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1-6(주일, 091122)
복된 삶의 지침서
돌아오는 금요일 저녁에 제가 지방 등급사경회에서 시편을 강의합니다. 저는 시편 강의를 준비하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더욱 더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가 느낀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시편 1편만 읽어봐도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시편은 “복 있는 사람은”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순복음교회를 싫어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순복음교회는 다른 메시지보다는 지나치리만큼 축복을 강조하는 교단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도 전해야지 축복의 메시지만을 전하면 어떻게 하나? 그러니까 성도들이 기복신앙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시편을 공부해보니까, 저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오히려 복을 빼놓고 신앙에 대해서 얘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복을 받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가 갖는 자연스런 소원입니다. 신앙생활 잘 하고자 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소원을 갖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벌써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자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복의 관점에서 성경을 묵상해보니까, 성경은 온통 복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먼저, 우리는 복 받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창세기 1:27-28절에 보니까,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생육의 복, 번성의 복, 충만의 복, 땅을 정복하는 복,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복을 주셨습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가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복을 받기를 축복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안식의 복을 누리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일곱째 날을 복 주셔서 거룩하게 하시고 안식하는 날로 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의 복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일주일에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돈을 하루치를 더 벌 수 있을지 몰라도 안식의 복을 누리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돈을 많이 벌면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고,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을 벌 목적으로 쉬지 않고 일하다가 건강을 해치면 쉬지 않고 일하여 번 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건강도 잃고 돈도 잃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강을 유지하며 안식을 누리는 길은 하나님이 정하신 삶의 규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의 복을 주시고자 아예 10계명 속에 포함시키셔서 순종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안식을 누리게 하셨고, 또 그 말씀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안식을 주도록 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복의 근원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복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창1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고, 사람들에게 복 주시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또한 우리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복의 근원이 되어 서로 서로를 축복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세계 모든 족속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모든 복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 열방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모르고, 사람이 사람을 저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삶을 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저주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설혹 악인을 만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저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심판과 저주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축복하는 일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저주의 통로가 아니라 복의 통로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보다 더 적극적으로 이 축복의 사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7-28)”고 하셨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14)”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고전4;12)”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된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성경은 축복의 길이 어떤 길인지를 알려주는 네비게이션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에야 우리는 복을 얻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부르실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그 결과 그는 열국의 아비가 되리라는 언약을 받았고, 그의 후손들을 통해 수많은 민족들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열방을 축복하는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길이 복된 길임을 알게 됩니다. 오늘 시편 1편도 말씀을 따라가는 삶이 복된 길임을 알려 줍니다. 2절에 보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가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 역시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신5:33)”
또 우리는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얼마나 모든 일에 있어서 복을 얻는 길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1:8)”고 하셨습니다.
전쟁을 앞둔 군사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형통하려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된 삶을 살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이 지시한 대로 사는 것은 필수라 할 수 있습니다. 그저 열심히 기도한다고 다 응답받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기도응답 받는 조건은 두 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는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겠습니까? 요한복음 15:10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결국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15:12)”
말씀대로 살면 원하는 모든 복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서로 사랑하면 복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 중에도 이기적인 사람이 많습니다. 성도 간에도 경쟁심이 넘쳐서 내가 복을 받아야지 다른 성도가 복을 받으면 배가 아픈 분들이 있습니다. 뭐든지 자기가 중심입니다. 복을 나누어 주기보다는 자기에게 복을 끌어당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을 얻는 하나님의 방법은 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하나님은 복을 얻지 못하는 길도 알려 주십니다. 그 길에 대해서 시편 1편은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악인의 꾀를 좇는 것입니다. 둘째는 죄인의 길에 서는 것입니다. 셋째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 세 가지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마귀의 유혹은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것과 동일합니다. 마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으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하나님의 명령에 정반대되는 것을 지시하면서도 사람을 잘도 속입니다.
