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버전 1.0
싱클레어 퍼거슨/ 김재성 옮김
IVP 조직신학시리즈
목차:
1장 성령과 그의 내력
2장 그리스도의 영
3장 성령의 선물
4장 오늘날의 오순절?
5장 질서의 영
6장 재창조의 영
7장 성결의 영
8장 성령의 교통
9장 성령과 그리스도의 몸
10장 성령의 은사들과 사역
11장 우주적인 영
역자서문
성령에 대해 개혁주의 신학적으로 정리된 교과서가 아브라함 카이퍼 이후로 약 100년 만에 출간되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교파마다, 심지어 목사마다 정리되지 않은 온갖 성령론을 주장하는 혼란의 극을 달리고 있는 시점에서 이 책은 그런 혼돈을 치유할 수 있는 훌륭한 해답서이다.
이 책은 현대의 성령론에 대한 수많은 조류와 사조를 각주에서 일일이 참고하고 논평하고 점검하면서, 성경적이며 전통적인 칼빈주의 신학에 근거한 성령론을 체계화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를 받는다. 특히, 오순절과 성령의 은사 이해에서 이미 주목할 만한 저술과 논문을 발표한 리차드 개핀(Richard Gaffin, Jr. 아들)도 이 책이야말로 개혁신학의 발전을 보여 주는 놀라운 책이라고 극찬했다.
이 책은 성경적 안목으로 성령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정리해주고 있다. 경험이나 전통, 혹은 교회에서 행해지는 관행에서 성령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전에, 먼저 성경에서, 그리고 역사적인 교회의 문서들과 신학자들의 설명에서 찾아보는 것이 순서이다. 그런 점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정리된 본서의 내용은 훌륭한 출발점이 된다.
1998년 9월 합신 연구실에서 김재성.
정리자 주:
퍼거슨의 성령론을 읽으면서 필자가 감탄을 한 점은, 이 책이 다소 스콜라적인 정통 개혁 조직신학을 매우 생동감 있게 재편성했다는 점이다. 그뿐 아니라 그간의 많은 학문적 발전의 결과와 논의가 이 책에 반영되어 있을 뿐 아니라 퍼거슨의 깊은 신약 신학적인 연구 결과도 들어 있다. 또한 이 책에는 퍼거슨의 깊은 영적 체험이 그의 학문과 놀랍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우리의 신앙 생활과 직결된다. 혹자에게는 이 책이 정통의 틀을 벗어났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마음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내용은 정통 개혁 신학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그 신학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필자가 이 책을 읽다가 후배들에게 정리를 해두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정리록을 만들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김재성 교수의 탁월한 번역(어려운 말을 이해하기 쉽게 번역함)은, 독자들로 하여금 책의 깊은 내용을 쉽게 생각하고 지나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노파심 때문이다. 먼저 번역서를 읽고 이 정리록을 읽으면 이해가 쉽게 되고 배운 것이 기억에 남을 것을 희망한다.
가끔 나타나는 괄호에 들어 있는 말이나, „à„ 이후에 있는 말은 정리자가 이해를 더하려고 붙인 말, 혹은 요약이다. 송다니엘(하이델베르크 개혁교회 목사)
5장 질서의 영
오순절에 교회에 부어진 하나님의 영은 회복의 영이다(성령님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러 오셨다). 성령은 이처럼 새로운 창조의 머리이신 예수님께 오셔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로운 지배권을 회복하실 자로서 봉사하도록 예수님을 구비시켜 주셨다(고전15:45-49[1]) à 성령님이 임하시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된다! 금이빨로 바뀌는 곳에서는 인간의 탐욕이 부추겨지고, 넘어지는 곳에서는 인간이 물건이 된다. 비인격적인 역사는 인간적 혹은 사단적이다!
새창조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믿는 자들도 다른 피조물과 함께 그날을 기다리며 탄식하고 있다. 성령의 사역은 마지막 날의 영광을 향하고 있으므로 종말론적이며, 종국에는 하나님이 새 창조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하신 영광을 모든 피조물에게서도 완성하신다.
