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스크랩] 제 1 강 히브리서

하나님아들 2014. 3. 25. 17:48

 

 

 

제 1 강 히브리서

1. 명칭

 

본 서신의 명칭은 한마디로 애매하다. 초기 전승은 본 서신의 명칭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거나 언급하는 경우 '히브리인들에게'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주후 2세기경 활동한 판테누스와 터툴리안 역시 본 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본 서의 표제만은 '히브리인들에게'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명칭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2세기에 이 문서가 바울 서간집에 포함되었을 때 편집자가 '로마인들에게'와 같은 말에서 유추하여 이 명칭을 붙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명칭은 단순히 수신자가 유대인들 또는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편집자의 막연한 느낌을 반영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명칭에 관한 불확실성은 본 서신의 역사적 배경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불리한 점이 되어 왔다. 물론 서신의 내용에서 역사적인 언급들을 찾아내어 추론할 수도 있지만 본 서신에서 역사적인 언급들은 매우 애매하고 단편적이다. 따라서 본 서신의 명칭에 관한한 누구도 확정적인 주장을 하기는 어렵다.

 

2. 수신자

 

만일 '히브리인에게'란 명칭이 원래의 명칭이 아니라 편의상 편집자가 본 서신에 갖다 붙인 이름이라면 수신자를 밝히는데 있어서 명칭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이 문제는 가능한한 성경 본문의 내증에 근거하여 밝혀져야만 한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본 서의 수신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거나 그의 말씀을 듣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어떤 사람들의 가르침을 받아 예수님을 알고 있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집단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개종한 이래 계속 박해를 받았는데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들의 생활이 시작된 직후 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에서 아주 떠날 위험에 대해 경고함으로써 계속 신앙의 전진을 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헬레니스트였음을 본 서신에서 추론할 수 있다. 그들은 헬라어로 된 구약성경을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옛 제사의식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구약성경을 읽은 데서 얻은 것이지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를 직접 접한 데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암시되어 있다. 본 서신의 수신자들은 계속되는 박해의 위협 속에서 유대교로 회귀하려는 강한 유혹에 처한 헬라어에 익숙해 있던 유대인 기독교인들로 보여진다.

 

3. 저자

1) 바울 저자설

본 서신이 누구에게 보내졌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여 또한 누가 이 서신을 보냈는지도 알 수 없다. 바울이 저자라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유세비우스 등의 신념은 동방 기독교의 판단에 영향을 주었고 궁극적으로는 4세기 말엽에 서방 교회의 판단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본 서신에 대한 바울의 저작설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의 경우처럼 단정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본 서신에 나타난 문체와 사상의 양식은 바울의 것과 같지 않다. 즉 본 서신은 구약성경의 헬라어 역인 70인역에서만 구약성경을 인용했으며 바울의 문체보다 훨씬 유창한 헬라어를 구사하고 있다. 특히 바울 서신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대제사장 기독론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은 바울의 저자설을 부인하기에 충분하다.

 

2) 바나바 저자설

주후 220년에 글을 쓴 터툴리안은 히브리서의 저자로 바울의 동료이며 사도인 바나바를 지적한다. 이 견해는 아프리카 지역의 교회들의 일반적인 견해로 보여진다. 바나바는 초대교회의 유력한 인물로서 '권위자'(행4:36)라고 불렀으며 헬라 사상에 젖어 있던 구브로 출신의 레위인이었다. 이런 점에서 제사 제도를 구속사에 정확하게 적용하여 기술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바울과 함께 전도 여행을 했으므로 히2:3의 내용과 부합된다. 그러나 이것은 터툴리안이 지나치게 반유대주의저인 편에 있는 가짜 바나바의 편지와 성경의 사용법이 유사한 것을 보았을 뿐 초대교회 당시의 외적 증거를 확보하고 있지 못한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3) 기타 저자설

419년 칼타고 회의 때 가서야 비로소 본 서에 대한 바울의 저작설이 동방에서처럼 사방에서도 전통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비평적 판단을 하는 주석가들은 여전히 본 서의 저자가 로마의 클레멘트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누가를 본 서의 번역자 또는 편집자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대에 칼빈은 누가나 로마의 클레멘트를, 루터는 아볼로 저작설을 주장하였다. 한편 하르낙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함께 본 서를 썼다고 주장했다. 분명한 것은 저자는 제2세대 그리스도인으로서 70인역에 정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풍부한 어휘력을 가졌으며 바울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수사학적인 문체의 대가였다. 그는 성경에 능한 자로서 스데반과 빌립의 동료들이며 이방 선교의 선구자들이었던 헬라파 유대인들의 사고 방식을 이어받은 한 헬레니스트였다. 그러나 실제로 누가 본서를 썼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만이 그 진상을 아실 뿐이다.

 

4. 기록연대

 

본 서의 기록 연대에 관하여 성전이 아직 기능을 하고 있었던 시대로 보는 견해가 전통적 입장이었다. 그러나 많은 현대 신학자들이 성전 파괴 이후로 연대를 계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크게 본 서신의 기록연대는 조기 기록설(A.D.58-60년)과 예루살렘 멸망 직전설(A.D.70년이전)과 그 이후의 설(A.D.80-90년)로 각각 나누어진다. 이와 같은 본 서신의 기록 연대는 로마의 클레멘트 히브리서 인용, 성전 제사의 진행여부, 박해 시기, 신학적 발전 여부에 따른 내, 외증에 의해 결정한다.

