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요한 계시록!!

[스크랩] 요한계시록 신학, 역사적, 신학적 이해

하나님아들 2014. 3. 25. 18:04

 
 

요한계시록 신학, 역사적, 신학적 이해

 

 

 

<1> 요한계시록의 해석 방법

 

 

1. 역사주의적 해석 방법

 

요한계시록의 해석방법에는 전통적 네 가지 방법으로 초대교회로부터 예수 재림 때까지의 세계역사를 예언적 형태로 기록한 책이 요한계시록이라 주장하는 역사주의적 관점으로 본문을 세계 역사의 종말을 계산하기 위한 계산자로 생각해 예수 재림의 날짜를 계산하기 위해 서양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본문의 내용들을 시도하려는 것으로 666과 같은 숫자를 히틀러, 모택동, 나폴레옹, 오바마 등등과 연관시켜 바코드나 베리칩 등의 열풍을 불렀다.

정치와 성경을 대입시키려는 시도는 서구 역사에 치중하고 있는 편협성과 주관성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현 시대의 성경학자들은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등을 돌리고 있다.

 

 

2. 과거 주의적 관점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이미 멸망한 예루살렘의 사건이라는 관점으로 21~22장의 내용에 포함된 승리한 성도들의 최종적 구원과 영광, 악한 자들의 심판과 멸망을 설명하는 데 취약점을 나타내고 있다.

 

3. 미래주의적 관점

 

한국 교회가 선호하는 관점으로 본문의 내용을 세상 마지막에 일어날 예언적 말씀으로 해석하고 있고 4장~22장의 내용을 세대주의적 영향으로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로 문자적 해석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회복, 교회의 휴거, 7 년 대 환란, 적그리스도의 출현, 곡과 마곡의 반란 등과 같은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다.

지나친 환상과 공상은 아마겟돈이라는 전쟁을 구상하게 되었고 극단적 시한부 종말론 자들에 의한 휴거와 3차 세계 대전, 혜성의 충돌 이후의 지구의 대 재앙의 징조를 시작으로 주님이 오실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4. 상징 주의적 관점

 

예수의 초림부터 재림에까지의 특정한 역사적 사건과 시기를 예언적 형태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무시간적 상징적 메시지를 통해 계시적 말씀을 전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승리라는 일반적 원리를 강조하는 영적인 진리를 해석하는 방법이다.

1세기 상황과 마지막 종말에 대한 시기의 불일치가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다.

 

5. 다차원적 관점인 절충 주의적 관점

 

여러 가지 관점 중 한 가지만 고집하게 되면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게 된다.

과거적 요소, 현재적 요소, 미래적 요소, 상징적 요소가 어우러진 구조를 함께 이해한다면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게 되어 본문의 의미를 극대화 할 수 있다는 것이 정설일 것이다.

 

 

 

 

<2> 상징의 의미와 의의

 

 

1. 상징의 의미

 

 

1세기 그리스도인들도 이해 못할 논리를 21세기의 사람들이 상징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시간의 간격을 무시하는 것일 것이다.

독수리와 곰이라는 동물을 미국과 소련으로 해석한다면 그 시대에 있지 않는 국가를 억지로 해석하는 것으로 그림 언어는 기능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상징적 이미지는 현대인들이 같이 공유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동 시대적 소통의 언어 이상은 아닐 것이다.

상징은 1세기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언어로 로마의 압제와 황제 숭배로 인한 고난을 로마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언어로 기록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신학적 메시지와 효과적인 의사전달의 역할을 요한계시록은 수행했을 것이고 믿음을 지킨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히 왕 노릇할 것이라는 실체를 요한은 환상이라는 실체를 통해 독자들에게 관점의 반전을 요구하고 있다.

숫적 상징 또한 네 생물, 네 모퉁이, 네바람,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열두 지파, 열두 문, 열두 기초석, 열 두 사도 등의 반복되는 동일한 숫자의 사용은 상징적 암시로 의도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실제적 삶의 상황에 오해 없이 전해질 때 의미는 메시지가 되고 상징은 역사적인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요한계시록에 쓰인 상징적 숫자 등은 거대한 로마가 결국 망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예언적 말이라는 것을 잊으면 주관적인 해석으로 인해 교회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을 것이다.

 

2. 요한계시록의 의의

 

신약은 복음서, 서신서, 묵시/계시 등으로 분류된다.

요한계시록은 계시/묵시(1:1), 예언(1:3), 편지(1:4)의 형태를 띤 복잡한 구성을 하고 있다.

1세기 당시 전 세계를 통치했던 로마라는 거대 구조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승리와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야 했던 요한은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상황과 문제들을 목회자의 심정으로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

현재를 견디고 인내한다면 결국은 미래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라는 중요한 메시지를 제시하고 있는 요한 계시록은 공간적 초월을 제시하며 현재를 견디게 해주고 있다.

