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지신 구속의 십자가
골1:13,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앞날을 알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앞날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미래를 안다고 할 때 그 길을 그대로 감수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앞날에 닥쳐올 죽음을 알고도 그 길을 택했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마26:38)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길이 인류 구원의 길이며 생명의 길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1.예언된 십자가 이었습니다.(사53:3절) 1)하나님의 예정된 섭리입니다. 성경은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하여 진행된 사건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혹자는 십자가 사건을 소영웅주의에 의한 도발적인 사건으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수치를 당하고 죽음에 직면해서 소영웅주의 적 의지로 자신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26:53)라고 반문하셨습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섭리를 인식하고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간구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마26:24)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행동은 인류를 위한 희생,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2)그리스도의 고난이 예고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의 고난을 미리 작정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롬4:25). "우리가 아직 연역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5:6)라고 했습니다.
남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 나의 죄를 위하여 수치와 모욕, 경멸과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제자들에게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막9:12)고 상기시켰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요 사랑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2.성취된 십자가입니다.(마27:23-31절) 1)세상 죄를 지십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의 구세주 되심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찍이 이사야는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53:12)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예고된 십자가는 주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그 십자가는 물론 주님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함으로 인류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성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율법에 얽매인 사람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2)인류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죄악 가운데 인류가 멸망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자 자기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바울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행4:12). 주님은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습니다.(갈1:4). "십자가 사건은 인류의 구원을 완성한 하나님의 구속 섭리의 완성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사역이 실패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주님은 친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롬10: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3.체험된 십자가입니다.(갈2:20절) 1)자기를 부인합니다. 우리에게는 각자 자기에게 부여된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주장하고 자신의 욕심과 이익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주장하면 바른 목표를 향하여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고 하였습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성도에게 부여된 삶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고 했습니다.
그러한 삶을 영위할 때 우리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구속의 삶을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소망으로 인내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여러 형태의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그 고난을 피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성도들이라고 고난에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은 불신자들이 겪는 고난과는 다릅니다.
불신자들에게는 소망이 없는 고난이겠지만 우리에게는 기쁨과 영광을 위한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고 했습니다.
또한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4:13)고 했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고난에 대하여 좌절하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 소망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체험하게 되며 아울러 주님의 약속의 자리에 참여케 될 것입니다.
4.말씀을 정리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십자가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우리에게 자신을 위하여 살지 말고 오직 주님을 위하여 살라는 권고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인류를 구속하고 생명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주님께서 자신을 버린 삶이었기에 그분을 믿음으로 구원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을 다른 사람도 받을 수 있도록 사순절 기간을 특별 전도의 기간을 삼아 교회를 배가 시키는데 귀하게 쓰임 받는 전도의 도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 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주님의 구속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저희들이 부족하지만 전도의 은사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에 앞장서는 전도 꾼이 되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요11:25-27
설교내용
예수님이 부활하신 부활주일 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아니하리라.
주님은 생전에 죽었다가 부활하신다고 자신에 대하여 에언을 하신대로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을 하셨습니다.
그 분이 부활하심은 죄가 없다는 증거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 분의 부활의 의미는...
첫째: 예수님의 부활은 성도의 부활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부활을 할 것입니다.
살전 4:13-17의 말씀에는 믿고 죽은 성도들은 낙원에서 부활을 할 것이고 살아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자들은 홀연히 변화 된 몸으로 부활을 할 것입니다.
그후 새하늘과 새땅인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들에게 인생 삶의 순간순간에 부활의 능력으로 삶을 개척하고 어려움도 새롭게 창조하며 살아갈 힘을 공급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 분이 곧 성령님 이십니다.
로마서8:9-11절에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님이 우리 속에서 변화를 일으킨다고 기록합니다.
부활의생명이 없는 사람들은 좌절하고 낙담이 되면 세상의 방법인 술이나 마약을 찾고 자포자기 하지만 부활의 생명이 있는 우리는 새롭게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은 나를 새롭게 하게 하고 또 타인을 새롭게 하며 타인을 일으켜 세우는 원동력을 공급하여 이웃을 섬기며 사는 성도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된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부활의 생명은 타인에게도 생명이 되어야 하며 이웃에게 사랑을 공급하는 힘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특히 남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 보다도 처지가 어렵거나 부족해 보여도.... 그 영혼은 하나님의 보시는 관점에서는.... 결코 부족한 영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마태복음18:10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18:10/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 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남을 업신여기기 전에 내게 있는 부활의 생명으로 섬겨주세요!
내가 하는 말 한마디가 상대방에게 용기와 힘을 주도록 조심을 해야 합니다.
이 부활주일에 부활의 생명을 받은 우리는 모두 새롭게 변화를 받읍시다.
다 이루었다!
마태복음 27장 62절~28장 6절,
요한복음 19장 30절
마27장은 <십자가장>이라면, 마28장은 <부활장>입니다.
마27장은 <고난의 장>이라면, 28장은 <영광의 장>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27장을 통해서 예수님이 당하신 그 끔직한 십자가 고난의 과정을 심도 있게 상고해 보았습니다. 이제 드디어 6년의 긴 강해를 마무리하는 28장으로 들어섰습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장인 28장으로 들어섰다고 하는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28장으로 넘어간 진짜 기쁜 이유는 그것이 아닙니다. 28장은 부활장이요 영광의 장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28장은 예수님의 부활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마태복음이 27장으로 끝나고 말았다면 구원은 없습니다.
천국도 없습니다.
죄사함도 없습니다.
교회도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마태복음은 28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28장에는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이 생생하게 증언되어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서른 세 살의 나이에 그냥 비참하게 죽으시고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서른 세 살이면 얼마나 아까운 나이입니까? 그렇다고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못난 제자 가룟유다에게 배신당하시고, 악랄하고 잔인 무도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덜컥 세상을 끝냈다면 이런 억울한 데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만일 그러했다면 이런 하나님을 믿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어디 계신 거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럴 수가 있어!" 분해서 하나님 믿을 사람 없을 것입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기고만장하고 제사장들은 우쭐대면서 의인인양 벌건 세상을 네 활개펴며 다니고, 예수님의 시신은 무덤에서 푹푹 썩어 없어 졌다면... 이런 무능력한 하나님을 도대체 누가 믿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에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의 위선의 탈을 확- 벗기고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당시 교권주의자들의 못되고 악랄하고 치졸한 음모를 만천하에 폭로하시면서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원수들의 콧대는 납작해졌습니다.
당당했던 악랄한 무리들은 쥐구멍을 찾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온 인류의 숙원이었던 죄악의 문제를 정복하시고 마침내 부활하셨습니다.
온 인류를 협박하던 폭군인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28장에서 이러한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관념이 아니라, 상상이 아니라, 회고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 확 부딪쳐오는 실제적 사건으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할 때 부활하신 주님이 내 죄에 있어서도, 내 죽음에 있어서도, 여전히 부활의 주님으로 역사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오늘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류 역사상 수백 수천 억의 사람들이 왔다 갔습니다. 그리고 그 중 인류에게 공헌을 끼친 사람은 많고 많습니다만 몇 사람의 예를 들면,
창공을 정복하는데 공헌한 라이트형제가 있고,
인간을 어둠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도록 전기를 발견한 에디슨도 있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도리를 가르쳐 준 공자가 있고,
참선을 통하여 인간의 108번뇌에서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준 석가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고 안 되고는 별문제로 하고... 어째든 나름대로 인간사에 공헌을 한 분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인류에게 무슨 영향을 끼쳤으며,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라이트 형제처럼 비행기를 만드신 것도 아니요, 에디슨처럼 전기를 발견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도 주지 못하는 것을, 공자가 주지 못한 것을, 석가가 주지 못한 것을 주셨으니...
죽음을 정복하고 영생을 주셨습니다.
죄를 정복하고 영혼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사단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인간의 끝없는 절망을 해결하고 영원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울음을 해결하고 웃음을 주셨습니다.
갈등을 정복하고 평화와 찬송을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야말로 인간의 문제를 다 이루셨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요19장의 표현처럼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죽- 나열했지만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다 이루었다!"는 말은 다음 두 가지의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1. "다 끝났다"는 뜻입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다 끝났다!"
"염려하지 말아라. 다 끝났다!"
"불안해하지 말아라. 다 끝났다!"는 말입니다.
그럼 무엇이 끝났다는 말입니까?