 

5. 목적

 

그 당시 독자들은 예전에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현재 계속되는 기독교안에 대한 박해와 죄의 문제로 딜레마에 빠져 유대교로 회귀함을 통해 제사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들은 세례 이후 죄의 문제로 시달리면서 예수를 믿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신학적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히브리서 독자들의 특별한 상황에 비추어서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그들에게 예수를 믿는 것이 계속 우리에게 도움이 됨을 논증하기 위해 히브리서의 대제사장 기독론을 전개한다. 여기서 저자는 예수께서 현재 대제사장 되심과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계속적으로 주고 계심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종말론적으로 한 번 영원히 효과 있는 제사로써 과거의 죄뿐 아니라 현재의 죄도 해결해 줄 수 있는 제사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자는 좀 새로운 논제로 이 문제의 해결을 전개한다.

 

[해설]

 

1. 히브리서의 사상 형성

 

예수의 대제사장직은 신약성경의 다른 책들에서 그대로 되풀이 되 어 나타난다(요17장; 계1:13).

이 개념은 장차 오실 메시야에 관한 시편 110편의 해석과 제사장이신 메시야와 왕이신 메시야가 오시리라는 유대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히브리서에 나타난 이러한 사상 개념의 독특한 발전은 사상 전승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창조적으로 반영하는 그리스도인의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장차 나타날 좋은 것들의 실체가 아니고 그림자일 뿐'(히10:1)이고, 땅의 장막들은 하늘에 있는 '참된 장막의 모형'(9:23,24)이라는 개념은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의 관계에 대한 헬라 철학을 반영한 듯하며, 저자가 쌓은 헬라 문화의 훈련을 보여 주는 것 같다.

학자들 중에는 히브리서에 나타나는 다양한 관점을 통하여 헬라의 영향을 받은 유대인 철학과 알렉산드리아의 필로(B.C.20년-A.D.40년) 사상과 눈에 띠게 유사한 점을 발견한 사람도 있고 또 어떤 학자들은 히브리서의 신학적인 면에서 영지주의적 요소들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바울이 히브리서 저자에게 미친 영향의 범위는 분명하지 않다. 히브리서는 바울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지만 반면에 유사성도 있다. 전반적으로 볼 때 히브리서에서 율법과 이스라엘의 희생제사로 시도한 바울의 접그놔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히브리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상()은 유대교 사상이나 헬라문화 그리고 원시 기독교에 기인된다는 사실은 분명한 사실이다.

 

2. 저작권

 

1) 바울

2세기 말부터 동방 교회는 바울을 저자로 간주하고 히브리서를 바울서신들 중의 하나로서 로마서를 기록한 뒤 또는 데살로니가후서 뒤에 쓴 것으로 여긴다. 서방 교회는 동방 교회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 A.D.325년부터 바울이 저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오늘날 거의 모든 학자들은 문학, 양식, 문체, 신학적인 면에서 바울의 저서가 아니라는 입장에 동의한다. 바울은 익명으로 서신을 쓰지 않았다. 그는 주장과 권면을 뒤섞지 않고 오히려 항상 편지 끝에 중심되는 간청을 남겨 두었다. 바울의 문제는 때때로 거칠고 눈에 뜨일 정도로 여담에 흐르거나 때로는 문장을 끝맺지 않지만 이 서신은 대단히 잘 다듬어져 있다.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은 바울의 독특한 주제들이 빠져 있는 것 같다. 첫째, 율법을 통한 의인(義認)이 아닌 믿음을 통한 의인, 둘째, 하나님의 목적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성, 셋째,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 등이다. 바울의 서신에는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형상은 나타나 있지 않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적을 없애 주는 희생 제도의 기초로써의 율법을 무시했으며, 오히려 죄를 드러내고 죄를 자극하는 도구로써의 율법을 강조했다. 바울은 두 번째 회개(히6:4-8 ; 히10:26-27 ; 히12:17)의 불가능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2) 아볼로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알렉산드리아의 아볼로가 히브리서의 저자라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은 다른 것보다 유력하다. 아볼로는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행18:24)였다. 따라서 루터는 아볼로가 많은 헬라의 수사학과 철학의 훈련을 통해서 히브리서의 문체와 사상을 알게 될 것이라 추정한다. 아볼로는 바울과 디모데와 가깝게 지냈다(고전16:12). 이것으로 히브리서의 바울적 특징과 디모데에 관한 그의 관심(히13:23) 모두를 알게 될 것이다.

3) 누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누가가 이 책의 히브리 원전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부 현대 학자들은 히브리서와 사도행전 사이의 유사점을 특히 스테반의 설교(행7장) 부분에서 찾아낸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누가의 신학과는 너무나 현저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누가가 히브리서 저자일 가능성은 희박하며, 더욱이 히브리서 또한 히브리 원전을 헬라어로 번역한 증거가 전혀 없다.

4) 바나바

터툴리안(A.D.220년경 사망)은 히브리서의 저자를 구부로 태생으로서 레위족인 바나바로 생각한다. 레위족(레위에서 시작된 제사장 족보)은 성전 제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바나바는 그렇게 깊이 잇는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추측을 뒷받침할 만한 것은 거의 없다.

5) 그밖에 사람들

로마의 클레멘트 실바누스(실라), 빌립(일곱 집사 중의 한명) 그리고 브리스길라 등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오리겐은 "이 서신을 쓴 사람은 하나님이 정확히 아신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들 중 가장 유력한 후보지도자는 아볼로와 바나바를 들지만 오리겐의 견해가 가장 유력하며 앞으로 계속 지지될 것이다.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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