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문 소논문

[스크랩]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

하나님아들 2014. 7. 19. 16:10

 

 

 

 

대각성에 관련된 저술들에 나타나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

과 목 : 구원론주제연구

담 당: 김길성교수님

발제일 : 2006년 5월 1일(월)

발제자 : 이상웅(Ph.D.과정 1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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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는 말 : 에드워즈의 중요성과 관련 문헌

1. 에드워즈의 중요성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에 대하여 구 프린스톤의 거장 B. B. 워필드 교수는 "성자요, 형이상학자요, 부흥사 그리고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식민지 시대의 지성적 삶에 있어서 참으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돋보인다”고 평가한 바 있다. 또는 무신론자이면서 에드워즈 연구가로서 20세기 중반에 에드워즈 전기의 출간과 에드워즈 전집(예일판) 발간을 시작하므로써 에드워즈 르네상스에 공헌을 한 페리 밀러(Perry Miller 1905-68) 교수는 에드워즈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그 당시 지적으로 가장 현대적인 사람이었으며, 그의 통찰들 중 어떤 것은 그의 시대를 아주 앞서갔기 때문에 우리 시대가 그를 따라 잡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신학적으로, 교회사적으로 뿐 아니라 미국사나 미국 문학사의 관점에서도 에드워즈가 미국을 대표할 만한 신학자요 철학자임을 인정하는데 이의가 없을 정도이다. 그는 미국의 역사를 빛낸 심원한 사상가 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복음주의자들 뿐 아니라 일반 학자들(즉 미국사나 미국 문학), 심지어 무신론자들조차도 에드워즈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에 에드워즈 관련 출판물(논문,박사논문,단행본)이 3천편이 넘는다고 하니 그 인기를 실감케 한다.

그러면 이와 같은 에드워즈의 인기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혹은 다르게 질문한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에드워즈를 읽어야 하는 것일까? 이와 같은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장편의 글을 써야 할 것이지만, 본인으로서는 세 가지 정도를 언급하고 싶다. 첫째, 에드워즈는 신학적으로 칼빈주의를 18세기 미국의 토양에서 개진한 사람이라는데 그 중요성이 있다. 그는 미국에서 알미니안주의에 대항하여 칼빈주의를 유력하게 변호한 사람이다. 그의 『이신칭의』, 『은혜론』, 『삼위일체론』, 『의지의 자유』, 『원죄론』, 『하나님의 천지 창조 목적』, 『참된 미덕의 본질』과 같은 저서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심원한 신학자요 사상가인가를 알 수 있다. 이안 머리는 에드워즈가 새로운 교리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에드워즈가 한 일은 개혁교회의 교리적이며 실천적 신학중 최선의 것들을 18세기 언어로 재조명하는 것으로 만족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에드워즈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에 개진된 신학으로 만족했다. 벤쟈민 워필드도 에드워즈는 "독창성을 과시하려고 전혀 애쓰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에드워즈가 정통 개혁주의로 만족한 까닭은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구 프린스톤 신학 전통을 따라서 박형룡박사 역시 에드워즈의 칼빈주의적 정통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를 내리고 있다.

초기 뉴 잉글랜드 신학은 엄밀히 칼빈주의적이었다. 1733년에 소시너스주의화한 알미니안주의가 널리 퍼져 전도열을 파멸하기에 이르렀다. 요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교의학에 중요한 공헌을 한 최초의 미국 신학자요, 미국이 산출한 가장 중요한 신학자였다. 그는 유행하는 알미니안주의에 반대하여 칼빈주의 교리를 매우 준엄하게 제시하였다. 초연신론에 봉사 하는 듯이 보이던 로크(Locke)의 철학을 그가 알미니안주의의 자유의지의 교리에 대한 반박에 적 용한 것("An Essay on the Freedom of Will",Boston,1754)은 미국과 구주에서 큰 흥미를 일으켰 다.

둘째, 에드워즈는 설교자로서 탁월했을 뿐 아니라 훌륭한 설교문들을 많이 남겨주었다. 개혁주의 설교를 배우기 원하는 설교자들은 그의 설교집들을 탐독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국내에는 『사랑과 그 열매』,『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대표설교선집』등의 설교집이 번역 소개되어 있다. 물론 에드워즈를 따른다고 하는 것이 에드워즈 처럼 설교 흉내를 내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셋째, 에드워즈는 부흥 혹은 대각성의 중심에 있었고, 성령의 사역에 대한 분석과 해설을 남겨주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오늘날 한국 교회가 에드워즈에게서 배우고 도움을 받아야 할 영역이 바로 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는 전통적으로 샤머니즘이 혼입되어 성령 운동이 대단히 혼조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참된 부흥과 참된 성령의 역사 그리고 참된 은혜 체험의 성격에 대한 에드워즈의 분석이 대단히 적실성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20세기의 복음주의 진영에서 에드워즈 르네상스를 일으킨 주요 인물인 마틴 로이드존스(1899-1981) 목사는 1976년에 행한 강연 속에서 에드워즈의 신학적 중요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조나단 에드워즈에게서 청교도주의의 정점과 극치에 이르게 됩니다. . . 실제로 나는 어리석게도 청교도들을 알프스에 비교하고, 루터와 칼빈은 히말라야에 비교하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 산에 비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그는 내게 가장 사도 바울을 닮은 사람처럼 항상 보입니다. . .조나단 에드워즈 보다 기독교의 현재 상황에 더욱 적실한 사람은 없습니다. . .그는 강력한 신학자이자 동시에 위대한 복음전도자였다. . .그는 탁월하게 부흥의 신학자였습니다. 당신이 부흥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알기를 원한다면, 참조해야 할 사람은 에드워즈입니다다. . . 내 강연을 듣고 진짜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 의심이 든다면, 나의 조언은 이것입니다. 조나단 에 드워즈를 읽으십시오. 많은 모임에 참여하는 것을 멈추십시오. 현재 복음주의 서클들에서 그렇게 유행하는 바 다양한 형태의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갈망을 멈추십시오. 집에 머무르는 것을 배우십시오. 다시 독서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단지 어떤 현대 작가들의 자극적인 책들을 읽기만 하지 마십시오. 다시금 견고하고 깊으며 실제적인 것들에 되돌아가십시오. 우리가 독서의 기술을 잃어버리고 있습니까? 부흥들은 종종 사람들이 에드워즈 전집들을 읽기 시작한 결과로 일어나곤 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을 읽으십시오.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십시오. 그의 설교를 읽으십시오. 그 의 실천적인 논문들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나서 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위대한 강론들을 읽으십시 오.

우리는 이러한 로이드존스 목사의 애절한 호소를 읽으면서 에드워즈의 부흥신학 내지는 성령론의 중요성과 독서의 필요성에 대해서 감명깊은 도전을 받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에드워즈의 전집을 피상적으로 일별해 본다면 에드워즈의 저서 목록 가운데는 성령론이라고 하는 타이틀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비록 심오한 신학자였지만 성령론에 대한 체계적인 저술을 출간한 적이 없다. 그의 생애 말년에도 완성하고 싶어했던 두 대작은 『구속 사역의 역사』와 『신구약 성경의 조화』등에 대한 저술을 쓰고 싶다고 편지 속에 고백한 적이 있다.

2. 에드워즈의 성령론에 관련된 문헌들

에드워즈는 영적 대각성 시기에 쓴 글들이나 대각성에 대해서 쓴 저술들 속에서 성령의 사역에 대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분석과 평가를 우리들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혹은 그의 설교들 속에서도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고 있다. 2002년 네덜란드 아뻘도른 신학대학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 연구로 박사를 받은 W. 판 플라스따윈(W. Vlastuin)박사는 부흥과 영적 대각성에 관련된 에드워즈의 저술들을 일일이 검토하며 분석을 했다. 그는 각 저서들의 특징을 한 마디의 문구로 묘사하기도 했다. 우리의 연구 수행을 위해서 도움이 된다고 사료되기 때문에 판 플라스따윈 박사의 분석을 그대로 옮겨 적어본다.

1.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 - 대각성의 모델(Het model van opwekking)

2. 『사랑과 그 열매』 - 대각성에 머무르기(Het blijven bij opwekking)

3. 『구속 사역의 역사』 - 대각성의 기대(De verwachting van opwekking)

4.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 - 대각성에 대한 광범위한 분석(De brede opwekkingsanalyse)

5. 『균형잡힌 부흥론』 - 대각성에 대한 자기 비판적인 분석(De zelfkritische opwekkingsanalyse)

6. 『신앙감정론』 - 개인적인 대각성분석(De persoonlijke opwekkingsanalyse)

7. 『기도합주회』 - 대각성을 위한 기도(Het gebed om opwekking)

8.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 대각성의 표본(Het voorbeeld van opwekking)

9. 『겸허한 질의』 - 대각성속에서 하나의 개혁(Een reformatie in opwekking)

이상의 저서들은 1736년에서부터 1749년 어간에 에드워즈가 출간한 것들이다. 이 기간 동안 에드워즈와 그가 시무하던 노샘프턴 교회는 두 차례의 영적 대각성(1734-35, 1740-42을 체험했다. 그는 영적 대각성 기간을 통하여서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체험하는 가운데, 부흥에 대한 변호와 분석과 그리고 부흥의 기대와 진작을 위해서 저술 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에드워즈의 성령론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상에서 제시한 책들을 읽어야 한다.

에드워즈의 성령론을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가 참조해야 하는 다른 저술들도 있다. 『삼위일체론』과 『은혜론』등의 저술들과 『문집(Miscellanies)』에 나오는 여러 항목들을 참조하여야 하겠고, 또한 성령의 사역에 대한 여러 설교들도 참조해야만 할 것이다. 1,200편이 넘는 그의 설교들 가운데 성령론에 관련된 주요 설교로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A Divine and Supernatural Light", "The Threefold Work of the Holy Ghost", "The Work of the Spirit of Christ".

이상에서 지적한 것들만 보더라도 우리는 에드워즈가 성령론이라는 직접적인 타이틀로 된 주저는 없다고 할지라도 성령론에 대한 풍성한 저술 활동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에드워즈의 성령론을 파악하고 체계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이상의 일차적인 자료들을 소화해 내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에드워즈의 성령론에 관련하여 연구한 학자들의 글들도 참조해야 할 것인데, 에드워즈연구 문헌들을 자세히 조사해 보면 이 부분에 대한 연구서가 그리 많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필수적인 문헌 몇 가지를 지적해 보고자 한다.

- John H. Gerstner, The Rational Biblical Theology of Jonathan Edwards, 3vols.(Powhatan,V.A. Berea Publications 1991-1993)

- Allan F. Story Jr, Promoting Revival: Jonathan Edwards and Preparation for Revival(Ph.D.Diss.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1994)

- Gerald R. McDermott, Seeing God: Jonathan Edwards and Spiritual Discernment Vancouver:

Regent College Pub, 1996.

- Caroline Schröder, Glaubenswahrnehmung und Selbsterkenntnis : Jonathan Edwards' theologia experimentalis(Göttingen : Vandenhoeck & Ruprecht,1997)

- Michael J. McClymond, Encounters with God: An Approach to the Theology of Jonathan Edward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1998

- Rachel Susan Stahle, The Trinitarian Spirit of Jonathan Edwards' Theology(Ph.D.Diss. Boston University,1999)

-Visser, Theo, Opwekking en zondebesef. Een zoektocht naar Gods werk in opwekkingstijden. George Whitefield (1714-1770), John Wesley (1703-1791), Jonathan Edwards(1703-1758), Charles Grandison Finney (1792-1875), Erlo Stegen (geb. 1935).[Scherpenisse] 1999

- W. van Vlastuin, De Geest van opwekking. Een onderzoek naar de leer van de Heilige Geest in

de opwekkingstheologie van Jonathan Edwards 1703-1758(Leiden:Uitgevrij Groen,2001)

- Stephen J. Nichols, An Absolute Sort of Certainty: The Holy Spirit and the Apologetics of

Jonathan Edwards(Philippsburg: Presbyterian & Reformed,2003)

- Michael A. G. Haykin, Jonathan Edwards: The Holy Spirit in Revival(New York:Evangelical Press 2005)

- 양낙흥,『체험과 부흥의 신학자』(서울:부흥과개혁사,2003)

II.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A Faithful Narrative of the Surprising Work of God)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가 매사추세츠주의 궁벽진 마을 노샘프턴에서 목회한 기간은 1727년에서 1750년까지 총 23년간이다. 노샘프턴 사역 기간 동안 에드워즈와 그의 교회는 두 번에 걸쳐서 성령의 부어주심(the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을 체험하였다. 에드워즈 이전에도 부흥(revival)이라는 단어가 있었지만, 에드워즈는 성령의 부어주심 혹은 성령의 특별한 은혜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다. 첫 번째는 1734년에 시작되어 1735년에 이르기까지 노샘프턴 교회에 일어났던 성령의 놀라운 역사로서 이 성령의 역사는 요원의 불길처럼 코네티컷 강 계곡에 소재한 마을들로 번져 나갔다. 그리고 두 번째 성령의 부어주심은 1740년에 시작하여 1742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이른바 <1차 대각성 운동>이 그것이다.

