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심리학
야곱 프로이트는 유태인들 특유의 생활 태도와는 전혀 다른 생활을 영위해가는 일종의 자유 사상가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새로운 사상이 담긴 서적들을 즐겨 읽었으며 이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불가사의한 일 조차도 과학적지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야곱은 16세 된 아말리에 나타손과 결혼하였다. 야곱은 옷감을 짜서 그지방의 시장에 내다 팔아 생게를 유지하였으나 새로 건설된 철도와 대량으로 옷감 생산을 하는 공장들 때문에 야곱의 집안 형편은 어려워 지게 되었다.이 무렵 전처의 아들인 임마누엘의 처가 아들을 낳았다. 또한 아말리에도 결혼한 지 5년만인 1856년 5월 6일에 첫 사내아이를 낳게 되었다. 산파는 이 아이가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말리에는 그 말을 믿었으나 야곱은 기울어진 가업때문으로 이 아이의 탄생을 그리 달가와 하지 않았다. 아말리에는 이 아이가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여 이름도 모라비아의 전설에 나오는 유명한 영웅이며 왕이었던 지그문트라는 위인의 이름을 붙여 주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아이의 아버지는 이 아이를 냉정하게 평가할 뿐 이었다. 이때만 해도 야곱은 그의 손자와 손녀를 아들보다 더 귀여워 했다.
지그문트는 조숙한 어린이였다. 그는 검은 머리와 현명하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까만 눈동자를 지닌 응석받이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손에 넣어야하는 의지적이고 강인하며 욕심이 많은 아이였다.어린 지그문트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기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어머니는 자기를 따뜻하게 사랑하고 있으며 아버지는 냉정하고 비판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심한 질투심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반대로 무한한 존경심을 느낄 때도 있었다.지그문트는 그의 형 엠마누엘의 아이들인 요한과 바울리네와 어울려 놀았다. 요한은 놀이에서 항상 대장 노릇을 하려고 들었으며 그때마다 지그문트는 명령에 잘따르지 않아서 둘은 항상 잘 다투었다.그러던 어느 날, 야곱의 사업이 실패하여 엠마누엘의 가족은 영국으로 건너갔으며 야곱의 가족은 비엔나로 가서 정착하게 되었다.지그문트는 6살이 되어도 학교에 입학하지 않았지만 그의 왕성한 지식욕으로 인해 많은 책을 읽었으며 그 또한 그의 아버지처럼 어린 시절부터 완벽한 과학주의자였다. 그는 10살 때까지도 학교에 다니지 않았지만 독서력이 대단히 뛰어났기 때문에 곧바로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으며 언제나 1등을 독차지하였다. 그는 여러 방면에 관심과 취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어학실력 또한 뛰어났다. 아버지인 야곱은 전보다 더 자식에게 비판적이었으며, 아들에게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칭찬 같은 것은 해 주지 않았다. 그는 17살때 고등부를 수석으로 졸업하였으며 고미술품에 대단히 심취해 있어 이따금 베르베델 박물관에 가서 몇 시간 씩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지내곤 했었다. 1860년대에 오스트리아 황제는 수도에 있는 모든 유태인들에게도 평등을 보장해 주겠다고 선언했고 비엔나 대학에도 유태인 학생의 입학이 허용되기 시작했다. 그는 비엔나 대학에 입학, 의학부에서 신경 구조에 관한 세계적 권위자인 에른스트 브뤼케 교수의 생리학 연구실을 드나들게 되었고 그곳에서 안정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대학의 광장을 건너가려 하다가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게되었다. 그는 몇 번이나 이런 기묘한 사실을 경험하였다. 이 현기증은 아무런 이유없이 돌발하는 공포와 같은 것으로서 역의 플랫포옴이라든가 대학의 광장을 횡단할때 또는 넓은 장소를 바라볼 때마다 틀림없이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그는 매우 건강했기 때문에 이 현상이 신체적인 요인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현기증을 경험한 이후 몇 달 동안 그는 자신이 마치 연구재료가 된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자신의 증상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면서 그 원인의 정체를 찾고 있었다. 그는 한센이라는 대학 강사가 최면술을 실험했을 때 최면에 걸린 남자에게 일어났던 신체적 변화를 관찰한 일이 있었다. 그는 의학도로서 해부학을 연구했으며, 신체의 모든 부분에 관한 지식을 습득했다. 그가 가장 흥미를 가졌던 것은 물체가 아니라 작용하고 있는 인간의 예민한 사고와 감각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5년 동안 브뤼케 교수의 연구실에서 연구한 원리들을 인간에게 적용할 수 있는 어떤 비밀스런 사실을 발견해 보려고 무한히 노력하였다. 