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결혼의 진리
믿음의 조상들의 결혼관
본문/창세기 2:18-25
요절/창세기 2:24,25 "이러므로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결혼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예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결혼을 전제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결혼 자체는 악하지도 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것을 보면 결혼은 하나님의 축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혼관이 비뚤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준엄하게 심판하셨습니다. 따라서 결혼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도 있고,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창세기에 나타난 결혼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은혜 받고자 합니다. 특별히 믿음의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결혼관이 어떠했는지 살펴보는 가운데 성경적인 결혼관을 확립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하나님이 창설하신 결혼의 진리
첫째, 결혼의 동기
창세기 2:18-25에는 인류 최초의 결혼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2장 18절에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독처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19,20절을 보면 아담이 에덴 동산을 지키라는 사명을 받은 후 열심히 짐승의 이름을 지어 주고 있었습니다.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지어 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확한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서는 섬세한 관찰을 잘 하는 여자의 도움이 필요하였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돕는 배필이 없는 것을 보시고 그를 잠들게 한 후 그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돕는 배필이 필요한 것을 아시고 그를 위해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결혼의 필요성을 인정하셨습니다.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말은 결혼 적령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사는 것은 하나님 보실 때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에덴을 다스리며 지키는 일이 혼자 감당하기에 벅찬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아담에게 아내가 필요함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하여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혼자 사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니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결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결혼의 동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혼자 힘으로 잘 감당할 수 없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본인이 돕는 배필의 필요성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 여자의 역할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셨습니다.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시고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배필이란 "동등하고 적합한 짝"이라는 뜻입니다. '돕는 배필'이란 단순히 일을 거드는 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이나 군사적인 도움처럼 적극적으로 돕는 짝을 말합니다(사 30:5; 겔 12:14; 호 13:9). 또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열심히 일하는 아담을 돕는 배필로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여자의 사명은 남편을 돕는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그 일을 잘 감당하도록 돕는 동역자입니다. 잘못된 길로 갈 때 붙잡아 주고, 연약할 때 힘과 용기를 심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남자보다 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세계를 정복하는 자는 남자요, 남자를 정복하는 자는 여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가 어떻게 돕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이 달라집니다. 바보 온달도 평강공주의 도움으로 위대한 장군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안에서도 아내의 동역에 따라서 남편의 삶이 달라집니다. 그만큼 아내의 동역은 중요합니다.
셋째, 사랑 고백의 근거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실 때 흙으로 만드시지 않고 아담의 갈빗대로 만드신 것은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인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아담의 머리뼈나 발가락뼈로 만들지 않은 것은 교만하지도 무시당하지도 않는 인생의 동반자로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을 때 아담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칭하리라(창 2:23)." 이 사랑의 고백은 연애 감정에서 나온 고백이 아닙니다. 자기를 위하여 여자를 만드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깊은 신뢰에서 우러나온 사랑의 고백입니다. 아담이 여자를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배필로 영접하였을 때 심령 깊은 곳에서 뜨거운 사랑의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우리말 공동 번역에 보면 아담이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지아비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라고 부르리라!"고 외쳤습니다(2:23). "드디어 나타났구나"라고 한 것을 보면 아담이 하나님께서 동역자를 만들어 주실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렸음을 말해 줍니다. 아담의 깊은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이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 한 확고부동합니다. 연애감정에서 나온 사랑 고백은 인간의 감정에 근거한 고백이기 때문에 쉽게 흔들립니다. 남비처럼 쉽게 뜨거워졌다가 쉽게 식어버립니다. 그래서 날마다 사랑을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과 신앙심에 뿌리를 둔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 깊어질수록 사랑도 깊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으로 동역자를 맞이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 결혼의 의미
창세기 2장 24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 말씀은 성서적인 결혼이란 무엇인가를 말해 줍니다. 첫째는 자립입니다.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는 것은 부부가 부모의 슬하에서 벗어나 자립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결혼한 후에는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남자가 결혼을 하면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합니다. 정신적, 영적으로 자립하여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연합입니다. 연합한다는 것은 남성은 남성으로서 여성은 여성으로서 가진 독특한 개성과 재능과 모든 것을 그대로 살리면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지려면 두 사람의 신앙, 삶의 방향, 희망, 사명 등이 같아야 합니다. 셋째로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말씀은 육체적인 결합으로 서로의 사랑을 고백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사명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두 사람은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았지만 전혀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이는 두 사람이 사랑으로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혼한 아담의 행복한 모습입니다.