첫째, "우리 구원을 위한 율법이 다 끝났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갈3:23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믿음이 오기 전에(믿음으로 구원받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담 이후부터 예수님 때까지를 율법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대에는 해라 말아라. 가라 와라. 앉아라 서라... 안 하면 벌받습니다. 그러니 억지로라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이 시대에는 철저한 법과 법의 관계만 있을 뿐입니다. 어기면 벌이 따르고, 그래서 억지로라도 지키려했고, 정말로 살벌한 시대였습니다. 이 율법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보려고 한 것이 율법시대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제는 내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 지켜주셨기에 나는 예수 안에만 있으면 율법을 다 지킨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지키려면 죽어라고 지켜도 겨우 몇 개였는데,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 있으니 예수님이 지킨 모든 율법이 다 내가 지킨 것이 되어 의인이 되더라 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최소한 "양심적으로 살아야지!" "도덕적으로 살아야지!" "계명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야지!" 말 한마디 해놓고도 따지고, 행동하나 해놓고도 따지고... 양심과 도덕적으로만 살아보려고만 합니다. 그러니 힘듭니다. 피곤합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슴에 꽉 부딪쳐 옵니다. 이것은 사건입니다. 내 심령 속에 구주 예수님이 확 부딪쳐 옵니다. 그러니 내 속에 다른 힘이 넘칩니다. 다른 생명이 운동합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달라집니다. 양심수준? 도덕수준은 저 아래입니다. 이제는 그 은혜에 감격하여 생명의 법칙대로 살다보니 선악의 법칙은 이제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이~구~ 율법대로 살아야지!" "법대로 살아야지!" 이렇게 벌벌 떨던 유치한 생활은 끝납니다. "오 주님!" 은혜에 감격되어, 사랑에 감격되어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은혜의 빛 아래 새 출발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의 법 아래 새 출발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럴 때 비로소 죽도록 충성이 나오는 것이요,
이럴 때 범사에 감사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주일을 지키는 것은 억지가 아닙니다.
전화해서 나오라 나오라 귀찮게 안 해도 기쁨으로 나와집니다. 교회가 가고 싶어 미칩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것도 이제는 억지가 아닙니다. 십이조는 없나 성경을 뒤적이게 됩니다.
교회에서 충성하는 것도 억지가 아닙니다. 전에는 할 일도 안하고, 해도 벌받을까봐, 축복 못 받을까봐 했는데 이제는 내가 더 할 일 없나 찾게 됩니다.
억지는 끝났습니다.
의무는 끝났습니다.
율법은 끝났습니다.
오직 감격, 이 감격으로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까 예로 들었던 이 종이, 이제 밖에 나가서 하는 일이 전과 같겠습니까? 전에는 안 하면 혼나고 벌받았기에 했었다면, 이제는 주인이, 아니 아버지가 시킨 일 자체가 즐겁고 기쁠 뿐입니다. 아버지가 시킨 양보다 더 많이 일할 겁니다. 그것도 기쁜 마음으로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은혜의 관계를 경험한 후에야 주일성수도 즐거운 것이고, 십일조도 기쁜 것이고 ,충성 봉사도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억지가 아닙니다. 법은 끝났습니다. 의무감도 끝났습니다. 율법도 끝났습니다. 기쁨과 즐거움만 있을 뿐입니다. 오직 감격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다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둘째, "죄가 끝났다!"는 말입니다.
롬8:1-4을 읽어보면 죄가 끝났다는 말입니다. 죄와 굿바이 시켜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죄는 법이 있어야만 존재합니다. 법이 없으면 죄를 규정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법만이 정죄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법이 있으면 죄도 있고 법이 없으면 죄도 없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것이 왜 죄입니까? 따먹지 말라고 하는 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법이 없어졌습니다. 그렇기에 죄도 없어졌습니다. 법이 없으면 죄를 규정할 근거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인간을 정죄하던 율법은 끝났습니다. 그러니까 죄도 끝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양심의 가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먹어도 해결 할 수 없고, 입어도 해결할 수 없는 죄책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입니다. 신사복 입고 멋있게 길거리를 나섰건만 그 속에는 죄책감에 억눌려 있습니다. 최신 유행으로 아름답게 장식한 숙녀도 아무 것도 든 것도 없고, 머리에 인 것도 없고, 등에 짊어진 것도 없건만은 뭔가에 억눌리며 사는 까닭은 양심의 가책이라고 하는 죄책감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것을 없애보려고 하루에 3번씩 참선도 해봅니다만 소용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수신제가를 해봅니다만 소용없습니다.
목탁도 닳아 뚫어질 정도로 두드려 보았습니다만 몽땅 다 허사입니다.
금욕생활도 해보고, 고행도 해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결심도 해보고, 혈서도 써보고, 맹세도 해보지만... 여전히 죄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인류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부터 벗어나려고 수 없는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바울도 이 고민했었습니다. 그래서 절구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고 탄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하기만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분의 못 박힌 손을 곡 붙잡고 고백하기만 하면 죄는 끝납니다. 죄는 봄기운에 눈 녹듯이 스스로 녹아질 것입니다.
심판의 하나님은 나를 보고 싱긋이 웃으십니다.
진노하시던 하나님은 날 보시고 괜찮다. 이제 죄가 끝났다. 위로해주십니다.
죄에 대한 해방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할 때 내 영혼 깊은 곳에서 행복감이 솟아오르게 되고,
이 행복감이 머리와 가슴에 가득 차게 됩니다.
이 행복감이 내 영혼에 가득 찰 때 죄책감 같은 것은 사라집니다.
형벌의식은 사라집니다.
심지어 죄지을 욕심까지 사라지게 됩니다.
전에는 불안해하면서도 죄를 지었지만 이제는 죄라면 몸서리가 쳐지고 지긋지긋해 집니다.
이것이 바로 죄는 끝났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은혜 안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 행복해질 때에 "양심아, 네가 뭐냐?" "십계명아, 네가 뭐냐?" "모세야, 네가 뭐냐?" "마귀야, 네가 뭐냐?" "우리 주님이 괜찮다고 하셨다!" 이 행복감으로 죄를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속에는 여전히 죄가 고개를 들고 일어나겠죠.
시기심이 일어나겠죠.
때로는 교만한 마음이 일어날 수 있겠죠.
때로는 욕심이 일어날 수 있겠죠.
그러나 이제는 전과 다릅니다. 전에는 싫다고 하면서도 헛손질하면서 무참히 패했지만 이제는 능히 죄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죄라면 이제 구질구질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다는 이 행복감이 이를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죄는 끝났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죄는 끝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인 것입니다.
셋째, "심판이 끝났다"는 말입니다.
요3:16-18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사람은 한번 나면 두 번 죽고, 두 번 나면 한번 죽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육신으로만 나면 육신도 죽고 나중에 영도 죽습니다만 두 번 나면, 즉 육신의 출생과 거듭남의 경험이 있으면 육신 한번 죽지만 영은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번 나면 두 번 죽고 두 번 나면 한번 죽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육체의 죽음과 지옥이라는 영원한 죽음, 두 번 죽지만 거듭난 사람에게는 지옥 사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은 심판이 이미 끝났습니다. 왜냐하면 죄 때문에 심판이 있는 것인데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법이 있어야 죄가 있고, 죄가 있어야 심판이 있습니다. 그런데 법이 해결됐으니 죄가 해결되고, 죄가 해결됐으니 당연히 심판은 없습니다. 과거의 죄든 미래의 죄든 모든 죄는 십자가의 보혈로 씻김 받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은 심판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를 마음대로 지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다음 말씀을 꼭 기억하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이렇게 "다 이루었다!"는 말속에서는 율법과 죄와 심판이 끝났다는 말입니다.
2. "다 됐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하다가 하다가 안되던 것, 공자가 하다가 실패하고 안된 것, 석가가 하다 하다 실패하고 안된 것, 성인 현자들이 하다 하다 안된 것... 그것이 다 됐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구원이 다 됐다"는 말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함을 말합니다. 구원받은 자를 신자(信者)라고 부르는데 비록 인간은 못돼먹었다 할지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이기에 그 사람은 구원받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불신자(不信者)라고 부르는데 그가 비록 성인군자와 같더라도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이기에 이 사람에게는 구원 못 받은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선하냐 악하냐이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생명과 죽음의 차이입니다.
윤리의 차이가 아닙니다.
도덕의 차이가 아닙니다.
