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2006. 8. 6. 예비신자작정 주일 낮설교

하나님아들 2014. 8. 30. 21:42

2006. 8. 6. 예비신자작정 주일 낮설교
설교제목 : 때늦은 전도
성경본문 : 누가복음 16:19-31

지난번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조사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1일기준으로 기독교 인구가 876만 6천명으로 10년전보다 14만 4천명이 줄었다는 통계입니다. 1.6%가 감소한 것입니다. (불교는 1072만 6천명으로 3.9%가 늘었고 천주교는 514만6천명으로 10년 전보다 74%가 늘어났습니다.) 그런데다가 저출산과 고령화 시대를 맞이하여 주일학교 학생들까지 감소되어 주일학교가 없어지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는 자성해야 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고 다시 100년전에 평양에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났던 1907년도 부흥운동과 전도 운동이 다시 한국에 각교회마다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한국교회가 세계선교사역을 감당해 나갈수가 있고 하루속히 민족복음화가 이루어지지 전도운동과 교회 부흥운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서구교회같이 힘없이 무너지고 추락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우이제일교회는 어느 교회보다 먼저 부흥운동이 일어나야 하겠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혼 구원형 교회로 생명을 구원하고 전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길만이 교회가 이 어려운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대안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시간 여러분들의 영혼구원에 문제를 다시한번 확실히 묻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앞에 오늘밤 갑자기 예측하지 못했던 죽음이 닥아 온다면 여러분들의 영혼은 어디로 간다고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정말 우리 인간이 죽은 이후 사후의 세계는 어떻게 되는것일까요? 아마 이것은 우리 모두의 질문이고 이땅에 살고있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께서 말씀해 주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우리 인간의 죽은이후 사후의 세계가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이 너무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은 죽음은 모든 것의 끝으로 생각하고 죽으면 무엇을 아느냐고 하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 사후 세계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죽은 후에도 영혼은 의식이있고 느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나사로를 알아보았고 자신의 고통스러운 느낌이 있기에 호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것은 사후(死後)의 세계에서는 내가 하고싶은 일들을 내마음대로 할수있는곳이 아니라는 곳입니다. 더욱이 이 세상에서 하지 못한 것을 사후의 세계에서 다시 할수 있는 기회는 절대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옥간 부자의 때늦은 전도의 소원입니다.
그럼 이시간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이세상은 어떤곳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이땅은 공존(共存)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부자와 나사로가 함께사는 공존하는 세상입니다. 즉 돈이 많은자와 가난한자가 공존하는 곳입니다. 기쁨과 슬품이 공존하고 행복과 불행이 교차합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고 낮과 밤이 공존합니다. 그래서 본문을보니까 한 부자가 세상에 살았는데 그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한 부자' 라는 말이 그의 이름을 대신하였습니다. 당시에 라틴어로 극치에 이른 부자를 디베스(Dives)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부라고 하는 물질 속에 그 인격이 파묻혀 버린 인생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자색옷은 겉옷이고, 고운 베옷은 속옷입니다. 이것은 당시에 왕이나 귀족들이 입는 값비싼 옷들입니다. 이것은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의 34,000배에 해당 되는 아주 고가품의 옷이었습니다.
그는 호화로운 연락으로 인생을 즐겼습니다. 여기 '호화로운 연락'이란 이국적이고도 값비싼 요리와 함께 주연과 주색으로 흥청거리는 쾌락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부자의 매일의 일과였습니다. 그래서'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는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하라(출 20:9)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연락을 좋아하고 육적 소욕과 세상풍조를 따라사는 쾌락주의의 인생으로 하나님을 모르고 믿음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았고, 하나님이 어디 있는지를 모르는 무신론자의 삶을 살아습니다. 그에겐 물질이 행복의 기준이 되었고 얼마나 갖고 소유했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였습니다. 그는 유물론자였고, 현실주의 자였고, 쾌락주의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동네에 나사로라 이름하는 자도 함께 살았습니다.
그럼 나사로는 어떤사람입니까?
