 교수나 화란 캄펜신학교에서 교수한 J. 다우마 박사가 그와 같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고의적 살인자와 달리 정치범이나 사상범의 사형은 최대한 삼가야 한다는 것이 개혁주의의 주장이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존 칼빈이 삼위일체 신관을 배격하는 한 망명객의 사형을 묵인한 것을 비판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 자유당이나 군사정권 시절 공안사범으로 몰려 억울하게 사형 당한 이들이 적지 않다. 이것은 명백히 사형제도의 남용이요 악용으로 그 장본인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렇듯 오용 내지 남용의 측면에서 보면 사형제도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의로 생명을 경시한 자의 생명을 존중하자는 것은 형평상으로 볼 때나 생명의 시여자인 하나님의 공의에 비추어 볼 때 온당한 처사라 할 수 없다.
사형제도가 함무라비 법전에 약 37개조의 규정이 있고 고조선 시대에도 8 조금법에 언급되었다하여 고대 미개한 인류의 경박한 생각으로 치부할 뿐 아니라 인류의 시작과 함께 실시된 강한 통치수단의 일환으로 이해한다면, 사형과 사면 양식의 구속(救贖)은 염연한 현실로 신임될 수 없을 것이다. 사형수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사형의 엄정한 사실 없이 절실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형제도는 유지되어야 하나 그 운용에 있어 잘못됨이 없도록 조심에 조심을 거듭할 일이다.
존머레이의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요약
1.조직신학과 자연계시
* 발췌: http://www.sorinar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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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서정에 대한 J.Murray의 견해)
존 머레이는 구원의 과정을 세분화했다. 소명, 중생, 회심, 믿음, 칭의, 입양, 성화, 견인, 영화. 과연 구원은 이런 순서로 이루어질까? 물론 머레이는 이 과정을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을 중심으로 설명하면서, 시간적인 과정으로 보지 않고 논리적인 순서로 해석한다. 그런나 성경은 구원을 이런 순서로 설명하지 않는다.
성경은 구원을 사실 상 세 단계로 설명한다. 첫째는 우리가 죄악에서 벗어나는 단계이고 그 다음은 성화의 단계이며 마지막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가 주님처럼 되는 영화의 단계이다.
필자는 이 문제를 “한국개혁신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한 적 있다. 이미 필자의 저서 『하나님 형상, 교회 그리고 영원한 안식』이라는 논문집을 참고할 것. 여기서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그 다음 종교개혁자들의 견해와 개혁파 모든 신조들이 가르치는 내용을 분석했다.
필자의 논지는 소명, 중생, 회심, 칭의 등이 구원이 이루어지는 순서가 아니고 모두 제 나름대로 죄악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사건을 다양한 시각으로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즉 우리는 구원을 소명으로, 또는 회심으로, 또는 중생으로, 또는 칭의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칭의 사건 속에 이 모든 내용들이 포함된다는 것 그리고 그 다음에 오는 것이 성화이고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영화라는 말이다.
매우 흥미롭게도 근래에 각광을 받고 있는 신학자인 스탠리 그렌츠는 이 세 단계를 회심, 성화 그리고 영화 이 세 단계로 설명한다. 여기 회심은 죄악에서 벗어나는 단계이다. 그의 저서 “조직신학”(크리스챤다이제스트) 제 15장과 16장을 참고할 것.
http://blog.daum.net/amabilepraise/8056902
고전2:11에서 바울은 말한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두가지 관찰이 가능하다 : (1) '영'이라 불리는 것이 사람속에 있다는 것, (2) 다른 사람은 얻기 어려운 지식, 즉 지적인 이해가 영의 속성으로 부가되어 있다는 것(참고,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결혼하지 않는 여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여 하되(고전7:34)라고 바울은 말한다. 이 구절은 전인적인 성화를 표현하려 하고 있으므로 총괄적인 묘사가 있는데, "몸과 영을 다"라는 표현에는 육체와 영혼의 구별이 함축되어 있다.