Ⅱ. 개척자 아브라함의 결혼관
첫째, 아브라함 시대 사람들의 결혼관
창세기 4,5장에는 아담이 범죄한 이후 인류가 급속도로 타락해 가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특히 5장에 보면 이미 가인의 후손들 가운데는 일부다처제도가 생겼습니다. 라멕은 두 명의 아내와 결혼했는데 그들의 이름은 아다와 실라였습니다. 아다는 '꾸미다'는 뜻이고, 실라는 '딸랑거리다'는 뜻입니다. 실라의 딸 나아마는 '사랑스러운 자'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여자들은 꾸미고 딸랑거리며 남자들을 유혹했으며, 힘 있는 남자들은 많은 여자를 아내로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6장으로 넘어오면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이러한 죄의 세력도 암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들에게까지 퍼지게 되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으로 살던 셋의 후손들까지 가인의 후손들처럼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가인의 딸들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진리를 버리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습니다. 본문에 "...아름다움...보고...취했다"는 말은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고 ... 보암직하여 ... 따먹었다"는 말과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단의 유혹을 받아 죄에 빠졌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래 결혼의 동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기들의 눈에 좋은 대로 골라잡아 결혼했습니다. 결혼이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쾌락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셋의 후손들까지도 이런 세속적인 결혼관에 깊이 물들게 된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6장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했습니다. 육체가 되었다는 말은 사람이 타락하여 이성이 없는 짐승과 다를 바 없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이 타락하여 육신의 쾌락과 정욕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짝짓기 위해서 사는 동물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땅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창세기 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홍수로 코로 숨쉬는 모든 생물을 다 멸하시고, 노아의 방주에 들어간 8명만 구원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도 그들의 결혼관이 비뚤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창세기 19장을 보면 소돔성 사람들은 천사들과 간음을 하려고 늙은이로부터 젊은 소년들까지 사방에서 몰려 왔습니다. 이를 보면 소돔에는 동성연애가 보편화되어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렘 6:15). 동성연애는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히 여기는 죄악입니다. 이는 창조의 질서를 파괴하는 심각한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소돔에 살던 롯의 딸들을 보면 소돔 사람들의 죄악된 결혼관에 물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을 여기는 소돔 청년들과 결혼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상황윤리에 사로잡혀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두 딸이 아버지와 간음을 하고 불의의 씨앗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소돔성을 유황불을 내려 심판하셨습니다(창 19:24,25). 이는 하나님을 불신하고, 간음을 행하며 정욕의 노예가 된 자들에게 있을 영원한 불 심판의 거울이 되었습니다(유 7; 계 21:8).
예수님께서도 노아 시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더니 홍수가 나서 멸하기까지 하였다고 하셨습니다(눅 17:27). 이만큼 결혼관이 비뚤어지는 것은 심판을 자초하는 심각한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과 그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젊은이들에게 결혼만큼 코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결혼만큼 지대한 관심사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결혼관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신앙과 그 사람의 가치관과 그 사람의 인생관이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결혼을 어떻게 하느냐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과 가치관 모두가 다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은 성경적인 진리에 입각한 올바른 결혼관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의 가정
창세기 12장 1-5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가나안에 기근이 들자 아브라함은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고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큰 수치를 당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회개하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왔습니다. 10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자 마음이 조급해진 사라는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의 첩으로 주어 이스마엘을 낳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라의 불신을 책망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결국 사라는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어서 백 세 된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을 낳았습니다(히 11:11). 또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마지막 시험에 패스하고, 복의 근원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또 아브라함은 손대접 하기를 힘쓰는 가정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기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누가 했겠습니까? 사라의 허락 없이 어떻게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벧전 3:7a)"라고 했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항상 웃음이 넘쳤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었고, 신앙적인 대화가 오고갔습니다.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가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가르치는 가정이었습니다.