그는 브뤼케 교수의 조수가 되고 싶어하였고 그가 이 대학에서 연구 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아버지는 게속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 쯤, 그의 동생인 안나가 아이자크 베르나이스의 손자와 약혼을 하게 되므로 그는 그의 집안과의 접촉이 잦아졌다. 안나의 약혼자에게는 민나와 마르타라는 두 누이가 있었는데 민나는 광범위한 독서량과 타인을 압도하는 그녀의 말에 지그문트는 남자 친구를 대하는 것과 같은 푸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르타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감정을 느낄고 있었다. 그녀는 몇 시간씩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수를 놓기도 했다. 그는 그녀에게 그의 생활을 이야기 해 주었으며 그녀는 그의 말을 들으며 수를 놓곤 했다. 그러면서 둘은 사랑에 빠졌으며 이윽고 둘은 약혼을 발표했다. 가족들은 그가 브뤼케 교수의 조수자리도 확실해 졌기에 더욱 즐거워 했으나 놀랍게도 그는 조수로 임명되지 못하였다. 교수는 그에게 여러 가지 현실적 이유 때문에 지금 그가 하고있는 연구를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유태인이기에 당해야만하는 불이익에 그대로 따라야만 했으며 그에게는 의사가 되는 일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다시 의학부로 돌아와서 중단했던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결혼하기 까지는 3,4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로 인해 마르타의 가족들은 그와의 결혼을 반대하였으나 그녀는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그를 기다리겠다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프로이트의 거주지는 알게마이네 크랑켄하우스 종합 병원의 의사 진료실로 옮겨 인턴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과학적인 정확함을 가지고 환자들을 진단하여 그는 우수한 진단가로 평가받았으며 병원 내의 모든 의학도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는 진단에 능숙하였기 때문에 병원 내에 조그마한 조직체를 만들어 신경병의 진단에 관해 가르치게 되었다. 그는 신체적인 원인이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은 증상으로 괴로워하는 수많은 환자들을 세밀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히스테리나 신경 쇠약 환자들, 이유 없이 느끼는 공포감등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이들 환자들이 호소하고 있는 증세는 일종의 병이면서도 그 원인이나 성질에 대한 것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이 문제를 밝혀 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와 커다란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그는 병원 내의 뇌 해부 연구소 에서 연구를 게속하였다. 이 연구소의 소장은 유명한 뇌 전문가인 데오도르 마이넬트교수였다. 그는 마이넬트의 지도로 뇌의 각 부분을 해부하면서 이 의문에 대한 정확한 해답은 뇌의 신비한 주름 속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뇌 속에서 이러한 징후를 발견해 내지 못했다. 그는 그가 하고 있는 연구의 주제가 지금 연구하고 있는 곳에서도 규명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브뤼케 교수를 설득하여 외국 유학을 갈 수 있는 소액의 장학금을 받게 되었으며, 그 당시 히스테리를 연구하는 샤르꼬 교수가 있는 빠리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이로인해 마르타와의 결혼은 더 연기가 되었으나 마르타는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마른 체격의 샤르꼬 교수는 의학적인 새로운 발견을 계속해 왔으며, 신경에 손상이나 염증이 있을 때 나타나는 질병을 치료해 왔다. 그는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도 질병으로 인정해야 하며 그 원인도 의학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다발성 경화증 을 발견함으로써 수많은 신경 증상이나 증상군으로 인하여 세게적인 대학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샤르꼬는 히스테리 라는 이상한 병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히스테리 환자의 증세에 대한 구체적인 시도하던 그는 어느 날 환자에게 최면을 걸어 이들의 증상을 유도해 본 결과 그의 주장은 히스테리는 일종의 최면 상태라고 특징지울 수 있다고 했다. 프로이트는 그의 생각이 옳은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으며 특히 최면술을 치료의 수단으로 이용할 수는 없을까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기질적 마비와 히스테리 마비의 차이를 연구 하였으며 히스테리 환자에게서 일어나는 기능 장애의 특수성에 대해서 연구했다. 기능적 마비에는 뇌 안에 신체적인 상처가 있지만 히스테리성 마비에는 어떤 종류의 상처 때문일지를 샤르꼬 교수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그 상처는 실제로 뇌에 있는게 아니고 어떤 활성적인 외상 때문일 것이라고 했으며 활성적 외상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를 의미하는 말이다. 