그러나 그 영광이 이미 믿는 자들 안에서 회복[2]되고 있으므로 반(半) 종말론적이라고 볼 수 있다. (신자는 이미와 아직 이라는 긴장 속에서 산다)
오순절 이후 성령의 활동은 물 위에 퍼지는 동심원의 물결처럼 역사를 통해서 퍼지고 있다. 구약 시대와 같이 신약 시대에도 성령의 활동은 구원론적이요 공동체적이요 우주적이며 종말론적이고, 개개인의 변화와 교회와 세상의 통치,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관계되어 있다.
이러한 유형에 대한 시사는 이미 사도행전의 이야기 속에 존재하고 있다: 오직 성령의 권능에 의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구속주요 주님으로 믿게 되고, 새로운 주님의 공동체는 성령의 활동 안에서 형성되며, 장차 올 새 시대의 권능이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서 현시대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히2:4; 고후12:12; 행3:1-10;5:12)
만일 우리가 죄 가운데서 수치스러운 삶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옮겨지려면, 거기에는 분명히 기나긴 여정이 있다. 어떻게 우리가 성령의 길과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는가?
구원의 서정
신학사에서 보면, 먼저 신론과 기독론이 어느 정도 정립된 후에야 구원론의 문제에 대한 자세하고도 비평적인 탐구가 이루어 졌다. 교부시대에는 하나님의 존재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격과 본성에 관한 질문이 압도적이었다.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구원론에 대한 결정적인 선언들이 추구되고 제시되었다. 칭의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고전적 해설은 트렌트 종교회의(1545-1563) 말기에야 공포되었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어떻게 구원이 성취되었는가에 대한 해석은, 불가피하게 그 구원의 개인적인 적용에 관한 질문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이런 맥락에서, 중세 신학의 주된 관심은 구원의 은혜를 성례에 연계시키는 것이었고, 따라서 의롭게 되는 과정(processus justificationis)에서 교회의 제사장적인 사역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성령의 사역은 7성례의 시행에 한정되어 버렸다. 종교개혁의 관점에서 이것을 볼때, 일곱 성례는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성령은 교회의식의 시행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세 신학은 주로 칭의의 과정에 집중하였으므로, 죄인이 은총을 받기 위해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비중을 두었다:
- 선행적 은총(gratia praeveniens[3])을 받아 의지가 죄를 미워하고 의와 칭의를 사모하는 쪽으로 움직이게끔 하다 보면 그에게는 상습적으로 은총을 받는 성향이 굳어진다. (선행적 은총은 아무에게나 공짜로 주는 것이 아니라, 성례를 받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따라서 성례를 은총의 수단이라고 한다. 성례를 계속 받으면서 죄를 미워하게 되면 은총을 받는 성향이 굳어지게 되는데, 이것을 habitus가 생긴다고 말한다. 이러한 가르침으로 가톨릭은 사람을 교회와 예식, 시제에 단단히 묶는다. 사제 없는 구원은 없다! 신교에서는 만인이 제사장이다. 은혜론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가틀릭에서는 „공짜는 없다“이고, 신교는 „오직 은혜로“를 가르친다)
- 죄에 대한 완전한 비탄이 결여된 불완전한 애통은 고해성사라는 수단으로 보충된다.
- 평생토록 충분한 은총을 단번에 받을 수 있는 의식이란 없다(따라서 가톨릭은 „오직 은혜로 단번에 칭의를 받는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고해성사는 칭의를 향한 지속적인 과정에서 정규적인 행사가 되어 버렸다.
- 이들의 칭의 개념은 실제로 의롭게 되는 것(justum facere)을 뜻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선포되고, 간주되고, 구성되는 종교개혁적 개념은 없었다. 즉 칭의가 내적인 의로움과 혼동되고, 법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면 개인이 완전한 성결에는 못 미치기 때문에 결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을 것이다.