셋째, 아브라함의 결혼관
창세기 24장에 보면 아내 사라가 죽고 아브라함은 나이 많아 늙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이삭에게 물려주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믿음의 여인과 결혼을 시키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가정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담는 그릇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을 불러 환도뼈 아래 손을 넣어 맹세를 시켰습니다.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창 24:4)." "내 고향 내 족속 중에서" 라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결혼의 첫째 조건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삭이 만일 가나안의 딸 중에 아내를 선택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얼굴만 예쁘고 믿음이 없는 여자와 결혼했다면 이삭이 과연 아브라함이 물려준 축복을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삭이 믿음의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그 후손들이 어떻게 믿음을 배우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자신과 이삭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섬기기 위해서는 이삭이 반드시 믿음의 결혼을 하도록 도와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절대절명의 사명감을 가지고 며느리를 택하고자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멀고 먼 고향 땅에 가서 이삭의 아내를 구해 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오고자 아니하면 이삭을 데리고 가서 맞선을 보이고 아내를 택해 오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여자가 오고자 아니해도 이삭을 절대로 데려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창 24:7). 그 이유는 첫째로 하나님께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셨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삭과 그 후손들에게 주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 땅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이삭이 결혼하러 고향에 갔다가 주저앉아 버리면 60년 동안 개척해 놓은 가나안 역사가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삭을 데려가지 말고 여자가 오려고 아니하면 그냥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나이가 40이 훨씬 넘어도 반드시 믿음 있는 처녀와 결혼을 하도록 돕고자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애굽 여인 하갈을 첩으로 맞아들인 후 많은 고생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삭만큼은 반드시 믿음의 가정을 이루도록 기도했습니다. 이만큼 믿음으로 가정을 이루는 일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섬기는 종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자녀들을 양육하되 믿음의 가정을 이루기까지 믿음으로 도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창세기 2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축복하시고 믿음의 여성 리브가를 이삭의 동역자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Ⅲ. 축복을 감당하는 이삭의 결혼관
첫째, 리브가의 결단과 이삭의 기도
아브라함의 종은 라반과 브두엘의 허락을 받은 다음 날 아침에 리브가를 데리고 떠나겠다고 했습니다(창 24:54). 부모들은 적어도 며칠은 유하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종은 일을 하루라도 빨리 아브라함에게 돌아가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주고자 했습니다. 그 부모가 리브가를 불러 물어 보았습니다. 이때 리브가는 즉시 "가겠나이다(58)." 라고 했습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축복을 믿었기 때문에 혈육의 정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이삭이 어떻게 생겼는지, 성격이 어떤지, 키가 얼만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이삭이 아브라함을 이어 하나님의 역사를 계승할 사람이요, 이 결혼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을 확신하고 즉시 떠나기로 결단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결단으로 리브가는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리브가가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이삭은 들에 나가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이삭은 결혼 문제를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종에게 온전히 맡기고 기도로 준비하였습니다. 이삭은 모친 상사 후에 위로를 얻었습니다. 이삭은 기도로 자기의 결혼을 준비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믿음의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데려오자 이삭은 리브가를 취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습니다(창 24:67).
둘째, 기도하는 이삭의 가정
이삭은 40살이 넘어서 결혼을 했는데 리브가가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이 때 이삭은 리브가를 구박하고 첩을 얻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리브가를 위해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창 25:21). 이삭이 60세에 아들을 낳은 것을 보면 20년 동안 줄기차게 기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습니다. 한 가지 기도 제목을 가지고 20년 동안 줄기차게 기도한다는 것은 놀라운 믿음입니다. 이삭은 인내와 끈기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낙망치 않는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리브가도 기도의 여인이었습니다. 아이들이 태중에서 싸우는 것을 느끼고 하나님께 나가 기도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리브가가 쌍둥이를 잉태하고 있으며, 각각 다른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을 계시해 주셨습니다(25:23). 그리고 먼저 나온 자가 나중 나온 자를 섬기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리브가는 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따라 자식들을 양육했습니다. 이상을 볼 때 이삭의 가정은 기도하는 가정이었습니다. 모든 문제를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며, 하나님의 뜻을 찾아 순종하는 믿음의 가정이었습니다.
