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성장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과 우리 역할의 균형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한 기독교/존 맥아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장 12~13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철학과 율법주의,신비주의와 금욕주의가 거짓된 영성의 기준이며 심리학적 성화는 결코 성화가 아니라면 참된 성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더 구체적을 말하면 신자의 역할은 무엇이며 하나님의 역할은 무엇인가?
신약성경이 신자들에 대한 명령으로 가득하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순종할 책임과 방편이 있음을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몫과 하나님이 하실 몫은 얼마나 되는가?
이 질문은 내가 최근에 어느 그리스도인들인 모인 자리에서 영적훈련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전한 뒤에 받은 질문이다. 나는 약 한 시간정도 말씀을 전하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고 그들에게 열심있게 부지런히 영적인 삶을 추구하라고 권면했다. 설교가 끝난 뒤 한 여성이 내게 다가와 내가 한 말에 이의를 제기했다.
"성화와,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매일 동행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목사님이 완전히 잘못 알고 계신 것 같네요, 성경에서는 내 안에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훈련하거나 인간적인 노력을 쏟으라는 부르심은 전혀 없어요. 우린 믿음으로 살라고 명령받았습니다. 그건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다는 뜻이에요. 우린 그냥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하시게 해야 합니다."
그녀는 "더 깊은 생명" 운동에서 비롯된 가르침의 대중적인 화법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었다. 그녀가 지닌 관점은 베스트셀러가 된 찰스 럼불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 무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진 저자가 쓴 [승리하는 삶을 사는 법], 해나 위톨 스미스가 쓴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의 비결] 같은 책들을 통해 대중화 된 것이었다.
그들은 신앙생활은 신자편에서의 아무런 노력도 요구하지 않으며 거룩함을 위한 능력은 신자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와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한 견해는 진리의 싹을 담고 있기는 하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로 살아가며 거룩한 삶을 위한 능력의 원천은 오직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다.
그러나 이 견해는 성경에서 실제로 신자들에게 부지런한 노력을 요구한다는,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진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 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6:11~12)
그리고 베드로는 적극적인 믿음을 요구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벧후1:5~7)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우리의 성화가 지닌 역설을 부각시켰다.
그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했지만 곧바로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라고 덧붙였다.
정적주의 대 경건주의
내가 전한 메시지에 반대한 여성은 정적주의라고 알려진 성화에 대한 관점을 믿고 있다.
정적주의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영적 성장의 과정에서 수동적이어야 하며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하시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적주의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과정에서도 에너지나 노력을 쏟아서는 안된다. 미약한 인간의 노력은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방해할 뿐이기 때문이다. 정적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성령께 전적으로 굴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를 '양보', '자아에 대해 죽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기', '육체죽이기', 또는 '자기 생명을 제단 위에 올려 놓기'라고도 부른다.) 그러면 성령은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통해 승리의 삶을 사시며 그리스도께서 말 그대로 우리를 대신하신다는 것이다.
그 극단적 형태에 있어 정적주의는 하나님이 신자의 행동을 전적으로 책임지시게 되고 신자는 결코 의로운 삶을 추구하기 위해 개인적인 노력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영적으로 수동적인 태도다. 정적주의자들은 "하나님이 하시게 하라."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같은 표현을 대중화 시켰다.
정적주의의 정반대는 경건주의인데 경건주의에서는 신자들은 개인적 경건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극도의 자기 수양을 실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경건주의는 적극적인 성경공부, 자기수양, 부지런한 순종을 통한 거룩한 생활, 그리스도인의 의무 이행을 강조한다.
극단적인 경건주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종종 입는 옷, 생활방식 등을 규정하는 율법주의적인 기준을 택한다. 사람들에게 전기, 자동차 및 현대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암만파(Amish)는 극단적인 경건주의의 본보기다.
대다수의 정적주의자들과 경건주의자들은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어진다는 데 동의 할 것이다. 그들의 차이는 성화의 영역에 있다.
정적주의자들은 신자의 노력을 경시하거나 완전히 무시하고 그로 인해 영적인 무책임과 무감각을 촉진할 위험에 직면한다. 경건주의자들은 인간의 노력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그로 인해 사람들의 교만을 부채질하거나 율법주의로 빠지기 쉬울 수 있다.
적절한 균형 찾기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한말을 다시 보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2절에서 바울은 마치 경건주의자처럼 말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런데 13절에서는 마치 정적주의자처럼 말한다. "너희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12절에서는 우리가 행하는 반면 13절에서는 하나님이 행하신다. 여기에는 완벽한 균형이 존재하지만 이를 충분히 이해하기란 분명히 어렵다.