에드워즈가 사역하던 노샘프턴 교회는 영적 메마름과 둔감함이 지배하고 있었다. 한 때 영광스러웠던 청교도적 영성과 도덕성이 해이해져가고 있었다. 솔로몬 스토다드 시절에도 다섯 차례나 영혼의 추수기(스토다드는 영혼의 추수 the harvest of souls라는 표현을 즐겨 씀)를 가졌지만, 에드워즈 부임 초기에는 아른한 옛 추억이 되고 있었다. 청년들은 밤에 술집에 모여들고 음담패설을 즐기고 있었다. 교회 집회에 성도들이 참석하기는 하지만 신앙의 열정이 없었다. 그와 같은 영적인 황무지에 갑자기 성령의 부어주심, 부흥이 임한 것이다. 1734년 봄에 젊은 청년과 갓 결혼한 여자 성도가 요절한 것이 마을 청년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영원한 것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734년에서 1735년에 걸쳐 진행된 노샘프턴 부흥 기간 동안 에드워즈는 반 알미니안주의적인 설교들을 강단에서 선포하였다. “이신칭의론”, “하나님 나라에로 침노해 들어감”, “룻의 결단”, “죄인들의 정죄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 ,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성”등이 노샘프턴 강단에서 선포된 대표적 대각성 설교이다.

노샘프턴에 성령의 강력한 임재로 인한 영적 부흥이 일어나자 부흥은 노샘프턴을 넘어 햄프셔 군 전체로 확산되어갔고, 매사추세츠와 코네티컷의 다른 지역들로 번져나갔다. 그것이 주로 코네티컷 강을 따라 형성된 마을들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교회사가들은 “코네티컷 강 골짜기 부흥”이라고 불렀다. 에드워즈는 자신이 경험한 부흥을 교회사에서 가장 경이로운 사건이라고 불렀다. 보스턴을 비롯하여 다른 지역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코네티컷 강 골짜기에 소재한 교회들에서 이어난 이 부흥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설왕설래하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보고서를 써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우리가 한글 번역본으로 읽는 것은 에드워즈가 작성한 보고서의 최종 형태이지만, 에드워즈는 이미 1735년 5월 30일자로 첫 보고서를 쓰고 있다.

아이작 왓츠 목사와 가이즈 목사가 이 보고서를 런던에서 출판해주는 바람에 에드워즈의 명성은 대서양을 넘어 영국에 까지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작은 책자는 에드워즈와 같은 해에 출생하여 후일 영국 감리교를 세운 존 웨슬리 목사의 손에도 들어가게 된다. 존 웨슬리 목사는 1738년 10월 9일자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옥스퍼드를 향해 출발했다. 가는 도중에 나는 회심들에 대한 참으로 놀라운 서술을 읽었다. 그것은 뉴잉글랜드의 노샘프턴과 그 인근에서 최근에 있었던 일이었다. 참으로 이는 주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Surely this is the Lord's doing, and it is marvelous in our eyes)". 양낙흥 교수는 본서에 대하여서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에는 단 몇 개월 사이에 영적 각성이 온 마을을 뒤덮게 된 과정, 그리고 그 결과 약 300명의 사람들이 회심의 은헤를 체험하게 되었던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 . 이 책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에드워즈의 현미경적 관찰력이다. 이미 젊은 시절에 거미의 생태를 관찰해서 논문을 쓴 적이 있었던 꼼꼼한 주의력의 소유자답게 에드워즈는 자기 교구에서 일어난 그 각성의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과정을 무서울 만큼 정확하고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에드워즈의 정신이 얼마나 맑고 안정되어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에드워즈는 최근에 일어난 부흥의 사건을 “경이로운 하나님의 역사”라고 표현한다. 그는 여러 사람들의 요청과 제안에 의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데 까지 최대한 공정하고 신실하게” 부흥 보고서를 작성하고자 펜을 들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1735년 봄과 여름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온 동네에 가득해 보였다고 한다. 마을이 그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 그러면서도 고뇌로 가득찬적은 없었다고 한다. 거의 집집마다 하나님이 임재하신 놀라운 표시가 있었다. 그것은 가족들에게 임한 구원으로 인한 기쁨의 시기였다. 하나님의 역사는 성전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주의 날 모이기를 힘쓰고, 공중 예배는 아름다웠고 회중은 예배드릴 때 생기로 넘쳤다. 성도들은 목사의 전하는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주의해서 들었고, 고뇌로 울기도 하고 기쁨과 사랑으로 울기도 했다. 공중 찬양도 활기를 띄게 되었다. “이제는 정말 전에 없던 넘치는 마음과 음성으로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찬양은 실로 즐거운 일이 되었다”.평일에도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그리스도와 영적인 일에 대해서 대화했다. 심지어 먹고 떠들고 즐기는 것이 예사이던 결혼식에 모여서 조차도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에드워즈는 앞서 기술한 부흥의 역사에 나타나는 비범성에 대해서 몇 가지 지적하였다. 첫째, 보편성에 있어 비상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모든 이에게 영향을 미쳤다. 둘째, 회심자들의 수에 있어서 비상했다. 부흥 후 교회 성찬에 참여하는 수는 620명에 달하게 되었다. 600명이라는 수는 노샘프턴 마을의 성인을 거의 망라하는 숫자였다. 부흥시기에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떼를 지어 교회에 몰려왔다. 반년 동안에 약 300명이 그리스도께 나아와 구원을 얻었다고 보고한다. 셋째, 하나님의 역사는 그 속도에 있어서 비상했다. 많은 사람들의 심령안에서 성령은 아주 신속하게 역사하셨다. 성령의 역사가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확산되는 과정도 신속했다. 이번 부흥에서 사람들은 아주 빨리, 크게 변화되었다. 넷째, 성령의 영향의 정도가 비상했다. 즉 각성의 깨달음, 구원의 체험의 정도와 범위가 비상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보고에 따르면 노샘프턴 부흥의 절정은 1735년 3월과 4월이다. “이 마을에서 성령의 역사의 절정은 이른 봄 즉 삼월과 사월이었다. 이 무렵에는 우리 중에서 대개 하루에 네 영혼, 일 주일에 거의 삼십명이 회심하는 일이 대여섯 주간 계속되었다. 하나님이 그처럼 놀라운 방식으로 역사하실 때는 보통 때 같으면 사람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동원하고 일상적인 축복을 다 사용해서 일년간 일해야 이룰 수 있는 정도의 사역이 단 하루 이틀만에 완수되었다”.

에드워즈는 보고서의 두 번째 부분에서 사람들의 심령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법에 대해 상술한다. 그는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다양성이 있음과 동시에 많은 점에서 그들 사이에 커다란 유사성이 있음도 인정한다. 회심에 있어 첫 번째 단계는 각성이었다. 사람들은 먼저 자신들이 생래적으로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를 의식하게 되면서 각성하게 되었다. 그들의 영혼이 멸망할 위험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과 그러한 멸망을 피해 신속히 달아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첫 현상이다. 각성의 결과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즉각 죄악과 방종을 버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다툼, 중상,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는 일을 즉시 중지했다. 술집은 비고 대신 목사관이 붐비게 되었다. 또 다른 결과는 구원의 수단을 아주 진지하게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성경 읽기, 기도, 묵상, 예배 참석, 소그룹 모임에 큰 열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라고 부르짖었다. 처음 구원을 찾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대개 자신에 대해 아주 무지했다. 그들은 자기가 얼마나 영적으로 눈이 멀었는지, 죄악 중에 얼마나 죽어 있는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각성 상태에서 사람들이 경험했던 두려움과 괴로움의 정도는 다양했다. 어떤 이들은 처음부터 위로와 소망 가운데 진행했고, 어떤 이들은 저주의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는데 때로는 그것이 신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자신의 비참에 대한 그러한 이해는 그가 구원을 받을 때까지 점점 더 증가되었다. 에드워즈는 각성된 죄인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공포의 감정을 가지는 것이 회심과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별다른 공포를 느끼지 않고도 아주 신속히 회심하는 경우들도 있었다. 회심의 방법의 다양성을 인정함에 있어 그는 그 전의 청교도들 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죄에 대한 깨달음을 가지게 된 죄인들을 다룸에 있어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방법에 매이시는 일이 결코 없어보였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각성된 죄인들은 점차 자신의 죄를 확실히 그리고 깊이 깨닫게 되었다. 성령이 그들의 사악함과 죄악됨, 그들의 불충분한 의와 오염, 그리고 무력함을 깨닫게 해주셨다는 것이다. 죄에 대한 깨달음은 각성의 초기 단계에서는 자신들의 외적 악행이나 죄악들에 집중되었지만, 그 후에는 내적 죄, 즉 마음의 죄에 대한 깨달음이 더 강해졌다. 그들의 부패한 본성, 교만, 불신등 자신들의 내면에 있는 오염을 보게 되면, 그들은 그 더러움을 씻어 내고 깨끗케 되기 위해서 애를 쓰기 시작했다.

각성이 구원의 체험으로 연결되는 경우 율법적 고통 후에 죄인들이 깨닫는 첫 번째 사실은 하나님이 그들을 정죄하시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그들은 청교도적 용어로 소위 겸비해짐을 체험했다. 하나님이 그들을 영원히 버리시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정당하고 의로운 행위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노력과 기도와 눈물이 그들의 가장 작은 죄조차도 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들의 마음과 생활이 너무나 비열하고 사악하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율법적으로 겸비해진 사람들에게 은혜가 처음으로 나타날 때의 양상은 아주 다양했다. 이 점에서 에드워즈는 자기 앞 시대의 청교도들과 견해가 달랐다. 앞 시대의 청교도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에 역사하실 때 어떤 특정한 단계나 방법들을 따른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다른 사람들의 규범으로 삼는 경향이 있었다고 그는 비판한다. 에드워즈는 사람들이 은혜를 체험하는 무한한 다양성 중 일부를 소개한다. 어떤 영혼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 속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싶어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그러한 갈망은 신적인 것들의 최고의 탁월성에 대한 감각이 있을 때만 생길 수 있는 것이었다. 영혼은 그것을 자신의 최고의 행복과 최선의 분깃으로 받아들였으며 이 선한 것을 영원히 추구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놀라운 감정을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펄쩍펄쩍 뛰었다. 어떤 이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면서 눈물이 홍수처럼 흘러내리면서 큰 소리로 울기도 했다. 때로는 큰 소리를 지르면서 큰 감사를 표현했다. 이들은 자기들이 누리게 된 영혼의 그 기쁨과 즐거움의 최고의 탁월성에 경탄했다. 그것은 지상의 모든 즐거움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평가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상의 쾌락이 얼마나 헛되고 잡되며 무가치한 것인가를 느끼게 되었다. 기쁨으로 충만한 동안 그들은 식사도 잊어버렸다. 주위의 모든 사물들이 아름답고 달콤하고 즐거워보였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의 탁월성에 대해 가장 주의 깊은 주의를 기울였다. 종종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황홀한 감각이 거기에 동반되었다. 이러한 은혜 체험을 묘사하는 단어들도 다양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보았다(sight)고 했고, 어떤 이들은 발견했다(discovery)고 표현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실감케 하는 확실한 깨달음(realizing conviction) 혹은 마음의 생생한 혹은 느껴지는 감각(lively or feeling sense of heart)이라고 묘사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처음으로 체험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는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에 대한 에드워즈의 묘사는 문자 그대로 극적이어서 독자들로 하여금 숨을 죽이고 손에 땀을 쥐고 한 단어 한 단어를 주목하게 한다.

“죄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한 극단적 공포 후에 죄인들이 감지하는 최초의 변화는 종종 고요함이었다. 그런 다음에 빛이 서서히 들어왔다. 칠흑같은 어두움 후에 처음에는 가물거리는 빛이, 그리고 한두 마디의 위로의 말씀이 부드럽게 그들에게 들려왔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달콤함과 구주의 사랑에 대한 약간의 지각을 가지게 된다. 그 때 공포와 양심의 가책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의 무가치함에 대한 겸손하고 온유한 감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리고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하는 어떤 성향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잠시 후에는 빛이 더욱 강력하고 분명하게 들어온다”.

