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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비밀*

하나님아들 2012. 8. 31. 19:16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비밀

빌립보서 4:4-7 /하원식 목사

 

행복전도사로 자처하던 최윤희 씨가 “루프스”라는 질병을 견뎌내지 못한 채 “700가지 통증에 시달려본 분이라면 제 마음을 이해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라는 비극적인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질병의 고통을 참지 못해 남편과 함께 동반 자살했다는 소식은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갖고 살려는 많은 사람들에게 배신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모방 자살이 늘어날 것이 우려된다. “자살”하려는 사람들을 향해 생각을 바꾸면 “살자”가 된다며 희망을 말하던 사람이 스스로 자살했다는 소식은 힘들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 절망을 안겨주는 것이다.

 

최씨가 자살하던 날 팔다리 없는 세르비아계 이민 2세로 “희망전도사”로 불리 우는 호주인 닉 부이치치가 방한했다. 태어날 때부터 팔 다리가 없이 태어난 닉 부이치치는 청소년 시절 3번의 자살 시도를 하기도 했지만 목회자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과 사랑 아래 양육 받으며 현재는 30개 국 이상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있다. 자신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것이 소망이고 비전이라는 닉 부이치치 는 절망 가운데 찾은 행복의 열쇠, 육체적인 한계를 넘어 도전하는 삶 속에서 발견한 인생의 목적 등을 말하고 있다.

 

닉 부이치치는 '나는 내 인생을 사랑하고 오늘 이 하루를 살 수 있는 것이 너무 기쁘다' 며 '내일 일은 오직 주님만 아실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삶 속에서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살아가는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닉 부이치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고 답한 그는 “하나님 없인 이곳에 설 수 없었을 것이기에 지금 너무 행복하며 고난이 오더라도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게 하실 하나님이 계시기에 모든 것이 괜찮다”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일반인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고 스케이드 보드, 서핑 등 취미생활을 즐기며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생활하는 닉 부이치치는 “항상 자신을 격려해주시고 언제나 용기 있는 결단을 해주셨던 부모님의 사랑은 그 어떤 의사들도 할 수 없던 가장 큰 치료였다”고 말했다. “허그”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닉 부이치치는 이번 책의 제목을 “허그“로 정한 이유에 대해 “사람들은 내가 포옹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날 안아주는 것을 좋아하고 나 역시 그들을 안으며 전해지는 따뜻함과 사랑의 마음이 좋다' 며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나의 선천적인 장애,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 모든 것들을 품는다는 의미로 그렇게 지었다'고 설명했다. 그는'희망은 볼 수 없지만 믿음을 갖고 찾으면 되는 것이다. 이 나라와 다음세대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계획하심 하에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사시기 바란다'고 전했다.

 

그도 수 차례 자살을 시도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자신의 가치를 발견함으로써 세계를 돌며 희망을 전하는 희망 전도사가 되었다. "행복하십니까?"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네!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니오! 저는 지금 불행합니다."라고 대답할 사람도 적지 않아 보인다. 사람들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적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행복하게 살고자 그토록 노력하면서도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서울대 사회발전 연구소가 전국의 20살 이상 된 성인 1200명을 대상으로 한국인의 행복지수를 조사했다. 그 결과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평균 66.5점이었다. 여러분의 행복지수는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행복한 삶을 결정하는 요인으로는 약 70%가 건강을 꼽았다. 다음이 경제력(약11%), 사랑(6.5%), 신앙(5.2%), 안정된 직장(2.8%) 순 이었다. 여러분은 무엇이 행복한 삶을 결정하는 요인이라고 여기는가? 통계에서 보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보다 건강하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자기의 꿈을 성취하면 행복해진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것들이 행복의 조건들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행복의 절대 조건은 될 수 없다.

 

세계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느끼는 나라 사람들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소득이 5만 불이 넘는 스위스나 스웨덴 같은 나라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다.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인 방글라데시였다. 1인당 국민소득 200달러요, 인구 밀도는 세계 1위다. 문맹률이 90%가 넘고, 매년 홍수로 국토의 80%이상이 물에 잠긴다. 천연자연도 없고, 교육 시설이나 의료시설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사회는 양극화 되어있고, 뇌물과 부정부패가 만연한 나라다.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할 직장도 없고, 공부할 학교도 없고, 아파도 찾아갈 병원조차 없는 곳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다.

