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앞에 합당한 삶을 위한 “용서”
- 그리스도인의 용서에 대한 묵상
마태복음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일부 문제가 있다고 지적되는 교회를 제외하고 이 구절이 익숙하지 않은 교회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주기도문이라는 이름으로 수 천 번 이상 암송하고 외우며, 묵상 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의 말씀을 오늘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마태복음 6장 12절에서 말씀하시는 죄로 번역된 헬라어는 “오페일 레마타”입니다. 이것에 대한 주석을 먼저 참고하겠습니다.
- 톰슨 성경 주석 -
본 절에서 죄로 번역된 헬라어는 오페일 레마타 로서 빚에 해당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과 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옵시고로 이해 될 수 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해결 될 수 없는 채무 관계를 야기 시켰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진 모든 빚을 탕감해 주셨다. 본절 후반에 언급된 죄는 성도가 일상에서 범하는 허물을 뜻한다.
주님이 말씀하신 “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에서 죄를 용서 받는다는 것은 속죄를 위한 회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나기 위한, 즉 단번에 죄를 용서 받음으로서 주어지는 중생과 칭의 이후의 성화를 위해 반복되는 회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장로교 조직 신학 (루이스 벌콥 / 기독교 신학 개론 256쪽)
새 생명을 심어주는 것으로 해석되는 중생은 결코 반복 될 수 없다.'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의 회심도 또한 반복될 수 없다 이것은 중생의 변화가 인간의 의식 생활에서 처음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반복되는 회심에 대하여도 말할 수 있다
감리교 조직 신학 (웨슬레 조직 신학 199-200쪽)
이 회개는 칭의에 헌생하는 회개와는 아주 다른 것 입니다. 여기서 회개는 죄책이라든가 정죄라든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이라든가 하는 것들과는 연관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깨달음이니 곧 우리 마음 속에 아직 남아있는 죄를 깨닫는 것 입니다. 곧 육에 속한 마음 입니다. 중생한 사람들 속에서도 그것이 남이 있으나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중생의 체험은 오직 한 번의 회개로 영원한 속죄를 받음으로 이뤄지나 중생 뒤에도 반복되는 죄를 위해 우리는 회개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것은 내 안에 죄가 있을 때 그것을 고백하고 죄로부터 돌이키지 않으면 구원을 상실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32:3~5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주님은 성도로서 중생 이후에 반복해서 회개 기도를 해야 할 것을 가르치셨으며, 이것을 발씻음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사도들은 이것을 이해하고 후회할 것 없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라고 말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우리는 성경에서 구원의 세 가지 시제를 발견하게 되는 동시에 칭의 이후의 회개에 대한 중요성을 반복해서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 답게 성장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빌립보서 1:27~28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성도로서 부름을 받은 자답게 하나님 앞에 자라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심겨진 믿음은 겨자씨와 같은 것으로 미약하지만 성장하는 것이며, 시간이 지나 충분히 성장 한 뒤에는 누군가를 품어줄 수 있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단순한 회개를 가르치신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죄를 아파하며, 그것을 떠나 돌이켜 합당하게 신앙 생활을 하려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임을 말씀하신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2절의 앞부분을 보면 “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과 같이 ”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부분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 합당한 자로서의 용서”라는 이름으로 묵상하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는 것을 우리는 간단하게 말해서 “용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조건이 있는 용서가 있으며, 무조건적인 용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용서는 조건이 있으면 곤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떠한 것도 드릴 수 없으며, 전적인 부패와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무능력 상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64: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전적인 은혜로서 구속함을 받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죄악이 충만한 사람이 무엇을 통해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15: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에베소서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이것은 우리가 용서하는 것 역시 조건 없는 용서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조건 없는 용서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성경을 묵상하다보면 구약에서 몇 몇 인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인물은 요셉이며, 다음이 다윗입니다. 요셉의 용서는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며, 하나님의 놀라우신 주권과 계획하심에 감탄하게 됩니다.
창세기 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요셉의 고백을 보면서 신앙적 위로를 얻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보면서 저는 용서의 위력을 보게 됩니다. 요셉의 용서와 다윗의 용서는 조금 달랐습니다.
사무엘상 24:14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 쫓아다닐 때 여러 번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이유로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를 용서하고 하나님께서 그에 죄와 자신의 억울함을 갚아 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사무엘상 26: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요셉의 용서는 모든 일이 성취 된 뒤에 이뤄진 것이었지만 다윗의 용서는 일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서 용서한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6:23~24
여호와께서 각 사람에게 그 의와 신실을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내 손에 붙이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오늘날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다윗은 사울이 자신에게 어떠한 은혜를 베풀었거나, 그와 어떠한 추억이나 친분이 있기 때문에 그를 용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이유만으로 다윗은 그를 용서했습니다. 요셉의 용서도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용서는 아직 아무것도 성취되지 않았고, 주어지지 않았었다는 점에서 요셉의 용서보다 더 놀라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용서가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원수의 집안인 사울의 후손인 므비보셋에게 베풀었던 인자와 사랑에 있습니다.
사무엘하 9:1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그는 사울의 집에 남은 자를 요나단을 인하여 은총을 베풀겠노라 말했습니다. 사울이 자신에게 그토록 잔인하고 집요하게 괴로운 일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것을 아무일도 아니었다는 듯이 말하며, 도리어 요나단과의 약속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원수로 행한 일보다 자신에게 은총을 베풀었던 것을 기억한 것입니다. 다윗의 용서는 조건 부 용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는 자신을 괴롭게 했던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사실만으로 그를 중심에서 용서한 것입니다. 모든 허물과 책망과 심판을 하나님께 부탁드리고 자신은 아무런 원한도 갚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가 그의 집안에 자손에게 은총을 베풀었습니다.