- 결과적으로 드물게 개인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계시 없이는(성자) 누구도 칭의의 복을 확신할 수 없다. (트렌트 공의회의 결정에 따르면, 특별한 계시 없이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
칭의 문제는 마틴 루터가 해결했다. 그는 많은 정신적 영적 투쟁을 통하여 중세적인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이것은 롬1:16-17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해 분출되었다. 바울은 이곳에서 의로움을 획득하기 위한 자신의 업적을 말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예비하심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음을 루터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인식의 패러다임의 전환이었고, 이 깨달음은 종교개혁의 초석이 되었다 à 전혀 다른 구원론)
제2세대 종교개혁자인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로 불린다. 칭의는 의로움이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gratia infusa) 전가되며, 스스로 취득한 것이 아니라 양도된 것이 (루터가 발견한) 칭의의 본질이다. 칼빈은 이 새로운 이해를 구원과 적용시켜 성령의 역할을 회복시켰다. 칼빈은 구원에 관해서는 성례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례가 말씀과 성령의 활동에 종속되었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칼빈은 „어떻게 성령이 개인에게 그리스도의 복을 적용하는가[4]„에 큰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식은 매우 중요하므로 이것은 구원의 서정[5]이라는 표제 아래서 논의되어 왔다. 서정이라는 말은 일련의, 한 가지 계열로 된 연속된 구조를 의미한다. 구원의 서정이란, 구속의 적용에 관해서 사용될 때, 성령께서 각 개인에게 구원을 부여해 주실 때, 구원의 다양한 측면이 질서 있게 배열됨을 의미한다. 특히 „어떤 방법으로 그 다양한 구속 적용의 측면들(중생, 회심, 칭의, 성화와 같은)이 서로 연관을 맺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서정에 대한 논의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적용하는 면에서의 내적인 일관성과 논리성을 밝혀 보려는 시도이다.
구원의 서정에 대한 토론에 있어서 주지해야 할 점은, 정통신학자 사이에도 관점이 일치하지 않으며, 이것이 소모성의 논쟁으로 발전될 위험도 있고, 점차적으로 이 개념 자체에 대해서 비판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제시하는 방식에는 구원의 서정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은연중에 표출되기 마련이며, 기독교의 복음이 선포되는 방식을 좌우하는 사고틀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성령이 개인에게 역사하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논리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어떤 순서인가?
구원의 서정: (예정) – 소명 – 중생 – 회심 – 신앙 – 칭의 – 양자됨 – 성화 – 성도의 견인 – 영화
학자에 따라 순서가 바뀔 수 있다. 알미니안주의에서는 회심과 신앙이 중생에 앞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à 정리자 주.
구원의 서정에서 중요한 것은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 배열이다. 서정에서 드러나는 순서는 시간상 어떤 것이 먼저 일어나는가가 아니라, 논리적인 연관성과 본질상의 순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6].
영어권 전통에서 구원의 서정에 대한 고전적 사례는 초기 청교도 신학자인 윌리엄 퍼킨스(1558-1602)의 저작 황금 사슬에서 발견된다. 그는 구원의 모든 다양한 측면의 원인을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는 주로 롬8:28-30, 특히 하나님이 예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는 바울의 선언에 기초하고 있다. 퍼킨스는 이것을 서로 나눌 수 없는 연속적인 것, 즉 구원의 „황금 사슬“안에서 하나로 묶인 것으로서 그 안에서 구별되는 요소들로 보았다. 사실 퍼킨스의 도식은 스스로 닫힌 형태의 연결고리가 이어지는 외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목회적인 탁월함을 가지고 있고, 많은 좋은 영향을 끼쳤지만, 근래에 이 유형은 심각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롬8:28-30과 같은 구절들은 구원의 적용에 있어서의 순서에 관해 언급한다기 보다도 오히려 구원으로 말미암는 복의 풍성함과 충만함에 관한 언급으로 해석되어 왔다. 벌카워는 여기에 성화가 빠져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여기에서 전혀 다른 요소들의 순서를 언급하고 있지 않음을 지적한다. 만약 이것이 구원의 순서를 지칭한다면 성화가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원인과 결과로 구성된 사슬 형태라는 용어로 표현될 때,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은 구원론의 핵심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빼놓는 위험을 범하게 된다. 이것은 주님의 사역의 열매들이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하나의 사슬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으로서,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연합으로 연결시키는 일이 좀 더 근본적으로 성령의 사역에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
예를 들자면, 이 도식에서는 선택은 중생의 원인이며, 이어서 중생은 믿음의 원인이 되고,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불변하고 필연적인 결과는 성화와 견인이다. 각각의 경우에서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모호하고 심지어는 축소되고 만다.