 

선교사님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코를 막고 30분간 애를 써야 버틸 수 있는 곳에 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너무 해맑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가난을 가난인 줄 모르고, 아픔을 아픔인 줄 모르고 사는 그들의 모습이 가슴 아프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 너무 행복하다는 것이다. 행복지수가 높은 대부분의 나라는 공통적으로 3세계에 속한 후진국들이다. 물론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과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다를 수 있다.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 진정 오늘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느냐는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결코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나라는 심리적으로 더 불안함을 느끼고 있다. 자살률이 오히려 높다. 행복은 경제적 조건이나 환경과 비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전도서를 쓴 솔로몬은 인생의 부귀영화를 모두 누린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내린 인생의 결론은 무엇인가? 전도서 1장 2-3절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스코틀랜드의 "제이니" 라는 학자는 항상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고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았다. 사람들은 그가 매일 천국을 다녀오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는 말한다. "기쁨이라는 것은 깃발과 같습니다. 성에 깃발이 꽂혀 있다는 것은 그 성에 왕이 머물러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기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 마음속에 만 왕의 왕이신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주님이 계시기에 기쁩니다."

 

우리 마음에 기쁨이 가득하고, 얼굴에 웃음이 있다는 것은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다. 여러분의 모습은 어떤가? 기쁨에 차 있는 모습인가요? 가득 차면 넘치는데 마음에 기쁨이 가득 차 있으면 표정에서 밝은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그것과 다르다. 나에게 임한 고통은 주님이 내게 주신 십자가로 받아들일 때 그 고통을 참을 수 있고, 비록 육체는 병들고 고통스러우나 자유로운 영혼을 노래할 수 있을 때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이다.

 

기독교를 가리켜 소위 '기쁨의 종교'라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의 소원이 성취되었을 때뿐만 아니라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도 기뻐할 수 있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라는 의미다. 더 나아가 이 말은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 상관없이 항상 기뻐해야 하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라는 것이다.

 

우리가 빌립보서를 옥중서신이라고 한다. 이 말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들을 권면하기 위해 감옥 속에서 작성한 편지라는 것이다. 즉, 이 말은 도저히 감사할 수 없고, 기뻐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있던 바울이지만, 바울 자신은 지금 자신의 처지, 자신의 형편이 기쁨의 조건이 아니라 자신을 매고 있는 감옥의 형편보다도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기쁨의 이유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자신이 주안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삶의 가치가 바뀌어지고, 삶의 목적이 달라지고, 삶의 이유가 새로워진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안에서 바라보면, 삶의 처지와 상관없이, 삶의 조건과 상관없이, 삶의 모습과 상관없이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는 모습으로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우며 진정한 기쁨으로 아름다운 믿음을 고백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 자신의 신앙의 고백이며,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신앙의 결단인 것이다. 옥중에 있는 사도 바울 로서는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쁨이 충만했던 것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쁨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진정한 평강을 얻는 길을 가르쳐 주셨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세 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1. 주안에서 기뻐하라 하셨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산다는 것 자체가 고생이요 힘든 들이, 많은 고달픈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기쁨보다는 어려움과 근심이 더 많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사는 우리는 기뻐할 처지가 못 된다. 그럼에도 성경은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 첫 번째 단계이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기뻐하되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한계를 정해 놓았다. 주안에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바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와 함께 해주시고 또 우리의 삶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고 또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 되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쁨의 조건을 세상에서 찾지 말고 주안에서 찾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신앙의 참 기쁨은 주안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을 찬양할 때만 참 신앙의 기쁨을 체험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자체가 기쁨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그 보좌 우편에는 즐거움이 넘친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안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가지면 그 기쁨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사느냐에 따라 마음속에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환경을 바라보고 불안과 공포에 빠지면 결코 우리 마음이 평안할 수 없다. 그러나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면 우리 마음에 평안이 넘쳐난다. 우리가 주안에서 기쁜 생각을 하고 기쁜 말을 하고 기쁜 찬송을 부르면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 마음 속에 충만하게 된다. 마음의 평안이라는 것은 기쁨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 기쁨의 문을 열어 놓아야 평안이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주안에서 기쁨은 무엇인가?