종교 훈련의 차이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아무 못돼먹은 왕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 아버지 왕은 아주 인자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 왕자는 아무 못돼먹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 같지 않다고 왕자가 아닙니까? 왕이 李씨면 왕자도 李씨오, 왕이 金씨면 왕자도 金씨입니다. 이는 생명, 혈통의 문제이지 행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느냐의 문제이지 하나님의 자녀다우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전혀 왕자답지 않아도 왕자일 수 있듯이 전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아도 예수님 영접했으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염소생명 다르고 양 생명이 다릅니다. 제아무리 착한 염소라 할지라도 염소는 염소입니다. 아무리 못된 양이라도 양은 양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양 생명을 가졌으면 양다운 행동을 하게 되 있습니다. 염소생명 가졌으면 염소다운 행동이 나오게 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생명 가진 자들의 삶의 모습은 어떠해야 합니까? 신자란 예수 생명을 나누어 가진 자들인즉, 따라서 비록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그 속에는 예수 냄새가 나야하고 예수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도 바울도 처음에는 형식적인 종교인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후, 예수님처럼 되고자 했습니다. 나중에는 분명히 예수님은 아니건만 저들이 가는 곳마다 예수 냄새를 풍기며 마치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예수를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 인격이 예수 성품 닮아갑니다.
그 인격이 예수 성품 닮아갑니다.
가치 판단의 기준이 예수화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진들이 어떻게 그리 위대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들은 특별하게 태어난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분들입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예수의 생명을 <많이> 가졌다는 사실뿐입니다.
예수의 생명 공급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이 다를 뿐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그들을 그렇게 변화시켜 놓은 것입니다.
베드로를 그렇게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어거스틴을 그렇게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성 다미엔을 그렇게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리빙스톤을 그렇게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슈바이처를 그렇게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 앉은 우리, 절망할 것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부합되면 생명이 달라져 앞서간 신앙인과 같은 걸음을 우리도 걸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요구는 "말씀을 많이 행하라"가 아니요 "내 생명을 많이 소유하라" 입니다.
말씀을 많이 안다고 행해지던가요?
결심으로 행해지던 가요?
금식과 철야로 행해지던 가요?
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 생명 소유했을 때 내 안에 계신 그분의 생명만이 말씀을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생명을 가진 만큼 말씀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기쁨으로 말입니다.
겁장이 베드로가 제2의 예수가 된 것도, 고집장이 사울이 바울 된 것도... 예수의 생명을 충만이 충만이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예수의 생명이 슈바이처를, 어거스틴을, 무디를, 웨슬레를, 김익두를... 그렇게 변화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만이 내 생명을 바꾸어 놓습니다. 이 변화의 축복이 28장에 들어선 여러분께 충만히 임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고속도로 공사가 다 됐다"는 말입니다.
"길 다 닦아놓았으니 서울 가거라." 그 말입니다.
하나님 만날 수 있는 고속도로 다 됐다는 것입니다.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하나님께 가는 길을 다 뚫어 놓았으니 그 길로 달려가라"는 말입니다.
실제적으로 구약시대 내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성전 휘장이 예수님 십자가 돌아가실 때 어떻게 됐습니까? 쫙~~~찢어졌습니다. 하나님께 가는 고속도로가 그 동안 죄 때문에 막혀있었는데, 그래서 휘장이 쳐저 있었는데 이제 죄 덩어리가 치워지니 이제는 무제한으로 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누구라도 이 아우토반을 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창녀야 이 길 달려가거라.
강도야 이 길 달려가거라.
살인범아 이 길 달려가거라.
횡령범도 이 길 달려가거라.
그저 이 길을 달리기만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누구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절대자를 만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현상인데 이것이 잘 나타날 때에는 종교로, 잘못 나타날 때에는 미신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사람은 참 절대자를 만나는 길을 모릅니다. 그러니 엉뚱한데 가서 만나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그러니 점점 비참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바로 하나님 만나는 고속도로로 연결되니 이 예수님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천국 건설이 다 됐다"는 말입니다.
벧전1:3-4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천국 다 됐다는 말입니다. 천국은 이미 다 됐으니 너희들이 만들려고 애쓸 필요 없다. 그저 너희들은 나하고만 교제해라. 그러면 천국은 땅 집고 헤엄치기요, 누워서 떡먹기다. 그런 말입니다.
저는 가끔 주안에서 먼저 가신 분들을 생각해 봅니다. 그분들의 육신이 지금쯤 무덤 속에 있을 텐데 그 시신을 생각해보면 구더기가 들끓을 것이요, 그 몸은 썩어 진물이 질질 나서 문들어 졌을 것을 생각하니 끔찍합니다. 그러나 고개를 위로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먼저 가신 분이 나를 보고 싱긋 웃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나 천국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하고...
그렇습니다. 이 땅에 있는 육신은 비록 썩어 문들어지고 냄새가 나지만 천국의 영혼은 영원히 쇠하지도 않고 썩지도 않습니다. 이 천국, 썩지도 아니하고 쇠하지도 아니할 그 천국을 누가 만들어 주셨습니까? 십자가 위에서 "다 됐다!"고 선언하신 주님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단지 만드신 천국에서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천국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27-28장) "다 이루었다!"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됩니다.
율법은 끝났습니다. 우리들은 은혜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다시는 율법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죄는 끝났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행복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죄 때문에 벌벌 떨지 마십시오.
심판은 끝났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사십시오.
그리고 다 됐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여러분께 심어 졌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충만이 충만이 채우십시오.
고속도로가 끝났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하나님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십시오.
천국이 다 됐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마음 천국, 가정 천국, 교회 천국, 지상 천국, 그리고 영원 천국을 누리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은혜
본문 고전15:51-58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세 가지 은혜를 받았습니다. 첫째는 죽음을 이기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죽을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둘째는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다른 일에 힘쓰지 않고 주의 일에 힘쓰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셋째는 하늘을 바라보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마지막 날 주님이 상 주실 것을 바라보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 가지 은혜를 오늘 본문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과 저도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이 세 가지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1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은혜
사람이 제일 무서워 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죽음 앞에서 비굴해 지기도 하고 무력해 지기도 하고 연약해지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 중의 하나는 죽기를 무서워하는 인간들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 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라"(히2:15). 베드로도 죽기를 무서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잡혀서 죽지 않기 위해서 그런 비겁한 짓을 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날 저녁에도 열 제자들은 한 곳에 모여 문을 닫아 걸고 숨어 있었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 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요20:19). 잡혀서 죽지 않기 위해서 그런 비굴한 일을 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목적 중의 하나는 죽기를 무서워 하는 우리 인간들을 죽음의 공포에서 놓아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죽음의 무서움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죽음의 위협과 협박을 받으면서도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죽음의 무서움에서 벗어나는 일만큼 멋진 일은 없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에서 놓여 나는 일만큼 자유롭고 여유로운 일은 없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사망을 향해서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습니까? 바울의 외침의 근거는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무덤에서의 부활을 확실하게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전15장 첫 머리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자기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느니라"(고전15:3). 사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자기는 이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을 직접 체험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15:8).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하고 믿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내가 죽어야 할 저주의 죽음을 나대신 죽으신 것을 믿기 때문이고 내가 살아야 할 영원한 부활의 삶을 나대신 먼저 사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사람은 죽어도 죽지 않고 다시 산다고 바울이 증거했습니다(고전15:23). 바울은 주님이 죽은 지 삼 일만에 다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의 몸도 죽은 다음 다시 영광의 몸으로 부활 할 것을 분명하게 믿었습니다. "우리가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니라"(고전15:51-52).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이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죽음을 사모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담대히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5:8).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것이 더욱 좋으나"(빌1:23). 바울은 참으로 자유롭고 여유롭고 멋진 삶을 살았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죽는 것을 무서워 하십니까? 죽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까? 그러면 비굴해지고 불쌍해지고 불행해 집니다. 당당하게 죽을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멋지게 죽을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담담하고 가볍게 죽을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면 됩니다.
2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은혜
사람의 가치는 무슨 일에 힘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다음부터 주의 일에 힘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살아계시고 부활의 주님이 자기에게 할 일을 맡기시고 부활의 주님이 자기를 인도하시고 부활의 주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고 부활의 주님이 자기를 축복하시는 분이심을 생생하게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9:6). 사도 바울은 안디옥에서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 소아시아에 가서 선교했고 드로아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마게도냐에 가서 선교했고 에베소와 두로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복음을 전했고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도 주님의 분부를 받아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했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행23:11). 바울은 한 평생 주의 일에 힘쓰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인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이와 같은 바울의 삶의 비결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데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자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여러분들, 자기 일에 너무 힘쓰고 있습니까? 피곤해 지고 공허해지고 서글퍼지고 맙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부활의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삶은 보람과 기쁨과 감격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면 됩니다.