청교도 목회하에서 회심의 은혜 체험은 대개 복음에 대한 단순한 믿음만이 아니라 확신을 가져왔다고 에드워즈는 기억한다. 기독교의 신적 탁월성과 영광이 사람들 앞에 제시되는 순간 그들은 그것에 대한 시각과 미각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러한 때의 그들은 복음의 교리들의 진실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마치 그들이 환한 대낮에 눈을 들어 태양을 바라볼 때 그 강한 햇살로 인해 태양의 존재를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것에 비유했다. 그들은 자신들 속에 아주 분명한 성령의 역사들과 신성의 강력한 증거들을 직관적으로 보고 직접적으로 느꼈다. 이 직관적 시각과 감각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청교도들이 주장하는 체험의 핵심이었으며, 그것은 단순한 머리 지식 혹은 관념적 사변적 지식과 구별되는 것이었다. 확신을 가지게 된 사람들에게 이제 복음의 진실성이 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능력으로 다가왔다. 전에는 남들이 그것을 진리라고 말하니까 그렇겠거니 생각했으나 이제는 그것이 정말 그러하다는 것을 그들은 보았다. 이제 모든 것이 그들에게 너무나 분명했다. 그래서 그 전에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이상해했다.

에드워즈는 자신이 진술하는 이 역사가 과거의 부흥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부흥은 자신의 전임자인 스토다드의 목회아래서도 몇 번 일어났다. 그때 역사했던 것과 동일한 영이 이번에도 역사했는데 차이가 있다면 그 정도의 비범성뿐이라는 것이었다. “전에 회심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제 하나님의 축복의 소나기에 같이 참여하여 하나님의 영의 갱신시키고 강화하고 세워주시는 영향을 받았다(And God's people that were formerly converted, have now partook of the same shower of divine blessing in the renewing, strengthening, edifying influences of the Spirit of God)”.

III.『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

1. 본서의 역사적 배경

에드워즈가 노샘프턴에서 목회한 23년 동안 체험한 두 번째 성령의 부어주심은 1740년에 시작하여 1742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이른바 <1차 대각성 운동>이 그것이다. 1차 대각성 운동은 규모면에서 식민지 전체에 영한 미친 광범위한 부흥운동이었으며 특히 뉴잉글랜드 지역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차 대각성 운동의 중심인물은 영국에서 온 순회 설교자 조지 윗필드(1714-71)이었다. 윗필드는 총 7차에 걸쳐서 미식민지를 방문했는데, 1차 대각성 운동은 그의 제2차 방문기간(1739년 10월 30일-1741년 1월 16일)중에 일어났다. 윗필드는 1740년 가을에 미국 뉴잉글랜드(미동북부 6개지역) 지방을 73일 동안 1,300km를 여행하면서 130회에 걸쳐서 설교를 했고, 1740년 10월 7일부터 4일간 조나단 에드워즈가 목회하던 노샘프턴에 머물면서 설교를 하는 동안 노샘프턴은 옛날 1734년-1735년 때의 부흥과 같은 은혜의 물결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후 뉴헤이븐을 방문하여 예일 대학에서 설교를 하였는데, 이때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큰 감화를 받았다. 윗필드의 뒤를 이어 길버트 테넨트(1703-64)가 설교를 통하여 부흥의 열기를 한층 더 고조시켰다. 한편으로 환상을 보고 황홀경에 빠지는 열광주의적인 반응으로 인한 부작용도 생겨나면서 사람들 속에 윗필드의 순회 설교 때 싹텄던 반부흥주의의 정서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두 사람의 사역으로 불붙기 시작한 뉴잉글랜드 지역의 부흥은 여러 지역 목회자들에 의해 1741년 4월에는 20여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여름에는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기간 중 에드워즈는 여러 지역으로 순회 설교를 다니게 되었고, 특히 1741년 7월 8일 엔필드(Enfield)에서 행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이라는 설교는 이후 에드워즈의 가장 유명한 설교로 알려지게 되었다. 1741년 8월 , 9월에 부흥은 최고의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지나친 열광주의로 인해 오히려 부흥에 찬물을 끼얹고 반부흥주의 노선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을 강화시켜 주는 사건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열광주의를 부추긴 대표적 인물은 예일대 출신의 제임스 데이번포트(James Davenport 1716-1757)였다. 그는 1740년에 윗필드의 놀라운 성공 소식에 깊은 열등감을 가지고 교인들을 모아놓고 24시간 연속 집회를 가졌다. 그는 회심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형제라 부르고 나머지 사람들은 이웃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후 이웃마을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1740년 봄에 목회지를 떠나 6개월 동안 회심하지 않은 목사들의 위험성을 강도 높게 경고하는 사역을 하고 있었던 장로교 부흥사 길버트 테넌트와 그리고 10월에는 윗필드와 개인적인 교제를 나누었다. 1741년 한 여름 하나님이 자신을 더 큰 일을 위하여 목회지를 떠나도록 부르셨다는 확신을 가지면서 코네티컷 지역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해안선을 따라 여러 지역을 차례로 순회하면서 데이번포트는 목사들에게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확인하며 회심 여부를 판단하라고 외쳤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목사들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회심하지 않았다. 선언하며, 회중들로 하여금 이러한 목사를 무시하게 하고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올 것을 촉구했다.

데이번포트의 이러한 행동은 사려 깊은 사람들이 “부흥이 통제될 수 있을 것인가?”하는 우려를 하게 했다. 이것이 조나단 에드워즈가 1741년 9월 10일에 예일대 졸업식에서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을 설교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에드워즈는 졸업식 설교 본문으로 요한일서 4장 1절을 택하여 당시 뉴잉글랜드 지방의 태풍의 눈으로 떠오른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에드워즈는 이 설교에서 부흥시 발생하는 강력한 체험, 특히 부흥에 대한 열광주의적인 극단으로 인해 초래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보고 부흥 자체까지 반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밝혔다.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참된 성령의 역사에 대한 증거를 살펴볼 때, 지금 일어나고 있는 부흥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참된 부흥임을 강조했다. 에드워즈의 이러한 설교에 대해 예일대 학생들은 열렬한 반응을 보였으나 교수진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는 이후 부흥 운동에 대한 친부흥파와 반부흥파의 분열을 예고하는 전조이기도 했다. 에드워즈는 예일대 졸업식 설교를 확대하여 같은 해 보스턴에서 출판하였다.

에드워즈는 사도시대가 하나님의 성령이 전례없이 엄청나게 부어진 시대였다고 말함으로 설교를 시작한다. “영감을 주고 기적을 행하게 하시는 성령의 특이한 영향력과 은사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마음의 죄를 깨닫게 하고, 회심하게 하고, 조명하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평상적인 역사에 있어서도 전례없이 큰 역사”가 있었던 시대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드워즈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기도 “비범한 시대, 즉 사람들의 마음속에 진귀한 역사가 매우 괄목할 만하고 또 광범위하게 나타나고”있는 시대라고 말한다. 그리고 성령이 폭포수처럼 부어졌던 사도 시대에도 이미 사단의 거짓 역사들이 많이 나타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을 통하여 성도들이 거짓 선지자나 거짓 사도들에게 미혹당하지 않도록 경고를 하고, 무엇이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셨다. 에드워즈가 본문으로 택한 요한일서 4장도 바로 그와 같은 목적을 위해 씌어진 중요한 장이다. 본문은 참된 영과 거짓 영을 구별하는 표징들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다. 사도 요한은 여기서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에 분명하고도 안전한, 그리고 확실한 구별성이 있으며 사용하고 적용하기에 아주 편리한 참된 성령의 표지들을 제공함과 동시에, 이 주제를 분명하고도 충분하게 다루려고 노력했다.

요일4:1의 말씀은 참된 영과 거짓 영을 구별하는 표징들에 대하여 가르치는 이 설교의 서론에 해당한다. 사도는 이러한 표징들을 말하기 전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의사항을 말한다. 첫째, 겉으로 그럴 듯하게 보이는 모든 것을 참된 영의 사역으로 함부로 믿는 어리석음과 무모함을 경고하면서, 영들을 시험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역설하고, 둘째, 영들을 시험하는 의무가 필요한 이유는 많은 모조품들이 등장하였기 때문임을 상키시킨다. 사도는 자신의 편지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들을 시험하는 문제에 대해 이와 같이 권면하고 경계한 후에, 성령의 평상적 사역이나 특이한 사역으로 위장하는 모든 것을 안전하게 판단할 수 있는 규칙들을 곧장 제시해준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계획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나의 계획은 하나님의 성령이 가진 참되고, 확실하고, 뚜렷한 증거들이 어떤 것인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들 또는 다른 사람들 안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역사라도 제대로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2.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이 될 수 없는 소극적인 증거 9가지

에드워즈는 제2부에서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데 있어서 증거가 될 수 없는소극적 증거 9가지를 먼저 제시한다. 에드워즈는 영들을 분별하는 표지들을 논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 우리가 판단할 수 없는 표지들이 무엇인지 9가지를 말하고 있다. 소극적인 표지들은 성령의 역사와 동반되는 현상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사단이 흉내낼 수도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이것은 성령의 역사이다’든지 아니면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는 점을 유념하여야한다.

(1) 매우 일상적이지 않고 아주 비범하고 특별한 일어 일어난다고 해서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성령의 역사다 아니다고 말할 수가 없다.

(2) 우리는 인간의 신체에 나타나는 어떤 영향들, 즉 눈물, 전율, 신음, 큰 소리를 지름, 육체적 고뇌, 혹은 신체적 힘이 빠지는 것 등에 의해서 그 역사가 참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다.

(3) 큰 소동과 종교에 대한 큰 잡음이 나타난다고 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나타나는 작용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4) 성령의 영향력 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상상(imaginations)에 커다란 인상들을 받는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마음에 나타나는 작용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5) 부흥을 반대하는 이들 중에는 부흥시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따라하여 동일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것은 참된 성령의 역사가 아니야라고 부정을 한다.

(6) 성령의 역사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으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의 행동이 매우 신중하지 못하고 변칙적인 일들(irregularities)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역사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7) 판단에 있어서 많은 실수들이 있고 사단이 그 역사에 어떤 미혹들을 뒤섞어 놓았다고 해서, 그 역사 전체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8) 소위 성령의 영향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몇 몇 사람들이 심각한 실수를 범하거나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하거나 또는 이단에 빠지는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 전체 부흥 운동을 거짓 영의 역사라고 매도할 수 없다.

(9) 부흥의 시기에 목회자들이 율법설교나 지옥설교를 많이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에 잠기게 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이상에서 나열한 9가지의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증거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반드시 성령의 사역의 결과인 것도 반대로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 근거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상의 9가지 증거들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아니면 악한 영의 역사 결과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상의 소극적인 기준들은 성령의 역사일수도 있고 성령의 역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에서 “중립적인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3. 성령의 역사 분별을 위한 적극적인 증거 다섯 가지

에드워즈는 제3부에서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적극적인 증거를 설명한다. 어떤 영적 현상이나 어떤 성령 체험 혹은 어떤 성령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것이 진정한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분별해낼 수 있겠는가? 앞서 말한 9가지 증거들은 성령의 역사 결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사단도 흉내 낼 수 있는 중립적인 증거이다. 그러나 사단이 절대로 흉내 낼 수 없고 흉내 내려고도 하지 않는 일들이 있다. 그것은 오로지 성령님만이 만들어내실 수 있는 일들이다. 에드워즈는 그와 같은 참되고 확실하며 뚜렷한 증거들이 무엇인지를 본문으로 읽은 요한일서 4장 전체에서 발견해 낼 수 있다고 말한다.

(1)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 고백. 예수님은 고별 설교를 통해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그가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실 것이며(요15:26), 자기 영광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6:14). 이와 같이 성령은 예수님을 알리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성령은 예수님에 대하여 바른 신앙 고백을 하게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며, 예수님께 순종하게 만들어준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곧 예수님 충만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일서 4장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4:2-3).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4:15).

(2)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 요한은 4, 5절에서 참된 영과 거짓된 영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을 대조시키고 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한편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하여 세상의 영을 이기고, 다른 쪽의 사람들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의 것들을 말하며 세상의 것에 취미를 붙인다. 이 세상에 속한 자는 세상에 속한 것들, 즉 죄의 욕심에 속한 모든 것, 인간의 모든 타락한 일과 육욕을 포함하는 모든 것, 그리고 그들의 욕망을 만족시켜 주는 모든 행동들과 대상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사랑한다(요일2:15,16)(115).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면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의 쾌락들과 이익들과 명예들을 덜 소중히 여기게 만드는 방식으로 역사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이러한 것들을 열렬히 추구하는 것에서부터 떠나도록 하며,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이 계시해 주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의 미래와 영원한 행복에 깊은 관심을 갖도록 만들어 주고,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열렬히 추구하도록 만들며, 사람들이 죄의 무서움과 그것이 가져올 죄책과 죄로 인해 맞이하게 될 비참함에 대해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다.