따라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그분과 우리의 연합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관심의 초점이 우리 안에 무엇이 이루어졌느냐에만 있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와 그분의 연합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헤르만 리델보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바울의 설교에는 구원의 인간론적인 적용에 대한 자세한 교리인 구원의 서정의 조직적인 발전 단계와 같은 요소가 전혀 없다. 이는 바울의 교리의 특징이 학문적인 의미에서 조직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의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구원의 서정이라는 개념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신학을 거론할 때에는 질서 정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원리, 혹은 모델을 사용하여 성령 사역의 순서가 추론되어야 하는가이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성령의 전체 사역에 핵심적인 개념 안에서 더 좋은 모델을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엔 크리스토)
성령의 핵심적인 역할은,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그분을 우리와 연합시키고 그분의 몸 안에 모든 사람을 참여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내주하심과 성령의 내주하심은 신약에서 하나이자 동일한 실재의 두 측면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7]„ 유지시키는 것이 성령 사역의 핵심이며 진수이다.
이는 성령의 사역을 구조화함에 있어서 우리가 채택할 모델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적용하는 모든 측면은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방식에 관계되어야만 하고, 그분과의 개인적인 교제로부터 직접 발생하는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따라서 구원의 서정의 가장 두드러진 동기이자 중추적인 근본 원리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복음주의 신학의 핵심에 위치해 있고, 칼빈이 기독교강요의 제3권을 시작하는 방식에서 분명히 입증된다:
……그분이 불쌍하고 곤궁한 인간들을 부요하게 하려고 주신 그 은혜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는가?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 밖에 머물러 계시고 그분이 우리에게 떨어져 계시는 한, 그분이 고난 당하신 모든 것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하신 일들은 우리에게 아무 소용도 없고 가치가 없는 채로 있게 되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그분 안으로 접목되어야 하고(롬11:17),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갈3:27)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소유하신 모든 것은 우리가 그분과 한 몸이 될 때까지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는 복음주의 신학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강조점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야말로 성령의 사역을 고찰할 때 뼈대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의 고전1:5(„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그분 안에서라는 말을 그대로 지키는 것을 그분에 의해서 라는 말로 바꾸는 것보다 더 좋아한다…우리가 그 몸의 일원이기 때문이요, 우리가 그안에 접목되었고, 한 걸은 더 나아가 우리가 그분과 하나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분은 성부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우리와 나누신다.
칼빈은 여기서(그리고 유사한 다른 주석에서도) 구원의 복들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를 그저 그 복들의 궁극적인 근원으로만 여겨서는 안 되고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 안에 직접 참여함으로써만 우리의 것이 된다고 여겨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접근이 성령의 역사에 대한 더 나은 성경적 관점을 대변한다.
구원의 복은 성령을 통해서, 배타적으로, 즉각적으로, 동시적으로, 종말론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것이 된다. 바울의 용어로 말하면, 그분 안에서(엔 크리스토)만 구원의 복들이 우리의 것이 된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일은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은, 각각 나름대로의 독특한 완성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도 우리의 것이 된다(엡1:3이하)
이러한 접근은 구원의 서정에 대한 해석의 주류를 이루는 일련의 묶음 또는 원인론적인 사슬 구조에 비해 몇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은혜를 베푸시는 분으로부터 분리되거나 떨어져서는 복음의 축복들을 생각하거나 즐거워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으면, 관심과 신앙의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구원의 사슬상 현재의 체험에 두게 되는 주관주의가 배태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더욱이 구원의 적용의 다양한 부분은, 신약 사상에 광범위하게 나타나 있는 생동감 있는 종말론적 차원(그리고 긴장)을 지닌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성령의 사역을 해석하는 중추적인 원리가 될 때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 참여한 사람들은, 또한 한편으로 이 세상 즉 육체에 의해서 지배되는 곳에서 살고 있으므로, 거기에는 구원의 현재 체험에서 „이미 그러나 아직[8]„이라는 특성이 있다.