그는 부자와 달리 자기 이름이 있었습니다. '나사로'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름은 히브리어의 '엘리에셀'에서 온 것인데' 하나님의 도움'이란 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 세상속에 살고 있는 '신자'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난한 자는 결코 아닙니다. 다만 불신앙적인 이 세상과 대조적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거지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 헌데를 앓아 진물이나고 거동도 못하는 환자였습니다. 심지어 개들이 그의 냄새를 맛고와서 헌 데를 핥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집이없어 부자의 대문앞에 노숙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이 그의 숙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식으로 삼아 배를 채웠습니다. 실로 그는 무기력하고 고난의 삶을 사는 불쌍한 사람이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마음중심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삶의 신조로 삼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2. 이땅은 누구나 죽는 인생임을 보여줍니다(눅16:21-22).
성경은 거지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였습니다(눅 16:22)
죽음은 예고없이 갑자기 찾아옵니다. 그런데 나사로의 죽음은 장례를 지냈다는 말이 없습니다. 아마도 그의 시체는 부잣집의 종들에 의해서 오물을 치우듯이 간단하게 가마니에 둘둘말아서 처리되어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돈이 많은 부자도 죽었다고 하였습니다(눅 16:22) 돈이 많다고해서 앞에 다가오는 죽음을 막을수는 없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도 오는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장사되었다는 하였습니다. 그의 시체는 장례식을 통하여 꽃속에 묻치였고 많은 조문객들이 모인가운데 장엄한 음악에 맟추어 최고로 화려하게 장례예식을 치루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경의 중요한 교훈은 두 종류(類) 의 실존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가난한 거지 나사로도 죽고, 돈많은 부자도 죽었습니다. 가난한 거지는 가난하고 돈이 없어 죽은것도 아니고 돈많은 부자는 그 돈의 능력과 힘 때문에 죽음을 연장한 것도 아닙니다. 죽음앞에는 모두가 평등한 것입니다. 이처럼 한번 태어나는 것이나 한번 죽는 것은 사람이 주관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하는 것이고 어느누구도 항거하거나 바꿀수없는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우주의 법칙인 것입니다(히 9:27). 그럼 왜 이땅에 죽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왔을까요? 이유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에 죄의 삯인 사망이 모든 인류에게 임하게 된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27을보면 한번 죽는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3. 육체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실존하는 내세가 기다린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6장 22절에 보면「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라고 한말에 유의해야 합니다.
나사로는 육신의 호흡이 끝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부리시는 천사들이 그의 죽음의 현장에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을 하나님 앞으로 데려갔다는 말을 '받들려갔다' 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극진하게 영접을 하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아브라함의 품'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가는 처소로, 곧 천국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천국백성의 대표입니다(마 8:11).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품'이란 실존하는 천국의 넉넉함과 안전함과 행복함을 알려 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나사로는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았던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비록 가진것이 없어 부잣집의 추녀밑에 노숙하고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며 살았을 지라도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서 그의 영혼은 천사들의 큰 영접을 받아 아브라함의 품속으로 안내가 되었습니다. 천국으로 들어 갔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어떤곳입니까?
요한계시록을 보면 천국은 슬품이 없는곳이고 곡하는것이나 아픈곳이 없고 다시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없고 주림이나 목마름이나 다시 상함이 없고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는 주님의 위로만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어떻게 되었나요? 부자는 죽은 이후 이세상의 상황과는 180도 판이하게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나사로와의 상황이 역전이 되었습니다. 그럼 부자는 죽은 이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1). 부자는 음부로 떨어졌다고 하였습니다(눅 16:23).
'음부'라는 헬라어 '하데스'는 지옥을 의미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자의 표상입니다. 혹자들은 그가 지옥에 간것이 자선을 베풀지 아니한것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그는 자선 을 베풀지 않아서가 아니라 믿지않은 그의 불신앙의 죄로 인하여 지옥에 가게된 것입니다(요 16:9).
예수를 믿지 아니한 불신앙의 결과로 지옥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요 3:18-19).
(2). 그는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하였습니다(눅 16:23).
누가복음 16장 28절에도 보면 그 부자가 음부에서 스스로 하는 말이 '이 고통 받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고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소원대로 안되는 고통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할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품을 눈앞에 보고도 못 가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눅 16:23).