(3) 성경에 대한 높은 관심. 사람들이 성경을 매우 존중하게 되고, 성경의 진리와 신성을 더욱 확신하게 된다면, 그런 식으로 역사하는 영은 분명히 하나님의 성령이시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영감 하셔서 기록하여 주신 성경을 사랑하게 해 준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4:6). 사도 요한이 우리의 말이라고 한 것은 사도들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성령님은 사도들을 통해서 주신 말씀을 듣게 하고 순종하게 만드는 분이시듯이 오늘날 사도들을 통해서 기록해 주신 말씀을 사랑하고 부지런히 공부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나 사람들의 영혼의 관심사에 있어서 모든 시대에 걸쳐서 교회를 지도하기 위하여 위대하고 영구적인 규칙으로 신적인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성령은 신적인 말씀에 대한 존중심을 가지게 하고 열심히 공부하게 만드는 것이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성령님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게 하지 않는다. 기록된 말씀 이외의 직통 계시나 새로운 계시를 주시지 않는다. 오히려 성령 충만하면 할수록 성경의 권위를 높이고, 성경을 더욱 더 가까이 하게 만드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 말씀을 읽을 때에 조명(照明)하시어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는 일에 도움을 주시는 분이시다.

(4) 건전한 교리와 신학. 성령의 역사가 가장 활발하게 나타났던 시기에는 성경의 주요 진리, 기독교의 중요 진리에 대한 아주 강렬한 관심과 신앙 고백들이 생겨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을 보면 성령은 곧 “진리의 영”(요14:17,15:26,16:13)이시기 때문에 참된 신자로 하여금 성경에 기록된 주요 진리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만든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 사이에 역사하는 영의 작용 방식을 관찰하는 가운데 그 영이 진리의 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본다면, 즉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고 진실인 것에 대하여 확신을 주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그 영이 바르고 참된 영이라고 안심하고 판단할 수 있다.

(5).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 사람들 사이에 역사하고 있는 영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영으로 역사한다면, 그것은 그 영이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분명한 증거이다. 사도는 요한일서 4장 7절-21절까지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사도는 누가 참된 영을 가졌는지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표지로서 사랑을 제시하고 있다. 사도는 사랑은 마치 그 속에 성령의 참된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12-13절,16절). 즉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과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 동일한 일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앞서 살펴 본 성령이 역사하실 때 나타나는 5가지 기준을 통해서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울러 배우게 된다고 백금산 목사는 평가한다. 앞서 본 5가지는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이러한 일들이 우리의 영혼 속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성숙한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이러한 요소들이 우리 안에 더욱 풍성해지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에 의한 부흥이란 한 개인의 성도 안에, 그리고 집단적인 교회 내에서 이러한 요소들이 평상시보다 더욱 크고 비범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과 사랑, 성경의 권위에 대한 존중과 열심히 성경을 탐구하는 것, 진리와 교리와 신학공부에 대한 관심, 죄에 대한 회개와 거룩과 성결한 삶의 추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등이야말로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서 언제나 성도들과 교회가 힘써 추구해야 할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4. 실제적인 적용

에드워즈는 본서의 결론 부분에서 지금까지 말해온 진리를 당시 부흥과 관련해서 다양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을 한다.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 부흥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부흥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들에게 권면을 한다. 반부흥파에 대하여는 성경의 분별 기준으로 볼 때 지금 일어나고 있는 부흥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분명하기 때문에 반대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분명 요한일서 4장에서 사도 요한이 말하는 성령의 분별 기준을 볼 때, 현재의 부흥은 분명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역사가 틀림없기 때문이다.

친부흥파에 대하여서도 에드워즈는 주의를 주고 있는데 부흥의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라고 말한다. 현재의 부흥의 불길이 꺼지지 않게 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교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조심해야 할 첫 번째 사항으로서 내적 충동이나 직통 계시나 예언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점을 말한다. 이를 위해 은혜와 은사를 구분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은혜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것이지만, 은사는 불신자에게도 주어질 수 있다. 말하자면 은사를 받고도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게 하는 것은 은혜이다. 은사는 은혜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의도된 것이다. 성령의 은혜의 역사를 이루지 못한다면 은사는 무의미하다. “나로서는 일년 내내 예언적인 환상들을 보고 계시들을 받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영적이며, 신적인 아름다움과 무한하신 은혜, 그리고 죽으신 사랑을 나타내 보여 주시고, 거룩한 믿음을 발휘케 하시고, 신적인 사랑과 달콤한 만족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의 겸손한 기쁨을 자아내시는 성령의 달콤한 영향력을 단 15분간만이라도 즐기는 편이 좋습니다.”

IV. 『균형잡힌 부흥론』(Some Thoughts concerning the present Revival of Religion in New-England)

1. 역사적 배경

이미 앞서도 살펴 본 것처럼 1740년-1742년 사이에 미국 식민지 전체에 1차 대각성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성령의 비범한 역사하심에 조지 윗필드, 길버트 테넌트,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 등이 도구로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뉴 잉글랜드 부흥이 진행되어 가면서 특히 부흥에 대해 양극단으로 치닫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쪽은 뉴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부흥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다른 극단에는 부흥 체험을 너무 광신적으로 몰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자는 보스턴 제일교회 협동목사(copastor)였던 찰스 촌시(Charles Chauncy, 1705-1787)를 중심으로 하고, 후자는 제임스 데이번포트(James Davenport, 1716-1757)를 중심으로 했다. 광신주의의 등장과 확산은 찰스 촌시와 같은 반부흥론자들이 뉴 잉글랜드 전역에서 일어난 영적 대각성을 광신주의적 열기의 결과로 매도하게 만들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양극단에 속한 사람들이 뉴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고 결국은 퇴조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였다. “오, 사탄이 얼마나 독기를 뿜어대고 있는지! 하나님은 경건한 열성주의자들(pious zealots)과 차갑고 악마적인 반대자들(cold, diabolical opposers)에 대항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지시하십니다!”.

(1) 광신주의의 등장

광신주의는 1741년 하반기에 등장해서 1742년에 본격적으로 기세를 떨쳤다. 이들은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였으며, 자신들의 감정적인 충동을 성령의 인도와 동일시했다. 그들은 교회를 분리시킬 뿐 아니라 평신도 설교자를 임의로 임명하여 교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러한 광신주의를 부추긴 대표자가 바로 젊은 목회자 제임스 데이번포트였다. 그는 1740년 윗필드의 놀라운 성공 소식에 자극을 받아서 교인들을 모아놓고 24시간 연속 집회를 가졌다. 그는 회심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형제라 부르고 나머지 사람들은 이웃이라 불렀다. 그는 1740년 봄에 목회지 사우스올드를 떠나서 테넌트와 윗필드 등과 개인적 교분을 가졌다. 1741년 한 여름, 그는 목회지를 떠나 코네티컷 지역을 해안선을 따라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는 회심하지 않은 목회자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에서 분리하라고 교인들을 선동하였다. 에드워즈가 1741년 9월 10일 예일대 졸업식에서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을 설교하던 시점의 분위기가 이와 같았다. 데이번포트는 1742년 봄부터 남부 코네티컷에서 사역을 재개했으나 방랑자들의 설교를 반대하는 강력한 법에 의거하여 하트포드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고 정신병자로 간주되어 사우스올드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우스올드에 오래 머물지 아니하고 보스턴 시에 모습을 나타냈다. 보스턴 지역 목회자들은 그가 강단에 설 기회를 허용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1742년 7월 1일에 충동과 목회자를 비난하는 것과 거리에서 노래 부르는 것, 평신도들로 하여금 설교하도록 부추기는 행동에 대한 반대 성명서를 내었다. 그러자 데이번포트는 많은 목회자들의 이름을 거명하여 이들이 회심하지 않았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당국의 개입으로 그는 체포되어 다시금 재판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 다시 정신병자로 판명되어 무죄 방면되고 다시 추방되었다. 하지만 1743년 3월에 데이번포트의 광신주의적 행태는 절정에 달하고 만다. 데이번포트는 코네티컷 뉴런던의 개척 교회 목사로 초청을 받아들인 후에, 추종자들에게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에서부터 성결해지려면 자신들이 가진 모든 좋은 옷, 보석, 책을 태워야 한다고 지시했다. 그가 태우게 한 책들 중에는 존 플레이블 전집과 많은 청교도 책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할렐루야를 외치며 거리에서 광란에 가까운 춤을 추며 찬양을 불렀다. 하지만 자신의 지나친 행동에 소진된 데이번포트는 고향으로 되돌아갔고, 휴식을 취하는 동안 제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1744년에는 자신의 지난 행동이 거짓 영 때문이었다는 고백과 회개의 글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의 회개는 때늦은 것이었다. 이미 교회들은 광신주의 때문에 분리되었고, 반부흥론자들의 부흥 반대의 빌미를 제공한 후였기 때문이다.

(2) 찰스 촌시와 반부흥론자들

성령의 비범한 역사로 뉴 잉글랜드 전역에 일어난 대각성과 부흥에 대해서 냉담하게 반응을 보이면서 비판하는 일단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와 같은 반부흥론의 진영의 선봉장은 보스턴 제일교회 협동 목사였던 찰스 촌시였다. 촌시는 자유주의자이며, 알미니안 신학자요, 심원한 학자였고, 타고난 구파(Old Light)였다. 그가 부흥에 대해서 비판의 포문을 연 것은 1742년 7월 데이번포트가 보스턴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그는 『광신주의를 분석하고 경고함(Enthusiam Described and Cautioned Against)』이라는 설교를 통하여 광신주의를 공격하였다. 촌시는 광신주의를 일종의 종교적 광란으로 부르면서, 반율법주의, 교황주의, 무신론등과 같은 뉴 잉글랜드의 다른 혐오스러운 운동들과 묶어서 취급했다.

촌시는 광신주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광신주의자는 자신을 하나님의 비범한 임재의 은총을 입은 사람으로 과대평가하는 자이다. 그는 자신의 열정의 작용을 하나님의 교통이라 오해하여 자신이 성령의 직접적 영감을 받은 자라 망상한다. 그러나 사실은 단지 과열된 상상의 영향하에 있을 뿐이다”. 촌시는 1742년 8월에 『보스턴에 있는 신사가 에딘버러 목회자 가운데 하나인 조지 위샤트에게 뉴 잉글랜드의 신앙 상태에 대해』라는 책자를 익명으로 간행하여 뉴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신앙 부흥에 대해서 광신주의적 열정이 빚어낸 결결과라고 도매금으로 비판하였다. 촌시는 길버트 테넌트와 데이번포트를 구별함 없이 광신주의자로 비난하였다.

1742년 말 쯤에는 이처럼 데이번포트의 광신주의와 촌시의 전격적인 공격이 날카롭게 양극화되어 있었다. 에드워즈의 『균형잡힌 부흥론』은 부흥에 대한 이런 양 극단적인 분위기 속에서 1742년 말에 원고가 넘겨져 1743년 3월 경에 책으로 발간되었다. 에드워즈의 책이 출간되자마자 촌시는 즉각적인 반박에 나선다. 촌시는 1743년 9월에 Seasonable Thoughts on the State of Religion in New England, a Treatise in Five Parts라는 이름으로 비판서를 출판하고 만다. 총 424쪽에 달하는 이 저서는 에드워즈의 책자와 유사한 타이틀을 붙였고, 내용적으로도 에드워즈의 글을 따라가면서 반박하고 있다.

2. 에드워즈의 『균형잡힌 부흥론』의 주제와 구조

에드워즈의 책은 전체 5부로 구성되어 있다. 부흥반대주의자와 부흥광신주의의 양극단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균형잡힌 부흥론을 제시하는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5부의 구성은 전체적으로 이것과 관련되어있다. 먼저 1-3부는 부흥반대주의에 대한 답변이다. 그리고 4부는 부흥광신주의 즉 광신주의에 대한 반박이다. 마지막으로 5부는 참된 부흥을 유지하기 위한 권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제1부 당시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범한 역사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사역이다(Part I. Shewing that the extraordinary work that has of late been going on in this land, is a glorious work of God).

지금까지의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부흥은 하나님의 역사이며, “아주 위대하고 경이롭고 극히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일”이라고 결론지어야 한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그것은 “비상한 혁명”이며, “갑자기 일어난, 예기치 않은 놀라운 국면 전환으로서, 뉴잉글랜드에서 한 번도 없었고, 다른 어떤 곳에서도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 전역에 파급된 부흥의 역사가 구속의사역이며, 새 창조의 사역이고, 옛 창조보다 무한히 더 영광스러운 창조이며, 하나님의 사역들 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사역이라고 말한다.