성화는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고후7:1) 자신을 깨끗게 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다시한번 그 총괄성은 명백하나 구별이 함축되어 있고, 앞서 언급한 몸과 영의 구별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가까이 접근해 있다.
인격에 있어 육체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과의 구별은 살전5:23에서 명백하다.
약2;26의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에는 영혼은 생기를 주는 원리라는 구별의 공표와 선언이 있다.
성경은 육체없는 인격을 영혼이라 부르며(히12:23; 벧전3:19), 육체없는 상태에서도 인격적 정체성을 인식한다고 한다. (눅9:30,31; 16:19-31; 23:43; 고후5:1-10; 빌1:22,23).
히12: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벧전3: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눅9: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눅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눅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눅16: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눅16: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눅16: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눅16: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눅16: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눅16: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눅16: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눅16: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눅16: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눅16: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눅16: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눅16: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고후5: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고후5: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고후5: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고후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고후5: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고후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고후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고후5: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빌1: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바울이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8)고 말할때, 그리고 그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1;23)라고 말할때, 그가 원한 것은 인격적 정체성의 유지, 인격이 기능들의 지적인 작용, 이러한 속성들의 가장 충만한 작용속에서의 구주와의 교제를 떠나서는 생각될 수 없다. 인격은 영혼 덕분에 그의 동일성을 유지하며, 육체 없는 상태에 적응하여 그에 걸맞는 존재양식과 영역에서 계속 존재하며 활동한다.
"혼"(soul)과 "영"(spirit)에 관한 성경의 용례는 인간성이 이분적이라 보다 삼분적이라는 사실, 곧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육체와 혼과 영의 세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종류의 신학적 신념을 가진 학자들은, 특히 지난세기부터 지금까지, 성경의 용례가 삼분설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이런 주장의 분류작업은 불가능하며, 시도하고 싶지도 않다.
예를들면, 엘리코트는 데살로니가전서5:23을 주석하면서, 여기에는 "세요소에 대한 명백한 표현이 있는 바 . . . 영(pneuma,프뉴마)은 두개의 결합된 비물질적 요소중 더 고상한 부분으로서 '사람안에서 활동하며 명령하는 우월한 힘'이며, 혼(psuche,푸수케)은 의지와 감정의 영역이며 인격의 진정한 중심으로서 '작동되며 기동되는 열등한 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들이 '이러한 단어들을 구별하여 쓰지 않았다.'(조웻)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건전한 해석의 법칙을 무시하는 것이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델리취는 물질과 정신이라는 이중적 실재를 주장하면서도 성경은 초감각적인 것이 두개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히브리서 4;12에서 혼과 영은 초감각적인 것을, 관절과 골수는 감각적인 것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리고 관절과 골수가 나눌수 있는 구성물이듯이 혼과 영 또한 나눌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체를 그 몇개의 부분으로 나눈다.
영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며 신적 형상을 지니고 있다. 타락 이래로 영은 위축되었고, 마치 소멸한 것처럼 되었다. 여기서 은혜의 역사가 시작된다. 하늘에 속한 성질이 다시 나타난다. 혼은 육체와 결합될 때 영으로부터 발산되는 생명이다. 죄로 인해 혼은 "부자유하고 방종한 정력과 정열의 부조화물이 되었고 물질적 마귀적 세력들의 손에 놀아나는 힘없는 노리개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혼과 영사이의 간극, 그리고 혼 그 자체의 비정상적 상태를 드러내 준다.
허드(J.B. Heard)는 사람의 삼분성의 계시는 진보적이며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계시와 유사하다는 주장을 편다. 구약에서 성령의 교리는 잠재적이며, 현시적이지 않다. 사람의 영의 경우도 그렇다. 신약의 서신서에서 비로서 사람의 영은 육체 및 혼과 대조되어 하나님이 형상으로 창조되고 성령에 의해 일깨워진, 신적이며 새롭게 된 성질로 나타난다.