뜨거운 불꽃 중에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한 방울의 물로 자신의 혀를 시원하게 적실 수가 없었습니다(눅 16:24-25) 아무리 나사로를 부르며 간청을 해도 결코 소원을 들어줄수 없는것이 지옥간 부자의 상황인 것입니다. 이처럼 지옥은 요청을 들어줄수 없는곳이고 소망이 없고 서로 오고 갈수 없는 단절된 장소가 지옥인 것입니다.(눅 16:26).
그래서 오늘 본문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큰 구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거나 가거나 왕래 할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큰구렁'이란 '크게 벌어진 틈'이란 뜻으로 그랜드 캐년같이 깊은 협곡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영원전부터 하나님이 고정해 놓으신 완벽한 간격을 뜻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것은 전도소원마저 거절을 당하는곳이 지옥입니다 (눅16:27-30). 그때 부자에게 뼈저리게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너무 유황불에 고통스럽고 와서는 안될 지옥 이였기에 바로 이세상에 살고 있는 자기 골육형제 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옥에서 부자는 간절한 소원을 요청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구하오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16:27-28) 정말 기막힌 소원입니다. 지옥간 부자의 애타는 소원입니다. 아니 절규의 소원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 형제가 다섯이 있는데 자기가 고통받고 있는 지옥에는 너무 고통스럽기에 오지 않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지옥의 실존을 맛보면서 터진 전도의 소원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소원은 거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때늦은 전도였기 때문입니다.
4. 그럼 때늦은 전도가 무엇인가?
(1). 사후 전도입니다.
그는 살아 있을 동안에 자기 중심의 삶을 살았던 자입니다. 매일같이 육체로 일락을 즐기다가 하나님 없이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그후 그는 음부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하였습니다(눅 16:22-23).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는 이 세상의 일에는 관여를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단 천국과, 지옥에 들어가면 그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기 때문에 서로 내왕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옥에는 소원이나 희망이 있을수 없는곳이고 모든기회를 잃어버린 곳이 지옥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할것은 복음 전파의 기회는 오직 이 세상에 살아 있을때에만 할수있는 일입니다. 사후에는 이땅에서 주어지는 모든 기회가 상실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자가 죽은 자를 위하거나, 죽은자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자를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라는 살아있는 동안에 할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카톨릭에서 말하는 사후에도 구원받을 기회가 있다고 가르치는 이른바 연옥설 교리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후손들이 죽은 자를 위하여 그 어떠한 속죄공덕을 비는 행위도 전혀 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일종의 유령 전도입니다.
부자는 죽은 나사로를 환생시켜 이 세상에 보내면, 죽은 자가 환생 하는 일로 인하여 저희 형제 다섯이 회개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눅16:27-30).
그러나 성경은 이세상에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눅 16:29, 31). 모세와 선지자는 율법과 예언을 가리킵니다. 율법과 예언의 중심은 예수입니다.
말하자면 이세상에는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들의 전도를 받지 아니하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말한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지옥간 부자는 '죽은자가 살아나서 말하면' 저희가 회개 할것이라고 고집하고 있습니다. 죽은자가 살아나서 말하는 것은 일종의 유령전도입니다. 그는 지옥에서 생각하기를 이세상에 있는 전도자들의 전도보다, 죽은 자가 살아나서 전도해야 그 형제들이 믿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이미 이세상에 있는 그 다섯 형제들의 심사를 잘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종의 유령전도, 혹은 이적적 전도를 통해서만이 그 형제 다섯이 회개할 것이라고 착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벵겔(Bengel)은 '우리는 충실한 복음을 들음으로 구원을 받았지 유령으로 구원받은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때늦은 전도는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 줍니다.
(3). 지옥간 부자의 소원과, 외침에서 이땅에 있는 우리는 교훈을 받아야 됩니다.
지옥간 부자의 외침은 지옥엔 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의 영이 산사람에게 결코 의사전달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우리들이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피차 복음을 전하여서 구원에 이르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 입니다.
지난번 도봉 소방서에서 2006년도 상반기 화재발생 현황을 보고했는데 총 159건의 화재가 발생되어 5명이 죽고 많은 재산 피해가 생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화재가 일어나 내가족과 내이웃이 불에 타죽고 연기에 질식되어 죽어가는데 우리가 뛰어들어가 그들을 구원해 내지않고 그냥 앉아서 구경만하고 가만히 있다면 얼마나 악한 사람들입니까?