(2) 제2부, 모든 사람이 이 부흥의 사역을 인정하고 기뻐하고 증진시켜야 할 의무를 지며, 그 반대의 일을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짓이다(Part II. Shewing the obligations that all are under to ackowledge, rejoice in, and promote this work, and the great danger of the contrary).

에드워즈는 천년 왕국이 미국에서 동틀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성령의 역사는 -그처럼 비범하고 경이롭기 때문에) 성경에서 그토록 자주 예고된 그 영광스러운 역사의 여명, 혹은 최소한 서막이다. 이 일이 진행되면 인간 세상을 갱신하게 될 것이다...이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이 틀림없이 박두했다. 그리고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역사가 미국에서 시작될 가능성이 많다”.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의 남녀노소, 빈부귀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대각성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길을 주목하면서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해야 하며 그것을 크게 기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두신 위치에서 그 부흥을 진작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한다.

(3) 제3부. 열심있는 부흥 사역자들이 근거없는 비난을 받는 열가지 경우와 그 부당성(Part III. Shewing in many instances wherein the subjects or zealous promoters of this work have been injuriously blamed).

3부는 에드워즈의 부흥에 대한 변증이요 옹호론이다. 그러면 부흥 설교자들이 부당하게 비난 받았던 점들이 무엇인가?

첫째, 부흥 설교자들이 청중들의 지성보다는 감정에 호소한다는 것,

둘째, 이미 커다란 공포속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지는 않고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설교를 한다는 것,

셋째, 그들이 지옥불과 영원한 저주의 이야기로 순진하고 연약한 어린이들에게 겁을 준다는 것

넷째, 그들이 종교적 집회를 너무 자주 가지면서 종교에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한다는 것,

다섯째, 그들이 설교를 너무 자주한다는 것

여섯째, 어떤 부흥사들은 비명소리, 기절등의 육체적 반응을 너무 많이 일으킨다는 것,

일곱째, 부흥 설교자들이 강한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아 둠으로써 혼란을 부추긴다는 것,

여덟 번째, 강한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말을 너무 많이 할뿐더러 너무 열렬하고 진지하게 그렇게 한다는 것,

아홉 번째, 집회에서 찬양을 너무 많이 한다는 것,

열 번째, 어린이들의 종교적 집회에 관해 제기되는 불만 등에 대해서 에드워즈는 예리하게 성경적으로 대답을 하고 부흥을 방어하고 변증한다.

(4) 제4부. 열심있는 사역자들이 경계해야 하는 함정들(Part IV. Shewing what things are to be corrected or avoided in promoting this work, or in our behavior under it).

에드워즈는 당시 부흥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심 때문에 때로 실수를 저지르거나 과오를 범하는 일들이 있음을 직시하고, 그러한 부작용들이 부흥의 진행에 차질을 초래함을 인식한다. 그래서 4부에서 열심있는 이들을 향하여 시정하고 조심해야 할 점들에 대해서 지적한다. 에드워즈는 광신주의가 생기는 세 가지의 일반적인 원인들로서 영적 교만, 잘못된 신학적 관점들, 영적 체험에 대한 무지등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리고 특수한 오류들로서 다른 사람들을 회심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오류, 평신도 설교와 관련된 오류, 찬양과 관련된 오류 등에 대해서 다룬다.

(5) 제5부. 부흥을 진작시키기 위해 해야 할 일들(Part V. Shewing positively what ought to be done to promote this work).

에드워즈는 마지막 5부에서 부흥을 진작시키기 위해서 어떤 일을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지, 혹은 이 부흥을 증진하기 위해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제시한다. 그는 우선적으로 부흥의 걸림돌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부흥을 반대하는 자들이나 찬성하는 이들 쌍방이 과실이 있음을 고백해야 한다고 말한다. 에드워즈는 부흥을 위해서 직접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모든 사람이 부흥의 수혜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고 나서, 부흥을 반대하는 자들 역시도 알미니안주의를 버리고 복음에 동참하기를 촉구한다. 그리고 이어서 나이든 사람들 역시도 부흥에 소외되지 않도록 조심할 것과, 특히 목사들이 할 일과, 대학 교수들이 할 일, 부자나 사회 지도자들이 할 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진술한다. 에드워즈는 또한 모든 성도들이 부흥을 진작시키기 위해서는 금식과 기도에 힘쓰며, 성찬식을 자주하며, 이웃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다할 것을 권면한다.

이상으로 에드워즈는 부흥에 관한 자신의 소견을 다 밝혔다. 그는 1740-2년 대각성 시기가 뉴잉글랜드 지역에 있었던 가장 복된 계절임을 말한다. 에드워즈의 마지막 소망을 담은 글을 인용해본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부흥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고, 부흥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능력과 은혜를 충분하고 자발적으로 인정하게 해 주시며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부흥에 참여하며, 또 적절한 방법으로 부흥을 촉진시킬 수 있도록 해 주신다면 부흥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일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다가온다는 복된 신호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예언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속히 오셔서 이 땅에 빛과 거룩과 평화와 기쁨의 왕국을 세우실 것을 정당하게 소망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하나님의 섭리가 가장 영광스럽게 드러나는 시기가 될 것이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부흥에 대한 양 극단의 입장의 잘못을 지적하며 부흥에 대해 바르고 균형잡힌 시각을 잘 보여주는 본서의 가치에 대해서 백금산 목사는 “교회사 최고의 체계적인 부흥론이며 교회사 최고의 부흥신학”이요, “부흥신학의 원조로서 부흥신학에 대한 최고의 고전인 동시에 최고의 명저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본서의 번역자 양낙흥 교수는 과거 1907년 평양 대부흥이나 1970년대 이후의 급속한 교회성장을 경험한 한국 교회이지만 과거 한국 교회의 부흥을 평가할 수 있는 신학적 기준이 한 번도 제시된 적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부흥관에 대해서 교회사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론은 한국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부흥 현상들을 평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양교수의 주장대로 우리 한국교회는 다시 한 번 은혜의 소나기가 부어지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하며, 부흥에 올바로 대처하려면 올바른 부흥론을 미리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V. 『신앙 감정론』(Religious Affections)

1. 본서의 역사적 배경

1746년에 첫 출간된 『신앙 감정론』(Religious Affections)은 『의지의 자유』와 『원죄론』과 더불어서 에드워즈의 3대 주저로 불리운다. 에드워즈는 본 서에서 “개인의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은혜로운 사역에 주의를 집중하고자 했다...순수하게 성령의 역사에 집중하였고 참된 신앙생활에 대한 실증적인 기술에 집중했다”. 스티븐 니콜스 교수는 에드워즈의 『신앙 감정론』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해서 자신이 한 강사에게 들었던 한 도전적인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He ended his lecture by issuing a challenge to read Religious Affections, claiming that, next to Scripture, it stands as the single most important book for any Christian to grapple with". 예일판 편집자인 존 E. 스미스 교수에 의하면 어떤 사상가를 평가할 수 있는 확실한 잣대 가운데 하나는 근본적인 질문들을 다루면서 보여주는 용기와 집요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기준으로 평가할 때 에드워즈는 탁월한 사상가였다고 말한다. 『신앙감정론』에서 에드워즈는 “성령의 임재 여부를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라는 청교도적 개신교의 중심적인 질문과 씨름했으며, 본서는 에드워즈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가장 집중적으로 끈질기게 탐구한 작품이었다고 말한다.

스미스 교수는 『신앙 감정론』은 정말 소화하기 힘든 작품이기 때문에 독자들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감정론은 모호한 말로 칭송되어 왔지만 이제는 탁월성을 지닌 작품에 걸맞게 읽혀지고 분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드워즈가 본서에서 수행하고자 하는 이중적 과업은 1) 신앙에서 감정을 제거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 맞서서 감정의 본질적 중요성을 변호하는 것과 2) 신앙이 감정적 광신주의와 거짓된 열광주의로 타락하지 않도록 감정들의 진위를 구별하는 기준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감정은 본질적으로 중요하지만, 참된 감정뿐 만 아니라 거짓된 감정이 있기 때문에, 판단의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의 주된 관심은 그런 판단을 내리기 위한 정당한 기준들을 확립하는 것이다. 영들을 분별하는 것은 체험적 신앙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이 책은 크게 봐서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2. 서론: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

제1부에서 에드워즈가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안에 있다(True religion, in great part, consists in holy affections)"는 교리적 명제로 압축된다. 우리 나라말로 정서 혹은 애정이라고도 번역되는 affection을 역자는 감정이라고 옮겼다. 에드워즈는 affection의 정의를 "한 인간의 영혼을 구성하고 있는 의지와 성향이 지닌 더 활기차고 감지할 수 있는 활동"이라고 하였다. 에드워즈는 감정이 무엇인가를 해명하기 위하여서 몇 가지의 중요한 인간론적 해명을 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영혼(soul)에 두 가지 기능들(facuties)을 주셨다. 첫째는 인식과 사유할 수 있는 기능, 즉 사물을 분별하고 바라보며 판단할 수 있는 기능으로서 지성(understanding)이고, 둘째는 사물을 단순히 인식하고 지각하는 것을 넘어서, 인식하고 지각하는 사물에게 어떤 식으로든 끌리게 되는 기능이다. 이것은 사물에게 호감이 생기게 할 수도 있고, 반감이 생기게 할 수도 있는 기능을 말한다. 에드워즈는 이 기능이 때로는 성향(inclination)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때로는 그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고 지배하기 때문에 의지(will)라고 불리기도 하며, 이 기능의 행사와 관련하여서는 정신(mind)이나 마음(heart)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 기능은 두 가지 방향으로 움직인다. 첫째는 영혼이 바라보는 사물을 인정하고 기뻐하고 애착을 가지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으며, 둘째는 반대하고 인정하지 않고 싫어하며 반감을 가지고 거절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영혼의 성향과 의지가 다양하게 표현되고 행사되는 것처럼, 그 표현되는 정도는 훨씬 다양하다. 이 기능을 더 활력있게 느끼게 되는 것을 감정(affections)이라고 부른다.

에드워즈는 또한 감정(affections)을 격정(passions)과 구별한다. 전자는 후자보다 더 포괄적이다. “감정은 의지와 성향이 모두 왕성하고 생생하게 활동하는 것에 사용한다. 그러나 격정은 본능에 미치는 효과가 더 갑작스럽고 더 격렬하며 정신이 더 충동적인 상태가 되어 통제가 되지 않는 경우에 사용된다.”

3. 신앙감정이 진정으로 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 근거가 될 수 없는 표지들

성령의 역사로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소극적인 표지들을 12가지 들고 있다. 특히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이런 소극적인 표지들을 가지고서 자신이 성령을 체험했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예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주의해서 읽어볼 만한 것이다.

(1) 첫 번째 소극적 증거: 감정의 강도 - 신앙 감정이 매우 크게 발휘되거나 아주 높이 고양되는 것 자체는 그 감정들이 은혜로운 것인지 또는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

(2) 두 번째 소극적 증거: 몸의 격렬한 반응 - 감정이 몸에 큰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은 그 감정에 참된 믿음의 본질이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해 주는 표지가 아니다.

(3) 세 번째 소극적 증거: 신앙과 신학에 대한 관심 - 신앙 감정이 있는 사람들이 신앙적인 일들을 매우 유창하고 열정적으로 그리고 풍부하게 말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감정들이 은혜로운 것인지 또는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있는 표지는 아니다.

(4) 네 번째 소극적 증거: 감정의 자가 생산 여부 - 신앙 감정이 있는 사람들이 신앙적인 일들을 매우 유창하고 열정적으로 그리고 풍부하게 말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감정들이 은혜로운 것인지 또는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있는 표지는 아니다.

(5) 다섯 번째 소극적 증거: 성경이 갑자기 떠오름 - 신앙 감정들이 성경 본문을 마음속에 기억나게 한다는 것 자체는 그 감정들이 거룩하고 영적인 것인지 또는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

(6) 여섯 번째 소극적 증거: 사랑의 피상적 표현 - 사람들이 체험하는 감정에서 사랑이 나타난다는 것 자체는 그 감정들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감정인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할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

(7) 일곱 번째 소극적 증거: 감정의 정도 - 사람들이 여러 신앙 감정들을 동시에 체험했다는 사실은 그 감정들이 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데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없다.

(8) 여덟 번째 소극적 증거: 감정의 체험 순서 - 양심의 각성과 죄에 대한 깨달음이 있은 후에 어떤 일정한 순서를 따라 위로의 기쁨이 뒤따른다는 사실로는 그 감정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판단할 수 없다.