요약하면, 허드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혼은 사람에게 자연적이며, 인간성의 정의에 필수적인 모든 능력과 힘을 포함하여 넓은 의미에서 사람의 생명이다. 영은 하나님을 아는 능력 또는 기관이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오직 우리의 영을 통하여 알려지고 예배되어 질수 있다. 혼의 기능인 이성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상징적 지식만이 가능하며, 오직 영만이 직각적인 지식을 가질수 있다. 영은 하나님께서 그자신을 알리는 성소이다. 영은 영적 안목의 기관이다.
타락이래로 영은 자연인에게서는 활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죽어 있거나 최소한 수면상태에 있다. 사람은 타락한 영이 아니라 죽은 또는 잠자는 영을 갖고 태어난다. 영은 중생하여 수면상태로부터 깨어나거나 죽음으로부터 되살아난다. 중생은 사람속에 있는 동물성을 제어하며 지성을 순화시키지만, 중생의 주요한 역할은 영적인 것을 깨우는것이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회복되고 우리의 사고는 경외,사랑,찬양으로 대체된다.
이러한 견해들을 고찰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성경의 용례를, 다음으로는 삼분설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하는 구절들을, 마지막으로는 성경의 용례가 주는 해답을 제시하고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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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해지는가? 아담의 죄에 대한 전 인류의 연관성을 신학적 용어로ꡒ전가ꡓ라고 한다. 그것은 직접 전가와 간접 전가, 두 형식으로 설명된다. 직접적 전가는 아담의 죄와 죄책 상태를 각 사람에게 직접 죄로 전가한다는 것을 말한다. 아담의 죄책은 그 어떤 것에 의해 우리에게 중개되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전가되었다. 아담은 모든 인류의 머리인 동시에 대표자다. 범죄한 아담은 우리 모두의 대표자로서 죄를 범했다. 따라서 아담의 죄는 또한 우리의 죄였다. 우리는 그의 죄책에 연루되었으며, 죄로부터 나온 저주와 관련되었다. 하나님과 우리의 대표인 아담 사이에 일종의 언약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아담의 행위가 우리를 속박한 것이다. 헤르만 바빙크, 존 머레이, 루이스 벌콥, 등 개혁주의에 속한 신학자들이 직접 전가설을 지지한다.
간접 전가설은 아담의 죄책이 즉각적 또는 직접적이 아닌, 어떤 다른 것의 중개에 의해 전달된다는 해석이다. 즉 아담의 죄책이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전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직접 전가설의 가장 큰 문제점, 즉 자신의 죄가 아닌,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강조하며, 죄를 범하지 않은 자들을 죄 있는 자로 선언하고 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현대적 형태의 간접 전가설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프랑스의 플래스(De La Place, 1596-1655)이나, 그 뿌리를 추적하면 어거스틴에 이르게된다. 어거스틴은 아담의 부패성은 부모를 통해 생리적으로 유전된다고 보았다. 우리는 이 부패성을 매개로 아담의 죄책에 관련된다. 우리는 타락 상태로 태어나므로, 역시 죄 있는 자로 간주된다. 이런 입장은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에서도 발견된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불순종으로 인하여 우리의 본성은 너무도 부패되었다. 우리 모든 사람은 죄 가운데서 잉태되고 분만된다.” 시편 기자는 인간이 “죄 중에 태어났고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었다”고 증거한다(51:5). 간접 전가설은 프랑스, 영국, 스위스, 미국 등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원죄에 대해 책임이 있는가? 웨슬리안은 원죄에 대한 신자의 책임을 부정한다. 신자는 유전적 부패성에 대해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사람이 세상에 올 때 타고난 죄에 대해서는 책망 받을 것이 없다. 그가 유죄하게 되는 것은 속죄 보혈로 준비해 놓으신 구제책을 거부할 때만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선행적 은총, 즉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원죄의 법적 결과를 무효화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불신하거나 거부할 때,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다. 한편, 칼빈주의는 모든 인간이 아담의 죄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어떻게 우리는 원죄, 즉 유전적 죄성을 제거할 수 있는가? 그것은 중생과 성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신자는 중생을 통해 법적 지위와 신분이 변하고 죄의 세력이 제거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은 죄성이 완전히 근절되거나 모든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은혜와 죄가 공존하고 있다. 따라서 신자는 중생 후에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법적 신분에 일치하는 수준까지 도덕적, 영적 상태가 성장해야 한다. 이 과정이 성결이요 성화다. 성화란 신자를 거룩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계속적 역사를 말한다. 인간의 부패와 타락성이 제거되고 하나님 형상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된다.