 

1] 구원 얻은 기쁨이다.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기쁨이다. 영혼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절대적인 기쁨이다. 이 기쁨이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게 한다. 우리가 아주 큰 기쁨을 느끼게 될 때 시시하고 작은 걱정들은 다 사라진다. 기쁠 때 건강하고, 창조의 힘이 있고, 능력이, 화평이, 생의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 기쁨이 떠나면 아무 의미도 없다. 절대적인 기쁨이 없을 때에는 돈을 벌어도 걱정이요 출세해도 불안하다. 사람을 사귀어도 고독하고 괴로울 뿐이다.

 

2] 주께서 나와 동행하신다는 것을 아는 기쁨이다.

이것은 주안에서, 성령 안에서, 또는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한 교제를 뜻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 하나님의 일꾼 된 영광, 그리스도와의 동행, 그리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실체로 체험하는 기쁨이다.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계신다. 나를 알고 사랑하고 동행하신다 하는 것을 아는 기쁨이다.

 

3]약속된 미래에 대한 기쁨이다.

이것은 소망 적, 미래 지향적, 종말론적인 것이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다르다. 우리가 하늘나라 간다는 것이 보장되어 있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솔직히 말하면 천당 갈 수 없을 것 같기에 걱정이다. 천당이 있는 듯, 없는 듯 분명히 믿어지지 않아서 걱정이다. 천당이 분명히 있고, 내가 틀림없이 갈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이 정도의 고생쯤이야 좀 하면 어떤가? 이 세상에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우리에게 슬픔이나 문제가 많은 것 같아도 이것을 종말론적인 의미로 볼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일 문제가 된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의 미래를 보지 못하는 영적 안목의 결여 때문이다. 그러므로 약속된 미래에 대한 기쁨 이것이 주 안에서의 기쁨이다. 세상에는 슬퍼할 만한 일이 많고 우울해 할 만한 일들이 많다. 그런데 슬퍼할 만 한 일을 두고 계속 슬퍼하고 우울해 할 만한 일이 생겨서 계속 우울해 하면 절대로 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다. 기뻐해야 한다. 기뻐해야 한다. 우울한 생각을 떨쳐 버려야 한다. 강하고 담대해야 한다. 주님이 함께 하시고 주님이 인정하시는 날이 있을 것이다. 몇 번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이 말씀을 되새기고 자신의 그 마음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2.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라 했다.

5절을 보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했다. '관용'이라는 것은 남에게 아량을 베푸는 것이고 심지어는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까지 너그럽게 용납하는 그런 마음의 자세를 말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미 많은 관용을 얻은 사람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잘못할 때마다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용서하시고 참아주는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했듯이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 모든 허물을 덮으셨다. 오늘 우리는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우리도 주님을 본 받아야지요.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야 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살아가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남들이 좀 잘못해도 너그럽게 봐 줘야 하고 부족한 것이 있어도 너그럽게 봐 줄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기주의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라는 색안경을 끼고 살기 때문에 자기에게 맞지 않는 사람을 배척한다. 그러므로 그 마음에 골이 패이고 깊은 갈등을 가지게 됨으로 그 마음에 평화가 있을 수 없다. 사람은 자기 혼자 사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라는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라는 관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마음에 평안에는 다섯 가지 적이 있다고 한다.

첫째의 적은 탐욕이다. 즉 소유욕이다. 탐욕이 마음의 평안을 앗아간다. 둘째는 야욕이다. 성취 욕이다. 지나친 욕망이 마음의 평안을 빼앗아 간다. 셋째는 질투다. 내가 넉넉함에도 남을 시기하고 질투한다. 질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영원히 평안할 수 없다. 넷째는 분노다.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 몰라서 후회가 많다. 다섯째는 교만이다. 자기의 자기 됨을 겸손히 인정하지 못하고 언제나 교만에 산다. 그래서 마음에 평안이 없다.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부딪치기를 좋아하기에 다른 사람에게 미움과 질시를 당하는데도 자기를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남을 관용하지 않는다. 그러면 관용하는 마음이란 어떤 마음인가? 관용하는 마음이란 용서하는 마음이다. 너그러운 마음이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이해 타산이 많아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해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관용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절대 평안이 깃들 수 없다. 성경은 "마음에 평화를 얻기 위해서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관용의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이해해 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3. 기도하라고 하셨다.