여기에서 프로이트는 활성적 외상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길 수 있는 것인가의 문제를 이상히 여기였다. 그는 해결의 빛이 보일 때까지 샤르꼬 밑에서 이 문제를 숙고하는 태도를 배웠다.그는 샤르꼬에게서 그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배웠다고 생각했다. 그는 위대한 샤르꼬 선생조차도 그가 알고 싶어 했던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가장 큰 관심사인 어째서 육체적 손상을 입지 않은 사람들도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비엔나로 돌아온 후 함부르크에서 마르타와 결혼하였다. 1886년, 그는 그의 아파트에다 신경병 전문가로서 개업하게 되었다.프로이트는 비엔나 의학 연구 에서 남자도 히스테리를 일으킨 다고 발표하여 회의장을 술렁거리게 했다. 그는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비엔나의 병원을 헤메고 다녔으나 외면을 당하다가 마침내 그러한 환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회의장으로 그 환자를 대리고 나와 그것을 증명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남자들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뿐 이었다. 그는 종래의 치료법들이 자기의 환자들에게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최면으로 히스테리 증상을 유도하는 실험 방법을 자주 머리에 떠올리게 되었다. 어느 날, 베르네임의 암시와 그 치료적 응용 이라는 책을 읽고 환자에게 최면 요법을 사용해 보기로 결심하였다. 놀랍게도 환자는 이방법에 반응 했으며, 모든 것이 잘 되어 나갔다. 그러나 이 방법은 크게 실망하는 사례에 부딪치게 되었다. 최면에 걸리지 않는 환자도 있다는 것을 알게된 그는 브로이어의 환자 중 스스로 이야기 함으로써 병을 고쳤다던 환자를 생각 해 내어 브로이어에게 도움을 청했다. 안나의 증세 라고 이름지워진 그의 환자의 예로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의 원인을 알아낸 것에 밤잠을 설쳤다. 그는 O.안나의 증세 를 발표할 것을 브로이어에게 주장했으나 브로이어는 꺼려했다. 프로이트는 그것을 자기의 환자에게 적용하여 그 이론을 다시 증명해 보이겠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의 환자인 루시라는 여자에게 적용하여 그병을 고쳤다. 그러나 그는 이 과정에서 과거에 일어났던 고통스러운 일을 회상시켜 환자의 증상을 치료하는 브로이어의 정화법 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기게 되었으며 그것과는 다른 방법이 고려되어야 할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정신 질병의 또 다른 원인은 우리가 무시하려고 드는 억눌린 감정과의 충돌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받아들일 수 없는 감정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 감정에 정면으로 대항할 수 없을 때, 우리들은 흔히 그 감정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려 하며, 그것을 우리들의 의식적 관점에서 쫑아내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는 이 이론을 완성한 후 그러한 행위를 depress 라고 불렀다. 그는 이것을 연구하면서 사람들을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어떤 특별한 감정으로 그것은 사회의 전통적인 윤리나 마음 속의 인상적인 감정과 격한 충돌을 일으키기 쉬운 감정들로서, 특히 사랑이나 결혼관과 관게된 것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가 밝혀 낸 것은, 우리를 가장 두렵게 하는 생각은 우리들 주위의 사람들이 도덕적이고 올바르다고 간주하고 있는 관념과 충돌하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것들을 검토한 후 그는 브로이어에게 가서 성과 신경의 질병은 서로 밀접히 관게되어 있다는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였으나 브로이어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아 서로의 의견 대립은 계속되었으나 결국 브로이어는 결국 이것을 공표하는데 동의하여 그들은 안나의 증세 를 발표했다.1893년, 그는 브로이어와 함께 Studies in Hysieria 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의견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자신들의 의견을 따로 제시하였다. 브로이어는 히스테리 환자가 걸리기 쉬운 최면 상태에 관한 이론을 집필했으나, 프로이트는 히스테리는 억압된 기억에서 비롯된다는 대담한 견해와 이 감정은 성의 감정과 관계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 책이 완성될 때까지 그들은 성에 대한 문제로 서로 의견이 대립되었다. 1983년 겨울 내내 그는 이 책의 서평이 의학 잡지에 실리기를 기다렸으나 그 기다림은 끝내 부질없는 소망이 되어버렸다. 브로이어는 이 일로 인해 그와의 관계를 끊었으며 두 사람의 관게는 허무하게 끝나버렸다.그의 진료소를 찾아왔던 한 환자는 자신의 고통스런 일을 생각 할 때마다 새파랗게 질려 최면이 끊기고 말았다. 