원죄설은 '죄의 연좌제 혹은 연대성'을 의미한다. 현대인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며, 자신의 자유와 책임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로 인해 벌을 받는다는 생각 때문에 원죄설을 배격하기 쉽다.” 그럼에도, 원죄교리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성경이 아담의 죄와 그 후손들의 죄 사이의 실제적 연관성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롬5:12-21).
http://blog.daum.net/paul-310/2787764
"그러므로..."(1)
로마서 8장은 "그러므로"(아라)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라는 말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말을 받아서 결론을 내리는 데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면 (롬 8:1)에서 언급된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의 어떤 내용과 관계된 말일까요? 이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존 머레이 같은 학자는 (롬 8:1)의 "그러므로"라는 말이 (롬 3-7장) 전체와 관련이 있는 말이라고 주장합니다. 바울은 (3-5장)에서 우리가 믿음을 통해 법적으로 무죄 선고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6-7장)에서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이 갖는 갈등에 대해서 묘사했습니다. 머레이 교수는 바울이 성도들이 믿음을 통해 법적으로 의롭게 되었지만, 아직도 죄의 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말한 후에(3-7장), (8:1)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법적으로 정죄를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죄의 세력으로부터도 해방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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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관한 고찰
1.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초대 교부들 사람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본래 사람의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특징들과 또한 거룩에 대한 기능이 존재하였다는 견해
이레네우스와 터툴리안 형상과 모양을 구분하였으며, '형상'을 신체적인 특징들에서 '모양'을 영적인 성질들에서 찾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겐 '형상'은 인간으로서의 인간의 특징을 표현하였고, '모양'은 사람에게 본질적인 아닌, 촉진되거나 상실될수 없는 품질들을 나타낸다고 주장
펠라기우스와 그의 추종자들 '형상'은 단지 사람이 이성(reson)을 부여받아 하나님을 알수 있다는 것, 자유의지(free will)를 부여받아 선을 선택하고 행할수 있다는 것, 또한 필요한 능력을 부여받아 하등 피조물을 지배할수 있다는것
어거스틴 형상은 영혼의 지성적 기능이고 , 모양은 도덕적 기능에 대해 언급한것
벨라민 형상을 사람의 자연적 은사에 대한 묘사로, 모양을 초자연적으로 사람에게 첨가된 묘사로 간주
종교개혁자들 형상과 모양 사이를 구분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본래적인 의로움이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된 것으로 또는 본래적인 상태에서의 사람의 성질 자체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함
루터 '형상'을 본래적인 의로움에서 찾음. 사람의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능력들과 같은 타고난 재능에서 찾지 않음.
칼빈 '형상'은 사람의 성질이 다른 모든 동물들의 종류들의 성질보다 초월하는 것에까지 확대된다고 하고, 아담이 부여받았던 고결성을 나타내고, 그때 그의 지능은 명백하였으며 그의 감정들은 이성에 종속하였고 그의 모든 감각들은 적당히 조정되었으며, 그때 그의 모든 탁월성을 그의 조성자의 놀라운 은사로 돌렸다. 그리고 신적 형상의 기초적인 좌소가 정신과 마음 또는 영혼과 그 능력들에 있었지만, 신체에 영광의 어떤 광채가 비쳐지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하나님의 형상은 타고난 재능들과 의로움으로 지정된 영적인 품질들, 즉 참된 지식,의로움,거룩을 포함하였다. 그 모든 형상이 죄로 말미암아 손상되었으나 단지 그 영적 품질들만이 완전히 상실되었다.