3 하늘을 바라보는 은혜
사도 바울은 전에는 땅을 바라보았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난 다음부터는 하늘을 바라보며 살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하늘에 계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이미 하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 스데반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6).
사도 바울은 인생의 최후 결산이 하늘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판단이나 자기 자신의 판단을 중요하기 여기지 않고 마지막 날 주님이 하늘에서 자기를 향해서 어떤 판단을 하실지를 항상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이시니라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4:4,5). 사도 바울은 천국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우리가 담대히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5:1,2,8). 사도 바울은 하늘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하늘에서 주님이 상 주실 것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니라."
하늘을 바라보면서 땅에서 주의 일에 힘쓰며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 땅을 바라보며 땅에 얽매어서 사십니까? 하늘을 바라보면서 자유롭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에서 주님이 상 주실 것을 바라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면 됩니다.
빌3:7-
사람으로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죽음이 모든 문제의 해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죽으면 그만이다" 소위 완전 범죄를 꿈꾸며 죽여서 문제의 해결을 보겠다는 사람은 얼마나 무서운 사람입니까? 그런가하면 나 죽으면 그만이라는 사람도 또한 무서운 사람입니다. 죽음이 끝인 것처럼, 죽음이 모든 문제의 해결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으로 참으로 위험한 사람입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2절에 보면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며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있을 수 있는 생의 철학입니다.
내일이 있다고 믿는 사람과 내일이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즉 소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이론이나 철학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장 오늘 이 한 시간의 생활 자세도 바로 여기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무서운 원수가 둘있습니다. 하나는 허무주의요, 또 하나는 물질주의입니다. 예술,철학, 사상 등 여러 가지로 말한다만 다 묶어보면 허무주의입니다. 맹랑하기 그지 없습니다. 어렵게 오랫동안 한 공부의 결론이 허무주의로 끝나고 있스빈다. 사 람으로는 그것밖에 더 생각할 수가 없나 봅니다. 또 하나는 물질주의입니다.
우리가 몸서리치게 생각하는 공산당이 유물주의 아닙니까? 유물주의 사상이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낳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공산당은 물질이면 전부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가진 자들입니다. 모든 가치관은 그의 인생관에서 유래되고 인생관은 그의 내세관에서부터 나옵
그리스도인의 내세관은 부활 신앙 위에 있습니다. 부활을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끔은 교인들 중에서도 부활신앙만을 예외로 생각하고자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부활을 빼면 기독교는 없어집니다. 기독교의 골자는 부활입니다. 인도의 선교사 썬다 싱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질문을 했는데 틀별히 대학교수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이 오랜동안 젖은 전통의 힌두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믿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 즉 힌두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바꾸었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철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며,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논리적인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오로지 부활 신앙입니다.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 위에서 부활 신앙이 세워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의 어느 장군에게 부활 신앙을 전도했다고 합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고 특별히 좀 포악한 장군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전도를 받고서 하는 말이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니나는 예수를 안 믿겠소"하더랍니다. 왜냐하면 그가 죽인 사람들이 다 살아난다고 생각하니 큰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전부가 허구입니다. 의의, 자유, 평등, 선, 진리, 사랑, 인내, 등 무슨 이야기를 해도 부활의 없으면 거짓말입니다. 사랑해야 할 이유가 어디있습니까? 참아야 할 이유는 어디 있는 것입니까? 빼앗아도 모자라는 세상에 남을 주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누가 어떤 말로도 부활없이는 진리와 의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진리니 선이니 하고 부르짖는 것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부활 신앙이 없는 도덕, 윤리는 꽃병에 꽂어 놓은 꽃입니다. 뿌리가 없기에 생명이 지속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정의는 죽을수가 없기에 예수는 부활했고,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에 예수가 부활했다고 말입니다. 즉 진리가 영원하기 때문에 예수가 부활했다고 말합니다. 거짓말입니다.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예수가 부활하셨기에 진리가 영원한 것이고, 사랑이 영원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론처럼 만일에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주장은 다 헛것이 되고 맙니다. 모든 외침은 다 쓸데없는 메아리로 흩어져 버릴 것입니다. 오늘이 있기에 내일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이 있기 때문에 오늘은 믿는 것입니다. 약속된 미래가 있기 때문에 오늘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그 부활의 신앙에 근거하여 우리는 오늘을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자연 현상이 아닙니다. 식물이 싹이 나고 시들고 다시 나는 것처럼 자연적인 생명의 과정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창조의 계시 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환생이나 윤회도 아닙니다. 옛 것에 대한 훼손이나 발전도 아닙니다. 옛것의 완전한 죽음에서 이루어지는 재창조의 역사입니다. 새로운 차원의 역사입니다. 사람에게는 죽이는 능력이 있지만 살리는 능력은 없습니다. 부활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바로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부활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것입니다.
비겁에 벌벌 떨떤 베드로였지만 부활 진리를 믿게되는 바로 그 순간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러한 증언을 합니다. "우리의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행3;13). 사람들은 예수를 죽였고 하나님은 그를 부활시켰습니다. 여기에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창조의 능력이며 권능입니다.
그런데 부활이 십자가 위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있을 수 없는 사건이지만 분명히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십자가의 고통, 그 죽음 뒤 에 부활사건이 있음을 중시해야 합니다. 창세기의 창조는 무에서 유의 창조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권능으로 나타나는 창조는 십자가 위에 세워지는 창조입니다. 이것이 더 놀랍고 위대한 하나님의 권능임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의로운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죽음이요, 하나님의 의의 계시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계시된 것입니다.또한 사랑이 담긴 희생의 죽음이었습니다. 위하여 죽는 죽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 자가입니다. 사랑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의 계시가 바로 십자가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은 자발적인 것이었다고 성경은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예수님은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죽지 않으실 수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피할 길은 여러번 있었습니다.만약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유월절에 들어오시지만 안 했어도, 만약에 비랄도 목전에서 한 마디만 잘 말씀했어도 죽음을 면할 수는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이것이 납득되지 않아 "내가 너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데 왜 말이 없느냐"고 답답해 했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자발적이요, 의인이면서도 죄인인 것처럼 이렇게 죽어갔습니다. 이 자원적인 죽음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부득이 하여 죽는 죽음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내가 죽어야 십자가입니다. 죽여서 죽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음을 선택하는 선택적인 죽음이 십자가란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위탁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깨끗이 내 생명을 위탁할 때에 그 위탁의 결과로 십자가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는 그 역사가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대신 죽으시는 죽음이 십자가입니다. 죽을 자를 위하여 산 자가 대신 죽는,즉 죄인을 위하여 의인이 죽으신 것입니다. 제물적인 성격을 가진 제사성의 죽음이 바로 십자가란 말입니다. 이 완전한 죽음 위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의 결정체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알수록 더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지식과 모든 노 력과 모든 희생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는 지난날에 좋아하던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십자가 외에는 더 알지 아니하기로 했습니다(고전 2장). 지식에서까지 십자가만 알기로 결단하고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무척 알려고 했습니다. 안다는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떻게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입니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왜 십자가 사건이 있어야 하느냐 말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알고자 했고 일생을 통해서 배웠습
그는 이제 깨닫습니다.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능력이 십자가 안에 나타나 있음을 안 것입니다. 영생을 주시는 생명의 능력이 십자가 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좀더 알기 위해서 고난에 참여하려합니다. 같은 경험에 들어가기 전에는 같은 지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상식적인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처럼 고난당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려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몸에 가득 채우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귀한 고백을 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은 아주 귀한 말입니다 . 시간 시간마다 사건 사건마다에서 그는 날마다 죽었습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처럼 죽으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본 것처럼 그는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죽으려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적어도 사람다운 생은 할 수 없이 죽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는 것입니다. 끝까지 살아 보겠다고 바둥바둥하면서 있는 방법 다 동원하다가 죽는 것을 보면 민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여러분 순교란 무엇입니까? 순교자는 자기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 스스로 죽음을 택할 때 이것이 순교입니다.오래 살고자 애쓰지 말고, 정말로 사람답게 그리스도인답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결정적인 선택을 할 수 없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 받아야 비로소 그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죽어야 그리스처럼 살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십자가 없는 부활을 바라고 있습니까? 오래 사랑야 하고, 편해야 하고, 성공해야 하며, 십자가가 없어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어리석은 말을 아직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들어가실 때 그 밑에서 소리지르며 "뛰어 내려라. 그러면 우리가 믿을 것이다"라는 외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 그의 누이동생은 "예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겁니다."라고 원망조로 이야기합니다. 또한 군중들은 "저가 장님의 눈을 뜨게 한 분인데 사랑하는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할 수는 없느냐"고 능력을 논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면 능력이라고 합니다. 꼭 살아 남아야 하고, 복을 받아야 하고, 무엇이든 잘되는 것, 즉 십자가 없는 능력을, 십자가 없는 영광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진 후에라야 하나님께 그를 일으키시는 능력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간혹 괴변을 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우리의 고난을 담 당하셨으니 우리는 편안해야 한다는 얌체같은 발상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를 쳐다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찌 편안하기만을 바랄 수 있습니까? 생각한다는 것이 겨우 편안해야 한다니 말이 안됩니다. 이것은 헛된 신학입니다. 죄로 인한 죽음 저주의 고통, 심판의 고난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 제거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의 고난, 선물로 주시는 시련, 우리를 교육하시는 훈련, 의로운 자의 고난, 그리스도인의 순교,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순교를 영광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이 고난은 곧 부활의 능력을 함께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앞에 있는 부활을 볼 뿐만 아니라, 현재도 그리스도 인해 당한 고난만큼, 죽은 것만큼 살리시는 능력을 오늘 깨닫고 오늘 체험하고 오늘 감격해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11절에서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이루려 하노라"고 말 합니다. 죽어서 부활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앉아서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부활을 이루려 했습니다. 부활로 가는 것입니다. 부활을 붙잡으려 했습니다. 부활을 깨닫고 부활로 살려고 했습니다. 그 능력으로 죄를 이기고 절망을 이깁니다. 그 능력으로 베드로도 담대하게 거꾸로 십자가를 집니다. 즉, 부활의 증인은 죽는 자입니다. 아니 부활을 믿기에 죽음이 아깝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순간마다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능력으로 사망을 이기고 거짓을 이기고 영원히 승리하는 자가 되십시다. 부활은 영원한 승리입니다.