사슬 모델에서는 하나의 연결 고리가 그 자체로서 완전하고 다른 것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으므로, 이 긴장 관계를 충분하게 표현할 수 없다. 예컨대, 중생의 결말에 이르면 믿음이 시작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 반대로, 구원의 측면들 각각에는 아직 완성에 도달해야만 하는 부분들이 남아 있음을 이야기한다.
성령의 사역에 대한 사슬 모델은, 이미 시작된 것은 또한 완전히 성취된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구원론의 각 측면에는 종말론적(이미, 그러나 아직) 구조가 들어있다:
- 중생이란 현재적 실재이지만, 이것 역시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마19:29)
- 성화 역시 죄의 지배로부터 이미 급격하게 그리고 단번에 결별이 이루어졌지만(고전6:11; 롬6:1-14), 이것 역시 완성을 향하여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있다(살전5:23).
- 영화도 미래에 완성되지만, 이미 이곳에서도 그리고 지금 은혜와 영광의 성령이 임재하심을 통해 시작되었다(고후4:18)
- 칭의 역시 이미 완성되고 완벽한 실재이면서 또한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
- 양자됨 역시 우리 몸의 구속, 곧 아들로 양자됨(롬8:23)을 우리는 기다린다.
모형과 근원이신 그리스도
이렇게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구원의 복들이 지닌 동시성을 바라보는 관점은 실상 바울 신학의 종말론적 구조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9]. 세밀하게 검토해 보면, 그 신학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의 적용에 관하여 주목할 만한 빛을 던져주고 있다.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은덕인 칭의, 양자됨, 성화, 영화는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통해 얻으신 것이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형이요 근원이 되신다) 이러한 교훈은 세 단계로 세분화할 수 있을 것이다:
1) 이 점에 관련하여 사도의 사상에 담긴 핵심은 바울의 경우, 우리의 구속의 근거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함으로써뿐만 아니라, 또한 부활에 참여하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롬6:3이하; 엡2:5-6; 골2:12-13;3:1[10]). 이처럼 그리스도가 죽으실 때, 우리도 죽고,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는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대표적으로 이루어졌다.
믿는 자들에게서 이것이 현실화되거나 실존화 되는 것은 중생이나 회심에서이다. 이들 두 가지 순간, 즉 그리스도와 부활과 우리의 부활은 시간적으로는 떨어져있으나 논리적으로 묶여 있다. 양쪽 모두 성령의 사역이다 à 우리의 영적 투쟁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삶 속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
2) 바울은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을 그리스도 자신의 구속으로 보았다[11]. 그분의 죽으심은 진정으로 죽음의 모든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심판을 받았고, 생명으로부터 격리되었고, 죄의 삯으로 죽음을 경험하셨다. 그러나 죽은 것으로 생각된 그리스도가 일으킴을 받았고, 건져졌고, 보호를 받았고, 부활을 통하여 구출되었다.
3) 복음에 대한 바울의 설명에서 믿는 자들에게 구속의 적용을 설명하고자 사용된 범주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밝혀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에 대한 구속의 적용은 그리스도께 대한 구속의 적용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칭의로 간주된다(딤전3:15).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죽음에 머물러 계실 수가 없었다.
- 바울은 또한 이 부활은 예수님의 양자됨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부활은 그분으로 하여금 권능있는 메시아적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했다. 부활 안에서 그분은 새로운 시대의 사람으로 양자가 되셨다[12].
- 부활은 또한 그리스도의 성화로 간주될 수 있다. 우리의 성화에 근본적인 것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 바울은 성화의 점진적인 측면이 아니라 결정적인 측면을 유념하고 있는데, 이는 죄의 영향권으로부터의 점진적인 해방을 위한 기초를 제공해주는, 죄의 지배권으로부터의 급격한 구원을 의미한다. 죽음으로 그리스도는 죄의 지배권 아래 들어갔다. 부활에서 그분은 그 지배권에서 구출되었다. 이 구출은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우리의 성화의 근거이다.