6절을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개인이나 가정이나 자녀나 부부나 직장이나 사회 생활 등 우리가 사는 곳은 어디든지 문제가 있기 마련이고, 그런 문제들로 인하여 염려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성경은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염려가 있는데 어떻게 염려를 안 할 수가 있는가? 그것은 대신 염려를 맡아줄 사람이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편히 쉬라는 말은 모든 짐을,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는 뜻이다.

 

우리는 기도로 우리의 염려와 근심의 짐을 주께 맡길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맡기지를 않는다. 하나님이 안 맡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맡기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게 맡겨라, 내가 네 문제를 해결해 주마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우리의 불 신앙 때문에 오히려 손해를 볼 것 같아서 맡기지 않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가진 특권가운데 하나이고 또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무슨 일이 있든지 기도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지 모른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가만히 보니까 기도하되 그냥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아니다. 어떻게 기도하라고 했는가?

 

1)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다.  2) 감사함으로 기도하라고 했다.

기도하면서도 염려하고 걱정하고, 이게 어떻게 될 건가? 전전긍긍하면서 기도하면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기도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분명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그리고 기도는 하지만 불평하는 것, 기도는 하지만 원망하는 것.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다.

 

결  론

참으로 우리는 기쁨을 잃어버리기 쉬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 생활고와 질병과 여러 가지 근심걱정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잃어버리기 쉽지만,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왜 기쁨을 잃어버리게 되는가?

첫째는 죄 때문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죄를 범하면 기쁨을 잃어버린다. 죄는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죄는 하나님과 담을 쌓게 하며, 축복을 가로막는다. 죄는 우리의 마음을 지옥으로 만든다. 이와 같이 죄는 기쁨을 빼앗아 가기 때문에 우리가 기쁨을 회복하려면 철저하게 죄를 회개해야 한다. 죄 사함을 받은 확신이 생길 때까지, 성령이 임하실 때까지 회개해야 한다.

 

두 번째 이유는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음이 약해지면 증상이 나타나는데,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부정적인 말을 한다. 조금만 어려움을 당해도 근심걱정을 많이 하게 된다. 그래서 기쁨을 잃어버린다. 이와 같이 믿음이 약해지면 기쁨을 잃기 때문에 기쁨을 회복하려면 믿음 무장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믿음, 긍정적인 믿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믿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왜 약해지는 줄 아는가? 기도생활을 게으르게 하기 때문에 믿음이 약해진다. 교회가 기도의 열기가 식어지면 믿음이 약해진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기도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믿음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약해져서 자꾸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부정적인 말을 하고, 세상 걱정하며 살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 걱정하면서 살게 된다.

 

세 번째 이유는 감사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 항상 감사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넘치지만, 감사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사라진다는 것을 아셔야 한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를 기뻐하신다. 감사하는 자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신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자에게는 큰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는 감옥에 갇혀서 언제 순교할지 모르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았다. 그는 편지로 성도들을 권면하기를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 수 있는가? 그것은 주님을 만난 체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은혜 충만한 가운데 살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구원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항상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다. 주님을 만난 체험이 있는 사람, 은혜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같이 뜨겁기 때문에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어둡고 축축한 감옥에서 항상 기뻐하라 말할 수 있는 바울의 확신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환경과 상황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를 감싸고 있다. 죽으면 그리스도를 뵙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할 것이니 좋다는 담대함과 확신이 있다. 그러나 내가 감옥을 나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면 여러분의 믿음 성장에 유익하고 여러분에게 기쁨을 선물할 수 있으니 죽지 않고 살아 나가는 것도 좋다는 기대와 소망이 있다.

 

내 안에 계신 분이 그리스도시니 내가 죽든지 살든지 나에게는 모두 좋다는 바울의 적극적인 신앙고백입니다. 바울의 기쁨과 평안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이 기쁨은 바울이 억지로 꾸며내 보이는 기쁨이 아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하늘의 기쁨이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찬송가469장) 하고 부르는 찬송처럼 내가 노력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은혜로 주어진 기쁨이다.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많지 않지만 허탄한데 마음을 두지 아니하고 내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를 위해 지금도 간구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신뢰함으로 얻는 선물이다. 기쁨의 근원이 내 마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래서 항상 기뻐할 수 있다. 이 기쁨과 평강이 여러분의 것이기 바란다.ⓗ

 
예수가좋다오/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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