본문 : 고전 15:1-10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주께서 성경대로 무덤의 권세를 박차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의 첫 열매로 영광을 선포하신 승리의 날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복음의 진수입니다. 주의 부활이 주는 의미와 우리 각자와의 관계를 본문을 중심해서 함께 생각하며 은혜 나누기로 합니다.
주의 부활은 곧 나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전후해서 성경 속에 그려져 있는 주의 제자의 서로 다른 두면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한면의 얼굴은 희망을 온전히 상실해 버린 버림받은 자의 실망하는 자의 얼굴로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사건 이후 공포와 낙담과 체념과 불안의 분위기 속에서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덜덜 떨며 문을 잠그고 움츠려 있는 제자들의 얼굴입니다. 또 한면의 얼굴은 용기와 산 소망이 넘치는 승리자의 얼굴로서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의 얼굴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두 얼굴은 언제나 우리 각자 얼굴의 양면일 수 있습니다. 날마다 엮어지는 신앙 생활속에서 때로는 어둡게, 때로는 밝게 두 얼굴의 모습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것은 우리들 신앙 체험의 연륜에 따른 당연한 결론이기도 하기에 우리는 오늘도 흔들림이 없고 주께서 인정하시는 한 얼굴의 정형을 위해 주의 십자가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따라서 목격자가 되지 않고는, 체험이 흔적으로 새겨지지 않고는 결코 바람직한 승리자의 한 얼굴을 소유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는 신앙의 산 체험으로 각자 자신의 부활을 가져야 주의 부활은 의미가 있습니
주의 부활은 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마리아의 울음을 해결해 주었습니다.(요20:15) 사죄의 은총과 무한한 기쁨으로 주님을 따랐던 마리아는 안식후 첫날 이른 새벽에 주의 시체에 기름을 바르기 위해 무덤을 찾았다가 빈 무덤을 발견하고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런 마리아를 향해 주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찾아오셔서 그의 눈물을 멈추게 하십니다.
우리도 오늘까지 말씀 안에서 신앙 생활하면서 남모르는 아픈 사연으로 인해 고통과 아픔과 절망의 눈물을 많이 흘렸지만 오늘 주의 방문을 받기만 하면 그 모든 눈물도 마리아의 경우와 같이 멈추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비극에 종지부를 찍는 승리의 낭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주의 부활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도 넘치는 소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절망과 좌절속에 예루살렘을 등진 두 청년 이었지만 그들의 고난에 직접 동참해 주신 주님은 부활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성경을 통해 해명해 주심으로써 두 청년의 가슴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들고야 말았습니다.(눅24:13-35) 승리의 환희를 안겨 주었습니다.(눅24:34) 이처럼 주의 부활은 온갖 의심을 파괴하는 권세와 능력,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새 교제의 시작을 가져옵니다.(요21:1-20) 주의 부활의 능력으로 무장하고 새 교제를 허락받은 제자들은 더이상 겁장이로 머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승리의 강한 확신을 안고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사역 감당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유다와 사마리아로, 로마를 향해 그 발걸음을 옮겨 달음박질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발걸음이 사울을 굴복시켜 바울을 만들었습니다. 이 역사가 부활을 통한 승리의 역사입니다.
부활 승리의 수많은 증거들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자료들은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이 있습니다. 그 첫째가 빈 무덤입니다. 기독교는 무덤이 없는 종교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영원한 승리를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증거물입니다. 무덤은 패배자의 집합소와 절망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승리자 예수님이 그 무덤 속에 머물 수 없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론입니다. 이 분이 지금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를 의롭다 인정하시기 위해 생명을 안고 이 분은 지금 우리를 향해 걸어오십니다. 이 분을 영접하시길 바랍니다. 삼 일이라는 숫자도 주의 부활을 증거하는 증거물입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고전15:4) 주님은 생전에 성전을 사흘만에 짓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삼은 완전 수 입니다. 그러기에 삼일은 기독교 승리의 표징이 됩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음모 또한 예수 부활의 큰 증거임을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부활하시던 새벽에 땅은 입을 벌리고 무덤의 돌은 굴러내리기 시작합니다. 이 놀라운 현상 앞에 무덤을 지키던 로마 군인들은 모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곤 성내에 들어가 주의 부활 사건을 전했습니다. 그 때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타협하여 군병들에게 돈을 주면서 예수의 제자들이 무덤에서 주의 시체를 도둑질해 갔다고 모해할 것을 지시했지만 진실은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원수들의 작당은 오히려 예수 부활의 큰 증거가 되고 만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국에는 승리가 있을 따름입니다. 진리만이 남게됩니다 .예수 부활은 진리의 승리를 보여주는 가장 큰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새 제도를 잉태했습니다.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의부활 사건은 예루살렘을 완전히 사로잡고 예루살렘 성전을 신약교회로 돌변 시키고 말았습니다. 유다에도 사마리아에도 교회 탄생의 계기를 마련하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세계적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결과입니다. 이 기쁨의 소식의 산실 교회를 통해 오늘도 부활은 증거되고 있습니다. 날마다 부활 신앙으로 생활 가운데서 이김의 영광을 선포하시는 성도 모두가 되시길 부탁드립니다. ♡
부활절
눅24 1-12)
인간은 본래 죽음과 저주가 없는 에덴 동산에서 고통 없이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복을 받아 세상으로 왔으나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의 죄로 인하여 실락원 하게 되어 수많은 질병과 저주를 가져와서 하나님께 범죄할 때마다 여러 가지 저주로 죄의 보응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공의와 사랑을 겸직한 하나님은 인간들을 그대로 버려 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손길을 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 오셔서
인간의 머리로 지은 죄로 인하여 가시관을 쓰셨고
손으로 지은 행위의 죄로 인하여 양손에 못을 박히셨고
배로 지은 죄로 인하여 창에 찔리셨으며
발로 지은 죄로 인하여 발에 못 박히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6시간 동안 7마디의 말씀을 남기시고 그의 영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가셨습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잘 드러 내지도 않고 주님을 섬기던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주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려다가 자기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새 무덤에 장사를 지내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가신 저주의 사형이니 그 장례식인들 오죽 했겠습니까.요즘의 장례식처럼 그 흔해 빠진 꽃 한 송이가 없을 것은 물론, 누구하나 동정하지 않은 처절한 장례식이었을 것입니다.
1. 주님은 자신을 위하여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으십니다.