- 부활은 그리스도의 영화를 이루었다. 성령의 권능에 의해서 그분의 육의 몸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였다(빌3:21)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모든 것을 함께 소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이 그분의 칭의, 양자됨, 성화, 영화를 함께 소유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런 것들은 그분의 부활이라는 단 하나의 종말론적 사건의 모든 측면이며, 그분에게 그것들이 동시적이고 분리 불가능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들이 즉시, 종말론적으로, 동시에 우리의 것이 된다.
물론 칭의, 양자됨, 성화, 영화는 구속의 적용에서 각각 구별되는 범주어이며 우리는 결코 이것들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것들을 각각 동떨어진 사건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이것들은 그분의 부활하신 영광 가운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한 가지 사건의 측면이요 부분들이며,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가고 성령의 권능으로 획득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의 은덕(칭의, 양자됨, 성화, 영화)을 우리도 성령을 통해 누림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통한다. 그리고 그분이 가지신 모든 것이 우리의 소유가 된다.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에게 결합하는 것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 다양한 전치사들은 그 연합의 긴밀성과 범위를 강조한다.
1) 위해서(hyper)
믿는 자들은 하나의 연합의 끈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분이 그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할 수 있다(롬5:6,8; 8:32; 고후5:21). 이러한 연합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 사이에서 그분이 하신 일이 곧 그들의 것이 된 것을 의미한다.
2) 함께(syn)
그리스도의 구속의 순간들에서 믿는 자들은 그분에게 긴밀히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 순간들 가운데 그들이 그분과 함께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있고, 따라서 이런 사건들은 그들의 현세적 삶에서 지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갈2:20: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롬6:4: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
롬6:8: 그와 함께 산다.
3) 그리스도 안에서(en Christo)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구절은 바울 사상의 특징이자 가장 두드러진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전부를 요약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동의어와 같다. 신자는 „아담 안에“ 있다가 „그리스도 안에“ 오게 되었다. 아담 안에 있다는 것은, 아담이 대표성을 가지고 행한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요, 우리가 죄를 통해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존재인 아담과 연합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한 유비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이 대표적으로 나를 위해서 행하신 모든 것이 실제로 나의 것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의 세 가지 차원: 그리스도와 연합은 세 가지 순간, 곧 영원한 순간, 성육신의 순간, 실존적 순간에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서로 다르지만 보완적이다.
1) 영원한 순간
믿는 자들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의 언약적인 연합 안에서 복을 받아, 그분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선택되었다(엡1:3-4,11-12). 이 연합에는 우리의 개인적인 실존을 넘어서 영원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으로 돌이켜 생각해야만 할 초월적인 차원이 있다. 여기에는 주권적이요, 단독적인 결정이 놓여 있다. 사도 바울은 더 이산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믿는 자들을 택하신 것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선택하신 것과 관계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은 어거스틴이나 여러 신학자들이 총체적 그리스도(totus Christus)라고 옛, 영원한 하나님의 결정에 의하여 떨어질 수 없이 함께 결합되어 있다.