Ⅳ. 연애 결혼을 한 야곱의 결혼관(29:1∼30:43)
29장 1절을 보면 야곱은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밧단 아람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라반의 딸 라헬을 만나게 되었는데 첫눈에 반해 버렸습니다. 야곱은 라헬과 결혼시켜 주면 7년을 봉사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야곱이 곱고 아리따운 라헬을 연애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29:18). 야곱이 밧단 아람에 간 가장 큰 목적은 라반의 딸과 결혼하는 것이었습니다(28:2).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방향에 순종하여 결혼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누구와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결혼인지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연애 감정에 사로잡혀 라헬과 결혼하고자 결정했습니다. 29장 20절을 보면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7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7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 그는 사랑을 얻기 위해서 엄청난 희생을 각오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을 올리고 첫날밤을 지내고 보니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였습니다. 라반에게 속은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다시 라헬을 위하여 7년을 더 봉사하는 조건으로 라헬도 아내로 얻었습니다. 결국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14년 동안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야곱은 두 아내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일부일처제의 하나님의 진리를 순종치 않았습니다. 아브라함도 한 아내와 결혼했으며, 이삭도 한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두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두 아내가 서로 시기와 질투하다가 자기 여종들을 첩으로 주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네 명의 아내를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그들에게서 난 아들들 사이의 갈등으로 야곱은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시기, 질투, 경쟁심, 억울함, 교만과 분냄 등 온갖 추악한 인간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야곱은 12아들을 낳았지만 배다른 아들들이 서로 미워한 나머지 가장 사랑하던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 죽은 줄로 알고 음부에 내려가는 슬픔과 고통을 당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야곱의 허물과 죄악을 감당해 주시고 합력해서 선을 이루셨습니다. 야곱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이루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야곱이 연애결혼이 잘한 것이라든지 그의 허물과 죄악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야곱의 결혼을 통해서 창세기 저자는 일부다처주의의 비극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연애 감정에 근거한 사랑의 불완전함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결혼은 결혼의 동기가 믿음에 뿌리를 박고 있지만, 연애 결혼은 사람의 외모와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감정에 근거한 사랑, 에로스적인 사랑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합니다. 애로스적인 사랑은 근본적으로 탐욕과 자기애(自己愛)에서 비롯된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식어졌다가 더워졌다가 합니다. 이런 사랑에 근거한 결혼 생활은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의 아내들처럼 끊임없이 남편의 사랑에 목말라하며 결혼을 했어도 사마리아 여자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남편의 사랑을 확인하지 않고는 불안해서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계명대학 도서관에서 "하나님, 나 이혼했어요?"라는 제목이 달린 책을 보았습니다. 야곱처럼 믿는 사람과 결혼한다고 다 믿음의 결혼이 아닙니다. 그 마음의 동기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창세기 34장에 보면 이런 가정에서 자란 야곱의 딸 디나는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디나의 마음속에는 이방 세계에 대한 유혹의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습니다. 세겜의 딸들이 무슨 옷을 입고, 어떻게 화장을 하고, 무슨 노래를 부르며, 어떻게 사는지 구경하러 나갔다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세겜성 남자들이 진멸을 당했고, 야곱은 벧엘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Ⅴ. 믿음의 순결을 지킨 요셉의 결혼관
요셉이 젊고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했습니다. 보디발의 처가 요셉에게 반하여 윙크를 보내다가 급기야 동침하기를 청해 왔습니다(창 34:7). 이 유혹은 젊은 요셉이 참으로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여자는 주인의 위치에 있습니다. 거절했다가는 어떤 화를 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셉은 첫째는 주인의 은혜를 절대로 배반할 수 없다는 것이요, 둘째는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했습니다(34:8,9).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이 시험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몸이 달아서 날마다 요셉에게 동침하기를 청했습니다(34:10). 그러나 요셉은 날마다 거절했으며,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 요셉은 유혹의 자리를 적극적으로 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집에 시무하러 들어갔다가 단 둘이 있게 되었습니다. 여자가 요셉의 옷을 잡고 늘어졌습니다. 요셉은 너무 놀라서 옷을 벗어 던지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자 여자는 남편에게 요셉이 자기를 겁간코자 했다고 모함하여 요셉은 강간 미수죄로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셔서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요셉을 돌아보시고 바로의 꿈 해몽을 하게 하심으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요셉이 얼마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눈에 보이는 사람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젊은 날에 가장 빠지기 쉬운 정욕 문제를 극복하고 믿음의 순결을 지켰습니다. 젊은 날에 믿음으로 충성하다가 연애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사명을 잃어버리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정욕의 유혹을 이기려면 요셉처럼 적극적으로 유혹의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몸과 마음의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가운데 인간적인 사랑에 목말라 하며 음심이 가득한 눈으로 유혹의 눈길을 보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캠퍼스 목자가 사람의 딸들의 유혹에 넘어가 불신자와 은밀히 데이트를 즐기는 분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젊은 종 디모데에게 "젊은 여자를 대할 때 일체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딤전 5:2a)"고 명했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입니다. 우리는 캠퍼스 목자요, 세계 선교 역사를 감당할 택함 받은 종들입니다. 이 귀한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마음에 일어나는 연애감정을 다스리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
우리는 음란하고 패역한 이 시대에 정욕의 누룩에 물들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요셉과 같이 적극적으로 정욕의 유혹을 뿌리치고 믿음의 순결을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혼에 대한 성경의 진리를 올바로 배우고, 성서적인 결혼관을 확립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야곱과 같이 연애 감정에 근거한 결혼을 하지 않고 이삭과 같이 믿음의 가정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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