슐라이어마허 '형상'이 본래적인 고결의 상태와 본래적인 의로움의 상태에 대한 개념을 거부하였다. 그가 본바대로는 도덕적 완전이나 의로움, 거룩은 단지 발전의 결과일 수 밖에 없음으로 그는 사람이 의로움과 거룩의 상태로 창조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용어상 모순이라고 하였다.
윗트니스 리 '형상'은 안에 속한 것을 말하며, 모양은 밖에 속한 것을 말한다. 우리는 모두 안에 속한것-생각,의지,감정을 갖고 있고 모양, 즉 몸(신체)을 갖고 있다. (이부분은 '형상과 모양'을 분리개념으로 보는것은 이레네우스와 터툴리안과 동일하나 반대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생각,감정,의지를 혼의 기능으로 보고 있으며, 영과는 분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형상은 안에 속한으로서 '혼(soul)'으로 보아야 한다.)
창1:26에서 "우리의 모양대로"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와 등치되어 있으므로, 이들은 보충적이라기 보다 설명적 또는 정의적인 것으로 보아야한다. 창5:1에는 모양'이라는 용어만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창1:26과 창5:1,2의 병행은 명백하며, 따라서 후자의 '모양'이라는 단어는 창1:26의 두용어를 포괄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밖에 창1:27에는 '형상'만이 사용되는데, 이 구절은 1:26과 근접해 있는 점으로 보아 '형상'을 1:26의 이중표현과 동의어로 간주해서는 안될 것 같다. 또 창5:3에서는 1:26의 순서및 구조와는 반대로 "자기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셋을 낳았다고 함으로써 추가가 아닌 한정으로 해석할것을 다시 한번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형상과 모양이 특히 신약에서 상호 대체적으로 항상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를들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고후4:4; 골1:15)으로 불리지만, 모양(호모이오시스 또는 호모이모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람(빌2:7)과 죄 있는 육신(롬8:3)의 모양(호모이오마)으로 나타나셨다. 참고로 히브리서 2:17에는 동사가 사용되고 있다.
형상과 모양은 동일한 개념을 나타내며 또한 "모양"은 단지 그 형상을 가장 흡사한 것으로 나타내기 위 한 설명적인 보충어라고 생각하는 편이 오히려 더 바람직하다고 할수 있다.(동일한 개념과 가장 흡사한것의 표현으로 볼때에, 어떤 차이점이 느껴지며, 그는 이것을 원본과 사본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성경적인 교훈은 다음 진술들을 정당화 하고 있다.
B.사람이 그 모양대로 창조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은 일반적으로 소위 "본래적인 의" 또는 보다 특별하게 참된 지식,의,거룩을 분명히 포함하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심히 좋게"(창1:31) 또는 "정직하게"(전7:29)만드셨다. 신약은 사람을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된 실유(being), 즉 이전 상태로 되돌아간 실유로 말하고 있는 곳에서 사람의 본래적 상태의 성질을 특별히 암시하고 있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상태는 좋거나 나쁜것이 아닌, 그 의지가 완전히 평행상태에 있는 중성(neutrality)의 상태가 분명히 아니라 참된지식(골3:10), 의나 거룩(엡4:24)의 상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 또는 보다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불릴수 있다. 사람이 이러한 도덕적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은 사람의 본래적 상태가 적극적인 거룩의 상태였으며 무죄나 도덕적 중간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C. 그러나 하나님이 형상은 죄로 말미암아 상실된 본래적인 지식이나 의 , 거룩에 국한되지 않으며, 역시 사람의 자연적인 구조에 속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들은 사람으로서의 사람에게 속하는 요소들, 예를들면 지적인 능력이나 자연적인 감정들, 도덕적인 자유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은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그는 이것들을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리지 않았으며 또한 사람이 되는것을 중지함 없이는 잃어버릴수 없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이부분은 실제로 죄에 의해 타락되었지만, 죄 때문에 타락한 이후까지도 사람안에 남아있다. 타락이후의 사람은 그의 영적인 상태에 관계없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표현되어 있다.(창9:6; 고전11:7; 약3:9). 살인자의 범죄는 그 극악성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공격이라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 이러한 성경구절들에 비추어볼때 사람이 완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화 될수없다.