사람들이 왜 사기꾼들에게 당합니까? 거짓말이 참말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유혹은 다 거짓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에 넘어갑니다. 그것이 좋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보암직스럽고, 너무나 먹음직스럽고, 너무나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유혹은 너무나 잘 포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포장 속에는 사망의 독이 있습니다. 그것을 따 먹으면 정녕 죽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왜 사단의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것은 그들 안에 있는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보고 싶고, 먹고 싶고, 지혜를 얻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보고 싶은 것 다 보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거룩하지 못한 것, 음란한 것, 포르노와 같은 것들을 보면, 순간적으로 눈의 정욕을 채워주기는 하나, 그렇게 되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의 눈을 통해 들어온 거룩하지 못한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더럽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 먹고 싶은 것 다 먹으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인스턴트 식품 좋아하면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입맛에는 맞지만 안 좋은 유해물질들이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뉴스를 들으니까, 어린아이가 소세지 3조각만 먹어도 사망할 수 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라면이 안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라면을 즐겨 먹습니다. 현미가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흰 쌀밥을 먹습니다.
우리는 건강의 길을 알면서도 실제로는 건강을 해치는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장의 입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얻는 것도 영적으로는 결코 좋은 것이 못됩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고는 실제로 선악을 분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은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은 잘 못 보면서 다른 사람의 벌거벗은 모습은 잘 봅니다. 아마도 우리의 눈이 앞을 향해 있기 때문인가 봅니다. 자신을 보기 전에 먼저 자기 앞에 있는 다른 사람이 보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항상 결점 투성이기 때문에 늘 결점이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도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죄인이라고 정죄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만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교만의 눈으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스스로 죄인임을 알았기에 다른 이를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님께 은혜를 구할 뿐이었습니다.
누가 구원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보다 세리와 창기가 천국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 죄인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세상 지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오히려 교만에 빠지게 합니다. 교만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스로 죄인인 것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만이 그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 죄사함의 복을 얻고, 구원을 얻는 참 지혜인 것입니다.
여섯 번째로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가 어떤 복을 얻게 되는지 알려주십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시편 기자는 그것을 비유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그 반대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뜨거운 사막에서 물이 모자라 바짝 말라버린 나무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 나무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어떻습니까?
그 나무는 시절을 좋아 과실을 맺습니다. 여러분은 시절을 좋아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열매 맺어야 할 때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절은 우리가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반면, 우리가 맺지 말아야 할 열매가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열매입니다. 육체의 열매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5:19-21)”
사도 바울은 이런 열매를 맺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시편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육체의 열매를 맺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비결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2절 말씀이 그 해답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또한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한 가지 보너스를 더 주셨습니다. 바로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로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깨달은 진리대로 살 수 있는 능력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깨닫게 하시는 대로 순종만 하면 그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히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똑같이 사랑을 하더라도 성령 없이 사랑하는 것은 의무적이요 율법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힘으로 해볼 때까지 해보는 것입니다. 자기의 능력 만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십자가의 능력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무한한 능력의 원천이십니다. 그분으로부터 솟아나는 샘물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열매가 없고, 잎사귀가 메말라 있는 것처럼 느껴지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생수의 근원이신 성령님으로부터 물을 길어 올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여러분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하시려고 해도 여러분들의 자아가 불순종하여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행사가 형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 귀 기울이고 말씀대로 살면 영원한 생수가 우리 안에 강같이 흘러서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하는 일마다 형통의 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복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으로 타락하여 복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금 우리를 복의 근원으로 부르셨습니다. 창조의 원형으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복된 길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또 성령을 주셨습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하십니다. 의인의 길이 있고, 죄인의 길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율법을 주야로 묵상함으로 죄인의 길을 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죄인은 망하지만 의인은 하나님께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면 형통하고 복을 얻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민은 그 말씀대로 살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고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역시 십자가 복음을 붙잡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거스르며 자아의 욕심대로 살 수 밖에 없는 나의 옛 존재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붙드는 것입니다. 갈등의 순간마다 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 의지를 성령께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이제 성령의 사람입니다. 내 맘대로 하는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오직 예수님의 종입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나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성령께 굴복하오니, 내 안에서 일해 주십시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친히 우리 안에서 일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복된 삶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순간순간 우리의 의지를 성령께 드리기만 하면 우리는 복된 길을 계속해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이 시간 우리를 복된 존재로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립시다. 복의 길을 알려주신 것을 감사드립시다. 성령을 주사 복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시다. 또한 우리의 의지를 성령께 드립시다. ‘나를 취하시고, 나를 복의 통로로 삼아주옵소서’ 라고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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