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 |
빛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우리 인간은 이 세상의 빛과 함께 살아왔다. 빛은 인간과 생명과 우주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가장 근원적인 물질이다. 빛이 없다면 우리 인류의 모든 유산과 활동과 역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이 빛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 가를 살펴보는 것은 신앙과 신학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신학은 일찍부터 성경의 빛을 주목하고 빛에 담긴 진실과 의미를 탐구하여 왔다. 또한 과학이 발달하면서 빛에 대한 개념은 단순한 성경적, 신앙적 해석을 넘어 그 자체의 물리적 신비에 깊이 접근하게 되었다.
본 논고는 그런 빛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검토해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성경 창세기에 나타난 빛의 창조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고 빛에 대해 주요 신학자들은 어떤 접근을 하였는지 간략히 검토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현대 과학의 연구 성과가 현대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어떤 의미들을 부여하고 있는 지 살펴보고 종합적으로 빛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분석해 보고자 하였다.
Ⅱ. 빛의 창조
성경은 빛(רוא, o-r)이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빛은 첫째 날 창조되었다(창 1:3-5).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날은 첫째 날이었다. 창조 명령은 6일에 걸쳐 8번 기록되었고 빛 창조는 그 가운데 첫 번째 명령이었다. 그리고 그 빛에 대한 가치 평가(4 상반절), 영역 지정(4 후반절), 의미 부여(5 상반절)를 한 것도 창조주 하나님 자신이었다. 최근 지적 설계 운동(Intelligent Design Movement)을 주도하고 있는 뎀스키(W. A. Dembski)도 빛이 창조되면서 세상은 개념화 될 수 있었고 가치가 적절히 부여되었으며 하나님의 의도가 충만한 장소일 뿐 아니라 그 의도가 이해 가능한 장소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뎀스키는 그 이해 가능성의 영역은 과학과 도덕과 미학에 모두 적용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태양을 빛의 근원이라고 여긴다. 태양은 물론 빛이다. 지구 빛의 근원이기도 하다. 창세기는 큰 광명과 작은 광명과 별들이 넷째 날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큰 광명과 작은 광명은 해와 달을 의미함에 틀림없다. 즉 성경은 지금 우리가 보는 이들 발광체(發光體)들이 있기 전 이미 빛이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태양이 있기 전 빛의 근원은 이미 창조된 것이다. 빛이 태양보다 먼저 나왔다는 성경의 기록은 어떤 다른 고대 문헌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오직 히브리인들만이 가진 계시였다.
플라톤(Platon, BC. 427-347)은 태양을 ‘최고의 선’(the Good)과 연관시키며 필로(Philo, BC. 20- AD. 50경)는 창조주를 빛의 원형(原型)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태초의 빛과 태양을 구분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성경은 빛의 창조에서부터 다른 어떤 기원에 대한 설화와도 다른 뚜렷한 차별성을 보인다.
태양이 있기 전 창조된 빛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어려운 난제이다. 일반적으로 태양이 이미 첫째 날부터 있었다고 보고 다만 넷째 날 보여 지게 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즉 첫째 날 하늘과 땅들이라는 구절 속에 이미 태양과 달과 별들을 포함 시키고 있다는 견해이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 넷째 날 창조된 태양과 달보다 먼저 창조된 빛이 있음을 알리므로 사람들이 무의식 중에 빛의 근원은 당연히 해와 달 일 거라고 믿을 지도 모르는 편견과 선입관을 자연스럽게 차단하고 있다
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 해석이라고 본다. 헨리 모리스(H. M. Morris)는 태양이 있기 전 어떻게 빛이 있었느냐는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태양보다 먼저 존재한 빛의 근원이 궁창 위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성경적으로 보면 첫째 날 분명 무언가 빛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태양은 아니었다는 것도 분명하다. 이것이 단지 히브리 민족의 관습적 해석이었는지 초월적 계시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을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첫째 날 빛 창조에 대한 입장부터 신학의 관점과 색깔이 갈라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빛이라는 본질에 있어서는 태양빛이나 달빛이나 첫째 날의 빛이나 다르지 않다고 본다. 다만 빛(창 1:3)을 나타내는 히브리어(o-r)는 남성 단수 명사를 사용하고 있다. 히브리 사람들은 물도 우리와 달리 물들(םימ, maim)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하는 데 빛을 단수형으로 쓰고 있는 것은 주목해볼만한 특이점이다. 태양빛과 달빛, 별빛 등을 생각한다면 빛의 복수형을 사용했어야 마땅하다. 본래적 빛(단수형)이 먼저요 빛의 발생인들(복수형, ma-or)들이 순차적으로 따라 오는 것이 논리적, 성경적 질서일 것이다. 하나님은 첫째 날 빛의 단수형을 사용하시므로 빛 창조의 절대성을 나타내고 있다.
