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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직예수의 이야기만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아들 2014. 12. 18. 00:29

오직예수의 이야기만 전해야 합니다

대담 | 이상훈 교수 전 서울신학대학 학장
임태현 소장 프리칭아카데미 대표

칠십 평생을 오직 예수 연구에 바쳐 온 외길 인생 이상훈 교수.
한국 기독교 100주년사에 기억될 만한 일백 인 중 대표 신학자 13인에 선정되기도 한 그는 그의 인생이 말해 주듯 평생을 한결같이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예수의 흔적을 찾아 순례의 길을 걸어 왔다.
상대주의적인 가치관이 난무하고 극심한 세속화의 물결 속에 신앙의 본질이 흐려지는 지금, 노신학자가 전해주는 예수 이야기를 통해 정결한 신앙의 전통이 오늘의 삶에 깊이 뿌리 내리기를 바란다.

교수님의 신앙과 삶의 여정을 소개해 주십시오.

일제강점기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원주농고 재학 시절 원주감리교회를 출석하면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가르치는 성경공부반에 들어가 영어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 성경공부반에서 훌륭한 지도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를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출석하던 교회가 감리교여서 감리교 신학교에 가려고 했지요.
그런데 우연한 기회로 1950년에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얼마 되지 않아 6·25사변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원주까지 피난을 가다가 인민군에 붙잡혀 총살되기 일보 직전에 주님의 보호하심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부산 피난 시절 서울신학대학교가 부산으로 옮겨 오게 되어 복학해서 학교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1962년에 유학을 다녀와서 64년부터 모교에서 교수로 봉직하다가 95년에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신학대학에서 강의하며 연구에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76년의 인생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 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설교사역에 있어서 신약성서의 위치와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약성서는 기독교신앙의 텍스트(text)입니다.
신약이 제일 중요합니다.
요즘 많은 교회에서 구약의 표상적인 것에서 지혜를 찾거나 하나님의 내면적 존재론이라고 하는 사변적인 정리에 만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제는 성서신학으로 그 중심이 옮겨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성서신학의 방법론은 해석학입니다.
해석학에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흐름을 찾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왜 있는가, 예수께서 이 비유를 왜 언급하셨는가, 어떤 계기로 이 비유가 시작되었는가, 그리고 결론은 무엇인가라는 등의 내러티브적인(narrative) 접근방식이 요구되는데, 이는 이야기의 맥락을 통한 이해를 의미하며, 이 맥락에는 반드시 플롯(plot)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시작과 끝이 있는 이야기로 전개되는 데도 불구하고, 요절 중심의 단편적인 형태로 접근하려는 것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그리고 저자의 의도대로 읽고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됩니다.
또한 예수의 증언이 공동체의 사명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회복시키시는 것도 인류 회복이라고 하는 인간 본래의 가치에 중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인간의 구원도 이를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메시아의 위치와 예수 지향, 예수 증언, 예수 신앙이 모든 구속사의 초점이며 성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메시지는 초대교회가 그러했던 것처럼 예수 증언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은 맥락에서 얻어 내야 합니다.
12세기에 시작되어 15세기에 자리잡게 된 신약과 구약의 장절 구분이 우리의 생각을 갈라놓았습니다.
처음 두루마기로 기록된 성경은 띄어쓰기나 장절의 구분이 없이 하나로 연결되어 시작과 끝만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플롯(plot)의 진행만 있어 그 당시 성경을 읽을 때는 반드시 맥락에서 의미를 찾았습니다.
요즘처럼 장절로 선택하여 이론화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설교자들은 선택한 본문을 성경의 장절을 뛰어넘어 원초적인 저자의 의도와 맥락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성경의 맥락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전달할 수 있는 바람직한 설교의 형식은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대지설교, 강해설교, 요절설교 등 기존의 설교를 하나로 묶어 내는 설교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통합된 설교형식에서 성경의 해석은 성경의 맥락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정확하게 그 뜻을 전하기 위해 저자의 의도대로 해석하고 설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은 교회의 월력을 따라가는 ‘교회 치리’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모세오경처럼 마태복음에도 이에 대한 예수의 교훈이 다섯 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누가복음 저자의 의도는 구속사적으로 묘사하는 예수 증언이며, 마가복음은 로마에서 박해 받는 초신자들에게 전하는 예수의 증언으로 고난 속에서 성도의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계신 말씀,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표적으로 보여 주시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를 보고 믿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일곱 가지 범주의 표적을 묘사하며 보고 믿을 것을 권면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보라’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저자의 의도입니다.
이러한 저자의 의도를 입체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요절만 보고 단편적으로 내용을 파악하면 본래의 의도를 이해하기 어렵게 됩니다.