하나님이 우리안에 친히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기 위해 역사하신다면 왜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고 명령하려 했을까? 바울은 이 두 진술 사이의 긴장을 조화시키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이 역설의 양면을 모두 긍정했다.
그와 같은 모호함으로 인해 고민에 빠져서는 안 된다. 누가 하나님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가? 그분의 생각은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우리의 제한된 이해력보다 휠씬 높다.
구원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은 이와 비슷한 역설을 담고 있다. 복음은 우리에게 죄에서 돌아서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거나 아니면 영원히 저주받을 것을 요구한다.
복음은 죄인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믿는 인간 의지의 행위를 요구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구원은 전부 하나님의 역사이며(엡2:8~9) 하나님은 창세전에 백성을 택하셨다고 말한다. (엡1:4~5)
이와 같은 긴장은 성도의 견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도 존재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손에 붙들고 계시며 아무도 우리를 그 손에서 빼앗을 수 없으므로 모든 신자는 안전하다.
아무도 우리를 고발 할 수 없으며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끓을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영생을 상속 받는 이들은 신실하게 끝까지 인내할 것이라고 말한다.(마10:22,24:13; 골1:22~23) 궁극적인 구원은 하나님이 보증하시고 지키시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그리스도인의 인내하는 믿음이 따른다.
성화의 문제에 있어서도 신자의 개인적 노력과 하나님의 주권적 통제의 또 다른 불가분적인 연합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놀랄일이 아니다. 빌립보서 2장 2~13절은 분명히 그런 측면에서 성화에 대해 말하는 유일한 구절은 아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이 말은 마치 바울이 이렇게 덧붙이기 까지 정적주의적인 입장처럼 보인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 하였으나." 이말은 경건주의적이다. 그는 이 구절을 이렇게 끝맺는다 "내가 한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다시 정적주의자처럼 들린다.
하나님은 바울을 바울 되게 만드셨고 바울도 하나님께 열심히 수고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든 것이 자기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였음을 인정했다. 따라서 바울의 성화관은 정적주의도 경건주의도 아니고 그둘의 완벽한 균형이었다.
"내가......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라는 말은 개인적 성화에 대한 바울의 관점을 대표한다.(갈2:20)
바울은 성화가 신자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성화를 위해 애써야 하는 신자와의 협력임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은 자신의 성화에 대해 말할 때 이러한 양면을 모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를 결코 자신의 공으로 가로채려 하지도 않았지만 자신의 궁금극적인 참여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이 자기 안에서 어떤 일을 행하시는 것에만 의존하며 게으르게 앉아 있는 데 만족하지도 않았다.
골로새서 1장 28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의 방향과 궁극적인 목표를 진술한다."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의 원동력에 대해 언급한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여기서 바울이 사용하는 언어는 회화적이다. "수고"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지칠 만큼 애써 일하는 것, 기진맥진할 때까지 일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힘을 다하여"라고 번역된 단어는 영어 단어 'agonize' (몸부림치다)의 기원이 된 말이다. 이 단어는 '혹사하다', '애쓰다', 또는 '고통을 받다' 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바울의 지칠 줄 모르는 수고와 온갖 종류의 방해와 반대에 맞선 싸움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정적주의적인 표현이 아니다.
바울은 최대한의 노력과 수고와 고투를 쏟아 부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라는 결정적인 어구를 덧붙인다. 이는 우리가 바울의 글에서 계속 보게 되는 예의 그 놀랍고 신비로운 역설이다.
분명히 그가 언급한 성화는 하나님의 목적과 조화를 이룬 그의 노력의 결과였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따라서 거룩한 삶을 살려면 우리의 삶과 정력을 우리가 소유한 모든 능력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바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의 모든 명령은 무의미 할 것이다. 사실 주님의 크고 첫째가는 계명은 전력을 다한 노력을 요구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12:30)
하나님이 신자를 연단하시는 모든 행위는 이 책임의 중대함을 증언한다. (히12:!~11)
신자들은 부지런히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자신의 모든 정력을 다 바쳐야 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 안에서 성취된 모든 일은 하나님의 역사다.
우리의 역할 :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일
빌립보서 2장12절의 주된 요점은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는 말이다. 여기서 "이루라"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katergazomai)는 현재시제 명령법 동사이므로 이 말은 이렇게 번역될 수도 있다.
"너희 구원을 이루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라." 이것이 성화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인의 역할이다.