첫째 날 창조된 이 빛을 빛의 근원(a source of light)일 거라고 표현한 헨리 모리스는 이 빛은 넷째 날 태양이 창조되면서 두 빛이 본질적으로는 다를 게 없으므로 자연스럽게 태양빛으로 대체되었다고 본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작업 가설(作業假說, working hypothesis) 같은 것이다. 이 태초의 빛(창 1:3)이 무엇이든 간에 과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그 실체와 의미를 추적하기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래서 칼빈(J. calvin)이나 헨리 모리스 같은 주석가들도 더 깊은 해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이 빛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삼가하고 있다고 본다. 그 실체를 당연히 모르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도 이 빛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결론이 끝나지 않고 있다.
이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 이 빛은 온누리에 균등하게 광명을 제공하는 빛은 아니었다. 태양이 낮과 밤을 나누듯 하나님은 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었다. 첫째 날 저녁을 맞기도 전에 빛과 어두움, 밤과 낮은 이미 지구 표면에 동시에 나타났다. 달을 보며 사람들은 달 표면이 밝은 곳과 어두운 곳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인류는 지구에도 그런 구분선이 있다는 것을 겨우 16세기(1542년 경) 코페르니쿠스에 의하여 과학적으로 인지(認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20세기 들어 우주비행사들은 이것을 친히 확인하였다.
Ⅲ. 빛에 대한 주요 신학자들의 이해
1.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철학자들은 빛의 과학적 연구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이미 빛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신비(빛의 형이상학, metaphysic of light)를 탐구하여 왔다(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위 디오니시우스, 동방신지학을 완성한 수라와르디를 비롯한 이슬람 신학자들, 베이컨, 칸트 등). 어거스틴도 그 가운데 한명이었다. 그는 본래 마니교도(摩尼敎徒) 였다. 마니교(Manichaeism)는 빛의 왕국이 사방으로 퍼져 어두움의 왕국에 이르렀다는 이원론적 종교였다. 이 때부터 이 지상에서는 선을 대표하는 빛과 악을 대표하는 어두움 사이에 끊임없이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이 싸움의 마지막에 비로소 한 예언자가 와서 어두움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작업을 하기 시작한다고 보았다. 이 예언자가 바로 마니였다. 마니는 자칭 세 예수 가운데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 다음으로 온 참 예수라고 자신을 지칭하였다. 이 종교는 '선은 빛이요 악은 그 그림자'라고 보는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를 많이 닮아있다. 마니교는 기독교와 불교, 조로아스터교가 복합된 종교였다.
하지만 회심 이전 숙명론적 마니교의 이원론에 익숙해있던 어거스틴은 회심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빛에 대한 어거스틴의 관심도 당연히 바뀌었다. 그의 창조론과 빛에 대한 관심은 성경의 창조론으로 돌아왔다. 어거스틴은 먼저 태양이 있기 전 밤과 낮이 있었다고 설명하는 창세기 1장 창조 기사의 첫 3일에 주목한다. 지구의 자전에 대한 정보가 없던 시절 이 문제에 대해 주목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어거스틴은 솔직하게 그 빛이 어떤 빛이었는지 어떤 운동으로 교차하여 어떤 성격의 아침과 저녁을 만들어 내었는지 인간의 지성으로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이 빛을 물체적 빛을 넘어 거룩한 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비약한다. 성경의 빛이 물리적 빛인 동시에 상징적 의미로 쓰여짐을 간파하고 성경 말씀의 다중적(多重的) 의미를 빛에도 적용한 것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자신의 책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De Genesi ad Litteram)에서도 빛에 대해 상세히 묘사하는데 첫째 날 만들어진 빛은 영적 창조의 형상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거스틴이 보기에 천사들의 집단이었다.