그는 점차 환자를 자극하거나 재촉하지 않고 환자가 훨씬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며 환자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 주게 되었다. 정신의 자연적인 연상과정에 의해서 하나의 관념이 다른 관념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으며 그는 이 과정을 자유 연상 이라 불렀다. 의사가 귀를 귀울여 듣고 있는 동안 환자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마음 속 깊은 곳의 응어리진 부분을 뚫고 들어가 거기에 숨어 있는 자신의 질병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했으며,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의 방법까지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구멍뚫는 식의 자기 발견이나 교육에의한 개성의 변화 등과 같은 사실에 대하여 psyche 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희랍어에서 따온 말로서 정신 을 의미한다. 그는 그의 새로운 치료법에 PSYCHOANALYSIS(정신 분석) 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혼자의 힘으로 이런 작업을 완성하였다. 그는 자기가 주장한 증세에 대하여 함께 토론해 줄 상대도 없었으며 질문하는 사람도, 상담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나아갈 길을 스스로 찾지 않으면 않 되었다.
프로이트는 환자들이 치료를 받으러 올때 책략을 준비하여 자신을 낫게 해 줄 과거의 기억이 밝혀지는 것을 묘하게 억제하는 것을 발견해 냈다. 그는 이것을 resistance 라고 불렀다. 그는 이것이 일종의 자기 방위라고 생각했다. 환자들은 이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지만 그중 저항을 극복하려고 노력한 사람들은 그를 강하게 신뢰하고 있는 환자들로서 치료 기간 중에 거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신뢰와 친밀감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환자들이 자기에게 보여준 이 강한 감정이 실은 그에 대한 것이 아님을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품었던 감정을 단순히 그에게 반복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여자 환자는 그에게 아버지에게 느끼는 감정처럼 그를 신뢰하고 의지했으나 남자 환자는 사랑과 적의, 신뢰와 반감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이것은 남자 아이가 자기 아버지에게 느끼는 감정과 같은 현상이었다. 그는 환자들이 그들의 어버이에게 품었던 감정을 자기에게 그대로 옮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이런 종류의 현상을 轉移(전이) 라고 불렀다. 그는 환자들의 협조에 의해서 사랑과 미움에 대한 우리의 습관은 유아 시대의 어버이와의 사랑과 미움의 관게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관념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우리는 유아 시절에 이미 어떤 충격을 경험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프로이트는 어릴 때 받은 여러 가지 충격 중에서는 나중에 어른이 되어 잊어버리게 되는 노이로제의 원인으로 연구되어야 할 중요한 원인이 들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전에 취급했던 사레를 새로운 입장에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는 그때 자신이 치료했던 것은 그때 그때의 일시적인 발작만을 치료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질병의 완전한 치료를 위해서는 마음에 상처를 준 최초의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가장 어린 유아 시기, 즉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망각의 베일에 싸여진 채 잊혀져 버린 바로 그 시기에 신경 질환의 출발점이 되는 어떤 외상적인 경험, 다시 말하면 최초의 마음의 상처인 심적 외상 이 있었다는 것을 추론해 내게 되었다.프로이트는 자기와 부친 사이에서 오랫 동안 지속되어온 어떤 갈등 같은 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코카인을 마취제로 사용하여 아버지의 눈을 수술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묘한 승리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느꼈던 질투나 적의는 없어지지 않으며 또 어머니에 대한 애정은 어째서 없어지지 않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얼마 후 그의 부친은 사망하였다. 이것은 이제까지 그에게 영향을 미쳐왔던 장애와 지지의 두 힘이 모두 이탈되었음을 이미하는 큰 사건이었다. 오래 전부터 지녀왔던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사라져 버리고 이제는 애착만이 남게되었다. 그 후 그의 마음은 소포클레스의 희랍 희곡인 King Oedipus 의 이야기로 기울어졌다. 