어떤 이들은 우리의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우리가 그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의미, 즉 구원을 위해, 또는 향해 애써야 한다는 의미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분명히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3:20,23~24,28)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불신자들에게 자신의 구원을 위해 애쓰라는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신자들에게 그들 안에 있는 신령한 공급원을 바탕으로 하여 지속적인 노력과 부지런함으로 거룩한 생활을 추구할 것을 촉구하는 부르심이다.(빌2:13)
성경은 그와 같은 명령으로 가득하다. 예컨데 로마서 6장19절은 이같이 말한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고린도 후서 7장1절은 이같이 말한다. "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라고 말한 다음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한다. (2~3절)
골로새서 3장 5~17절에서 그는 영적인 훈련과 거룩한 생활을 촉진하기 위한 우리의 책임을 함축한 명령들을 열거한다.
고린도전서 9장 24~2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바울은 허공을 치거나 제자리를 맴돌지 않았다. 그는 이기기 위해 싸웠다. 그는 최선을 다해 거룩함을 추구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는 이렇게 자신 있게 외쳤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
우리의 구원을 이루라(work out)는 명령을 또한 마치 어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거나 어느 피아니스트가 소나타곡의 어려운 악구를 '연주해 내는(worl out)' 것처럼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애쓰거나 어떤 것을 성취, 충만, 또는 완전에 이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 표현은 어떤 것을 해결하거나 완전하게 하거나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기까지 그들의 구원을 이루어 가기를 원했다.
바울은 구원에 대해 말할 때 구원의 충만한 결실을 미리 보면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그 목표를 향해 일로매진 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바울의 메시지의 의미는 "너희 구원을 위해 애쓰라". 는 것이 아니라 영광 가운데서의 믿음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라는 의미에서 "너희 구원에 대해 애쓰라"는 것이다.
택함 받은 성도는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부지런히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
빌립보서 2장12절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방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다섯 가지의 핵심 어구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 "그러므로" : 자신의 본을 이해하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겸손과 순종과 복종의 본으로 제시하는 빌립보서 2장 5~11절을 가리키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르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끓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영적인 헌신의 본질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말했고 요한은 그리스도를 안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삶의 패턴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요일2:6)
2)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이해하라.
빌립보 교회는 신실한 교회였지만 문제가 없는 교회는 아니었다. 이 교회에는 교만과 분열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바울은 아마도 연합을 그토록 강하게 강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2:1~5) 우리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여성이 서로 갈등 관계에 있는 두 파벌을 이끌었으며 (4:2~3) 그 외에도 틀림없이 그와 비슷한
다른 문제들이 있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빌립보 성도들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며 끈기있게 바로잡았다. 바울은 그들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불렀다. 1장 8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표지인 인내와 자비와 은혜로 대했다.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과정에서 실패하는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향해 오해 참으시고 자비와 용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안에는 우리의
실패를 용납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3) "항상 복종하여" : 순종의 위치를 이해하라.
순종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특징이다. 빌립보 교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복종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손님을 맞으러 나간다.', 또는 '들은 결과로 순종한다.' 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들은 대로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예컨데 루디아는 빌립보에서 바울의 설교를 들었고 주님은 그녀의 마음을 열어 복음에 반응하게 하셨다. 그 결과 그녀는 침례를 받고 바울과 그 일행을 환대했다.
사도행전 16장 30~34절에 나오는 빌립보 감옥 간수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다. 이 두사람은 각기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을 보였다.
4)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 자신의 공급원과 책임을 이해하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이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순종했지만 바울은 자신이 없을 때 더 잘 순종하기를 원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더 이상 바울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제 바울의 가르침을 내면화라여 스스로 계속해서 경건을 추구할 때가 온 것이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다른 성도들이 우리를 자애롭게 양육하며 책임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인 능력과 격려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지나치게 많이 의지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자신을 떠 받쳐 주는
그런 환경을 떠 날때 자신의 영적인 지주와 경건한 교우들의 무언의 압력이 사라짐으로 인해 절제와 순결을 위해 몸부림 친다.
5) "너희 구원을 이루라." 는 바울의 말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외적인 도움과도 관계없이 넉넉히 경건을 추구 할 수 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성도들은 자급자족적인 모든 신령한 원천의 보고이며
자신의 영적 건강을 유지할 능력과 책임이 아울러 있다.
6) "두렵고 떨림으로" : 죄의 결과를 이해하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를 지을 때 인내하시고 용서하시지만 죄에는 필연적으로 결과가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성화를 추구해야 한다.
"두렵고"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포보스(phobos)인데 여기서 'phobia(공포증)이라는 단어가 유래되었다.