주님의 3년간에 공생활에는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 주시고 먹여 주시고 영생의 교훈을 주셨지만
자신의 육신을 위하여서는 빵 한 조각을 만들지 않으셨고
주님의 안일을 위하여서는 이적을 행하신 일이 없으시며
자신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늘 군사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기도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한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가진 수모를 다 겪으셨으니 그 표현을 이사야 53:.4-6에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수모라는 수모,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으시고 남의 무덤에 묻히신 주님의 죽음이지만 언제까지나 주님을 붙잡아 둘 수가 없어서, 돌무덤의 능력도 주님의 부활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금요일 토요일이 지나자 주일 아침 일찍이 여인들이 주님의 무덤을 찾아가 예수님의 시체에 향료를 발라 드리려고 하다가 깜짝 놀랄 일을 발견하였으니 ,무덤 아구를 덮었던 큰 돌이 굴려져 있었고 두 사람이 찬란한 옷을 입고 옆에서 말했습니다. "너희는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구나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예수는 살아서 40일간을 계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2. 주님의 부활을 부정하려 했으나 할 수가 없었습니다.
(1) 가사설(假死說)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실신했다가 다시 살아 났다고 하는 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6시간이나 십자가 위에 계셨고 운명 후 로마 군인이 옆구리에 창을 절러 물과 피를 나오게 하여 죽음을 확인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주님의 제자이지만 죽은 것이 확인되니 무덤에 장사했을 것입니다. 로마 병정도 죽은 것이 확인되니 시체를 내어 주었고 제자들도 확인되니 흩어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2) 도거설(盜去說)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해 가고는 돈을 주고 예수가 살아났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훔쳐 갔으면 무엇 때문에 여자들과 베드로가 무덤에까지 찾아갔겠습니까? 로마 병정들이 인봉을 하고 지키는데 어떻게 접근했겠습니까? 나아가 제자들은 무엇 때문에 순교하기까지 부활의 주님을 증거했겠습니까?
도리어 대제사장들이 로마 군인들에게 돈을 주면서 훔쳐 갔다고 거짓 증거하라고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그 외에 환상설도 있으며 유령설도 있으며 가지가지 거짓 증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가 베드로, 야고보 외에도 500명이나 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기독교회가 세상에 끼친 영향으로도 증거하고도 남으며, 교회확장과 박해국가들이 기독교 국가로 변하며, 현재의 역사를 통해서도 주님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불란서의 볼테르는 50년 후에는 교회가 다 없어진다고 하면서 무신론과 성경을 반박하는 책을 많이 출판했습니다. 그러나 50년 후에 교회는 없어지기는커녕, 신기하게도 그 무신론의 책을 출판하던 출판소가 성경을 찍어내는 인쇄소가 되어서 마루에서 천정까지 성경책으로 꽉 찼다고 합니다.
3. 예수님의 빈 무덤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여러분의 사랑으로 저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두 번이나 들어가서 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누워 계셨다고 하는 대리석을 잡으니 손은 차지만 가슴은 뜨거워짐을 실감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손을 댄 원인인줄 압니다. 주님의 빈 무덤을 통하여 몇 가지 산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요 11 :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는 말씀을 실증해 주시는 증거인줄 압니다.
세상에 수많은 교주마다 무덤이 있고 죽음이 있었으나 우리 주님은 빈 무덤이요 당신의 말씀대로 죽지 않고 영원히 사시는 길을 향하여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였습니다.
(2)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마 28 : 20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천사의 말도, 바울의 말도 아닌 주님의 말씀이요 약속입니다. 빈 무덤을 통하여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3) 빈 무덤을 통하여 우리 주님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믿을 수 있게 확신을 주십니다(요 14. 1-6).
세상이 무어라 해도, 신신학자들이 무슨 미친 소리를 하여도, 과학이 아무리 발전을 해도, 우리 주님이 다시 세상에 오심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구약에는 예수님의 초림에 대한 약속이 456번이나 된다고 하며 신약에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이 319번이나 된다고 합니다.
신약 성서가 260장인데 빌레몬서와 요한3서를 제외하고는 매성경 마다 주님의 재림이 약속되어 있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한가지 사실을 예언한 것만도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거든 하물며 319번이나 예언된 주님의 재림이 공수표이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에는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산 소망(벧전 1 : 3), 복스러운 소망(딛 2 : 13), 영광스러운 소망(롬 8: 17)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결론
기독교의 자랑 중에 하나는 주님의 빈 무덤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신대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승천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부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승리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철저히 믿고 준비하시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에관한기사들
마 28: 1-10)
온 인류는 현재 핵전쟁이 일어나면 4분이면 파멸 당하는 엄청난 죽음의 턱밑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초목이 잠자는 죽음의 겨울은 지나고 대 자연계의 새싹이 돋아나는 생명과 희망과 부활의 봄철에 전세계 인류가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니 더욱 큰 의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부활절은 춘분 지난 만월(滿月) 다음에 오는 첫 주일입니다.
옛날 초대교회 교우들은 부활절을 년중행사 중 제일 큰 날로 지켜왔습니다. 이들은 고난주간에는 매일 목욕하며 근신하고 또한 예수님이 무덤에 40시간 계셨다고 해서 40시간 금식하고 부활절 전날에는 철야하며 세례받고, 세례받은 사람들은 흰옷을 입고 오순절까지 예배에 참석하고, 부활절 지난 50일은 오순절 환희의 기간으로 매일 만찬식을 거행하며, 40일은 예수님의 승천일이요 50일은 성신 강림 주일로 기념하면서 엄숙히 지냈습니다.
이 위대한 부활절이 바로 오늘이니 이 넘치는 은혜와 축복이 나와 여러분 위에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우리 주님은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하셨으니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7일중 첫날 새벽에 믿음의 여인들이 무덤에 달려가서 보니 염려하던 돌은 굴려졌고 광채가 빛나는 무덤 속에서 두 천사를 만나고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종교 모리배와 로마병정들 그리고 빌라도의 권위 앞에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히 죽고 매장된 줄만 알았더니 세상에 간계를 정복하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고야 말았습니다.
보십시오, 마리아는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은 예수님의 무덤에 참배를 가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요 20 : 16-17).
지금도 아무런 생명력 없이 교회에까지 찾아 나오신 분이 이 말씀을 통하여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주님은 한 무덤의 주인공이 되어서 슬픔에 차서 찾아오는 참배자들을 기다리는 공자나 석가모니 같은 도학자(道學者)의 시체가 아니라, 어둠의 장막을 깨치고 일어나시어 불안에서 평안을 주시고 슬픔에서 기쁨을 주시고, 힘없는 발걸음에 용기를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기에서 내 영혼에 주님의 부활을 동참 시키사 그의 은혜와 평강을 받아들이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부활의 주님이 인류에게 허락하신 축복
(1) 평강의 은총을 허락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했습니다.
"오 하나님, 당신은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만드셨나이다. 그러므로 당신 안에 우리의 안식처를 얻을 때까지는 우리 마음은 평안을 얻을 수 없나이다" 어거스틴의 고백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기본욕구가 여섯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안전 또는 안정의 욕구,
둘째는 애정의 욕구,
셋째는 인정의 욕구,
넷째는 소속의 욕구,
다섯째는 새로운 경험의 욕구,
여섯째는 창조적 표현의 욕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사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평강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주께서 세상에 오시면서 첫번 허락하신 것이 평강의 선물이요, 부활하사 허락하신 것도 평강의 선물입니다.
누가복음 2 :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했습니다.
고대광실 높은 집에서도 평강이 없으면 지옥이요, 남의 셋방에서도 평강이 있으면 천국입니다.
주의 제자들은 절망과 슬픔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자 기쁨과 평강으로 돌변했습니다.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부활 주님을 만나면 은혜와 평강과 기쁨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2) 부활 주님이 두 번째로 허락하신 선물은 성령과 함께 속죄의 은총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2절에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며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과 함께 있을 때는 평범한 제자에 지나지 않았으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서는 한번 설교에 3000명의 심령을 뒤집어 놓았고 옥문을 열고 버젓이 걸어 나을 수가 있었으며 갖가지 병자를 일으킬 수가 있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 받았을 때,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지는 속죄 권까지도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급한 것은 먼저 성령과 말씀에 완전히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성령으로 충만하니 로마에까지 복음이 전파되었고
루터에게 성령으로 충만하니 종교개혁이 크게 일어났으며
웨슬레에게 성령으로 충만하니 뜨거운 감리교회가 탄생되었고
윌리암 뿌스에게 성령으로 충만하니 구세군이 창설되었고
죠지 윌리암에게 성령으로 충만하니 기독청년회가 창설되었고
리빙스톤에게 성령으로 충만하니 아프리카에 복음이 정착했고
토마스, 언더우드, 아펜셀라에게 성령으로 충만하니 한국에 복음이 전파되어 복음의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을 때 사무엘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땅에도 아직 성령의 불은 붙고 있습니다. 더욱 우리 제단에 성령의 불은 요원의 불길처럼 훨훨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 불길에 잡힌 바 되기를 축원합니다.