D. 사람의 신체가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분을 구성하는가라는 의문이 제기 될수 있다. 또한 이 질문은 긍정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성경은 사람(단지 사람의 영혼만이 아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또한 “생령”의 사람은 신체없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더욱이 성경은 살인을 신체의 파괴로 표현하고 있으며(마 10:28) 사람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로도 표현하고 있다.(창9:6) 우리는 신체의 물질적 실체에서 형상을 찾을 필요가 없다. 그것은 오히려 영혼의 자기표현을 위한 적절한 도구인 몸에서 발견된다. 더욱이 신체는 결국 영적인 신체, 즉 완전히 영이 지배하는 신체, 영혼의 완전한 도구가 되도록 되어 있다.
E. 하나님의 형상의 또 다른 요소는 불멸성(immortality)이다. ...사람은 죽지 않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은 그의 영혼이 무궁한 존재를 부여받았다는 의미에서 뿐만아니라 그가 그자신 안에 육체적인 죽음의 종자를 갖지 않았다는 의미에서와 그의 본래적인 상태에서 죽음의 법칙에 예속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이다.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로서 임박하였으며(창2:17), 또한 이것이 신체적이거나 육체적인 죽음을 포함하였다는 것은 창세기3:19을 볼때 분명하다. 바울은 말하기를 죄가 죽음을 세상으로 가져왔으며(롬5:12; 고전15:20) 죽음이 죄의 응보로 간주되어야만 한다고 하였다(롬6:23)
개혁파의 견해
(b)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실유인 사람의 심리적인 능력들과 기능들, 즉 그것들의 기능들을 수반한 의지에 존재하고 있다. (c) 참된 지식이나 의,거룩에서 그 자체를 계사하고 이는 사람의 성질의 지성적이고 도덕적인 고결성에 존재하고 있다.(엡4:24; 골3:10) (d) 물질적인 실제로서가 아니라 그 불멸서을 분배하는 영혼의 적합한 기관으로서의 신체에 존재하며 사람이 하등적 피조물에 대해 지배권을 행사하는 도구로서 신체에 존재하고 있다. (e) 지상에 대한 사람의 지배권이 존재하고 있다.
루터파 - 하나님이 형상으로서의 사람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루터파의 지배적인 개념은 개혁파의 그것과 현저하게 다르다.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하나님의 형사을 상실하였으며또한 지금 그를 동물들과 구별하는 것은 종교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거의 중요하지 않다. 둘 사이의 큰 차이점은 하나님의 형상에 놓여 있으며 사람은 전적으로 이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견자에서 볼때 루터파가 유전론을 채용하고 사람의 영혼이 동물이 그것과 같이, 즉 생식에 의해 비롯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은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것은 또한 루터파가 인류의 도덕적 통일성을 거의인식하지 못하고 그 육체적 통일성과 특별히 죄의 육체적 번식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형상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접촉점" 즉 하나님과의 어떤 일치성에서 찾고 있으며 또한 이것이 죄에 의해서 파괴되고 폐기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점에서 개혁파보다 루터파에 더 접근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 -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본래상태'에 대하여
개신교 -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본래상태'에 대하여
사람은 그것을 상실할수도 있고 머물러 있게 할수도 있지만, 이상적인 의미에서 그는 그것을 상실할수 없으며 또한 머물러 있게 할수도 없었다. 다른말로 한다면 그것은 상실은 실제적으로 인간성의 타락과 손상을 의미한다고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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