"떨림"은 트로모스(tromos)에서 나온 말인데 이말은 trauma(외상)라는 단어의 기원이다.
이 두 단어는
모두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면 안된다는 건전한 두려움과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올바른
근심을 말한다. 그것은 영원한 멸망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사람에게 의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는
경건한 경외심이다.
이와 같은 두려움은 죄를 짓는 것에 대한 두려움, 시험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능력에 대한 불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에 대한 혐오다.
그것은 죄가 우리를 잘 속이며 우리 자신의 마음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와 함께 다가오는 예감이다. 그것은 도덕적 파탄에 대한 두려움이자 그런 죄가 초래할지 모르는 성도로서의 자격 상실에 대한 혐오며 바울이 초기 교회에 이스라엘 민족의 실패를 상기 시키면서 명령했던 것과 같은
신중한 태도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거나 욕되게 할 만한 모든 일에 대한 도덕적 혐오다.
이사야서 66장2절은 올바른 두려움에 대해 말한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5절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아 그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 문맥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에 떠는 자를 언급하시면서 사실상 이 표현을 참된 신자를 뜻하는 호칭으로 사용하신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하심에 대한 큰 두려움 가운데 살아야 한다.
그래서 죄로 인해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거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에 대한 자신의 신앙 고백을 어기거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섬기는 일에 쓰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징계를 초래하지 않도록 죄를 피해야 한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란 쉽지 않다. 이일은 고되고 일관된 노력과 훈련을 요구한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기르고, 우리의 영적 원천을 자기 것으로
만들며, 죄의 심각한 결과를 이해하기를 요구하는 평생에 걸친 거룩함의 추구가 수반된다.
바울은 그렇게 하려면 우리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고(고전9:27)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후7:1)
그와 같은 높은 부르심은 모두가 자기 의지로는 이 일에 실패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은 그런 실패를 억제해 줄 것이다. 그런 두려움은 우리가 다른 무엇 보다 경건을 추구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역할 : 우리 안에서 행하심
빌립보서 2장 13절에서 바울은 성화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설명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인가! 하나님이 친히 우리 안에 거하시며 자신의 뜻을 행하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 우리 자신은 만족스럽지 않지만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후3:5). 이짧은 구절안에 신앙생활에 필요한 신령한 원천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하나님에 대한 다섯가지 핵심적인 진리가 들어 있다.
1) 하나님의 신원 : 하나님.
바울은 "너희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 이시니"라고 말했다. 원문의 헬라어는 하나님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하나님이 곧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매우 친밀하게 관여하시고 우리의 영적 행복에 무척 관심이 많으셔서 자신이 명하신 일을 성취하시기 위해 인격적으로 우리안에 거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풍성한 능력과 원천으로 축복하실 수도 있지만 우리의 영적진보를 뒷바침하는 원동력은
우리의 인간적인 능력이나 자원이 아니다. 또한 동료 신자들의 사역은 분명 큰 축복이지만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격려와 지원도 그와 같은 원동력은 아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양치기가 자기 양을 돌보듯이 우리를 돌보는 존재는 인간인 목사와 교사가 아니다. 섬기는 영으로 하늘에서 보냄받은 거룩한 천사들도 아니다.(히1:14)
모든 영적 진보의 진정한 원인은 하나님이 친히 우리 안에서 우리의 성화를 이루시기 위해 역사하신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화는 결코 전적으로 중단될 수 없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며 궁극적으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롬8:30)
구원은 언제나 의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약2:17~26; 엡2:10) 구원은 불가피하다. 불변하고 영광스럽고 주권적이고 위엄있고 의롭고 거룩하고 은혜롭고 자비로운 하나님,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언제나 자신이 원하시는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며 결코 방해받지 않으신다.
이것이 대체로 인정머리 없고 단순하며 복수심에 불타는 신들을 믿는 이교도들의 세상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까닭은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자비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원한 약속을 바탕으로 한 영원한 언약으로 우리를 지키신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11:29)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를 꿰뚫어 보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신다.
2) 하나님의 능력 : 역사하심
바울은 헬라어 동사 에네르게오(energeo)의 현재 분사 형태를 사용하여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을 묘사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영어의 '에너지'라는 단어는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그것은
효력있고 생산적인 에너지, 역사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무한한 능력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 진보에 활력을 불어넣으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성화를 이끌어 간다. 의를 촉진하고 죄를 부정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안전하다. 하나님의 능력은 계속해서 우리를 영화로 인도한다.