그는 우리는 아버지에 대해서 처음에는 증오와 반항의 충동을 느끼지만 어머니에 대해서는 먼저 애정에 대한 충동을 느끼게 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중에 이러한 감정은 남녀 관계를 지배하는 감정의 기본적인 흐름이 된다고 믿었다. 또한 어린이는 태어 날 때부터 장래의 종(種)의 존속을 가능하게 해주는 이러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환자의 기억이나 꿈을 연구하고 자기 자신의 꿈이나 가장 어렸던 유아 시절의 기억을 탐구한 다음 인간의 성적 감정은 태어날 때부터 서서히 발달하게 된다는 증거를 점차 분명히 밝혀내게 되었다. 그는 어린이가 자기의 몸 밖에 알지 못하며 자신의 몸에서 모든 쾌감을 맛보고 있는 최초의 어린 시절을 (arcissism의 기간이라고 일컬었다. 유아기를 지나 그 다음 단계에 도달하면 이성의 부모에대한 사랑의 감정과 동성의 부모에 대한 적대감에 가까운 질투의 감정이 나타나며 이것은 어린 시절의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것을 외디프스 왕의 이야기를 따라서 외디프스 정황 이라 불렀으며 이 감정은 우리가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감정이라 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러한 현상이 감정 발달의 초기 단계에 그대로 머물러 버리는 수도 있으나, 이 단계에서 떠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청년 시절의 중요한 일은 양친과 사이좋게 생활하면서 자신의 내면적인 독립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외디프스 정황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있게 되는 경우를 Oedipus complex 라고 이름붙여였다.그는 스스로 자기 분석을 해 보았다. 그의 이복형으로서 그보다 나이가 20세나 많은 필립을 생각했으며 그는 필립을 자기 아버지라고 믿었으며, 사랑하는 어머니와 필립과의 관계를 질투하여 필립에게 적의를 품었던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의 꿈을 더듬어 보기 시작했으며, 그 자신의 생활은 환자들의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환자들의 꿈을 기록해 두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야말로 외디프스의 어리석은 신화의 의미에 가장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정직해 진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라고 했다.프로이트는 거의 비슷한 종류의 꿈이 사람들에게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원인과 그 꿈이 지닌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꿈은 비록 숨겨
진 의미이기는 하지만 그나름대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여 환자의 꿈에 대한 사례를 1,000가지 정도 수집하였다. 그는 꿈 속에서 나타나는 상징적인 상태는 표출되지 못한 채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무의식적인 충동이나 유혹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꿈은 무의식(unconsious-ness)에 솟아나며, 어릴 때의 원시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꿈을 연구한 후 아버지에게 느꼈던 감정을 권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반복해서 느껴 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꿈이 솟아나오는 원천적인 무의식은 꿈 이외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기억해 낼 수 없는 기억을 축적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오늘날 꿈의 해석이라는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진 가장 성공적인 예로는 도라의 증세 로서 탁월한 연구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그가 열심히 기록해 두었던 1,000가지 꿈을 분석해서 1899년 여름에 책을 완성하였다. 그는 이 책의 제목을 The Inturp-retation of Dream 이라는 약간 의미심장하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제목을 택하였다. 1900년 1월 2일에는 드디어 책이 발행되었으나 그의 연구는 의학게에서 완전히 무시당하고 말았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의 사소한 일, 즉 일상 생활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조그마한 일에도 한결같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나 수치스러운 일 등을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기억을 되살리는 연고까지도 잊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우연히 행동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런 우연한 행동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희망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는 