2) 성육신의 순간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뿌리로서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구원을 준비하기 위해서 성령의 권능 안에서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셨다. 그분은 우리 구원의 창시자(아르케고스)가 되기 위하여 우리의 몸을 입으셨다. 이는 순종과 의로움을 성취하신 자로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이것들(순종과 의로움)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롬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은 그의 육체에 접지되어 있고 그 연합의 수행자인 성령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분의 구원 사역의 위대한 순간들이 함축하는 것들은 우리가 함께 공유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죽임을 당하고, 장사 지낸 바 되고, 다시 살아나시고, 승천하였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신 일에서 연합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신 중보자로서의 그분의 신분에도 연합된다. 그분과 연합으로, 우리의 신분은 급격히 바뀌었다. 더욱이 그분이 우리의 육체적인 실존을 거듭나게 하시고, 자신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시켜 가는 이상, 우리의 인격은 그분이 우리를 영광의 최종 단계로 변화시키실 때까지 점진적으로 바뀔 것이다(빌3:21)
3) 실존적 순간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초시간적으로 의도된 이 연합은, 성육신에서 구체화되었고, 이것은 다시 그리스도의 영의 내주하심과 그에 관련된 믿음을 통해서 비로소 실존적인 실재가 된다. 이 실재는 신자의 삶 전체를 결정짓는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연합의 충만한 실재는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믿음으로 연합시킬 때, 우리의 실존 안에 자리하게 된다. 바울의 특유 표현 중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믿는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비록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을지라도, 우리가 그분을 신뢰할 때까지는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대상(엡2:3)이요,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있다. 오직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의로워지고 하나님의 언약적 목표가 우리 안에 현실화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함축된 의미
그렇다면,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구원의 적용에서의 성령의 역사에 관한 전반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세 가지 요점을 주목할 수 있다:
첫째, 성령의 사역은 본질적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사역이며,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물려받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칼빈은 이를 잘 그려내고 있다(II,16,9):
우리는, 우리의 구원과 그것의 모든 부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됨을 알 수 있다(행4:12). 따라서 우리는 그것의 부분들을 다른 데서 찾아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만일 구원을 알기 원한다면, 이것은 그분의 것(고전1:30)이므로 예수님의 이름만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만족이라면, 그분의 희생에서 찾을 수 있으며, 정결하게 하심은 그분의 보혈에서, 화해는 그분의 지옥에 떨어지심에서, 육체를 죽이는 일이라면 그분의 무덤에서, 생명의 새로워짐은 그분의 부활에서 찾을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그분 안에 모든 종류의 선이 풍성하게 넘친다. 그러므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 샘에서 우리에게 충분한 양을 채우자.
두 번째 함의는, 신약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강조된 것으로, 우리가 „육체 가운데서“ 지난날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지만, 그것은 현재 우리의 생활에 더 이상 압도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더 이상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요, 영에 속한 사람이다(롬8:9). 우리의 과거는 아담 안에서의 과거다. 우리의 현재 존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성령 안에 있다.
셋째로,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의 인성 안에서 그분이 우리와 연합하심에 근거하고 있다. 이로부터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구원받은 인성의 창시자(아르케고스)가 되시려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표현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성령의 목표이다. 이는 믿는 자들로 하여금 점차로 참되고도 온전한 인간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성령의 성화시키는 사역을 논할 때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루이스 벌코프는 이를 훌륭하게 언급한 바 있다.
이 연합으로 인하여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따라서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된다. 그리스도가 그분의 백성 안에서 행사하시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분에게 일어났던 일의 복제이자 재생산이다. 객관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주관적인 의미에서도 그들은 십자가를 지고, 못박히고, 죽임을 당하며, 그리스도의 생명의 새로움으로 일으킴을 입는다. 그들은 다소간 그들의 주님의 경험을 공유한다[13].
정리: 성령의 역사의 핵심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믿음을 통한 우리의 그리스도와 연합이다.
[1] 고전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à 인간을 최종적으로는 부활을 통해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을 수 있도록 회복하심.
[2] 정리자 주: 그러므로 믿는 자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부분적으로나마 나타나야 하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3] prevenient grace. 웨슬리는 이 용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여 독특한 교리를 만들었다. 그에 따르면, 이 선행적 은총은 누구나 받는다고 한다. 따라서 누구든지 자신의 결단에 따라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한다.
[4] 정리자 주: 이것은 기독교강요 3권의 주제이다.
[5] 이 표현은 F. Buddeus(1724)와 J. Karpov(1739)때에 그 용어가 출현했고, 그 개념은 그 후에 정리되었다.
[6]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7] 바울은 이러한 표현을 약 160회 사용한다.
[8] already/ not yet, schon/ noch nicht (오스카 쿨만)
[9] 자세한 내용: Richard Gaffin Jr. „부활과 구속“ 엠마오.
[10] 롬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엡2: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골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1] 리처드 개핀의 상계서.
[12] 게할더스 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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