지난번 갑자기 폭우가 계속 쏟아지고 산사태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 실종이 되어서 가족들이 물에 떠내려간 시신이라도 어떻게 찾을수 없나하여 구조대원들과 가족들이 배를타고 구석구석을 쌋쌋이 뒤지며 안타깝게 헤매며 찾아다니고 있는 모습을 보셨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잃은 영혼을 찾는 구조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죄악에 물결에 빠져 휩쓸려 내려가는 영혼들을 건져내고 구원해내는 영혼구원형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족의 영혼을 찾고 내형제들의 잃은 영혼을 찾는 영혼을 찾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이 중대합니다. 내일이면 늦을 것입니다. '인생은 언제나 기회가 있는것이 아닙니다. 기회는 달아나기 쉽고, 때는 언제나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르반데스 돈키호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양이 비취고 있는 동안에 건초를 만들어라.'
A.리톤은 말하기를 '기회는 모든 자들에게 찾아오지만 그것을 잘 활용하는 자는 소수이다.' 한국 속담에는 '고기만 보고 기뻐만 하지말고 가서 그물을 던져라.' 기회를 포착하여 활용하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프랑스격언에는 '기회가 사람을 버리는것 보다 사람이 기회를 잃어버릴 때가 더많다.'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말했습니다.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한다」(요 11:9)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였습니다(딤후 4:2).
때늦은 전도는 사실상 전도일 수가 없습니다. 때늦은 전도란 말은 사실상 무의미합니다. 그것은 사후전도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유령전도입니다. 사후 전도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옥간 부자는 전도하는 기회를 잃은 자였습니다. 아니 전도를 못해본 자입니다. 다만 주님은 이 비유에서 살아 있을 동안에 골육의 구원을 위하여 전도해야 된다는 암시적 교훈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사후에 지옥이 있고 천당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아브라함의 품이 있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음부의 영원한 고통이 있다는 내세의 진리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땅에서 받은 나의 시간이나 건강이나 지혜나 부나 기타 모든 것들을 부자와같이 남용하지 말고 바르게 선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바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돈이나 부(富)라고 하는것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수단일 뿐, 결코 숭배나 육체적 쾌락이나 삶의 목적의 대상이 될수 있는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일할수 없는 밤이 오기전에, 내게 힘이있을때 전도해야 됩니다. 일할수없는 밤이 다가 옵니다. 언젠가는 죽음이 찾아 옵니다. 그러므로 때가 늦기 전에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시기를 바람니다.
내가족과 내 친척과 내자녀들을 예수님앞으로 이끌어 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일은 이 세상에서 감당할 우리 그리스도인의 첫번째 본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는 내가정과 내직장과 내이웃에 파송된 평신도 선교사 들입니다. 그래서 나를 통해서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전해져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 돼야합니다. 우리나라의 최초로 복음을 전해주었던 영국의 토마스 목사님은 옥스퍼드대학의 의사공부를 포기하고 복음을 전하여야 하겠다는 비전을 안고 1865년 젊은나이에 체프에서 만난 한국인들과 중국인 우문테가 선장으로있는 배를타고 한국 서해안에 들어와서 2개월 반동안 전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에 1866년 8월에 제너럴슈만호를 타고 한국에 왔다가 대동강변에서 젊은 나이에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그의 희생과 개신교의 첫순교로 한국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첫째는 그가 나누어준 성경으로 최초한국에 기독교인들이 처음 생겨나게 되었고 둘째 그의 순교를 통하여 조선이라는 나라가 유럽과 미국에 알려지고 한국어 성경이 번역이 되게 되었고 셋째는 제네랄 쉬만호의 사건으로 한국과 미국의 조미수호 통상조약으로 선교사들이 한국에 공식으로 들어올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한사람의 희생적인 전도와 순교로 오늘의 한국교회를 이루어 놓았다면 오늘 우리도 내가정과 내직장과 내이웃에 순교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살려내는 우이제일교회 평신도 선교사들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통해서 내가정을 살려내고 내가족의 영혼을 구원해내고 내이웃과 내민족의 생명을 살려내는 평신도 선교사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높이 들어나는 우이제일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출처 : 부르짖는 기도
글쓴이 : 이국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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