우리 주이에서 일어나는 우연이라고 생각되는 일들을 검토해서 The Psychopathology of Everyday Life 라는 매우 의미있는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 역시 의학 잡지나 비엔나 시민들로 부터 완전히 무시당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또 다른 책을 썼는데이 책은 그당시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것은 Three Essays on the Theory of Sexuality 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성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몇 계를 거치면서 점차 발달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학설은 오늘날에는 소아 성욕에 관한 것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대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성 감정은 분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갓난아이는 입술 중심으로 해서 성적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발달 과정중의 첫 단계를 입술기(oral stage) 라고 하였다. 이 단계에서 고착되어 버린 사람에게서는 입술기적 성격 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발달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먹는 일이나 담배를 피우는 일 또는 남과 이야기하는 일 등에서 쾌감을 느끼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의 도움과 끊임없는 관심을 요구하는 의존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 발달의 제 2 단계는 최초로 배설에 대한 신체의 기능을 알게 되는 시기인데 이 단계를 항문기(anal stage) 라고 하며 이 단계에서 고착되어 버린 사람은 항문기적 성격 을 보이는데 이들은 완고한 성격이거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감정적인 상처를 주고 싶어하는 특징을 보여주게 되며 이러한 성격이 심한 경우 항문 새디즘(anal sadism) 이라고 부른다. 성적 발달의 제 3 단계는 성기기 또는 남근기(phallic stage) 라고 불렀는데 이 시기가 오면 성적 감정이 성숙해 지고 완전한 어른이 되며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남녀 관계에 대한 준비를 갖추게 된다. 그는 Three Essays on the Theory of Sexuality 에서 이와 같은 학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의학계는 여전히 그에게 냉담하였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학설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에게 그는 최초로 정신 분석이라는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지 3명만이 참석했으나 그의 강의는 며칠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으며, 곧 10명이 넘는 청강생을 맞이하게 되었다. 어느 날 의학적인 원고를 신문에 연재하고 있던 빌헬름 쉬케텔(Wilhelm Stekel)은 자신의 신경 증상을 상담하기 위해 그를 찾아왔다가 그의 견해에 매우 흥미를 갖게 되었다. 쉬케텔은 그가 연재하고있던 신문에 프로이트의 창의적인 치료 방법에 관한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그는 프로이트에게 프로이트의 견해를 따르고 있는 사람들을 좀더 잘 훈련시키기 위해서는 매주 세미나를 여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제의했으며, 그후 프로이트의 자택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모임이 시작되었다. 이 모임은 프로이트를 추종했던 몇몇 사람들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세상에서는, 특히 비엔나의 신문에서는 프로이트의 사상을 계속 비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눈에 그리 집착하지 않았다. 신문의 이러한 비난 속에서 알프레드 애들러(Alfred Adler)는 그를 열심히 변호하였고 프로이트는 그를 수요일의 모임에 초대했으며 그는 곧 회원이 되었다. 그는 열등감에 대한 보상 심리를 주장하였으며 프로이트의 토론에도 열심히 참가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후 열등감의 이론은 애들러 학파의 근본적인 개념으로 발전하였다.이 조그만 모임인 비엔나 그룹 은 점차 강력해졌다. 이즈음 부르크헬츠리 병원에 있던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프로이트의 이론이 그의 조발성 치매 라는 병의 치료에 처음으로 빛을 던져주는 단서로 발견했다. 융은 해외에서 온 의사들을 모아 프로이트의 이론을 공부하는 그룹을 만들었다. 프로이트와 융은 우정이 담긴 편지를 교환하게 되었다. 융은 프로이트에게 정신 분석 분야에도 진료자의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1908년 여름, 10개국에서 40명의 정신 분석의가 모였다. 