(9) 아홉 번째 소극적 증거: 종교적 행위와 의무의 피상적 실천 -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 감정이 그들로 하여금 신앙적인 일에 시간을 많이 사용하게 하고, 예배의 외부적인 의무들에 열심히 헌신하게 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감정에 참된 신앙의 본질이 있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는 확실한 표지는 아니다.

(10) 열 번째 소극적 증거: 찬송을 열심히 부름 - 사람들이 가진 신앙 감정이 그들로 하여금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게 한다는 사실로는 그 감정의 본질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11) 열한 번째 소극적 증거: 자신의 구원 확신 - 어떤 감정이 생긴 사람들 스스로 자신들의 체험이 신령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영적으로 건전한 상태에 있다고 크게 확신한다는 사실은 그 감정이 바른 것인지 또는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표지가 될 수 없다.

(12) 열두 번째 소극적 증거: 타인에 의한 구원의 확신 - 사람들이 밖으로 표현한 감정이 참된 성도들의 마음에 들고 호응을 얻을 만큼 크게 감화력이 있고 기쁨은 준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신앙 감정의 본질이 어떠한지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4. 진정으로 은혜로운 거룩한 감정을 뚜렷이 구별해 주는 표지들

에드워즈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참된 감정을 알아볼 수 있는 표지로서 다음의 12가지를 들고 있다. 『신앙 감정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분량 상으로 중요하지만, 내용상으로 더욱 중요한 부분이다.

(1) 첫 번째 적극적 증거: 성령의 내주 - 참으로 영적이고 은혜로운 감정은 영적인, 초자연적인, 신적인 영향과 작용들이 그들 마음에 역사할 때 생겨나게 된다.

(2) 두 번째 적극적 증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인식 - 은혜로운 감정이 생기는 가장 객관적인 근거가 신적인 일들이 가장 탁월하며 그 자체로 사랑스럽다는 데 있어야지, 그 일들이 자기 이익과 관련되었다는 데 있어서는 안 된다.

(3) 세 번째 적극적 증거: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대한 인식 - 참으로 거룩한 감정들은 주로 신적인 일들에서 드러나는 도덕적 탁월성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다. 달리 표현하면, 신적인 일들에서 드러나는 도덕적 탁월성이 아름답고 향기롭기 때문에, 신적인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거룩한 감정들의 시작이며 원천이다.

(4) 네 번째 적극적 증거: 하나님을 아는 지식 - 은혜로운 감정은 지성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일들을 바르게 이해할 때 생긴다.

(5) 다섯 번째 적극적 증거: 진리에 대한 깊은 확신 - 은혜로운 감정은 신적인 일들에 대한 실재성과 확실성을 합리적이고도 영적으로 확신할 수 있게 해 준다.

(6) 여섯 번째 적극적 증거: 참된 겸손 - 은혜로운 감정은 복음적인 겸손을 동반한다.

(7) 일곱 번째 적극적 증거: 성품의 변화 - 은혜로운 감정을 다른 감정들과 구별하게 해 주는 또 하나의 표지는 은혜로운 감정은 본성의 변화를 동반한다는 것이다.

(8) 여덟 번째 적극적 증거: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감 - 참으로 은혜로운 감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 같고, 비둘기 같은 심령과 기질을 가지도록 돕고, 그것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거짓되고 기만적인 감정들과 다르다. 다시 말하면, 참으로 은혜로운 감정들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 온유, 평온함, 용서, 자비의 심령을 자연스럽게 닮아가게 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도와준다.

(9) 아홉 번째 적극적 증거: 하나님을 두려워 함 - 은혜로운 감정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며, 기독교적인 온유한 마음을 동반하고 산출한다.

(10) 열번째 적극적 증거: 신앙의 균형 - 참으로 은혜로운 거룩한 감정들이 거짓된 감정들과 다른 점 또 한 가지는 그것들이 아름다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11) 열한 번째 적극적 증거: 하나님을 향한 갈망 - 은혜로운 감정들과 다른 감정들 사이에 차이점을 크고 뚜렷하게 구분해 주는 또 하나의 다른 표지는 은혜로운 감정들이 더 높이 고양되면 고양될수록, 영적인 만족을 위한 영혼의 영적인 욕구와 갈망이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반면에 거짓된 감정들은 그 자체로도 만족해한다.

(12) 열두 번째 적극적 증거: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 은혜로운 거룩한 감정들은 그리스도인의 행위로 드러나고 열매를 맺는다. 거룩한 감정들은 그 감정들을 경험하는 주체인 성도에게 영향력과 효력을 미치게 되며, 그 결과로 기독교의 원리와 전체적으로 일치하고, 그 원리에 따라 규정되는 행위는 성도가 일생동안 실천하고 마땅히 행해야 한다.

VI. 『기도 합주회』(An Humble Attempt to promote an explicit agreement and visible union of God's people through the world)

이 책의 한글 번역본의 제목은 데이비드 브라이언트의 책 제목을 모방하여 [기도합주회]라고 했으나, 1747년 보스턴에서 첫 출판된 에드워즈의 저서의 원 제목은 『성경-종말에 관한 약속과 예언들-에 준하여 기독교의 부흥과 지상에 그리스도 왕국의 확장을 구하는 비상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분명한 일치와 가시적 연합을 증진시키기 위한 하나의 겸손한 시도(An Humble Attempt to promote an explicit agreement and visible union of God's people through the world, in extraordinary prayer for the revival of religion, and the advancement of Christ's Kingdom on earth, pursuant to Scripture promises and prophecies concerning the last time)』이다. 이 책은 1749년에 간행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 An Account of the late Reverend Mr. David Brainerd』와 더불어 선교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책이 되었고 역사상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부흥과 세계 복음화를 위한 긴박한 기도의 필요성을 알리고, 그들을 기도로 인도한 책이 되었다.

이 책은 한 마디로 우리가 구해야 할 가장 영광스럽고 긴급한 두 가지의 기도 제목을 가지고 평상적 기도가 아닌 非常 기도를 연합적으로-교파를 초월하고, 교리적 차이를 넘어서서-드려야 한다는 촉구요, 도전이며, 청원이다. 두 가지 기도 제목이란 교회의 부흥 곧 영적 각성과 세계의 복음화 즉 선교의 종결이다. 이 두 가지 기도 제목을 가지고 비상하게 엎드려 하나님 앞에 온 교회가 간구해야 할 가장 긴급한 기도이기 때문에 특별한 기도라고 부른다. 부흥과 세계 복음화의 은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에 달려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기도는 하나의 겸손한 시도일 뿐이다. 본서에서 드러나는 근본 사상, 곧 에드워즈가 선교와 종말 그리고 역사에 관하여 견지하고 있던 근본적인 사상은 바로 기도-부흥-선교,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중보기도-영적 각성-세계 복음화라고 하는 일련의 순차적 패턴이다. 이것을 데이비드 브라어언트는 신적 패턴이라고 부른다.

부흥과 선교를 위한 합심 기도의 필요성은 스코틀랜드 목회자들에 의해서 청원되었고, 에드워즈는 이에 부응하여 1747년 2월 3일 스가랴 8장 20-22절을 본문으로 노샘프턴에서 설교를 했다. 그리고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기도합주회를 확산시키기 위하여 그 설교 원고를 다듬어서 출판하게 된 것이다. 에드워즈는 2차례에 걸쳐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를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크고 광범위한 성령의 부으심으로 인해 이 세상에서 참된 신앙과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관심이 놀랍게 진전될 날이 아직 남아있다고 본서에서 말한다. 장차 있을 교회의 확장과 번영의 영광스러운 시기에 대하여 언급한 많은 예언들이 아직 성취되지 않고 있다. 선지자들이 증거하고 바라보았던 그 정도의 수준으로 참된 신앙이 광범위하게 전파되고 파급된 적은 아직까지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은총의 나라에서 세상의 후사로 임명하시고, 복음전파와 복음의 축복을 가져다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열방을 소유하며 다스리게 하셨다는 것이 사도적 선포의 내용이다.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마지막 날에 성령의 부으심과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왕국 안으로 들어오는 영적 추수가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다. 온 인류가 그리스도의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될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을 소망하게 한다. 그러나 (에드워즈 당시) 아직 복음화 되지 않은 지역이 많았기 때문에 세계 복음화의 예언이 아직 성취된 것은 아니었다.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누린 평화와 번영의 기간은 짧았다. 성경에 예언된 영광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에드워즈는 롬11장에서 충만한 이방인의 수가 차고 나서 유대인들의 국가적인 회심이 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고난과 구속사역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했던 축복들의 총체는 바로 성령 하나님이셨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얻어진 위대한 축복이며 모든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그분의 내주와 감화와 열매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사람들을 위하여 값을 치르고 사신 모든 영적인 축복의 총체이며, 모든 은혜와 거룩과 위로와 기쁨의 총체이시다. 또한 성령은 내세에 있을 사람들을 위하여 그가 값주고 사신 완전함과 영광과 영원한 희락의 총체가 되신다. 성령은 영원한 구속언약과 은혜언약이 제공하는 모든 약속들의 중심 주제가 되실 정도로 위대한 은총이다. 또한 성령은 구약에 약속되고 예언된 대로 메시아의 왕국이 가져올 축복들을 다 포용해 낼 수 있는 거대한 주제가 된다.

에드워즈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영광스러운 날을 위해 많이 기도하도록 자극하고 유도하는 가르침과 권면과 본보기로 가득 차 있다. 성령의 임재는 여러 축복들 중의 최상의 축복이며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중심 주제다(눅11:13). 왜냐하면 성령은 모든 영적인 축복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은 모든 다른 것들보다도 우리에게 무한히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며 그 안에 우리의 참되고 영원한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그의 성령을 주시려고 특별히 준비하고 계신다. 성령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심이 더욱 만족스럽게 드러나며, 우리의 구원이라는 거대한 계획과 목표가 더 확실히 성취되고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가 그의 사역에서 더 큰 성공을 거두시게 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성령을 구하는 기도는 성경에 명백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교회는 마지막 날에 있을 성령의 영광스러운 부으심을 위해 많이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성령의 부으심을 통하여 성취될 일들을 위해서도 많이 기도해야 한다. 겔36장 33절-38절을 보면 교회가 영광스럽게 회복되고 진보할 것을 약속하시면서 그래도 그렇게 해 주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사62:6-7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축복을 얻기 위하여 얼마나 끈질기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신다(너희는 쉬지 말며...여호와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주기도문의 전반부의 세 가지 기도 제목도 영광의 날의 도래를 위한 것이다. 그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복음의 전파가 성령의 능력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그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간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이 진보되는 것에 종속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셨다. 선지자들은 교회의 회복과 진보에 대하여 예언하면서 이 모든 일이 하나님 백성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자주 말하였다.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그리스도에게 성령이 부어지신 것처럼(눅3:21-22), 주님의 교회위에도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성령이 강림하셨다(행1:14-2:1). 하나님 말씀의 다양한 증거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위하여 기도하는 간절한 기도의 영이 그리스도의 교회 가운데 충만하면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그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기도에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첫 번째 혜택을 기대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간절히 구하고 찾는 자에게 오실 것이다(사25:9,26:8).

VII. 『사랑과 그 열매』(Charity and Its Fruits)

『사랑과 그 열매(Charity and Its Fruits)』는 에드워즈가 1738년에 노샘프턴 교회에서 고린도전서 13장을 본문으로 해서 16회에 걸쳐 강해한 설교 원고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에드워즈는 뒤이어지는 설교 시리즈 『구속사역의 역사』(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와 더불어서 출판을 의도했었지만 두 작품 다 유고로 남겨졌다. 그러다가 『사랑과 그 열매』는 1852년에 그의 후손 Tryon Edwards의 편집으로 출판되게 된다.