우리가 인내하는 것은 하나님으로 인해 힘을 얻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궁금적으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일을 이루실 것임을 안다.(빌1:6)
3) 하나님의 거처 : 우리 안.
에베소서 3장 20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신다고 말한다.
바울은 "하늘이나 그리스도나 성령 안에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대신 그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계획하거나 추론하거나 심지어 꿈꿀 수 있는 능력을 초월하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자신의 능력으로 목적한 바를 이루실 수 있으며 이루신다. 그러한 내적 능력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며 우리의 충분성의 기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신자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기독교 특유의 교리다.
구약시대에 신자들은 성막이나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했다. 반면 이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신자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의 성전이다.
고린도 후서6장 16~17절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우리가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께 바칠 때부터 그분의 얼굴을 대면하여 볼 때까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 때는 한 순간도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계시고, 언제나 양육하시고, 언제나 떠받치시고, 언제나 붙드시고, 언제나 공급하시고, 언제나 힘을 주시고, 언제나 보호하시고, 언제나 우리의 삶에서 거룩하게 하는 효력을 낳으신다.
그리고 그런 거룩하게 하는 과정은 중단 될 수 없다. 어떤 이들이 영적인 여정 속에서 길을 헤매기도 한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의 신실함이지 우리의 경솔함이 아니다.
죄는 그 과정을 늦추겠지만 하나님은 신자를 징계하시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히12:5)
4) 하나님의 목적 :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심.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뜻과 우리의 일, 우리의 욕구와 우리의 행동에 활력을 불어 넣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에게 옳은 일을 행할 수 있는 소원과 능력을 함께 부여한다.
모든 행동은 욕구와 의도에서 나온다. 사실 빌립보서 2장13절에서 "소원을 두고"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의도나 성향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도록 경건한 소원을 주입하시기 위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어떻게 그 일을 하시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키기 위해 두가지 것을 사용하신다.
첫째는 거룩한 불만족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육신적인 본성에 불만을 갖게 하신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부르짖으며 비참할 정도로 그런 불만을 경험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그가 불만족한 것은 자신의 환경이 아니라 자신의 죄였다.
두번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자신의 뜻과 일치시키는데 사용하신다. 그것은 거룩한 열망이다. 이것은 불만족의 또다른 면이다. 더 낫고 더 순전하고 더 거룩한 것에 대한 갈망이다.
우리가 바울이나 요한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말씀을 읽으면 우리 마음은 그들을 닮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찬다. 또는 어떤 위대한 주님의
종의 전기를 읽고 갑작스럽게 그에 비하면 우리의 헌신이 얼마나 피상적인지를 깨달을 수도 있다.
그런 경험은 하나님이 쓰시기에 더 합당한 모습이 되고 싶다는 거룩한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우리의 욕구와 의도에 힘을 불어넣어주심과 더불어 하나님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 일하도록 힘을 주신다.
바울은 우리의 일을 묘사하기 위해 하나님의 일을 묘사하는데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다.
하나님은 자신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위해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거룩한 불만족은 거룩한 열망으로 이어지고 거룩한 열망은 옳은 일을 하겠다는 거룩한 결심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거룩한 행동으로 이어진다.
5) 하나님의 뜻 :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빌립보서 2장13절에서 "뜻"으로 번역된 헬라어 명사는 만족이나 선한 기쁨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만족하게 하고 기쁘게 하는 일을 행하도록 우리안에서 역사하신다. 그것이 바로 성화 과정의 목표다.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성도들은 하나님께 매우 귀한 존재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이것이 곧 관계의 본질이 아닌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고 싶어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을 원하시는 까닭은 그것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의 표시로 우리의 가장 좋을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우리를 위해 모든 일을 하시는 분 -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우리의 모든 병을 고치시며 우리의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우리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우리의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 분(시103:3~5)-께 기쁨을 드릴 수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그래서 우리는 순전히 성화를 정적주의거나 경건주의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성화에 우리의 최선의 노력과 하나님의 방법의 놀라운 조화가 있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불가능한 요구를 하신 뒤에 우리가 불순종하면 우리를 짓밟으시는 고압적이고 강제적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섬긴다.
기독교의 유일무이함과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다(골 1:27)
그리스도는 우리의 성화이며 우리의 넉넉함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함으로 부르시고 나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도록 부르신 뒤에 우리를 동원하셔서 하나님 자신의 능력과 임재로 섬기게 하신다. 신령한 동반자 관계다. 그러나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진다.
거기에는 절대적인 충분함이 있다!
인생의 문제가 무엇이든 의지할 원천은 하나님이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누가 그보다 못한 원천을 받아들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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