그때 비엔나 그룹의 리더로 자처하고 있던 애들러는 프로이트에게 융의 영향이 강화하는 것에 반감을 나타냈다. 1909년에 창립 20주년을 경축하는 기념 강연의 연사로 프로이트는 미국으로 초청되었다. 그 강연회에는 미국의 철학자이며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도 있었다. 프로이트는 강연을 하였으나 그는 그의 연구가 이제는 그 나름대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뿐 본격적으로 이론적인 싸움이 시작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존경했던 제임스 이외에도 미국 신문에 실린 대부분의 평론들이 프로이트의 학설에 상당한 의문을 제기하였다.유럽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융과 훼렌치, 프로이트는 정신 분석에 대한 치료를 감독할 세계적인 조직체를 만든다는데 의견을 일치했다. 프로이트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회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이즈음 유럽에서는 -비엔나도 마찬가지로- 반유태주의가 계속 팽창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융이 새로운 조직체의 회장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이듬해 여름에 그는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정신 분석학의 세계 대회를 소집했다. 그곳에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그의 제자들로 가득 찼다. 그들은 이 모임에서 국제 정신 분석 학회 의 설립을 만장일치로 결정하였고 이 학회는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그러나 융이 이 학회의 회장으로 선발되는 것에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특히 애들러는 매우 분개하였으며 그를 포함한 10사람은 회의장을 나가버렸다. 프로이트는 그들을 다시 설득하여 융을 회장으로 선출하는데 합의하였으나 그의 임기는 2년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이미 애들러는 프로이트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함께 소수의 그룹을 만들었으며 이 그룹은 프로이트의 이론에 강력히 반대하기 시작했다. 애들러는 몇 권의 책을 집필하면서 그의 열등감 이론 에 대한 학설을 체계적으로 완성시켰다. 그는 프로이트의 학설을 말살시키고 자기의 학설을 주장하려 하였으나 프로이트의 제자들은 그의 학설을 거부하였다. 그 후 애들러는 프로이트를 떠나갔으며 그 나름대
로 자신의 학파를 만들어 자신의 체계를 만들어 개인 심리학 이라고 했다. 그러나 곧 최악의 배반이 뒤따랐다. 융 또한 독자적인 자신의 이론을 체계화 시켰으며 신경 이상을 치료하는 독자적인 방법을 발전시켰는데, 그는 이 방법을 분석 심리학 이라고 불렀다.드디어 세계 제 1 차 대전이 발발하였고 프로이트는 이 전쟁으로 인해 새로운 이론을 체계화 하게 되었다. 그는 The Ego and the Id(자아와 이드) 라는 내부 영역을 취급하는 일종의 정신적 지리학에 대한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이드 란 우리의 동물적 욕구와 원시적 희망 그리고 충동이 머물러 있는 장소로서, 인간 정신의 원시적인 영역이라고 설명했다. 이 영역에 새로운 개척지가 형성되었는데 이것이 자아 라는 영역이다. 이곳은 문명화된 관념이 번영하는 정신적 개척지인 것이다. 이드와 자아는 계속 싸움을 하는데 이것은 개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야만과 문명의 투쟁인데 자아에는 재판관과 같은 기능을 행사하는 초자아 라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생활의 규칙을 받아들인 자아의 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초자아는 지나치게 잔혹한 요구를 할 수도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자아가 이드와 초자아에 대항하여 자기를 방어하게 된다. 그러나 자아가 너무 약해서 그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드에 저항할 수 없다면, 초자아는 자아를 강력하게 벌주려 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행복은 야만적인 이드와 문명화된 자아의 힘이 균형을 이룰 때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는 모든 인간은 정신적으로 성장해야 하며, 동시에 우리들 내부의 야만적인 힘을 유용한 목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했다. 1918년 제 1 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혁명의 회오리가 오스트리아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그가 자아와 이드 라는 책을 발간하였던 1923년까지도 세계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많은 환자들이 그의 진료소를 찾아왔으며, 그는 개개인의 문제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 문명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그는 1920년대 후반에는 The Future of an Illusion (1927)과 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s (1930)라는 두 책을 완성하였다. 이때 그는 그에게 무서운 원인이 된 질병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알아 차리게 되었다. 담당