에드워즈는 첫 번째 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란 같은 한 성령으로 부터 흘러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할 때 사랑도 함께 오기 때문이다. 성경에 의하면 성령의 본질은 사랑이다(롬1:8,15:30,빌2:1,롬5:5등).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내주하시어 자신의 본질을 성도의 영혼속에 전달하시며 교통하시는 일이 있어야 한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사람을 사랑하든지 그리스도인의 참 사랑은 '같은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나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나 간에 그 사랑은 하나의 신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의 성령론과 관련해서 중요한 설교는 두 번째 설교이다. 에드워즈는 두 번째 강해에서 사랑을 다른 어떤 것들 즉 이적적인 은사들(방언, 예언등)과 성령의 일반적인 감화력의 결과로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사랑, 신적인 사랑을 비교하여 어느 것이 우월한 것인지를 밝히려고 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사랑은 감화하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은사의 열매이다. 사랑은 모든 은사보다 탁월하다. 다른 모든 성령의 은사들을 다 합한다고 하여도 그 사랑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모든 구원의 은혜의 요약이다. 사랑이 없으면 성령의 모든 은사들이 아무 것도 아닐 정도로 큰 것이다. 성령의 모든 은사들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 에드워즈는 제2설교에서 말하려고 하는 교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 제시한다: “마음에 사랑의 은혜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일반적인 감화는 성령의 어떠한 은사보다 훨씬 탁월하다(That the ordinary influence of the Spirit of God, working the grace of charity in the heart, is a more excellent blessing than any of the extraordinary gifts of the Spirit)". 에드워즈가 말하는바 ”성령의 일반적 감화“란 마음속에서 사랑의 은혜로 역사하는 성령의 작용을 의미한다.

에드워즈는 성령의 은사를 보통 은사와 구원하는 은사로, 또는 일반적 은사와 특이한 은사로 구분한다. 보통 은사(common gifts of the Spirit)는 정결한 사람이나 경건치 아니한 사람이나 불문하고 주어지는 공통되는 은사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경건한 자 뿐 아니라 자연인의 마음 가운데도 감동시키는 방식을 갖고 계신다. 자연인 안에도 죄책감이나 종교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신다. 그러나 구원하는 믿음, 구원 받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랑등은 성령께서 구원얻는 경건한 사람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사(Peculiar and Saving Graces of the Spirit)가 있다.

에드워즈는 또한 일반적 은사와 특이한 은사를 구분한다. 특이한 은사(Extraordinary gifts)는 방언, 예언, 이적행할 수 있는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가리킨다. 이는 일반적 섭리 중에는 부여되지 아니하고 특별한 경우에만 주어지기 때문에 특이한 은사라고 부른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하나님이 마음과 하나님의 생각을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을 통하여 계시하도록 하셨는데, 바로 그 경우에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에게 부여된 은사를 특이한 은사라고 한다. 이런 은사는 초대교회에만 주어졌고 정경이 완성되고 교회가 완전히 설립되고 나서는 멈추어졌다(-에드워즈는 방언, 예언, 이적, 신유등의 은사가 자기 시대에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 것으로 부흥 관련 저술에서 밝히고 있는데 왜 이렇게 말하는지 생각해 볼이다).

일반적 은사(ordinary gifts)는 모든 교회 시대에 걸쳐 계속 주어진다. 그런 은사들은 죄를 깨우치고 회개하여 회심할 때에 허락된다. 그 은사들은 성도들의 성화와 위안을 촉진하여 성도들을 바로 세워 주는 데 소용된다. 주의해서 읽어야 할 것은 에드워즈가 앞서 말한 보통 은사(common gifts)와 일반은사가 같은 것이 아니다는 점이다. 믿음 소망, 사랑과 같은 일반적 은사는 하나님께서 모든 시대의 교회에 일반적으로 부여하시는 은사이지만, 불신자나 신자 가리지 않고 공통적으로 주시는 은사인 것은 아니다. 오늘날 불건전한 성령운동이 판을 치고 있는 한국 교회 현실에서 더욱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성령의 특이한 은사들(즉 방언, 이적, 예언등)은 교회내에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은사가 아니지만, 또한 경건한 사람들만이 받을 수 있는 은사도 아니다고 하는 에드워즈의 기가 막히게 예리한 지적이다. 마태7:22-23에 의하면 귀신 쫓아내고 선지자 노릇하며 많은 권능을 행하는 특이한 은사는 불경건 사람들 가운데도 주어질 수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러한 특이한 은사들이 위대한 특권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일반적인 감화로 마음속에서 열매맺는 사랑의 은혜만은 못하다고 에드워즈는 외친다. 즉 모세나 엘리야나 다윗, 열 두 사도들이 받았던 그 모든 이적적인 은사들 보다 더 큰 축복은 마음속에 일반적인 성령의 감화로 일어나는 사랑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복락은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본질에 고유한 성질이며, 성령의 은사 중 참된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창조하는 은사는 영혼 속에 은혜로운 행사를 하 하며 마음에 복락을 누리게 한다. 특이한 은사들은 훌륭한 것임에 틀림없으나 사람의 본성의 탁월함에 합당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에 고유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된 은혜와 거룩함은 사람들의 본성에 합당한 것이다. 특이한 은사들은 마치 아름다운 야회복과 같다. 그 옷을 입은 사람이 그 옷 때문에 성품상의 변화를 만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몸을 우아하게 보배로운 보석들과 같다. 그에 반해서 참된 은혜는 영혼 자체를 보석처럼 만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은혜를 주시는 일반적인 감화를 통하여 자신의 거룩한 성품을 영혼에 나누어 주신다. 거룩한 영이신 성령이 사람 속에 내주하게 되면 성령은 그 사람을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아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하게 하신다. 은혜라고 하는 것은 성령께서 영혼에게 분여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성질이다(Yea, grace is, as it were, the holy nature of the Spirit imparted to the soul).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예언을 말하고 이적을 행하는 이상한 은사들만을 주신다면, 그것만으로는 그것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의 동참자들이 되게 하지 못한다. 곧 그 자신의 성품안에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는 은혜를 함께 받지 못하면 특이한 은사들만으로는 영적인 사람이 되지 못한다.

마음을 거룩하게 하고 신적인 원리를 가지게 하며 거룩하고 하늘에 속한 삶을 살도록 하는 성령의 감화력 속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적 형상이 있다. 그리스도의 도덕적 형상과 도덕적 성품을 닮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는데 더욱 많이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정신을 가지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행하는데서 그러한 도덕적 그리스도의 형상이 더욱 많이 나타난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을 가지고 행하는데서 그리스도의 형상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성령의 일반적인 감화로 일상 주어지는 은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녀들에게만 주시는 특권(privilege)이다. 그러나 성령의 특이한 은사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것이 상례이지만, 때로는 성도들이 아닌 사람들에게 주시는 경우도 있다고 하면서 에드워즈는 발람(벧후2:15,유11,계2:14), 사울, 가룟 유다(마10:1-8)의 예를 든다.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성도들을 향한 성령의 고유한 은사로서 하나님이 특별한 사랑을 주시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축복이지만, 성령의 특이한 은사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자에게 조차도 주실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마음에 역사하는 성령의 감화는 성령의 특이한 은사들보다 더욱 탁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특이한 은사를 많이 받은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그 은사들을 자기의 선한 지위로 삼지 않았으며, 오히려 솔직하게 사랑이 없이는 그러한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다.

영생 혹은 구원의 약속은 성령의 특이한 은사를 받은 자에게 약속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일반적 은혜를 받은 자에게 약속된 것이므로 마음에 역사하는 은혜가 성령의 특이한 은사보다 무한히 더욱 탁월하다.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은 성령의 특이한 은사들을 가졌지만 지옥에 갔다(또한 마7:22-23). 예수님은 귀신들이 자기에게 복종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그런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에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눅10:20).

행복은 그리스도인이 받은 은혜의 진수가 되는데, 그것은 특이한 은사보다는 성령의 일반적인 감화로 얻어진다. 사람의 최상의 행복은 거룩해지는 데 있다. 이성적 피조물의 모든 선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 하나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다. 그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은 바로 그 거룩함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에 거룩한 성품을 가짐으로 행복을 얻는다. 그러한 것들이 생생하게 행사되는 속에서 행복은 찾아지는 것이다. 다른 것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것들만 있어서도 행복은 얻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없이는 다른 어떤 특권이나 기쁨도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

영혼 속에 성령의 일반적인 감화력으로 열매 맺는 이 신적 성품은 그 자체가 목적이고, 특이한 은사들은 그 목적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복음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둠에서 빛으로,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데로 옮아가게 하는 데 있다. 모든 특이한 은사들은 죄인을 회심시키려는 목적을 위한 방편이다. 그리고 성령의 일반적인 감화력의 열매인 거룩함 속에서 성도들을 세워 주려는데 사용되는 도구이다(엡4:11,16). 목적은 수단보다 우월하다. 수단이 목적에 복종하지 않으면 그것은 악하게 된다. 수단 자체로는 선한 것을 스스로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목적을 수단보다 더 우월하게 숙고해야 한다.

가룟 유다나 히6:406, 마13:20등을 언급하면서 에드워즈는 성령의 특이한 은사들을 많이 받아도 성령의 일반적인 감화의 열매인 마음속에 존재하는 은혜가 없다면 다른 이들 보다 더 큰 정죄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특권들을 누리고 있으면서 그 성령의 은혜의 열매가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거스리는 죄가 있다는 것이다.

고전 13장 8절에 의하면 신적인 사랑은 영원히 남을 것이나, 성령의 특이한 은사들은 시간이 지나면 폐하여질 것이다. 그러한 은사들은 수단이 가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목적이 이루어지면 그것들은 폐하여지는 것이지만, 신적인 사랑은 영원히 남는다. 에드워즈는 세부적으로 나누어서 설명함으로써 두 번째 설교를 마무리 짓는다.

1) 영혼 안에서 부어지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일으키는 구원하는 은혜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축복 중에서 가장 위대한 축복이다. 구원하는 은혜는 어떤 자연적인 천성과 재능보다 크고, 위대한 자연의 천성들보다 더 크다. 또한 일반적인 학식보다 큰 것이며, 외부적 부요나 영예, 황제나 왕이 되는 것 보다 큰 것이요. 솔로몬의 모든 부요함과 영예와 광대함과 그의 모든 영광을 다 합하여도 그 구원하시는 은혜에 미치지를 못한다. 심지어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 보다 영혼 속에 그리스도를 잉태하는 자가 더 복되다고 말씀하신다(눅11:27,28).

2) 특이한 은사를 받았다는 것이 구원하는 은혜를 받았다는 확실한 증표는 될 수 없다. 두 가지는 전혀 무관할 수 있다. 성령께서 꿈을 꾸게 하고 환상을 보게 하는 특이한 감화도 은혜에 대한 분명한 증거는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성령의 모든 열매들이 은혜의 증거들임을 생각하고 비중을 두어야 한다. 그 모든 열매들의 요약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든 은혜의 요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이든지 간에 자기들의 선한 성장 상태를 알 수 있는 오직 유일한 방식은 마음속에 이 신적 사랑의 역사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사랑이 없으면 당신이 좋아하는 은사들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런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3) 방언을 말하고 예언하는 은사를 가지지 않고도 그 은사들이 주어진 시대보다 훨씬 영광스러울 수 있음을 부인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만일 성령께서 그의 거룩하게 하시는 감화력을 대량으로 부어 주신다면 특이한 은사들을 주시지 않으면서 영광스러운 교회 시대가 되지 못할게 없다. 그래서 사도는 더 좋은 길이 있다고 열심을 다하여 역설한 것이다(고전12:31). 이 영광은 교회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이다. 이런 좋은 길을 따라서 교회가 충만해 지면 사랑과 인애가 온전히 왕 노릇을 하는 하늘에 있는 교회와 방불한데 가 있다.

VIII. 나가는말

이상에서 우리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부흥과 대각성과 관련하여 쓴 저서들의 역사적인 배경과 개략적인 내용, 그리고 이러한 저서들 속에서 개진된 성령의 사역에 대한 에드워즈의 견해들을 살펴보았다. 에드워즈는 개인적으로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말미암는 영적 각성을 어린 시절부터 평생에 걸쳐 자주 체험하였고, 목회 현장에서 두 차례나 성령의 특별한 부어주심으로 말미암는 영적 대각성 내지 부흥을 체험했다. 에드워즈는 성경과 청교도 신학에 대한 깊은 연구를 통하여서 올바른 성령론을 정립하고 개진했다. 그 결과 에드워즈는 참된 성령의 역사와 거짓된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는 성경적인 지침들을 예리하고 풍성하게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에드워즈는 칼빈과 청교도 신학자들에 못지않게 깊이 있는 신학자로 인식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공헌은 성령론에 있다고 평가되어진다. 로이드존스의 말처럼 그가 오늘날 적실성을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성령의 특별한 역사인 부흥에 대한 그의 건전한 신학 때문이다. 특히 한국 교회는 메마른 정통주의와 극단적인 성령운동의 양극단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경향이 농후하기 때문에 성경과 개혁신학의 바탕을 둔 균형잡힌 성령론 내지 부흥신학의 정립이 시급하다고 사료된다.