(3) 부활 주님이 허락하신 또 하나의 선물은 소망과 영원한 부활 천국입니다.
사도행전 24장 15절에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이론 시인은 "인생은 만추(滿秋)의 낙엽이라 꽃과 열매는 다 떨어지고 벌레와 낡음과 비애만 내 것이 되었구나" 하고 절망했습니다.
불교는 바른 깨달음을 통해 열반에 들어가는 불법을 가르치지만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의 충만함을 통하여 생명의 도(道)를 통하여 영원한 소망과 영생을 공급하고 있는 생명력이 약동하는 종교입니다.
흑암의 죄악과 멸망의 세계에서 헤매는 인류는 지금도 주의 부활의 은총에 동참하면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소망이 있습니다. 정치적인 소망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소망이 있습니다. 자녀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가정적인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망이 주안에 이루어져서 영생의 나라에까지 연결되는 영원한 소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부활 주일예배에 참예하신 성도 여러분은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시고 평강의 선물과 성령과 속죄의 선물과 영원한 소망과 영생의 선물을 받아 가지고 돌아가시는 은총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마리아와 몇 제자들이 주의 무덤에 갔다가 돌은 굴려지고 광채 나는 천사를 만나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된 것 같이, 지금 나와 여러분에게 신령한 눈이 열려지기를 축원합니다.
이 영적 부활에 체험을 강하게 한 제자들은 예루살렘 한 복판에 거상과 같이 나타나 생명을 내걸고 담대하게 부활의 주님을 소개하던 확신의 감격이 지금 나와 여러분의 가슴에도 벅차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의 대부호 아르티비아데스가 철학자 소크라테스에게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땅이 굉장히 넓다는 것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조용히 세계지도를 아르티비아데스의 앞에 펼치면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소유하신 땅은 어디서 어디까지요?"
아르티비아데스는 당황하여, "농담이 아니오, 내 토지가 아무리 넓을지라도 세계 지도에까지 실릴 수야 있겠소?" 하니까 소크라테스는 말하기를 "그렇소? 세계 지도에도 실릴 수 없는 정도의 땅, 지구의 한 모퉁이도 못되는 땅이 뭐 그리 자랑스러워 자랑하고 있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것은 아무리 가져도 만족함이 없고 세계 지도에 한 점만도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총만 힘입어 보십시오 .천하가 부럽지 않고 그 한 분만으로 족함을 얻습니다.
결론
우리 주님은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셨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고, 속죄의 은총을 주셨으며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 부활의 승리가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선물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 단7:9-12, 골3:1-4
오늘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가장 기쁜 날이다. 금요일에 장사지낸 바 되셨던 예수님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우리는 오늘, 과거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되고 부활을 자신이 새롭게 체험하는, 그리하여 부활의 주를 만난 삶을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부활의 주를 만난 삶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
1. 새 힘과 용기를 얻어 사는 삶이다.
예수 처형을 목격하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은 부활의 주를 만난 후, 새로운 용기를 얻어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 누가복음 24:13-35 말씀에 이 사건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처음에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열 한 사람에게 나타나시고 오백 명 이상되는 사람에게 일시에 나타나셨다. 그러나 부활하시던 날의 형편에 대하여서는 예수께서 두 제자들로 더불어 엠마오로 가실 때에 된 일을 누가가 기록한 것이 가장 눈앞에 보는 듯이 극적으로 되었고 가장 정확하고 세밀하게 나타난 것이다. 엠마오는 예루살렘 북편 약 이십리 가량 되는 곳에 있었다.
거기서 이 두 사람은 마음에 슬픔과 낙망을 품고 길을 가고 있었다.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로 희망을 두었던 예수께서 종내 죽임을 당하였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친히 말씀하셨다 할지라도, 또 비록 주님이 살아났다고 말하는 천사의 환성을 본 것을 전하는 말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날이 다 지나도록 자신들에게 주님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주께서 그 언약하신 말씀을 이루시리라는 것을 별로 믿지 못하였다.
주께서 말씀 하신바 그 사흘이 아직 지나지 않았는데 그들은 낙망중에 예루살렘을 등지고 떠났다. 그리고 천사가 부활하신 기쁨의 소식을 전해 주었으나 또한 믿고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들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고 책망을 받게 된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예수께서 자신이 친히 하신 말씀을 믿지 않았다고 책망하신 것도 아니고, 동료나 천사의 말에 응하지 않았다고 책망하신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구약에 증거한 말씀을 믿지 않았다고 책망하신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는 믿었으나 모든 선지자들이 말한바를 믿지 못하였다. 특히 예수님의 "구속의 죽음"과 하늘에 올라가셔서 다시 하늘 나라의 영광에 들어가실 것을 예언한 말씀을 믿지 못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다시 자세히 풀어 가르쳐 주셨다. 그들의 마음이 무거워졌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비로소 뜨게 되었다.
이들은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주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증거하게 되었다. 절망과 실의 속에서 낙심하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복음의 증인이 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의 신앙을 살펴보자.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보고 나서야 믿겠노라고 한다면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을 것이다. 부활의 주님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증언한 말씀을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해 믿고 뜨거워지면 절망과 실의 속에서 낙심하는 심령이 새 힘과 용기를 얻고 살게될 것이다.
2. 과거를 씻고 새 출발을 하는 삶이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신도들은 부활한 주를 만난 후 숨고, 무서워하고, 절망에 빠졌던 과거를 청산하고 새아침을 맞이하는 것처럼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오히려 예수님이 살아계셔서 육신으로 함께 하실 때보다 더욱 큰 힘을 얻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과거는 흑암이었다. 고통이었고, 불과 며칠 되지 않는 동안이었으나 죽음의 긴 터널을 도망쳐나온 사람들처럼 지쳐 있었다. 그러나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던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고 이젠 생전에 약속하신 말씀처럼 영원히 살아서 함께 하시면서 성령을 통해 힘과 능력을 주시게 되셨으니 말할 수없는 새로운 힘이 솟아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전혀 새로운 삶으로 바뀌어졌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삶이 사순절 기간을 지나 고난주간을 거치면서 살아왔던 과거의 삶을 벗어나서 부활의 주님이 영원히 살아서 함께 하시면서 성령을 통하여 힘과 능력을 주시는 약속을 전해듣고 믿음을 가지면 전혀 다른 새로운 출발을 경험하게 될 줄 믿는다.
3. 참 생명을 발견한 삶을 사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죽음을 향하여 무덤에 갔으나 생명을 발견하였다. 시체가 있는 무덤을 향하여 올라갔으나 빈 무덤, 생명이 가득찬 부활의 무덤을 발견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은 시체를 찾아 향품을 바르려고 왔지만 천사는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눅24:5-6)고 하였다. 참 생명이 바로 여기 빈 무덤 가운데 나타나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세상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참 생명을 발견하지 못한채로 방황하면서 살고 있음을 본다. 세상의 훌륭한 선인들이 참 생명의 길을 발견하려고 애를 썼지만 만족할만큼 그 길을 자신이 간 사람도 없고 가르쳐 준 사람도 없다. 참 생명은 빈 무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부활의 영광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참 생명의 길을 가기 위하여 예수를 믿으려고 교회에 왔지만 과연 우리가 찾고 있는것이 빈 무덤만을 남겨 놓은채 부활하신 주님이 아니라 아직도 죽은 시체를 찾고 있지는 않는가? 아니라면 참 생명을 발견했는가?
4. 가치관의 전환이 이루어진 삶을 사는 것이다.
삶에 있어서의 우선 순위, 중요도가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뀐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부활한 주님을 만난 체험은 제자들에게 전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하였다. 예수께서 살아생전 하신 말씀이긴 하지만 그때에는 그 말씀이 전혀 귀에 들려오지 않았고, 자신들의 이기심과 육적인 욕심이 끊임없이 계속되었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부터는 자신의 이기심이 사라졌다. 육적인 욕심도 끊어졌다. 오직 복음을 전하는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삶으로, 우선 생각하는 것이 내가 아니라 예수님을 앞세우는 자세로,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어진 삶을 살게 되었다.