의사인 도이취는 그것이 악성 종양인 것을 알았지만 프로이트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종양 전문가인 하이네크 교수를 만나 그가 그렇게 두려워 하고 있던 암이라는 사실을 선고받게 되었다. 그는 도이취가 진실을 말해 주지 않은 것에 분개했으며, 이 일로 인해 도이취는 그의 주치의를 그만 두게 되었으나 친구로서의 교제는 끊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원기 있게 활동하고 환자를 돌보면서 국제 정신 분석 학회 를 이끌어 가고 있었으며 학회는 이제 세 개의 잡지와 많은 책들을 출판하게 되었다. 그의 견해는 범람하는 강물처럼 세계의 곳곳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프로이트의 명성은 이제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많은 저명 인사들이 그를 찾아왔고, 그 중에서도 마리 보나파르트는 가문을 무시한 채 진심으로 예의를 다하여 그를 섬겼다. 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두 주일에 한번 씩 턱의 나쁜 조직을 긁어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사상은 예술과 문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많은 소설가들이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iousness)이라는 관점에서 소설을 썼으며, 그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James Joyce의 율리시즈 가 있다. 그의 정신 분석적인 개념은 드라마, 연극, 희곡, 영화에도 그의 영향이 깔려 있었다. 어린이의 교육 방법에도 기계적인 암기 학습에서 자유로운 학습 방법이 권장되었다. 그러므로 정신 분석학의 탄생을 억압했던 비엔나 시에서도 1931년에는 그의 업적과 명예를 기리기 위해 큰 모임을 개최하게 되었다.프로이트는 암에 침식되어 이제는 외출도 할수 없게 되었다. 그의 명성이 날로 커져 갈 무렵 비엔나의 거리에는 히틀러의 숭배자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1938년 최초의 나찌스는 비엔나 거리로 들어왔고 세계는 프로이트의 안전을 걱정하게 되었다. 나찌스는 이미 국제 정신 분석 학회 의 출판소를 페쇄시켜 버렸으며, 프로이트의 재산 일체를 몰수하였으며 여권도 가져가 버렸다. 그가 어려운 입장에 놓여 있는 소식은 전세계에 알려졌다. 세계 각 처에서는 그를 도우려는 많은 노력들이 보였으며, 마리 보나파르트는 그녀의 재산 중에서 25만 실링이나 되는 거금을 프로이트의 몸 값으로 지불하였다. 1938년 7월 8일에 그의 아파트는 빈 집이 되었다. 그의 책과 원고, 이집트의 골동품들도 모두 영국으로 옮겨졌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죽음의 시련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인후의 통증이 점점 더 심해져서 밤에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통증은 주야로 심해졌으며 심장의 고동이 커지기 시작했다.1939년 9월 23일 프로이트는 영원히 잠들고 말았다. 그는 화장되어 골더스 그린에 안장되었으며 코란바리암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지그문트 프로이트 1856-1939]comment이 얇은 책으로 프로이트의 광대한 인생을 얕게나마 알게되었다. 그의 삶과 사랑, 사상에 이르는 것을 모두 다 이해하려 함은 무리이겠지만 그래도 내 나름대로 그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을 쓴 라켈 베이커는 일반 인들이 프로이트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취지에서 이 책을 저술한 것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이 책은 그의 정신 분석의 체계화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가 어린 시절에 자라면서 느꼈던 심리 상태를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 물론 그가 다루었던 많은 환자들의 예화도 내가 이해하기 힘들었던 용어들의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심리학 분야에서 각자의 이론을 확립시켰던 사람들이 한때 프로이트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으나 그 친분이 끊어진 것은 마음이 아팠다.그러나 베이커는 프로이트를 너무 미화시킨 점도 없지않아 있다. 물론 많은 책들이 한 인물에 관해 쓸 경우 그런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에게 사로잡힌 점도 있지만 그것만이 그의 전부는 아닐것이다.그의 이론에 한계점의 설명을 보충하지 않고 있다. 이 점이 이 책의 약점인 것 같다.그러나 적어도 이커는 프로이트의 이해를 돕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한 인물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인생을 알기 쉽게 요약한 것은 칭찬할 만 하다.
출처 : 포도나무 - Vitis | 글쓴이 : Viti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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