사무엘하 9:3
왕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시바가 왕께 고하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절뚝발이니이다
시바는 다윗에 물음에 “절뚝발이”를 강조했습니다. 왜 그가 절뚝발이를 강조했을까요?
사무엘하 5:8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구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소경과 절뚝발이는 집에 들어 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시바는 므비보셋이 절뚝발이라고 강조하면 다윗이 그를 사울의 집안 자손일 뿐 아니라 절뚝발이라는 사실만으로 미워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바의 생각과 다르게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었습니다.
사무엘하 9:7~8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찌니라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 보시나이까
므비보셋은 말했습니다.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사실 사울의 집안은 망했고, 그는 다윗 앞에서 죽음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원수의 집안의 자식을 찾는 것을 볼 때 그는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부름은 전혀 다른 부름이었습니다.
그는 사울의 밭을 다시 주고, 므비보셋을 왕자 중에 하나와 같이 자신의 상에서 함께 식사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조건 없는 용서였습니다. 므비보셋이 무엇을 했다고 다윗이 그를 용서하는 것 입니까? 무엇을 했다고 그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 입니까?
다윗이 사울을 용서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였다는 사실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으며,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푼 것은 오직 그가 사울의 집안 후손으로 요나단과의 약속에 따라 은총을 입을 자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용서는 단지 다윗의 용서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용서가 놀라운 진정한 이유 이유입니다.
다윗의 무조건적인 용서를 입은 므비보셋이 또다시 무조건적인 용서를 보여줍니다.
사무엘하 19:24~30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서 왕을 맞으니 저는 왕의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을 때에 왕이 저에게 물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뇨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 나는 절뚝발이이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나의 종이 나를 속이고 종 나를 내 주 왕께 참소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내 아비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었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 두셨사오니 내게 오히려 무슨 옳음이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왕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므비보셋이 왕께 고하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저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에 의해 도망갔다 돌아 왔을 때 그를 배반했다고 거짓말한 시므이의 모함에 므비보셋은 다윗을 버린 배역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므비보셋은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하였다는 사실을 말하였으나 이것으로 인하여 어떠한 처벌도 시므이가 받기를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므비보셋이 왕께 고하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저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
므비보셋은 다윗이 평안히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시므이의 모함에 대한 처벌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 조건 없이 그를 용서한 것입니다. 다윗에게 아무 조건 없는 은혜와 용서를 입은 자로서 그는 자신이 받은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서 시므이를 아무 조건도 없이 용서한 것입니다.
.....
다윗의 조건 없는 용서가 놀라운 것은 그가 단지 조건 없는 용서를 했다는 것으로 기록이 끝나지 않고, 그를 통해 또 다른 조건 없는 용서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놀라운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가 또 다른 용서를 불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한가지 비유를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24~35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일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아 그를 옥졸에 붙임으로서 그는 용서 받은 자로서 합당하지 않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것은 구원을 빼앗겠다는 말씀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아무 책망도 하지 않겠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마태복음 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주님은 이 비유를 형제를 용서하는 일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주셨습니다. 성도가 성도를 진정으로 용서하고, 그 용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심을 생각할 때 무조건적이며 당연한 용서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이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요한1서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1서 4: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
그리고 이것은 사도 요한이 말한 것과 같이 새 계명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새로운 계명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서로 뜨겁게 사랑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요한1서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리고 이것이 성도의 당연한 것이며,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동시에 구원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로는 항상 주님을 무엇보다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현란한 동작과 요란한 악기로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 우리가 진실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주님 앞에서 우리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요한1서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성도 간의 사랑은 성도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다시 말하면 내 앞에 주님의 피 흘리신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사람도 그리스도인 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함부로 말을 했습니까? .... 내가 주님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하신 성도를 함부로 비난한 것입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함부로 성도를 판단했습니까? .... 내가 주님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하신 성도를 함부로 판단한 것입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나에게 실수한 성도를 용서하지 않았습니까? .... 내가 주님이 죄 없다고 용서하신 성도를 책망하고 심판하고 죄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 내가 일만달란트 탕감을 받았는데, 아직도 일백데나리온, 아니 한 데나리온조차 되지 않는 나에게 주는 상처와 아픔과 괴로움과 불쾌감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내 믿음을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용서”는 ‘내가 하고 싶다’ 또는 ‘하기 싫다’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내가 받은 사랑에 대한 마땅한 의무로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 입니까?
예수님의 피흘리심으로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음을 믿고 감사하십니까?
내 삶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릴 수 있을정도로 감사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
그렇다면 내가 성도를 용서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입니다.
에베소서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로새서 3: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그러나 어느 분은 말하십니다. ‘ 용서하면 나는 손해 보는 것이 아니냐’고 하십니다. 네, 아닙니다. 다윗의 무조건적인 므비보셋에 대한 용서는 시므이에 대한 므비보셋의 무조건적인 용서로 이어졌습니다.
오늘날 내가 한 명의 형제의 잘못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라는 이유로 받아줄 때 우리는 그 놀라운 용서가 교회 안에 가득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시지 않습니까?
“ 내가 너희를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였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네 형제를 사랑하고 있다. 나를 위해 그를 사랑해 줄 수는 없겠니? ”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리스도인의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입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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