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이란!

[스크랩] 구원론 (guwon soonsu)

하나님아들 2014. 3. 24. 00:20





구원론 (guwon soonsu)



“구원의 순서”



1. 세 가지의 다른 접근 방식들



(1) 존 머레이(John Murray)의 경우는 극단적이다. 그는 성경으로부터 구원의 명확한 순서가 추출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성경적인 구원의 순서는 부르심, 중생, 믿음과 회개, 칭의, 양자 삼으심, 성화, 견인 그리고 영화라고 이해한다.

(2) 루이스 벌콥(Louis Berkhof)은 중간적인 입장이다. 그는 자신의 조직신학에서 성경은 구원순서를 뚜렷이 밝히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의 완벽한 순서를 제공하고 잇지는 않으나 그러한 순서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기는 하다는 것이다.: 벌콥의 구원순서는 다음과 같다. 부르심, 중생 돌이킴(회개와 믿음 포함), 칭의, 성화, 견인 그리고 영화의 순서이다.

(3) 또 다른 극단의 예는 벌카우어(B. C. Berkouwer)이다. 그는 주목하기를 이 주제에 대한 신학적인 몰입은 종종 구원 자체가 갖는 풍요함에 이르게 하는 것이 오히려 구원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단계들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성경으로부터 구원의 고정된 순서를 추출할 수도 없으며, 로마서 8:30에서의 바울이 의도하는 바 역시 구원과정에 나타나는 명료한 단계의 순서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벌카우어는 구원의 순서를 정하기를 거부한다.



2. 어려운 문제들



(1) 우리가 구원의 순서를 설정하는 데에 사용하는 용어들이 조직신학에서 사용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경의 저자들에 의해 사용되고 잇지 않다는 점이다. 팔링게네시아(중생: regeneration)란 단어는 신약에 두 번 사용되고 있다. 오직 디도서 3:5절에서만 이 말은 우리가 보통 이해하고 있는 의미인 새로운 삶, 즉 성령으로 인해 우리 속에 회복된 새 생명을 가리키고 있다. 또 다른 구절인 마태복음 19:20에서 이 말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도래될 만물의 새로운 질서를 지칭하고 있다.

(2) 구원의 과정 속에 나타난다는 다양한 단계들의 순서 역시 항상 똑같지 않다는 점이다.

(3) 구원의 순서를 정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의 토대로 사용되어지는 로마서 8:30에서도 이 구절의 주요 목적이 구원의 순서를 정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29절과 30절은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 이란 구절의 의미를 상술함으로써 그들을 하나님께서 아셨고, 정하셨고, 부르셨으며 또한 의롭다 여기사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러 국면들이 나타내고 있는 구원의 순서는 부차적인 목적이다. 바울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이 누릴 안전과 영원한 축복을 수사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있다.

(4) 믿음이 구원의 순서에 나타나는 여러 관계 중 하나의 단계일 뿐이라고 생각되어져서는 결코 안 된다. 믿음은 신자의 일평생의 삶을 통해 지속되어지며 수행되어져야 한다. 믿음은 칭의의 단계에서 필수적이듯이 성화와 성도의 견인 가운데서도 필수적이다.

(5) 칭의와 성화는 성도의 삶속에 나타나는 연속 과정이 아닌 동시에 나타나는 사건들이다.

(6) 머레이와 벌코프가 주장하는 구원의 순서는 완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소망이 이들의 순서 속에서는 언급되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신컨대 사랑과 소망 역시 믿음만큼이나 구원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필수적인 것들이다.



3. 우리가 꼭 구원의 순서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가?

중생이라 함은 성령께서 그의 역사를 통해 우리를 그리그도와 연합되게 하시며, 한때는 영적으로 죽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사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중생이 정의되어진다면 중생은 돌이킴(믿음과 회개를 포함), 칭의, 성화 그리고 성도의 견인 모두를 앞서고 있음이 자명하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경험들은 영적 삶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구원의 과정 속에서 중생이 제일 먼저라는 일종의 순서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크마는 구원과정을 중생, 돌이킴, 칭의, 성화, 성도의 견인과 같이 일련의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적인 발생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비록 중생이 다른 국면들에 의해서 원인적인 우선순위를 갖고 있으나 그것은 시간적인 우선 순위가 결코 아니다.



4. 함축된 의미들



(1) 중생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처음에 일어나지만 그것이 주는 여파는 신자가 거듭난 삶을 살아가는 동안 계속되어진다. 또한 믿음과 회개가 시초에 일어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역에 걸쳐 지속적으로 수행되며 계속 되어져야 한다. 또한 비록 칭의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자마자 일어나지만 칭의가 수반하는 혜택들의 소유를 위한 일평생의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성화는 신자의 일평생에 걸쳐 지속되며 죽기 전까지 완료되지 않는다. 믿음 가운데의 인내 역시 일평생의 행위이다.