2.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74)
로마 카톨릭 신학을 완성한 신학자로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 빛(lux)은 보게 만드는 것이요 드러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적 존재들에게 있어 빛은 먼저 은유적이며 고유적 의미는 그 다음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 첫 번째 날의 빛은 어거스틴처럼 물리적 실체가 아니었다. 아퀴나스가 볼 때 빛은 첫째 날 창조되었으나 그것은 또한 태양의 실제적 형상이나 자연적 형상이 아니었다. 빛이 물체가 아니라는 개념은 현대 과학의 눈으로 보면 분명 올바른 해석은 아니다. 빛이 열을 내므로 일종의 에너지라는 것은 아퀴나스도 알고 있었으나 빛의 실체적 현상들은 인식될 수 있는 것이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물체라고 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광명의 장소로서의 ‘최고의 빛나는 하늘(coelum empyreum)'은 보시기에 좋게 창조되었다. 아퀴나스에게 있어 신앙과 이성은 갈등이 있을 수 없었다.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이해 부족에서 발생한 오류 때문이라고 하였다.
3.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창조주이심과 하나님이심은 루터에게 있어 동일한 의미였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분이요 유일한 창조주라는 점에서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전지전능하시고 우리의 구주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은 이렇게 무(無)에서 모든 유(有)를 창조(Creatio Ex Nihilo)하신 분이다. 따라서 빛도 당연히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빛을 포함한 모든 것을 창조하였을 뿐 아니라 보존한다. 루터에게 있어 창조는 완결된 행위가 아니라 현재적 실재요 지속적인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지속적 관심을 가지고 세상에 관여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창세기 1장에서 그친 게 아니라 계속하여 세상에 머물러 있다. 빛은 그 창조의 섭리와 보존의 중심이다.
하지만 루터의 관심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 머물지 않는다. 루터의 신학은 십자가 안에서 더욱 미래로 나아간다. 루터에게는 창조의 빛도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빛은 십자가 안에서 물리적 빛 이상이었다. 창세기 1장 이후 빛의 성경적 의미는 물리적 빛의 의미를 너머 다중적 의미를 지니기 시작한다. 본래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자연의 빛과 초자연적 빛 자체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는 빛을 천사라고 하는 알레고리로 해석한 어거스틴의 견해를 받아들인다.
이것을 루터가 빛의 물리적 성질을 무시했다는 식으로 단순히 해석하여 오해하면 안 된다. 현세의 빛은 마지막 날 이루어질 빛에 비하면 겨우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빛의 창조주로서 영원한 빛이요 영광의 빛이요 빛의 빛이신 주님을 앙망한다. 인간은 죽음의 절망 가운데 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음 이후에 이루어지는 소망 가운데 산다. 성경은 그것을 빛의 비유로 설명한다. 이렇게 루터는 빛의 물리적 성격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나타나는 미래의 영원한 빛을 주목한다. 즉 달빛이 햇빛 같아질 때가 올 것이다(사 30:26). 이것이 신학의 풍성함이요 루터 신학의 묘미이기도 하다.
4.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
종교개혁 신학자 칼빈 신학의 해석학적 중심은 간결함과 용이함(brevitas et facilitas)에 있다. 칼빈은 창세기 주석의 빛 해석에 있어서도 이 같은 자신의 해석학적 특성을 간결하고 용이하게 그대로 보여준다. 칼빈은 창세기에 언급된 대로 빛은 마땅히 맨 처음에 창조되어야 했다고 믿었다. 그것을 방편삼아 세상은 아름답게 장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피조물의 구별은 빛으로부터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경 그대로 해와 달보다 먼저 빛이 창조되었음을 인정한다.
모든 도구들은 하나님의 도구이다. 사람들은 보이는 물체인 태양과 달과 별빛에 매달린다. 하지만 개혁주의자 칼빈이 볼 때 해와 달이 없어도 하나님은 우주를 붙드실 수 있는 분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과 달리 당연히 태양과 달에 매달리는 분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의 뜻에 복종한다. 칼빈은 첫째 날 창조된 빛은 흩어져 없어졌으나 지금은 그 빛이 빛나는 물체들 속에서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고 묘사하여 첫째 날 창조된 빛과 넷째 날 창조된 빛 사이의 해석적 조화를 시도한다.