오늘 우리도 제자들과 같이 부활한 주님을 만남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가치관의 전환은 옛날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만 오는 것이아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동안 계속 이루어진 사실이다. 지금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가치관이 바뀌고 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가치관이 바뀌어지는 기적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의 이기심이 사라지고 육적인 욕심이 끊어지는 삶으로 변화될 수 있어야 하겠다. 우선 생각하는 것이 내가 아니라 예수님을 앞세우는 자세로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어지는 기적이 일어나야 하겠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5)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게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3:1-2) 예수와 함께 부활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겸손과 인내를 내 생활에 반영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나의 옷으로 갈아 입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자비와 용서와 그 넓은 사랑을 옷입듯 한다는 뜻이고, 예수의 부활이 나의 생활이 된다는 것은 감사와 찬미의 새로운 인생이 된다는 뜻이다.
내 삶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바뀌어진 것은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다. 나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어야겠다. 그래서 내 중심에 찾아 오신 부활의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허락하시는 복을 받고 사는 생활이 되기를 바란다.
부활에 관한 기사들
데이빗 휘튼(DAVID WHEA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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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복음서들에 나오는 부활에 관한 기사들을 건성으로 읽으면 그 기사들 가운데 서로 불일치되는 점들이 많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될 수도 있다. 면밀히 검토해 보면 그것들이 놀라울 정도로 일치되고 있음을 발견하고 또 표면상 모순점들로 보이는 내용들을 사실상 복음서 저작자들이 초대교회의 서로 다른 출처들에서 그들의 자료를 수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넷다 근본적으로 동일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무릇 한 사건에 대해서 서로 다른 증인들에게서 증언을 들어본 사람이면 그러한 상황에서 관심사와 배경과 정서적인 특성이 각각 다른 사람들이 그들 나름의 주견에 따라 동일한 사건들을 얼마나 다각적인 면에서 단편적으로 보고 또 서로 다른 점들을 기억하고 있는가를 잘 알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마28:1-10,막16:1-8,눅24:1-12,요20:1-10) : 1380년경의 패널로 크기는 132*97cm 이며 프라하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남부 보헤미아의 아우구스티스 수도원 부속 성당에 그려진 제단화의 익화로 앞에 비스듬히 놓여진 석관 위에 붉은 옷을 입은 그리스도가 서 있다. 묘지기를 하던 병사들은 졸고 있는 사람도 있고 부활의 기적에 놀란 눈초리를 보여주는 사람도 있다. 나무 하나하와 숲의 풍경 저편에는 별이 반짝이는 붉은 하늘이 펼쳐져 있다. 자연주의적인 표현과 상징적인 표현이 독특하게 혼합되어 보헤미아적인 신비주의의 세계를 낳고 있다.
빈 무덤을 처음 보았던 주요 증인들은 최근에 정서적으로 심각한 긴장상태에 있었던 일단의 여자들이었다. 그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 나서 곧 그 여자들은 그 소식을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각기 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세부사항에 있어서 그 설명들이 달라진 것은 놀랄 일이고 또 그 증거는 어떤 의미에서 가치를 잃게될 것이다. 차이점들은 복음서 저작자들이 적어도 하나 이상의 출처에서 그들의 증거를 수집하였다는 사실을 암시해주며,이 사실은 네 복음서의 기사들의 전체적인 일치를 더욱더 인상깊게 만들어주고 있다. 복음서들의 기록에 나오는 사건들은 대게 다음과 같이 간추려 놓을 수가 있다.
성경의 증거
일단의 여자들이 안식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기 위하여 무덤에 가다(마28:1,막16:1-2,눅24:1,10,요20:1 상)
그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 돌문이 굴려진 것을 발견하다(마28:2-4,막16:3-4,눅24:2,요20:1하).
그들이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체 대신에 그들에게 되어진 상황을 설명하여 주고 또 메시지를 준 천사를 만나다(마28:5-7,막16:5-7,눅24:3-7).
그들이 예루살렘에 달려가서 다른 제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나 대부분 믿지 아니하다(마28:8,눅24:8-11,22-23,요20:2).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가 무덤에 달려가서 그것이 비어 있음을 확인하고 그후 집으로 돌아가다(요20:3-10,눅24:24 을 보라).
막달라 마리아가 그 두 제자를 뒤따라 무덤에 가서 그들이 떠난 뒤까지 그곳에 머물다.이때 예수께서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다(요20:11-18,마28:9,마태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바로 그 날에 예수께서 베드로(눅24;34,고전15;5)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눅 24;13-32,막16:12-13을 보라)에게 나타나시고 다시 예루살렘에서 도마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요20:19-23,눅24:36-43,막16:14)에게 나타나시다. 이 특주의 범주에 들지 아니한 그 밖의 "나타나심"은 네 복음서들과 사도행전 1장 및 고린도전서 15장에 기록되어 있다.모든 기사들에서 얻어지는 결론은 두가지 관점 곧 예수께서는 이제 그의 부활의 몸을 자신의 뜻에 따라 나타낼 수도 있고 숨길 수도 있으시다는 사실과 오직 그를 좇는 자들에게만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놀라운 일치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표면상의 모순점들
어떤 여자들이 무덤에 갔는가? 분명히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와 요안나와 "갈릴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온 다른 여자들"(눅23:55)이었다.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만을 골라내어 언급하고 있다.(20:1) 어쩌면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그 소식을 알려준 것이 막달라 마리아였기 때문일 것이다.20:2에서 막달라 마리아 자신이 자기와 함께 다른 여자들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그러므로 복음서 저작자들은 각기 자기에게 인상적인 자료를 제공해주는 여자들을 골라서 그 이름을 밝히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무덤의 돌문은 언제 굴려졌는가? 마가복음 16:3-4과 누가복음 24:2은 여자들이 그 지점에 이르기 전에 이미 굴려져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마태복음 28:2-4의 사건도 그들이 이르기 전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고 또 그 결과 파수꾼들이 성으로 돌아간 것이 분명하다(28:11-15에서 그 파수꾼들은 여자들이 무덤에서 돌아가고 있을 때 이미 성내에 들어가 그들의 거짓말을 여기 저기 퍼뜨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 곳에 천사들이 몇이나 있었는가? 여자들이 도착했을 때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의 돌문을 굴려낸(마28:2)그 천사는 무덤 안에 들어가서 다른 천사와 함께 있었다(눅 24:4-막달라 마리아 역시 두 천사를 보았다.요20:12). 마태와 마가는 대언자 역할을 하여 그 여자들의 주의를 끈 천사만을 언급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가복음 24:5("두 사람이 이르되")의 복수는 한 천사가 말하고 다른 천사는 옆에서 확증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을 것이다.
천사들은 무슨 말을 하였는가? 다시 한번 각 기사들을 종합하여 볼 때 우리로 하여금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너희가 여기 온 이유를 아노라. 예수는 살아나셨음으로 여기 계시지 않느니라. 빈 무덤을 보라. 가서 제자들에게 이르랴. 주께서 갈릴리에서 너희를 만나시리라. 그가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예수님을 처음 본 사람은 누구였는가? 마가복음 16:9은 주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 나타나신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요한복음의 기사와 일치된다. 누가복음에는 이것과 상충되는 내용이 없다. 마태복음 28:9에서는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중심인물)와 "다른 마리아"에게 나타나신다. 이것이 처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그 이야기가 퍼져나갈 때 말달라 마리아의 이름은 밝혀지고 다른 마리아는 잊혀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마치 다른 복음서 저작자들이 바디매오는 언급하고 또 한 소경은 생략했듯이, 그리고 군대귀신 들린 자만 언급하고 또 다른 귀신 들린 자는 생략했듯이-하지만 마태는 각 경우 모두 둘 다 언급하고 있다).
마태와 마가가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을 기록하고 있고,누가와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나타나신 일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물론 요한복음 21장은 우리를 갈릴리로 데려다 주고 있고 또 마가도 그의 복음서 추신에서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나타나신 일들을 언급하고 있다. 마태와 누가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것이 각 저작자의 의도와 구조에 조화되고 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를 처음 시작한 곳-예루살렘-에서 끝맺고 있고 마태는 갈릴리의 한 산에서 하신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으신 왕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선언(28:16-20)으로 더불어 끝맺고 있다.
[출처] 십자가와부활|작성자 주의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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