(2) 구원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국면들은 동시적일 뿐 아니라 또한 상호적이다. 중생은 반드시 믿음과 회개로 나타나게 마련이며, 또한 성화의 시작이기도 하다. 믿음은 칭의가 수반하는 축복들을 소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또한 성화에서 진전을 가능케 하는 수단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인내하게 하는 수단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일생에 걸쳐 필수적이다. 사실상 중생은 이미 견인을 내포하고 있다. 즉 새 생명의 잉태와 함께 갖게 된 새로운 삶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진정으로 돌이키고서 믿음에서 인내치 못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듯이, 성화 없는 칭의 또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3) 성도가 영화롭게 되는 것은 종말론에 속한 것이요, 그러기에 구원론의 한 부분으로 다뤄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기서 꼭 기억해애 할 사실은 구원의 과정은 이 현재의 삶 가운데서는 종결되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믿는 자는 그가 이생에 있는 한,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가운데 있는 자들이다.



5. 구원의 과정에 대한 견해 가운데서 배척되어야 할 것들



성결교회는 돌이킴/회심(칭의) 후에 전적인 성화에 도달한다고 본다. 대부분의 오순절 교회들은 돌이킴/회심(칭의) 후 성령세례라는 두 번째 단계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며, 몇몇 오순절 교회들은 돌이킴/회심(칭의) 후에 성화 그리고 성령세례라는 두 번째와 세 번째 단계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진보된다는 것은 회심 이후에 이르게 되는 어떤 특정한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진적이고도 지속적인 성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두 번째 세 번째 단계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러한 구원론들은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형태의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보통의 그리스도인, 성화된 혹은 성령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이러한 구분은 영적으로 해로운 태도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하층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의욕상실을, 자신들이 이미 상층구조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자만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후크마는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란 개념 역시 배척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속적인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나 그들의 삶은 돌이킴 이전에 행하던 것과 똑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명백히 배척되어야 한다.(성경적 근거 없고 어린아이와 같은 성도: 고전3:1)

1) 그리스도인 가운데 여러 수준의 성숙도가 존재하며, 모든자들이 계속적으로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야 하며 “세속적인 그리스도인” 개념은 오해의 소지와 함께 해롭다 할 수 있다.

(1) 신약은 거듭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그리스도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육체를 따라 사는 자와 성령을 따라 사는 자, 신령치 못한 자와 신령한 자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있으나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는 제3의 부류의 사람에 대한 기록은 없다.

(2)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란 개념은 돌이킴 이후에도 뚜렷하고도 인지 가능한 제2의 어떤 단계의 필요성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으로 충분치 않고 변화의 제2단계로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3)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란 개념은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지 않고도 그를 구세주로 영접할 수 있다는 의미를 자아낸다. 이러한 가르침이 수용되고 있는 집단에서는 소위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를 왕좌에 앉히고 그를 당신의 삶의 “주로 모시라고”권해진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신약의 가르침과 무관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지 않으면서 그를 구세주로 영접할 수가 없는 것으로 자아만이 여전히 삶의 권좌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신약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케 되는 것이다.

(4)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란 개념이 암시하는 바는 사람이 육체를 따라 살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되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신자들이 육체로 인해 여전히 유혹을 받으며 때때로 육체에 굴복함이 사실이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육신에 혹은 “육체를 따라” 걷고 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라고 간주되어 질 수 있다는 생각은 성경의 진리와 부합되지 못한다. 그러나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란 개념은 이상에 열거한 이유들로 해서 배척되어야 마땅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중요한 진리의 요소를 담고 있다. “세속성”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위험한 독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신자에게 미칠 수 있기에 “세속성”에 대해서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미혹 때문이다: 음란한 생각, 부정한 행위, 시기, 질투, 교만, 탐욕, 욕심, 분노, 나태함 등 신약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죄와의 끊임없는 갈등이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그리스도인” 교리를 부인한다 해서 “세속적인 삶”에 빠질 수 있는 항존하는 위험성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사실상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돌이킴 이후에 소위 절정의 경험들 혹은 정상의 경험들을 갖는다는 사실 역시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돌이킴 이후의 절정의 경험인 “제2의 돌이킴”, “제2의 개종사건”이 “구원의 순서”라는 구조의 틀 속으로 프로그램 되어져서는 안 된다. 도든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경험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자녀들을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구원치는 않으신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삶 속에서 이러한 유의 경험을 받아들일 만한 여지가 항상 남아 있어야 함도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알프스의 눈동자. 데보라의 세계여행
글쓴이 : 알프스의 눈동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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