<b>에드워즈는 분명 이러한 상황에 처한 한국 교회에 적어도 한 사람의 중요한 길잡이 내지 멘토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은사와 능력 위주의 성령 운동에 반하여 에드워즈는 성령의 구원하시는 은혜와 중생한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시는 성화의 역사를 강조한다. 그의 성령론은 철저하게 구원론적이면서 윤리적인 특색을 가진다. 그리고 또한 그는 승귀하신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사역하는 영으로서 강조한다.</b> 성령은 승귀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들을 위해서 수행하신 구속의 사역의 결과 사신 복 그 자체라고 강조한다. 에드워즈는 오순절의 단회적 특징을 인정하지만, 시대마다 성령의 부어주심을 사모하고 기도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가장 풍성한 성령의 부어주심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영광스러운 교회 시대에 있을 것임을 그는 강조한다. 그는 성령의 부어주심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 혹은 그 방편인 선교와 관련지어서 말한다.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를 소망하는 성도들은 성령의 부어주심을 위해서 간절히 구해야 한다. 성령은 회심케 하는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며, 거룩하게 하는 영이시기 때문이다.

본 발제문은 발제자의 연구 시간 부족과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조야하고 난삽한 형태를 면치 못했다. 주로 그가 대각성과 관련하여 쓴 저서들의 일별에 집중하였을 뿐, 그의 성령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개진하는 일에는 소홀하였음을 스스로 자책한다. 이제 후에 이와 같은 중대한 과제를 수행하는 일에 힘써 보고자 한다. 앞서 대략 제시한 에드워즈의 저술들에 대한 철저하고 충분한 요약은 http://jonathanedwards.cyworld.com에서 제시한 바 있다.

● 참고문헌 ●

1. 에드워즈의 저서들

Stout, Harry(ed.),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New Haven and London:Yale University Press,1957ff(현재까지 총 23권 간행)

『사랑과 그 열매』,서문강 옮김, 서울:청교도신앙사,1999

『놀라운 회심 이야기』,정부홍 譯,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1997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는 없을까』,백금산 편역, 서울:부흥과 개혁사,1999,2003

『기도합주회』,정성욱 & 황혁기공역, 서울:부흥과개혁사,2000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양낙흥 옮김, 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2002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노병기 옮김, 서울:부흥과개혁사,2004

『신앙감정론』,정성욱역, 서울:부흥과개혁사,2005

『 조나단 에드워즈 대표설교 선집』,백금산역, 서울:부흥과개혁사,2005

2. 에드워즈에 관한 저서

Haykin, Michael, Jonathan Edwards: The Holy Spirit in Revival,New York:Evangelical

Press,2005

Nichols, Steven J. Jonathan Edwards: A Guide Tour of His Life and Th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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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lastuin, W. van, De Geest van opwekking. Een onderzoek naar de leer van de Heilige Geest in de opwekkingstheologie van Jonathan Edwards 1703-1758,Leiden:Uitgevrij Groen,2001

Warfield,B.B., "Edwards and New England Theology," in Studies in Theolgy,Grand Rapids: Baker, 2003

양낙흥,『체험과 부흥의 신학자-조나단 에드워즈』,서울:부흥과개혁사,2003

이상현,『조나단 에드워즈의 철학적 신학』,노영상,장경철공역,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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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rad Cherry 지음,『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주도홍 옮김,서울:이레서원,2001

조지 마즈던,『조나단 에드워즈 평전』,서울:부흥과개혁사,2006

존 파이퍼,『(하나님의 영광을 위한)하나님의 열심』,백금산 옮김,서울:부흥과개혁사,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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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성,『구프린스톤 신학 전통과 메이천의 신학』,총신대신대원강의안,n.d.

홍철,『미국 장로교회의 역사와 신학』,서울:CLC,2005

부록 1. 조나단 에드워즈 저작 전집(Yale edition)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eds. H. Stout et al,New Haven and London:Yale University Press,1957ff) 총 26권으로 간행 예정

1. Freedom of the Will

2. Religious Affections ; 『신앙 감정론』,정성욱역(서울:부흥과개혁사,2005)

3. Original Sin

4. The Great Awakening ; 『부흥론』,양낙흥역(서울:부흥과개혁사,2005)

5. Apocalyptic Writings

6. Scientific and Philosophical Writings

7. The Life of David Brainerd

8. Ethical Writings

9.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

10. Sermons and Discourses, 1720-1723

11. Typological Writings

12. Ecclesiastical Writings

13. The "Miscellanies" a-500

14. Sermons and Discourses 1723-1729

15. Notes on Scripture

16. Letters and Personal Writings

17. Sermons and Discourses, 1730-1733

18. The "Miscellanies": 501-832

19. Sermons and Discourses, 1734-1738

20. "The Miscellanies," 833-1152

21. Writings on the Trinity, Grace, and Faith

22. Sermons and Discourses, 1739-1742

23. The "Miscellanies," 1153-1360[이상의 책들은 이미 간행됨]

24. Blank Bible,2parts[2006년중 간행 예정]

25. Sermons and Discourses, 1742-1758

26. The Catalogues of Readings

부록 2.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 연대표

아래에 제시하는 간략한 연표는 예일대학교 부설 에드워즈 센터에서 제공한 학문적으로 신뢰할 만한 연대표(time line)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에드워즈의 생애를 다룬 세 권의 전기가 국내에 소개되어 있다: 양낙흥,『조나단 에드워즈』(서울:부흥과개혁사,2003); 이안 머레이,『조나단 에드워즈』(서울:이레서원,2006); 조지 마즈던,『조나단 에드워즈 평전』(서울:부흥과개혁사,2006).

1. 출생과 초기 성장(1702-1716)

1703년 10월 5일 미국 식민지 시대 코네티컷주의 동 윈저(East Windsor)에서 지역 교회 목사인 티모시 에드워즈와 에스더 스토다드 에드워즈사이에 태어남

* homeschooling으로 라틴어 배우다

1710년 1월 9일 사라 피에르퐁 뉴 헤이븐에서 출생

1712년(9세) 동 윈저 교회에서 영적 각성 일어남, 에드워즈도 종교적 열심을 가지다.

2. 예일대학재학, 임시 목회, 그리고 예일대 tutor(1716-1727)

1716년 9월(13세) 예일대(Yale College)에 입학하다

1720년 9월(18세) 예일대 최우수 졸업

1720년-22년(17세-19세) 예일대에서 신학 공부

1721년 여름 동 윈저에서 회심 체험

1722년 8월(19세)-23년 4월(20세) 뉴욕 장로교회의 목사로 6개월 섬김

1723년 5월 동 윈저로 돌아옴, 보스턴 방문

7월-8월 예일대 석사 Quaestio준비

9월 예일대에서 문학석사 학위 받음(M.A.). The Mind 저술 시작

11월 코네티컷주 볼턴에서 목회(-1724년 5월까지)

1724년 1월 Notes on Scripture 저술 시작(WY 15)

6월 예일대 tutor로 사역하기 시작(-1726년까지)

1725년 9월-11월(22세) 뉴 헤이븐에서 중병에 걸림, 동 윈저에서 투병

1726년 4월-7월 글래스턴베리(Glastonbury)에서 간헐적으로 설교하다

여름 뉴 헤이븐으로 돌아가다

8월 29일 노샘프턴 교회의 부목사로 청빙받음

9월(23세) 예일대 tutor직 사임

3. 노샘프턴 교회 목회시절(1727-1750)

1726년 10월 26일부터 노샘프턴 교회에서 시험설교 시작

11월 21일 노샘프턴 교회에서 부목사 청빙투표하다(연봉-100파운드)

1727년 2월 15일 노샘프턴 교회 부목사로 목사 안수받음

7월 28일 뉴 헤이븐 출신의 사라 피에르퐁(Sarah Pierpont)과 결혼하다

1728년(25세) 1월 Faith에 대해 저술 시작(WY 21)

8월 Images of Divine Things, Signs of Godliness 저술 시작

8월 25일 장녀 사라 출생

1729년(26세) 2월 외조부 스토다드 목사 소천, 에드워즈가 담임목사가 됨

1730년(27세) 1월 Discourse on the Trinity저술 시작(WY 21)

10월 Blank Bible 기록 시작(WY 24)

1731년(28세) 7월 8일 보스톤 제일교회에서 <인간의 신앙을 통해서 영광받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강론한 것을 후에 출간(에드워즈의 첫 출판물)

1734년(31세) 8월 <신적인 초자연적 빛 A Divine and Supernatural Light>설교하고,

후에 출간하다.

노샘프턴에서 대각성 시작(-1735세)

1735년 6월 1일 이모부 조셉 홀리 자살하다.

8월 Robert Breck의 스프링필드 목사 임직 반대

9월-10월 건강을 개선하기 위하여 뉴욕에 가다

11월 교회당 신축안 통과되다.

1736년 11월 6일 노샘프턴 부흥 보고서 완성

가을-겨울 Joseph Bellamy 에드워즈 집에 와서 목회실습

1737년(34세) 노샘프턴 대각성 보고서인 『놀라운 회심 이야기』출간

12월 25일 노샘프턴 신예배당 헌당예배

1738년(35세) 4월-10월 고전 13장 강해(1852년에 『사랑과 그 열매』로 출간)WE8

Discourses on Various Important Subjects 출간

1739년 3월-8월 『구속 사역의 역사 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연속 설교하 다(1774년 간행, WY 9)

1740년(37세) George Whitefield가 뉴잉글랜드 지역에 순회 설교하면서 1차 대각성 운동 시작(-1742년까지 지속됨)

10월 17일-19일 윗필드가 노샘프턴 교회에서 설교

12월 Aron Burr 목사의 요청으로 Personal Narrative 저술(WY 16)

1741년 7월 8일 Enfield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손아래 있는 죄인" 설교하다

8월-9월 노샘프턴 교회 대각성의 최절정기

9월 10일 예일대 졸업식에서 『성령의 사역 분별 방법 Distinguishing Marks』설교하고 증보하여 출간(WY 2)

12월 새무얼 홉킨스 목회 실습하기 위해 에드워즈 집에 옴(-1742년 3월말)

1742년 1월 19일-2월 4일 사라 피에르퐁 종교적 엑스터시 체험

3월 16일 노샘프턴 교회 언약 갱신

가을-겨울 『균형잡힌 부흥론Some Thoughts concerning the Present Revival of

Religion in New England』저술

<신앙감정>에 대한 연속설교 시작하다(-1743년).

1743년(40세) 3월 『균형잡힌 부흥론』 출간(WY 4)

1744년 3월 “나쁜 책(bad book)" 사건 시작

1746년(43세) 『신앙 감정론 Religious Affections』출간(WY 2)

1747년(44세) 10월『기도 합주회 An Humble Attempt』 출간(WY 4)

10월 9일 에드워즈의 집에서 인디언 선교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소천하다

1748년(45세) 12월 한 청년의 교회 회원가입 청원을 거절함으로 노샘프턴 교회에서 성찬 참여 자격 논쟁 시작되다

1749년(46세)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출간(WY 7)1

8월『성찬참여 자격에 관한 겸허한 질의(A Humble Inquiry)』출간(WY12)

12월 26일 에드워즈와 노샘프턴교회 사이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첫 council

1750년 2월 7일-8일 분쟁 해결 위한 두 번째 council

6월 19일 분쟁 해결하기 위한 마지막 council

6월 22일 공의회에서 에드워즈 목사 해임 결의(230대 23)

7월 1 일 에드워즈 노샘프턴 교회에서 고별설교를 하다

7월-11월 preaches on supply basis at Northampton

10월 스톡브리지에서 첫 설교

4. 스톡브리지 사역과 프린스톤대학 학장(1751-1757)

1751년 2월 22일 스톡브리지의 지역교회 목사겸 인디안 선교사로 청빙받고,

8월 8일에 공식적으로 시무 시작하고,

8월 18일에 가족들이 이주하다.

1752년 여름 Misrepresentations Corrected, and Truth Vindicated(WY 12)

1754년(51세) 12월『의지의 자유 Freedom of Will』 출간(WY 1)

1755년(52세) 『하나님의 창조 목적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과 『참된 덕의 본질 The Nature of True Virtue』저술(1765년초판)(WY 8)

1757년 5월 『원죄론 Original Sin』저술완성

9월 24일 뉴저지대학 학장이자 사위인 Aron Burr의 소천

9월 29일 사위 아론 버의 후임으로 뉴저지 대학 학장으로 청빙

1758년 1월 27일 아버지 티모시 에드워즈가 89세에 별세

2월 16일 뉴저지대학(=프린스톤 대학) 학장으로 집무시작

2월 23일에 천연두 예방접종 받은 후 부작용으로 3월 22일에 소천

4월 7일 딸 에스더 버 소천,

10월 2일 사라 에드워즈 이질로 필라델피아에서 소천

『원죄론 Original Sin』에드워즈 사후에 출간(WY 3)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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