칼빈이 활동한 시대는 근대 과학이 꿈틀대던 시대였다. 하지만 과학의 성과들은 여전히 가변적이었다. 칼빈은 성경적 범위를 벗어나는 과학적 언급에 대해서는 삼간다. 빛과 어둠이 어떻게 낮과 밤을 점유하고 있는 지에 대한 세부적 설명은 칼빈 당시에 꼭 알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알 필요도 없었다. 칼빈은 이 부분의 해석에 대해서는 미결의 문제로 남겨 두었다. 검증되지 않은 불필요한 성경 밖 주장들을 함부로 성경에 적용하지 않으려는 칼빈의 성경 자증 원리(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가 여기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5.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바르트는 빛의 창조를 언약의 외적 근거로서의 창조의 측면에서 다룬다. 바르트에게 있어 창조는 언약의 외적 증거(Creation as the External Basis of the Covenant)인 동시에 언약은 창조의 내적 근거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심으로써 빛을 창조하였다. 창조주의 인격적 본질은 첫째 날부터 드러난다. 피조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말씀하심으로 주인의 명령에 존재하게 되었다. 바르트에게 빛은 생명을 뜻하며 하나님의 사역의 표징(sign)이며 은혜의 상징이기도 하다. 바르트는 칼빈이나 다른 주석가들처럼 빛이 첫째 날 창조되었음을 언급한다. 하지만 바르트는 자연으로서의 빛이 아니라 언약에 매달린다. 이것들은 지구라는 언약의 동산에 주어지는 필수불가결한 언약의 파트너이다.
바르트도 창조는 실제로 일어났음을 믿었다. 다만 바르트에게 있어 창세기의 창조 사건들은 다른 사건들과 달리 피조계의 맥락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바르트가 보기에 창조는 다른 사건들처럼 기록될 수도 연구될 수도 없는 것들이다. 따라서 바르트는 인간 역사와 자연역사보다 앞서 일어난 창조는 ‘사가(saga)'라고 불려지는 것이 맞다고 제안한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실제로 발생한 전(前)역사적(Urgeschichte, Pre-historical) 실재에 대한 직관적이고도 시적인 기술이다.
칼 바르트가 자연신학을 적극적으로 반대한 요점이 여기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어거스틴과 칼빈과 바르트가 자연신학을 부정한 것은 같았으나 어거스틴과 칼빈이 자연계시에 대해서는 작은 불빛처럼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반면 카르트는 창조를 언약의 외적 근거로 보므로써 자연신학과 더불어 자연 계시의 효용성조차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바르트는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별되는 로마 카톨릭의 자연신학과 자연 계시와 자연 은총에 긍정적인 에밀 부룬너와 완전히 결별하였다.
Ⅳ. 빛의 연구에 대한 간략사(簡略史)
빛을 인간의 시각에서 과학적으로 보면 ‘눈의 망막을 자극하여 시각을 생기게 하는 전자기파로 빛 또는 가시광’이라 부른다. 파장은 대략 400-750nm의 범위에 있어 빨강에서부터 보라까지 색감을 일으키게 한다. 하지만 감마선에서 전파까지의 전자기파(파장 10-14~155m) 전체로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빛이라 부르는 물질은 극히 좁은 범위를 차지한다. 자외선(1~400nm), 적외선(750nm~1mm)도 넓은 의미에서 빛이라 부르기도 한다.
빛에 대한 연구는 고대 헬라의 철학자인 아르키메데스와 유클리드 등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러나 빛의 과학적 성격이 알려진 것은 17세기 무렵이었다. 영국의 뉴턴(I. Newton, 1642-1727)은 빛이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입자(粒子)라고 설명했다. 이것이 빛의 입자설이다. 같은 시대 네덜란드의 크리스티안 호이겐스(Christiaan Huygens, 1629-1695)는 빛의 반사와 굴절을 확인하고 빛은 파동(波動)이라고 설명하였다. 파동은 반사와 굴절을 설명하는 데는 유용하나 빛의 직진성을 설명하는 데는 난관이 따른다. 19세기 들어와 교회의 장로였던 천재 과학자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은 전자파와 빛의 속도가 같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전자파도 일종의 빛이라는 것을 증명한 중요한 성과였다.
20세기 초 드디어 양자 역학이 성립되면서 빛은 전자파의 일종이며 입자와 파동이라는 이중 성질을 가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빛이 직진한다는 것도 밝혀졌다. 1676년 덴마크의 뢰머는 목성과 그 위성의 회전주기(回傳週期)를 이용하여 빛의 속도를 알아내었다. 그는 빛의 속도가 1초에 약 30만 km라고 하였다. 거의 정확한 측정이었다. 그 후 여러 과학자들의 수고와 연구(표 1 참조)로 오늘날 빛은 직진성과 파동, 반사, 굴절, 회절, 산란, 분산, 스펙트럼, 색깔 등 아주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음이 알려졌고 정밀한 빛의 속도도 측정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서도 빛의 본질적 신비는 과학계 안에서도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계속>
* 이 글은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연구소’ 홈페이지(www.kictnet.net)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
크리스챤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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