황제 도미티안이 지배하고 있는 눈에 보이는 대로의 세상은 진짜가 아니고 진정한 주인이 누구이고 진정한 찬양과 경배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서사시와 같이 분명 요한 계시록은 믿음 안에서 소망과 위로를 제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회개와 구원이라는 예언적 선포의 초점은 지금 지키면 된다는 것으로 구원과 심판의 실체가 보좌이며 죽음 당하신 어린양(5장)을 보좌(4장)와 연결 시켜 돌이키라고 선포하고 있다.

일곱인과 번개(4;5)), 일곱 나팔과 지진(8:5), 일곱 대접과 음성(11;19), 천재지변(16;18.21)등은 역사에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 6;12~17)

이렇듯 점점 강해지는 의도적인 사건들은 심판을 위해 오시는 신적 현영 현상으로 묵시 문학이라는 외적 틀을 가지고 심판은 보좌 위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피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회개하고 돌이킨다면 구원하겠다는 진리 안에서 유대인들이 처한 삶의 상황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해주는 승리와 위로의 말씀인 것이다.

 

 

<3> 본문 적용

 

1. 음녀 바벨론과 새 예루살렘의 구조적 관계( 15~16장과 17:1~22:5절)

 

심판의 완결( 15장 ~16장)과 구체적 설명(17~21장)은 일곱 대접으로 연결되어있다.

소아시아 7 교회(1;9~3장), 타락한 세상의 심판을 나타내는 7 인, 7 나팔, 7 대접, 큰 성 바벨론의 멸망(17~18장)과 어린양의 혼인 잔치와 박해속의 소망(19:7), 거룩한 예루살렘의 환상(21~22:5) 등의 4 가지 환상의 의미는 신앙생활은 소망이라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소망은 우리 안에서 회복이 전제되는 것으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에 기뻐하고 행복해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되는 것이다.

심판이 끝났다(4,5,6,16장)라는 선언적 심판과 약속의 말씀(17장)은 멸망의 장면을 보여주는데 “보이리라.”(17;1, 21;9)는 일곱 대접(17;1, 21;9)을 상징적으로 대입하여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제시하고 있다.

탐욕에 찌든 세상이 아니라 지금 소박한 기쁨과 은혜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된다.

사단은 우리에게 이 기쁨을 빼앗고 사이비 기쁨을 심어주려고 발악하지만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한 신부와 하나님께 대적하는 바벨론을 상징하는 음녀를 등장 시켜 쾌락 추구(19;2), 우상숭배(17;2), 성적인 타락은 한국 교회를 무력화 시키고 성도를 구원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것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타락하면 성적인 타락이 온다는 것이 성경적 원리이다.

우리끼리 싸우는 지금 음녀가 세상을 잠식하게 되고 영적인 혼란은 사치(17;4)와 외모지상주의(18;3)와 자기 사랑(18;7)에서 오며 음녀가 조종하고 있다.

절약하지 않고 흥청망청하고 있다면 자기 사랑에 빠져있다고 보면 되고 예배를 위해 꾸미다 늦게 되는 것 역시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는 행위이며 물질 만능주의가 우리나라를 좀먹고 있는 타락의 원흉이다.

 

2. 성도가 할 일

 

돈을 벌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권력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청소년들이 성장한다면 우리나라의 미래는 좌절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기쁨은 음녀의 유혹을 거쳐 신부의 자리에 갈 때 오는 것으로 크리스천의 종착역은 처절하게 싸울 때 하나님의 은혜로 임하게 된다.

음녀에게 노리개가 되어 현재의 기쁨 때문에 미래를 버리지 말자.

진정한 기쁨은 기다림이다. 영적인 파워만이 현재의 기쁨을 이기고 현재의 유혹을 이기고 신부의 자리가 미래를 기다리는 축복의 확신이 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5;11~15)는 말을 확증하게 되고 현실의 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영적 권능을 나타내게 된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며 기다림의 기쁨이 있다. 예수의 재림을 기다린다면 “카이로”(기쁨)는 카리스(하나님의 은혜)가 되어 어린양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구원받은 우리의 영혼을 자각하게 되어 카이로는 완성된다.

인생은 고뇌이며 고통의 무게가 다를지라도 복음과 십자가의 은혜 없이는 도저히 이결 낼 수 없다. 서로 위로가 되어 기쁨이라는 복음을 전파할 때 절망은 빛이 되어 희망의 메시지로 들려오게 되고 나를 통하여 세상은 빛으로 가득하게 된다.

범죄로 인한 고통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며 받는 고통은 새 노래로 주를 찬양하는 진정한 신부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은혜의 회복이며 소명을 완성할 수 있는 권능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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