한국교회의 강단이 아직도 예수 지향의 맥락에서 예수의 증언을 저자의 의도에 따라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설교를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대지를 중심으로 순서를 정하고 서론, 본론, 결론으로 전개시키지만, 성서의 이야기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전개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성서의 이야기는 모두 사건의 이야기이며,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설교의 형식이 어떤 것이든 중요한 것은 저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주된 설교 형태는 주제설교입니다.
성경의 맥락과 저자의 의도라는 관점에서 주제설교와 관련지어 말씀해 주십시오.

명제설교와 주제설교에 대하여는 가능한 한 자제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명제설교의 제목은 오늘의 맥락에서 요구되어지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 사상이 역사적으로 흐르고 있는 사건의 연속이며 그의 성취가 예수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의 증언이기 때문에 우리의 문화 안에서 예수를 증언해야 한다고 봅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 문명은 다양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핵심으로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적인 상황 속에서 진보와 보수의 갈등 가운데 처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어떻게 증언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고난을 무릅쓰고서라도 하나됨의 사랑을 전하고 증언해야 한다고 봅니다.

설교에서 요구되는 성경해석의 문제는 텍스트(text)와 콘텍스트(context)의 문제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것은 상당히 조직신학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문제는 본문과 상황, 그때와 지금,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등의 분법에 의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내러티브를 통한 접근에서는 그러한 분법을 초월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많이 언급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아직도 구약의 사람들처럼 하나님과 여호와만을 찾는 것은 조직신학의 영향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창조자, 무소부재, 절대주권자, 처음과 끝, 심판자 등으로 나열된 조직신학에 제한된 영향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초월하면 기도의 대상으로 호명할 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며 찾게 됩니다.
빌립의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요구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기도의 형식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경험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구약을 맥락적으로 읽지 않는 사람들은 구약에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표현이 많이 언급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사실 한 번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신약으로 넘어와서 복음서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요한3서에 가서야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와 같이 구속사의 맥락에서 연결되어 결말에 이르러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정언적이고 선언적인 것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성경을 바로 보는 데 지장을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는 맥락적으로 바르게 읽고 설교할 때는 예수 증언, 복음의 증언으로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 본다면, 상황에 대한 응전에 소홀한 점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에 대한 우리의 응전은 예수 증언이라고 하는 목적 때문에 응전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회개량주의자나 환경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러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예수 증언에서 콘텍스트와 만나야 됩니다.
예수께서 설교하시는 것을 보면 떡을 떼어 주시며 떡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나사로를 살리시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우물가 여인에게는 물을 달라 청하신 후 자신이 누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보면 말씀은 항상 상황과 함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를 증언해야 하는데, 예수 증언의 사람들은 지금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나의 갈 길을 다가고 믿음을 지켰다고 말할 때, 갈 길을 다갔다고 하는 것은 예수를 증언하는데,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신학교육에 대해 우려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최근 영성교육의 회복을 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전에는 신학대학교가 일반대학교 수준의 공인을 받기 위해 아카데미아로 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 때문인지 말씀의 종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런 현실이다 보니 목사의 청빙에 학위를 요구하고, 사역자와 공동체의 관계가 전략화, 기업화되는 것이 마치 텍스트처럼 되는 위험한 상황에 대한 반성으로 영성운동이 나오는 것은 바람직한 것입니다.
이러한 문화의 에코(echo)가 지나치게 교회를 침범해서 주인 노릇을 하게 되면, 예를 들어 “설교는 10분만 해 주세요. 칸타타가 1시간 정도 걸리니까요.”라고 하는 웃지 못할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이 우리의 텍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출처 : 소망성경연구원, 좋은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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